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니츠키 이 비가 지나가면 만물이 생기를 되찾고 가벼운 숨을 쉬겠지요. 그런데 오로지 나에게만은 이 소나기가 생기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 같네요. 내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허비되었다는 생각이 마치 유령처럼 낮이고 밤이고 내 숨통을 조여 와요. 내 과거는 없어요. 그것은 하잘것없는 일에 헛되이 낭비되고 말았지요. 그리고 현재는 끔찍스럽게 무의미해요. - P138

옐레나 안드레예브나 그럼, 물론이지. 나는 사실이 무엇이 됐건 간에 애매한 상태보다는 덜 끔찍하다고 생각해. 나에게 맡겨요, 아가씨.
소냐 맞아, 맞아……. 가서 자기가 그 도면을 보고 싶어 한다고 말할게. (나가다가 문가에 서서) 아니, 애매한 게 나을지도 몰라……. 그러면 최소한 희망이라도 있으니까…. - P161

아스트로프 따분한 농담이야. 자네는 미친 게 아니라 그냥 괴짜일뿐이야. 어릿광대지. 예전에 나는 괴짜들을 모두 환자나 비정상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괴짜야말로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라는 거야. 자네는 완전히 정상일세. - P186

아스트로프 (화가 나서 소리 지른다.) 그만해! (진정하며) 우리가 가고 나서 백 년이나 2백 년 뒤에 살게 될 사람들은, 우리가 이 토록 어리석고 따분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는 걸 알고 우릴 경멸할 거야. 그들은 아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겠지. 하지만 우리는 …… 자네나 나나 한 가지 희망밖에는 없어. 나중에 우리가 관 속에서 잠을 잘 때, 어떤 환상이 우리에게 찾아올지 모른다는 희망 말일세. 그게 즐거운 환상이면 더 좋고, (한숨을 쉬고) 그래, 친구. 우리 군 전체를 통틀어 정신이 제대로 박힌, 지적인 인간은 자네와 나, 둘밖에 없었어. - P187

소냐 주세요. 왜 우리를 겁주세요? (부드럽게) 주세요, 바냐 삼촌! 난 삼촌 못지않게 불행하지만, 그래도 좌절하지는 않을 거예요. 내 생명이 스스로 다할 때까지 나는 참고 또 참을 거예요………. 그러니 삼촌도 참아요. - P189

아스트로프 에이! (재촉하는 시늉을 하며) 제발 부탁이니 가지 말아요. 솔직해지세요. 이 세상에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당신에겐 아무런 인생의 목적도 없으며, 관심을 둘 만한 일도 없어요. 그러니 이르는 늦든 당신은 자신의 감정에 어차피 굴복하게 될 겁니다. 이건 피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 일은 하리코프나 쿠르스크 같은 곳이 아니라, 여기, 자연의 품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더 낫지요. 최소한 시적이라는 장점이 있잖아요. 마침 가을 경치도 아름답고…… 여기에 보호림도 있고, 투르게네프 취향의 다 쓰러져 가는 저택들도 있고 하니………. - P191

보이니츠키 (소냐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우리 아기, 난 너무 힘들구나! 오, 넌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를 거야!
소냐 그래도 어쩌겠어요, 살아야지!

사이.

바냐 삼촌,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낼 거예요. 우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도, 그리고 늙어서도 안식을 잊은 채 일할 거예요. 그러다 언젠가 우리의 때가 닥치면 불평 없이 죽어 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 무덤 위에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우리는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렸고, 괴로워했노라고, 그러면 하느님은 우릴 가엾게 여기시겠죠. 나는 착한 우리 삼촌과 함께 아름답고 찬란하고 멋진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면서 지금의 불행을 감격과 미소 속에서 돌아볼 거예요. 그리고 우린 쉴 거예요. 삼촌, 난 믿어요. 뜨겁게, 간절하게 믿어요……. (바냐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그의 손에 머리를 올려놓는다. 지친 목소리로) 우리는 쉴 거예요! - P1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옐레나 안드레예브나 오늘 날씨 좋네요………. 덥지도 않고.

사이.

보이니츠키 목매달기 딱 좋은 날씨네………. - P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월부터 한달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최소 2권씩 파먹기로 결심. 예전에 민음사 파주 창고에서 패밀리세일 할 때 신나게 2박스 지른 세계문학전집이 읽지 않은 책장에서 줄어들지 않고 있다. 얇은 책만 야금야금 꺼내 읽는 꼼수를. 체호프 단편선도 역시 얇아서 원 픽^^


체호프는 몇 년 전에 연극 보기 전에 희곡 '벚꽃동산'과 '갈매기'만 읽어보았기에, 소설은 처음이다.


풍자적인 상황 가운데 갑작스러운 충격적인 결말로 맺는 이야기도 좋았지만, 사랑,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씁씁함과 여운을 많이 남긴다. 화자가 상대에게 호감이나 애정의 감정이 있었으나, 막상 그 상대가 사랑을 고백하거나 화자의 감정을 받아들인 후 화자에게 벌어지는 내면의 변화, 변심, 외면하는 심리가 자주 묘사되고 있다. 특히, '베로치카'의 남성 화자의 여성 화자에 대한 감정 변화, 세계에 대한 관점을 나란 사람과 많이 겹쳐보게 된다.


유명한 단편 중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 민음사 단편선에는 수록되지 않아 문학동네 일러스트 도서가 있길래 도서관에서 빌려왔다(로쟈님이 번역한 줄은 몰랐네). 가볍게 시작한 불륜관계에서 생겨난 사랑, 화자는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고 하지만, 이런 감정이 정말 화자에게 처음일까, 이게 정말 사랑이라는 감정일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왜인지. 그들의 시작은 "어떻게? 어떻게?"라는 고민과 함께, 그리고 이야기가 끝난다.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 내일 일을 누가 알겠는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2-04-04 1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읽었어요!!!!!! 하아, 요즘 읽은 책이 많이 눈에 보이는 걸 보면서 책 많이 읽었다고 착각하면 안 되는데,,,, 저라는 인간은,,ㅎㅎㅎㅎㅎ

햇살과함께 2022-04-04 22:01   좋아요 2 | URL
라로님 바쁘신데도 많이 읽고 계시죠~ 꾸준히~

새파랑 2022-04-04 2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체호프 단편선> 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만 추가되어 있으면 딱 좋은데 아쉬워요 ㅋ 갠적으로는 민음사 체호프 단편집이 제 취향에는 가장 좋더라구요 ^^

민음사 전집 월 4권 읽기도 가능하실거 같아요~!!

햇살과함께 2022-04-05 09:04   좋아요 1 | URL
체호프 단편 다 읽은 새파랑님 의견이니!
이제 두꺼운 책만 잔뜩 남아 ㅎㅎ 다른 책의 유혹을 잘 물리쳐야죠!
 

반복적인 경험, 실상 쓰라린 경험을 통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있었다. 모든 연애는 처음엔 삶을 다채롭게 변화시켜 사랑스럽고 가뿐한 모험으로 만들어주지만, 점잖은 사람들, 특히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모스크바사람들에게는 아주 복잡한 문제로 커져버려 결국에는 곤혹스럽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그렇지만 새로운 매력적인 여자와 만날 때마다 이런 경험은 어쩐 일인지 기억에서 전부 사라지고, 그냥 삶을 즐기고 싶었다. 그러면 또 모든 일이 순탄하고 유쾌하게 여겨졌다. - P11

오레안다에서 그들은 교회 근처의 벤치에 앉아 말없이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얄타가 보였고 산꼭대기에는 흰 구름이 걸려 있었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매미들만 소리 내 울었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먹먹한 파도 소리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평온과영면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에 알타도 오레안다도 존재하지 않던 때에도 그렇게 아래쪽에서는 파도 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지금도 그 파도 소리가 울리고 있고, 우리가 모두 사라진 후에도 그렇게 무심하고 먹먹하게 - P26

계속 울릴 것이다. 이런 항구성에, 우리들 각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완전한 무관심 속에, 아마도 영원한 구원의 약속, 지상에서의 삶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완성을 향한 무한한 진보의 약속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여명을 받아 더 아름다워 보이는 젊은 여인과 나란히 앉은 구로프는 바다와 산, 구름, 넓은 하늘이 내다보이는 풍경에 흠뻑 빠져 있었다. 구로프는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인간적 존엄을 잊은 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했다. - P28

기차는 빠르게 떠났고, 그 불빛도 곧 사라졌다. 잠시 후에는 기차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달콤한 미망과 광기에서 빨리 벗어나라고 모든것이 일부러 꾸며진 듯했다. 플랫폼에 혼자 남겨진 채 멀리 어둠을 응시하던 구로프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으로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전선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인생에 또 한번의 무모한 장난 혹은 모험이 있었으며, 이제 이것도 다 지나가고 추억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심란하고 슬펐으며 가벼운 회한을 느꼈다. - P31

그런데 이제야, 머리도 세기 시작하는 지금에 와서야 난생처음으로 진짜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다음에는 다시 칠흑 같은 어둠과 살을 에는 찬바람과 얼어붙은 구릉들이 이어진다. 몸도 마음도 고통스럽다. 기만적인 자연조차도 이 고통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그 어떤 수단이나 기만을 갖고 있지 않다 ....….. - P132

「젊은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정신을 차리시오. 나야 이백만 루블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신은 인생의 황금기를 삼사 년 잃게 되는 것 아닙니까. 삼사 년이라고 말한 이유는 당신이 그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운 나쁜 젊은이,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스스로 택한 감금은 강제적인 감금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점이오. 매 순간 당신이 독방에서 자유롭게 나갈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당신의 존재 전체에 독을 퍼뜨릴 겁니다. 난 당신이 불쌍해요!」 - P136

그의 독서열은, 바다 위에 널린 난파선의 잔해들 속에서 헤엄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무것에나 무턱대고 매달리는 한 인간을 연상시켰다! - P140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가능한 모든 것을 성취했으며 여태껏 믿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것은 불투명했다. 아직도 무언가가 부족했으며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그에게는 무언가 가장 중요한 것이, 언젠가 막연하게 꿈꾸었던 그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것 같았다. 어린 시절과 대학 시절 그리고 외국에서 가졌던 그 모든 소망이 현재에도 그를 고뇌하게 만들고 있었다. - P1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