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 강의를 도강한 양춘단 ㅋㅋㅋ 의식이 깨어나나!
그러고는 굳은 다짐을 보여주듯 고개를 크게 두 번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철진은 영일의 빈 사발이 차고 넘치게 막걸리를 콸콸콸 들이부으면서 아이고, 서운해서 어쩐다요, 이 집이 비어싸면 마을이 초상집 같을 틴디, 알고 보면 성님이 송정리 대장이나 매한가지 아니오. 한 집 걸러 다 떠나니 우리 마을도 이젠 아주 갈라나 봐요…… 입으로는 그렇게 갖은 아쉬움을 떨었지만 밑바닥에 엽전같이 깔린 마음이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반짝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격이 도적감이든 정승감이든 어쨌든 빚쟁이는 멀리 두고 사는 게 좋은 법이다. - P9
영일은 자신이 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남은 목숨을 통고받아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사는 동안 좋은 일은 무릎이 벗겨지도록 기도를 드리고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도 생기지 않는 데 반해 나쁜 일이란 건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무서워 깨금발을 하고 다녀도 우연히 비껴가는 한 줄기 바람결로도 생긴다는 것을 모르는 인생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 작은 알갱이의 뿌리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죄짓지 않고 착하게 살아온 인생을 억울해하는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남은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영일은 급기야 잡을 데 많은 의사의 넓은 소매를 덥석 붙들고 매달렸다. - P12
결국 이런저런 죄목이 곁들여져 춘단은 한시적으로 교회 출입이 금지되었다. 춘단은 밥상을 치운 다음 토방에 앉았다. 꼭지 딴 고추 같은 초승달이 까만 밤하늘에 덩그러니 떠 있었다. - P59
자고로 이 눈이란 것은 제아무리 밝다 해도 산 너머를 보지못하며 아름다운 것, 좋은 것엔 커지고 더러운 것, 추한 것엔 작아지는 법이니 부처님은 그 간교한 눈이 아니라 깊이를 모르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는바, 그러면 만 리 밖의 세상이나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인간의 마음속 어디든 못 볼 것이 없는 법이오. - P84
얼굴을 표현하는 데 있어 눈의 중요성을 역설한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사이비 예술가는 눈을 그리는 게 어렵다고 아예 눈을 감은 모습만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다고 해서 눈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감은 눈이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석공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참말로 사람 부담스럽게시리 왜 부처고 예수고 할 것 없이 다들 눈을 감고 있는 것이여…………. - P83
자고로 이 눈이란 것은 제아무리 밝다 해도 산 너머를 보지못하며 아름다운 것, 좋은 것엔 커지고 더러운 것, 추한 것엔 작아지는 법이니 부처님은 그 간교한 눈이 아니라 깊이를 모르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는 바, 그러면 만 리 밖의 세상이나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인간의 마음속 어디든 못 볼 것이 없는 법이오. - P84
푸드덕거리는 닭 날개를 간신히 쥐고 있던 영일의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개 반치도 못 되는 손바닥만 한 것인데, 남의집살이가 이런 것이구나. - P88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품이 큰 검은색 양복, 굽은 등, 튀어나온 날개뼈, 춘단은 비스듬하게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만 보고도 그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어려운 일로 기운이 쑥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춘단은 되도록 남자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도시락을먹었다. 크고 작은 인기척이 나도 남자는 주변에 관심이 없는 듯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풍경속에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은 남자의 존재를 일깨우는 것은 머리 위를 맴돌다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사그라져버리는 담배 연기뿐이었고 그 하얀 연기마저 없으면 남자는 시간의 한 지점에 갇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 - P105
춘단은 남자를 향해 젓가락을 내밀었다. 한 끼 밥을 권하는 가는 쇠젓가락에 싸움을 거는 것 같은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어쩔 줄 모르던 남자는 젓가락을 쥔 늙은 손이 쉽게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춘단의 곁으로 걸어왔다. - P108
기다란 회색 복도 벽에는 여덟 개의 똑같은 문이 세워져 있었다. 춘단은 물걸레를 쥐고 먼지 낀 창틀을 닦아나갔다. 창가 쪽에서 쏟아진 햇살에 나무 이파리들이 만들어낸 그늘이 덮이면서 복도 바닥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걸어갈 수 없게 붐비던 곳이 정각이 되자 버려진 놀이터처럼 텅 비었다. 사람 발소리에 익숙한 복도는 사람을 잃고 한여름에 냉기를 내뿜었다. 길고 좁은 복도에 알 수 없는 적막감이 흘렀다. - P110
"우리는 흔히 가정이 사회의 모든 이데올로기에서 분리되는 원초적인 휴식 공간이자 따듯한 안식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도 가정의 의미가 그러했을까요? 가정을 휴식처로 생각하는 것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시각에 불과합니다. 여성에게 가정은, 모성애라는 희생적인 이름하에 노동을 제공해주어야 할 또 하나의 일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여성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철저히 착취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푸른색 유니폼을 들킬까봐 책상에 잔뜩 움츠려있던 춘단의 목이 갑자기 아침 꽃처럼 쑥쑥 솟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여성을 착취한 주체는 가부장적인 남편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이 낳은 자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라는 교수의 발언이 나오는 순간 급기야 심드렁하게 앉아 있는 옆자리 남학생의 머리를 이기고 강의실에서 가장 높이 솟아올랐다. "아여, 저게 뭔 소리다냐." - P115
"밤이면 밤마다 뭐라고 혼자 구시렁대는 거여?"
"....내가 시집온 이후로 당신은 평생 나를 착취했소."
"뭔소리여?"
"이제 와서 뭐를 워떻게 해보겠다고 하는 소리는 아니니께 겁먹을 것은 없소. 그냥 알고나 있으라고 하는 말이오."
"뭘 알고 있으라는 거여?"
"아, 당신이 나를 착취했다고 안 허요. 당신 김가 집안이 앞으론 나를 착취할 생각은 이맨큼도 허질 마쇼. 나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텡께."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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