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에서 우편이 왔다. 1년간 휴간을 한다는 소식이다. 지난주에 온 181호를 아직 펼쳐보지 않아 몰랐다. 181호에도 휴간 소식이 안내되어 있었는데;;
10년 동안 녹색평론 정기구독 할까 고민만 하다 올해 초에 다른 잡지 대신 정기구독을 결정한 무식한 초보 구독자로서 망연자실이다. 부디 1년 간의 휴지기간 이후 다시 만나기를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기후변화는 지구라는 기계가 고장이 나서 나타나는 이상 징후가 아니다. 지구라는 유기체가 형평성(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질서를 회복하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 P3

《녹색평론》은 지난 30년에 걸쳐서 우리의 생태적·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날 유일하게 건강한 길은 농업 중심 사회의 재건이라고 말해왔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추구해온 방법, "대규모의 산업시스템속에서 일자리와 생계를 구하는 것"을 단호히 그만두고, "소규모의 지역중심, 자립적 생산·생활 협동체들을 광범하게 만들어나가고, 그 틀 속에서 태양에너지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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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백석 시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안도현 시인의 시집 제목으로 잘 알려진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시구가 포함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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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에서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취약점이 문제를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다루지 않고 중간에 덮어 버린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자살로 너무나 손쉽게 마무리가 되고 있는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유럽 소설들에도 그런 작품들이 여럿 있다. 어떤 문제를 중편 규모로 다루는 방식과 장편으로 다루는 방식이 있는데, 장편으로 다루려면 일단 전지적 시점을 취해야 한다. 1인칭 시점으로는 제한적이기 때문에 장편 규모로 확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한국작가들이 전지적시점의 작품을 잘 못 쓰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까지 갖게 된다. - P157

강석경은 이화여대 조소과 출신인데, 이대 출신이라는 것과 미대출신이라는 것, 두 가지가 다 의미가 있다. 뭘 쓸 것인지, 어떻게 쓸것인지가 대충 가늠이 된다. 강석경은 토마스 만을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토마스 만은 시민성과 예술성의 대립, 시민과 예술가의 대립이라는 주제를 주로 다뤘다. 《토니오 크뢰거》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시민과 예술가라는 주제를 다루려는 모든 작가들은 토마스 만을 표준으로 삼는다. 시민과 예술가의 긴장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면 좋은작품이 나온다. 《숲속의 방>도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 P159

그런 시기를 배경으로 여성적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파고든다. 《나목》에서 예술가성을 상징하는 박수근은, 박완서가 시민성으로 안착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기도 하다. 그 방향으로 넘어가려면, 자기 안에 있는 예술적 자아를 포기하거나 부정해야 한다. 예술가성을 계속 품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성적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이고, 정신분석에서 $로 표시하는 거세된 주체의 공식이다. 이런 거세 과정을 통해서 주체가 된다. - P161

가고 싶으면 가면 된다는, 불가능이 없는 조건에서는 소설이 나오지 않는다. 시는 나올 수가 있지만, 소설은 원리상 현실의 하중이 없으면 나오지 않는다. 현실세계의 압력이 있고 거기에 맞서서 투쟁하는 과정이 바로 소설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 P171

세계 인구가 70억 명이라면 나의 가치는 고작 70억 분의 1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나는 유일하다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인격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이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70억 각자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타인에 대한 배려도 가능하다. 그런데 소양은 그런 의식까지는 가지 못한다. ‘섬‘이라는 것은 자기애적 만족에서 그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단계에서 빠져나와야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남녀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학습했던 경험과 막상 일상에서 부딪히는 현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공지영의 세대는 그러한 충돌을 경험한 첫 세 대다. 그것을 작품화했다는 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시대사적 의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도 시대적 지표가 되는 중요한 시집이다. 문학적으로 중요하다기보다 정확하게 이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후일담 시집‘이다. 달리 말해 최영미의 시는 공지영의 시 버전이다. - P197

공지영은 작품 안에서 남편들의 이중성을 이야기하지만, 실은 어머니의 이중성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딸들에게는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아들들에게는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도기로서 1990년대가 내포하는 문제이다. 이 세대는 이러한 변화를 몸으로 겪은 첫 세대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것은 그 이전 세대도 겪은 것을 똑같이 반복한 것이 아니다. 이들의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어머니 세대의 삶이 할머니 세대와 비슷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1980년대를 통과하면서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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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은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직·간접적으로 갖게 된 문제의식일 텐데, 1960년대 초반에 "여자는 전체로 보아서 아직도 하인의 신분에 있으며 "그 결과 여성은 자기로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성으로부터 이렇다고 정해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하게 된다"고 쓰고 있다. - P92

요즘은 드물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전혜린 문학이다. 다만 전혜린 문학은 이런 강한 면모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정서적으로 취약한 부분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표시되어야 하는 어떤 자리라고 생각한다. 한국문학이 결여하고 있는 부분을 온전하게 결여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 P96

특이한 것은 독자도 여기에 반응했다는 점이다. 이런 과감한 생략에 공감한 것이다. 이 두 시대를 부담스러워하는 대중적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괄호에 넣고자 하는, 그래서 없어도 되는 것으로 날려 버리는 것이 바로 1990년대적인 현상의 핵심이다. 1990년대 독자들의 무의식이 작가와 공모한 것이다. 1970년대는 박정희 정권으로 1972년부터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될 때까지 유신체제 하에 있었다. 이어서 1980년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 서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1987년까지 뜨거운 시대를 보냈다. 이것이 왜 아무 의미가 없는가. 이 시대가 주인공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 것처럼 처리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적이지 않다. 그저 편의적으로 그렇게 보고 싶어 한 것뿐인데, 그 점이 독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 P222

1990년대에 문학의 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가 ‘욕망‘ 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1980년대 문학에서는 욕망이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도 않고, 따라서 키워드도 될 수 없었다. 1990년대 중반쯤에 프로이트 전집이 번역되어 나온 것도 이러한 흐름과 맞물려 있다. 집단이나 민족, 사회주의 같은 거창한 이념이 있던 자리를 개인주의가 대신한다. 그래서 개인의 재발견이나 욕망의 재평가 등이 이론적인 차원에서 주목받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 조응해서 문학 쪽에서는 문학동네 같은 출판사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이 출판사의 간판작품으로 떠오른다. - P224

정확히 똑같은 내용이 러시아작가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1840년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에도 나온다. 남자 주인공이 "내 안에 두 명의 나가 있다. 보여지는 나가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가 있다" 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불행한 의식을 갖게 한다. 이것이 근대적 개인이다. 러시아문학에서 처음 탄생한 근대적 개인이 이 소설을 통해서였다. 프랑스문학에서는 그보다 조금 앞서 그런 주인공이 등장한다. 스탕달의 1830년 작품 《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앵 소렐이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행동하고 있는데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나‘가 있다. 이것이 근대적 주인공의 기본형이다. - P235

또한 1970~1980년대에 괄호를 치는 기본 전략을 통해, 1980년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덮어 버리는 소설이다. 하지만 덮어 버린다고 덮이는 것이 아니다. 결국 다시 삐져나오게 된다. 우리가 해결하거나 관통해 가야 하는 시대적 과제로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1960년대 후반의 불안과 1990년대의 환멸을 겹쳐놓으면서 성장 불가능성을 현시하지만, 이것이 면죄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성장 불가능한 시대를 산 것이 아니라 책임을 떠안지 않으려고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243

<엄마를 부탁해》가 출간된 2008년에는 미국발 국제금융위기가 한국에도 여파를 미쳤다. 그런 상황이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독자들의 무의식을 자극하게 된다.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철저하게사회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문학적인 성취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저주받은 걸작이 생겨나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 최대의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이 작품을 판단할 때의 참고사항이긴 하지만 오히려 작품 이해에 장애가 되는 면이기도 하다. 반면에 그런 사회적 배경을 제쳐 놓고 이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짚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 P254

한국문학에서 근대 사회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불만이다. 여성작가들의 경우 대부분 그렇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는 발생사적인 의의는 근대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데 있다. 그것이 근대소설의 본질이다. 한국에서는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기는 해도 근대와 정면 대결하는 작품이 희소하다. 그렇게 근대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을 ‘신파‘라고 하는데, 그 원조는 일본이다. 일본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나오는 가정소설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 P256

쿤데라도 이야기했듯, 소설의 미덕은 인생의 본질에 대해, 실존의 비밀에 대해 뭔가 더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 작품이 무엇을 더 알게 해주는가. 이미 아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더 알게 해주는 것은 없어 보인다. 엄마가 이런 존재라는 것은 이 소설을 읽기 전에도 다들 알고 있다. 그저 이 소설을 통해서 한 번 더 확인할뿐이다. 작가가 초점을 두고 이야기하는 엄마의 비밀이라는 것도 싱겁다. 쿤데라에 따르면 이런 소설은 부도덕하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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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소설의 주인공은 내면을 갖고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내면을 갖고 있는 인간은 재 보고 판단한다. 그래서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여준다. 알고리즘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두 단계 갔다가 바로 결론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이것도 생각해 보고 저것도 생각해 보느라 복잡해진다. 이 작품에는 그런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용빈이 그런 인물에 가까운 후보인데, 용빈이라는 인물을 충분히 발전시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P46

이것은 이 작품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학이 전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단편에 비해 장편이 취약한 것도 그래서이다. 단편은 짧기 때문에 티가 덜 나지만 장편으로 늘리게 되면 농도가 분량을 감당 못 해서, 마치 희석주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전반적으로 한국작가들이 장편에 대한 감이 부족하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계속된 고질적인 문제다. 단편으로만 트레이닝을 하고 장편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장편은 돈벌이로 쓰는 것으로 생각했다. - P49

우리는 좋은 소설을 쓰거나 읽으려고 할 때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숙명론은 소설과 양립하기 어렵다. 루카치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구 "나는 나의 영혼을 증명하기 위해서 떠난다 I go to prove my soul"를 《소설의 이론》의 제사題辭로 삼았다. 이것이 소설이다. 당장 운명론과 충돌한다. 운명론에서는 떠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해 알고 싶다면 철학관에 가면 된다. 여기서 자기 운명을 증명한다는 것은 시험해 보는 것이다.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관에서 소설이 탄생한다. 그것이 근대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단순한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런데 한국적인, 토속적인, 전통적인 세계관은 이런 소설적 세계관과 맞지 않는다. - P57

이육사나 윤동주의 시쯤에 와서야 근대성으로 넘어온다. 이들의 시에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갈등이 있고 고뇌가 있다. 윤동주만 하더라도 시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다고 쓴다. <진달래꽃>의 세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 민요 아리랑의 세계인데 ‘날 두고 떠나면 발병이나 나라‘ 하는 세계다. 내가 뭘 하겠다는 것이 없다. 더 적극적으로 못 가게 발목을 부러뜨리든가 하는 게 아니라, 자기는 가만히 있고 발병이나 나라고 비는 그런 세계다. 이것이 전근대적인 세계다. 시에서도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 정신을 그리기 때문에, 더 나아가면 정신의 내부 분열을 보이기도 한다. 윤동주의 시도, 이상의 시도 그렇다. 이상의 <거울> 같은 시에도 자기분열이 드러난다. 이런것이 근대시다. 소설은 이것을 더 큰 스케일로 보여주는 것이다. - P59

한국문학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이런 것을 혐오한다. 항상 본래적 가치가 있고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왜곡되고 변질된 가짜가 있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가치와 변질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 소설을 쓰지 못한다. 근대에는 잘 맞지 않는다. 이원적 가치가 전면화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근대이기 때문에 이것을 비판하고 극복하려면 우회해서는 안 되고 통과해 가야 한다. 이것을 통과해 갔을 때라야 뭔가가 보인다. 멀찌감치 피해 가서 과연 이것을 넘어선 다른 지평을 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 P63

작품 자체가 중요하지 않아서 평가가 애매하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삶과 문학과의 관계에서 삶 자체가 문학이 되기도 한다. 전혜린은 그런 경우다. <전혜린이라는 텍스트〉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무엇을 쓰지 않았더라도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이다. 그래서 전혜린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읽을 수 있다. 이것도 다양한 문학관 가운데 하나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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