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역사
마크 스미스 지음, 김상훈 옮김 / 수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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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부에서 시청각 교육(교육공학: Educational Technology)을 전공하였다. 우리 때 만해도 칠판식 수업과 필기위주의 학습이 주를 이루었지만 요즘은 보고 듣는(audio-visual)교육 외에도 후각, 미각, 촉각을 다양하게 이용한 오감체험 교육이 학교현장 밖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머지않아 과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등장하는 첨단기술의 제품과 IT기기의 대중적인 보급으로 이제 미세한 손끝의 움직임만으로도 복잡한 업무는 물론이고 교육, 오락, 방송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세상과 접속하며, 세상을 엿보고, 세상에 소리치고, 세상과 교류 할 수 있게 되었다. 내일은 어떤 새로운 소식이 소개될 지, 다음의 제품은 어떻게 발전되었을 지 이제 막 새로운 제품을 손에 넣고 겨우 손에 익을 즈음엔 여지없이 비웃기라도 하듯 언제나 나보다 더 새로운 제품을 손에 든 사람이 나타나고 세상은 또 저만치쯤 도망가 있다는 걸 느낀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숨가쁘게 좇아가는 것을 스스로 포기 하고 멈추게 되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욕심이나 뒤쳐진다는 느낌이 사라질 무렵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저들은 젊었다는 생각이 돌이킬 수 없는 결론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도 벅찬 현실에 '감각'이라는 것의 '역사'를 알아보고자 과연 감각 간에도 서열이 있어 그러한 시각이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하는 것들을 궁금해 한다는 것 자체도 썩 미래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선입견이 들긴 했지만, 마치 방대한 논문 열 편 정도를 훑은 것 같은 지적인 만족감은 결코 세상에 뒤쳐져 있다는 패배감을 충분히 보상해 줄 만한 것이었다.

눈에 보인다는 사실과 눈으로 믿는 진실
'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일 때가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확인방법으로써 이런 말을 하게 될 경우는 주로 남을 통해서 어떠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거나 소식을 접한 경우일 것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눈으로 보는 것은 '믿음'과 관련지어 생각해 왔던 것 같다. '내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못하겠다'라는 말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눈'이 진실과 지식의 원천으로서 '시각'이 다른 감각보다 우위에 자리해 르네상스, 18, 19세기 이후 종교, 의학, 과학,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권력관계를 야기하고 계층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보였다.

16,7세기 유럽궁중에서 시작된 발레는 정치적, 사회적 볼거리의 일환으로 발소리와 숨소리를 최소화 하여 초시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연기자들의 목표였으며 사회통제와 상류층의 관심을 하나로 결합시키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은 새롭고도 놀랄만 했다. 현대 발레를 생각한다면 아름다운 주제음악이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예술의 한 장르인데 소리가 강조되는 춤이나 음악을 노동자 계급이 선호하고 또 그들을 상징하기도 했다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가도 '발레'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멈칫거림이 있었다. 
 
또 하나,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드러난 공공장소에서 '흑'과 '백'을 구분하는 '눈'의 한계를 나타내는 두 가지 에피소드는 우리도 그들의 시선으로는 유색인종인 입장에서 무척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결론적으로 정체성은 오로지 눈으로만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하지만 나는 아직도 미국의 지하철을 탔을 때 육안만으로는 뚜렷한 흑인만 인식 할 수 있지 누가 흑인으로 오해 받을 수 있는 백인인지, 히스패닉인지는 구분하지 못한다. 이미 미국의 지하철엔 백인은 타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상식처럼 알고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오해로 인해 부당한 인종차별을 받을 확률이 있는 백인들의 문제인 것이지 백인으로 오해받아 인종차별을 받지 않을 흑인들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즉, 진실은 오로지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눈으로만 확인 된 사실을 진실로 여기고 싶어하는 오랜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시각과 협력해 감각을 드높이다
나이가 들면 생물학적인 청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기능이 떨어진 상태에서도 감각은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아마도 세월과 같이한 소리에 대한 '기억'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리는 시각보다 신뢰도부분에서는 하위에 있을지 모르지만 피부로 느끼는 체감력으로 본다면 더 직접적이라 생각한다. 청각의 역사에서 제시된 정치, 교육, 신앙에 대한 지배력은 모든 감각이 골고루 발달되지 못했던 시기인만큼 더 상대적으로 막강했을 것이다. 소리가 하나의 기호체계로서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는 역할을 하고 마차소리, 종소리, 대장간 소리 등 그 도시만의 독특한 기준음이 공동체 의식을 구축했다는 사실은 소리가 장소의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교회, 성당, 시장, 공장, 학교, 운동장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소리에 대한 영적이고 주술적인 힘이나 반대 개념의 소음의 문제, 소리를 기록하는 음반의 등장, 식민지국가를 대상으로 한 자아와 국가 정체성의 확보같은 청각의 발전은 오늘날 크게 주목할 만한 이변적인 요소로 다가오진 않았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요즘 마케팅의 일환으로도 자주 이용되고 있는 '낭독회'를 떠올릴수 있겠다. 혼자 눈으로 읽고 철저하게 혼자 느낄 수밖에 없는 독서의 외로움이 소리 내어 읽고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서로 공감을 나눌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분명 청각이 시각의 커뮤니케이션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한 무형의 매체라 생각한다.

나는 시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안경을 쓰는데 안경을 벗으면 이상하게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즉, 안보이면 안 들리게 되는 것 같아 누군가 나와 이야기를 하려할 때는 나도 모르게 안경을 찾게 된다. 그렇지만 안 들린다고 안 보이는 것인가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꼭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다. 실제로 나쁜 것은 시력임에도 불구하고 청력이 시력에 종속되어 약간의 통제를 받는 다는 생각을 한다. 시청각교육에서도 시각적인 정보만 제시하고 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면 약 30% 전달력이 떨어지지만 반대로 소리만 들려주고 시각적인 정보를 제시 하지 않으면 거의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실험을 통해 청각이 시각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어떤 감각이 어떤 감각의 우위에 있느냐 자체가 중요하진 않지만, 두 가지 이상의 감각이 사용되는 장르에서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방법을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냄새를 말 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냄새는 발생한다
신입사원 시절 우리 회사에 프랑스에서 파견 온 남자가 있었다. 그 친구는 유난히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나는 사람이었는데 자신도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진한 향수를 바꾸어가며 뿌리는 꽤 멋쟁이였었다. 그런데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이십년 이상 그의 육체를 만들어온 그 나라 특유의 문화와 그가 섭취해 온 음식을 다 종합한 그 세월의 냄새는 우리를 속일 수 없었다. 그가 한여름이 지나 사무실을 떠났을 때에도 그 냄새만은 두어 달 이상 건물에서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그의 존재를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냄새에 대한 기억은 시각이나 청각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그것이 안 좋은 기억일 땐 영원히 각인되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파리도심의 메트로 역사에서 나던 이해할 수 없었던 냄새, 미국 LA의 어느 박물관 화장실에서 나던 냄새, 일본의 신칸센만 타면 흘러나오던 냄새...나는 유난히 후각에 민감하며 냄새의 온갖 종류와 그에 대한 기억력이 남들보다 자세해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남들도 피곤하게 만들었던 적이 많았다. 나에게 냄새는 장소의 기억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향기와 냄새에 대해 정리한 연구들을 보니 고대와 중세에는 종교적 신앙과 밀접하게 결부 되어 있었고 그 후 근대와 현대를 거쳐 오면서 여성, 계급, 이념과 인종을 구분짓는데까지 정교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부르조아들이 범죄자와 가난한 노동자를 깍아 내리기 위해 계급적으로 후감통제를 이어 온 것과 그로인해 가난과 질병, 불결의 부정적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미지로 굳어졌으며 또 그것은 그들의 감각이 우둔한 것으로 정당화 하는 합리적인 선입견이 되었고 그러한 선입견은 그들의 참을성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을 보고, 나는 어떠한 감각을 잘 참는 것이 그 감각에 둔감하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감각을 잘 견디거나 그러한 행위가 반복되어 익숙해진다면 그것 또한 그 감각에 대해 둔감한 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연구는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훈련이나 연습을 통해 더 개발되고 민감해 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상위계급층이 하위계급층에 도살장 청소나 쓰레기 버리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후감의 권력행사를 보며 나는 현대에 와서도 작게는 학교에서 화장실 청소나 쓰레기 수거같은 체벌로 혹은 인분투척 같은 개인의 사회적 단죄를 떠올렸다. 아마도 악취는 죄악이라는 고대적부터의 뿌리깊은 의식이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연결지을 수 있었다.

맛이 멋이 되다
음식과 요리의 역사라는 틀 안에서 '맛의 역사'는 프랑스와 중국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은 우리와 친근하기도 하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세계 어디를 가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중국음식점을 보며 늘 신기해 하면서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상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수 있었다. 그 지방만의 특산품과 조미료만으로 만든 요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중국인들에게는 자기 지방과 민족의 음식과 맛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으며 그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결국 민족의 정체성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 같다.

또 영국에서는 지배층의 문화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육안으로 구별이 어려운 시각보다 미각으로 격차를 벌이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했으며 설탕을 노동자 계급에 이용해 더욱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이득을 얻기도 했으며, 초창기에는 옥수수가 돼지사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등은 매우 흥미로왔다. 내 경험으로 보면 입맛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면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바뀌어 진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맛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해외 이주민의 경우 미각이 국가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정서적 진정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에 충분한 공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경우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가'라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미각에 대한 진리의 탐지 역할과 그에 대한 신뢰는 보고 듣는 것보다 더 아래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멀고 사람이 많아도 애써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미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다른 감각도 뛰어날지 만약 다른 감각에 더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어떤 감각인지 궁금하다. 미각이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사용되었다면 아마도 미각과 연계된 우수한 감각 역시 그 민족의 문화적 발달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만질 수 있다면 가질 수 있다
가장 열등한 밑바닥 감각으로 이해되어져 온 촉각의 역사는 아무래도 감각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락이었다. 특히, 눈알을 도려내 피부에 가해지는 체벌에 대한 견딤으로 남자다움과 지위를 판단하기 위해 손톱을 기르고 눈알을 파는 것이 일상적이었다는 사실은 나이든 여성 산파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힘을 보여주기 위해 젊고 임신한 여성들을 촉각적으로 괴롭혔다는 사실 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인종차별에 촉감적인 해석이 개입되어 80년대 에이즈의 원인과 감염에 흑인의 타락과 성애에 관한 인종적 고정관념이 투사된 것 역시 노동력 착취와 서열 확립을 위한 지배층 역사의 오래된 관습을 대변하는 것 같아 문화적면에서 결코 상대적인 평가에 자유롭지 못한 유색인종으로서 반가운 결과는 아니었다.

만져 볼 수 있다는 것과 만질 수 없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디지털 시대에서 촉각은 아날로그적 감성과 교류, 물리적인 접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상하는 그 실체를 확인해볼 수있는 실존하는 무게감의 존재증명과 지각의 감각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터치감을 중요시 하는 디지털 제품들에서 손끝의 예민한 감각으로 화면과의 접촉을 통해 컨텐츠를 올리고 보내고 내려 받고 만들 수 있지만 아무리 첨단의 제품일지라도 촉각의 수준자체가 그 제품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시기는 이미 지나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만져 본다는 것은 점점 더 희소성의 감각으로 위태로와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 장에서 제시한 박물관의 유물 만져보기는 단순한 역사를 체험하는 의미로서의 촉각이 아닌 소유를 욕망하는 접촉의 의미로 해석되어 결과적으로 교육적 효과보다는 관리적 측면에서의 제한된 실험요소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다. 만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감각보다 확실히 내 것임을 상징하고 증명하는 하나의 기표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인간의 욕망과 연계된 더 많은 연구결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결론 부부에서 감각의 역사성과 재현문제에 관한 논의들은 당면하고 시급한 문제로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감각의 역사가 외교정책에 도움이 될 것이며 그 예로 감각에 대한 우위가 서양과는 다른 인도에 대한 사례는 같은 아시아이긴 해도 문화적, 외교적으로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꽤 중요한 논제가 아닐 수 없다. 역자도 후기에 밝혔듯이 서양사학자의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구이기도 하지만, 간혹가다 예외로 등장하는 중국과 인도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감각의 역사도 정리되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 분명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고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의 계보와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실용적인 측면에서 후속적인 연구가 이어지길 바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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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한기
이지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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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참, 원나참, 참나원....
이 소설 한마디로 유쾌경쾌상쾌 하다 !!!
큰 기대 없이 열어본 선물상자나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영화 한편이 꼭 그 쪽 일 것이다. <청춘극한기>라는 물과 불의 속성을 한데 섞어 놓은 듯한 묘한 느낌의 제목에 대한 호기심과 전작 <모던보이>를 통해 이미 재기발랄한 발상을 기대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그냥 말 그대로 그뿐이었다. 더군다나 개인적으로 얼마 전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벨이 울리고>를 덮고는 다시금 청춘연애소설에 대한 얼마간의 기피현상까지 생기게 된 나로서는 솔직히 다시 <청춘>이 반갑지 않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소설, 이 작가 퍽이나 괘안타. 영화로 치면 코미디와 액션, 스릴러, SF, 적당한 멜로까지 온 장르가 잘 버무려진 12세 관람수준으로 학생관객까지 동원할 수 있는 설이나 추석 특수 초특급 흥행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읽는 내내 웃다가 짠하다가 또 뒤늦게 미소 짓다가 진지해지다가 결국 마지막엔 시원스레 박수치며 고개 끄덕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책 읽는 동안 연관되어 떠오르는 다른 잡념없이 오직 책읽는 즐거움에 몰두하며 빠른 시간에 책을 덮었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고 그만큼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없는 건 사랑해 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이 없음을 안타까와 하는 고백의 심정과도 같을 것이니 이해를 바란다.

희망을 짝사랑하는 청춘...
이 작품에는 일, 연애, 인간관계 등 살면서 그다지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자칭 백수의 시나리오 작가인 서른 정도의 일인칭 화자 '옥택선'(2PM의 옥택연이 내내 연상되었지만)이 등장한다. 그녀는 스타벅스에서 소개팅을 하며 자신의 유품으로 주성치와 에릭 로메르 DVD, 아이북과 아이팟, 낡은 나이키 조깅화, 어그부츠, 빛을 보지 못한 작품의 메모들, 이 빠진 머그잔, 머리냄새가 밴 쿠션 등을 떠올리고 끈기나 패기, 희망, 행복같은 것에는 변변찮은 생활만큼이나 큰 미련이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명의 부실한 청춘임에 틀림없다. 여기까지는 흡사 김애란식 소설에 등장하는 편의점에 가는 이십대 여자와 비슷한 현실에 냉소적인 성격을 예상할 수 있었다.

"..희망이 간절한 사람은 때론 희망이 두렵기도 해. 희망밖에는 가질 게 없으니까...그러면 오히려 희망에게 배신당할까봐 피하게 되지. 짝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숨는 것 처럼." 58p

어린시절 재혼한 아버지는 다시는 가질 수 없는 희망으로 옥택선의 가슴에 문신이 되고 결국 무언가 간절할수록 그것이 두려워지는, 그리하여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방어기제로 무관심이나 냉소, 미련 버리기 같은 부차적 반응이 일상화 되 버린 것이다. 이긴 자가 다가진다는 말을 청춘이 한참 지난 후에 비로소 깨달은 나는 그래도 순진한 축에 속했지 싶다.

마법의 시간으로의 초대...
그러나 작품 초반부에 묘사되는 남수필과의 소개팅 분위기, 첫사랑인 김연우와의 흥분된 재회 및 뜬금없는 고백상황, 남수필이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연락에 이은 연우와 함께 공무원들로부터 도망치는 장면까지 빠른 속도로 펼쳐지던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남수필이 문자메시지로 실마리를 제공한 이균과의 만남이 전개되는 중반부로 넘어 오면서 부터는 잠시 머뭇하며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는데 이는 러브 바이러스의 이차적 징후인 '마법의 시간'을 거치면서 그 절정에 달한다.

- 내가 누구인지, 나란 존재를 이루는 사건과 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내가 애써 외면한 진실은 무엇인지, 그것들을 추리하며 슬슬 나를 지배하는 그것에 대하여 감을 잡기 시작했다. 139p 
 
이는 러브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인해 나타나는 1차적 징후 - 온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뛰고, 흥분으로 들뜬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느낌 - 를 겪고 난 후 그동안 잊고 지내던 무의식 속 자신의 지난 과거를 하나씩 회상하는 것으로 비록 바이러스 자체는 무방비 상태에 들어온 것이지만 이를 충분히 객관화 하여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암시하는 상징적 희망기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독감에 걸린 후 주사를 맞으면 내 안의 지독한 바이러스와 그것을 퇴치 하려는 약들과 치열히도 치고 박으며 서로의 힘겨루기를 하는 내적인 싸움의 시간처럼 말이다.

'마법의 시간'에서는 20년 전 헤어진 아빠를 다시 만나기도 하고, 아직은 미숙하기만 했던 스무살 첫사랑을 기억나게 하고, 어릴 적 뛰놀던 동네를 생각나게 만든다. 비록 지금 바이러스에 감염된 청춘은 가시화되지 않은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하지만 마법과도 같은 반추의 시간은 어떤 외부의 자극이 아닌 순도 백프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하여 결국엔 바이러스가 아닌 진짜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하는 '치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하나, 옥택선이 첫만남에선 옥신각신하며 서로를 반신반의 하다가 바이러스로 인해 서로가 원치않던 사랑을 느끼지만 백신의 치료로 정상이 된 후에도 병리학적 전염병이 아닌 진짜 가슴으로 사랑을 느끼게 된 현실의 인물 이름이 이균인 것은 아마도 바이러스의 가짜 사랑균과 가슴속 진짜 사랑균 두 가지를 암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개인적 이익을 위해 동료의 희생을 당연시 하고 성공을 위해 비열한 태도가 경쟁력이 되 버린 이균의 가슴에도 러브바이러스의 감염 후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찾게 되었으니 그 또한 옥택선 만큼 기뻐할 일이었다.

감염을 희망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작품 후반부에서 옥택선이 성교수를 만나 러브 바이러스의 백신 개발을 위해 기꺼이 실험용 쥐 신세가 되는 과정과 이균과의 바이러스가 아닌 진짜 사랑의 시작을 암시하는 장면, 뜻하지 않게 '바이러스 가이드'가 되어 자신처럼 다시 다양한 감염자를 만나 사회적 역할을 마다않는 능동적인 변화들은 분명 같은 <청춘>을 소재로 하면서도 궁극에는 그 불완전함과 현실적인 고뇌, 실존적인 물음 등을 던지고 막을 내렸던 무거운 작품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결말이었지만 몇 개의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작위적인 연출-아이돌 그룹의 리더와 사제지간의 바이러스 가이드가 되는 설정 등-은 자칫 만화적인 설정으로 인식될수 있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나 역시도 앞만 보고 달려온 청춘에 대해 그 치열했던 시행착오를 다시 떠올리면 얼굴이 뜨거워 고개를 들기 민망할 정도이다. 사실 청춘이라는 극한기를 거쳐 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이나 희망 버리기 같은 소극적이고 패배적인 방어기제를 사용하면서 사회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학부모가 되고 중년이 된다. 많은 상처와 미련으로 세상에 속고, 사람에 사랑에 다치다 보니 굳은살의 모양이 그만 얼음같은 외모로 굳어져 버렸던 것은 아닐까.

지금 청춘이든 아니든 이 작품을 접한 독자들은 잊고 지내던 시간들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 처럼 다시 찾아오는 마법의 시간을 경험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 안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도 될 바이러스 일 것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을 시켜도 좋은 바이러스 일 것이다. 목숨을 위협하거나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해도 좋을 것이다. 잠시 활동을 멈췄다가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잠복 감염의 증상을 보여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삶을 청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앞으로 끝없이 살아내는 동안 사랑하며 살 수 밖에 없을 바이러스.

이제, 나에게도 전염되었음을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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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해요 2010-06-05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이장욱 외 지음 / 작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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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소설에 등장하는 7명의 작가들은 책의 이름처럼 2010년 현재를 대표하고 있는 현역소설가인 듯하다. 그들이 이미 한국문단에서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중복되게 수상하였다는 이력은 둘째치고라도 지극히 일반적인 독자부류에서 보았을 때도 그 이름 두석자를 간간이 접해보았다는 면에서 이른바 세상에 대한 노출 빈도횟수가 높은 작가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모두다 문단에 주목받으며 좋은 평을 받았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꼭 그래도 그중에 1등은 누구의 작품인지를 습관처럼 확인하려드는 의식적인 무의식에 살짜기 미안함을 전하며 일곱 편의 작품을 비교적 공평한 애정을 품은 채 <오늘의 소설>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 이장욱 <변희봉>
 요즘 관객들은 변희봉의 대표작을 봉준호 감독의 <괴물>로 알고들 있겠지만 80년대 사춘기를 보낸 내 기억속의 변희봉은 단연 역대 시청률 78%를 자랑했던 <사랑과 진실>이라는 80년대 중반의 김수현 드라마에서 보여준 비밀의 조연이었다. 25년이 지난 내 머릿속에서도 주인공 원미경이나 정애리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남아있던 그의 연기, 그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그로테스크함의 정수 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주인공 원미경의 출생비밀을 알고 있는 고향아저씨로 잊을만하면 원미경의 주변에 나타나 그녀를 불안에 떨게 했던 조연 중에서도 매회 등장하지 않는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었다. 그의 캐릭터가 이토록 누가 들어주든 그렇지 않든 오랫동안 불편한 진실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해온 만큼 <변희봉>이라는 작품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혼란스러운 오늘 을 사는 현대인에게 아마도 이름석자로 그 어떤 진실이상의 확연한 메타포를 선사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섣부른 예감을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초등생 시절 지금의 김연아처럼 예쁘고 날씬한 서양선수들이 피겨나 체조경기에 등장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경쟁을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 이웃사촌이자 학교선배이자 나의 물주였던 내 사촌언니와 체조 금메달 선수인 코마네치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놓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사촌언니는 소련, 나는 루마니아- 훗날에도 코마네치가 어느 나라사람인지를 심심하면 물어보는 계기가 되었음- 를 내걸고 당시 걸 수 있었던 모든 걸 걸었던 시절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었던가. 그 유명한 10점 만점의 10점 연기의 주인공 코마네치가 소련이 아닌 루마니아 사람이란 것을 의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오지만 사촌언니는 내기에 진 사실에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는지 그 전처럼 나를 예뻐하지도 않았고 성장하면서 더 이상 친해지지 않게되는 계기가 되었던 코마네치 국적내기 사건...이장욱의 변희봉은 어쩌면 내 사촌언니에게 코마네치와도 같지 않았을까.

2009 현대문학상 수상후보작이었던 <고백의 제왕>에서 보여준 '소설 읽는 재미' 를 다시한번 통렬하게 느낄 수 있었고, 배우<변희봉>의 이름이 주는 상징성처럼 <이장욱>이라는 이름이 오늘을 살고 오늘을 파헤치며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의 대표성을 획득하리라는데 한치의 의심을 가질 수 없는 작품이었다.

- 김숨 <간과 쓸개>·
간혹 단편을 읽을 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소설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떠올라 몰입을 방해할 때가 있고, 반대로 작품 속 주인공이나 상황 속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는데 <간과 쓸개>는 철저히 후자였다. 화창한 어느 봄날 마주친 노인이 작품을 쓰게 했다는 작가는 홀로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간암환자의 쓸쓸한 일상을 저수지의 검푸른 물빛 처럼 나즈막히 들려준다. 쓸개에 큰 이상이 생겨 자식들의 집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는 구순의 누님을 만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지병인 간암을 하루하루 견뎌낼 수 있는 생의 목표라도 되는 듯 누님과의 재회가 이루어지기까지 노인의 소소한 일상은 그립다 못해 몸서리쳐지기 까지 하다. 마지막 누님과의 외나무 같은 재회에서 마주한 누님의 '뭣 때문에 우는가?' 이 한마디는 참고 참아왔던 노인의 고독함과 서러움을 기어이 터뜨리고 마는 한방의 먹먹함을 선사해준다. 그리고 늙음과 자식을 위해 그래도 희생하였던 부모라는 인정하기 싫은 진실이 훗날 내 모습이 될지 모르는 슬픔과 마침내 겹쳐지며 천천히 숙였던 고개는 다 들지 못한 채로 막을 내린다. 
 
2009년도 현대문학상 후보작중 하나였던 <모일, 저녁>에서 보여주었던 평범한 일상의 소름찾기를 선연히 기억한다. <모일, 저녁>이 피부 바깥으로 오소소 드러나는 소름이었다면 <간과 쓸개>는 조용히 내장을 관통하는 소름이었다.

- 김애란 <벌레들>
서울 변두리 재개발 구역의 낡은 연립주택으로 이사 온 신혼부부의 벌레와의 동거이야기가 온갖 종류의 다양하고 끔찍한 벌레들이 끝내 스물스물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제목이 된 <벌레들>은 실제 소설 속 재개발 현장에서 주거공간으로 침입하는 불청객이기도 하지만, 더 넓게는 하루가 멀다하고 공사가 판을치는 대도시와 그 개발현장 안밖에서 인간성을 서서히 질식시키는 위협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달동네를 밀어내고 들어서는 첨단의 건축물 혹은 그러한 인공물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만삭의 신부가 그러한 온갖 종류의 벌레를 생산해내던 쓰러진 나무를 보면서 거기서 탈출하던 벌레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산통을 극렬하게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몸서리치도록 그 고통의 끝이 아득하기만 한 산통의 현장에 비로소 주인공이 된듯했다.

- 김중혁 <유리의 도시>
유리의 자살 이라는 겉으로는 미학적으로 보이지만 다소 폭력이 내재된 도시형추리소설을 만난듯했다. 도시의 부속품처럼 인식되던 대형유리가 물리적인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떨어져나가 길을 가던 무고한 행인을 살인하게 되고 섬뜻한 생명성을 가지게 된다. 소설은 뭔가 허무한듯 시원스럽지 않지만 주제전달이 명쾌하다. 커다란 반전은 없었지만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가의 장르적 취향도 엿볼 수 있었다. 2010 젊은 작가상 대상작인 1F/B1를 읽고서도 도시라는 거대파일속에 보이지 않지만 어긋나버린 디스크 조각들을 치밀하게 파일링 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이 끝나고 곁들여진 애니메이션 작가노트를 기억한다. 작가의 홈피를 방문했더니 흡사 신문의 연재만화를 보는 듯 지적인 디자이너였다. 그의 아이디어 창고 속에서 새롭게 탄생될 도시를 기다린다. 프로파일러와도 같은 그를 통해 오늘의 비열하고 차디찬 도심거리에 복수라도 하고 싶어진다.

- 배수아 <무종>
2010 이상 문학상 우수상에도 선정된 작품이다. 작가 자신이 매우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라 말했듯이 읽는 내내 무의식의 저편을 단절없이 방황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현격하게 호흡이 긴 문장과 의식의 흐름에 따른 배경의 연속적인 등장으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소설 속에서조차 꿈과 현실, 회상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특별한 사건이나 반전, 캐릭터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화자의 사적인 생각의 흐름만으로 글이 전개 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실제로 얼굴도 모르는 스무명의 사람들과 여행을 준비 중인 다급한 상황에서 작품을 썼다는 작가의 후기를 보니 어렴풋한 이해를 곁들 일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이-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새로운 스타일을, 독특한 미학적 의미를, 작가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상징한다는 평론의 긍정적인 반응들이  더 진부해보였다. 이제는 좋은 게 좋은 게 아닌, 새로우면 새로운 것인지, 다르면 실험적인 것인지 독자로서 주제넘은 생각도 해보게 된 작품이었다.

- 신경숙 <세상 끝의 신발>
당혹스럽다. 나는 도시인의 고독이나 이중적인 인간상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글들에는 내성이 강한편이나 가족이나 농촌, 특히 전쟁을 겪어내고 살아온 세대와 다음세대와 연결되는 상처들에 대해서는 유난히도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는 편이다. 신경숙은 우리가 상실한 가족이나 공동체의 의미를 가장 따스하게 위로해주는 대표적인 작가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어떤 작은 일상일지라도 그냥 술술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당시 열여섯, 열다섯이었던 아버지와 낙천 아저씨의 목숨을 주고받은 신발에서부터 어린 시절 친언니처럼 돌봐준 순옥 언니의 가죽부츠, 어른이 된 내가 취재했던 발레리나의 토슈즈와 스케이트 선수의 스케이트 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소복히 쌓여만가는 하얀눈밭을 좇아가며 계속하여 야속한 발자욱을 남기는 일같이 미안하고 아프기만하다. <세상 끝의 신발>이 그렇게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이 들에게 부디 한겨울 털신같은 포근함을 안겨주길 바란다.

- 편혜영 <통조림공장>
2010 이상 문학상 우수상으로도 선정된 작품이다. 2010 젊은 작가상에 빛나는 <저녁의 구애>에서도 예상치 못한 반전에 소름이 돋았고 그 여운이 너무 길었는데 <통조림공장> 역시 한동안 회색빛 문체가 퍼즐처럼 둥둥 떠다니는 듯한 '활자의 표류현상'을 경험했다. 도시의 대량생산과 획일화된 삶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는 통조림 공장에서의 공장장 '박'의 실종과 '박'의 실종 후에도 변함없는 정형화된 공장의 일상, 노동자들의 무표정과도 같은 행동들이 점차 노동자보다 더 냉담할 것 같은 독자의 가슴에 저마다 반복적인 노크를 해댄다. 처음엔 마치 피 한방울도 없을 것 같은 무감정의 기자가 사실만을 객관화해서 쓴 기사를 읽듯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만 남은 공장장의 실종에서 존재의 불안은 곧 마주한 나의 내면을 끔찍이도 파고들어 결국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감정의 교사상태에 이르고 만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음식이 아닌 온갖 실존하는 물건들을 통조림에 넣고 밀봉하듯이 내안에서 도망가지 못하는 작품에 대한 패배감 역시 작가가 제공한 통조림에 조용히 밀봉해 버리고 싶었던 그런 작품이었다.

  9시 뉴스만 매일 시청하여도 소설의 소재는 얻을 수 있다는 어느 작가의 인터뷰를 떠올린다. 소설보다 더 잔인한 현실을 보며 어쩌면 소설 속 세상과 인간의 이야기는 차라리 따스한 난방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우리와 같은 공간, 우리와 같은 시간인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들의 오늘의 소설은 이러한 소설보다 더하거나  못한 현실을 견디어 내는 또 하나의 청정 시스템 일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잠시 오늘의 세상과 오늘의 인간을 만나고 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지독하고 어떤 이가 더 형편없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오늘, 오늘을 같이 살아낸다는 것이다. 그가 작가이든 독자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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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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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 나가서 문 열면 들어와 !" 

  중학교 1학년 이었다. 우리 반 선생님은 체벌이 비교적 육체적, 물리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주로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거나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았을 때 교실 밖 복도에 정해진 시간만큼 서있으라는 벌을 내리셨다. 평소에 손바닥 또는 엉덩이를 때린다거나 무식하게 운동장을 몇 바퀴 돌거나 하는 체벌이 아니었던 지라 나는 어떨 때 너무 벌이 약한 거 아냐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과목의 노트를 챙겨오느라 열심히 정리한 숙제를 내지 못했고 하필 그 우아한 체벌의 대상자가 된 것이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바깥으로 나가서 문 열면 들어와' 이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교실 밖 복도 벽을 향해 뒷짐을 진 채로 십여 분을 서 있었던 것 같다. 애써 정리한 노트에 대한 아쉬움과 숙제를 하고서도 벌을 받게 되었다는 억울함은 둘째치고서라도 서서히 밀려오는 서러움에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이까짓 벌에 눈물을 보이긴 싫어 참고 또 참았다. 복도엔 수업이 시작되어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내가 벌을 받는지 누구하나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우리 반 외에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어쩌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반 친구들도 내가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했으리라-차라리 다른 친구들 속에 섞여 운동장 백 바퀴를 돈다거나 아니면 빡세게 뺨이라도 한 대 맞는 편이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내 자존심은 그야말로 서서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느낀 서러움은 아마도 저들은 '안' 에 있고 나는 '바깥' 에 있다 는 상대적 좌절감이  아니었을까. 내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때 바깥세상으로 내밀려진 당시의 느낌은 영원히 추억의 '바깥'으로 내던지고 싶은 내'안'의 비교적 선명한 상처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참 편하다. 그래서 덮고 나면 무언가 불편한 진실을 건내 줄 것 같은 책들은 서점에서의 만남을 마침표로 찍고 들어올 때가 많은 요즘이다. 성공이나 처세를 위해 한 계단 더 올라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는 책들보다 자신에 대한 성찰, 치유에 관한 책들이 더 대세인 최근 경향에 편승하려는 기미가 엿보인다거나 결국 참신한 정밀화보다는 빤한 추상화를 감상한 듯한 허탈감, 혹은 다양성에 대한 착한 교육적 메시지에 에돌기만 할 것 같은 섣부른 염려로 고백하건대, 이 책을 쉽사리 들고 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끝내 내 발길을 돌려놓은 미련 섞인 그 한마디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의 '바깥' 이었다.  

  신문사 기자가 취재한 인터뷰 연재기사라는 소갯 글을 뒤로 나는 어쩌면 어느 '시' 제목과도 유사한 느낌의 그 한 구절을 통해 시집이나 잠언집을 집어들 때의 문화적 우월감을 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순간 많은 대중들이 선택하는 법정스님이나 하루키, 베르베르의 소설 앞에 몰려있는 독자들의 안마당이 아닌 그들의 '바깥'에 서 있는 내 자신에게 야릇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표지에 뚫려진 조그맣고 네모난 하얀 창 뒤로 빨갛게 드러나는 속살, 이제는 잊었을지 모를 내가 가진 바깥 세상에 대한 첫 추억을 기어이 들추어 살며시 어루만져 주고 싶은 조금은 유치하고 이유 있는 이기심이 더 정확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바깥 세상의 세가지 모임 

 저자도 언급하였지만 '바깥'이 주는 의미를 구태여 분석하지 않아도 우리는 긍정보다 부정의 메시지에 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굳이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 주류 혹은 집단 가치의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적 의미의 아웃사이더, 세勢에 쫒겨 밀려난 주변인, 혹은 사물, 시간, 공간까지 불러오지 않아도, 반대개념의 '안'이 제공하는 안락함과 따스함, 안정감, 선택되어진 기쁨이나 성공의 대열에 안착하는 듯한 느낌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건 어떤 가르침 없이 알게 되는 사계절의 변화나 생노병사의 진리쯤 된다고 말한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서글픈 것일까.

  육개월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가 만난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현재의 인물들, 그리고 동물, 사물, 음식, 공간 이 스물여섯개의 대상들은 바깥세상이라는 위치적인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저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바깥 안에서 자신만의 에너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 운동성의 모습과 행태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깥이라는 개념을 구분 짓는 기준과 근거와 관련이 있는 바, 주제넘지만 기자가 만나본 스물여섯의 대상을 취재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미있는 '동사動詞'의 모임 으로 그들을 다시 무리지어 보았다. 내 나름대로 저마다의 사연을 더 곡진히 존중하고 싶었고, 바깥이라는 결과보다는 그 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더 이해하고 싶었다. 

< 바깥으로 밀려나다 - 바깥에서 피어나는 꽃 >

  첫 번째는 시대의 역사적 흐름이나 자연적인 이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밀려난 경우이다. 10년을 경주마로 살았던 퇴역마 다이와 아라지, 택배기사 된 연극배우 임학순, 40원어치 폐지신세로 절판의 운명을 맞이하는 책들, 은행지점장까지 지낸 IMF 명퇴 1세대 정석희, 한 시대를 상징했던 <광야에서>를 작곡한 '노찾사' 문대현, 아득한 역사의 오브제로 점점 멀어져 가는 우표, 70년대 인기를 누렸던 가수 주정이, 지배적 사회윤리에서 벗어난 유림의 성균관장 최근덕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밀려나다'라는 개념은 다분히 타의적이다. 세월과 나이에 밀려났고, 사건이나 현상에, 혹은 주변의 권유, 아니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떠밀리다보니 어느새 주류와는 멀어지고만 경우이다. 이들은 그래도 한때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박수를 받았으며,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해 인정도 받았으며, 세상을 향한 말이나 글에 힘있는 권위를 실을 수 있었다. 경주마는 마음껏 달릴 수 있었고, 책과 우표는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매번 넘기거나 붙여야 했을 것이다.
  바깥세상이라는 구역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분의 추락을 경험한 경우이므로 세월에 대한 야속함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좌절감이 가장 컸을 것이라 어림짐작해본다. 그들중 가장 현실적인 타협을 통해 개인의 자아에서 사회적 구성원들 이라는 공동체로 그 대상을 감동적으로 넓혀간 명퇴 1세대 정석희님이 나는 가장 뿌듯했고 멋져보였다. 불교사찰을 돌며 버스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그의 겸손한 '하루출가'가 그 어느 유명한 종교인 부럽지 않은 나날들로 다시 꽃피고 있었다. 
 
< 바깥을 택하다 - 똑똑한 클라라 보다는 >

  두 번째는 보다 자의적인 의미에서 이미 바깥임을 알고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강력한 의지를 배경으로 바깥을 선택한 경우이다. 노인들의 2천원 짜리 낙원을 꿈꾸는 허리우드 클래식 사장 김은주, 정통 사회주의자이자 직업혁명가인 이일재, '세계마을 영화축제'를 꿈꾸는 떠돌이 영화감독 신지승, 마음가는 대로 음악을 한다는 홍대 인디밴드 타바코쥬스, 천시와 배척된 30년을 무당으로 살아온 천하대신 할머니,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셋넷학교 박상영 교장, 재주나 묘기가 아닌 소리로 인정받은 풀피리 연주가 오세철, 높은 정신력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성베네딕트 요셉수도원 안 마르코 수사, 민주화된 한국을 모델로 삼은 미얀마 난민 조모아, 호랑이의 정기를 담아내는 다큐 감독 최기순, 한국 출판계의 원칙주의자 개마고원 장의덕 사장이 그에 해당된다.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바깥으로 밀려났다기 보다는 보다 진취적으로 그 바깥세상을 향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오롯이 던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택한 바깥세상이 주는 의미와 그 현실이 주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선택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적어도 각자의 바깥세상 안에서는 그들도 리더이거나 어느정도 최고로 인정받고 있었다.

  다만 슈만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클라라처럼 자신의 선택을 지나치게 정당화하는 일종의 '과잉 정당화(over-justification)'에 해당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소심한 독자로서 바래본다. 과잉 정당화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기에 스스로 너무 똑똑한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보다, 슈만을 위대한 작곡가로 만드는 편이 똑똑한 클라라에겐 더 쉬운 선택이었던 것 처럼 바깥을 당당하게 선택한 그들 역시, 자존심 때문에 아닌줄 알면서도 행여나 고집스런 행보를 미련하게 끌고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바깥에 놓이다 - 영원한 바깥은 없다 >

  마지막으로, 주변이나 세월의 속도에 밀려난 것도 아니고, 또 바깥 세상을 선택한 것도 아닌 어찌하다 보니-타자의 시각에서 바라본-바깥세상에 놓이게 된 경우이다. 박태환의 훈련파트너 수영 국가대표 배준모, 산악계 휴머니스트 넘버 3 한왕용, 서울대 박사출신 시간강사, 이영애와 김연아의 손모델 최현숙, 주역이 아닌 군무 발레리나 안지원, 삶의 상징적인 바깥공간 비부장지대 DMZ, '바깥스러운' 뉘앙스의 우리술 막걸 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손모델과 막걸리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꿈꾸는 최고의 경지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또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동료 중에는 우연히도 최고 중에 최고가 떡하니 존재한다는 애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재능과 실력, 성실함이 부족하여 2등이나 들러리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그보다 더 완벽했던 김연아가 있어 2위에 머무른 아사다 마오와 비슷한 그림이라고나 할까.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현재위치에 대한 크나큰 좌절감이나 '안' 세상에 대한 불만은 알고 있는 만큼보다 덜하다는 것이다. 그저 결과적으로 대세의 흐름이나 주류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바깥으로 분류된다는 것이지 여전히 묵묵히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하고 있는 것을 그만둘 생각도 없다는 점에서-이들도 처음부터 인정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그들이 견디었을 시간의 내공이 보다 안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전 다섯 번의 올림픽 도전에도 끝내 메달획득에는 실패한 이규혁 선수를 기억한다. 인기개그맨의 매니져였거나 인기가수의 백댄서였지만 지금은 자신도 어엿한 스타가 된 연예인도 서너명 알고 있다. 막걸리가 지금처럼 주목받기 전에는 특정 여학교의 축제를 지속적으로 훼방놓는 모 대학교를 상징하는 대표성을 띠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바깥이라는 의미를 최고나 1등을 상징하는 수직적 개념으로서 보다 그 하위에 해당되는 것들을 총칭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그 의미를 보다 더 반갑게 받아들여 따스하게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노력하고 꿈꾸는 자들에게 안과 밖을 구분짓지 않고 그저 박수를 쳐주면 되는 것이다.

  며칠전 어느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나왔을 때의 일이다. 첨단 멀티플렉스 극장도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관객을 몇 개의 엘리베이터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마침 우리의 차는 지하 3층에 위치해 걸어가는 피곤함보다는 기다려서라도 엘리베이터를 탑승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그런데 우리가 위치한 층에 열려지는 엘리베이터엔 사람이 꽉꽉 차있어 우리가 탑승하면 바로 인원초과 경고음이 가차없이 방송될 순간이었다. 몇 번의 기다림 끝에 겨우 탑승을 했고 각층마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멈춰 문을 열고 다시 닫느라 너무나 피곤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엘리베이터 '바깥'에 위치한 우리들의 심정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깥 사람들을 바라본 심정은 화장실 들어가고 나올 때와 같이 너무나 달랐다. 바깥에서의 애졸임과 상실감이나 안에서의 안도감과 성취감을 넘나들 필요 없는 비상계단으로의 속편함과 떳떳함, 이 책은 그런 비상계단을 이용하는 관객들-기자가 대상을 인터뷰하는 심정으로-의 현명한 선택이자 그 결과 누리게 될 자기 존중의 끄덕임, 그것은 아니었을까.   

 뫼비우스의 띠,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

  최윤필 기자는 프로필에 '기자를 하면서 밥을 벌어 먹은 게 아니라 빌어 먹은 것 같다'는 글을 남겼다. 검색을 해보니 기자로 산다는 것이 너무 기생하고 산다는 느낌이 들어 기자직을 그만두었고 목수라는 '딴짓'을 18개월 정도 하다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져서 재입사한 직후 다시 펜을 잡으며 연재를 시작한 것이 바로 '최윤필 기자의 바깥'이었다. 즉, 자신이 조직에서 주류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신문사 기자라는 직업적인 주류세상에서 빠져나와 '목수'라는 바깥세상에서의 노동을 몸소 체험 한 후 비주류의 세상과 사람을 취재한 것이니 어쩌면 책의 제목은 결국 어느 날('안' 세상에서 빠져나와)바깥으로 들어간 자신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느 신문이나 주목을 받는 것들은 따로 있지만 바깥과 안을 그 범주에서 보면 신문에 속하는 이야기들이 안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바깥이 자신이 쓰는 대상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내가 귀를 쫑긋한 부분은 바로 그 '범주' 라는 바깥과 안을 구분 짓는 의미에서의 개념적인 울타리 그것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바깥이고, 바깥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적어도 그 기준이 사회통합적 의미에서 관용되고 있는 범위 내라는 전제하에-근거나 필요조건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존재하다면 과연 타당한 논의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개인적인 딴지를 걸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터다.  다행히도 그는 책머리에 자신이 바라본 바깥과 안의 경계는 아주 허술하고 느슨하여 혹자는 '어떻게 이게 바깥이야' 라고 시비일지 모르지만 경계의 경계警戒가 삼엄하지 않아 안과 바깥이 평화롭게 바뀌고 섞이기도 하는 구분이 없는 세상을 바란다고 다소 김빠지긴 하지만 겸손하게 속내를 비추고 있다. 이마저도 아마 기자에서 목수로 다시 목수에서 기자로 유연하게 넘나드는 자신의 행보를 바라보는 주변 혹은 스스로에 대한 조심스런 격려의 시선이자 독자에게 바라는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의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니까 결국 그는 자신이 '안'에서 빠져나왔던 '바깥' 세상을 다시 '안'으로 들어와 세상에 알리고자 하니 잠시만 주목해 달라 한 것 아니겠는가. 마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는 오래된 속담처럼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으니 다시 안으로 들어와 바깥을 소개하는 치밀하고도 정당한 그의 플랜은 정말로 기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까 그의 시선은 자칫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바깥으로 밀려난 갖가지 사연에 섣부른 연민을 자극한다거나 모질게도 지켜낸 비주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에 의례적인 박수를 치지지도 않을뿐더러 인터뷰 대상에 대한 개인적인 동조나 평가를 미루고 접어둔다.

  어찌보면 그의 문체는 대지에 꽃이 만발하는 화려한 '봄'이 아닌 처연하게 떨어지는 낙엽소리에 가까운 '가을'이다. 계절의 감성에 호소하진 않지만 꽃내음과 낙엽의 습기가 뿌리깊이 스며들어 이미 그의 뇌세포를 거친 외피와 내골이 이루어낸 오랜 약속처럼 그렇게 흘러간다. 유유히 흐르는 절제와 냉정에 가까운 필력들이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강물과도 같아 책을 덮고나니 말없이 가슴이 편안해진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인터뷰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인터뷰 대상을 더 배려한 결과- 대상을 만난 후 써내려간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오연히 들려오는 것도 비슷한 연유 일터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비주류라고 밝히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마흔 세살의 기자, 늦어도 쉰 살쯤에는 수도권 바깥에다 번듯한 작업장을 열고 부끄럼없이 자신을 목수로 소개하고 싶다는 그의 시선을 따라 바깥구경을 아주 알차게 하고 돌아왔다. 굳이 '안'이거나 혹은 '바깥' 이 아니더라도 또는 그 경계선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 누구라도 그가 바라본 스물여섯마당의 세상 안에서 공존共存과 공생共生의 의미를 진지하게 느껴본 시간들이었다.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고  
그 세상은 '바깥'보다 더 따스해 '안'보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기꺼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주저없이 그 손을 잡아
우리는 바깥 없는 바깥에서 서로 에게 '안' 이 되었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 영원히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라도 만들어 진 것일까.  
빨갛게 내비치던
바깥으로 들어 간 내 '안'에 오롯이 새겨진 그대, '바깥'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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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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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내가 흑인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참 다행이구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굳이 CNN의 다큐멘터리 ‘미국의 흑인(Black in America)’에 등장하는 흑인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마약 중독 매춘부 혹은 에이즈 환자를 떠올릴 수 있을 것 이다. 비록 인종차별에는 자유로왔으나, 우리도 당신이 딸이든 아들이든 '딸 가진 부모가 죄인'이라는 피해적 입장에서의 자조적인 넋두리는 피할 수 없지 않았던가. 나의 엄마는 할머니의 '딸'이었고, 나는 엄마의 '딸', 그리고 내 아이는 나의 '딸'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야의 세상살이가 주는 울림이 내게로 돌아와 앉은 지금, 나는 과연 어떤 편지를 내 딸에게 건내어야 하는 질문에 답할 차례이다.

 

딸에게 보내는 이유 

  작년이었다. 3학년 딸아이가 '아름다운 편지쓰기 대회'라는 가정통신문을 들고 와 '엄마가 자식에게' 부문에 제출을 해야 하니 빨리 편지를 써달라 연필을 손에 쥐어 주었던 오월의 어느 아침을 기억한다. 등교시간이 코앞이었던 아침에 느닷없이 편지지를 들이대니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울화와 짜증이 앞섰다. 시계를 보며 뭉뚝한 연필로 대충대충 글을 써서 내보낸 몇 주 후에 아이가 상장을 받아왔다. "엄마 상탔어, 내가 아니라 엄마가." 바쁜 아침에 써내려간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3등에 해당하는 상을 받아온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분야별로 시상을 하는 것이었고, '자식이 부모님에게' 부문이 아닌 '부모가 자식에게' 부문을 선택하여 어찌보면 숙제를 내게 미룬 것이었으며, 그 부문 제출자가 아주 적었던 모양이다. 좀더 신경썼으면 1등 하는건데 하는 아쉬움으로 편지를 다시 가져와 읽어보니 이건 내안에 있던 내 엄마가 내게 하는 말을 그대로 적어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평소 엄마가 내게 주문처럼 하셨던 말들로 그 편지는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건 아니다 싶어 나중에 정말 내 인생이 대단한 업적을 만들진 못하였어도 딸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편지들을 모아 책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을 한 적있다.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받았을 때도 막연하게 어느 유명인사가 자신의 딸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경험을 통해 전해주는 식의 편지글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국내에서도 연예인이나 교수, 작가 등의 유명인이 자신의 딸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글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책을 접할 때 내 예상을 뒤엎는 경우 읽는 내내 실망감대신 더 진지하게 오기를 가지고 작가의 생각을 읽어보려 더 안간힘을 쏟는 편인데 이 책도 그러했다. 애석하게도 저자에게는 내 예상을 뒤엎고 실제로 아들 한명만이 존재했으며, 글의 형식 역시 제목과 같이 편지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왜 굳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my daughter"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졌던 것일까

  마야 엔젤루는 아마도 자신이 한사람의 '딸'로서 자랑스런 인생을 살아내었다고 그리하여지금의 자신을 돌이켜볼 때 그 길목에는 항상 자신처럼 딸이었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있었기에, 많은 여성들을 딸로 생각하며 그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이 책이 시작하기도 전에 "나의 어머니가 되어준 분들', '나를 딸로 맞아준 분', '내가 딸처럼 생각하는 여인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서문을 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많은 흑인, 백인, 유대교, 이슬람교도, 동양인, 스페니쉬, 아메리카 원주민, 알레우트족, 동성애자, 이성애자, 학력과 외모를 떠난 이땅의 모든 딸들을 부러 언급하며 양해를 구하지 않았나 싶다.
 

그림자에서 지팡이까지 - 할머니의 당당함과 어머니의 유연함을 한몸에

  스물 여덟 개의 챕터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의 에피소드와 자작시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할만한 것은 이야기의 도입부에 '할머니의 그림자' 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던 저자의 어린시절을 시작으로 태양과 달 사이에 신음과 자장가의 중간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서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마치고 있다. 마야는 존경하지만 일로 바빴던 어머니를 대신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르쳐준 할머니의 그림자를 밟으며 성장하고 극적인 순간에도 할머니의 가르침을 지팡이 삼아 위기를 헤쳐왔다고 고백하고있다.  

  또한, 동양적 사고방식과는 다르게 미혼모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의 딸의 고백에도 예쁜 아기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다려주며 손자와 마야를 자랑스러워했다. 마야에게 할머니와 어머니의 태도와 교육은 아주 중요한 시사점 을 함의하고 있는데, 바로 마야 스스로가 자신이라는 존재를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밑천을 제공 하였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부딪힐 수 있는 크고 작은 난관들은 나중의 문제였다. 흑인이면서 그것도 여성이라는 인종과 성 두분 모두에서 차별을 안고 태어났던 마야에게 두사람의 존재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마야의 어머니는 호텔사장으로서도 지역의 존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딸의 성폭행, 고교재학중 낳은 아들, 또 다양한 직업을 가지며 활발하게 여러지역을 돌아다녔던 마야에게 긍정적 사고방식과 지혜, 무엇보다 독립심을 뼛속까지 깨우쳐준 장본인이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선 엄마와 할머니의 세대간 교육방식의 차이로 인해 딸은 물론 실제부모와 양육자간의 많은 갈등이 가족간 불화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기에 저자가 품위있고 부지런했던 할머니와 외향적이고 세련되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두사람의 장점을 훌륭하게 수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긍정적인 열린 가슴이 참으로 부럽고 배울만하다. 또 우리로선 유난히 부/자 보다는 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족상처들을 소재로한 영화나 소설이 많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보다 더 피해자적 입장(여성이면서 흑인이기까지한)일수도 있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분노를 견디고 미소짓기까지

  마야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를 통해 실수했다면 사과하는 법, 미소짓기 만해도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흑인이지만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는 법, 덮어놓고 무례한 사람들에 대한 자기방어 방법 등을 배웠다고 한다. 대부분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글을 읽으면서 내내 전해져 오는 신호 하나는 바로 그녀의 '분노'였다. 단순히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결과에 대한 지적과 비난(사회적 차별)이 아니라 자신이 바꿀 수 없었던 흑인(인종차별)이라는 운명, 사회적 약자인 여성(성차별)이라는 신분, 즉 엎친데 덮친격으로 두가지 멍에를 짊어지고 부당하게 당해야 했던 차별에 대한-그것을 쌓아왔건 혹은 극복했건간에-저자만의 분노와 결국에는 미소를 짓기까지의 견딤 그것이었다.
  저자는 어느 유명한 영화감독을 기념하는 자리에 당대 유명한 백인배우들-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팩, 헨리 폰다, 찰턴 헤스턴 등-과 나란히 초청되어 추모와 함께 소갯글을 낭독할 차례가 다가왔는데 막상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올라서니 자신이 어린시절 오빠와 다니던 흑백분리영화관이 떠올라 그만 혀가 굳어지고 만다. 매표소부터 백인과는 분리되어 관객석까지 닭장같은 별도의 장소에서 영화를 관람하였던 그때 그 영화 속의 하얗고 훌륭한 어른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그만 '유명하고 돈 많고 인정받는 하얀 당신들을 증오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한참동안이나 멍해졌었다는 고백을 한다. 당당하게 배우들 앞에서 자신만이 아는 멋진 복수를 하기엔 분노만큼이나 쌓여진 미소가 더 많았던 모양이다

  그저 그녀가 방문했던 나라와 또 수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속에 고여 있었을 눈물과 그것이 미소로 되기까지의 그 견딤의 세월에 고개를 숙일뿐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던 마야
                                              자신을 자랑 스러워 했던 마야
                                                자신을 믿을 줄 알았던 마야

 

작은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지혜

  여기서 나는 그녀가 세상의 모든 딸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한번 더 짚고 가고자 한다. 모든 이야기들은 그녀의 업적과 결과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일어난 일상의 순간이거나 당시의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로 일관하며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는 특히 여자로서 사회인으로서 나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으니 너만은 이렇게 살지 말아라 혹은 너도 이렇게 살아라 식의 두부류로 나누어지는 한국식 딸에게 보내는 편지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미국은 가족간 소소한 에피소드를 소중하게 여기려는 노력 으로 나중에 순간을 기억했을 때-그것이 억지였건 간에-웃을 수 있는 일이 많은 반면 우리는 막상 작은 에피소드에는 냉정하다가 꼭 세월지난 후에 그래도 속으로는 너만을 사랑했다는 식의 고백으로 결론지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마야가 어린 시절이었던 1940년대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결손가정이나 성폭행, 워킹맘 같이 저자가 겪었던 시련들을 똑같이 겪어내고 있다. 희미하게나마 비록 서양의 저 멀리서 우리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인종이 다른 한 여성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가벼운 쪽지처럼 치부하지는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녀는 가족이건, 초면이건, 무례하건, 고맙건 간에 언제 어디서든 매순간을 소중히 여겼고 진실했으며 최선을 다했다는 것.
 


                    일흔여덟 살의 마야가 열일곱 살의 미혼모 마야에게 용기를 건내듯,
                      “다시 돌아가게 되더라도 너 혼자 내딛는 그 첫 걸음이 중요해.”

                                마야의 어머니가 지친 마야에게 용기를 건내듯,
                     "생각해보았는데 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대단해.
           마음씨가 착하면서도 아주 똑똑해,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드문데 말이야."

 

마지막으로, 책에서처럼 멋지진 않지만 나만의 언어로 '딸에게 보내는 편지' 리뷰의 인사로 대신하고자 한다. 

 소중하고도 아련한 나의 딸아!

  너는 아마도 살면서 여자이어서 행복할 때도 있겠지만, 반대로 여자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낄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가 지금보다 더 훌륭한 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지 못해도 너는 엄마가 네 할머니를 존경하고 훌륭한 점을 본받으며 생활했듯이 너 역시 도 엄마와 같을 거라고 믿고 싶다.
  다만, 세상은 그렇게 배워온 모든 것들이 오히려 너에게 칼이 되어 상처를 주고 배신을 알게 하고 절망을 던져줄지도 몰라. 
  <아름다운 삶> 이란 무엇일까?
  진부하지만 엄마가 살면서 느낀 정답노트를 살짝 공개할께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아름다운 삶'이란 결국 그 어떤 것도 얼마나 견디었나의 문제라고 생각해. 네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향한 쉼 없는 단근질과, 실패나 이별 같은 경험에도 또 일어서려는 의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너의 노력, 때론 억울하고 마음속 분노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 그 모든 것에 대한 '견딤'의 선물이 아닐까 
  올봄에도 약속한대로 꼭 꽃구경을 가자.
  꽃처럼 활짝 핀 네 얼굴을 또 한번 봄 속에 엄마 가슴에 담고 싶어.  

< 2010. 4. 꽃보다 더 봄같은 우리딸에게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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