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은 맨 뒤에서 뒷짐을 진채 자금성 건물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입을 한일 자로 꾹 다물고 있는 영일이 신경이 쓰였는지유정이 곁으로 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영일은 좋다 싫다 별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춘단은 영일이 지금 누구보다도 흡족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일은 맛있는 것을 먹거나좋은 것을 볼 때면 호들갑 떠는 법 없이 오히려 점잔을 뺐다. 사람이 뭐든 지나치게 좋아하는 티를 내면 없어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정도면 어디가서 칠순잔치 얘기가 나왔을 때 물만마시고 있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P147
소장은 화지에 참여하는 것을 자율에 맡긴다고 했지만 조직이 자율이라고 써진 복권을 나눠줬다고 해서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진실을 얇게 덮고 있는 금박을 긁어보면 자율이 지워진 자리에 ‘강제‘라는 말이 드러나는 것이 여태껏 조직 명의로 발행된 모든 복권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조직을 떠나지 않는 한, 강제에 당첨된 사람모두 자율적으로 남아 벽에 걸레질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 P165
아침 먹기가 무섭게 논에 물을 대야 하고, 고추밭에 농약을 뿌려야 하고, 폭우에 쓰러진 나락을 다시 일으켜야 하고, 메리밥까지 챙겨주어야 하는 농사꾼의 긴 하루가 전생에서 짓고 온죄의 업으로 느껴진 적도 많았다. 다들 알아서 제 앞가림 좀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지금 이 시멘트 바닥, 제 앞길들을 너무나 잘 닦고 있어 돌봐줄 것 하나 없는 도시의 옥상에 서보니 영일은 자신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 생명들이 오히려자신을 살게 해주는 것들이었다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닭터에게 콩 한 알을 먹이면서 들었다. - P172
전장에서 돌아오는 밤은, 해진 옷으로, 부러진 총대로, 밑창 닳은 군화로 초라해도 아침은 절대 남루한 법이 없었다. 어제의 낡은 시름은 잠이 다 몰아내고아침은 새것, 반짝이는 새 기운, 새 정신으로만 넘쳐흐르고 있었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아침을 만끽하던 그때, 영일의 눈에 막 대문을 나서는 춘단의 모습이 들어왔다. - P174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금언은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노인이 새겨들어야 할 충고였다. 내일, 내일 하다가 어느 순간 내일은 없고 사람도 없고 끝내지 못한 일만 덩그러니 남아있더라는 것이 죽은 사람들의 하소연 아니던가. - P176
나: 장대열이 할머니 가방을 건드리는 것도 본 적 없으세요? 양: 없소. 나: 김낙현이 가방에서 쪽지를 꺼내는 것도 모르셨고요? 양: 몰랐제. 나이 들면 누가 옆구리를 찔러도 모르데요. 나: 할머니 가방을 통해 지령이 오가고 했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 가방이 죄인이네요. (여기서 잠깐 정적이 흘렀음.) 김 1: 맞네, 그라믄 가방이 죄인이네. 김 2: 가방이 죄인이면 가방을 잡아들이시면 되겠네요. 양: 내 가방을? 김1: 아여, 일어나게, 범인 잡혔으니까 이만 가세. 김 2: 어머니, 얼른 일어나세요. 김1: 뭐혀, 얼릉 가자니께 닭터 집도 못 지어주고 아침부터 이게 뭔 봉변이여. 양: 갈 때 가도 가방은 도로 가져가야 하는디. 김2: 이깟 가방 새것으로 사드릴 테니깐 어서 가요. - P190
대학의 실체와 구성요소를 둘러싸고 피라미드적 관점과 실존론적 관점과 민주주의적 관점을 오가며 또 한 차례 토론을 벌인 미화원들은 그래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동양의 인연론적 관점에서 원만한 합의를 이루었다. 그 인물로는 미화가 소속된 시설관리팀의 김자용 주임이 뽑혔다. - P214
"...... 맞아. 진짜 나쁜 새끼들은 바로 그놈들이야." 포문이 열리자 입속에 갇혀 있던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우리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데? 우리가 뭐 소장을 위해 일하나. 우리가 걸레질해주는 복도로 걸어다니고, 비질해주는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우리가 쓰레기 버리고 변기통까지 닦아주는 화장실에서 오줌똥누면서, 뭐? 이제와서 우리랑 자기네가 아무 상관이 없어? 지들 손으로는 쓰레기하나 주울 줄 모르면서. 다들 버릴 줄만 알았지 복도에 떨어진종이 한 장이라도 줍는 인간은 교수고 학생이고 본 적이 없어." "화지특만 해도 그래. 문제는 지들이 일으키고 수습은 다 우리한테 하라 그러지 않았어. 내가 그거 지우면서 평생 듣도 보도못한 욕이란 욕은 다 봤네. 그 추잡한 낙서들 다 지워준 게 누군데 그래? 나는 그때 삐끗한 허리가 아직까지 쑤신다고. 써먹을 때는 종처럼 부려놓고 좀 도와달라고 하니까 이렇게 내팽개쳐?" - P227
학교에서 미화원들이란 보이지 않을수록 좋은 존재였다. 무난한 소장, 까다로운 소장, 김종래 같은 소장, 어떤 소장이 오든미화원들이 지켜야 할 기본강령은 깨끗한 시설 유지와 최대한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것이었다. 대학 성장 가능성을 평가하는 정부사절단이 방문한 몇 해 전, 그 전날 꼬박 야근을 하며 청소한 미화원들은 사절단이 일을 마치고 갈 때까지 알아서 대학 곳곳에 숨어 있으라는 지령을 받았다. 쓰레기 봉지를 지고 다니는 모습이나 복도에서 걸레질하는 모습이 절대로 사절단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명령을 어기고 활개를 치다 걸리는 사람은 벌금 조로 그날일당을 제한다는 특별 언급까지 있었다. 화장실 쓰레기통을운 후 계단 비상구에 숨어 있던 한 미화원은 남자 구둣발 소리가 들리자 혹시 사절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리저리 숨을 곳을 찾다가 마땅한 곳이 없자 스스로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기도 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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