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내 삶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끊임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 두 가지는 서로 별개라는 것이다. 퀴어로 커밍아웃한 것은 트랜스, 즉 타인의 기대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뒤진화한 나 자신으로 커밍아웃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이런 기억들은 비선형적인 서사를 이루는데, 퀴어함이란 본질적으로 비선형적인 것, 굽어지고 틀어지는 여정들이기 때문이다. 두 발짝 앞으로 나섰다가,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 나는 내 삶의많은 부분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아주 조금씩 깎아나가는 한편으로 무너질까 두려워하며 보냈다. 그 과정 역시도 의도적으로 내글에 담았다. 여러 의미에서 이 책은 내가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 P11

「주노」가 성공을 거두자 영화계 사람들은 내게 내가 퀴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한테 해가 될거라고, 내게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고, 그게 최선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그래서 나는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했다. 사진촬영을 했다. 폴라를 비밀로 간직했다. 그러면서 우울증과 쓰러질 정도로 심각한 공황발작에 시달렸다. 나는 거의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몸속에 못이 가득 든 것처럼 무감각했고 조용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그고통이 얼마만큼 큰지조차 표현할 수 없었다. 특히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적어도 남들이 그렇게들 말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나는내가 느끼는 감정이 과한 거라고, 내가 감사할 줄 모른다고 스스로를 비난했다. 아프다고, 꼼짝도 할 수 없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죄책감이 너무 컸다. - P28

내가 나를 알게 된 건 네 살 때였다. 핼리팩스 시내, 퍼블릭가든 건너편 사우스파크 스트리트에 있는 YMCA 유치원에 다니던시절이었다. 짙은 색 벽돌로 되어 있던 건물 외벽은 이후에 철거한뒤 재건되었다. 나는 내가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애초부터 알았다. 의식적으로 안 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의미에서였다. 그 감각은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그리고 선명한 기억 중 하나다. - P35

아버지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와 온 가족이 있을 때 참 다른사람이었다.
"린다와 네가 물에 빠지면 나는 널 구할 거다." 아버지는 남몰래 내게 말하곤 했다. "린다는 내 평생의 사랑이 아니야. 너야말로내 평생의 사랑이지." 그건 비밀이었다. 아버지가 대놓고 비밀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린다 곁에 있을 때는 에너지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나에게는 둘만의 노래인 루스 브라운의 참견하지 마Ain‘t Nobody‘s Business」가 있었다. 나를 학교에 태워다 줄 때면 아버지는 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따라부르곤 했다.
린다 곁에 있을 때 그런 ‘사랑‘은 증발해버렸다. 말투도, 몸짓도, 표정도 변했다. 마치 두 사람이 하나로 뭉쳐 작당이라도 한 것같은 차갑고 냉랭한 태도에 내 눈길은 절로 바닥을 향했다. 린다는 사람들 앞에서 내게 못되게 굴었고 둘만 있을 땐 더더욱 못되게굴었다. 나는 아버지와 나만의 비밀을 잘 숨겼다. - P67

전문 배우가 되는 동시에 쇼핑몰에서 "녀석, 고맙다."라는 말을 듣는 시절도 끝이 났다. 배역을 위해 머리를 기르고, 신체의 변화를 목전에 두었던 나는 세트장에 있는 시스 남자아이들을 빤히바라보곤 했다. 칼라 달린 셔츠, 멜빵, 반바지에 타이츠는 입지 않은 아이들. 머리에는 리본이 아닌 뉴스보이 모자를 쓴 아이들.
왜 나는 저 모습이 아니지? 나는 저들처럼 움직이고, 저들처럼 연기하는데.
어린아이 시절부터 시작되어 대상포진처럼 골수에 깃들어 있던 괴로운 느낌이 예고도 없이 닥쳐와 온몸에 퍼지며 내 신경을 노출했다.
어머핏 포니를 촬영하는 동안 나는 젠더 디스포리아에 시달렸다. 풀로 붙인 것처럼 딱 달라붙던 타이츠도, 하늘하늘 날리던 드레스도 빌어먹을 리본은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에 꽂아 주던 머리핀처럼 해소되지 않는, 내면화된 울화를 자극했다. - P75

아버지를 용서하기는 그만큼 쉽지 않았다. 당장 토론토로 가서네 엉덩이를 걷어차 주마. 자기 자식이 보호를 필요로 했을 때, 자기자식이 사랑을 필요로 했을 때, 그는 폭력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미성년자인 내가 겁도 없이 성인 남자와 인터넷으로 교류했다는이유로 노여워했다. 그 순간에 내게 돌봄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순간에 내게 안전과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영영 그런 것을 얻을 날은 없지 않을까? 아버지의 그 한마디 말은 그 남자의 위협보다, 그의 집착보다, 내 팔을 훑던 그의 손가락보다 내 몸속에 더욱오래 머물렀다. - P89

2014년의 커밍아웃은 선택했다기보다는 하지 않을 수 없어서한 것이었지만, 맞다,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한 일들 중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노출되고 취약해지는일이 잇따랐다 한들, 커밍아웃은 그 모든 걸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걸음이었다. 나는 숨어서 고통받느니 살아 있으면서 고통을 느끼고 싶었다. 어깨를 활짝 펴고, 심장을 환히 드러낸 채, 나는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손을 잡고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공허함이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익숙한 낮은 목소리. 그 속삭임은 여전히 선명하게 내 귓가에 맴돌았다. - P111

수줍어하던 나는 점점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갔다. 벌써 그녀가 나를 아끼고, 지켜 주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고, 그럼에도 어른 행세는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그렇지만우리의 친밀함은 그 영화를 촬영한 경험이 열아홉 살의 내 자아에미친 영향을 아주 약간 완화해 준 데 그쳤다.
「아메리칸 크라임은 1965년 인디애나주 역사상 한 명의 희생자가 겪은 최고 수위의 학대를 경험한 열여섯 살 소녀 실비아 리킨스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잔인한 영화지만 실화의 끔찍함에비하면 자제한 편이다. 나는 실비아 역을 맡게 되었다. - P123

내가 맡은 배역들은 나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연기란 다른 인간의 경험을 탐구하는일이다. 공감하고,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자 바라는 마음으로, 감정이 솟구쳐 오르기를 기다리는, 결코 끝나지 않는 연습이다. 눈을 감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이 내게 닥쳐왔다. 실비아는 어떻게 그토록 오래 버틴 걸까? 어떻게 포기해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고문이란 사람을 끝까지 끌고 갔다가 다시 끌어당기는 일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는 것이리라. - P127

촬영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특히 더 힘든 날이면 키너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돌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테킬라를 마시고 키너의 집 벽난로 앞에 앉았다. 음악을 크게 틀어 두고, 알 수 없는 커다란 모험을 앞둔 채 춤을 추고 또 췄다. 우리가 만나게 된 계기인 이 영화에서는 키너가 나를 살해한다. 실제 세계에서 키너는 내 하나뿐인 구원자였다. - P129

비록 그 배역을 맡게 되리라는 걸 스크린 테스트 전부터 넌지시 알고 있었음에도, 배역이 확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기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 가슴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인물을 연기하게 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꿈꾸던 배역에 캐스팅된 것이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스크린 테스트가 끝나고 두 달 뒤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촬영이 밀렸고, 회복할 시간이 생겼으니 내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자기억제는 여전했지만 음식을 먹는게 훨씬 더 편해졌고 일은 내게 도움을 주었다. 주노 세트장에 있으면 치유받는 기분이었고, 고문의 장면들이 나를 집까지 따라오지도 않았고, 나는 내 몸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나아졌다. 그 어떤 의미도 없다는 기분으로 지내다가, 드디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우울감이 나를 껍데기만 남기고 빨아들여 버렸는데말이다. - P135

내 옷은 내 허벅지에, 가슴에, 거머리처럼, 1990년대에 유행하던슬랩 팔찌처럼 철썩 달라붙었다. 여성스러운 옷을 입었을 때 마치내가 기적 같은 승리라도 거두었다는 듯 환해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내 얼굴은 일그러졌다. 내가 칸 영화제에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프리미어 시사회를 위해 몸에 딱 붙는 금빛드레스를 차려입었을 때 기뻐하던 얼굴들을 앞으로도 영영 잊지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예쁘잖아."
울 "그냥 게임을 한다고 생각해."
나 개인의 삶에서 하고 있는 연기가 이미 나를 숨 막히게 하고 있는데 스크린에서도 연기를 한다는 것은 너무 큰 압박이었다. - P156

할리우드의 바탕은 퀴어함을 지렛대처럼 활용하는 데 있다. 필요한 순간에는 치워버리고, 이익이 될 때는 끄집어내면서 자기들끼리 뿌듯해하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때늦게, 한참 뒤처져 반응하고 따라간다. 할리우드라는 깊숙한 벽장은수많은 비밀을 묻어 버리고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내가 퀴어라는 것 때문에 벌을 받는 와중에도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대놓고 학대하면서도 보호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뒤틀린 체계에서 잔혹성은 보편적이며 평범하게 보이고, 이를 해소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도리어 이상해 보인다." 꼭읽어 볼 만한 책인 세라 슐먼Sarah Schulman의 『끈끈한 유대감: 가족 내의 호모포비아와 그 결과 Ties That Bind: Familial Homophobia and ItsConsequence』에 나오는 구절이다. - P163

불안감은 사라질 줄 몰랐다. 무언가가 나를 자꾸만 짓눌렀고,
공황발작 때문에 도저히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운전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날들도 많았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의욕이 없었으며, 바라는 것도 없었다. 처음으로 제대로된 심리치료사에게 나를 데리고 가서 삶을 구하는 조언을 얻게 해준 건 매니저였다.
"진짜 당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로 가야 해요." 스물세 살에만난 새로운 심리치료사가 말했다.
"안 돼요, 그건 불가능해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내 퀴어다운 걸음걸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젠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너무 뜨거워서 건드릴 수도 없는 주제였으니까. 내가 젠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게 되기까지, 내가 나 자신에게 충분히 귀를 기울이게 될 수 있기까지 이로부터 10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극한에 몰린 나머지 더는 선택지가 없어질 때까지. 길 위의 마지막 갈림길에 놓일 때까지.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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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숲속쉼터에서 비 그치길 기다리며 읽은 책.
커피만 있으면 딱 좋은 비오는 날 분위기.
이 책은 정말 표지에 있는 권법 자세를 취하는 여러 길고양이들이 나오는 귀여운 책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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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서
전시 환경파괴는 전쟁범죄이다
1943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어느 생물학 실험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아서 갤스턴은 ‘2, 3,5-트라이아이오도벤조산‘이라고 불리는 화학물질이 식물의 생장을 무분별하게 촉진시켜서 오히려 말라죽게 한다는논문을 발표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연구결과는 갤스턴이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적극 활용되었다. 1950년대 영국과 미국 국방부 소속 과학자들은 이 연구를 바탕으로 식물을 말려서 죽이는 제초제, 즉 고엽제를 만들어냈다.
우리에게 고엽제는 미군이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 동안 베트남전에서 약 8,000만L를 살포했던 ‘에이전트오렌지‘라는 이름으로 잘알려져 있다. 영국 공군도 1950년대에 일명 ‘말라야 비상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말레이시아 반도에 고엽제를 살포하였다. 에이전트오렌지를 비롯한 제초제의 파괴력은 잔혹했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이었다. 오늘날 에이전트오렌지로 인해 파괴되었던 인도차이나반도의 숲은 외관상으로는 옛 모습을 되찾은 듯하다. 하지만 화학염으로피해를 입은 베트남 주민들은 최소 400만 명에 이르며,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미국과 한국 군인들도 고엽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오염물질이 빗물에 씻겨서 지하수로 흘러들어간 뒤 인간의 건강뿐만 아니라 동식물에도 소리 없는 피해를 계속 입히고 있다. - P109

백무산
현실은 이제 인간에 대한 문제에 다른 관점을 요구한다. 인간문제를넘어서 인류의 문제로, 문명의 역사를 넘어 인류사 전반의 문제로 인식의 확장을 요구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사회를 기준으로 나머지 다른 영역을 해석하는 오만하고 잘못된 전통 그대로 문명사회를 기준으로 과거 인류의 문제를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인간을 제대로이해하기 위해서 ‘머나먼 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P121

도시문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문자였다. 도시는 이질적인 사람과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며 교환을 위한 사업적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문자가 이질적인 것을 연결하고 권력에 의한 통제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문자는 단순히 말을 받아 적은 기호가 아니었다. 문자는 우리의 생활세계에 생성하고 소멸하는 구술적 상호작용 대신에 정신을 사물화하고 불변하는 허구적 세계를 구성하는 능력을 가짐으로써 스스로를 지상에서 더없이 우월한 존재로 만들었다. - P123

자본주의 노동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간의 감각을 변형하고 왜곡시킨다. 자본주의 노동습관은 자연에 대해 무관심과 적대와 공격적인충동을 유발한다. 노동의 윤리는 그 시대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태도를결정한다. 노동 자체에 대한 성찰은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며 자연과의왜곡된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기계노동은 신성하지도 인간적이지도않다. 그 누구도 인간성의 요구대로 노동자가 된 사람은 없다. 채찍과감옥이 있었고 감시와 처벌로 훈육되고 개조되었다. 이러한 성격을 인간성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윤리성을 인간의 고유성으로 둔갑시켰다. - P125

숲속을 거닐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기보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이 발견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시선에서 발견되는 나는 내가 생각해온 내가 아니다. 그 시선은 나의 내면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깬다. 나는 보는 자이기도 하지만 보이는 자이기도 하다. 보여지는 것도 나의인식의 일부다. 나의 내면은 내 안에만 거주하는 것은 아니다. - P127

강수돌
저는 언론과 대중문화에도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개개인이 분리배출 잘하고 전기차를 타면 기후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녹색과 성장이 양립할수 있는 개념인 것처럼 이야기해서 정치의 책임으로부터 눈을 돌리게합니다. 그렇지만 수치로 따져도 세계 최상위 부자 10%가 대기 중 온실가스의 약 45%의 책임이 있다고 하잖아요. 이 사람들의 생활이 평균으로만 내려와도 온실가스가 3분의 1 줄어든다고 합니다. - P146

선생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생활정치라고 할까요, ‘나부터 혁명‘이라는저서도 여러 권 내셨지만 사고장애, 경쟁, 동일시, 중독 등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 보통사람들의 왜곡된 욕망을 분석하고, 노동(자본)의 족쇄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때 맛볼 수 있는 보람과 즐거움, 그리고 가능성을 몸소 실천적으로 주창해오셨지요. 저희 편집실은 깊은 무기력증과 빈곤한 상상력의 수렁에 갇혀 있는 우리 사회에 절실한 것은 정밀한 진단과 함께 대안적 삶의 모습 그 자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선생님께 말씀을 청해 듣고 싶었습니다. - P147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력’으로서의 삶을 무시할 순 없지만, 노동력 차원이 10~20% 정도라면 ‘인격체‘로서의 삶이 80~90%가 돼야 온전히 삶의 주인으로서 살 수 있어요. - P148

강 대다수 사람들이 ‘강자동일시‘를 하면서 그들을 선망하고 모방하려 하는 것은 결국 ‘거품을 향한 질주‘죠. 물론 자본주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악마로 묘사할 순 없어요. 오히려 크게 두 가지 측면-신분의 자유화, 소비의 민주화라는 역사적 성취를 이뤘어요. 그러나 이 성취들이갈수록 족쇄로 기능하죠. 신분 자유화로 노동력을 자유로이 거래하는대신 잉여가치 생산시스템에 종속되었고, 소비 민주화는 결국 자원낭비, 자연오염, 생태위기를 초래했어요. ‘이카루스 역설‘처럼 성공의 요인이 패망의 요인으로 작동한 역설이죠. 비근한 예로, 성공 신화로 회자되는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떴잖아요. 그가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성공은 할 만큼 했지만 놓친 게 있다. 바로 내 삶을 놓쳤다. 내 삶의 시간과 내용은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결코 살 수 없다." 가치관 내지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이들과 이런 메시지를 공유하고 토론을 해야 한다고 봐요. - P151

그러니까 내가 잡초를 ‘이겨야지‘, 이런 마음으로 달려들면 안돼요. 요즘 저는 잡초한테 배워야지, 잡초처럼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우리도 그런식으로 활동하고 운동해야죠. 칡넝쿨처럼 우리가 가는 모든 지점에 뿌리를 내리고 씨앗을 뿌리는 운동을 꾸준히 해나가야 해요. 그게 얼마나 성공할 것인가 물어보는 이들이 있는데, 결과와는 관계없이 ‘옳은 일‘이면 해야죠. - P155

복지국가란 원래 자본주의를 존속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결코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변화시키는 건 아니죠. 이 부분에 저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 - P162

강 굉장히 중요한 점인데, 아픔이나 고통 같은 어두운 면이나 기쁘고 행복하고 밝은 면 모두, 큰 차원에서는 삶의 흐름 안에서 부단히 교 - P168

차하고 공존하는 거예요. 그런데 도시민들은 대개 좋은 것만 취하려 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 전가하거나 안 보이는 데로 돌려버리려는 회피성향이 커요. 어두운 면(더러움, 촌스러움, 귀찮음, 아픔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둠을 직시하지 못하죠. 그리고 바로 그 과정에 자본이 개입해요. 기술이나 약품, 오락의 형태로! 그렇게 해서 중독의 늪에 빠져드는거예요. 자신의 인간적 필요, 고통 같은 것들을 책임감 있게 직접 대면하면서, 때로는 좀 아픔도 겪으면서 긴 터널을 통과하듯 빠져나가야 비로소 어둠과 함께 하나의 큰 세상을 구성하는 빛도 맛볼 수 있어요. 두렵다고 자꾸 우회로를 만들고 달콤한 대체물에 의존하게 되면 중독의수렁에서 헤매게 되죠. 그렇게 ‘악의 일상성‘이 구현되는 거죠.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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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구매 첫 책은 여성주의책 같이읽기 책 <파묻힌 여성> 415페이지인데 주석이 100페이지가 넘는다. 100페이지 날로 먹는 느낌 ㅋ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와 <제법 엄숙한 얼굴>은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 책이다. 근대 여성 작가의 단편소설들과 이에 대한 현대 여성 작가의 단편소설과 에세이 매칭이라는 흥미로운 기획, ‘소설, 잇다’ 시리즈이다. 잘 몰랐던 근대 여성 작가 작품을 보는 재미가 기대된다.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0월말에 구입한 책이다. 남편의 요청과 첫째의 학교 숙제용으로 구매 대행. <경제학이..>는 읽어보겠지만 자본론과 함께 자본주의 양대 산맥이라는 막스 베버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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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1-01 2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00페이지라니!! 주석이 엄청 자세한 가 보군요? 자세한 주석은 중간중간 있어야 보기 편한데….

햇살과함께 2023-11-03 18:58   좋아요 0 | URL
주석이 많으면 각주에 있어도 미주에 있어도 보기 불편하더라고요.
중간 중간 있으면 읽기에 맥이 끊기기도...

다락방 2023-11-02 06: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석이 백페이지라고요? 하하하흐

햇살과함께 2023-11-03 18:58   좋아요 0 | URL
ㅎㅎㅎ 100페이지 거저 먹는 느낌

독서괭 2023-11-02 0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야 할 기한이 있는 책은 페이지수부터 확인하는데, 주석 분량이 많으면 다행스럽기도 하더라고요 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11-03 18:59   좋아요 0 | URL
괭님도 그렇군요. 저도 일단 몇 페이지인지 가늠 ㅎㅎ

단발머리 2023-11-02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 숙제용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눈길이 갑니다. 주석이 100페이지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11-03 19:01   좋아요 0 | URL
선생님이 너무 하신 거 아니신지.. 고등학생에게 막스 베버라니... ㅎㅎㅎ 덕분에 소장용 책 하나 더 생겼고요.
책은 아무도 펼쳐보지 않았다! ㅎㅎㅎ
 

안담, 작가-친구-연습
어딘글방에서 우리는 작가 되기뿐만 아니라 작가의 친구 되기도 훈련했다. 인용하는 연습뿐만 아니라 인용당하는 연습도 했다. 기꺼이 서로의 글감이 되어 줄 수있는가? 글방에서 우정은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어떤 경험과 말에 ‘내 것‘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치사하고 쩨쩨한 처사였다. 누가 나를 글에 써서 분하다면 나도 그를 글에 쓰면 된다. 공동으로 겪은 하루를한 사람은 글로 써 오고 한 사람은 만화로 그려 오는 풍요가 글방에는 있었다. 아직 쓰이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아니다. 따라서 ‘내 이야기였어야 할 이야기‘라거나 ‘내가 쓰려고 했던 이야기‘라는 표현은 틀렸다. 그가 썼다면 그의 이야기인 것이다. - P22

언제부턴가 좋아하는 작가를 물으면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의 뛰어난 문장과 생각을 모셔와내 글의 부족함을 만회한 적이 수도 없이 많다. 그 대가로 나도 내 말을 그들에게 헤프게 준다. 이제는 친구들이 나를 어디서 어떻게 인용하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나는‘이라고 너무 많이 쓰다가 그렇게되었다. 원없이 ‘나‘라고 써놓고보니 그 많은 나가 다나일 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엇이라고 쓰는 순간 나는 그 무엇으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무엇도아니다. 그러므로 내말은 너의 말도, 그의 말도 될 수있다. - P29

이연숙, 비우정의 우정
그러나 분명 우호적인 관계를 못 맺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 역시도 우정이라는 개념을 경유해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정상적이라 말해지는 사회 규범에 도무지 적응할수 없는 괴짜들(queer)이 속할 수 있는 가장 미약한 공동체를 상상하기 위한 용어로 ‘비(非)우정의 우정‘을 제안한다. 비우정의 우정이란 너와 나의 ‘같음‘이라는 유사성과 동일성에 기반을 둔 우정이 아니다. 오히려 너와 나의 ‘다름‘이라는 불화와 불일치를 기반으로 할 뿐만 아니라, 너와 나의 ‘특별함‘ 또는 ‘유일무이함‘이라는환상이 들어설 자리를 너와 나라는 ‘아무나‘의 우연한마주침으로 채운다. 너와 내가 결코 같지 않고 앞으로도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너와 가까워지고자 하는, 혹은너를 소유하고자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영원히 반복될 너라는 대상을 향한 나의 오해와 오독에는 일종의 충실성이 있다. - P39

김영민이 『동무론』에서 제시한 비우정의 우정은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사에서 유구하게 반복되어 말해진 주제다. 다시말해 우리가 우정이라 부르는 관계는 ‘나는 그를 안다‘는 긍정이 아니라 ‘나는 그를 모른다’는 부정에서, 혹은 그런 긍정과 부정의 사이 또는 겹침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주제에서 가장 유명한 경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고전해지는 "친구여, 친구가 없구나(O friend, there is nofriend)‘일 것이다. ‘친구‘를 돈호하는 동시에 ‘친구‘의부재를 확인하는 이 수수께끼 같은 경구는 『인간적인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니체에 의해, 그리고 『우정의 정치학에서 데리다에 의해 전유된다. 하지만 조르조 아 - P45

감벤에 따르면 그들은 전략적으로 그리스어 원전을 오독했다고 한다. 원전의 의미는 ‘친구가 많은 자는 친구가 없다‘는 뜻이다. - P45

흥미롭게도 푸코의 우정론의 토대가 되는 ‘비인격적 친밀감‘은 로넬의‘커피나 한 잔‘에 대한 혐오, 김영민의 ‘서늘한 관계‘에대한 옹호, 아감벤의 ‘함께-나님‘과 공명한다. 이처럼친구의 정체성도, 과거도, 얼굴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비우정의 우정이 제기하는 문제는, 내가 너를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P51

김정은, 자기 언어를 찾는 방법
1984년 결성된 ‘또 하나의 문화‘는 조형, 조한혜정, 조옥라, 장필화 등이 남녀평등 문제에서 출발해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대안 문화를 모색하고자 한 동인 모임이다. [1] 줄여서 ‘또문‘이라 불린 이들은 계급 담론과 노동자 정체성이 특권화된 1980년대 대항 공론장에서 노 - P57

동 현장이 아닌 가정과 학교 등을 새로운 현장으로 부각했다. 이화여대, 연세대, 서강대 등에 소속된 동인들은 서울 신촌 지역에 사무실을 차리고, 이를 근거지로삼아 여러 모임을 주관했으며 모임의 결과물을 정리하고 다듬어 무크지 <또 하나의 문화》(1985~2003년)를펴냈다. 활자 매체를 통한 운동으로 20여 년 동안 한국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제를 발굴했다. - P58

현재 출판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길보라, 이슬아, 하미나 등 1990년대생 여성 필자들은 모두 같은 글방에서 함께 어울리면서 자기 언어를 찾았다. 어딘글방을 운영한 김현아는 또문이 인큐베이팅한 대안학교하자센터의 교사였으며, 글방은 또문의 사무실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집단에서 서로의 언어를 찾아가는 우정이라는 방법은 단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지금도 자기 언어를 갱신하는 구체적 훈련 방식으로 활용된다. - P59

[10] 김혜순은 2002년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출간을 기념한 한인터뷰에서 ‘문화권력모임‘과 관련한 질문에 특히 바리데기와 관련해 "김성례 교수에게서 많이 배웠다."라고 말했다. "당시 미셸 푸코가 유행하면서 여기저기 ‘권력‘이란 말이 붙어다녔다. 토론 결과를 책도 내지 말고 세상에 알리지도 말자는 모임이었다. 서강대 종교학과 김성례 교수에게서 많이 배웠다. 바리데기는 기본 뼈대만 같은 이본(異本)이 수십 종이고, 그것들은 각각 연희 때마다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바리데기를 글로 읽지 않고 파동으로 받아들이면서 흡수하게 된 것이다." "강요된 주부엄마의 정체성 벗고 싶었다"」, 《조선일보》, 2002년 1월 3일. - P65

김예나, 털 고르기를 하는 시간
동성애의 생물학적 기원을 설명하는 연구 자료는매우 많고, 실제 인간을 포함한 동물에서 동성 간 섹스는 많이 관찰된다. 하지만 동성 간 섹스를 하는 동물에게 찾아가 방금 섹스를 한 당신의 파트너가 연인인지그저 친구일 뿐인지 물어볼 수 없는 노릇이니 사랑과우정의 명확한 차이에 대한 생물학적 답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엄격히 이야기하면 사랑과 우정은 사람이 만들어 낸 단어에 불과하다. 시공간에 따라 유동적인 개념이며 문화나 개인에 따라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 P82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타인과의 연대를 추구하고 그러한 연대를 통해 신체적, 심리적 안정을 얻으며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무리 지어 사는 모든 동물에게 공통으로 해당하는 생물학적 사실이다. - P82

김지은, 비둘기와 귀얽히는 영역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어느 날 샤워를 하고 나체로 욕실을 나온 후,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검은 고양이의 시선에 돌연 부끄러움을 느낀다. 언제나 발가벗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늘 발가벗고 있지 않은 암컷 고양이 앞에 인간 남성이 전라의상태로 서서 고양이의 눈길을 온몸에 받는 상황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거북함을 자아낸다. 데리다는이 곤란한 만남을 동물적 만남이라고 명명하고, 그 만남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도출한다. - P92

비슷한 맥락에서 호주 페미니스트 생태철학자 발플럼우드가 들려주는 먹이 이야기는 ‘풍요롭고 호의적인 자연‘이라는 안일한 환영이 어쩌면 도시인이 덧씌운 ‘낭만화된 자연‘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녀는 1985년 2월 호주 카카두 국립공원에서 홀로 카약을 타던 중 바다악어에게 허벅지를 물린채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죽음의 소용돌이‘를 세 번이나 겪는다. 악어의 공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생존한플럼우드는 만물의 주인으로 군림해 온 인간이 먹이로 전락한 사건 속에서 일종의 환영을 발견한다. - P101

김경채, 일본인이 되는 문제
식민지라는 극단의 시공간은 마음을 증명하고 판단하는 일이 권력 및 권리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한국과 일본을 지우고 질문을 이렇게 - P123

바꿔 보자.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에 대한 판단을 멈출수 있을까? 마음을 확신할 수 없는 데서 비롯되는 의심과 불안을 견디고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을까? 이것은결코 아름다운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 생명에의 위협을 감수하고도 언젠가 나에게 총구를 겨눌지도 모르는 타자의 존재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급진적인 물음이다. 나는 이런 물음들과 마주하는 것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국가 혹은 민족의 구심력에 대항하는 방법이라 믿는다. - P124

김민하, 정치에서 우정 찾기
모두가 자기는 책임지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면서 남의 말에는 책임을 지우는 게 오늘날의 온라인 화법인 셈인데, 바로 이 점이 온라인상의 정치적 분쟁을 격화시키는 원인 중 하나다. 이게 대의민주주의에서 유권자가 정치를 인식하는 일반적 방식과 결합하면 부정적 효과는 배가된다. - P159

장현정, 바닷가 동네의 친구들
우정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렇게 말했다. "친구들의 도움 그 자체보다는 우리 친구들이 틀림없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그 확신이우리에게 더 도움이 된다." 인간은 불안과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나름의 믿음 체계를 구성해 왔다. 먼 옛날에는 종교가, 이후로 국가나 민족이, 요즘에는 돈이라는물신(物神)이 사람들을 불안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믿음 체계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종교나 민족이나 돈처럼 거대하거나 창백한 가치보다는 훨씬 구체적이고 살아 숨 쉬는 대상을 믿는다. 사람 말이다. - P178

추주희, ‘호구’가 되는 우정
이후 나는 도시의 공동 주거 경험과 또래 관계에서 새로운 친밀성과돌봄의 지형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팸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팸은 가출이 장기화되거나 가족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탈가정 청소년들이 주거와 생활비를 해결하기위해 또래들과 함께 사는 방식이다. 가출한 후에 생계와 안전 그리고 정서적 유대를 도모하는 유일한 자구책인 셈이다. 그만큼 쉽게 해체되기도 한다. - P188

때때로 어떤 팸은 조건 만남이나 마약성 물품 판매 등 불법적인 일을 하면서 유지된다. 그러한 불법적인 일로 현재의 삶을 돌보는 관계를 유지한다. 삶의 불법성과 돌봄의 필요성이 교차하는 관계에서 분명한 것은 서로를 돌보는 과정이 의미 있는 삶의 순간으로 경험된다는 점이다. 진짜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관계, 어쩌면 폭력성이 가장 먼저 두드러지는 관계에서돌봄과 친밀성이 구성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영지와 그 팸 구성원은 서로 마땅히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팸에서 돌보는 자, 그러니까 호구를 일방적으로 - P198

착취당하는 피해자로만 보면 돌봄과 친밀성의 관계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돌봄과 폭력은 의존관계에서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물론 폭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폭력 속에서도, 폭력을 뚫어 내고서 팸 생활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이유를 돌이켜 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들은 원가족을 벗어나서 새로운 가족 실천을 통해 자신이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함께 살 것인지를 매번 몸소 부딪혀서 배우고 결정해 간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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