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순수는 모래와 돌들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인간은그만 그곳에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권태가 잠든 이 기이한 도시 안에 피신 중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오랑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양자 대결에서 생겨난다. 순수와 아름다움에 포위당한 권태의 수도, 이곳을 둘러싼 군대는 돌들의 수효만큼이나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도시 안에서 어떤 시간이면 그만 적진으로 넘어가 버리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거센가! 저돌들과 하나가 되고 싶은 유혹, 인간의 역사와 그 소란을 부정하는 저 뜨겁고 무정한 세계와 한 몸이 되고 싶은 유혹! 이것은 아마도 헛된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의 인간 속에는 파괴의 본능도 창조의 본능도 아닌 깊은 어떤 본능이 잠재해 있다. 그저 아무것과도 닮지 않고 싶은 본능 말이다. - P200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비극적인 것과 절망을 혼동하고 있다. "비극적인것이란 불행을 한바탕 크게 걷어차는 발길질 같은 것일 터이다."라고 로런스는 말했다. 이야말로 건전하고도 당장에 적용할 수 있는 생각이다. - P207

그 땅이 가장 많이 닮은 곳은 스페인이다. 그러나 전통을뺀다면 스페인은 그저 아름다운 사막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다가 그곳에서 태어나서 살게 되었다면 몰라도, 사막 속으로물러나서 살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들은 어떤 특정한 부류뿐이다. 그 사막에서 태어난 나로서는 어쨌건 방문객처럼그 고장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자신이 몹시 사랑하는 여자의매력을 목록 작성하듯 시시콜콜 꼽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진않는다. 그녀를 그냥 통째 다 사랑하는 것이다. 굳이 말해 본다면, 뾰로통해질 때 흔히 짓는 표정이라든가 혹은 고개를 젓는 모습 같은 한두 가지 특히 마음에 드는 점을 꼽을 수는 있겠다. 나는 바로 그런 식으로 알제리와 오랜 관계를 맺어 왔다. 그 관계는 아마도 끝날 날이 없을 것이고 그 때문에 나는이 고장에 대하여 아주 명철하게 이야기할 입장이 못 된다. 그저 최선을 다한 끝에, 이를테면 좀 추상적인 방식으로, 자기가 - P219

사랑하는 대상 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면의 어떤 세목을 분간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알제리에 대하여 한번해 보려는 것은 바로 학생이 연습 문제 푸는 것과 비슷하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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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은 없다."
이렇게 나는 그 글 속에서 다소 엄숙한 어조로 썼다. - P18

유일한 낙원은 바로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3) 오늘 내 마음속에 깃드는 감미로우면서도 비인간적인그 무엇인가에다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이민(民)이 그의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나는 기억한다. 아이러니, 경직된 마음, 그런 모든 것이 다 잠잠해지고, 마침내 나는 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행복을 반추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이건 그보다 훨씬 더 간단하고 훨씬 더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망각의 밑바닥으로부터 내가 건져 올리는 이 시간들 속에는 무엇보다도 어떤 순수한 감동의, 영원 속에 정지한 한순간의 추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으니 말이다.

3) "진정한 낙원들은 잃어버린 낙원들이다."(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되찾은 시간」(Gallimard Pléiade, t. IV, p. 449). 카뮈는 프루스트의 애독자였다. - P46

가난 속에는 어떤 고독이, 하나하나의 사물에 그 나름의 가치를 부여하는 고독이 있다. 어느 정도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하늘 그 자체와 별들이 가득한 밤도 그저 자연의 재화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밑바닥 계층에서는 하늘이 본래의 모든 의미를 되찾게 되어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은총이다. 여름의 밤들, 별들이 반짝이는 신비의 세계! - P49

나는 일찍 식사를 마치고 8시 반이면 자리에 눕곤 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자신으로부터 딴 데로 생각을 돌릴 수있었다. 교회, 궁전, 박물관 같은 모든 예술 작품 속에서 나는나의 불안감을 진정시켜 보려고 했다. 그런 상투적인 수단으로 나의 반항을 우수로 녹여 없애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헛수고였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한번은 시가지 맨 끝에 있는 어느 바로크식의 수도원 안에서 그시간의 다사로운 분위기, 느리게 울리는 종소리, 오래된 탑에서 흩어져 날아오르는 한 떼의 비둘기들, 그리고 풀과 허무의향기와도 같은 그 무엇이 마음속에 눈물 가득한 침묵을 만들어 내면서 나는 거의 해방감에 가까운 느낌을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저녁에 돌아와 긴 글을 단숨에 적었는데, 여기에그것을 그대로 옮긴다. 왜냐하면 바로 그 표현의 과장됨 그 자체에서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의 복잡함을 다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 P66

물론 나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고독하지않게 되었을 뿐이다. 프라하에서 나는 벽 사이에 갇혀 숨이막혔다. 여기에서는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 주위로 투사된 나는 나를 닮은 형상들로 이 우주 전체를 가득 채워 놓고 있었다. 나는 아직 태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 빈곤의 세계에 대한 나의 애착과 사랑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나는이제야 비로소 태양과 내가 태어난 고장이 주는 교훈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오가 되기 조금 전이면나는 밖으로 나가 비첸차의 광대한 벌판이 내려다보이는, 내가 잘 아는 어느 지점으로 가곤 했다. 해는 거의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하늘은 짙고 서늘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은 구릉들의 경사면을 따라 내달리다가 사이프러스와 올리브나무들, 하얀 집들과 붉은 지붕들에 옷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옷을 입혀 준 다음, 햇빛에 겨워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벌판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럴 때면 똑같은 헐벗음이 남았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뚱뚱하고키 작은 사내의 가로누운 그림자. 그리고 햇빛을 받아 소용돌이치는 그 들판 속에서, 먼지 속에서, 나무들을 베어 버린 후햇볕에 탄 풀들만이 부스럼 딱지처럼 남은 그 구릉들 속에서, - P75

내 손끝에 만져지는 것, 그것은 내가 나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그 허무의 맛의 헐벗고 멋없는 어떤 모습이었다. 이 고장은나를 나 자신의 중심으로 회귀시켜 숨겨 온 나의 불안과 대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라하의 불안이었고 동시에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나무들과 태양과 미소로 가득한 그 이탈리아의 벌판을 눈앞에두고 나는 한 달 전부터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죽음과 비인간성의 냄새를 다른 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절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 P76

아마도 알제에 오랫동안 살아 보아야 자연이 주는 부가 지나친 것일 때 그것이 얼마나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고 단련하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이곳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 고장에는 교훈이 없다. 이 고장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슬며시 엿볼 만한 것도 없다. 이 고장은 주는 것, 그것도 아낌없이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고장은 남의 눈에통째로 다 보이도록 내맡긴다. 그 주어진 것을 보고 즐기는 순간부터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곳이 요구하는 것은 또렷이 볼 줄 아는 영혼, 즉 위안받으려 들지 않는 영혼이다. 이곳은 우리가 신념에 따라 행동하듯 명철한 의식에 따른 행동을할 것을 요구한다. 제가 먹여 키우는 인간에게 저의 찬란함과남루함을 동시에 제공하는 이곳은 얼마나 기이한 고장인가! 이곳에 사는 민감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관능적인 부가 극도의 헐벗음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놀라울 것이 없다. 진실치고 그 속에 그 나름의 쓰디쓴 맛을 담고 있지 않은 진실 - P125

은 없는 법이다. 그러니 내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 있을때만큼 이 고장의 얼굴을 사랑하게 되는 때는 없다 한들 무엇이 놀랍겠는가,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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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세트 - 전2권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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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순서대로 실린 시를 통해 시인의 변화를, 그의 이십 대를, 삼십 대를, 사십 대의 다름을 조금은 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시인의 이십 대의 강렬하고 처절한 시들이 가장 좋다. 그 ‘헛되고 헛됨‘을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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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6-08-19 0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다운시인, 최승자...

햇살과함께 2026-08-21 21:23   좋아요 0 | URL
이십 대에 이런 시를 쓰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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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쏜살 문고 조지 오웰의 <책 대 담배>를 읽었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 중 9편을 실은 책인데, 100페이지 수준이니 쏜살문고 중에서도 얇은 편이다.


이 책은 지난주 일요일에 혜화동 소극장 뮤지컬을 보러 가는 길에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동양서림에서 구매한 책이다. 가방이 무거워서 (이미 집에서 가져간 책 3권에 빵집 2군데서 산 빵들로....) 위트 앤 시니컬에서 시집 한 권만 살 생각이었으나, 1층에 내려오니 동양서림에서도 책 한 권을 사야할 것 같아서 가벼운 이 책을 골랐다.


표제작 책 대 담배나 어느 서평가의 고백, 책방의 추억 등 쉽게 읽을 수 있는 꼭지도 있지만, 오웰의 정치적인 생각이 많이 반영된, 오웰의 1984나 동물농장의 기반이 되는, 전체주의를 논하는 꼭지들은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오웰의 사상이나 그 당시 상황 들을 더 알아야 잘 이해할 수 있는 꼭지였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어보아야 겠다.


위트 앤 시니컬에서 구매한 시집은 유병록 시인의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인데, 사서 바로 선물해버려서 읽어보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다시 사는 걸로.


동양서림 갈 때마다 1층에서 유희경 시인이 결제해 주는데(물론 아는 체는 하지 않는다), 다음엔 2층에서 유희경 시인 책 사서 사인 받아볼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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