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이 해피엔딩 - 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김연수.김중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장만한 지 얼마 안 되던 컬러 TV에선 주말마다 프로야구를 했는데 그때 난 서울에 살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MBC 청룡의 팬이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참..) 나는 당시 이 책의 저자들처럼 야구기록을 하진 않았지만 대신 그보다 유치한 야구게임(서로의 한손을 세워 가리고 동그라미에 색칠된 표식으로 스트라이크와 볼을 맞추던)은 빈번하게 했던 것 같다. 6학년을 떠올리면 나는 하늘색 나이키 런닝화와 청 플레어 스커트, 그리고 흰 블라우스만 생각난다. 거의 우리 반 여자아이들의 교복이나 다름 없었던 그 복장을 지독히도 혐오한(몰개성의 몰지각한 행동이라 비난시작) 나는 당시 나이키와 필적할 수 있었던 프로-스펙스 테니스화와 조다쉬 청바지(1개월 투쟁과 설득끝에)를 시위하듯 입은 채로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고추잠자리를 낮이나 밤이나 불러대던 '어린 아이'였었다. 이 책을 읽고 내 기억은 그때 그곳으로 마구 달려가는 걸 막지 못했다. 그때 나와 같이 프로-스펙스를 신었던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이들처럼 같은 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두 명의 작가 중 한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대책없는 생각에 잠시 잠겨본 시간이었다.

그렇다. 나는 김연수 작가가 6학년일 때 같은 학년이었고, 그가 89학번일 때도 같은 학번이었으므로 그와 나는 갑장의 관계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작년까지 인생사가 무척이나 바쁘던 사람이었기에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김연수'와 '김언수', 혹은 '김중혁'과 김경욱'을 명확히 구분하는 독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김연수 작가와 김중혁 작가가 김천 출신의 30년 지기 친구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이 젊은 날 자취방에서 밤을 새며 이 시대의 문학과 그 시대의 부조리에 번민하고 계실 때 나는 남녀평등이 아닌 우리사회를 뼈저리게 실감하며 산업전선에서 날밤을 새고 있었다. 하지만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일로 밤을 새었을 지언정 그 격동의(?) 시기를 이 맨몸 하나로 헤쳐(?) 나왔다는 그 질펀한 동질감은 솔직히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래 우린 그랬지, 그 마음 내가 알지...짜식들...요즘 애들은 모르지...이렇게 박수쳐줄 수 있는 독자는 얼마든지 되고도 남음이다.

핑퐁에세이라 했다. 한명이 '핑'하고 공을 던지면 한명이 '퐁'하고 받아주는, 잘하면 박빙의 탁구경기지만 어설프면 지들끼리 '잘 노는'꼴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서브는 김연수가 맡는 것으로 보였다. 스파이크 역시 김연수가 강약조절을 하면 김중혁이 장단에 맞추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할 일이 전혀 없었던 나로선 본의 아니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들의 글을 넘기다보니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른 점을 알게 되어 자연스레 그들의 매력을 도마 위에 올려 놓게 되었다. 그러기에 누가 동네 친구들끼리 책을 내라고 했나. 만약 저들 중 한명하고 황석영 혹은 이문열 작가가 합심하여 공동집필을 했다하면 내 이렇게까지 할 일은 없을 터. 하필 같은 세대라는 이 필연적인 우연을 이용해서라도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다시없을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나는 그들을 내 맘대로 비교분석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무려 쉰다섯꼭지나 되는 두 사람의 글은「씨네21」에 '나의 친구 그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번갈아 쓴 칼럼을 묶은 것이라 했다. 그들이 '영화'를 보고 쓴 칼럼인지 미처 몰랐기에 순수한 에세인줄 알았던 나로서는 처음 적잖이 실망을 했었다. 몇 년 전에 김영하 작가가 같은 잡지에 칼럼을 기고한 글을 묶어버린 책을 우연히 접했는데 솔직히 영화전문가가 아닌 소설가들한테 영화평 하라고 원고주면 삼분의 이는 자신의 인생평으로 채운다는 걸 그때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영화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인생도 아닌 뭔가 2% 부족함을 역시 그의 소설로 밖에 채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적이 있었기에 에고...결국 이들의 소설을 봐야하나 이런 생각으로 책을 들추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번 件은 기획이 신선했다. 허물없는(어 보이는) 친구관계인 두 남자가 서로 상대친구와 영화에 대해 1년 동안 격주로 한번 씩 정리 한 글이니 요즘 유행하는 프로젝트 그룹 창민과 이현의 '밥만 잘 먹더라'가 퍼뜩 생각이 날 정도로 각자 잘나간다고 생각되는 작가를 (소속사에서) 한데 묶어 잘 프로듀싱한 반짝 앨범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먹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기본적으로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였었고, 이들도 피튀기는 글빨을 무기로 갈고 닦은 실력파였기에 읽는 재미 또한 쏠쏠했음이다.

거기다가 두 사람이 글을 연재한 기간이 딱 2009년(우린 작년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 났었는지 우리조차 이해가 안되는)의 일 년이었기에 이야기의 흐름은 자신들이 본 영화 - 떠오른 옛날일화 - 작금의 현실 순으로 이어지며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식의 넋두리성 글들이 많아 핑퐁게임이라고만 하기엔 던지는 공의 무게가 진중해 보였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툭하면 그놈의 '마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잊을만 하면 현재 내 나이를 인식하게끔 하여 웃다가도 입을 다물게 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나처럼 마흔의 감기나 불혹의 체증을 꽤 오랫동안 겪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 마음이 짠한 구절이 많았던 것도 부인치 않겠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엔 글 시작 페이지에 그려진 인물 아이콘이 없어도 누가 썼는지 자동적으로 알아졌는데 김연수 작가의 글에서 어린 시절 내 모습과 대학시절 고민, 과거에 대한 우수한(?) 기억력, 정치적인 견해가 일치해서 였는지 나와는 성향이 많이 다른 김중혁 작가가 참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몇 개의 단편에서 김중혁이라는 사람은 꽤 매니아적인 기질이 있는 아웃사이더로 인식되었기에 자신이 관심가는 분야에는 철저하고 그렇지 않은 분야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기질에 충분한 공감이 되었고 (김연수의 표현에 의하면)예술가 성향이 강하다는 김중혁의 유머는 두어 번 배꼽을 잡고 뒹굴 정도로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당했다.

굳이 온도를 재보자면 김연수는 1도가 뜨겁고 김중혁은 1도가 차가운 것으로 느껴졌다. 목소리로 보자면 김연수가 아나운서 톤이라면 김중혁은 성우톤이었다. 기타로 치면 김연수는 C나 F, 김중혁은 D나 E코드...직업으로 보자면 김연수는 기자가 쓴 글 김중혁은 건축가가 쓴 글....이상하게도 그랬다. 똑같은 영화를 이야기 하고 같은 추억을 떠올리고 어느 한사람 웃기지 않은 구절이 없었음에도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슬픔에 대해서라면 김연수는 울컥하기 까지를, 김중혁은 울컥 한 후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연수는 이렇게 된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고, 김중혁은 지금 이후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더 걱정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허물과 장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들로서 나로 하여금 친구가, 글쓰기가...친구와 글쓰기가 사무치게 그립도록 만들었다. 작가들끼리 친구가 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이들은 작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친구였기에 오늘날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었고, 재능이라는 것이 얼마간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늘 비슷한 재능을 가진 상대의 재능이 부럽고 더 커 보이는 열등감을 부르기 쉬운 문단에서 적어도 그러한 질투와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의 편을 태어날 때부터 배정받은 사람들로 느껴져 나는 그들의 관계가 너무나 질투나고 부러웠다.

김연수의 글에선 미키루크를 보고 인생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꼭 작년의 나와 같아 이 사람이 나와 같이 영화를 보았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신촌의 동시개봉 영화관에서 보았다는 <나인하프 위크>, <투문 정션>, <카프리의 깊은 밤>은 나 역시도 모조리 본 영화였고 그중에 킴 베이싱어와 미키루크가 보여준 신기의 과일정사신은 우리시대 베드신의 고전으로 남지 않았던가. 그 꽃미남 미키루크가 <더 레슬러>에서 이마에 호치키스를 박는 레슬러로 변신할 줄, 아니 망가질 줄 나는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 영화를 보고 그날 화장실에서 나는 내 얼굴을 꽤 오래 쳐다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전원일기>의 등장인물을 일일이 열거해 가며 원고의 80%를 (영화가 아닌 전원일기의)드라마의 배경과 전체줄거리로 정리할 땐 그만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특별한 조연이었던 노인 삼총사를 기억하고 있다니...갑자기 전원일기의 주제곡이 귓전에 들려오던 순간이었다. 그는 필히 혜은이를 첫사랑으로 짝사랑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을 연도별로 기억하는 내 기억속의 혜은이는 1979년도 가수왕이었다. 강물은 흘러만 간다던 그대와 나의 꿈을 싣고서 흘러만 간다던...그때 우린 열 살이었다.


<전원일기와 김연수...>

웃다가 울면 어디가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김중혁의 글은 키득키득 웃다가도 방심한 그 순간 처절한 한방에 무너지는 격이다. <김씨 표류기>에서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이 그만 샐비어를 따먹고 달작지근한 딱 그만큼의 희망으로 다시 일어난 장면을 떠올리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뛰어 내린 부엉이 바위 주변에 샐비어라도 있었다면 혹시라도 그를 붙잡을 수 있었을까 하던 그의 안타까운 심정은 지난 일년간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꾹꾹 눌러버리는 것 같아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마더>의 마지막 장면인 김혜자가 춤을 추는 모습에서도 자신의 부모님이 관광버스에서 넋놓고 춤을 추시던 모습을 회상하며 그때 춤사위를 부끄러워 하던 자신이 부끄러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제시하는 관람 그래프 분석과 모기향 인생론은 그의 단편에서도 자주 확인하던 아이디어 스케치의 한 페이지를 들쳐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무엇이든 기발하게 단순화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으로 보였고 김연수는 그런 그를 무척이나 즐거워 하는(자랑스러워서) 듯 했다.



<마더, 김혜자 그리고 김중혁...>

두 명 다 작가이다 보니 간혹 가다 뼈있는(그래서 뼈아픈)문구들을 물 흐르듯 잘 위치시켜 역시나 키득키득하던 내 가슴을 서늘하게 할 때도 있었다. 주로 은근하게 배수진을 치는 김중혁은 총제적으로 견해를 밝히고 김연수쪽은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툭 던지는 한마디의 김연수는(이때는 기자필이 예리하다) 대 여섯 번 15년차 작가의 내공을 올곧게 느낄 수 있는 구절들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논리도 자신있게 밝히고 있었다. 그중에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나는 참았던 밑줄을 기어이 긋고 만 구절이 있는데, '치졸하게 느껴질 때, 그건 진실일 가능성이 많다.' 아...나는 비교적 내 삶에서 우아하지 않았던 지난 일년 간을 떠올리며 그것은 현재 마흔,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지금까지의 중간결론임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포괄적이고 우아하고 잘난 것은 진실이 아닐 확률이 높은 것...그래,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 치졸한 서로의 구석까지 알고 있기에 진실한 친구 일 수 있겠지 싶었다. 치졸하기 까지 하면서 진실하지도 않다면 인생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두 남자의 영화를 빙자한 1년간의 수다가 말처럼 가볍지만은 않은 독서였다. 순간 그들이 여자들이었다면 어떠한 글이었을 지 궁금했고, 대책없이 해피엔딩의 시리즈 격으로 그렇게 친구인 작가들이 주거니 받으니 글을 쓴다면 우리로선 재미난 구경이 될 것 같았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우연인지 내 앞엔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술이든 차 한잔이든 마시며 요즘 화두인 '공정'이나 '정의' 같은 이야기를 나누어 볼 듯이 만나서 요즘 컴백한 F.T 아일랜드의 새 노래 들어봤냐며 농담이나 주고받을 친구가 너무도 그리워진 시간들이었다.

이 책은 영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친구와 사소한 것들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교환하는 이미 친구인 사람들이 나누어 가진 우정에 대한 이야기 였다. 그들의 방식은 치사하게 부러울만큼 근사했고, 그들이 나눈 우정은 김천의 세월만큼 퍽이나 질겼다. 소재가 된 영화는 노래방에서 새우깡이냐 양파깡이냐의 차이일 뿐 무엇이 되었든 동일하게 근사하고 질겼을 것이다. 김연수와 김중혁이 각자의 톤으로 돌아와 자신들만의 무기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다음의 솔로앨범을 기다려 봐야겠다. 그러는 와중에 난 혹시나 바뀌었을 지 모를 친구들의 전화번호나 뒤적여 볼 생각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꼭!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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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3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1-0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구입한 책이네요. 이 책 재미가 좋아요~

님의 블로그 구경 잘하고 갑니다 ^^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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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

가슴이 아리아리하다...언젠가부터 책을 읽고 '가슴이 아픈' 것에 해당하는 증상에 관해 세밀하게 구분하고 싶어졌는데 뭐랄까 이 감정...봄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신작로길에서 마주오던 무엇에 우연히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한다면, 무릎이 까져 일주일은 반창고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됬다면, 겨우 아물어 갈 때 쯤 막 새살이 올라오려고 하던 그때 하필 체육시간에 뜀틀을 뛰다 엉덩이에 걸려 뒹굴면서 겨우 피어나던 새살위로 벌어지던 그때의 아픔과 비슷하려나...그래, 어짜피 상처는 아물었고 봄은 지나갔다. 얼마나 다행인가...흐드러진 벚꽃이 안녕을 고하며 눈처럼 피날레를 장식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은. 목련이 나뒹굴어 마음 한구석 그 바닥에만 쌓이지 않아도 되는 지금은.

강원도 평창이 고향이라는 김도연(여자이름 같은) 작가의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덮고는 한참동안 가슴이 어지럽게 간지러웠다. 누군가에게 사과 받는 것 같았고, 나도 누군가에게 사과를 한 것 같았다. 그렇게 퉁치며 무언가 털어 낸 것 같았는데 가슴엔 오히려 소복히 눈이라도 쌓이는 것 같았다. 분명 가슴에 쌓인 눈은 그곳에서 얼음이 되거나 녹아 버려야 할텐데...이상했다. 그들이 흰색으로 위장해온 내 정신의 옷을 원래의 흰색으로 정화(淨化)시키고 있었던 걸까. 그의 반성문은 마치 어머니가 깨끗이 삶아 마른 햇살에 널어 입힌 속옷이라도 된 듯 어머니의 젖냄새가 난다. 어쩌면 내 어린 살냄새 일지도 모르겠다. 목련꽃과 벚꽃이 눈부시던 고향의 흙냄새, 아니 원고지에 글을 써보겠다던 내 동심의 연필냄새였는지 모른다. 옛날 외할머니 댁 문간방 선반 위에 두고 온 오래된 책에서 나는 종이냄새였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한번은 꼭 써야할 반성문...두 번은 다시 없을...그래서 나는 내 모든 영혼으로 용서를 구하고자 하며 그럼으로 나도 모두를...용서하겠다.

소설가가 된 주인공은 길어야 세 달이라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병문안을 갔다가 선생님으로부터 '500장의 반성문' 약속을 잊어 버린 것인지...하는 질문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삼십년이 흘렀어도 당시 소설가(화자)가 백일장에 써내었던 글의 제목 '정류장'을 기억하는 분이니 반성문에 대한 약속은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침 선생님은 소설가가 쓴 작품을 받아 들고는 '자네 글은 무언가에 막혀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를 자극하고 한술 더 떠 아내는 '당신 글에는 어린 시절 이야기가 없다'며 남편의 상처를 환기시킨다.  

그는 백일장에 참가했다가 수상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학생잡지에서 본 글의 핵심적인 소재와 구성을 가져와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덜커덕 장원에 뽑히게 되고 어찌되었건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현역소설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작가였다. 그의 말을 빌자면 '내가 훔쳐온 건 원고지 한 두장 분량'에 불과했는데...반성문은 오백장이라는 것이 너무 과한 벌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A4용지(10P 가정)의 두어 단락 쯤 되 보인다. 엄청난 표절임에 틀림없지만 내가 생각해도 오백장은...(그러니까 다시 A4용지로 60장 정도 되려나, 쉽게 생각해 단편소설 네 다섯 개의 분량)심하긴 했다. 이에 반해 마침 국어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다른 이의 공들인 마음을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마음을 훔친 것이니 오백장은 꼭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을 집필한 김도연 작가도 소설 속 주인공처럼 교내 백일장에서 어느 학생잡지에 실린 글을 절반쯤 훔쳐와 장려상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그러나 평생을 그 한 번의 도둑질이 발각될까봐 악몽에 시달렸다며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소설을 빙자한 자신의 뼈아픈 반성문을 아주 근사하게 써낸 것이다. 자신의 실제 경험이 소재가 된 것이니 만큼 남의 글을 인용한 사람의 당시 상황과 심리, 그 후에 생겨난 공포스런 죄책감, 성장하며 겪었을 지속적인 부채감, 그리고 그것이 결국 소설가가 된 자신에게 어떠한 멍에가 되었는지 너무나 예민하고도 절절하게 그려내어 하마터면 그래 까짓것 두 눈 뜨고도 눈과 코를 베어 가는 표절천국이 되버린 요즘 세상에 비하면 철모를 때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잡지의 한 구절 쯤이야 슬쩍 가져와 각색한 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이야...고, 괜찮다고 충분히 이해하기만 할 뻔 했다...이해야 하지만...잘못은 잘못인데 말이다.

아니..사실, 그냥 잘못이 아니라 막대한 잘못이지. 6년 전인가. 미니홈피와 블로그가 지금의 트위터 처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이미 젊은이들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후였다. 그땐 지금처럼 인터넷상에서 저작권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유료 컨텐츠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한때 무방비 상태로 악성 댓글이 유행할 때처럼 남이 쓴 글을 허락 없이 클릭 하나로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하는 일은 일종의 자료조사이거나 좋은 글에 대한 공유에 지나지 않은 범죄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라고는 전혀 인식조차 못하고들 있을 때...나는 그때 검색을 하다가 내가 쓴 글을 버젓이 자신이 쓴 것처럼(스크랩차원이 아닌)게시하고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덧글도 받아 내는 작태(?)를 목격했다. 물론 나는 유명한 작가도 아니었고 그때 내가 끄적인 글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난 너무 소심했다) 일개 네티즌에 불과했지만 그때 놀랐던 건 정작 내 마음을 훔친 것에 대한 상처가 아니라 내 글을 가져간 사람의 무심어린 그 당당함이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냥 거대한 바닷가 모래밭에 떨어진 조개껍질 한 조각을 주어놓고 누가 알겠어 주은 사람이 임자지...그런데 그런 일을 이놈의 인터넷이 생기고부터 따지고 세어보지 않아서 그렇지 부지기수로 당했다.(아마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전문을 가져간 것은 살짝 귀엽기라도 하다. 분명히 내 글의 일부 혹은 형식, 소재를 빌어 자신이 새로운 글을 창작해낸 양 글을 올리고 타자와 활발하게 교류하는 사람도 보았다. 더 교활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물증은 없지만 글을 최초로 써낸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우연히 아주 비슷한 글을 비슷한 시기에 써낼 수 있는 확률이 일반인들에게도 해당됨을 모르지 않으나..한자 한자에 예민했던 나는 아마추어 글쟁이 일망정 내 마음 훔쳐간 그 마음을 알아챌 만큼의 눈치는 있었음이다. 그 역시도 그 문장에 딱 어울리는 그 한 단어에 대한 고민을 알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었으니까...그런데 그런 일을 자행하는 사람들 중에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아예 글에 관심이 없고 더 좋은 글을 써보자는 욕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만사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얼굴도 아주 못생긴 사람보다 웬만큼 남들이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 여자들이 더 많은 성형에 매달리는 것 처럼.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내 상처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중학교 때 친구들끼리 편지를 거의 매일 주고 받았다.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이 그러니까 매일 다섯통을 써내어야 하는 애틋한 우정을 간직한 나는 어느 날 내가 쓴 편지에 삽입된 문장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도착하는 우스꽝스런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꽤 오랜동안 누군가 나의 글을 슬그머니 훔쳐갈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회사생활에서도 나는 하필이면 수백페이지의 제안서 원고를 써내어야 하는 직무에 종사했는데 그 땐 운없게도 인터넷에서 지금처럼 모든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었기에 발품을 팔아 도서관이나 서점을 다녀온 횟수가 곧 그가 작성해 낸 페이지의 양을 결정할 시기였다. 기획서...제안서..프리젠테이션 원고...이런 것들은 아직 팀장이 되지 못했을 시기엔 거의 내가 낳아놓은 아이를 탯줄을 끊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윗선에서 훌러덩 가져가는 것과 다름 없었다. 나와 같이 신입시절 죽도록 고생한 어느 동료가 다른 회사로 스카웃 된 후 내가 작성한 기획서 초안을 가지고 잘 가공해 공모에 당선된 적도 있었다.(훗날 어떤 술자리에서 내가 제안서를 최초로 베낀 여자가 저기 있다며 고백 비슷하게 퉁치려고는 하더라..) 그 安은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지독했던 상무를 욕하며 화이트 보드에 끄적이고 정리했던 아이디어(우리끼리 떠들고만)였다. 아이디어만인가... 버젓이 세상에 공개되어 제출된 제안서에서도 뼈대를 그대로 가져가 단어와 영어 스펠링 몇 개만 바꾸어서 새로운 척 안을 작성해 내는 것은 거의 플래너로서 트레이닝의 한 단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였다. 물론 그 와중에 나 역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무지막지한 스트레스를 덜어보려 유명한 작가나 정치인들의 저서에서 슬그머니 이거다 싶은 문구를 가져다가 '기획의 배경'이나 '기획의 의도' 쯤 되는 단락 세 번째나 네 번째 문장 어느 구석에 적절히 삽입, 각색(인용에서 발전한)하고는 난 작가가 아니니까....이렇게 인쇄소를 달려간 적도 많았다.(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맨 뒷페이지 참고문헌에 적어 놓았다 !)

블로그를 삭제한 적도 몇 번 있었고 저작권 문제로 재수 없게 벌금을 문적도 있었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내 글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남의 글에 대한 존중이 생겨버렸고 그 예절은 웬만해선 남의 글을 읽지 않은 것으로(도용을 안볼 수 있고 혹시라도 내가 안할 수 있다는 1석2조의 효과)발전해 적어도 글에 대해선 남의 마음에 시선을 일절 거두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나의 고해성사인듯 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상처를 자랑하며 투정하는 꼴이 되었는데 다시 책으로 돌아와 작품 속 주인공 처럼 작가만 못되었지 서평을 많이 써온 분들이라면 내 이야기가 자신의 사연과 흡사한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내가 쓰는 반성문이자 또 내가 받아야 할 반성문이라는 생각에 적어도 내 서평을 읽은 분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

주인공이 중학교 2학년 백일장에 참가해 제출한 글의 제목은 '정류장'이다. '추운겨울, 한적한 시골정류장에서 흩날리는 눈발을 배경으로 버스를 기다리며 울고 있는 낯선 소녀'라는 그림같은 소재에 자신의 마을풍경과 자신의 마을사연을 덧붙인 주인공은 현실에서도 거짓말 같이 정류장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삼십년 전의 실수를 기억하는 선생님만큼이나 나는 이 소녀가 내 어린 시절 고향에서 헤어진 풋사랑, 그녀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스라했다. 소녀는 미술반이었고 자전거를 타고 오가면서 만난 소녀와의 인연은 자신이 반은 지어낸 이야기속의 어린시절 환타지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소년이었던 주인공은 결국 그 소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반성문 보다 더 지독한 자기체벌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 순간 소녀는 동화 속에 등장하는 여학생처럼 소년에게 키스를 선물하고 쌓이는 눈 속에서 소년은 첫 번째 구원을 받게 된다. 주인공(작가)에게 강원도 시골 마을은 동심의 순수를 찾아가는 시발점이었고 끝없이 내리던 눈, 산처럼 쌓이던 그 눈은 세상에 더럽혀진 뭍 때와 각질을 씻어 내리는 자신만의 정화기제로 자리잡은 듯 하다. 나는 이 장면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으며 어쩌면 주인공이 삼십년 동안 반성문을 쓰지 않았어도 견뎌낼 수 있었던 수치이자 동시에 치유의 추억이라 생각한다. 훗날 그 소녀는 결국 화가가 되어 소년이 반쯤 표절한 이야기인 '정류장'을 다시 시골 정류장을 배경으로 중학생인 그들이 키스하는 장면을 그려내며 나머지 반쪽을 완성한 그림을 선물하게 되고 그 그림은 소설가가된 주인공의 거실에 마치 십자가처럼 걸리게 된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선생님이 연일 연재되는 반성문을 읽으며 답신하신 글 또한 이 작품의 백미이다. 오백장의 반성문은 실은 자신의 젊은날 과오를 투영한 모진 벌이었으며 자신이 검열 받은 소설과 교사라는 직업을 바꾸게 된 오랜 상처를 고백하는 계기이자 자신처럼 되지 말라는 선생의 마지막 부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소설가가 된 제자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는 눈물 없이 읽을수 없었다...소설가가 된 제자가 자신 한명을 위해 쓴 소설이라 자랑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어른 거리는 듯 하다.

“내 마음을 내가 오래 공들여 가꾸지 않고 다른 이의 공들인 마음이 마치 내 것인 양 착각한 채 그때껏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가 내 발에 걸려 넘어졌을 때 내 힘으로 일어서려 하지 않고 목청 높여 울며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버릇이 됐다는 것이다.”

아리아리 하던 가슴팍을 기어이 쿡쿡 찌르고 마는 작가의 말이다. 삼십년 전의 일뿐이겠는가...하루하루 반성만 하고 살아도 그 하루가 모자랄 것 같이 글로 상처 받은 적 있고 또 똑같은 글로 남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는 우리들이다. 오백장의 반성문을 통해, 한편의 서평을 쓰면서도 오로지 내 힘으로, 온전한 내 감성, 진정한 내 감정만으로 남의 도움없이 떳떳이 세상에 내보일 수 있어야 함을 다시금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작가의 목련꽃 반성문이 한 바퀴 돌아 다음 목련꽃이 떨어질 그때 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쩐지 목련 꽃이파리가 떨어지는 모습이 슬프기만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때도 아리아리 할 것임에 틀림 없지만.

<진부의 송어낚시>

진부의 송어축제 행사장에서 인터넷에 올려진 방문객의 게시글을 보고 운영진 측에 정보를 전달하는 아르바이트, (업무영역으로 보자면 행사 사이트관리?)를 하게 된 고3 정미의 송어 같은 이야기이다. 정미를 보면서 잠시 나의 고3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수능시험을 보다 말다 뛰쳐나와 마을 다리밑에 마련된 송어축제 행사장을 보게 된 정미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었지만 끝내 공감하기 어려웠음이다.

내가 고 3이었을 땐 전국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최하는 올림픽에 열광하던 여름밤이 그해의 전부였을 정도로 우리 동네, 우리 학교에선 내 임무가 대학을 합격하는 것인지, 올림픽을 치루어 내는 것인지 헤깔릴 정도였다. 그때 9월 달이었나? 모의고사를 앞둔 그날 밤 양영자와 현정화라는 탁구선수는 중국의 복식조와 결승을 다투고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독서실에선 당연히 사람들의 함성이 3초의 터울을 가지고 반복되며 천지를 흔들어 댈 때였다. 나는 그날 밤 독서실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보며 '내가 대학을 가야 하는 것인가요' 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하늘을 보며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이집 저집에선 금메달의 기쁨과 함성소리에 마치 하늘에 볼꽃놀이라도 펼쳐진 듯한, 그래서 더없이 외로웠던 그날 나는 남은 몇 개월은 어머니를 위해 공부하겠다는 나름의 결론을 가지고 옥상을 내려왔다.  

정미의 송어는 왜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 바로 그날 밤을 떠올리게 했는지...진로를 방황하며 갈피를 못잡던 정미가 흐리멍텅 해보이는 얼음구멍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송어를 향해 고맙다 인사한 덕분인지, 그때 혹시 정미는 나와 비슷한 두렵지만 버리지 말아야 할 용기 한줌을 집어 삼킨 것은 아니었는지...정미가 시험을 포기 하지 말았으면 하는 내 마음도 알아주길 바라며 작품을 덮었다. 처음에 정미를 이해 할 수 없었던 그 어른 된 심정까지 사과하면서... 

통통튀는 송어와 마찬가지로 톡톡 쏘는 정미의 대사가 잘 어우러 지면서 희망은 절망적인 고민에서 비로소 튀어오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에 이은 이십년도 더 된 각서였다고나 할까. 송어의 마음을 얻으려고도 했는데 까짓것, 사람의 마음이야...그 마음 한참동안 잊지 않고 싶은 정미의 마음이 옛날 그때, 우리 거기에도 있었다.  

고 3들이여, 고 3이었을 사람들이여...모든 것은 지나왔고, 지나가나니... 
서로가 축하 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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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3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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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껏 이분의 책이 이렇게 도발적인 시선을 유발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수채화라기 보다는 아크릴물감의 빨강색을 두른 책표지가 그야말로 '의미심장'했다.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한번 벗겨본 줄리앙 슈나벨의 그림(붉은 상자, 1986)은 이 작품의 모든 것을 함축한다고 할 정도로 강렬하고 솔직했다. 자유롭게 뻗어 가는 나뭇가지들이 내게는 오래전부터 자라온 뿌리로 느껴졌으며 마침 같은 가지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상자들은 뜨겁게 봉인된 열매로, 붉은 바탕을 메우던 눈처럼 뿌려진 흰 꽃들은 주체할 수 없는 생명의 환희로 다가와 온정신을 일깨우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왔음에도 새삼스럽게 살아있음이 감사한...이것일까.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생명의 경이로움이란.

그래서였는지 그동안의 소설과 산문에서 버릇처럼 느껴온 감동의 색깔도 보다 더 진하고 원색적으로 느껴졌음이다. 책의 본문에 작가는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느낀 글이 서술일뿐 서평이 아니라 언급하였는데 그건 내가 이 작품을 읽었다고 글을 쓴다 할때 해야 할 말이었다. 달리 이러쿵 저러쿵 말이 필요 없는 글들을 내가 감히 책의 내용에 대해 평評할 수가 있을런지 내 앞에 놓여진 붉은 심장에 가만히 고개만 숙일 따름이었다.

박완서 작가는 내게 있어 현실과 세상에 대한 모든 핑계를 침묵하게 하는 분이었다. 부모님이 가신 이후론 더욱더 부모님과 동시대인으로서 늘 언제라도 마음 한구석 그리움의 시원처럼 유현하게 자리하던 분이었다. 매일을 부족함 없이 풍요로운 식단에 다양한 메뉴를 찾다가도 때가 되면 어머니가 차려주는 찌개와 김치로도 허기진 밥심을 채우고 또 한번 기지개를 펴듯 그렇게 내게는 문학의 고향이자 소설의 친정같은 분. 언제나 좋아하는 작가를 적어내라고 할 땐 '박완서', 한 치의 고민 없이 대답해왔다. 불혹이 된 내가 늘 못 가본 길을 떠올릴 땐 그 길의 대로변엔, 아니 길의 최초 시작지점 이정표엔 늘 그 이름 석자가 있었기에 그분에게도 못 가본 길이 있을까...마땅히 가야했고 죽어도 가보고 싶었던 길을 선택했다고 느껴지는 그분이었기에 많이도 궁금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이 꽃보다 붉은 책이 몇 년 전에 헤어진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설레고 초조한 기다림이었기에 그 재회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언젠가 나도 현역작가로서 꼭 연애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한 글을 읽은 적이 있기에 첫사랑에 대한 자전적 소설 <그 남자네 집>을 무색케 하는 뜨거운 청춘소설을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연재작으로 만나보는 발칙한 상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터 였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지만 나는 그 재회의 기쁨만큼은 정성껏 서술하고 가슴으로 느낀 것들을 예를 다해 기억해 내고 싶다. 그래서 이럴 땐 글을 쓰고 읽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온다. 화려한 문장이나 절절한 단어로 잘 구성된 글이 꼭 그 감동의 정도도 극대치였다고는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치하지만 의학이나 과학에서 사용되는 혈액, 체온, 눈물, 맥박등과 같은 객관적 검사치를 통한 결과로서 감동의 정도가 평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분명 환자로선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을 테니까. 이 작품은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비슷한 말과 근사한 수식을 아무리 찾아봐도 역시 사랑해 그것보다 더한 말이 필요 없는 고백처럼 나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낮의 더위가 염증이나 여름을 포기 하고 싶을 때 진한 몸보신의 엑기스라도 마신 기분, 나는 그 생명水에 대해 서술해보겠다.

작품은 크게 자연과 생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뭉근히 감지 할 수 있는 사유의 글과, 신문에 연재했던 '친절한 책읽기', 그리고 먼저 생을 달리한 지인들에 대한 그리움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전반에 저 깊은 밑바닥 어딘가에도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각은 마치 고향의 땅속에서 무심코 버려진 씨앗이 한줌의 흙과 바람과 공기를 마시고 아주 천천히 싹을 틔우는 생명의 발아와도 같다고 할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책장을 넘길수록 어렵게 틔운 싹이 계속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마침내 책을 덮었을 때엔 기어코 흐드러진 꽃잎 위로 보석같은 열매가 오롯이 남겨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가슴에 맺히는 것이 恨 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가슴에도 맺히던 붉은 열매...누구나, 누구라도 각자의 가슴에 붉디 붉은 열매 하나쯤 자라날 토양은 있었나보다. 누가 심어 주었을까. 혹시 원래부터 자라날 씨앗이었건만 몰랐거나 모른 척 했던 것은 아닐까.

푸르게 토해내는 질긴 뿌리

많은 정신의학 연구에서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려면 정원을 가꾸라는 충고를 하고 있다. 생명에의 관심을 다시 쏟을 수 있고, 혹시 동반자가 세상을 먼저 떠났을 때에도 위안을 줄 수 있다고 말이다. 정원에는 일종의 불멸성이 내재해 있으므로 지금이 아닌 다음 계절, 그 이듬해 봄 까지 죽지 않고 계속 살아 남을 것에 대한 기대와 자신이 돌 본 것이 자라남에 대한 기쁨과 보람, 그로 인한 삶의 감사등으로 스러져 가는 노년에 품위있는 노화를 선사한다할 것이다.

작가는 작품의 상당 부분에 자신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소설의 배경처럼 흘려 놓고 있었다. 흙과 씨앗의 생명력, 계절에 따라 미묘하게 움직이는 정원의 변화, 온갖 식물들의 행태등을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신문을 보는 하루의 일상적 일과처럼 담담하게 전해준다. 그리고 흙을 상대로 자유와 평화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 기원을 유년시절 고향의 앞마당과 추억이 깃든 살구나무로 찾아간다. 경기도 산골짜기 마을로 이사 간 이유를 어린 시절 고향과의 유사성에서 원형을 찾는다.

나는 흙을 밟으며 자라지도 않았고 실개천이 흐르는 마을에 살아보지도 못한 도시의 아파트 세대지만 한강변에 살아보았기에 사계절 시시각각 변하는 한강의 풍광을 조망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물속을 노닐던 신비한 물고기가 잠시 그 아름다운 비늘을 드러내 보여준 그 짧은 순간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는 작가의 표현에 무릎을 탁치며 고개를 끄덕여 버린 것도 내가 바라본 한강과 다르지 않았음이다. 자주 이용하던 양평길도 마치 인문학 강의를 마주 앉아 듣는 것처럼 역사에서부터 사상, 문학적 배경까지 공시적, 통시적 시각을 편하게 담아내는 문장의 드라이브는 실제 한강변 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이토록 깊은 사유와 통찰의 근원적 힘은 아마도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작가의 질긴 생명력이었음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작가가 기뻐하고 환희하듯 그를 통해 독자 역시 같은 힘을 느낀다면 생명의 힘은 얼마나 막강한 것일까.

붉은 기억의 열매

다수의 작품에서도 직접,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전쟁이나 남편과 아들을 잃은 애끓는 고통에 대한 기억은 이제 상실감을 초월해 치유에 대한 자긍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극심한 고통의 시간들을 끊임없이 견뎌온 그 세월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남한산성> 이라는 작품을 기억할 때도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전쟁 속 피난당시 느꼈던 뼛속 추위와 오빠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이야기 하고,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말 할 때도 결국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로서 같은 고통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하루키의 달리기를 보면서 그가 느꼈다는 '고통이 극에 달하면서 뭔가가 돌담을 뚫고 훌쩍 빠져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 즉, 나는 나이고 내가 아닌 것 같은 아주 조용한 경지를 맛보고 고통까지 사라진 기쁨을 자신의 기쁨처럼 완벽하게 공감하고 우리를 이해시키기 까지 한다.

척박한 땅에 질기게 뿌리내린 생명력은 무엇으로 열매 맺은 것일까. 그녀는 불타는 남대문이나 2002년 월드컵을 기억 할 때도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 사회전반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 하다가도 그 근원적이고도 성숙치 못한 우리의 자의식 밑바탕에 자신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곁들여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갈래머리 여학생일 때도, 4.19 현장을 바라보면서도 애국심이나 승리감, 우월감으로 피가 끓고 가슴이 울렁거린 적이 있었고 그렇게 살아온 시간동안 우리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확인 하는 것이 이제 삶의 골인지점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오늘에서 이 비슷한 기억들을 어떻게 남겨 둘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답하고 있었다.

죽음을 초월해 보이는 성찰이 심원한 고백으로 느껴져 새삼 작가의 지나온 시간에 경건하고도 무연한 경외감이 들었다. 작가의 가슴에 피어난 붉은 열매는 상처로 묻혀질 봉인된 기억이 아닌 생명과 사랑으로 치유된 삶의 희망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죽음과,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그를 뛰어 넘은 삶의 의지야 말로 작가가 맺어 놓은 열매이자 충만한 기쁨이 아니었을지.

그리움의 꽃잎 

나는 2008년도에 신문에 연재한 '친절한 책읽기'를 자신하게 기억한다. 그중 두어 개 이야기는 당시 읽었던 순간의 느낌은 물론이고 마음에 드는 문구를 보고 블로그에 적어 옮기기 까지 한 그날의 날씨까지 기억한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는 문장을 재차 확인하고 벅찬 반가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야말로 '강력한 정신한테 허약한 정신이 한바탕 휘둘리고 난' 독자로서 그렇다면 나는 분명 앞선 문장에서 '시'를 '박완서'로 바꾸어야 할듯하다. 시간이 지나도 가시에 찔린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뇌리에 남아 이렇듯 잊었던 감성을 다시 일깨워 주다니 새삼 고마움에 전율했다.

글의 후반부에 고인이 된 김수환 추기경과 박경리 작가, 박수근 화백에 대한 그리움은 마치 한껏 피었다가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보는 심정이었다면 작가의 회고에 누가 될런지 모르겠다. 하얀 꽃이 눈처럼 흩날리며 감사의 향기를 퍼트리니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글이었다.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마 박완서 작가도 후배 문인들에게 더 진한 향기로 사랑을 베풀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이 순간 작가는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가 아니라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다로 느껴졌다고 한다면 얼마간 무례한 발언일까. 작가에게서 지금 순간이 참 행복하다고 느껴졌고 그 기쁨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늘 집 앞에서 서성이다가 우연히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정원을 거니는 느낌, 또 우연히 빈집을 봐주는 행운이 찾아온 느낌...그리곤 그녀의 행복을 조금이나마 전해받고 온 느낌.

나는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다. 행복하게 글 쓰고 그래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길 바란다. 빨갱이 콤플렉스에 짓눌려 피하기만 하던 붉은 색이 아닌 역동적이고 정열적인 원초적 붉음에 삶의 희열을 느끼고 그 감정을 그대로 말해주길 바란다. 그녀의 길이 누구에게는 못가본 길, 아름다운 길이 되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의 길이 되길 바란다. 그리곤 나 역시 아직 가보지 못한 길, 꼭 한번은 가 보고 싶은 길에 고개를 돌리지 않기를 바란다. 어쩌면 계속해서 그녀가 행복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처럼 나는 소망한다, 그녀의 행복을, 그리고 내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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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9-0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어오질 말던지,리뷰를 읽지를 말던지...
아웅,내가 살면서 책 살 돈이 없다는 소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ㅠ.ㅠ

한사람 2010-09-02 07:12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이...
워낙 독서애호가 시니..그렇죠..ㅋㅋ

하지만 이 책은...소장가치도 있고..
작가란 이렇게 나이 들어야 해...이런 생각이 드네요^^
 
<바이퍼케이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이퍼케이션 1 - 하이드라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Beyond the story ..... 다다를 수 없는

우선 미안하다. 먼저 책을 읽었다고(선택이 아닌 기회였기에), 평을 하는 기회가 생겼다고 함부로 입이나 손을 놀리고 싶지 않았다. 변명을 하자면 이 작품에 대해 그 어떤 의견도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일절 생기지 않은 이유로 나는 책을 덮고는 얼마간 뜸을 들였음이다. 혹시라도 먼저 취한 자에 대한 통상적인 예우로 질문을 받을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그냥 읽어봐...' 이렇게 말하곤 또 입을 굳게 다물었을 것이다. 그것이 15년이나 준비기간을 거쳐 치밀한 분량의 장편을 엮어낸 작가와 작품에 대한 예禮라 생각했기에 굳이 내 방식대로 '침묵'의 답을 고집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라도 15년의 결과물을 단 며칠 안에 독파했다고 이러쿵저러쿵 해야 하는 일개 독자로서 먼저 사과의 인사는 해야겠다.

또 하나, 어줍짢은 글 실력으로 가끔 소설 창작에의 의욕이 충만해질 때, 혹은 그 옛날 어렴풋한 꿈을 더듬어 책이라도 한권...하는 희망을 가져볼 때 여지없이 그 의지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작가와 작품은 그 의지를 불타오르게 한 작가와 작품들만큼이나 많았는데, 내 인생에 있어『바이퍼케이션』은 애석하게도 전자에 속하게 될 듯하다.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로 느껴졌다고나 할까. 혹시라도 비슷하게 흉내를 내기도 힘들 것 같은 - 이것은 작품에 대한 감동의 깊이나 작가에 대한 평가의 정도와는 다른 이야기다 - 무언가, 어딘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格으로 느껴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밀도와 완벽함에 압도당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작가로서, 이 작품을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 오감을 초월한 감각'을 자신이 그대로 재현해 낸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에서 자연스레 '얼마나 고민하고 파헤쳤을까'하는 존경심이 그 의구심을 대신한다. 그동안 편협했던 내 독서취향에 대해서도 조금은 수정이 불가피 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는 애석하게도 작가의 대표작인 『퇴마록』을 접해보지 못했기에(영화로만 만나본) 전작과의 비교나 변화에 대해서는 언급할 자격이 없다. 生의 이력을 보니 이과를 졸업하고 예술분야의 직업을 가진 후 지금은 문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관심을 가지고 홈피를 방문하였더니 그의 인사말엔 틀에 박힌 주례사가 아닌 진솔하면서도 정중한 부탁이 전부였다. 근황을 알리는 게시판에는 작품 마무리로 인해 세상과의 연을 끊고 며칠 다시 칩거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2010. 8.28) 순간, 그렇다면 이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그가 세상과 인연을 끊었던 시간은 얼마나 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언가 보통사람들이 가늠할 수 있는 삶의 내공을 훌쩍 뛰어 넘은 사람으로 느껴졌고, 약간의 神적인 기운까지 감지되었다. 시쳇말로 '신들린 듯' 이야기를 창조해 내지 않았을까하는 무례한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으론 그 인내와 고통의 과정에 자못 숙연해지기도 했다. 작품 속에서 아주 오랜 기간 풀리지 않는 무언가를 놓고 고민하고 부딪히며 그것을 부수어 보려는 각고의 노력과 의지를 읽는 내내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만의 약간은 어둡고 뒤틀린 분위기를 내는 공간은 너무도 많고, 저는 그런 것에는 지쳤습니다. 얼굴을 마주 보는 것처럼 실명을 드러내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며, 나이 많은 사람은 어린 사람을 이끌어주고 어린 사람은 윗사람 혹은 선배를 존중하는, 그런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http://www.hyouk.kr/ 이우혁 공식 홈피 인사말 中에서

『바이퍼케이션』이라는 학문적 용어를 제목으로 한 이 작품은 세권 분량의 장편으로 장르 소설의 추리, 범죄, 판타지, 스릴러등의 영역에 분류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부분에 이의를 달고 싶지는 않으나 나는 굳이 '심리' 혹은 '철학'이라는 수식어를 차용해 '심리판타지'나 '철학스릴러'라는 타이틀을 추가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잔혹한 살인장면이나 피로 물든 공포분위기 보다는 작품의 근간이 된 심리학과 철학적 배경이 상당히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로인한 논리성이 무서우리 만치 과다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무게감은 이 작품이 공포나 범죄소설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에 충분했고 궁극에는 인간의 본질이나 능력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향하고 있었기에 혹시 이 작품을 '재미' 나 '쾌감'을 주목적으로 집어들 생각이라면 과감히 권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의견이기도 하다.

작품의 영역과 작가의 문체는 독자인 내가 리뷰를 작성하는데 있어서도 영향을 주었던지 전에 없이 감수성과 서정적 분위기를 지양하고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하이드라'로서 작가가 글로써 독자를 조종한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내가 이 작품을 덮으면서 가장 경외로와 보였던 것은 에이들이라는 FBI 프로파일러의 숨쉬기도 힘들 정도의 더할 수 없는 논리성이었다. 두 번째로는 그 논리성을 더욱 완벽하게 부각시키는 피라미드적 구성이었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천착한 문제인 세상은 '우리가 인식하는 느낌과 힘'으로만 구성되어있는 것인지의 여부,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종류의 감각이나 차원에 대한 신비로운 문제의식이었다. 이를 정리하면 소설적 구성에의 완벽성, 등장인물의 매력성, 문제의식의 참신성으로 귀결된다 할수 있겠다.

Pyramid Construction ..... 소설적 구성의 완벽성

우선 작품 전반에 해당 장의 첫머리엔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나 실제사건의 경위 및 결과, 범죄자의 인터뷰 혹은 니체나 세익스피어, 애드가 앨런 포, 에밀리 브론테와 같은 작가의 작품 속 문구와 대사가 등장한다. 이 반복되는 장치들은 물론, 이야기로서의 황당함이나 이해불가한 상황들을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반신반의성 도구로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법의학자'만 해도 '법의병리학자'와 '법의곤충학자'로 분류될 수 있다는 사실과 '범죄생물학자' 로도 칭해진다는 지식을 마치 수학예습처럼 훑을 수 있고 실제 일어난 사건의 살인자와 소름끼치는 인터뷰 기록을 보고는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적인 신뢰감을 조성한다.

1권에 주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프로파일러나 법의학, 실험 및 검사기법, 통계 및 분석 등의 객관적 자료가 제시되어 연이어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을 피해자나 가해자의 입장이 아닌 냉철한 프로파일러나 수사경찰의 입장으로서 사건을 침착하게 바라보게 한다. 이때 이 객관적 자료들은 사건에 도움을 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해결에의 공동의 책임감과 중압감을 더 드높이는 교묘한 장치로도 느껴졌다. 도무지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로서 각 사건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듯한 느낌을 갇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마치 힌트나 자료를 얻고도 답을 풀지 못하는 무능력한 소시민이 되는 무력감을 제공해 추후 그것을 논리정연하게 풀어 나가는 프로파일러의 천재적인 사고능력과 그 전개에 완전히 몰입할 수 밖 에 없도록 하는 치밀한 전략으로 생각된다. 물론, 다른 공포 추리 소설에서도 던져진 사건들을 좇아가다 보면 도대체 범인이 누구인지, 배경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그 궁금증 자체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그것은 장르소설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기본요소 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범인과 배경에 대한 정당한 일차적 궁금증 외에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도대체 이 이야기가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컨텐츠인지 내가 파고들 수 있는 범위와 깊이의 수준인 것인지 어디까지 이야기가 벌어질 것인지 읽어갈수록 서사의 파도와 그 파워에 압도된다는 것이다. 항해를 해보기 전에도 아예 눈앞에 펼쳐진 거친 파도로 격랑을 헤쳐나갈 용기가 상실되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을까. 작가는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동의를 처절하게 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2권에서는 프로이드와 융의 심리학 저서에 인용된 문장들이 에이들이라는 냉철한 프로파일러와 가르시아라는 인간적인 수사경찰관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한 이해에 힘을 실어 준다. 3권에서는 세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대사나 노래가사 등이 자주 등장하며 해결국면으로 치닫는 과정에서도 시적인 은유로 이야기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한다. 전권에 걸쳐 헤라클레스, 오레스테즈, 탄탈로스, 파에튼, 악타이온와 같은 그리스 신화속 인물의 탄생 배경과 전적, 의미 하는 것들을 미리 들려주고 그 인물을 적용시킨 소설 속 주인공들이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지 관찰자의 시각으로 좇아가게 만든다. 신화 속 인물들은 바로 작품속 범인의 성격과 범죄유형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며 사건으로 나타난 양상 자체 보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에 더 마음이 가도록 유도한다. 가끔 순수문학작품의 한 구절을 뜬금없이 제시하며 작가가 고민하고 질문하려 했던 메시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스치듯 지나갔던 그 질문은 세권을 다 읽은 다음에도 오랜 여운으로 남아 섬뜻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전 분량에 걸쳐 이같은 순도높은 배경으로 같은 정도의 밀도를 고르게 유지 한다는 것이 놀라웠고 결국 처음에 우스워 보일 수 있었던 카드나 지폐의 글씨만으로도 사람의 의식을 조종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하고 유치해 보이는 설정도 나중에는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다는 공감을 도촐 해 내는데 성공한다. 이렇듯 작품의 맨 하부에 이론적 지식과 객관적 자료, 신화적 배경을 흩뿌리고 맨 상층부에 가이드 팁을 배치한 후 중간부분에 방대한 이야기를 펼쳐놓은 방식은 거대한 피라미드가 되어 내구성 있는 건축물로서 뼈대의 튼튼함은 물론 외양적인 신비감까지도 한껏 높여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소설적 구성에의 완벽성을 추구했다는 점이 문학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나는 범죄심리학에서 출발해 인문분야의 인지부조화나 심리학 전반, 그리스 신화, 수학적 현상, 서양철학, 다양한 고전작품에 이르기까지 개개의 퍼즐이 딱딱 들어맞게(시쳇말로 아구가 들어맞게)소설을 축조한 작가의 완벽적인 성향에 후한 점수와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Character Match ..... 등장인물의 매력성

이 작품에는 따지고 보면 범죄와 살인에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조종에 의한 우발적 사건이었건, 치밀한 계획에 의한 복수이었건 사람들은 외견상으로 모두 칼이나 총을 들고 자신을 포함한 타자에 잔혹한 피를 뿌린다. 그런데 내가 매력을 느낀 건 총기가 아닌 입이라는 무기를 사용해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면전에서 끝까지 대립하는 인물들의 말싸움 이었다.

즉, 프로파일러 에이들과 수사관 가르시아의 심리적 대결구도와 헤라와 헤라클레스간의 내면적 대결이 이 작품을 더욱 심리소설의 영역으로(물론, 내 주관이지만) 확장시키는데 큰 몫을 한 듯하다. 1권이 연이어 터지는 사건 속에서 점점 고조되는 긴장의 연속이 감상포인트라면 2권은 에이들과 가르시아간의 지칠 줄 모르고 파고드는 설득과 의견주장이 핵심이라 할 것이다. 에이들이 가르시아와 벌이는 긴 시간 설전양상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심리적 압박감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에이들의 타고난 천재성과 논리정연한 의견, 상대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함정에 빠뜨리는 능숙한 두뇌는 의외로 가독성과 흡입력이 높아 몰입의 무아지경을 체험케 하는 마법을 함께 선사한다. 내가 놀란 것은 에이들이 사건을 분석하고 단서들로만 하나의 구심점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상당히 전문적으로(물론, 내가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아니, 천재이상의 초월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도저히 풀 수 없어 보이는 암호나 퍼즐을 맞추는 영화 속 주인공에다가 과거의 상처에 자유롭지 못한 음울한 분위기,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철함이 더해져 어느 한사람의 고착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오히려 그러한 에이들에 짓눌려 보다 인간적이고 따스한 성품의 가르시아 반장의 캐릭터가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것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더불어 에이들이나 가르시아 역시 과거 누이와 아버지의 끔찍한 죽음으로 인한 지울 수 없는 내면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로 그려지는데 이 두 사람이 그 어둠을 헤쳐 나오는 방식은 각기 '복수'와 '용서'라는 상반된 코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결말도 대치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 인간본성이라는 것이 과연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본질적 질문에 귀착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초반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나는 에이들과 가르시아의 설득, 대결, 동맹, 의리, 연민, 이해등의 다층적구조가 섬세한 감정묘사와 어우러져 펼쳐지는 일종의 팽팽한 두뇌게임과도 같아 빠른 속도로 작품에 빠져들었다.

결혼, 출산, 가정의 수호신인 헤라와 그리스 신화의 최고의 영웅 헤라클래스와의 대립구조도 심상치 않은 재미를 선사하며 에이들 대 가르시아 다음으로 흥미로왔음이다. 특히, 융의 심리학에서 여성안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아니무스를 적용시켜 해라부인의 아니무스로서 헤라클레스를 창조한 것은 무릎을 탁 칠만한 독창적인 선택이었다. 해라와 헤라클래스의 인격대립은 이 작품의 주제와도 연결되는 가장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모티브였기에 앞으로 벌어질 다소 작위적일 수 있는 연출까지도 어느 정도 반론을 무마할 수 있는 논리성을 획득했다고 본다. 결국 동일인물이면서 한명의 인간 안에 두 개의 인격으로 그려진 광기어린 혼돈의 도가니는 그야말로 인간이 이렇게 까지 무서운 존재일 수 있을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 적지 않았음이다. 3권에 이르면 헤라와 해라클레스의 내면적 분열과 그 결과로 나타는 참혹한 인명의 피해가 그 수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들간의 대립양상에 피곤함이 감지되면서 해결국면을 바라게 된다. 그러던 중 나는 해라에게 조종당해 3권의 어느 페이지에서 정말 숨이 멎을 만큼의 경악과 소름을 몸서리치게 경험했는데...아마도 작품을 몰입하며 읽었던 독자라면 글자의 힘을 새삼스레 체감한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경고하건데, 심장이 멎을 만한 페이지가 있을 것이라 절대로 미리 책을 뒤적이지 말기를 바란다.

Theory & me ..... 개인적인 견해

나는 학부에서 인지발달이론, 인지학습이론 등을 연구하는 교육심리가 전공과목에 있었기에 인지의 적절한 불균형 상태를 말하는 '인지부조화'와 그 이론의 광범위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편에 속한다. 그런데 여지껏 그러한 복잡한 심리학 이론을 인물의 캐릭터에 적용해가며 작품 속 대사에서까지 그것을 소재로 토론을 하는 소설은 보지 못했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된 공간으로 정신병원이 등장하는데 만약 그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하나하나 분석해가며 환자의 성장발달과 가정환경 속에서 심리학적 용어와 이론을 언급했다면 독자로서 정작 소설읽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어떤 일을 대하는 태도와 실제로 그것을 행하는 행동이 균형을 이루려는 심리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내적신념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일치되지 않을 때는 부조화를 기피하고 조화를 선택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부조화(불일치)를 피해 조화(일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쉽게 나타나는 태도변화가 합리화라 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사교육이 필요없다는 평소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아이를 학원으로 내보내야 하는 불가피 상황이 발생할 때 학원을 보내지 않기 보다는(행동변화) 사교육에 대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꿈으로써(태도변화) 인지의 조화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는 이 당연해 보이는 이론의 기본공식을 사용하지 않고 응용버전을 제시한다. 즉, 소설 속 인물들은 에이들, 가르시아, 해라, 뱀파이어 할 것 없이 대부분 '인지부조화 현상'을 겪었거나 그로인해 이미 혼란스러운 상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저질러 버린 자신의 행동이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은 것과 같은 단순한(학원문제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일생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극적이고도 우발적인 상황이었다.(해리성 장애, 살인,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등)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자신의 원래 신념을 교정할 때 무리수를 두게 될 것이며 그 과정과 결과로 에이들처럼 과다한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 한다든지, 해라처럼 새로운 근거나 추론을 만들어 낸다든지, 파에튼처럼 아예 파멸에 이르던지 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연속되는 사건 속에서 각자의 인지가 부조화 되는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부조화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의 대응방식이나 방어기제가 더 중요했다고 생각하기에 이 작품에서 굳이 '인지부조화 이론'을 언급하며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내게는 논리적인 옥의 티로 보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그러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미 그리스 신화적 배경이나 사건의 개연성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작품의 제목이 된 '바이퍼케이션'현상에 대해 언급을 하자면 바이퍼케이션 현상은 작품 속에서 치명적인 충격을 받은 해라에게 일어난 일로 보여 지는데 세권의 분량에 비하면 현상에 대한 이해를 완벽히 하는데 조금은 부족했다고 느껴졌다. 해라 외에도 다른 인물들이 인지부조화 현상이 발화되는 그 시점을 바이퍼케이션지점으로 보고 그 현상 이후 주인공들이 어떻게 불확실하게 변모했는지를 더 자세히 그려 내었다면 바이퍼케이션에 대한 인지가 더 확실해 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바이퍼케이션'은 원래 불확실한 결과를 뜻하는 수학용어로서 작가는 쉽사리 정의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을 이 단어에 비유한다고 들었기에 내가 이과적인 용어에 익숙치 않아서 그런 것인지 인문학적인 사람의 본성에 대한 결과론적 입장에서는 쉽사리 연결되지는 않았다. 사람이나 세상에 일어나는 하나의 극적인 순간 정도로 인식되었고 그 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상할 수 없는 결과로서의 인물들의 행동들로만 인식되었던 것이 아쉬웠던 부분이다. 차라리 증상이나 현상을 상징하는 의미보다는 결과로서의 의지를 지향하는 '균형'이나 '조화'같이(오만과 편견처럼) 진부하지만 여러 함의를 지닐 수 있는 제목이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무례함을 범해보았다. 불확실한 인간본성에 대한 의견은 전공분야마다 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을까?

Agenda for next ..... 문제의식의 참신성

하지만 작가가 끝까지 질문하려 했던 문제는 상당히 참신하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내 수준에서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인식하는 느낌과 힘만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만약 신적인 힘이나 능력 그 이상의 인간 너머의 감각과 존재를 가진 무엇이 있다면... 이 질문은 철학적이면서 과학적이고, 사회적이면서 개인적인 아주 고난이도의 난제가 될 것이다.

이미 작가는 작품에서 질문에 대한 가설을 세운 후 그 대답의 하나로서 자신만의 창의적인 답안을 제출하였다. 우리가 그것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작가는 앞으로도 이 문제에 대해 더 고민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이 끝이 아니고 사실 앞으로 더 무궁무진하다는 뜻으로도 읽혀진다. 어쩌면 그것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 위해 작품 속에서 이미 우리를 지독히도 설득해 오진 않았을까.

우리는 살다보면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감각이 더 발달한 사람들을 만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예지력이나 보통사람 이상의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도 만난다. 그러다가 이해가능 범위를 넘어선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그것은 일종의 정신병이거나 접신의 결과로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선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현실 불가능한 상황에 대리만족 하고 공감하며 현실로 돌아와 금새 잊어 버린다. 그러다가 뉴스를 통해 도저히 인간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범죄소식을 들었을 땐 대부분 정신이상적 징후를 거론하며 결론지으려 한다.

실생활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다중인격을 행사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범죄를 저지른 인물들은 하나같이 정신적으로 병적인 징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 곳도 마무리 된 곳도 정신병원이었다. 현대인은 이제 더 이상 정신병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을 실감하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발달할수록 정신이 더 다양화된 인간이 출현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신이상이 아닌 다양한 정신세계의 인간군상들 이라면 삼차원, 사차원이 아닌 더 깊고 넓은 차원의 힘과 감각을 가진 사람도 출현할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더 다양화된 인간의 감각과 능력에 대해 상상해볼 수 있었고 앞으로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으로 작가가 그려낼 다음 작품에서 그러한 내 상상력의 한계를 또 한번 넘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다. 쉽지 않았지만 나또한 무언가 해내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으로서 인간이기에 인간을 더 이해하고 싶었던 아주 근본적인 내안의 인간성이었음을 조용히 깨우쳐 본다.

"인간은 스스로 소유한 자유의 현기증속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는 안정을 원한다. 그런데 그는 신앙같은 의지할 것을 거부한다. 대신에 그는 상상력 속에서 사는 삶으로 후퇴함으로써 '자기자신'의 지성과 '자기자신'의 건강과 '자기자신'의 힘을 의지해 '자기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휘하려 함으로써 안정을 얻으려 노력한다."                                                                     - 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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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3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우혁은 언제쯤 읽기를 그만두었어요.
요번 작품도 이 리뷰를 읽지 않았다면 포기했을지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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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기회

그럴 때가 있다. 너무나 할 말이 많아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을 때. 몇 십년 간 헤어져 있던 이산가족이 서로를 애타게 찾다가 어느날 갑자기 해후라도 하게 된 그날이라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생이별을 감내한 후 드디어 만남의 순간이 실현된 그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두어달 전 이 책을 덮고 난 심정이 꼭 그러했다면 나는 분명 너무나 할 말이 많은 쪽 이었을 터이고 그런 만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못내 고맙고 기특하다. 지난 봄 목울대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 급한 대로 꿀꺽 삼켜버린 책을, 청춘의 열병이 아닌 불혹의 체증으로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던 그때 그 사람들을 가만히 그러잡았다. 다시 들쳐보고 확인하고 만져보고 결국 두 손을 교차시켜 가슴팍에 꼭 끌어 안는다. 상처도 그리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가버렸다 생각하지 않고 저만치 부러 두고 온 것으로 여기었던 내 청춘을 어루만지듯...그리움의 여운이 아직이다.

물 먹은 스펀지 처럼 축축했다. 처음엔 마음이 축축해 지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몸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책을 읽는 중간에 시작된 감기는 일주일이나 지속되었고 다시 책을 집어 들기가 얼마나 두려웠던지 작가고 작품이고 주인공이고 그런 건 일단 나중의 일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그토록 시름앓이 하던 증상이 꼭 프랑스 감기와 닮았었다. 파리는 고작 영하 1도의 기온에도 습도가 높아 안개처럼 스며드는 한기에 많은 유학생들이 병을 얻고는 한다. 나 역시 파리로 오랜 출장을 갔었던 그 겨울에 한동안 현지감기로 고생을 한 적이 있는데, 냉기 속에서 밤새 가습기를 틀어 놓고 일어난 것처럼 미칠 것 같은 외로움도 함께 덤으로 폐부에 스며들게 되는 악명높은 '프랑스 감기'와 꼭 같은 느낌의 감기였던 것이다. 뒤늦게 육체적인 감기를 인정하고 원인을 찾았을 땐 그건 마흔살 올해의 감기가 아니라 이십대 청춘의 그때 감기였다는 자각에 나는 육체적 아픔도 회춘이 되는 것인지 의아했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 청춘성장소설이었다고 나에게 있어서 지나간 청춘에 대한 연가나 헌사는 아니었던 터 이다. 청춘에 물러선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객관적 사실은 언제나 청춘이 그립기도 한 주관적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인증수단이었다. 유난히도 청춘이나 연애에 준하는 수식이 앞서는 작품들을 기꺼이 선호하지 않아 왔었고 혹시 접했다 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냉정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건 그런대로 잘 견뎌왔다는 자긍이 아닌, 나는 상처 받은 적이 없다는 부인이나 외면도 한몫했음이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청춘은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내면의 무의식에서 시작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인생에서 '청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객관적 세월들을 그만 황급히 묻어 봉인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썩어서 버리지 못하고 급속히 냉동시켜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처들로 오랜 세월 보존된 덕에 영영 부활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청춘과 영원히 이별 할 수 있었던 나에게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오히려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거나 부러 확인하려 하지 않았던 상처들을 또렷이 기억하게 함으로써 비교적 담담한 채 중년을 맞이할 기회를 여간해선 도와주지 않았다. 아마도 미련하게 마흔을 지독한 열병으로 투병 중이던 나에게 이 작품은 분명 청춘을 똑바로 반추하라는 최후의 기회를 제공하려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십대의 외국타지에서 걸린 바이러스가 이렇게 재발될 리가 없었다.

이번 작품은 작가가 특정시대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다고 친절히 설명해주었지만 이 작품을 읽었을 독자 누구라도 그러하듯 그 특정시대는 내가 청춘이었을 당시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나였다. 그것은 작가의 전작인『엄마를 부탁해』를 접했을 때에도 마치 내 어머니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느껴진 작가의 놀랄만한 공감 소통력도 있었겠지만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생활방식은 어느 누구의 청춘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끝까지 내 고집을 버리지 않았음이다. 물론 내 청춘 속에서만 외로움과 그리움, 편지와 책, 눈맞춤과 입맞춤, 헤어짐과 상처가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헤어진 모든 연인은 더 아름답고 죽어간 모든 시인은 더 위대한 것처럼 지나간 모든 청춘은 더 아픈 것일 테니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젊은이는 청춘이라는 시간적 공간안에서 모두 각자의 상처를 손에 들고 어깨에 짊어지고 등에 업고 부둥켜 안고 있다. 이들이 청춘을 밟아가는 방식은 우리가 청춘을 지나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대적 배경은 물론이고 만약 영어, 중국어, 일어, 불어로 번역되어 살짝 지명만 바꾼다 해도 독자들은 자기나라 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현대문명의 기계를 배제했다는 미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잠시라도 인터넷에 접속 못하면 안절부절 하는 네트워크와의 분리불안증이 너나 할 거 없이 심각한 오늘에도, 로봇과 당당하게 결혼을 하는 시대가 올 것 같은 내일에도 불멸의 청춘으로 기억 될 가슴앓이는 청춘에 대한 이 세상 모든 이의 그리움의 질량만큼 계속하여 세상에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윤, 단, 명서, 미루...마치 가슴을 울리는 종소리가 저마다의 특색인 어느 아름다운 종들의 이름처럼 이 네 명이 울리는 종소리는 깊고도 길었다. 네 명은 서로를 만나고, 서로를 알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잃어가며 자신의 종을 울리고 자신만의 소리를 내는 방법을 찾아간다. 여기에 먼저 방법을 알아내었고 또 지금까지 알아가려 노력하는 윤교수라는 청춘의 스승이 이 들 네 명을 보이지 않게 연결해 주고 손 잡아 준다. 이들 젊은이 네 명과 젊은이 였었던 한명이 울려내는 종소리는 다행히도 우리들 각자 자신들만의 청춘에 훌륭한 배경음이 되어 유현하게 자리잡는다. 그들이 청춘을 알아가던 시간이 다시 내 청춘에 포개어지는 엄숙한 이 합체식은 우리들 뇌리에 오랫동안 각인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들이 소통하고, 관계하며, 변화를 희망했던 방식을 오래 기억하고자 한다.

마음으로 소통하는

먼저, 소설은 팔년 만에 임종을 앞둔 윤교수의 소식을 알리는 명서의 전화와 그를 받아든 윤의 감회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윤교수의 임종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소식을 알리려는 전화벨과 소식을 듣고 달려가게 된 사이에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경우이다. 전화벨은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신을 찾고 있는 소통의 신호이자 의지의 표현이다. 청춘을 향한 발신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들 네 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누군가를 찾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패와 상처를 얻게 된다. 이들이 소통하는 방식은 아마도 휴대폰, 컴퓨터가 아닌 전화선이 꼬불꼬불한 유선전화라는 기계를 도구로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이 울리는 소리는 지금처럼 세상에 울리는 온갖 종류의 소리가 아닌 '나는 지금 단 한사람 너를 찾고 있다'는 보다 명징한 '따르릉'의 한 가지 벨소리였음이 분명하다. 수신자는 그 하나의 소리에 눈이 아닌 마음으로 상대를 유추할 수 밖에 없고 발신자는 내가 누군지 확인 할 수 없는 상대에게 마음으로 의지를 전달할 수밖에 없는 애절한 통신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화라는 기계를 이용하지 않는 나머지 대다수의 시간엔 언제나 마음과 일체된 자신의 신체를 이용하는 감성적 아날로그 행위를 보다 많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방식은 마음을 다해 걷고, 마음을 다해 쓰고, 마음을 다해 읽는 것으로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것이다. 이 안쓰럽고 다소 미련스러운 방식은 아이폰과 트위터의 속도와 범위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을 담지 않아도 얼마든지 나를 알리고 상대를 알 수 있는 무례함과 가벼움을 허락치 않으며 소통이 막 이루어진 순간 이후에도 외롭거나 허무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진심과 진실성에는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하지만 걷고, 쓰고, 읽는 것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고 살아 있는 한 계속될 일이기 때문에 이들의 청춘은 영원할 수 있어 보였다.

엄마를 보내고 휴학했던 윤이 다시 도시로 돌아와 자신과 약속한 다섯 가지 중 마지막 약속은 이 도시를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걷겠다는 것이었다. 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 중 하나였지만 무작정 걸었기에 넓고 좁은 길이 너무 많아 자주 길을 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상처가 살아나려 할 땐 누군가가 그리울 땐 시장과 헌책방, 고궁, 공원과 학교 를 걸어왔고, 세상의 끝이라도 보게 될 것처럼 명서와 바닷길을 걸었고, 윤교수를 만나기 위해 험난한 눈길을 헤쳐 걸었다. 윤과 명서, 미루는 도시를 순례하듯 같이 걸어가며 길과 친해지고 사람을 알게 되고 공간에 익숙해지는 청춘의 탐색과정을 통과한다. 걸었기에 잃어버렸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걸으며 찾으려한 그들의 청춘은 자꾸 넘어져도 언젠가는 자기 발로 걸음을 떼고 마는 어린아이의 첫 발자욱을 그리게 한다. 이들의 '걷기'는 '숨쉬기' 였으며 이들의 '걸음'은 '생존'과도 같은 동일이음어 였지 않을까. 그들이 작품 속에서 걸어 다닐 때마다 어느 시절 숨을 내쉬며 걸어간 내 발자국이 같은 길 위로 희미하게 새겨지는 기쁨이 느껴지기도 해 가슴이 쉬지 않고 방망이질을 해댈 때가 많았다. 그들이 걸었던 길이 사르트르와 까뮈가 차를 마셨다는 카페골목처럼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거지향적인 욕심일까. 내가 걸어왔던 길도 대부분 사라져 버린 오늘이지만 누군가와, 아니혼자라도 걸었던 그 시간만큼은 영원하기를 바래본 순간이었다.

명서는 학교 앞 서점에서 구입한 갈색노트에 자신의 행적과 사유를 남기는 것으로 윤과 단이, 그리고 자신과 소통하고자 했다. 명서는 앞 못보는 동료를 위해 스스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개처럼 언니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거울처럼 안고 사는 미루에게 길잡이가 되었듯, 작품에서도 '갈색노트'라는 이정표를 통해 우리에게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노트의 색깔이 마침 갈색인 것은 빛바랜 추억의 일기장을 들쳐보는 회상효과를 일으켰고 작품 속에서 마치 윤이의 질문과 고민에 대답과 원인을 밝혀주는 의미로서 '정답노트'나 '진실노트'의 의도된 장치로도 느껴졌다. 가죽의 겉표지를 선호하는 내 취향과도 꼭 같았지만 청춘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마음은 매번 조심스럽기도 해 한마디, 한문장도 놓치기 싫었음이다.  

거식증이 있었던 미루는 자신이 먹은 것을 하나의 의식처럼 노트에 기록하고 의문을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과 사건 경위를 적는다. 윤, 명서, 미루는 문장 이어쓰기 놀이를 하며 희망을 쌓고, 단이는 군대에서 윤에게 편지를 보내며 시간을 견뎌낸다. 윤교수는 시집을 쓰고 사직서를 내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건넨다. 이들 중 미루가 자신의 식사기록을 남기던 장면은 유독 내 기억의 한 자락을 자꾸 노크해 그만 문을 열어 버릴 수 밖에 없던 순간이기도 했다. 고혈압이었던 내 아버지는 매일아침 자신의 혈압을 체크하고 그것을 강박적으로 작성하는 기록맨이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론 당신이 당신의 힘으로 거동이 가능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손으로 기록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수시로 정리를 해놓고 자신의 뇌를 점검하는 행위가 기록의 습관이지만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무엇을 하고 기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록하려 무엇을 하게 되고 기록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미루나 내 아버지나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던 것에 대한 두려움을 기록함으로써 견뎌내려 한 것 같아 미루의 노트는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이들은 각자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말테의 수기를 읽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시집을 읽어주고 노래를 들려주며 서로의 청춘을 어루만진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청춘이었을 때 기형도의 시집이나 전경린의 수필 한권쯤은 의례 가방에 넣고 다니며 마치 요절한 천재 작가들이 못다피운 청춘의 꿈을 그때 청춘이었던 자신들에게 바치는 헌사 쯤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시집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친구가 있고 또 그것을 들어줄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처럼 이들에게 쓰고 읽고 노래 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나로 이어지는

윤, 단, 명서, 미루 이 들 네 명은 모두 각자 태어나기 이전의 내면의 쌍둥이같은 존재를 품었기에 서로에겐 반쪽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윤이는 단이를, 명서는 미루를 잃게 되면서 자신의 반쪽을 상실하게 된다. 단이는 어린시절부터 윤의 고향친구였고, 명서는 같이 한 공간에서 식구로도 지낸 미루의 이웃친구였다. 그런데 여기서 윤과 명서의 만남으로 파생된 윤과 미루의 관계에서도 같은 상처를 가지게 된 동등한 입장으로서 이차적인 반쪽관계가 형성된다. 즉, 윤과 미루는 서로 암으로 사망한 엄마와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언니를 대신하는 존재로서 서로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나는 사실 윤과 명서의 애틋한 러브라인 보다도 동성간이지만 윤과 미루가 마음을 나누는 과정들이 퍽이나 공감가고 시큰했기에 그런 만큼 미루의 죽음은 원래 반쪽이었던 명서의 슬픔보다 더 큰 윤의 슬픔으로 거칠게 다가왔음이다. 여학교만 15년을 다녀온 생의 이력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돌이켜 보니 그 시절 매일을 붙어 다니며 걷고 쓰고 읽는 것으로 청춘을 나누던 친구들이 내게도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는 상실감으로 선명하게 자각되어 겉잡을 수 없이 슬픔이 배가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을 보내고 남겨진 두 명의 청춘 윤과 명서는 각자의 반쪽을 잃은 후 살을 도려내는 상실을 받아 들이고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 질듯 하면서도 완벽히 반쪽이 되지는 못한다. 각자 엄마와 언니를 잃었던 윤과 미루는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똑같이 친구를 잃은 상처를 공유하게 되었으면서도 왜 이들은 서로를 껴안을 수 없었을까. 이 부분에서 아마도 나처럼 나이든 많은 독자들이 지난날 첫사랑을 포함한 몇 번의 사랑에서 시행착오로 얻게 된 자신들의 상처텃밭에 비로소 그리움의 싹이 발아 되는 것을 감지했으리라 믿는다. 남녀간의 이성에서는 각자 너무나 큰 상처를 가지고 있을 땐 결코 같이 손잡고 있는 것이 사랑을 지속하는 일이 못될 수도 있다는 훗날의 깨달음이 윤과 명서를 보면서 새삼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사랑을 할 땐 내상처의 크기와 관계없이 상대의 사랑의 질량과 비교없이 누구라도 내 온전한 마음을 줄 수 있어야 했다...다행히도 소설 종결부에 윤과 명서는 서로에게 언젠가 함께 늙고 싶은 존재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반쪽으로 재생될수 있음을 예감케 하였다.

이들이 서로와 관계 맺고 연결되는 직접적 계기는 청춘의 상처라는 눈에 보이는 소설적 장치들이었지만 이들이 그 상처를 극복하는 존재들로서 뒷켠 한 구석에서 보이지 않는 응원을 해준 것은 윤교수라는 우리 시대 청춘의 스승이었다. 윤교수는 보이지 않게 연결된 사람들을 이어주는 따스하고 희망어린 '손'을 상징한다.

윤교수는 크리스토프의 전설을 통해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방법을 알려주었듯 사람들과 손잡는 법을 온몸으로 실천하도록 유도한 당사자이자 전달자였다. 윤의 아버지와 사촌언니는 윤이 외롭고 힘들 때 피같은 체온을 담아 손을 꼭 쥐어주었다. 윤은 그 손으로 불에 타고 있던 언니의 손을 놓지 않아 화상을 입게 된 미루의 손을 잡아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언니의 손을 놓기 힘들었던 미루에게 남겨진 화상은 외양적인 수치감은 물론 내면적인 죄책감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흉터였기에 윤의 배려는 미루에게 재생의 의지를 제공한 것이다. 미루는 자신의 노트에 윤교수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으로 삶의 구원을 갈망한다. 단이는 거미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서 엄마묘소를 향한 윤의 손을 꼭 잡아 주며 순수한 마음을 건넨다. 명서는 시내 한복판 시위대 현장에서 길을 잃고 맨발이 된 윤의 손을 놓지 않으며 훗날 같은 상처를 이겨내야 할 그들의 의지를 암시한다. 윤교수는 운명하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이용해 제자들의 손바닥에 별이 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으로 사람들이 진실하게 소통하는 방식을 끝까지 온몸으로 보여준다. 이들이 관계하는 방식은 결국 함께 있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손을 내밀어 기꺼이 잡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선사하며 마치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하나가 된 듯한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손을 잡아 준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을 잡아주는 일일 것이다. 두 손을 잡는 것의 몇 배로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으리라 생각하니 어느새 내 가슴도 홧홧해져 그 뜨거움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꿈을 꾸고 희망하는

작가는 이들이 꿈을 꾸고 변화를 희망했던 각자의 공간을 세밀하게 창조하여 우리를 초대했다. 네 명의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 걷기도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 머물기도 했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청춘의 추억을 생산한 보다 구체적인 그들의 공간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내며 특유의 서정적 묘사로 상실한 가족이나 동시대인으로서의 공동체적 연대감에 절대적인 공감을 유도해 내는데 성공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는 그 어떤 공간도 이 세상에서 가장 미학적으로 표현해내며 독자를 어떻게든 위로하고 마는 놀라운 치유능력을 보여준다. 그들이 함께한 공간에서 그들의 추억을 접하면서 청춘이었을 나의 꿈과 희망을 살며시 포개어 보는 마음은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모양으로 변화할 것을 예고하는 일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한 윤교수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정지해 있지 않고 계속하여 성장하던 청춘 속에서 그들이 꿈을 꾼 공간은 바로 희망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사촌언니의 신혼집에 검은 도화지를 붙이던 윤은 자신만의 옥탑방에서 명서, 미루와 함께 체온을 나누고 불안과 고독을 겨루어 낸다. 아주 작은 빛줄기도 차단하며 마음의 문들 닫았던 윤이 자신의 방문을 직접 열고 친구들을 맞이하기까지 얼마나 혼자 눈물을 흘렸을까.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세상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절이...내게도 있었다. 돌이켜 보니 혹시 청춘이 아니었다면, 나이 들어 내가 누군가를 더 위로해 주어야 할 어른의 입장이었다면 책임감이나 혹은 그동안에 맺어놓은 관계들의 무게때문 이라도 마지못해 세상을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청춘의 상처는 세상에 더 빛나 보이는 자신과 같은 청춘들로 인해 그 상처가 더 깊어진다. 그래서 였는지 윤이 마음을 열어 친구들을 맞이한 그날, 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았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이 작품에서 윤과 명서, 미루 세 사람은 윤의 옥탑방에 모여 아욱국과 깻잎김치를 서로의 밥에 얹어주며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한다. 윤은 처음으로 그 밥상머리에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알리고 미루는 깻잎을 떼어 밥숟가락에 얹어주며 위로의 마음도 건네준다. 깻잎은 바로 작가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면서 고향과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할 때 떠올리게 되는 음식이라 고백한 적이 있다. 엄마가 없는 빈자리에서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반찬을 권하며 엄마의 죽음을 말하는 윤의 어깨를 말없이 안아주고 싶었고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 향이 진한 깻잎을 담아 그녀에게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놓고 나는 책을 덮고는 어린아이처럼 큰소리로 소리 내어 울었다. 딱 한번만 어머니가 해주시는 찌개와 장아찌들을 먹어 볼 수 있다면...한번만...그 순간, 사람은 떠난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떠나면서 그 사람이 만들어주던 음식을 못 먹게 되었음도 하늘이 무너지듯 슬플 수 있구나...절망은 이렇게 부끄러운 자신의 욕구에서도 시작될 수 있구나 싶어 스스로 많이도 놀라웠고 그 사실은 상실감 이상의 격한 서글픔이 되버렸던 것 같다. 그들이 밥을 먹는 모습은 그렇게 나를 울렸고 소박하지만 사람이라면 느껴보았을 따스한 인간애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세 사람이 함께한 밥상이었지만 그 밥상에는 윤의 부모님과 사촌언니, 단이와 함께한 추억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반찬으로 차려졌고 미루의 언니에 대한 그리움이 곁들여져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가슴 벅찬 청춘의 진수성찬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 반면 미루는 지상과 단절된 계단 끝에 위치한 지하방에 꼭꼭 숨어 감당하기 힘든 상처들을 계속하여 쌓아 두려고만 했다. 미루에게 있어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는 명서가 심어준 백합꽃이 비추는 한줄기 빛이었기에 그 빛을 통해 흘러들어온 윤과는 목욕탕이라는 서로를 숨길 수 없는 공간에서 마저도 상처를 벌거벗고 마침내 서로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게 된다. 미루는 죽은 언니, 명서와 함께 했던 빈집을 자신이 잊지 말아야할 상처의 원형이자 동시에 재생의 장소로 인식하였는데 이곳에서 우연히도 윤, 단, 명서, 미루가 단의 입대를 앞두고 며칠간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는 꿈과 같은 추억을 남기게 된다. 이 장면은 정면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았지만 각자 인생에서 청춘을 아름다움으로 회상할 때 잊을 수 없는 불멸의 풍경이 되어 오롯이 회상되고 있었기에 가장 아프면서도 가장 그립고 행복했던 청춘의 상징이자 꿈으로 다가왔다. 미루는 그 빈집이 팔리게 되자 현실을 더 이상 이겨내지 못하고 언니와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점점 어디서 태어났느냐 보다 어디에서 죽을 것인지가 더 궁금하고 그런 만큼 더할 수 없이 중요하게 생각된다. 미루의 삶은 불행한 청춘의 표상이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생을 마감하고 정리할 공간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죽음이야 말로 그녀에게 있어 또 다른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누군들 불꽃같이 치열했던 청춘, 그 시기에 꿈같던 기억하나 없겠는가. 누군들 청춘보다 아름다운, 그 곳에 죽음만이 희망으로 여겨졌던 순간 하나 없겠는가. 어쩌면 그러한 장면 하나로 나머지 눈물이나 실수를 이기고 여기까지 살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윤과 미루에 비해 집이 마땅치 않았던 단과 명서는 각각 군대와 성당이라는 도피 장소에서 현실에의 절망을 이겨보려 했지만 그곳은 또 다른 상처를 생산해 내는 더 잔인하고 분명한 현실을 대표할 뿐이었다. 특히 단이에게 군대는 더 이상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윤이에게 거절까지 당한 장소로서 그대로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는 청춘이 사장된 공간으로 표현된다. 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곧 생존을 할 수 없게 되는 가장 명백한 증거임을 다시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네 명의 젊은이들이 각자의 희망과 절망을 겪어내는 공간 뒤에 작가는 소설의 처음과 끝에 윤교수의 매개공간을 창조해 이들을 한데 모이게 함으로써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여기서 윤교수가 실재하던 연구실은 윤과 명서, 미루가 최초로 조우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이들이 헤어짐을 기념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윤교수의 빽빽하던 책꽃이에서 출발하였고 윤이 타이핑 했으며 그들이 나누어 가진 '우.리.는. 숨.을. 쉰.다.'라는 교재는 실제로도 그들의 숨통 역할을 하는 이야기 이상의 힘을 발휘했으며, 미루가 죽은 후 남겨진 노트는 윤교수, 윤, 명서를 향한 시와 편지를 그대로 간직한 채 윤교수의 책꽃이에 오롯이 꽃히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모두들 어디선가 울리는 전화벨을 듣고 달려와 모인 장소는 바로 윤교수의 임종을 앞둔 병원이었기에 그들은 그곳에서 윤교수의 죽음을 받아 들임과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 할 수 있게 된다.

희망의 종소리

그들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종소리는 하나의 울음이 되고 날아가는 새가 되고 흩날리는 눈송이가 되기도 했지만 이렇게 다시 오늘의 아침을 만들었다. 단이를 생각하면 봄날의 진달래와 개나리만으로도 신이 났었던 소꿉친구가 생각난다. 윤과 명서를 생각하면 스무살 풋내기 때 여름날의 축제가 떠오른다. 미루를 생각하면 가을날 코스모스와도 같았던 학교선배가, 윤교수를 생각하면 한겨울 눈이 쌓인 우리들만의 성탄절이 떠오른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아버지가 쓰러지는 상투적이고도 진부한 가정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 이후로 지나가는지도 몰랐던 청춘을 질기게 외면하는 것으로 대상이 없는 복수를 꿈꾸었고 그런 내 자신을 용서하지 않아왔다. 청춘이 없었기에 실연도 상처도 없었다고 믿어왔고 그러한 믿음은 그 시절 종교이상으로 내가 청춘을 넘어오는 단단한 버팀목으로 자리했다. 외동딸이었던 내가 공주님을 버리고 졸지에 가장이 되고나서 정확히 15년 후 아버진 길고 긴 투병생활을 마감하셨다. 그 15년 동안 나는 누군가를 사랑했었고, 누군가와 이별했고, 누군가의 죽음을 겪었었지만 그런 일들은 항상 처녀가장의 어깨 뒤에 숨겨야 할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기에 냉소와 무관심으로 똘똘 무장한 채 스스로를 곧추세울 수밖에 없었다. 죽도록 죽을 만큼 바빴고 바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이문세의 노래 중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이야' 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나는 이제 누가 물어보면(물어보지도 않겠지만) 많이 아팠다고 그 시절은 참 많이도 힘들었다고 말할 것 같다.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야 할,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내 자신을 위해, 죽도록 힘들었던 그 시절을 지나온 지금의 내가 너무나 근사하지 않냐고 되물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시절 미처 씻겨 내리지 못한 내 청춘의 상채기들을 어떻게든지 해원(解寃)하여 더 이상 빚을 안고 두 번째의 스무살을 맞이해선 안 될 거라는 무의식적인 절박한 심정이 그토록 필사의 사투로 내몰았던 벼랑 끝 독서는 이제 어엿한 추억이 되었다. 이해하지 않고 넘어갔던 상처들, 보듬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잊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대가는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가 한번은 부활하여 기어이 돌아오고 말 것이었다. 누구나 한번은 청춘에 대한 예의 깊은 성찰과 위로는 필요한 것이며 그것을 위한 자신만의 의식은 있어야 했던 것이다. 물리적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시간을 거슬러 꽃다운 내 청춘을 만나게 해준 작가의 노력에 이제야 눈물 짓는다. 청춘이라는 이 진부하고도 흔한 소재로 이토록 한 인간의 정체성을 다시금 재확립시켜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벅찬 날들이었다. 그녀가 선사하는 문학적인 공감과 인간적인 위로는 가족이 해체되고 진실은 은폐되고 인간성은 상실되는 오늘날에 만연된 불안과 공포를 정교하게 감싸안는 신화적 기운으로까지 느껴진다.

나는 이제 서야 뜨거워 질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를 살아내는 일은 청춘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청춘보다 더 치열할 자격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는다.

다시, 지나간 청춘을 어루만지듯 표지를 애무해본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모양으로 변화할 것을 예고하는 일이고, 바로 그것이 희망이라 했던가.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 희망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쩌면 나는 더 뜨거워지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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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3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이럼 안되는거잖아요~ㅠ.ㅠ
책보다 리뷰가 더,더,더...좋으면 신경숙 님한테 '쪼콤"미안해 지는 거잖아요~


2010-08-31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