젠더 개념의 집대성? 어렵네..

가사경제
소비 노동
공통 언어라는 꿈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이원론을 탈출

3부 부적절한/부적절해진 타자를 위한 차이의 정치학
7장 마르크스주의 사전에서 젠더: 용어의 성적 정치학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89)는 젠더 정체성 담론이 이성애 일관성이라는 허구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페미니스트들은 비일관적인 일체의 젠더들에 대한 서사적 합법성을 생산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젠더 정체성 담론은 또한 페미니스트 인종차별주의에 내재적인 것이기도 한데, 그것은 폐미니스트 인종차별주의는 일관된 여성과 남성의 환원불가능성(non-reducibility)과 적대적인 관계를 고집한다. 이런 과제는 섹스혹은 자연처럼, 단일성으로 나가는 분석적 범주를 ‘실격 처리‘ 하는 것이다. 그런 조치는 젠더의 중핵을 조직하는 내부적인 환상을 폭로하고 재의미화에 열려 있는 인종과 젠더 차이의 장을 생산할 수 있게 한다. 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은 버틀러가 권장하는 것과같은 조치를 거부해 왔는데, 왜냐하면 핵심적 정체성과 그런 정체성의 구성적 허구성이 공격받게 되어 주체 개념이 위축되면 여성의 행위자성 개념을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버틀러는 행위자성은 능력 강화적 제약(enabling con-straints) 속에서 행해지는 제도적 실천이라고 주장한다. 일관된 내적 자아는 (문화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든 혹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든, 복잡한 행위자성과 책임성을 생산하고 긍정하는 - P244

페미니스트들의 프로젝트에 불필요한-사실상 금지하는 규율적 허구라는 것이다. - P245

에이드리엔 리치(Adrienne Rich, 1980) 또한 강제적 이성애를 여성 억압의 근원으로 이론화했다. 리치는 ‘레즈비언 연속체‘를 새로운 자매애의 토대를 위한 강력한 은유로 형상화했다. 리치에게 결혼 저항은 역사를 가로질러 레즈비언 연속체를 구성하는 규정적인 실천이었다.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 1981)또한 여성 억압에서 의무적 이성애가 핵심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독자적인 주장을 전개했다. 프랑스에서 여성해방운동(MLE, Mouvement de libération des Femmes)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운동과 단호하게 결별한 이유로 MLF의 저자들이 설명했던 공식에 따르면, 위티그와 연대한 집단은 모든 여성들이 그들 위에 군 - P249

림하는 남성들에게 이념적·정치적·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성차의 위계적인 사회관계로 구성된 계급에 속한다고 주장했다(《여성문제》의 편집진들, 1980). 여성을 만드는 것은 남성이가진 특수한 전유 관계다. 인종과 마찬가지로, 섹스는 모든 구성물에 선행하는 것으로, 인지된 몸을 포함하여 현실을 생산하는 그런 종류의 ‘상상적‘ 구성물이다. 단수로서 ‘여성‘은 오로지 이런 종류의 상상적 존재로서 존재하는 한편, 복수의 여성들은 전유를 매개로 한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자 섹스로 자연화된다. 페미니스트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여성을 위해, 그리고 그런 계급을 소멸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투쟁은 이성애라는사회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섹스‘는 사회를 이성애로건설하기 위해 자연화된 정치적 범주이기 때문이다. ‘섹스‘의 범주에 기반한 (거의) 모든 사회과학은 타도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레즈비언은 ‘여성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애의 정치경제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레즈비언 사회는 자연적인 집단으로서 여성들을 파괴한다(위티그, 1981). - P250

어쨌거나 이런 공식은 레즈비어니즘을 페미니즘의 핵심으로 부각시키고 합법화하는 강력한 장점이 있었다. 레즈비언 형상은 페미니스트 논쟁의 장에서 반복적으로 경합하면서 생성적인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킹, 1986). 오드리 로드는 ‘차이의 집‘을 이해하는 핵심에 흑인 레즈비언을 위치시켰다.

함께 여성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달랐다. 함께 게이 여성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달랐다. 함께 흑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달랐다. 함께 흑인 레즈비언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달랐다. (...) 어떤 특정한 차이의 안전보장보다는 우리의 자리가 다름 아닌 차이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로드, 1982) - P251

퍼트리샤 힐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 1989a)는 흑인 여성들이 그들 자신의억압을 자기-규정하는 시점을 마련하려고 관점주의 이론을 흑인페미니스트 사상의 토대의 특징으로 각색했다. - P254

마르크스주의 덕분에 또 다른 이론을 전개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와 젠더의 언어 양자 모두에 비판적이었던 캐서린 매키넌(Catherine MacKinnon)은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섹슈얼리티와 페미니즘이 맺는 관계는 노동과 마르크스주의가 맺는 관계와 유사하다. 대부분 자기 자신의 것임에도 대부분 빼앗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 섹슈얼리티는 욕망을 창 - P255

조하고, 조직하고, 표현하고, 지시하는 사회적 과정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사회를 창조하듯이, 섹슈얼리티는 우리가 남성과 여성으로 알고 있는 사회적 존재를 창조한다. (...)타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특정한 사람들-노동자들의 노동을 조직적으로 박탈하는 것을 계급이라고 정의한다면, 타자들의 사용을 위해 특정한 사람들의 섹슈얼리티를 조직적으로 박탈하는 것을 섹스, 즉 여성이라고 정의한다. (매키넌, 1982)

매키넌의 입장은 미국 포르노그래피 반대 운동의 상당한 영역에서 정치적 행동을 불러일으킨 논쟁적 접근방식의 중심에 있었다.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를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자 그리고/혹은 여성들의 시민권에 대한 위반으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포르노그래피는 여성들을 여성으로서 구성함으로써, 그들에게 시민의 위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매키넌에게 여성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물질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여성은 자기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성들이 단수 ‘여성‘으로 존재하는 한,그러니까 성적 대상들로서 존재하는 한, 여성들은 잠재적인 역사적 주체마저 되지 못한다. "여성들은 대상화의 주인이 아니었기때문에, 그들에게 대상화와 소외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우리는 대상인 그들(them)이었다"(1982). 이런 입장의 인식론적인 정치적 결과는 광범한 영향을 미쳤고 격렬한 논쟁을 초래했다. 매키넌에게 여성들의 생산은 다름 아닌 물질적 환상으로서 ‘여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 P256

매키넌과 공감하면서 폭력의 젠더화를 분석하면서도 다른 이론적, 정치적 자원을 이끌어 낸 이론가가 테레사 데 라우레티스(Teresa de Lauretis, 1984, 1985)다. 재현에 접근하는 데 라우레티스의 방법론은 젠더를 근대적·후기 근대적 문화이론에서 검증되지 않은 비극적인 결함으로 파악하도록 도왔다. 그런 문화의 단층선이 이성애 계약이다. 데 라우레티스는 젠더를 ‘여성‘ ‘남성‘으로만들어지는 사회적 구성물이자 주체성이 만들어지는 기호학적 생산물로 정의한다. 젠더는 ‘역사, 실천, 의미와 경험의 중첩‘과 관계 맺어야 한다. 말하자면 젠더는 "사회적 현실이라는 외부 세계와 주체성이라는 내부 세계가 겹쳐지는 기호학 속에서 상호 구성되는 효과"와 맺는 관계다(1984). 데 라우레티스는 근대 페미니즘에서 가장 문제적인 개념의 하나인 ‘경험‘에 대한 방법론을 발전시키려고 찰스 퍼스(Charles Peirce)의 기호학 이론에 의지했는데, 그런 근대 페미니즘은 친밀한 체현으로서 경험과 의미화 실천을통해 매개된 경험 양자 모두를 고려한다. 경험은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결코 접근할 수 없다. - P257

여기서 ‘차이의 집‘(로드), ‘대립적인 의식‘ [샌도벌(Sandoval)], ‘우머니즘‘(워커), ‘중심에서주변으로 왕복하기‘[스피박(Spivak)], ‘제3세계 페미니즘‘ [모라가와 스미스(Moraga and Smith)], ‘왼손잡이의 세상‘[안잘두아(An-zaldúa)와 모라가], ‘메스티자 여성들‘(안잘두아), ‘인종적으로-구조화된 가부장적 자본주의‘ [바브나니와 콜슨(Bhavnani and Coul- - P261

son), 1986], ‘부적절한/부적절해진 타자‘(트린, 1986-1987, 1989)등이 페미니스트 담론의 장을 구성했다. 그런 담론의 장은 ‘페미니즘‘의 외부에서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여성‘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탈코드화하는 것이다. 복잡하게 얽힌 형상이 ‘백인‘ 여성들의페미니스트 글쓰기에서도 출현했다. ‘섹스-정치적인 계급‘ [소풀리스(Sofoulis), 1987], ‘사이보그‘(해러웨이, 1985), 페미니즘에서의 여성 주체(데 라우레티스, 1987) 등이 그런 사례다. - P262

"재산의 (자유롭지 못한) 상속인을 낳는 것과 (자유롭지 못한) 재산 자체를 낳는 것은 같지 않다"(커비, 1987). - P265

8장 사이보그 선언문: 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사회주의페미니즘

캐서린 매키넌(1982, 1987)이 제시하는 래디컬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은 그 자체가 전유, 통합, 총체화 경향을 보이는, 정체성의 정초 행위에 대한 서구 이론의 풍자화다. 12 래디컬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달게 된 최근 여성 정치의 다양한 ‘순간‘과 ‘대화‘ 전체를 매키넌의 해석에 동화시키면, 사실의 측면에서나 정치적 측면에서나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매키넌의 이론이 함축한 목적론적 논리는, 인식론과 존재론-그리고 그에 대한 부정을포함하여-이 차이를 삭제하거나 단속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사실 매키넌의 이론이 발휘한 효과 중 한 가지만 래디컬페미니즘이라고 일컬어지는 다형적인 장의 역사를 다시 썼다. 그 주요 효과는 모든 혁명적 입장을 종식시키는 여성의 경험과 여성의 정체성 - P288

이론을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이 래디컬페미니즘의 이야기 속에구축된 총체화는 급진적인 비-존재에 대한 경험과 증언을 강제함으로써 자신의 목적 - 여성의 단결을 달성한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볼 때 의식은 획득하는 것이지 당연하게 주어진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매키넌의 이론은 인본주의적 혁명 주체 안에 구축된 난점을 일부 제거하는 대신 급진적 환원주의에 따르는 대가를 치른다. - P289

리처드 고든(Richard Gordon)은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을 가사경제(homework economy)라고 불렀다." 고든은 이 ‘가사경제‘ - P301

라는 말을 통해 전자제품이 도입되면서 말 그대로 집안일이 늘어난 현상도 분석하지만, 본래 취지는 예전에는 말 그대로 여자들만하는 일로 간주되었던 여성적인 일과 동일한 성격을 공유하는 형태로 노동이 재구조화되는 현상을 명명하는 것이었다. 노동은 남성이 하든 여성이 하든, 말 그대로 여성적이며 여성화된 것으로다시 정의되고 있다. 여성화된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취약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해체되고 재조립되며 예비 노동력으로착취될 수 있다는 것, 노동자보다는 서비스 제공자로 여겨진다는것, 노동일 제한을 비웃기라도 하듯 급여가 지급되다 말았다 하는노동시간 배치에 종속된다는 것, 언제나 외설적인, 자리를 벗어난, 성으로 환원되는 실존의 경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탈숙련화(deskilling)는 한때 특권적 위치에 있던 노동자에게 새로 써먹을 수 있는 뻔한 수법이다. 하지만 가사경제는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탈숙련화만 지시하는 것이 아니며, 이전까지 숙련노동에서 배제된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새로운 고도 숙련의 노동 영역이 출현한다는 점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 개념은 오히려 공장, 가정, 시장이 새로운 차원에서 통합되고 있으며, 여성의 위치가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여성들 서로의 차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서 남너 관계가 갖는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 P302

가정: 여성 가장 가구, 연속적 일부일처, 남성의 도주, 독거하는 노년 여성, 가사 노동의 테크놀로지, 가사 노동의 임노동화, 가정 노역장의 재출현, 가정 기반 사업과 자택 근무, 전자화된 가내공업, 도시의 홈리스, 이주, 모듈화된 건축, 강화된(시뮬레이션된) 핵가족, 강도 높은 가정폭력.
시장: 신기술로 제작된 신상품이 범람하는 가운데 새로 마케팅 대상이 된 여성들의 지속적 소비 노동(특히 산업화된 국가들과 산업화 중인 국가들이 대량 실업의 위험을 모면하려 경쟁하게 되면서, 딱히 왜 필요한지 알 수 없는 상품을 판매할시장을 넓혀 가려 애를 쓰는 것이 필연이다), 기존의 대중시장을 무시한 채 부유층을 노린 광고전략과 짝을 이루는, 양극화된 구매력, 부유층 하이테크 시장구조에 대응하는 비공식노동 및 상품시장의 중요성 확대, 전자금융을 통한 감시체제, 경험의 시장적 추상화(상품화)의 강화, 그로부터 등장한 실효성 없는 유토피아적 공동체 이론이나 그에 준하는 냉소적이론들, 시장/금융 체계의 극단적인 유동성(추상화), 성적 시장과 노동시장의 상호 관통, 추상화되고 소외된 소비가 섹슈얼리티와 한층 더 결부되는 현상. - P309

나는 서로 겹치기도 하는 두 유형의 텍스트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사이보그 신화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통찰을 얻어 보려 한다. 바로 유색인 여성과 괴물 자아를 구성하는 여성주의 SF다.
나는 앞에서 ‘유색인 여성‘을 사이보그 정체성의 한 형태로 제시했다. 사이보그 정체성이란, 오드리 로드의 ‘생물신화학(bio-mythography)‘인 [자미](1982)가 서술하는 복합적인 정치적·역사적 층 속에 퇴적된 ‘이방인‘ 정체성들을 융합하여 합성하는 강력한 주체성이다. 이런 잠재력을 지도로 그릴 수 있게 하는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격자망이 있다. 로드는 [시스터 아웃사이더(Sis - P315

ter Outsider)](1984)라는 책의 제목에서 이 느낌을 포착해 낸다. 내 정치 신화에서 자매 이방인(시스터 아웃사이더)은 외국인 여성으로, 여성이거나 여성화된 미국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연대를방해할뿐더러 안전을 위협하는 적이라고 여기게끔 가정한 상대이다. 내국, 즉 미국 국경 안에서 자매 이방인은 같은 산업에서 분열과 경쟁을 유도하고 착취하기 위해 조작당하는 여성들의 인종적·민족적 정체성의 한복판에 놓인 잠재력이다. ‘유색인 여성‘은 과학 기반 산업에서 선호되는 노동력이며 전 세계의 성 시장, 노동시장, 재생산 정치의 만화경을 일상으로 도입하는 현실의 여성들이다. 성 산업과 전자제품 조립 공장에 고용된 젊은 한국 여성들은 고등학교에서 모집되고 집적회로를 만드는 교육을 받는다. 읽고 쓰는 능력, 특히 영어 능력은 다국적기업에게 이처럼 ‘값싼‘ 여성 노동을 매우 매력적으로 만든다. - P316

기계와 유기체, 기술적인 것과 유기체적인 것에 관한 공식적 지식에서 근본적, 존재론적 분리는 없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에 나오는 레플리칸트 레이철은 한 사이보그 문화의 공포, 사랑, 혼란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 P322

이 글에서 사이보그 이미지는 두 가지 핵심 주장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 첫째, 보편적이고 총체화하는 이론을 고안하면아마도 언제나, 지금은 확실히, 현실 전반을 놓치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둘째, 과학기술의 사회관계에 대한 책임이란 반과학적 형이상학과 기술의 악마학을 거부함으로써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서 일상의 경계를 능숙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기술은 인간을 만족시킬 수단이나 복합적 지배의 기반만 되는 것이 아니다.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몸과 도구를설명해 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 줄 수 있다. 이것은 공통언어를 향한 꿈이 아니라,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를 향한 꿈이다. 이것은 신우파의 초구세주 회로에 두려움을심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기계, 정체성, 범주,
관계, 우주 설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언어이다. 나선의춤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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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엔 강화도에 다녀왔다. 바람은 많이 불어 춥고 미세먼지로 공기는 너무 안 좋았던 날.

강화도에 북스테이, 북카페를 함께하는 책방이 많아졌다. 바다가 보이는 뷰에.

가보고 싶었던 곳은 <책방 시점>이었는데, 시점은 3월 한 달 방학이라는 공지가 있어,

마니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책방 국자와주걱>이라는 재밌는 이름의 책방이 있어 가보았다.

시골동네 가운데 있는 시골 집이다. 북스테이도 같이 하고 있다.



입구는 이렇다. 시골 외갓집에 가는 기분?



마당 한쪽엔...



사진을 찍으니 냐옹 냐옹하고 인사하더니 내려와서 몸을 부빈다. 인사성 밝은 냥이.



책은 이렇게 2권, 아니 이슬람 학교는 2권짜리니 총 3권.


<이슬람 학교>는 국내 유일무이한 이슬람 지역 전문가 이희수 교수의 책.

마침 이번달 <정희진의 공부>에서 정윤수님이 언급하신 이희수 교수라 궁금했는데

(그렇다고 이 책을 내가 고른 것은 아님. 아니 2권 중에서 뭐 살까 물어보길래 이걸로 골라주긴 했네)

강의를 책으로 엮었고, 사진도 있고 글자도 커서 청소년부터 읽을 수 있는 수준인 것 같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제목만으로도 끌리는, 많은 분들이 읽은(산?) 그 책.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 막혀서 일주일 째 헤매고 있다. 어렵다는 말만 계속하게 되는 책.

인상 깊고 핵심을 찌르는 몇몇 쉬운 문장들이 너무 좋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어떻게 연결되는 거야?

왜 이런 얘길 하는 거야? 문장 하나에 너무 많은 걸 담고 있다. 어지럽다.

암튼 주말에 친구네 놀러가기 전에 끝내는 것을 목표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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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3-21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경이 익숙하고 정겹네요. 이희수 교수 방송에서 본 적 있는데 목소리가 참 특이하시더라구요 ㅎㅎㅎ
저도 해러웨이 읽고 있습니다. 햇살님 질문이 모두 다 제 질문입니다 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4-03-21 17:56   좋아요 1 | URL
이희수 교수 유투브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해러웨이는 너무 큰 산입니다. 연초부터 오르지도 못할 높은 산을 기어가고 있네요 ㅎㅎ
 

작년에 첫째가 학교 국어 수업 관련 난쏘공을 읽고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며 엄마가 한번 읽어보라고 하길래 뭐가 이해가 안간다는 거지 하고 궁금해서 - 그러나 반년간 책상 책탑에 쌓여있다가 - 16년 만에 다시 읽어보았다.

표제작을 먼저 읽어보았다. 아 이해가 안간다는 의미를 알겠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난장이라는 것도 소설의 기법도 우화같기도 동화같기도 하다. 화자가 계속 바뀌고 공간도 갑자기 바뀌고 시간도 과거와 현재가 시점이 갑자기 바뀐다. 단락이 구분되지 않은 채 마치 연결되는 대화처럼 묘사처럼 설명처럼.

또한 이 소설은 연작소설이기에 첫편부터 읽는 것이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데, 아마 소설 전체가 아닌 표제작만 읽었겠지. 물론 개별 단편들만으로도 독립적인 작품이다.

70년대말 엄혹한 분위기에서도 이 소설을 살아남게 한 힘, 출간된지 45년이 넘은 이 시대까지 300쇄를 넘어 살아있게 한 힘. 그것은 아직도 우리 시대의 난장이가, 꼽추와 앉은뱅이가, 그들의 자식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겠지. ‘더 이상 <난쏘공>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왔으면 한다’는 조세희 작가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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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4-03-18 0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대 시절에 처음 <난쏘공>을 읽었을 때 동화를 보는 듯한 표현이 낯설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끝까지 읽게 만드는 <난쏘공>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독자마다 느낌이 다를 거예요. 의미가 숨어버린 상징적인 표현을 선호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테니까요. ^^

햇살과함께 2024-03-18 12:25   좋아요 0 | URL
저도 다시 읽었는데도 처음에 이게 뭐지 했네요 ㅎㅎ 현실을 너무 뾰족하게 사실적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동화같이 표현하여 더 널리 오래 읽히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2부 경합하는 독법들: 서사의 성격

바바라 크리스천 <흑인 페미니즘 비평>

2부 경합하는 독법들: 서사의 성격

페미니스트들은 자연과학에 관해 특별히 할 말이 있는가?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적 학문과 그런 학문의 생산 조건을 비판하는 데주력해야 하는가? 혹은 페미니스트들은 과학적 지식에 관한 모든 측면을 조명하는 인식론적 혁명의 토대를 마련해야 하는가? - P127

혹은 그 함의에 그리스 학문의 유산과 17세기 과학혁명의 유산에견줄 만한 오늘날 특히 부상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지식 이론이 있는가? 과학적 탐구를 제공하는 페미니스트 인식론이 기존의 재현이론과 철학적 실재론의 가족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혹은 페미니스트들은 실제 세계와 객관적 관점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부인하는 급진적인 인식론의 형태를 채택해야 하는가? 페미니스트 지식의 기준은 주체와 대상 사이, 혹은 비- 침략적 지식과 예측과 통제 사이의 균열이라는 딜레마를 진정으로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 페미니즘은 과학과 인본주의 사이를 연결하는 데 어떤 통찰을 제공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지식과 권력이라는 곤혹스러운관계에 관해 새롭게 말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가? 이름 짓기에 대한 페미니즘의 권위와 권력은 이 세계에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페미니즘은 주인 학문이될 수 있는가? - P128

길버트와 구바는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어 했던 19세기 여성작가들에게 끼친 밀턴(Milton)의 비범한 영향력을 분석하면서, 밀턴이 그들에게 신의 방식을 정당화했다고 주장한다. 여성작가들은 우리의 결핍과 차이를 표시하는 언어로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밀턴의 딸들로서 출발한다고 제시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1979)는 밀턴의 문학적 딸들이 저술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 두 가지 주요한 전략을 채택했다고 주장한다. 그중 하나는 일단 기원 설화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한번 재해석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반역적으로선언하는 것이다. 그와 대단히 유사한 방식으로, 현대의 기원 설화들말하자면 생물학-의 제작에 책임이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설화를 올바로 세우고, 진화, 뇌, 호르몬에 관한 조잡한 과학을 청소하고, 생물학이 어떻게 이성과 권위의 틈새에서 아무런갈등 없이 제대로 생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노력할 수도 - P129

있다. 혹은 페미니스트들은 보다 더 과감하게 완전히 새로운 탄생을 선언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전략 모두에서, 페미니스트들은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경합한다. 따라서 발화의 조건(terms ofspeech)을 설정하고자 경합하는 수사학적인 전략은 자연과학 분야의 페미니스트 투쟁의 핵심이다. 이 장에서 거론하는 책 네 권은 좋은 학문과 과학을 정의하는 조건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수사학적 전략을 다투기 위한 시합에 참여한 선수 명단으로 무엇보다 우선 읽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이 네 권과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 책들이 권위를 입증하려고 채택한 말하기 양식을 검토한후에 우리는 새롭게 귀를 열고 이 장의 도입부 문단에서 제기했던질문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 P138

사실에는 이론이실려 있다. 이론에는 가치가 실려 있다. 가치에는 역사가 실려 있다. 이런 경우 그런 역사는 특정한 연구자가 일상적이고 경험적인젠더 지배로부터 가능한 멀리 벗어나서 신빙성 있는 젠더 연구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P140

‘내부‘의 편향을 제거할 수 있도록 고통스러운 과학적 실천을 행하는 것을, 과학의 이야기를 결정하는 ‘외부‘의 사회적 힘이라는관점과 대립시키는 입장을 주장하다 보면 문제가 생겨나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내부와 외부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은유라는 것이다. 사회적인 힘과 매일의 과학 실천은 둘 다 내부에 존재한다. 둘 모두가 공적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이 중 어느 것도 순수성이나 오염의 근원이 아니다. - P167

수컷뿐 아니라 암컷과 새끼의 활동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 삶을 설명하는 동물 모델을 주장하면, 이제 더 이상은 과학에서 수용될수 없다. 이 결과는 역사적인 세계 여성운동과 문화적으로 특수한 남성과 여성이 영장류학에서 현장 및 실험실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가시화된 현상 둘 모두의 복잡한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 실천을 통해 최근의 역사에 응답한 것은 여성만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다인종적인 실천의 장에서, 이야기는 어떤 모습이 될까? - P193

1967년에 워시번 부계의 아들인 도널드 린드버그(Donald Lindberg)는 다윈 이래로 알려진 사실, 즉 암컷의 성선택을 강조했다. 동물 암컷이 일반적으로 누구와 짝짓기를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린드버그는 이 원칙을 영장류의 생리학적 특성과 진화에 대한 논쟁의 맥락에 위치시켰다. 몇 년이 흐른 후 딸인 에이드리엔 질먼이 린드버그의 요소를 가져와서 인간의 생활 방식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생리학적 조건에 대한 이야기로 편입시켰다. 이 생활방식은 채집 - 공유의 생계 경제 혁명과 인간 진화에 기초적이고 안정적인 여성 중심의 사회집단과 협동하는 방법을 아는 남성을 선발하게끔 하는 변경된 생식 관행의 맥락에서, 여성이 자신의 성욕을 더 많이 통제함으로써 가능해졌다. 16나는 이 새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또 나는 이 이야기가 발정기에 대한 과학적 논쟁에서 어떤 것이 유효한지 가늠하는 규칙들을바꾸었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최소한으로만 말하더라도, 저자가될 권위를 지녔고 과학적 담론의 규칙에 따라 작업하는 누군가가들려주는 이야기가 다양한 지면에 출판되고 있다. 그는 워시번의계보에 있는 다른 딸인 제인 랭커스터로서,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학술지 [인간 본성(Human Nature)]](1978)에 기고했다. 이 논문은 널리 읽히는 인기 많은 논문이다. 이야기는 퍼져 나간다. - P195

나의 핵심 논점은 공적담론에서 과학적 의미들이 출현하는 과정을 탈신비화할 것을 주장하는 데 있었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의미를만든다. 이는 영장류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 P196

연계된 경험이라는 정치적으로 폭발적인 영역을 매개로, 페미니스트들은 연결을 시도하고 운동에 가담한다. 복합성, 이질성, 특수한 입장성, 권력으로 충전된 차이들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경험은 기호학이며 의미의 체현이다[드로레티스(de Lauretis), 1984]. 페미니스트들이 반드시 표명해야 하는 차이의 정치학은 경험의 정치학에 근거해야 하는데, 이런 경험의 정치학은 자기 자신의 끝없는 차이에 대해 심리학적이고 자유주의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특수성, 이질성, 연결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집단적인 것이다. 차이는정치적이다. 말하자면 차이는 권력, 설명가능성, 희망에 관한 정치다. 경험은 차이와 마찬가지로, 모순적이고 필연적인 연결에 관한 것이다. - P198

그런 점들은 오드리 로드(AudreLorde)의 「자미(Zami)](1982)*에 나타난다. 「자미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인 자전신화는 역사, 전기, 신화가 혼합된 것이라고, ‘장르‘를 읽어 낸 케이티 킹(Katie King)은 강력하게 주장했다(1988). 읽기는 무엇이 여성의 경험으로 간주될 만한 것인가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로 기능할 수 있다. - P206

아마도 수많은 식민주의 담론이 그랬던 것처럼, 에메체타의 픽션은 응코와 같은 여성들이 그들의 몸이라는 영토 위에 타자가 써 내린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을 막아 내고자 한 분투로 읽어 내야 한다. - P223

우리가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기 자체 속에서 생산된다. 모든 읽기는 잘못된 읽기이자, 다시 읽기이며, 편파적인 읽기이자 강제적 읽기이며 상상된 텍스트의 읽기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원래부터궁극적으로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가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는 이미 언제나 서로 경합하는 실천과 희망으로 뒤엉켜 있다. 여성 의식을 표시한 당대의 지도 위에서 대단히 특수하고 순수하지 못한 지역적/지구적, 개인 - P224

적/정치적인 우리의 위치에서 비롯된, 이들 각각의 읽기야말로 교육적 실천이다. 그런 실천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여성 경험‘이라는 막강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권력으로 충전된 차이, 특수성, 친화성이라는 호명을 통해 작동한다. 만회 불가능한 하나라는 환상의 상실은 차이 속에 자리한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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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나는 책을 읽기 위해 자주 노동자 교회에 갔다. 내가 필요로 하는 자료들을 목사가 찾아주었다. 공포심이 우리의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목사는 강조했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일반 교회의 목사들이 그공포심을 이용한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다. 노동자 교회의 목사는 달랐다. 그도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사회조사연구회‘라는 모임에 끌어들였다. 지부장은 공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표 복사본만 게시판에 나붙었다. 은강방직 노조는 조용히 침몰해가고 있었다. - P221

노인은 간단히 말했다.
"아주 좋아질 거야. 거기다 동그라미를 쳐줘."
학생들은 나무껍질 문 앞에 서 있었다. 뜻밖의 대답이라는 표정을 그 아이들이 지었다.
"나는 곧 죽을 거야."
애꾸눈 노인이 말했다. 어머니는 그 노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죽은다음에야 평온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찾아온 아이들에게는 "우리의 생활은 아주 나빠질 것이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불안해했다. 어머니는 내가 질 싸움을 시작했다고 믿었다. 나는 어머니가 저목장에 나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 P237

클라인씨의 병

"죽기가 살기보다 쉽지."
어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얘들 아버지를 원망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우."
"그러시겠죠." - P247

"아버지는 꼽추가 아녜요. 앉은뱅이도 아니구요. 아세요?"
"안다."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나는 벌레야." - P252

"그래서, 뭘 얻었니?"
"눈을 떴어요."
"너는 처음부터 장님이 아니었어!"
지섭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현장 안에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깥에 나가서 뭘 배워? 네가 오히려 이야기해줘야 알 사람들 앞에 가서 눈을 떴다구? 장님이 돼버린 거지, 장님이, 그리고, 행동을 못 하게 스스로를 묶어버렸어. 너의 무지가 너를 묶어버린 거야. 너를 신뢰하는 아이들을 팽개쳐버리구."
"그렇진 않아요."
내가 말했다. - P256

추위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 어느 날 나는 과학자를 찾아갔다. ‘클라인씨의 병‘은 그의 방 창가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병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알았어요."
빠른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예요."
과학자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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