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소설의 주인공은 내면을 갖고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내면을 갖고 있는 인간은 재 보고 판단한다. 그래서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여준다. 알고리즘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두 단계 갔다가 바로 결론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이것도 생각해 보고 저것도 생각해 보느라 복잡해진다. 이 작품에는 그런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용빈이 그런 인물에 가까운 후보인데, 용빈이라는 인물을 충분히 발전시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P46
이것은 이 작품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학이 전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단편에 비해 장편이 취약한 것도 그래서이다. 단편은 짧기 때문에 티가 덜 나지만 장편으로 늘리게 되면 농도가 분량을 감당 못 해서, 마치 희석주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전반적으로 한국작가들이 장편에 대한 감이 부족하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계속된 고질적인 문제다. 단편으로만 트레이닝을 하고 장편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장편은 돈벌이로 쓰는 것으로 생각했다. - P49
우리는 좋은 소설을 쓰거나 읽으려고 할 때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숙명론은 소설과 양립하기 어렵다. 루카치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구 "나는 나의 영혼을 증명하기 위해서 떠난다 I go to prove my soul"를 《소설의 이론》의 제사題辭로 삼았다. 이것이 소설이다. 당장 운명론과 충돌한다. 운명론에서는 떠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해 알고 싶다면 철학관에 가면 된다. 여기서 자기 운명을 증명한다는 것은 시험해 보는 것이다.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관에서 소설이 탄생한다. 그것이 근대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단순한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런데 한국적인, 토속적인, 전통적인 세계관은 이런 소설적 세계관과 맞지 않는다. - P57
이육사나 윤동주의 시쯤에 와서야 근대성으로 넘어온다. 이들의 시에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갈등이 있고 고뇌가 있다. 윤동주만 하더라도 시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다고 쓴다. <진달래꽃>의 세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 민요 아리랑의 세계인데 ‘날 두고 떠나면 발병이나 나라‘ 하는 세계다. 내가 뭘 하겠다는 것이 없다. 더 적극적으로 못 가게 발목을 부러뜨리든가 하는 게 아니라, 자기는 가만히 있고 발병이나 나라고 비는 그런 세계다. 이것이 전근대적인 세계다. 시에서도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 정신을 그리기 때문에, 더 나아가면 정신의 내부 분열을 보이기도 한다. 윤동주의 시도, 이상의 시도 그렇다. 이상의 <거울> 같은 시에도 자기분열이 드러난다. 이런것이 근대시다. 소설은 이것을 더 큰 스케일로 보여주는 것이다. - P59
한국문학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이런 것을 혐오한다. 항상 본래적 가치가 있고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왜곡되고 변질된 가짜가 있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가치와 변질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 소설을 쓰지 못한다. 근대에는 잘 맞지 않는다. 이원적 가치가 전면화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근대이기 때문에 이것을 비판하고 극복하려면 우회해서는 안 되고 통과해 가야 한다. 이것을 통과해 갔을 때라야 뭔가가 보인다. 멀찌감치 피해 가서 과연 이것을 넘어선 다른 지평을 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 P63
작품 자체가 중요하지 않아서 평가가 애매하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삶과 문학과의 관계에서 삶 자체가 문학이 되기도 한다. 전혜린은 그런 경우다. <전혜린이라는 텍스트〉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무엇을 쓰지 않았더라도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이다. 그래서 전혜린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읽을 수 있다. 이것도 다양한 문학관 가운데 하나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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