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에서부터 질문하기 - 김종철 선생님의 창간사, 1주년, 10주년, 20주년 권두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품고 있는 맹목적인 숭배나 신뢰는 과학은 거짓이 없고 실패가 없다는 전연 근거 없는 미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이 널리 유포된 데에는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비역사적 사고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 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현재 능력이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 해야 옳다. - P113

따지고 보면, 현대 기술문명의 기저에는 정복적 인간의 교만심이 완강하게 버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도를 따르는 순리의 생활을 우습게 여기면서, 모든 것을 자기자신의 통제와 조종 속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야만적인 폭력이 끝없이 창궐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연적 환경이든 인문적 환경이든 나날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생활의 창조적 재조직이 가능하려면, 자기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겸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 (창간호, 1991년 11-12월) - P116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 《녹색평론》은 단순한 기술이나 ‘녹색산업주의‘로는 문제 해결이 근본적으로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아직은 소수의 의견을 대변하고자 노력해왔다. 오늘날 우리의 지배적인 삶의 양식, 즉 산업문화가 근본문제이며, 그 산업문화를 진보나 발전으로 보는 근대화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분법적 유물주의의 세계관 - 이런 것이 본질적으로 재고되지 않는 한, 이 전대미문의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하려고 하였다. - P118

그러나 이러한 구조에 다가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동안 개발 이데올로기 또는 산업문화의 지배하에서 우리자신도 모르게 두텁게 쌓여온 인간중심주의적 교만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 것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주생명과 내 생명이 다른 것이 아니며, 만물이 나의 부모형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문화를 누릴 필요가 있다. 불필요하게 생명체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없이는 산업주의적 생활방식에 대한 중독상태로부터 벗어나올 수도 없고, 설사 의도적인 노력을 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금욕적 생활의괴로움만을 안겨주기 쉬운 법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쁨으로 하지 못하는 행동은 뿌리가 약할 수밖에 없다. - P119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생명을 부정하는 모든 사회적 목표와 권력체계를 폐기해야 하고, 경쟁의 논리에 세뇌된 우리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켜야한다. 일찍이 미국의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퍼드가 갈파한 바와 같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장래는 결국 한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그것은 "모든 수준에서 또 온갖 종류의 공동체에서 권력의 강화가 아니라 상부상조와 애정 어린 연대와 생명의식의 강화를 통해서 이 행성이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방향으로 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건이다.(제7호, 1992년 11-12월) - P120

지난 10년 동안 《녹색평론》을 통하여 우리가 일관되게 이야기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성장, 팽창을 내재적인 요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산업경제, 산업문화가 물러나고, 새로운 차원의 농업 중심 사회가 재건되는 것만이 생태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건강한길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지고, 또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이 아니라 공빈공락(共共樂)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 P122

따라서 타자들 - 사람이든 아니든 - 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우리가 인간다운 위엄과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난하게,
겸손하게 사는 도리밖에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목소리를 낮추어야 딴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고, 사람이 조용해져야 새들이 노래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 P122

그러나, 실제로 미국적 생활방식 또는 미국적 문명이란 대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 전체 인구의 5%에 해당되는 인구가 세계 전체 자원의 대부분을 독점적으로 점유, 소비함으로써 유지되고 있는 그러면서도 인종적, 계층적, 성적 불평등의 문제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이른바 미국적 생활방식이란 결코 부러워할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전체의 평화와 생태계를 위협하는 재앙일 뿐이다. 석유의 낭비를 무한정 자극하는 미국적 생활방식이 아니라면 중동을 비롯한 세계 도처의 무고한 사람들의 자주적인 삶이 터무니없이 유린되지도, 토착민들의 땅이 무참히훼손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 P127

일찍이 간디는 서구문명에 대하여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게 못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간디에 의하면, 참다운 문명이란 자발적으로 물욕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 P128

간디는 사람들의 기본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는 이 지구는 극히 풍요로운 곳이지만, 탐욕 앞에서 지구는 지극히 결핍된 곳이라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 지상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이보다 더 간명한 진리를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 P128

《녹색평론》 독자들 중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평론‘이라고 굳이 고집해온 까닭이 없지 않다. 그것은 이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이 ‘저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상대화하면서 철저히 의심하고, 질문하는 행위,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의 저항을 뜻한다. 처음부터 《녹색평론》이 의도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사회와 세계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맞서서,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 올바른 방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 - 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 해법들이 개진되고 있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 진단, 해법들이 과연 안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좌우의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정당하게 설명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판단 밑에서 작업해왔다. - P131

그러나 문제는 그 ‘경제문제‘가 이제는 ‘에콜로지‘를 고려하지 않고는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국면에 지금 우리 모두가 처해 있다는 점이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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