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한 밤, 호수 앞에 선 젊은 사람.
겁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고 태연하게 섰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당겨진 양극의 줄고작 한 발짝으로 결정되는 삶과 죽음의 친밀함. 갖은 수모를 당하더라도, 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더러운 일들이 눈앞에서 행패를 부린다 해도, 자신이 아니라 부모 형제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고욕 한 번 하고 뒤로 물러선다면 그리 못 살 건 또 없지 않은가. 바라던 꽃길은 아니어도 이럭저럭 걸을 만한 작은 길이 뒤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똑똑한 청년이 모를 리 없다. 그것이 그를 더 괴롭힌다.
호수 위로 떨어진 나뭇잎이 바람에 휘청댄다. 그것이 마음 여린 사람에게는 재촉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밤이 가기 전에 너도 이제 그만 결정을 내리라는, - P284

닭터의 죽음에서 사는 것의 무용(無用)을 본 영일은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계절은 죽음을 향한 그의 망상을 더욱 부추겼다. 한번 내렸다 하면 폭설로 변하는 눈이 죽은 땅에 하얀 상복을 입히면, 어두운 옷깃에 머리를 파묻은 사람들은 무인(無人)의 관을 따라 장례 행렬에 나서는 조문객들이 되고, 빈 가지를 흔드는 겨울 휘파람은 우울한 만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달마다 정기검진을 받으러 현관을 나서던 영일은 함박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그대로 문턱에 앉아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눈으로 덮이도록 몇 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마당에 나왔다가 눈에 파묻히고 있는 시아버지를 본 유정이 깜짝 놀라 눈을 털어주며 왜 아직까지 병원에 가시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영일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발을 잡고 놓아주질 않으니 앞으론 병원에 못 가겄다…………. - P351

겨울이 다시 눈을 내렸다. 춘단은 일 년 전과 같은 자세로 여전히 코끼리를 두드렸다. 춘단은 파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거친 땅에서, 빈솥에서, 작은 동굴에서 먹을 것과 입을것과 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였다. 그러나 춘단은 컴컴한 밤에 홀로 코끼리를 두드렸다. 두드리고 두드리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앙상하게 철골만 있던 건물이 세상 무섭지 않은 탑으로 변신했다. 두드리고 두드리다가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손등을 두드리기도 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두드리는데, 어느 밤 손전등을 든 수위가 환한 불빛을 코끼리 상에 비추는바람에 코끼리 대신 쿵쾅쿵쾅 심장을 두드리기도 했다. 코끼리를 두드리는 긴 시간 동안에도 춘단은 자신이 두드리고 있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저 더 열심히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 P360

교정 곳곳에 설치된 서른두 개의 스피커에서는 온종일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은 사람을 신과 만나게 했다. 그들은 평소에 없던 용기를 발휘해 모르는 사람 손을 잡고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음악보다 힘이 강한 것은 쓰레기였다. 방송실에서 틀어주는 음악은 때때로 느리고 빠르게 잠깐의 침묵 뒤에 흘러나왔지만 쓰레기는 일정하게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쓰레기를 버리는 데는 특별한 용기도 필요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개인의 족적처럼 특색 있는 쓰레기가 남았다. 미화원들에게 축제가 의미하는 것은 경이적인 쓰레기 배출량이었다. - P365

해가 저물고 모두가 기다려온 축제의 밤이 열렸다.
인디밴드 록앤해머가 명성이 자자한 가수들을 제치고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오른 것은 그들의 인지도나 인기 때문이 아니라 매니저 없이 서울 변두리 연습실에서 버스 타고 오느라 지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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