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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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만화란 중학교 시절 황미나의 <안녕, 미스터 블랙>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론 잘 기억나지 않는 이유들로 만화와 인연이 끊어졌기에 만화에 대해선 아직 '순정'이나 '로맨스', '환타지' 라는 장르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수적 독자층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이 작품의 제목을 보고 감히 만화일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으며 최규석이라는 작가 또한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심정은 대학시절 늘 그렇고 그런 헐리우드 영화를 보아오다 어쩌다가 학회에서 장산곶매의 <닫힌 교문을 열며> 같은 영화를 본 기분이라 할 것이다. 만화라 하기엔 좀 애매하고 그렇다고 웃기엔 더 애매한 이 작품은 며칠 전부터 시작된 가을바람 만큼이나 신선하고 놀라웠다.

먼저 이 작품의 참신한 미덕은 무엇보다도 '표현과 감정의 디테일'에 있는 듯하다. 작가는 처음엔 60페이지 분량을 생각했다가 어찌하다 보니 125페이지의 살인적인 작화작업을 헤쳐나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장 한 장 일일이 선화작업을 하고 채색한 컷수가 어림잡아 800커트가 넘어 보인다.(세어보면서 새롭게 발견한 그림도 있다) 길바닥에 떨어진 지라시에 전화번호까지 새겨넣는 세밀함을 배경의 기본으로 유지한 덕에 그 노동량을 페이지가 넘어가는 손끝에서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공을 들인 덕에 요즘 일반만화는 물론이고 수채만화조차 접해본 일이 없었던 만화까막눈인 나로선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같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이 즐겁고 마음이 풍요로왔다.

공평한 꿈

하지만 그렇게만 말하고 말기엔 뭔가 좀 애매한 이 잔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턱없이 부족하다. 아마도 담겨진 이야기가 너무나 만화적이지 않다는 '리얼리티' 때문인 걸까.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김밥장사 어머니를 둔 강원빈 학생이다. 이름은 고급스럽지만 그의 외모는 원래부터 빈(貧)했을 것같은 뉘앙스가 물씬이다. 원빈이라는 배우가 생겨버릴지 미처 몰랐을 그의 부모의 센스가 아쉬울 지경이다. 실제로 작가는 미술학원에서 대학입시 만화강사로 일하며 학생들과 농담따먹기에 능했다고 했다. 그래서 작품엔 자학성 개그, 위악성 개그, 폭로성 개그가 난무한다. 원래 늘 거울로 확인하던 자신의 얼굴도 어느날 문득 정사진으로 새겨지면 그제서야 얼굴에 드리운 세월의 신산(辛酸)을 실감하듯 늘 보아왔던 서울의 거리, 동네학원가, 청소년의 뒷모습이 스틸컷으로 표현되고 나니 이토록 비정하고 짠할 수 있다니 새삼 우리 현실이 시려온다. 입시를 앞둔 청소년들의 실상이 그야말로 울기엔 좀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 웃거나 울거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화를 내는 것도 가능하지 -

울기도 뭣하고 웃기엔 미안하고, 화내기엔 썰렁하고... 얼마나 익숙해지면 상처에 무던해 질수 있을까. 나는 주방에서 오래 일한 어느 주방장의 수천 번 데인 손등이나 하도 발길질을 해서 발톱이 문드러져 버린 축구선수를 떠올렸다. 분명 매번 아프고 견디기 힘든 외상일테지만 반복된 내성은 본질이나 형태까지도 변하게 할 수 있는 '고통의 성찰'단계, 아프긴 하지만 견뎌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에 '알 수 있는 슬픔'이자 그러기에 '두렵지 않은 슬픔'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친구가 산전수전 다 겪은 아저씨, 아줌마가 아닌 꿈많은 십대 청소년들이다. 아... 이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에게 '꿈 많다'는 무책임한 수식을 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많지는 않았지만 선명한 꿈은 있었다.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집안형편 때문에 재능을 포기할 뻔한 원빈이에게도, 합격한 대학에 어떻게든 등록금을 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은수에게도, 단점은 없지만 몇 년 동안 특성이 없는 그림을 그려내던 부잣집 딸 지현이에게도, 지현이보다 성적은 높았지만 수시합격에 떨어진 윤선이에게도, 술집에서 알바를 하던 은지에게도 모두 꿈은 있었다. 이들에게 꿈이 없었다면 현실은 오히려 더 편하고 그런대로 살만했을까. 이들은 모두 확실한 꿈이 있었기에 현실이 아팠다. 학원비는 그들이 키우는 꿈의 속도를 좇아오지 못하고 툭하면 밀리기 일쑤고, 겉으로 천민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하던 서점 사장에겐 노동의 사기를 당하고 만다. 언뜻 보아도 누구라 콕 짚어 말하긴 거시기한 누구와 참 비슷하게 생긴 학원 원장은 강사에게 살짝 손댄 그림을 학생응모작으로 공모전에 접수하라며 돈 주는 애들을 위해 일을 하라 핀잔을 준다. 어른이 보기에도 어른 됨을 무지하게 후회하게끔 만드는 어른들의 얼굴은 거리의 전봇대나 어지러운 간판, 포장마차의 불빛과 어우러져 늘 그 자리를 지키던 길고양이에게까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음이다.

불공평한 재능

학원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사제지간에서도 그런대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꿈을 준비하던 이들에게 무엇보다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순간은 빈부격차가 곧 합격의 격차와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꿈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현실을 확인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수시합격자 발표를 둘러싼 학원내부 비리 갈등은 비단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에서만 일어나는 비극은 아닐 것이지만 태섭샘과 달리 세상이 더 편해 보이는 종화샘이 보여준 어른들의 야합과 학생들을 향한 기만은 그의 반반한 얼굴을 더욱 역겹게 하는 대목이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90도로 인사하던 지현이 부모님보다 걱정하지 말라던 종화샘도 분명 어른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시기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경쟁은 거기서 끝났지만 작품이후 지현이의 삶은 어떠했을까. 친구들 그림으로 만들어진 포트폴리오로 대학을 합격한 지현이는 대학시절을 떳떳하게 보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기득권을 차지해버린 지현이가 부모가 되었을 때 다시 자신의 아이를 같은 방법으로 지원해 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자신의 그림으로 자신이 응시하려고 한 대학에 합격한 지현의 소식을 듣고도 원빈은 윤선이 처럼 울거나 은지처럼 화내지 않는다. 머리 좋으면 놀아도 공부 잘하고, 재능이 있으면 그림도 금방 그리고, 얼굴이 예쁘면 살기 편하다고 그러니까 '돈도 재능이다'라는 말로 우린 그저 돈이라는 재능이 없었을 뿐이라는 슬픈 의견을 내비치고 만다. 아이들의 꿈을 담보로 학원에서마저 철저하게 모순된 부조리를 겪으며 그 순간을 이해해 버리고 마는 원빈이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것일까. '운도 실력이다' 나 '부모도 능력이다', '얼굴도 재능이다'같은 우리 세대들의 넋두리에서 진일보된 '돈도 재능이다'는 이 작품의 명언이자 사실상의 결론이었다.

"돈 외에 명예 그런 것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에 돈이 있으면서 다른 가치가 붙어 있는 경우에만 그 사람의 가치가 입증되지, 돈이 없는 상황에서 학식만 있는 사람은 학식이 입증 안된 것으로 판단된단 말이에요 대중들한테. 그런 것을 좀 깨고 싶은 생각이 있죠."     - 작가 인터뷰 중에서

작가는 명예나 학식은 독립적으로 입증되는 가치가 아니라 돈이라는 자본 위에서만이 비로소 그 후광효과를 톡톡히 얻을 수 밖에 없는 종속적 가치라 주장한다. 즉, 돈도 없이 명예나 학식을 입증하기란 소위말해 지들끼리 땅 따먹는 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는 진부한 논리는 여기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재능은 적어도 타고나는 것인데 돈이 재능이라면 지현이 같이 날 때부터 타고난 돈으로 원빈이나 재수생 은수보다 조금은 더 쉽게 명예나 학식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세명 다 그림이라는 재능은 거기서 거기라 치고 돈이라는 재능에선 지현을 따라 잡을 수 없었기에 마치 백미터 달리기에서 50미터는 저만치 앞서 출발한 주자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암담하다.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기계처럼 그림을 그린 덕에 어찌하여 지현이와 같은 대학에 붙었다 하자. 그런데 마침 지현이도 어쩐 일인지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탄탄대로로 좋은 직장을 배정받았다면 재능의 차이는 노력과 상관없이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원빈이와 은수에게 지현이와 경쟁하려들지 말고 자신과 경쟁하며 오로지 자신의 부족함만을 채우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으로 깰 것인가. 이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원빈이는 대학을 합격해 놓고도 은수처럼 '어떻게든'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자신을 앞에 두고 그야말로 울기에 애매한 상황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살아온 모든 내공을 발휘하고 만다. 이대로 끝인가? 슬픔을 일찍부터 내면화하며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아온 원빈이가 그 순간 만큼은 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슬픔을 위해 원빈이의 슬픔이 가라앉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눈물로 외면화 될 수 있었던 원빈이의 외침이 sound off 되면서 막을 내리는 이 작품의 야속함은 우리 모두의 심장을 억누르며 차마 울지도 못하게 하는 비루함을 선사하는데 대성공 한다.

재능과 꿈의 동행

이 작품은 우리시대, 울고 싶은 십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십대를 울게 하는 나머지 세대들을 위한 작품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주칠 때마다 미안하고 눈돌릴 수 없다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을 향한 작가의 농담은 담배 한모금 들이 마시고 쳐다보는 가을하늘을 생각게 한다. 구름한점 없는 가을 하늘엔 왜 그리 떠다니는 것들이 많은 것일까.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태섭샘은 수업중에는 지현이의 재산을 노리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며 원빈에게 농담을 던지다가도 어쩐 일인지 아이들 입시전략이나 원장의 위선을 대하는 갈등해결 국면에서는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표현된다. 아쉽게도 태섭의 사연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삽입하지 않았다는 작가의 의도가 실제로 불의나 부조리 앞에서도 막상 팔 걷어 붙이고 투쟁하기엔 힘이 없는(아니 용기가 없는) 기성세대를 암시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그의 역할은 학원에서 원장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펜과 붓으로 아이들의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들을 멋지게 그려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원빈이는 '어떻게든' 등록금을 마련해 지현이와 같은 대학에 입학하길 바란다. 은수는 화장실에서 헤어진 여자친구와 선후배로 다시 재회하길(화장실 청소와 그녀의 독설장면은 이 작품에서 표현과 감정의 디테일이 가장 완성도 높게 어우러지는 명장면이었다) 바란다. 윤선과 은지도 정시모집에선 합격의 축배를 들길 바란다. 생계를 위해서건 미래를 위해서건 한때 만화를 가르치며 아이들과 현실의 위악을 견뎌낸 그가 이렇게 독특한 창작력으로 주목받는 만화가가 되었듯이 그때 그 친구들도 각기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어른이 되어주길 바란다. 울기엔 좀 애매해도 나를 위해 울기엔 쑥쓰러워도 한명의 친구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확실한 어른이 되어주길 바란다. 방법은 없다. 묘안이나 전략도 없다. 좋은 어른이 꼭 좋은 환경에서 좋은 청소년을 지내왔으리라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이미 어른 된 어른일지라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 이렇게 만화도 넘겨보고 그만 미안함에 냉가슴이 되곤 한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트럭밑에서 눈을 부릅뜨던 길고양이를 떠올린다. 다 지켜보고 있었을 것 같은 유난히 파랗던 하늘도 생각난다. 인생은 길고양이의 눈과 눈부신 하늘 사이에 위치하는 것 같다. 고양이는 재능이고 하늘은 꿈인 걸까? 우리는 가끔가다 고양이를 벗삼아 먹이를 줄 때도, 눈이 부셔 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하늘을 우러러 볼 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갈 길을 잃지 않고 앞을 보고 걸어가게 될 것이다. 재능과 꿈이 하나 될 그날까지 미련하게 반복 할 것이다. 그 외엔 없지 않을까? 


 
 - 어두운 주황과 카키톤의 모노톤을 유지하지만 하늘만큼은 파랑이었다 -



- 억지로 찍게된 사진이라지만 본인이 만족하는 것 같아 살짝 퍼왔다 -

그의 홈피에는 누가보아도 예쁜여자가 자신은 절대 예쁘지 않다며 한사코 부인 하는 류의 사람들이 제발 '객관적 지표로 볼 때 예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바란다고 한다.외모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에 관해 지나치게 겸손인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유무형의 자본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누려온 혜택을 은폐함과 동시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도 애초에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작전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인물 덕을 봅니다'라며 당당히 말해왔기에 평판이 안좋아졌다고 말한다. 잘생긴 그의 얼굴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글이었다. (참고 : http://www.mokwa.net/

 < 덧붙임 >

오늘 새벽 (9.29) 우연히도(까마귀 날자 배떨어진 격으로)  KBS '책읽는 밤'에서  최규석 작가와의 인터뷰를 시청했다. 그는 아이들과 같이 보낸 그 시절에 이미 꼭 만화로 그 시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 다짐했다며 그래서 이 작품을 마치고 어떤 것보다 보람있었다 말했다. 외모는 도시적, 예술적이었지만 의외로 약간의 사투리 투박한 억양이 무뚝뚝하게도 느껴졌지만 표정에서 소설가의 서사를 읽을 수 있었다. 만화를 하려는 친구들에게 막연히 만화가를 꿈꾸지 말고 나는 어떤 만화를 그리겠다는 분명한 좌표를 오래동안 생각하라는 그의 눈빛이 진지해보였다. 우연히 좋은(?) 작가를 알게된 것 같아 기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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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속 하늘처럼 요즘 가을 하늘도 너무 좋을만큼 파랗기만한데 왜 현실은 속시원하게 울 수도 없으면서도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을 정도로 애매할까요?? 만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한마음님의 글을 읽으니
뭔가 가슴이 먹먹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0-02 12:24   좋아요 0 | URL

만화라 하기 참 애매한 작품이었던 이유는...
아마도..서사가 소설적이라는 이유때문인 것같아요
다분히 소설식의(?) 결말을 지향하는 듯해요
 
8기 신간평가단 활동 안내
소설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 타 온라인 서점의 리뷰이벤트에 해당되는 작품들은 제외했습니다 
- 국내외적으로 너무 유명한(알아서 판매걱정없는 ?) 작가의 작품은 제외했습니다.   
- 장편과 단편모음집을 섞어서 선정했습니다

     
1. 그여자 전혜린 / 정도상 / 두리미디어
전혜린을 좋아했다.
정도상의 <낙타>는 인상적이었다.  
두사람이 썩 잘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그 변주곡은 너무나도  기대된다. 

 

2. 내 정원의 붉은 열매 / 권여선 / 문학동네
권여선의 시선은 날카롭다.  
하지만 읽는 독자를 향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일종의 대리만족을 충분히 제공하는 그녀의 소설집은
후회없는 선택일 것이다.  

   

3. 도망자 / 오리하라 이치 / 현대문학
1982년 동료 호스티스를 살해한 후 도주했다가
공소시효가 성립되기 21일 전에 극적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받은
후쿠다 가즈코를 주인공의 모델로 삼고 있다...는 소개글이 
눈을 끌었다...같이 도망가는 꼴이 되고도 남을 듯하다.  

   

4. 여름의 마지막 장미 / 온다리쿠 / 재인
 환타스틱한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경험해 보고픈 장르이고, 온다리쿠의 명성을 확인해 보고자. 

 

 

5. 육식 이야기 / 베르나르 키리니  / 문학동네
그 상상력이 발칙하고, 능청맞고, 매력적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놀라움도 기다려 진다

 

 

 

 7기 평가단 활동을 하며 느낀 것입니다. 
 서평단이 작성하는 리뷰가 각 온라인 서점의 직접적인 매출에 영향을 미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이용하는 독자로서는 먼저 접한 리뷰어의 글을 조금이라도 참고하게 됩니다. 
 알라딘 평가단 운영진측에서 책들을 모두 읽어보시고 선정하는지는 모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책에 서평을 쓰게 될 수가 있더군요
 될수 있으면 좋은 점을 찾아서 서평을 쓰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작품 선정은,
 아무래도 출판사의 영향(수급문제 등)에 많이 좌우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서평단의 리스트를 수렴하시는 것으로 운영을 하기로 했으니 
 리스트를 추천하는 서평단도 어느정도 가이드라인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추천의 범위가 너무 막연해(그냥 앞선 달에 출간 된 소설...)제 나름의 제외상황만 서술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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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한마음님도 이번 알라딘 8기 신간평가단 소설 분야에 되셨는지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소설 분야가 이번 신간평가단에서 제일 경쟁률 치열했다고 들었는데,,
대단하십니다. 앞으로 6개월동안의 신간평가단으로서의 활약과 멋진 글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ㅋ

한사람 2010-10-02 12:27   좋아요 0 | URL

이궁, 여기도 제 닉을 한마음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ㅋㅋㅋ
가끔..닉을 한마음이나 한사랑으로 부르시는 분들이 있어요^^*
저도 다른분 처음 봤을때 눈으로 인식하지 않고 마음으로 읽은 단어를 부른적이 있거든요~~

소설분야가 치열한건 아무래도..가장 쉽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건 일종의 운이라 생각해요

cyrus님은 인문, 교양쪽으로 풍부한 독서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로선 그게 더 부러운걸요^^

cyrus 2010-10-0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하도 열린책들 카페에 들락날락거리다보니 혼동을 해버렸네요;;;;
한사람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소설 읽는 분들이 제일 부럽더군요^^;;
특히 한국소설,,, 우리나라 문학도 즐길 줄 알아야하는데 말이죠-_-a
 
테러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9
공진성 지음 / 책세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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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를 추억하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그 해 나는 우연히 미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두 번째 방문에 그만 secondary 조사를 받은 것이다. 그날의 순간을 생각하면 다시는 미국을 방문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혹시 다시 방문하더라도 secondary이력이 내게 미칠 영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는 미국 전 공항에서 자국인이 아닌 외국인 중에서도 특히 아시아인,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보안검색을 까다롭게 할 시기였다. 나는 그날 샌프란시스코 공항 입국심사에서 어느 덩치 큰 흑인의 뒤를 따라 미국입국검사대 바로 뒤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사무실로 인솔되었다. 영어로 내 자신을 변호할만한 실력은 되지 않았던 내게 무슨 일로 한해 두 번씩이나 미국을 방문했느냐, 직업에 대해 자세히 말해달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고서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삼십 여분 동안 되지도 않은 영어로 열을 올리고 나니 그제서야 공항 내 한국직원이 들어왔고 그 한국인 덕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다른 외국인들과는 다른 출구에서 생화학적 세균을 제거하는 방역가스를 한차례 확실하게 살포한 후에야 보내주었다.(당시의 굴욕적이고도 창피했던 심정이란...) 지금도 여권엔 주홍글씨의 낙인처럼 secondary가 빨갛게 찍혀있다. 나중에 한국직원으로부터 들은 것이지만 secondary라는 것은 미국입국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재조사 하는 곳이며 당신은 테러 유발 위험 인물로 기재된 중국인 여성과 인물이 흡사해 재수없게 조사를 받은 것이라고 했다.(테러유발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니...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소식인지) 돌아와서 우스개 소리로 그날의 일화를 이야기하곤 했지만 나에게 '테러'는 그저 뉴스에서만 접하던 아주 상관없는 남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9.11테러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을 지 모르지만 지구상에 미국을 알고 미국과 인연이 있거나 미국을 방문하려는 아시아인들에게 '테러'는 어이없게도 가장 피부체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테러' 소식이 '오늘의 교통사고 사망자' 소식만큼 진부해졌다며 굳이 책을 사서 읽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소재는 아니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다. 나 역시 9.11 테러와 미국방문 전에는 '테러'에 대해 그 단어가 가지는 실상과 피해, 그리고 영향만큼 진지한 성찰을 해온 독자는 아니었다. 요즘엔 보도, 교양, 시사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상황을 '테러'에 빗대며 관용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secondary사무실에서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해도 억울하긴 마찬가지 였겠지만(한국직원은 꽤 오래 나를 위로하기 까지 했다) 당시 영문도 모르고 방역작업까지 당한 나로서는 이 책이 일종의 보상장치로서 조금이나마 테러 해프닝에 위로를 제공해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알고나 당하자...하는 진부한 의지였지만 책에 대한 기대는 내심 남달랐음이다.  

책은 얇은 두께에 비해서 상당히 논리적이고 그리하여 설득적이었다. 책을 덮고 난 지금 그동안의 내 오해와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은 물론 앞으로 발생하는 어떠한 '테러'에 대해서도 나름의 진지한 해석과 그로인한 시사적 견지를 시도해 보겠다는 야무진 태도를 심어주었으니 '실천하는 삶'이라는 뜻의 라틴어 Vita Activa 시리즈로서 '주체적인 삶과 실천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출판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된 듯하다. 하지만 행동이 아닌 개념적인 사고전환에의 실천은 그 시작과 과정, 결과 모두 많은 시간이 걸리고 효과 역시 눈에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한계 앞에 그동안 '폭력의 정치학'에 천착해온 저자의 질문들은 '정치'에 무심하고 '테러'를 외면해온 보통의 시민독자들을 위한 가깝고도 친절한 서비스로 느껴졌다. 그동안 '테러'와 '도덕', '테러'와 '정치'를 연결 지어 현상을 분석하기 어려웠던 나 같은 독자들은 이번 '테러의 정치학'에서 속속들이 얻어가는 영양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테러에 질문하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은 '테러리즘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설득력있게 결론지은 질문 들일 것이다. 도덕과는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이는 테러와 도덕성사이에 펼쳐지는 직접 간접적인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개념의 변화들도, 상당히 흥미롭고 위험해 보일 수 있는 논조에서도 나름의 품격을 잃지 않는 객관성은 마지막 부분의 저자의 결론을 한층 부각시키는 일등공신이었다.

저자는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 때에 오히려 우리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는 것 또한 비판할 수 있다”는 논리로 기실 도덕과 테러를 연결짓기 어려운 최초부담감을 테러를 진압하는 쪽을 향한 도덕성에 대한 질문으로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곤, 이어지는 결론으로 “기존 권력에, 또는 테러리즘에 어떻게 맞서 싸우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질문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이러저러한 올바름을 전제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가장 위험한 적이며 테러리즘에 가장 우호적인 토양"이라며 어느 정도 현 정부를 의식한 질타성의 결론을 그것을 인식하는 다수 시민들에게 포커스를 이동해 '질문하지 않는 비도덕' 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결국 끊임없이 비판하고 '질문하는 도덕'성이야 말로 테러리즘에 맞서는 가장 현명한 방안이라 주장한 것이다. 나는 도덕성의 여부를 질문이라는 학문의 가장 기초적인 동기유발 항목으로 기초화한 저자의 참신함과 우아함에 깜찍하고도 지적인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TV에서 테러관련 보도를 접하면서 얼마나 질문하고, 무엇을 질문하였던가. 누가 나서서 일절 질문하지 말라고 억압한 사람도 없었건만 대부분 시각적인 이미지와 그 결과 몇 명이 죽었는지에 대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다행히 이곳, 우리에겐 미치지 않는 사안이라 다행임에 안도하고 측은지심에 공감하는 것으로 테러를 감성적 컨텐츠화 해 오진 않았던가. 저자는 테러를 감성적 컨텐츠에서 이성적 컨텐츠로 느끼는 뉴스에서 질문하는 뉴스로, 시각적 정보에서 인지적 정보로 수동적 동정에서 능동적 도덕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차근차근 부추기고 있었다.

그동안 일반인들이 테러에 두려워하고 공포감을 느꼈던 이유는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테러의 대상이 정작 정치 종교와는 무고한 시민이자 무작위로 선출된 사람들이라는 데 있었다. 그 대상에는 갓난아이를 포함한 여성, 노약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버스나 지하철,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 관청이나 백화점, 호텔, 관광지등의 불특정 장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속된 말로 재수 없으면 여름휴가지 나이트 클럽에서도 목적지를 향하던 버스 안에서도 폭탄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다소 운명적인 자조성의 두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마치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하여도 상대방이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온다면 재수없이 충돌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종류의 누구나 어쩔 수 없는 만연된 두려움과 다르지 않다는 본질적 모순을 안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혹시 어쩌다가 '나' 일 수도 있겠지만 설마 '나'이지는 않길 바라는 그 냉소적이고 소극적인 비겁함을 꼬집는다.

우리가 당연시 해왔던 학교나 군대에서의 테러의 방식과 연대책임 논리는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 통렬했다. 학기 초에 수업분위기를 바로 잡기 위해 작은 실수를 저지른 학생을 필요이상으로 처벌하여 공포 분위기를 확산한다든가 간혹 가다 선택의 무작위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모범생에게도 같은 체벌을 가함으로써 체벌자로서의 공평한 권력을 강조하는 것 모두 무고한 사람을 무작위로 계획하는 테러의 작동방식을 의미한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군대에서 한명의 낙오자라도 생기면 전체인원이 동일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은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면 억울하거나 무고한 사람은 없다는 연대책임론에 입각한 것이라며 그 정당화 논리 역시 테러리스트들의 논리이기에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는 '무고한 사람은 없다'의 의미를 '공존의 거부'로 인식하고 공존을 거부하고자 했던 반정치적 사고는 민족주의적, 종교적 테러리즘 뿐 아니라 우익의 백색테러도 마찬가지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공포를 이용한 지배와 저항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로마 제국의 통치술부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예로 든 것은 '테러'라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에 테러는 이미 통치 방식으로서 자리 잡은 고도의 계산된 행위였음을 쉽게 알려주는 일종의 도입부 흥미 전략이었다. 특히, 한 두 사람을 본보기로 잡아 희생양을 만들고 지배적 분위기를 확고히 다지는 조직폭력배들을 빗대어 흔히 마키아벨리스트라 지칭하지만 '정치적인' 자비로움과 '개인적인' 자비로움을 구분한 그의 주장이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부정적 주의로 결론짓기 보다는 그가 주장한 '최소도덕'으로서의 공포를 '비도덕적 정치'가 아닌 '정치적 도덕'으로 해석해야 함을 지적한 부분은 참신하고 주목할만 했다. 비로소 '테러'와 '도덕'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한 기분이었고 결국 정치적인 시각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혁명의 시대를 질러오며 뇌리에 인상 깊었던 문구는 "두려워 하지 않는 대중"이었다. 스피노자에 의해 공표된 이 말이 "대중이 느끼는 공포"와 상반되는 "대중이 불러 일으키는 공포"라는 의미의 "공포의 상호성"으로 해석되었음을 서술하는 부분이었다. 두려움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귀족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역사적 현상은 오늘날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두려움이야 말로 시민을 가장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심리적 통치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긴장이 없으면 목표를 달성 할 수 없듯이 두려움은 철저하게 계획되어진 후 알맞은 시기에 제공되는 지배자의 선심과도 같다는 불신과, 테러는 그 연장선에서 이용되는 '최소도덕'일지 모른다는 회의에서 자유롭기 힘들었음이다.

저자는 무고한 시민들이 막연한 불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테러집단과 그 대응집단이 서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교묘하게 '정치적 맥락의 불안정'을 이용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서로가 가한 폭력이 각자의 입장에서 더 정당함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저자는 이데올로기가 사람들 간의 정서적 연계를 차단하여 공포의 확산마저 차단하여 온 단적인 사건,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제시한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인과 유대인간의 정서적 연계를 이데올로기 적으로 차단하여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국가적 테러를 그저 '유고한'자들에게 가해진 것으로 따라서 '무고한'자신들과는 상관이 없게끔 인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로 올 초에 있었던 천안함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내가 북한의 인민이었다면 북측이 남측에 가한 테러 역시 '유고한' 남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것이기에 '무고한' 자신들에게는 미치지 않을 폭력으로 받아 들였을 것이라는 추측에 이르자 나는 테러와 도덕이면에는 각자 테러시행집단과 테러대응집단 그 하부에 소속된 무고한 시민들 마저도 '도덕성'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테러와 도덕은 결국 정치와 도덕, 그리고 인간과 도덕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매스미디어가 발달된 오늘날에는 테러의 목적 자체가 공포라는 심리를 확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종족적, 계급적, 사회적, 민족적으로 뿌리 뽑혀있는 자신들의 정치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제 3자를 끌어 모으는 홍보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섬뜻하게 다가왔다. 또한 자살공격같은 희생정신이 부각되는 영웅적 심리나 죽음으로 구원받겠다는 순교자적 태도가 마치 지배자와 강자를 대하는 약자의 최후선택인 것처럼 면죄부를 획득하는 현상을 경계하자는 부분 역시 날카로왔다. 대중의 지지와 도움을 구할 수 없는 또는 구하려고 하지도 않는 정치적 약자가 가장 손쉽게 선택하는 수단이 테러이므로 물리적으로 약하다는 것 자체가 테러리즘을 호소하는 것에 당위성을 부여받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모든 정치가 결국은 테러리즘이라며 냉소적인 치부로 정치집단을 매도하는 것도 정당성 없는 공권력을 사용하는 집단에게 부도덕함을 희석시키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설득한다. 테러를 일으키는 입장과 대응하는 입장, 그리고 바라보는 입장을 골고루 반영하여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공평함을 느낄 수 있었다.  

테러에 자유롭다

저자는 마지막에 도덕적으로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는 것이 정치집단에게만 해당되는 의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늘상 테러에 노출되는 무고한 시민일지라도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라는 충고가 이해는 되면서도 선뜻 자신있게 실행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테러리즘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내 나름대로 '공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판단'이라는 조금은 쉬운 강령으로 전환해 보았다. 우리는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 수용소에 배치될 것 같지는 않아도 언제든지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지하철에서 폭탄이 터질 수 있다는 공공장소에서의 테러불안에는 어쩐지 익숙하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궁극에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살금살금 누적된 공포는 사실 야금야금 빼어먹은 자유의 질량과 동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1차적 사건 발생이후 2차적으로 이러한 공포를 가공, 확산시키는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이 언론이 되었건 정부가 되었건 공포의 늪에 빠지지 않는 것이 우리가 자유로와 질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여진다. 무고한 민간인이자 테러와 폭력 혹은 정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시민들이 테러발생이후 이러한 통찰력을 지니기는 쉽지 않아 보이지만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면 다음은 선택의 문제이기에 원인을 알면 두렵지 않다는 두렵지 않은 것이 자유의 첫걸음이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구는 상당히 고마운 말씀임에 틀림없었다.

이 책은 테러라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부터 역사적으로 시도되어온 테러리즘의 실례와 그 배경에서부터 혁명의 시대,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도덕이라는 테러와 이율배반적인 주제를 쉽고도 공감하도록 논지를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퍽이나 유용한 독서였다. 테러에 '무고한' 일반인 독자를 '유고한' 관계된 독자로 만들어 준 것에 감사하며 되도록 많은 유고한 독자가 늘어나길 기대한다. 테러를 나름대로 도덕적으로 비판해보기 위해 어쩌면 다음 테러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겨버렸음을 나지막히 비밀로 하고자 한다. 타자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테러 정치학은 독자와의 공생을 추구하는 실천하는 삶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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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타 악티바 시리즈,, 분량은 얇은데 내용은 진짜 깊이가 있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서 좋은거 같에요^^
아직 <인종주의>랑 <파시즘>만 읽어서 모든 시리즈가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나름 내용이 좀 어려운 사회과학 분야 시리즈치고는 이 시리즈는 쉽게 읽을 수 있고 가격이 착해서 좋네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0-02 12:28   좋아요 0 | URL

아..비타 악티바 시리즈를 전혀 몰랐는데..
이벤트 지원을 할까 하다가..cyrus님 말씀 하시는 인종이나 주의...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제가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그냥 저와 관련이있었다고(?)
여겨지는 테러를 한번 읽어봤어요^^

의외로 압축해서..할말을 힘있게 전달하는 책이더라구요
생각보다 유용했답니다~~

cyrus 2010-10-0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도서관에서 있었던 시리즈를 읽었을 뿐입니다^^;; 동네 도서관에 인종주의, 파시즘 말고도
노동가치, 정당... 저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념의 시리즈 밖에 없어서 그냥 그 두 권을 읽은 겁니다.
테러도 읽고 싶었는데... 제가 다니는 도서관에는 없네요ㅠㅠ
 
<불안의황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소설가는 삶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게 아니고,
삶에 대한 자신의 오해를 정당화하려고 소설을 쓴다...



 이 글을 시인이 되고자 하는 자와 시인이 되지 못한 자가 읽기를 바란다. 이 작품의 저자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소설가가 된 듯하다. 많은 소설가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므로 소설가가 시인보다 많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러므로 시인이 되지 못한 자가 소설가가 되지 못한 자 보다 많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러므로 시인이 되고자 한 자, 시인이 되지 못한 자 모두 이 작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글로써 간섭하고 싶은 충동을 물리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였다. '문학을 하는 사람'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한 후 그 영향으로 마치 나조차 '문학을 아는 사람'이 되버린 듯...남의 일기지만 내 일기처럼 곁에 오래두고 싶은 작품이었다.

# 전날 밤

불안의 황홀이라...이사람 이름이 낯익다. 김.도.언. 일단 이름은 문학적인 것 같고 누구의 남편인 듯하다. 그래...작가들끼리 결혼한 사람들인 듯 한데...찾아보니 부인이 김숨이네...근데 두 명 다 소설가 아닌가. 이거 은근 氣싸움이 만만치 않을텐데...한명은 시를 써야 더 문학적으로 완벽한 커플 아닐까. 서른 여덟부터 거꾸로 서른 세살까지 일기를 '문학'으로 엮으셨네. 좋겠다. 이외수 작가처럼 그냥 트위터에 몇 자 적은 것도 그림넣고 모아내면 베스트셀러 되고 마는...그런 건 아니겠지...이거야 원, 작가라고는 하지만 남의 일기 훔쳐보고 평까지 하게 생겼다. 지난번 독고준처럼 일기라 해놓고 잔뜩 비평만 있기만 해봐...문학일기인지, 일기문학인지 오늘은 됬고 내일부터 들쳐 볼란다. 가을이 무서운 속도로 도착했다. 그래놓고 영 봐주지 않을 기세다. 책을 덮고 쓸쓸해 질까 두렵다. 느낌이 수상하다. 선뜻 펼치는데 주저함의 이유가 무엇일까.

# 아침

1. 독특하다. 솔직하다. 하지만 몇몇 단어들의 선택에 지나친 문학적 우월감이 엿보인다.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김훈과 고종석까지는 아직인 것으로 느껴졌다.(그들은 저자가 존경하는 작가들이니 맘 상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그 직업적으로 능란한 문체가 왜 그런지 참 매력적이다. 허구헌 날 술인 것으로 보아 그만 슬그머니 동석해 한잔하고 싶을 정도다. 생계와 창작 사이에서 병적으로 고민이 많았던 사람인가 보다. 일기가 마치 자신의 지병을 기도하는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까지 연출이든 말든 상당히 일기자체에 충실했다고 느껴지기에 그 온전한 '솔직'은 강박에 가까운 '정직'으로 이해 될 지경이다. 이로써 적당한 가식이 더 편해진 나를 발견하는 꼴이다.

2.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시인과 술자리를 한날 그 시인의 직업이 현재 예순 나이에 지방 내륙도시의 보일러공이라는, 그래서 그 직업에 고개 숙인다는 김도언에 울컥해진다. 그런데 그 시인 오래전에 처와 자식을 위해 술을 끊었다고 하니 코끝이 시큰해진다. 시인이 먹고살자고 처자식을 위해 술을 끊었다는 건 詩를 끊었다는 것 아닌가. 시인을 사랑한 여자는 더 이상 시인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시인은 사랑을 해도 이별을 해도 살거나 죽어도 진실해야 할 것. 진실하나가 시인의 전부인데 세상은 참 시인같지가 않다. 그 순간 시인이 무척 되고 싶었으나 그 욕망을 잠재운 그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왜 매일 시인을 만날까.

3. 그는 작년에 내가 한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때 김승옥 작가를 초대해 아내와 지인들과 함께 따스한 시간을 가졌다, 고 적었다. 살면서 몇 편의 단편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여지껏 읽어본 단편 중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서울, 1964년 겨울>...을 쓰신 희대의 천재아니던가. 자신의 원고도 당선시켜주고 주례도 섰으니 보통의 인연은 아닌 게다. 그가 작가인 것은 부럽지 않으나 문단과 절교하셨다는 김승옥과의 인연만큼은 부러웠고(이것은 강호동과 이승기가 친한 것이 부러운 수준과 다를 바 없지만서도) 속된말로 '지자랑'격인 인연일기는 그의 평생재산이자 문학적 경쟁력으로까지 읽혀졌다.(미안하다. 나는 이렇게 속물적이라)

4. 문장이 선동적이다. 열정을 태우는(태웠던)사람들 로부터 격한 감동을 느끼며 그것을 주체 못하는 일상을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고통이든, 좌절과 패배든 타자의 극한이 그에게 미학적 쾌감을 드높이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을지.

   "살아있는 몸은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진부한 것이다. 살아있는 몸은 성욕을 관리해야 하고,
    날씨와 식사량등을 체크해야 한다. 부패하지 않은 몸의 형편은 그토록 남루하다."   - 60P

5. 감정선이 고르지 않다.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을 고백할 때만이 뜨겁고 동료문인들의 작품을 이야기 할 땐 무서우리 만치 냉철하다. 그 당연한 텍스트가 나 역시 편치가 않다. 그는 일기라는 장르적 특성안에 자신의 허울과 문학적 미완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순서없이 허용할(허용받을) 생각으로 문학일기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그의 일기를 보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 또한 나의 서평을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다행히 공평하다. 서른일곱 연말에 그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견해를 인용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고바야시 히데오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한 그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가는 자신의 사상과 세계관, 정체성등을 이해하고 그것을 작품 속에 표현하는 존재가 아니고, 작품을 창작하는 동안 비로
    소 자신의 사상이 무엇인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존재다"  - 고바야시 히데오

흔히들 작가가 세상의 이치와 도리를 훤히 꿰고 있어 그토록 격조높은 작품을 창작해 냈다고 생각하지만 통찰의 깊이는 작가의 자각의 결과가 아닌 작품의 자각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작가는 훌륭한 작품보다 훌륭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 역시 한권의 책을 읽고는 모든 생각을 집대성 한 것처럼 글을 쓰지만 사실은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정리된 생각이 결국 하나의 작품을 겪어낸 내 성찰의 질량임을 깨닫는다. 결국 '작품의 자각'이 통렬할수록 독자는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사람인 것이다. 아...자각...자각...입에 살근살근 씹히는 단어의 질감이 참으로 관능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왜 시를 쓰지 않았을까.

# 점심나절

1. 시인 김수영과 고종석이 꼽은 자신들만의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처럼 그도 아끼는 우리말 열 개를 꼽으며 '직관의 사전'풀이를 해주었다.(이외수의 감성사전 표절! 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형식이 유사하다고 몰아부칠 수는 없는 일) 아침에 김훈과 고종석만 못하다는 말 취소다. 정확히 내가 아끼는 단어와 세 개가 일치하고(아..이 주관적 평가란) 감성의 논리적 묘사는 충분히 시적이며 다분히 이기적이다. 한 개의 단어를 선택하기까지 그간의 눈물이 느껴진다. 누구도 거침없이 내뱉는 그만의 자유를 감탄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비문단형 비주류 작가로서 고종석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는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자신의 글만큼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적었다. 내가 생각할 때 작가들은 작가이어야 할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같다. 점점 그의 글이 슬퍼진다. 조짐이 안좋다. 텍스트에 감염될 가능성이 농후하고...이사람 전염성이 아주 강한 문체를 지니었다. 남의 일기 읽고 눈물 흘리긴 싫다.

3. 이래도 되는 걸까? 그는 자신의 지인을 만나고 돌아온 날 그들을 이야기 하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물론 일기니까)그들의 가족사와 사연을 꺼내놓고 연민과 공감의 산문을 완성한다. 그의 지인들은 그의 일기에 자신의 어머니가 치매이고 자신의 큰형은 큰아버지에 양자로 입적되었다는 등등의 사연이 문학으로 생산되었음을 반가워 할 것인가.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이후 한동안 가족들과 냉랭했다고 전해지며, 공지영은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나눈 담소를 에세이에 적었다가 절교할뻔 한 적 있다고 고백했다. 내가 그의 지인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책으로 출간됨에 적어도 구두로 통보내지는 허락의 절차를 가졌을 것으로 믿는 바, 그렇다면 그의 지인들은 참 너그러운 분들이며 그럼으로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4. 등단이후 글만 쓰지 않고 육체를 썼다는 사실에 상처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세월이 오늘의 일기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를 쓰려고 문학을 하였나 생각될 정도로...아니 일기를 썼기에 문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서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 잠시 글을 덮는다. 어느 선배가 그의 소설을 달콤하다고 했다는데...진한 다크 초콜릿 같은 느낌이다. 보통이상으로 쓰지만 결국엔 감미로운.

# 늦은 오후

1. 사람 중에 가장 불편해하는 부류는 남을 이기려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똑같다. 아버지는 늘 '져주면서 살아라' 말씀하셨고 그 무기력한 유전자는 작심하고 남을 이기려는 사람들을 경멸하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언젠가 하루키도 경쟁을 죽도록 싫어한다고 고백한 글이 기억난다. 꼭 세상에 경쟁자라고는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저런말 할 때 나는 그 절망만은 이겨보고 싶다.

2. 시인들과 만나고 온 날 조금 더 뜨겁다. 그들과 시를 이야기 하고 온 날 그의 글이 지독하게 환멸스럽다. 노동자의 문법을 구사하다가도 일순간 예술가의 문법으로 돌변하는 그가 두얼굴을 가진 직업예술인과 같이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모든 계간지 송년회는 다 불려 다니는 그가 이상하게도 그날들의 술자리에는 말을 아끼는 것 같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 인가. 말하면 안되는 이유인가. 송년회는 꼭 요약하는 그의 일목요연이 계속하여 걸린다. 그래도 글이 중반부를 너머서면서 부터는 좀 덜 불안해 보인다. 그 이야기는(일기가 과거로 회귀하는 형식이므로)지금이 가장 불안하다는 말이렸다. 그렇다면 가장 황홀하다는?

3. 많은 문인들의 부고소식이 나를 슬프게 한다. 개인적으로 이청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이 서운하다. 박경리 작가 때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말도 속상하다. 출판사 편집장을 하면서 문인들의 뒷모습만 보아도 눈물이 핑돌았다는 그가 나와 같지 않음에 상처받는 내가 웃기다. 사계절 내내 비를 그렇게 설레고 달뜨게 기다려 놓고선.

4. 시인이 쓴 산문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한다. 나 역시 시적인 부력으로 변형된 산문을 외면하고자 한다. 시를 쓸 줄 알면 나 같으면 산문 같은 건 안쓴다. 이 사람, 시를 읽을땐 꼭 술을 마신다, 고 적었다. 소설보다는 시집을 읽는다고 한다. 일기를 표방한 전문적인 시평도 더러 보인다. 혼자 사는 시인이 밤새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자신에게 전화 걸어 울면서 자신이 쓴 시를 읽어주었을 때 그만 울고 한숨 자라고 했다. 코미디언이 자신의 코미디 연기에 웃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이다. 난 가끔 내가 쓴 글을 읽으며 서럽게 운 적이 있는데...코미디언의 웃음은 아마도 눈물이었을 거다. 시인의 눈물은 웃지 못함이었을까. 잘한일임에도 그가 야속했다.

5. 이어령 선생님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무척이나 정중하게 고독하고 적막한 분이라 평하였다. 박범신 선생님을 뵈었을 땐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제자를 당당히 소개하는 각별한 정이 부러웠다고 했다. 피천득 선생님은 그에게 "찬물에 세수를 한 스물한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최인호 선생님은 "왜 소설 안 쓰고 직장생활 하는 거냐" 덕담을 해주신 덕에 그만 가슴이 쿵쿵 울렸다고 했다. 아...김승옥과 산책하고 고종석이 책을 선물해준다는 그가 도대체 부러울 것이 무엇인가. 


온종일 그의 일기가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한 하루였다.
이상하게도 그의 일기는 뒤로 갈수록 점점 더 뜨거워 진다.
그가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감성의 온도가 높았던 것인지,
일기가 뇌리에 누적될수록 내 가슴의 온도가 올라간 것인지...는 모르겠다.
책을 덮고서 그 오묘한 매혹에 한참을 빠져나오지 못했던 건
히스테릭한 그의 사유때문인지 델리케이트한 표현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를 키운 건 8할이 불안이었던 것 같다.
공부하고 있으면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는 모범생적인 면모는
차라리 섬뜻할 정도였다.
몇 년에 걸친 일기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고민,
'문학을 어찌 할 것인가'에
읽는 내내 어찌할 바를 모를 독서였다.

많은 문장들 중에
가장 설득력있게 다가온 그의 한마디로 당혹함을 대신하겠다.
불안은 불안하지만 불안의 황홀은 불안하지 않았다.
결국, 황홀이었다. 
 
                ... 사랑은 출렁이는 물, 흔들리는 줄과 같은 불안의 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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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9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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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막 시작된 가을처럼 찬바람이 스며든다. 여름의 열기에 어쩔 줄 몰라 더위를 외면해 놓곤 순리에 따라 막 도착한 가을에 적잖이 당황하는 꼴이 언제나 인간인걸까. 책을 덮고는 지난 여름 내가 한 일이라곤 문학이라는 이야기에 빠져 이야기 밖의 현실을 잠시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럴 땐 진실이라는 보물을 찾으러 자꾸 여기, 우리 사는 이곳을 멀리하고 엉뚱한 곳에서 눈물을 훔치고 돌아온 것 같아 진실보다 더한 현실이 늘 존재해 왔었다는 사실조차 싸늘하게 두려워진다. 꼭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은 책의 제목부터 심상치 않더니 그만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시보다 더 슬프고 소설보다 더 잔인한 문학이 있다면 그건 '현실이라는 진실'이었음을 새삼 되돌림 한 시간이었다.

이 책의 원제는 'NOT FOR SALE' 로 미 샌프란시스코 대학 윤리학 교수 데이비드 뱃스톤(David Batstone)이 책을 출간하면서 시작한 노예제 폐지 운동을 일컫는다. 분명 캠페인성의 뚜렷한 목적을 가진 책이 문학성을 가지게 된 배경은 원제를 시에서 인용한 한 구절로 한참 의역하신 번역의 힘이 컸다. 

 

꽃은 다시 피어나지 않았다
단 한 송이도
입술을 열어 용서라고 발음해주지 않았다

꽃이 난만했던 그 자리쯤
마른 꽃씨들
멀건 눈으로 흩어져 있을 뿐

벌도 날아들지 않는 봄길,
그 누가 안간힘으로
꽃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일까 

불임의 봄, 어떤 울음도
터져나오지 못하고 어떤 눈부심도
허락되지 않는 그 길을 따라

누군가 마음 터뜨려
괜찮다 괜찮다 대답해주기 전에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었다

- 봄길에서 / 나희덕

그도 그럴 것이 시의 전문을 천천히 다 읊어 보면 꽃들이 피지 못하고 멍든 가슴을 부여 잡고 있는 것 같아 더욱더 무력하게 구경만 하는 입장이 되고 만다. 아무리 괜찮다 괜찮다 답해봐도 내가 괜찮아 지지 않으니 이 일을 어찌 해야 할지 한참이나 난감했다. 누군가 현대판 노예의 실상을 고발하는 글이라 했다. 다른 누군가는 개인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걸 믿는 인권운동가들의 이야기라 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난 지금 가장 떠오르는 건 정녕 봄길이 아닌 가을의 초입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구경꾼에서 한걸음이라도 내딛는 작지만 무언가 실천할 수 있는 일거리, 그 하나의 행동이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무엇을 할 수 있는 가보다는 진보한 듯 하지만 사실, 자신의 능력치에 좌절하는 그 한마디와 다르지 않았음이다.

책에서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비롯한 우간다, 페루, 유럽, 미국에 이르기까지 차마 눈뜨고 읽어 내려가기 힘든 사실들이 소개된다. 사연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엄청난 현장속에 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이리저리 팔려가고 강제노동과 성폭력에 시달리며 인간이 아닌 소나 돼지와 같은 格의 노예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실상들을 접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인간을 착취하는 고용주나 착취당하는 고용자가 아니라 그들을 연결해 주는 위치에 자리한 비겁한 인간들...나는 노예 대하 드라마의 조연격인 그들을 좇아가서 결투를 신청하고 싶을 정도로 그자들이 원망스러웠고 참기 힘들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겨우 탈출한 여성과 아이들을 마치 자신이 구원해줄 듯이 데리고 와 다시 버젓이 고용주의 손에 건네는 중간자들...범죄조직과 단단하게 결탁되어 있던 경찰들...자식이 팔려가는 것을 유도하는 부모들...그들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딸 하나를 살림살이가 더 나은 나라로 팔아 버리는 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트남 신부들의 실상과 다를 바 없었다. 세계에서 인신매매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는 캄보디아의 스레이 네앙은 열두살 때부터 가족을 위해 늙은 여자의 노예로 팔려가면서 그 끔찍한 여정이 시작된다. 노인이 죽은 후엔 우연히 친절을 베푼 남자의 집에 들어가 남자의 부인에게 속아 악독한 주인에게 건네지고 목숨을 걸고 탈출한 후엔 택시기사를 거쳐 비슷한 술집에 인계된다. 한 번의 목숨을 더 걸고 탈출한 네앙은 손님이었던 남자의 집에 들어가게 되지만 남자의 부모에게 내쫓겨 임신한 몸으로 거리를 떠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자유의 몸이 되어도 성폭력과 억압으로 피폐된 몸을 끌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마는 그녀들을 보면서 어쩌면 '저주 받은 삶'이 따로 정해져 있었던 건 아닐까... 딸이었고 소녀인적이 있었던 여성인 나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혹은 동유럽의 빈곤층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천금같은 행운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럼으로써 그 사실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죄스러웠음이다.

비슷한 여성들의 케이스 외에 충격적이었던 실상중 하나는 우간다의 반군단체 '신의 저항군(LRA)'에 납치 당하는 소년병 노예들의 이야기였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도망가는 노예를 잔인하게 처벌하게 함으로써 죄책감과 공격성을 동시에 훈련시키는 어른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지 무언가 세상에 대한 믿음과 가치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상식선에서 이해가지 않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싸우도록 훈련받은 소녀들은 장병들의 성노예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어 이중고를 겪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게 같은 나라, 같은 민족,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었다는 것이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 믿기 어려운건 영화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모든 이야기가 전후시대나 동서냉전시기가 막을 내린 1980년대 후반도 아닌 2000년을 넘어선 오늘날 지금까지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970년대엔 태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가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었고, 그후 나이지리아, 우간다, 가나 등의 아프리카 여성들을 거쳐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에 이르면 브라질, 멕시코, 페루등의 라틴 아메리카의 여성이 각광을 받다가 90년대 이후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등의 동유럽 여성이 주요 타겟이 된다. 드디어 2000년이 너머서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의 구 소비에트 연방국가들로 시장이 이동되었다.

굳이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아도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가 약소국의 이름으로 인신매매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여기서 한국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다소 점잖은 형국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앞선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치를 떨며 소름 돋았던 고용주와 고용자 사이를 연결하는 방관자적 이기주의자들의 영역과 아주 쉽게 오버랩 되는 우리 현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노예폐지 운동에 앞장서는 미국의 우방국으로 인신매매를 철폐해야 할 것 처럼 나서고 있겠지만 베트남 신부를 사들여 오면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사실상의 노예계약과 같은 결혼을 자행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며, 동남아시아로 섹스관광을 떠나는 주요국가에서도 그 이름을 지울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한국전쟁이후 꾸준히 미국에 전쟁고아들을 입양수출해 온 경력을 발판으로 미국 주요지역에 일자리를 알선한다는 명목으로 버젓이 성노예를 수출하고 있는 나라 역시 한국이라는 것...결국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나라에서는 왕노릇을 하다가도 우리보다 한참 강한 나라에는 종노릇을 하는 타고난 외세 적응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기회에 따라 인신매매의 출발지도 종착지도, 중간지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비로소 한여성의 운명은 한나라의 운명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가만히 깨닫는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단체들 중에 내가 아는 단체는 단 하나도 없었고, 영웅적인 이타 정신을 발휘하여 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구해낸 분들 중 단 한명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들이 부끄럽기 보다는 어쩌다가 운좋게 빈곤과 가난, 질병과 전쟁에서 벗어난 여기 우리나라에서 노예로 팔려가거나 여기 우리나라의 노예로 팔려오고 있을 그들 누군가에게 많이도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모른 체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책을 덮고 캄보디아 어린이들에게 작은 기부를 하였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였지만, 빌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에 비하면 턱도 없이 말도 안되는 선심이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오늘부터 시작이니 다음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다음을 약속하는 것으로 그리고 잊지 않으려는 마음하나로 한숨을 들이쉬고자 한다. 지금 당장 노예해방구역에 가서 자원봉사라도 할 수 없는 나는 이만 무겁게 책을 덮는다. 바람이 시리다. 이제 가을은 가을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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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09-1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세계 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리뷰를 통해 이와 관련된 새로운 도서를 알게 되었네요.
제목이 참 의미심장하고 여운이 남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