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동네 의사는 서른두 살, 덩치가 크고 뚱뚱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닮았다.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비칠비칠 취해 진찰실에 나타난 터라, 우스웠다. 치료를 받으며 나는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의사도 키득키득 웃기 시작해,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둘이서소리를 맞춰 한바탕 웃었다. - P10
8월의 끝, 나는 아름다운 걸 보았다. 아침에 의사 집 툇마루에서 신문을 읽고 있자니, 내 옆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부인이, "아아, 기쁜가봐요!" 나직이 살짝 속삭였다. 문득 얼굴을 들자 바로 눈앞의 샛길을, 원피스를 입은 청결한 모습이 살랑살랑 뛰다시피 걸어갔다. 하얀파라솔을 빙글빙글 돌렸다. "오늘 아침, 허락이 났거든요." 부인은 다시, 속삭인다. 삼 년, 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가슴이 벅찼다. 세월이 갈수록, 나는 그 여성의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그건 의사 부인이 뒤에서 조종했을지도 모른다. - P12
벚나무와 마술피리
들도 산도 온통 신록, 알몸인 채로 있고 싶어질 만치 따듯하고, 나는 신록이 눈부셔 눈이 따끔따끔 아픈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모노 허리춤에 한 손을 살짝찔러 넣고 고개를 숙인 채 들길을 걸었습니다.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것, 죄다 괴로운 것들뿐이라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몸부림치면서 걸었습니다. 퍼엉, 퍼엉, 봄의 땅 깊디깊은 밑바닥에서, 마치 극락정토에서 울려 나오듯 희미한, 그러나 무섭도록 우렁우렁한,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엄청나게 큼지막한 북을 두드려 대는 듯 무시무시한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오는데, 나는 그 무서운 - P17
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정말로 이제 내가 미쳐 버린게 아닐까 생각하니 그대로 몸이 굳어지며 선 채 꼼짝을 못 했습니다. 느닷없이 아악! 하고 큰 소리가 터져 나와, 서 있을 수도 없이 털썩 풀밭에 주저앉아, 실컷 울어버렸습니다. - P18
달려라 메로스
탁류는 메로스의 외침을 코웃음 치듯, 더욱더 거세게 미쳐 날뛴다. 파도는 파도를 삼키고, 소용돌이치고, 세차게 펄럭이는데, 시간은 째깍째깍 사라져 간다. 급기야 메로스도 각오했다. 헤엄치는 수밖에 없어! 아아, 여러신이여! 굽어살피소서! 탁류에도 굽히지 않는 사랑과 진심의 위대한 힘을, 지금이야말로 발휘해 보이겠어. 메로스는 첨벙! 물살에 뛰어들어, 백 마리 구렁이처럼 몸부림치며 사납게 날뛰는 파도를 상대로, 필사적인 투쟁을 개시했다. 온몸의 힘을 팔에 쏟아, 밀려들며 소용돌이치고 잡아당기는 물살을, 뭘! 요까짓 일쯤이야! 헤치고 헤치며, 무턱대고 성난 사자처럼 무섭게 분투하는 인간 아들의 모습에, 신도 가엾다 여겼는지, 마침내 연민을 내려 주셨다. 휩쓸려 떠내려가면서도, 멋들어지게, 건너편 강기슭의 수목 줄기에, 매달릴 수 있었다. 고마워라! - P39
"세리눈티우스!" 메로스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했다. "나를 때려! 아주 힘껏 뺨을 때려!나는, 도중에 한 번, 나쁜 꿈을 꾸었어. 네가 만약 나를 때려주지 않는다면, 난 너와 포옹할 자격조차 없어. 때려!" 세리눈티우스는, 모든 걸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형장 가득 울려 퍼질 정도로 소리 나게 메로스의 오른쪽 뺨을 갈겼다. 때리고 나서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메로스! 나를 때려! 똑같이 소리 나게 내 뺨을 때려! 나는 요 사흘 동안, 딱 한 번, 슬쩍 너를 의심했어. 태어나서, 처음 너를 의심했어. 네가 나를 때려 주지 않으면, 난 너와 - P46
포옹할 수 없어!" 메로스는 팔에 한껏 힘을 실어 세리눈티우스의 뺨을 때렸다. "고맙다! 친구여!" 두 사람은 동시에 말하며, 서로 꽉 끌어안고서, 기쁜 나머지 엉엉 목 놓아 울었다. - P47
기다리다
나는 인간을 싫어해요. 아니에요, 무서워요.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별일 없으세요? 추워졌네요! 어쩌고 내키지 않는 인사를 건성으로 하노라면, 어쩐지 나만한 거짓말쟁이가 전 세계에 없을 것 같은 괴로운 심정에 죽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또 상대방도 무턱대고 나를 경계하여, 해도 안 해도 그만인 입에 발린 말이며 거드름 피우는 거짓 감상 따위를 늘어놓습니다. 나는 그걸 듣고 상대방의 쩨쩨한 조심성이 슬퍼서, 한층 세상이 싫고 싫어져 참을 수가 없습니다. - P76
비용의 아내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저는 무엇하나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웃으며 손님의 음란한 농담에 덩달아 장단을 맞추고 훨씬 더 천박한 농담으로 맞받아치고, 손님에게서 손님으로 미끄러지듯 술을 따르며 돌아다니고, 그러는 사이 저의 이 몸이 아이스크림처럼녹아 흘러 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 P109
남편은 말없이 다시 신문에 눈길을 쏟고, "야아! 또 내 험담을 써 놨군. 에피큐리언 가짜귀족이라잖아. 이건 틀렸어. 신을 두려워하는 에피큐리언, 이렇게라도 말하면 좋을 텐데. 삿짱, 보라고! 여기 나를 가리켜 비(非)인간 어쩌고 써 놨잖아. 그건 아니지! 난 지금에야 말하는데, 지난해 세밑에 말이야, 여기서 5000엔 갖고 나간 건, 삿짱하고 아이에게, 그 돈으로 오랜만에 멋진 설날을 보내게 해 주고 싶어서였어요! 비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짓도 저지르는 거예요." 저는 딱히 기쁘지도 않고, "비인간인들 뭐 어때서요? 우린, 살아 있기만 하면 돼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 P121
포스포렛센스
어머니의 말투를 봐선 거의 몽상가나 다름없는 수준이고, 딸은 그 몽상을 깨뜨리는 이른바 현실주의자같은 얘길 하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실제론 그 꿈의 가능성을 추호도 믿지 않는 까닭에 그런 몽상을 쉽사리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그걸 허둥지둥 부정하는 딸 쪽이, 어쩌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허둥지둥 부정하는 것이려니 싶다. 세상의 현실주의자, 몽상가의 구별도 이처럼 착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다고, 요즘 내겐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 P126
미남자와 담배
아아! 살아간다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야. 특히 남자는 괴롭고 슬프지. 아무튼 무엇이든 싸워서, 그리고 이겨야만 하니까요. - P139
그 분한 울음을 운 날부터 며칠 후, 어느 잡지사의 젊은 기자가 와서 제게 묘한 말을 했습니다. "우에노의 부랑자를 보러 가지 않을래요?" "부랑자?" "네, 함께한 사진을 찍고 싶어서요." "내가, 부랑자와 함께한?" "그렇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합니다. 어째서, 특히 저를 선택했을까요? 다자이 하면, 부랑자. 부랑자 하면, 다자이. 뭔가 그러한 인과 관계라도 있는 걸까요? "가겠습니다." 저는 울상을 짓고픈 심정일 때, 도리어 반사적으로 상대방에게 맞서는 성벽을 지닌 모양입니다. - P140
발레리의 말 - 선을 행할 경우에는 언제나 사과하면서 해야만 한다. 선만큼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건 없으니까. - P143
한 가지 더, 우스개를 덧붙이련다. 그 두 장의 사진이 도착했을 때 나는 아내를 불러, "이들이, 우에노의 부랑자야." 일러 주었더니, 아내는 진지하게, "아, 이들이 부랑자인가요?" 말하며 찬찬히 사진을 보았는데, 문득 나는 그 아내가 응시하고 있는 데를 보고 깜짝 놀라, "당신은 무얼 착각해서 보고 있나? 그건 나야! 당신 남편이잖아! 부랑자는 저쪽이야." 아내는 지나칠 정도로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로, 농담 따위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진심으로 내 모습을 부랑자로 잘못 본 듯하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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