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동네 의사는 서른두 살, 덩치가 크고 뚱뚱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닮았다.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비칠비칠 취해 진찰실에 나타난 터라, 우스웠다. 치료를 받으며 나는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의사도 키득키득 웃기 시작해,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둘이서소리를 맞춰 한바탕 웃었다. - P10

8월의 끝, 나는 아름다운 걸 보았다. 아침에 의사 집 툇마루에서 신문을 읽고 있자니, 내 옆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부인이,
"아아, 기쁜가봐요!" 나직이 살짝 속삭였다.
문득 얼굴을 들자 바로 눈앞의 샛길을, 원피스를 입은 청결한 모습이 살랑살랑 뛰다시피 걸어갔다. 하얀파라솔을 빙글빙글 돌렸다.
"오늘 아침, 허락이 났거든요." 부인은 다시, 속삭인다.
삼 년, 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가슴이 벅찼다. 세월이 갈수록, 나는 그 여성의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그건 의사 부인이 뒤에서 조종했을지도 모른다. - P12

벚나무와 마술피리

들도 산도 온통 신록, 알몸인 채로 있고 싶어질 만치 따듯하고, 나는 신록이 눈부셔 눈이 따끔따끔 아픈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모노 허리춤에 한 손을 살짝찔러 넣고 고개를 숙인 채 들길을 걸었습니다.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것, 죄다 괴로운 것들뿐이라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몸부림치면서 걸었습니다. 퍼엉, 퍼엉, 봄의 땅 깊디깊은 밑바닥에서, 마치 극락정토에서 울려 나오듯 희미한, 그러나 무섭도록 우렁우렁한,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엄청나게 큼지막한 북을 두드려 대는 듯 무시무시한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오는데, 나는 그 무서운 - P17

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정말로 이제 내가 미쳐 버린게 아닐까 생각하니 그대로 몸이 굳어지며 선 채 꼼짝을 못 했습니다. 느닷없이 아악! 하고 큰 소리가 터져 나와, 서 있을 수도 없이 털썩 풀밭에 주저앉아, 실컷 울어버렸습니다. - P18

달려라 메로스

탁류는 메로스의 외침을 코웃음 치듯, 더욱더 거세게 미쳐 날뛴다. 파도는 파도를 삼키고, 소용돌이치고, 세차게 펄럭이는데, 시간은 째깍째깍 사라져 간다. 급기야 메로스도 각오했다. 헤엄치는 수밖에 없어! 아아, 여러신이여! 굽어살피소서! 탁류에도 굽히지 않는 사랑과 진심의 위대한 힘을, 지금이야말로 발휘해 보이겠어. 메로스는 첨벙! 물살에 뛰어들어, 백 마리 구렁이처럼 몸부림치며 사납게 날뛰는 파도를 상대로, 필사적인 투쟁을 개시했다. 온몸의 힘을 팔에 쏟아, 밀려들며 소용돌이치고 잡아당기는 물살을, 뭘! 요까짓 일쯤이야! 헤치고 헤치며, 무턱대고 성난 사자처럼 무섭게 분투하는 인간 아들의 모습에, 신도 가엾다 여겼는지, 마침내 연민을 내려 주셨다. 휩쓸려 떠내려가면서도, 멋들어지게, 건너편 강기슭의 수목 줄기에, 매달릴 수 있었다. 고마워라! - P39

"세리눈티우스!" 메로스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했다. "나를 때려! 아주 힘껏 뺨을 때려!나는, 도중에 한 번, 나쁜 꿈을 꾸었어. 네가 만약 나를 때려주지 않는다면, 난 너와 포옹할 자격조차 없어. 때려!"
세리눈티우스는, 모든 걸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형장 가득 울려 퍼질 정도로 소리 나게 메로스의 오른쪽 뺨을 갈겼다. 때리고 나서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메로스! 나를 때려! 똑같이 소리 나게 내 뺨을 때려! 나는 요 사흘 동안, 딱 한 번, 슬쩍 너를 의심했어. 태어나서, 처음 너를 의심했어. 네가 나를 때려 주지 않으면, 난 너와 - P46

포옹할 수 없어!"
메로스는 팔에 한껏 힘을 실어 세리눈티우스의 뺨을 때렸다.
"고맙다! 친구여!" 두 사람은 동시에 말하며, 서로 꽉 끌어안고서, 기쁜 나머지 엉엉 목 놓아 울었다. - P47

기다리다

나는 인간을 싫어해요. 아니에요, 무서워요.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별일 없으세요? 추워졌네요! 어쩌고 내키지 않는 인사를 건성으로 하노라면, 어쩐지 나만한 거짓말쟁이가 전 세계에 없을 것 같은 괴로운 심정에 죽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또 상대방도 무턱대고 나를 경계하여, 해도 안 해도 그만인 입에 발린 말이며 거드름 피우는 거짓 감상 따위를 늘어놓습니다. 나는 그걸 듣고 상대방의 쩨쩨한 조심성이 슬퍼서, 한층 세상이 싫고 싫어져 참을 수가 없습니다. - P76

비용의 아내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저는 무엇하나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웃으며 손님의 음란한 농담에 덩달아 장단을 맞추고 훨씬 더 천박한 농담으로 맞받아치고, 손님에게서 손님으로 미끄러지듯 술을 따르며 돌아다니고, 그러는 사이 저의 이 몸이 아이스크림처럼녹아 흘러 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 P109

남편은 말없이 다시 신문에 눈길을 쏟고,
"야아! 또 내 험담을 써 놨군. 에피큐리언 가짜귀족이라잖아. 이건 틀렸어. 신을 두려워하는 에피큐리언, 이렇게라도 말하면 좋을 텐데. 삿짱, 보라고! 여기 나를 가리켜 비(非)인간 어쩌고 써 놨잖아. 그건 아니지! 난 지금에야 말하는데, 지난해 세밑에 말이야, 여기서 5000엔 갖고 나간 건, 삿짱하고 아이에게, 그 돈으로 오랜만에 멋진 설날을 보내게 해 주고 싶어서였어요! 비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짓도 저지르는 거예요."
저는 딱히 기쁘지도 않고,
"비인간인들 뭐 어때서요? 우린, 살아 있기만 하면 돼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 P121

포스포렛센스

어머니의 말투를 봐선 거의 몽상가나 다름없는 수준이고, 딸은 그 몽상을 깨뜨리는 이른바 현실주의자같은 얘길 하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실제론 그 꿈의 가능성을 추호도 믿지 않는 까닭에 그런 몽상을 쉽사리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그걸 허둥지둥 부정하는 딸 쪽이, 어쩌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허둥지둥 부정하는 것이려니 싶다.
세상의 현실주의자, 몽상가의 구별도 이처럼 착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다고, 요즘 내겐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 P126

미남자와 담배

아아! 살아간다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야. 특히 남자는 괴롭고 슬프지. 아무튼 무엇이든 싸워서, 그리고 이겨야만 하니까요. - P139

그 분한 울음을 운 날부터 며칠 후, 어느 잡지사의 젊은 기자가 와서 제게 묘한 말을 했습니다.
"우에노의 부랑자를 보러 가지 않을래요?"
"부랑자?"
"네, 함께한 사진을 찍고 싶어서요."
"내가, 부랑자와 함께한?"
"그렇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합니다.
어째서, 특히 저를 선택했을까요? 다자이 하면, 부랑자. 부랑자 하면, 다자이. 뭔가 그러한 인과 관계라도 있는 걸까요?
"가겠습니다."
저는 울상을 짓고픈 심정일 때, 도리어 반사적으로 상대방에게 맞서는 성벽을 지닌 모양입니다. - P140

발레리의 말 - 선을 행할 경우에는 언제나 사과하면서 해야만 한다. 선만큼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건 없으니까. - P143

한 가지 더, 우스개를 덧붙이련다. 그 두 장의 사진이 도착했을 때 나는 아내를 불러,
"이들이, 우에노의 부랑자야."
일러 주었더니, 아내는 진지하게,
"아, 이들이 부랑자인가요?"
말하며 찬찬히 사진을 보았는데, 문득 나는 그 아내가 응시하고 있는 데를 보고 깜짝 놀라,
"당신은 무얼 착각해서 보고 있나? 그건 나야! 당신 남편이잖아! 부랑자는 저쪽이야."
아내는 지나칠 정도로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로, 농담 따위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진심으로 내 모습을 부랑자로 잘못 본 듯하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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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은 이제 거의 다 맞춰졌다. 내 서툰 손가락으로 맞춰보려했을 때 끝내 안 되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레베카 이야기를 꺼냈을 때 프랭크의 태도는 어딘가 어색했다. 비어트리스는 머뭇거리는 듯하면서도 부정적이었다. 공감과 슬픔으로만 받아들였던 침묵이 실은 수치심과 당혹스러움에서 나온 것이었다니.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스스로의 벽을 깨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걸까. 그리하여 진실 앞에 눈감아버리는 아둔함은 얼마나 높고 거대한, 뒤틀린 장벽을 쌓게 되는 것일까. 나도 바로 그런 행동을 했다. 마음속에 잘못된 그림을 그리고 그 앞에 그저 앉아만 있었다. 진실을 알아내려는 용기가 없었다. 내가 한 걸음만 나아갈 수 있었다면 맥심은 넉 달전, 아니 다섯 달 전에 이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을 텐데. - P429

전과 똑같은 나였지만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점이 있었다. 불안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웠던 것이다. 더 이상 레베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좋았다. - P443

때때로 이런저런 말도 했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그림자는 없었다. 침묵했던 순간은 침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주변 상황이 그토록 암울한데 어쩌면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묘한 행복이었다. 내가 꿈꾸거나 기대했던 행복은 아니었다. 홀로 있는 시간에 상상했던 행복은 아니었다. 열정에 들뜨거나 급박함이 어려 있는 행복은 아니었다. 그것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행복이었다. 서재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우리는 이야기하거나 서로를 애무하지 않을 때면 어두운 밤하늘을 내다보았다. - P448

그 순간 맥심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에 처음으로 내 쪽을 본 것이다. 그 눈길에서 나는 작별의 의미를 읽었다. 마치 떠나가는 배 위에서 항구에 선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길 말이다. 그의 곁에, 그리고 내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어깨를 건드리기도 하겠지만 우리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람도 세고 거리도 멀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말을 하거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지 않는다. 배가 항구를 떠날 때까지 그는 내 눈을, 그리고 나는 그의 눈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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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페이지 이후 대반전~!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두 번 다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차를 마시며 내 쪽을 보고 미소 지었고 손잡이에 걸쳐져 있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 미소는 내가 얻어낸 보상이었다. 재스퍼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 보상이듯이 말 잘 듣는 개라면 만족하고 엎드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재스퍼가 되었다.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핫케이크를 한 장 집어 반으로 나눈 뒤 개들에게 주었다. 뭘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온몸의 기력을 소진한 듯 피곤했다. - P182

프리스가 식당을 나간 틈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즈를 가져오는 척하며 찬장 쪽으로 갔다. 그냥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나는 살짝 콧노래까지 불러야 했다. 멍청하고 병적인 행동, 신경쇠약 환자가 할 법한 행동이었다. 내가 원하는 정상적이고 행복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P186

하찮은 작은 일들,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지만 내게 있어 레베카는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난 정말이지 레베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맥심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함께 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그것 말고 아무런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머릿속에 꿈속에 레베카가 찾아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맨덜리의 손님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레베카가 다니던 곳을 걷고 쉬던 곳에 몸을 누이는 손님. 안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손님. 말 한마디 한마디, 물건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내게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 P211

"당신은 참으로 이상한 행동을 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당장 부인을 불러 ‘자, 이걸 복원할 수 있는지 알아봐요‘라고 말하면 그만이오. 조각을 긁어모아 서랍 안에 감추다니. 그건 안주인다운 처신이 아니오. 아까도 말했지만 견습 하나 할 짓이지."
"전 견습 하나 다름없는 존재예요. 여러 면에서 그렇죠. 아마 그래서 제가 클래리스와 잘 지내는지 몰라요. - P220

"당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됐소."
"아녜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야지요. 그렇게 생각하죠? 우린 행복하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손을 잡힌 채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목이 타들어가고 눈이 충혈되었다. 오, 하느님, 이건 마치 막이 내려지기 직전 두 배우의 모습 같잖아. 나는 생각했다. 이제 연극이 끝나면 관객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분장실로 가는 건가. - P225

맥심이 무사히 도착한 것을 확인했고 비스킷으로 배도 채웠으니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듯 해방감이 느껴졌다. 수업도 숙제도 없는 토요일을 맞이한 어린애처럼 말이다. 그런 날이면 애들은 내키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 낡은 스커트에 편한 신을 신고 이웃에 사는 친구와 신나는 술래잡기를 해도 좋다.
나도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맨덜리에 온 이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맥심이 런던에 갔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 자신도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가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지 않았나. 그런데 이토록 마음이가볍고 발걸음도 경쾌해지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어다니고 뒹굴고 싶은 아이 같은 기분이 되다니. 나는 입가의 비스킷 가루를 쓱쓱 닦으며 재스퍼를 불렀다. 날씨가 너무 좋아 기분이 이렇게 좋은걸 거야...... - P232

젊었을 때의 할머니는 어땠을까? 키 크고 잘생긴 부인이 주머니에 설탕을 넣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마구간을 누비는 모습이 그려졌다. 꽉 졸라맨 허리에 목깃이 높게 달린 옷을 입었겠지. 2시까지 마차를 준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는 다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할머니는 벌써 40년 전에 남편을 그리고 15년 전에는 아들을 떠나보냈다. 마침내 죽음이 찾아올 마지막 날까지 간호사와 함께 이 벽돌집에서 살아야 한다. 노인들의 심정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아이들이 어떤 두려움과 희망, 믿음을 가지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어제까지 아이였으니 기억이 생생한 것이다. 하지만 눈이 먼 채 숄을 두르고 저렇게 앉아 있는 맥심의 할머니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 걸까? 비어트리스가 하품을 하며 연신 시계를 보는 것을 알까? 우리가 그저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찾아온 것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자, 이걸로 석 달 동안은 양심의 가책을 안 받아도 돼‘라고 혼잣말하리라는 걸 알까?
가끔은 맨덜리를 떠올릴까? 내가 앉는 식당에 앉았던 것을 기억할까? 할머니 역시 밤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셨을까?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채 그저 조용하고 파리한 얼굴로 소소한 통증과 소소한 불편만 느끼는 것일까? 햇살이 따뜻하면 기뻐하고 바람이 차면 질색하면서? - P283

"처음 만났을 때 당신 얼굴에는 특별한 표정이 있었소. 지금도 그 표정이 있지.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그건 내가 당신과 결혼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요. 방금 당신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동안에는 그 표정이 사라졌소. 뭔가에 밀려난 거요."
"뭔가라니요? 그게 뭔데요?" 나는 또다시 물었다. - P312

오후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여행 짐을 다 싸고 열쇠까지 채운 뒤 출발을 기다릴 때처럼 말이다. 나는 뒤따라오는 재스퍼나 다를바 없이 허둥거리며 이방 저방을 오갔다. - P319

비어트리스는 말을 맺지 않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올케가 너무 딱하게 되어 어쩌나 올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
"제가 알아야 했어요." 나는 멍하니 비어트리스를 바라보았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알아야 했어요."
"아니야, 올케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우리 중 아무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었는걸. 그래서 그저 다들 충격을 받은 거야.너무 뜻밖의 일이라 맥심은………."
"네, 맥심은요?" - P334

내가 내려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대는 통에 비어트리스의 동정심이 사그라진 모양이었다. 나는 꽁무니를 빼고 만 것이다. 비어트리스는 이해 못 할 것이다. 나와는 다른 신분에 속해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존심이 있다. 나와는 다르다. 비어트리스가 나 같은 일을 겪었다면 아마 벌써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가 손님들을 맞았으리라. 자일스 옆에 서서 미소 지으며 악수를 했으리라. 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게는 자존심이 없으니까. 신분이 다르니까. - P338

맨덜리에서 내가 치른 첫 파티, 아니 처음이자 마지막 파티를 떠올려보면 가장무도회라는 커다란 캔버스가 아닌, 각각 동떨어진 작은 부분들만 기억이 난다. 기본 배경은 수많은 얼굴로 이루어진 흐릿한 바다였다.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또 영원히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단조로운 왈츠 음악도 있었다. 똑같아 보이는 남녀가 똑같은 미소를 짓고 똑같은 춤을 추며 차례로 눈앞을 지나갔다. 계단 아래에 맥심과 나란히 서서 늦게 도착한 손님들을 환영하는 내 눈에는 다들 보이지 않는 줄에 끌려 팔다리를 움직이고 빙빙 도는 꼭두각시 같았다. - P344

얼음 그릇을 떨어뜨리던 로버트의 모습도 기억난다. 임시로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로버트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을 때 프리스가 지었던 표정도 난 로버트 곁으로 가서 말해주고 싶었다. ‘네 기분을 알아. 이해할 수 있어. 난 너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었거든‘이라고 눈빛은 서글프더라도 안간힘을 다해 미소 짓던 느낌도 생생하다. 다정한 비어트리스는 파트너의 팔에 안겨 춤을 추면서도 내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용기를 불어넣으려 애썼지. 손목에서는 팔찌가 쩔렁거리고 베일은 뜨거워진 이마에서 계속 미끄러졌다. 기운을 짜내 자일스와 함께 온 방을 돌아다니며 춤추던 내 모습도 보인다. 걱정하는 빛이 그대로 드러나는 선량한 눈으로 내게 다가온 자일스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나를 이끌며 춤추는 것은 말 한마리를 끌고 다니는 것만큼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 P346

레베카, 레베카, 늘 레베카가 있다. 집 안을 걸을 때나, 어딘가에 앉을 때나,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꿈꿀 때조차도 레베카를 만나게 된다. 레베카의 겉모습까지 알게 되었다. 길고 가는 다리, 작고 좁은 발, 나보다 넓은 어깨, 능숙하게 움직이는 두 손 레베카는 그손으로 꽃꽂이를 하고 모형 배를 만들고 시집 속표지에 ‘맥스에게 레베카가‘라고 썼다. 달걀형의 작은 얼굴에 피부는 하얗고 검은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고 했지. 좋아하는 향수 냄새도 안다. 그 웃음소리와 미소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그 목소리는 구별해낼 것 같다. 레베카, 레베카. 어느 한순간도 레베카를 벗어날 수 없다.
내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듯 레베카도 날 벗어날 수 없겠지. - P361

그때로부터 스물네 시간이 흘렀다. 드레스 때문에 온갖 괴로움을 겪고 시달린 시간이었다.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라고 했던 내 말을 떠올리니 못 견디게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내 걱정과 달리 맥심이 떠나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테라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침착했다. 내가 아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간밤에 계단 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맥심은 멀리 가버리지 않았다. 그는 저 해변 어딘가에 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 P390

나는 홀로 나갔다. 재스퍼가 소리 내어 물그릇의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나를 보자 녀석은 꼬리를 흔들었고 다 마신 후에 겅중겅중 달려와 앞발로 내 치마를 건드렸다. 나는 재스퍼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테라스로 나가 앉았다.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고 나는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해묵은 내 두려움, 수줍음, 열등감 같은 것들은 이제 다 극복해내야 했다. 지금 실패하면 영원히 실패할 것이 뻔했다. 또 다른 기회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아프게 눌렀다. 그렇게 푸른 잔디밭과 테라스의 꽃봉오리를 바라보며 5분 정도 앉아 있었을까.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설 대령이 분명했다. 맥심에게 소식을 전하고 가버린 것이다. 나는 일어서서 천천히 홀을 가로질러 서재로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벤이 주었던 고둥이 잡혔다. 나는 그걸 꼭 쥐었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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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6-30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엄청 재밌죠!! >.<

햇살과함께 2022-07-01 11:40   좋아요 0 | URL
네~! 초반엔 이 것도 분위기만 내는 고딕소설인가?? 걱정하며 읽었는데, 중반 이후 몰입감 짱입니다!! 넷플릭스 영화도 봐야겠어요
 

행복은 획득하는 소유물이 아닌, 생각의 문제이고 마음의 상태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절망의 순간은 찾아온다. 하지만 시계로 잴 수 없는 시간이 영원으로 치달을 때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면서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함께 걸어간다는 것, 어떤 의견 차이도 우리 사이의 장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 P11

하지만 부인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구역을 마구 짓밟고 돌아다니는 머리 나쁜 염소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민망한 마음에 나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 P27

"텅 빈 집은 꽉 찬 호텔처럼 고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둘 다 냉정한 장소라는 거죠." 그는 다시 망설였다. 나는 그가 드디어 맨덜리 이야기를 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의 입을 막았고 결국 그는 성냥불을 불어 끄면서 의지의 빛도 꺼버렸다. - P42

그는 또 라일락을 좋아하냐고 물었던 것 같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선 라일락나무는 침실 창가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향기가 강하다면서 부지런한 현실주의자인 누님은 맨덜리에는 향기가 너무도 많다고, 그래서 취해버릴 수밖에 없다고 그에게 불평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인생 최초의 기억은 하얀 화병에 꽂힌 커다란 라일락 가지가 내뿜는 향기였던 것이다. - P51

첫사랑의 열병이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은 참 다행이다. 시인들이 어떻게 찬양하든 그건 분명 열병이고 고통이기 때문이다. 스물한 살의 나이는 용감하지 못하다. 겁이 많고 근거 없는 두려움도 많다. 쉽게 까지고 상처를 입어 가시 돋친 말 한마디를 견디지 못한다. 중년을 바라보면서 탄탄한 갑옷을 입은 지금에야 가시에 찔린 사소한 상처 같은 것을 가볍게 넘기고 곧 잊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남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오래도록 남아 고통스러운 낙인이 되고 어깨 너머 뒤돌아본 눈길 하나가 영원히 기억에 꽂히고 마는 것이다. - P56

곧 부인은 혼자서 침대칸에 앉아 떠나겠지. 그와 나는 호텔 식당에 앉아 미래를 계획하며 점심을 먹을 것이다. 대모험의 시작인 것이다. 부인이 가버리고 나면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함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해줄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는 시간이 없었다. 또 그런 말은 아무 때나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눈길을 들어 거울에 비친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마음을 고쳐먹고 행운을 빌어줄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고 용기를 북돋아줄 모양이었다. 하지만 부인은 모자 아래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계속 미소만 지었다. - P98

"물론 왜 그가 너랑 결혼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설마 그가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빈 저택의 공허함이 괴로운 나머지 그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까지 온 거야. 네가 들어오기 전에 자기 입으로 그 얘기를 하더구나. 도저히 혼자서는 거기서 살 수 없다고 말이야………" - P98

나는 맥심 팔에 몸을 기대고 그 소매에 얼굴을 묻은 채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내 손을 톡톡 치면서 비어트리스와 이야기를 했다.
‘이건 내가 재스퍼를 대할 때와 똑같잖아.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나는 재스퍼처럼 굴고 있어. 그는 생각날 때마다 나를 어루만지고 그럼 난 기분이 좋아지지. 그는 내가 재스퍼를 좋아하듯 나를 좋아하는 거야‘ - P158

비어트리스는 내 손을 잡고 얼굴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잘 있어요. 내가 무례한 질문을 너무 많이 했다면 잊어주고. 하지 말아야 할 말도 많이 해버렸네. 맥심도 말하겠지만 내가 워낙 생각 없이 떠드는 편이어서요. 아까도 말했지만 올케는 정말 내 예상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비어트리스는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휘파람을 불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레베카와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에요."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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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 아이 블루? 곰곰문고 101
브루스 코빌 외 지음, 조응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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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체성의 다름에 고민이 있거나, 아직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 있는 10대들이 주인공인 청소년 퀴어 단편 소설집이다. 이 책은 그런 청소년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 라고, ˝너도 곧 받아들이게 될 거야˝ 라고 말해주며 용기와 응원의 손길을 내미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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