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한 밤, 호수 앞에 선 젊은 사람.
겁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고 태연하게 섰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당겨진 양극의 줄고작 한 발짝으로 결정되는 삶과 죽음의 친밀함. 갖은 수모를 당하더라도, 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더러운 일들이 눈앞에서 행패를 부린다 해도, 자신이 아니라 부모 형제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고욕 한 번 하고 뒤로 물러선다면 그리 못 살 건 또 없지 않은가. 바라던 꽃길은 아니어도 이럭저럭 걸을 만한 작은 길이 뒤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똑똑한 청년이 모를 리 없다. 그것이 그를 더 괴롭힌다.
호수 위로 떨어진 나뭇잎이 바람에 휘청댄다. 그것이 마음 여린 사람에게는 재촉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밤이 가기 전에 너도 이제 그만 결정을 내리라는, - P284

닭터의 죽음에서 사는 것의 무용(無用)을 본 영일은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계절은 죽음을 향한 그의 망상을 더욱 부추겼다. 한번 내렸다 하면 폭설로 변하는 눈이 죽은 땅에 하얀 상복을 입히면, 어두운 옷깃에 머리를 파묻은 사람들은 무인(無人)의 관을 따라 장례 행렬에 나서는 조문객들이 되고, 빈 가지를 흔드는 겨울 휘파람은 우울한 만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달마다 정기검진을 받으러 현관을 나서던 영일은 함박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그대로 문턱에 앉아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눈으로 덮이도록 몇 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마당에 나왔다가 눈에 파묻히고 있는 시아버지를 본 유정이 깜짝 놀라 눈을 털어주며 왜 아직까지 병원에 가시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영일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발을 잡고 놓아주질 않으니 앞으론 병원에 못 가겄다…………. - P351

겨울이 다시 눈을 내렸다. 춘단은 일 년 전과 같은 자세로 여전히 코끼리를 두드렸다. 춘단은 파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거친 땅에서, 빈솥에서, 작은 동굴에서 먹을 것과 입을것과 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였다. 그러나 춘단은 컴컴한 밤에 홀로 코끼리를 두드렸다. 두드리고 두드리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앙상하게 철골만 있던 건물이 세상 무섭지 않은 탑으로 변신했다. 두드리고 두드리다가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손등을 두드리기도 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두드리는데, 어느 밤 손전등을 든 수위가 환한 불빛을 코끼리 상에 비추는바람에 코끼리 대신 쿵쾅쿵쾅 심장을 두드리기도 했다. 코끼리를 두드리는 긴 시간 동안에도 춘단은 자신이 두드리고 있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저 더 열심히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 P360

교정 곳곳에 설치된 서른두 개의 스피커에서는 온종일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은 사람을 신과 만나게 했다. 그들은 평소에 없던 용기를 발휘해 모르는 사람 손을 잡고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음악보다 힘이 강한 것은 쓰레기였다. 방송실에서 틀어주는 음악은 때때로 느리고 빠르게 잠깐의 침묵 뒤에 흘러나왔지만 쓰레기는 일정하게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쓰레기를 버리는 데는 특별한 용기도 필요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개인의 족적처럼 특색 있는 쓰레기가 남았다. 미화원들에게 축제가 의미하는 것은 경이적인 쓰레기 배출량이었다. - P365

해가 저물고 모두가 기다려온 축제의 밤이 열렸다.
인디밴드 록앤해머가 명성이 자자한 가수들을 제치고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오른 것은 그들의 인지도나 인기 때문이 아니라 매니저 없이 서울 변두리 연습실에서 버스 타고 오느라 지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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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은 맨 뒤에서 뒷짐을 진채 자금성 건물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입을 한일 자로 꾹 다물고 있는 영일이 신경이 쓰였는지유정이 곁으로 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영일은 좋다 싫다 별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춘단은 영일이 지금 누구보다도 흡족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일은 맛있는 것을 먹거나좋은 것을 볼 때면 호들갑 떠는 법 없이 오히려 점잔을 뺐다. 사람이 뭐든 지나치게 좋아하는 티를 내면 없어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정도면 어디가서 칠순잔치 얘기가 나왔을 때 물만마시고 있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P147

소장은 화지에 참여하는 것을 자율에 맡긴다고 했지만 조직이 자율이라고 써진 복권을 나눠줬다고 해서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진실을 얇게 덮고 있는 금박을 긁어보면 자율이 지워진 자리에 ‘강제‘라는 말이 드러나는 것이 여태껏 조직 명의로 발행된 모든 복권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조직을 떠나지 않는 한, 강제에 당첨된 사람모두 자율적으로 남아 벽에 걸레질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 P165

아침 먹기가 무섭게 논에 물을 대야 하고, 고추밭에 농약을 뿌려야 하고, 폭우에 쓰러진 나락을 다시 일으켜야 하고, 메리밥까지 챙겨주어야 하는 농사꾼의 긴 하루가 전생에서 짓고 온죄의 업으로 느껴진 적도 많았다. 다들 알아서 제 앞가림 좀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지금 이 시멘트 바닥, 제 앞길들을 너무나 잘 닦고 있어 돌봐줄 것 하나 없는 도시의 옥상에 서보니 영일은 자신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 생명들이 오히려자신을 살게 해주는 것들이었다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닭터에게 콩 한 알을 먹이면서 들었다. - P172

전장에서 돌아오는 밤은, 해진 옷으로, 부러진 총대로, 밑창 닳은 군화로 초라해도 아침은 절대 남루한 법이 없었다. 어제의 낡은 시름은 잠이 다 몰아내고아침은 새것, 반짝이는 새 기운, 새 정신으로만 넘쳐흐르고 있었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아침을 만끽하던 그때, 영일의 눈에 막 대문을 나서는 춘단의 모습이 들어왔다. - P174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금언은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노인이 새겨들어야 할 충고였다. 내일, 내일 하다가 어느 순간 내일은 없고 사람도 없고 끝내지 못한 일만 덩그러니 남아있더라는 것이 죽은 사람들의 하소연 아니던가. - P176

나: 장대열이 할머니 가방을 건드리는 것도 본 적 없으세요?
양: 없소.
나: 김낙현이 가방에서 쪽지를 꺼내는 것도 모르셨고요?
양: 몰랐제. 나이 들면 누가 옆구리를 찔러도 모르데요.
나: 할머니 가방을 통해 지령이 오가고 했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 가방이 죄인이네요. (여기서 잠깐 정적이 흘렀음.)
김 1: 맞네, 그라믄 가방이 죄인이네.
김 2: 가방이 죄인이면 가방을 잡아들이시면 되겠네요.
양: 내 가방을?
김1: 아여, 일어나게, 범인 잡혔으니까 이만 가세.
김 2: 어머니, 얼른 일어나세요.
김1: 뭐혀, 얼릉 가자니께 닭터 집도 못 지어주고 아침부터 이게 뭔 봉변이여.
양: 갈 때 가도 가방은 도로 가져가야 하는디.
김2: 이깟 가방 새것으로 사드릴 테니깐 어서 가요. - P190

대학의 실체와 구성요소를 둘러싸고 피라미드적 관점과 실존론적 관점과 민주주의적 관점을 오가며 또 한 차례 토론을 벌인 미화원들은 그래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동양의 인연론적 관점에서 원만한 합의를 이루었다. 그 인물로는 미화가 소속된 시설관리팀의 김자용 주임이 뽑혔다. - P214

"...... 맞아. 진짜 나쁜 새끼들은 바로 그놈들이야."
포문이 열리자 입속에 갇혀 있던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우리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데? 우리가 뭐 소장을 위해 일하나. 우리가 걸레질해주는 복도로 걸어다니고, 비질해주는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우리가 쓰레기 버리고 변기통까지 닦아주는 화장실에서 오줌똥누면서, 뭐? 이제와서 우리랑 자기네가 아무 상관이 없어? 지들 손으로는 쓰레기하나 주울 줄 모르면서. 다들 버릴 줄만 알았지 복도에 떨어진종이 한 장이라도 줍는 인간은 교수고 학생이고 본 적이 없어."
"화지특만 해도 그래. 문제는 지들이 일으키고 수습은 다 우리한테 하라 그러지 않았어. 내가 그거 지우면서 평생 듣도 보도못한 욕이란 욕은 다 봤네. 그 추잡한 낙서들 다 지워준 게 누군데 그래? 나는 그때 삐끗한 허리가 아직까지 쑤신다고. 써먹을 때는 종처럼 부려놓고 좀 도와달라고 하니까 이렇게 내팽개쳐?" - P227

학교에서 미화원들이란 보이지 않을수록 좋은 존재였다. 무난한 소장, 까다로운 소장, 김종래 같은 소장, 어떤 소장이 오든미화원들이 지켜야 할 기본강령은 깨끗한 시설 유지와 최대한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것이었다.
대학 성장 가능성을 평가하는 정부사절단이 방문한 몇 해 전, 그 전날 꼬박 야근을 하며 청소한 미화원들은 사절단이 일을 마치고 갈 때까지 알아서 대학 곳곳에 숨어 있으라는 지령을 받았다. 쓰레기 봉지를 지고 다니는 모습이나 복도에서 걸레질하는 모습이 절대로 사절단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명령을 어기고 활개를 치다 걸리는 사람은 벌금 조로 그날일당을 제한다는 특별 언급까지 있었다. 화장실 쓰레기통을운 후 계단 비상구에 숨어 있던 한 미화원은 남자 구둣발 소리가 들리자 혹시 사절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리저리 숨을 곳을 찾다가 마땅한 곳이 없자 스스로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기도 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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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강의를 도강한 양춘단 ㅋㅋㅋ 의식이 깨어나나!

그러고는 굳은 다짐을 보여주듯 고개를 크게 두 번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철진은 영일의 빈 사발이 차고 넘치게 막걸리를 콸콸콸 들이부으면서 아이고, 서운해서 어쩐다요, 이 집이 비어싸면 마을이 초상집 같을 틴디, 알고 보면 성님이 송정리 대장이나 매한가지 아니오. 한 집 걸러 다 떠나니 우리 마을도 이젠 아주 갈라나 봐요…… 입으로는 그렇게 갖은 아쉬움을 떨었지만 밑바닥에 엽전같이 깔린 마음이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반짝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격이 도적감이든 정승감이든 어쨌든 빚쟁이는 멀리 두고 사는 게 좋은 법이다. - P9

영일은 자신이 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남은 목숨을 통고받아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사는 동안 좋은 일은 무릎이 벗겨지도록 기도를 드리고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도 생기지 않는 데 반해 나쁜 일이란 건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무서워 깨금발을 하고 다녀도 우연히 비껴가는 한 줄기 바람결로도 생긴다는 것을 모르는 인생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 작은 알갱이의 뿌리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죄짓지 않고 착하게 살아온 인생을 억울해하는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남은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영일은 급기야 잡을 데 많은 의사의 넓은 소매를 덥석 붙들고 매달렸다. - P12

결국 이런저런 죄목이 곁들여져 춘단은 한시적으로 교회 출입이 금지되었다. 춘단은 밥상을 치운 다음 토방에 앉았다. 꼭지 딴 고추 같은 초승달이 까만 밤하늘에 덩그러니 떠 있었다. - P59

자고로 이 눈이란 것은 제아무리 밝다 해도 산 너머를 보지못하며 아름다운 것, 좋은 것엔 커지고 더러운 것, 추한 것엔 작아지는 법이니 부처님은 그 간교한 눈이 아니라 깊이를 모르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는바, 그러면 만 리 밖의 세상이나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인간의 마음속 어디든 못 볼 것이 없는 법이오. - P84

얼굴을 표현하는 데 있어 눈의 중요성을 역설한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사이비 예술가는 눈을 그리는 게 어렵다고 아예 눈을 감은 모습만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다고 해서 눈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감은 눈이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석공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참말로 사람 부담스럽게시리 왜 부처고 예수고 할 것 없이 다들 눈을 감고 있는 것이여…………. - P83

자고로 이 눈이란 것은 제아무리 밝다 해도 산 너머를 보지못하며 아름다운 것, 좋은 것엔 커지고 더러운 것, 추한 것엔 작아지는 법이니 부처님은 그 간교한 눈이 아니라 깊이를 모르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는 바, 그러면 만 리 밖의 세상이나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인간의 마음속 어디든 못 볼 것이 없는 법이오. - P84

푸드덕거리는 닭 날개를 간신히 쥐고 있던 영일의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개 반치도 못 되는 손바닥만 한 것인데, 남의집살이가 이런 것이구나. - P88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품이 큰 검은색 양복, 굽은 등, 튀어나온 날개뼈, 춘단은 비스듬하게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만 보고도 그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어려운 일로 기운이 쑥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춘단은 되도록 남자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도시락을먹었다. 크고 작은 인기척이 나도 남자는 주변에 관심이 없는 듯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풍경속에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은 남자의 존재를 일깨우는 것은 머리 위를 맴돌다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사그라져버리는 담배 연기뿐이었고 그 하얀 연기마저 없으면 남자는 시간의 한 지점에 갇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 - P105

춘단은 남자를 향해 젓가락을 내밀었다. 한 끼 밥을 권하는 가는 쇠젓가락에 싸움을 거는 것 같은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어쩔 줄 모르던 남자는 젓가락을 쥔 늙은 손이 쉽게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춘단의 곁으로 걸어왔다. - P108

기다란 회색 복도 벽에는 여덟 개의 똑같은 문이 세워져 있었다. 춘단은 물걸레를 쥐고 먼지 낀 창틀을 닦아나갔다. 창가 쪽에서 쏟아진 햇살에 나무 이파리들이 만들어낸 그늘이 덮이면서 복도 바닥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걸어갈 수 없게 붐비던 곳이 정각이 되자 버려진 놀이터처럼 텅 비었다. 사람 발소리에 익숙한 복도는 사람을 잃고 한여름에 냉기를 내뿜었다. 길고 좁은 복도에 알 수 없는 적막감이 흘렀다. - P110

"우리는 흔히 가정이 사회의 모든 이데올로기에서 분리되는 원초적인 휴식 공간이자 따듯한 안식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도 가정의 의미가 그러했을까요? 가정을 휴식처로 생각하는 것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시각에 불과합니다. 여성에게 가정은, 모성애라는 희생적인 이름하에 노동을 제공해주어야 할 또 하나의 일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여성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철저히 착취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푸른색 유니폼을 들킬까봐 책상에 잔뜩 움츠려있던 춘단의 목이 갑자기 아침 꽃처럼 쑥쑥 솟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여성을 착취한 주체는 가부장적인 남편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이 낳은 자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라는 교수의 발언이 나오는 순간 급기야 심드렁하게 앉아 있는 옆자리 남학생의 머리를 이기고 강의실에서 가장 높이 솟아올랐다.
"아여, 저게 뭔 소리다냐." - P115

"밤이면 밤마다 뭐라고 혼자 구시렁대는 거여?"

"....내가 시집온 이후로 당신은 평생 나를 착취했소."

"뭔소리여?"

"이제 와서 뭐를 워떻게 해보겠다고 하는 소리는 아니니께 겁먹을 것은 없소. 그냥 알고나 있으라고 하는 말이오."

"뭘 알고 있으라는 거여?"

"아, 당신이 나를 착취했다고 안 허요. 당신 김가 집안이 앞으론 나를 착취할 생각은 이맨큼도 허질 마쇼. 나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텡께."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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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조지 손더스
헤밍웨이, 빗 속의 고양이

그리고 단편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는 플래너리 오코너, 앨리스 먼로, 존 치버, 윌리엄 트레버가 소중한 선생님입니다. 특히 윌리엄 트레버는 글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글 너머의 정신까지 좋아합니다. (존 치버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치버샘, 죄송합니다!).....

- 이미상 - P17

6. 소설이 한 글자도 써지지 않을 때 어떻게 자신을 다스리시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저 자신을 안심시킵니다. 안 써도 돼. 내일은 쓰겠지. 내일도 아니면 내일모레, 영영 못 쓰면 말지 뭐. 그렇게 배짱과 여유를 부려요. 밖으로 나가 산책하고 다른 사람이 쓴 좋은 책을 읽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새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봐요. 내가 글을 쓰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합니다. 그러다보면 다시 책상 앞에 앉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정신이 번쩍 들도록 도움을 주는 건 어려운 일상을 헤쳐가면서도 꿋꿋이 글을 쓴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힘들었구나, 그래도 썼구나, 그게 삶이고 행복이구나. 그런 단순한 진실을 저 자신에게 확인시켜줍니다.

- 김멜라 - P22

7. 십년 후에는 어떤 소설을 쓰고 있을 것 같으신가요?

저에겐 십 년 후가 까마득한 미래처럼 느껴지네요! 저는 시계가 그리 넓지 않거든요. 병으로 얻은 습관 같아요. 병을 얻고 나면 정기검진을 갈 때마다 새로 시간을 얻는 느낌이 들거든요. 다음 정기검진 때까지는 괜찮은가보다. 그런 식으로 육 개월, 일 년 단위로 삶을 연장하는 느낌이에요. 십 년 후라, 감히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지금보다는 조금 더 솔직한 이야기를 쓰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제 소설은 아직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가고있는 중인 것 같아서요.

- 성혜령 - P28

4. 젊은 근희의 행진」에서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문장과 그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산업과 연결되어 있는 해방운동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진정한 해방이 아닐 것이다."(같은 책, 166~167쪽)
문희의 생각이 담긴 이 문장입니다. 요즘 해방의 의미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어서 이 문장이 새롭게 마음에 남아요. 산업과 결부된 해방일지라도 인류의 진보를 향한 해방이라면 좋은 게 아닐까, 산업과 결부되지 않은 해방은 결국 실패하고 마는 게 아닐까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해방의 역사 같기도 하고, 저의 역사도 어떤 의미에선 그랬던 것 같아요. 앞으론 더욱더 해방되고 싶네요.

- 이서수 - P33

4. 가슴에 두고 자주 꺼내 보는, 혹은 저절로 떠오르는 문장이있으신가요?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필사도 몇 번이나 했는데요. 다 외우지는 못하고 띄엄띄엄 구절들을 떠올릴 때가 있어요.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 그러나 킥킥, 당신" (『혼자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27쪽). 특히 마지막 구절인 ‘그러나 킥킥 당신‘을 저도 모르게 가끔 중얼거릴 때가 있어요.

- 정선임 - P39

누구나 그렇겠지만 제게도 오래된 외로움이 있는데요. 타인으로도 메울 수 없는 외로움 같아요. 소설이나 영화는 이 외로움을 마주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해결해주진 않고, 다만 대면하게 해줘요. 곳곳에 혼자 있는 것들과 저를 연결해주는 거죠. 심지어 나쁜 이야기조차 그런 역할을 해냅니다. 그들이 만들어준 뿌리에 내처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에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마음이 지금도 뱃속에 있어요.

- 함윤이 - P47

당겼다 험상궂은 얼굴로 신음을 토하는 소란스러운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성격에 너무 잘 맞더라고요. 부작용은 어떤 사람이 저에게 쓴소리를 할 때 저도 모르게 ‘첫 전완근도 작으면서‘라거나 ‘그런 말 할 시간에 바벨로나 해라‘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 현호정 - P52

조지 손더스의 말은 이런 의미다. 단편소설 작가가 장편소설을 씀으로써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거개의 장편소설이 훨씬 짧게 쓰였어야 했다.……… 비가 내린다. 일과를 마친사람이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도 고됐다. 짧은 소설 한 편 읽고 자야지 하며 머리맡에서 단편집을 집어드는 순간의 고요와 충족감이 빗소리와 함께 교실을 가득 채운다. 사람들은 창문을 열어 들이치는 빗방울을 느끼며 손더스 선생님의 독법에 따라 헤밍웨이의 「빗속의 고양이를 아주 아주 느리게 읽어나간다. 거의 장편소설 한 편을 읽는 속도로,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들이 그 짧은 이야기를 쓸 때 그토록 오래 걸렸던 것처럼.

- 이미상 자선 에세이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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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이미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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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읽는 유일한 수상작품집. 올해는 딱 이거다 라는 느낌이 오는 픽이 없다. 내가 점점 ‘늙어가서’ 인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드네.. 그래도 <당신의 4분 33초>로 흥미를 가졌던 이서수 작가의 <젊은 근희의 탄생>에서 보여주는 경쾌한 문장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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