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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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내가 흑인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참 다행이구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굳이 CNN의 다큐멘터리 ‘미국의 흑인(Black in America)’에 등장하는 흑인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마약 중독 매춘부 혹은 에이즈 환자를 떠올릴 수 있을 것 이다. 비록 인종차별에는 자유로왔으나, 우리도 당신이 딸이든 아들이든 '딸 가진 부모가 죄인'이라는 피해적 입장에서의 자조적인 넋두리는 피할 수 없지 않았던가. 나의 엄마는 할머니의 '딸'이었고, 나는 엄마의 '딸', 그리고 내 아이는 나의 '딸'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야의 세상살이가 주는 울림이 내게로 돌아와 앉은 지금, 나는 과연 어떤 편지를 내 딸에게 건내어야 하는 질문에 답할 차례이다.

 

딸에게 보내는 이유 

  작년이었다. 3학년 딸아이가 '아름다운 편지쓰기 대회'라는 가정통신문을 들고 와 '엄마가 자식에게' 부문에 제출을 해야 하니 빨리 편지를 써달라 연필을 손에 쥐어 주었던 오월의 어느 아침을 기억한다. 등교시간이 코앞이었던 아침에 느닷없이 편지지를 들이대니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울화와 짜증이 앞섰다. 시계를 보며 뭉뚝한 연필로 대충대충 글을 써서 내보낸 몇 주 후에 아이가 상장을 받아왔다. "엄마 상탔어, 내가 아니라 엄마가." 바쁜 아침에 써내려간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3등에 해당하는 상을 받아온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분야별로 시상을 하는 것이었고, '자식이 부모님에게' 부문이 아닌 '부모가 자식에게' 부문을 선택하여 어찌보면 숙제를 내게 미룬 것이었으며, 그 부문 제출자가 아주 적었던 모양이다. 좀더 신경썼으면 1등 하는건데 하는 아쉬움으로 편지를 다시 가져와 읽어보니 이건 내안에 있던 내 엄마가 내게 하는 말을 그대로 적어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평소 엄마가 내게 주문처럼 하셨던 말들로 그 편지는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건 아니다 싶어 나중에 정말 내 인생이 대단한 업적을 만들진 못하였어도 딸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편지들을 모아 책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을 한 적있다.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받았을 때도 막연하게 어느 유명인사가 자신의 딸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경험을 통해 전해주는 식의 편지글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국내에서도 연예인이나 교수, 작가 등의 유명인이 자신의 딸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글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책을 접할 때 내 예상을 뒤엎는 경우 읽는 내내 실망감대신 더 진지하게 오기를 가지고 작가의 생각을 읽어보려 더 안간힘을 쏟는 편인데 이 책도 그러했다. 애석하게도 저자에게는 내 예상을 뒤엎고 실제로 아들 한명만이 존재했으며, 글의 형식 역시 제목과 같이 편지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왜 굳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my daughter"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졌던 것일까

  마야 엔젤루는 아마도 자신이 한사람의 '딸'로서 자랑스런 인생을 살아내었다고 그리하여지금의 자신을 돌이켜볼 때 그 길목에는 항상 자신처럼 딸이었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있었기에, 많은 여성들을 딸로 생각하며 그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이 책이 시작하기도 전에 "나의 어머니가 되어준 분들', '나를 딸로 맞아준 분', '내가 딸처럼 생각하는 여인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서문을 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많은 흑인, 백인, 유대교, 이슬람교도, 동양인, 스페니쉬, 아메리카 원주민, 알레우트족, 동성애자, 이성애자, 학력과 외모를 떠난 이땅의 모든 딸들을 부러 언급하며 양해를 구하지 않았나 싶다.
 

그림자에서 지팡이까지 - 할머니의 당당함과 어머니의 유연함을 한몸에

  스물 여덟 개의 챕터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의 에피소드와 자작시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할만한 것은 이야기의 도입부에 '할머니의 그림자' 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던 저자의 어린시절을 시작으로 태양과 달 사이에 신음과 자장가의 중간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서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마치고 있다. 마야는 존경하지만 일로 바빴던 어머니를 대신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르쳐준 할머니의 그림자를 밟으며 성장하고 극적인 순간에도 할머니의 가르침을 지팡이 삼아 위기를 헤쳐왔다고 고백하고있다.  

  또한, 동양적 사고방식과는 다르게 미혼모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의 딸의 고백에도 예쁜 아기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다려주며 손자와 마야를 자랑스러워했다. 마야에게 할머니와 어머니의 태도와 교육은 아주 중요한 시사점 을 함의하고 있는데, 바로 마야 스스로가 자신이라는 존재를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밑천을 제공 하였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부딪힐 수 있는 크고 작은 난관들은 나중의 문제였다. 흑인이면서 그것도 여성이라는 인종과 성 두분 모두에서 차별을 안고 태어났던 마야에게 두사람의 존재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마야의 어머니는 호텔사장으로서도 지역의 존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딸의 성폭행, 고교재학중 낳은 아들, 또 다양한 직업을 가지며 활발하게 여러지역을 돌아다녔던 마야에게 긍정적 사고방식과 지혜, 무엇보다 독립심을 뼛속까지 깨우쳐준 장본인이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선 엄마와 할머니의 세대간 교육방식의 차이로 인해 딸은 물론 실제부모와 양육자간의 많은 갈등이 가족간 불화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기에 저자가 품위있고 부지런했던 할머니와 외향적이고 세련되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두사람의 장점을 훌륭하게 수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긍정적인 열린 가슴이 참으로 부럽고 배울만하다. 또 우리로선 유난히 부/자 보다는 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족상처들을 소재로한 영화나 소설이 많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보다 더 피해자적 입장(여성이면서 흑인이기까지한)일수도 있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분노를 견디고 미소짓기까지

  마야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를 통해 실수했다면 사과하는 법, 미소짓기 만해도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흑인이지만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는 법, 덮어놓고 무례한 사람들에 대한 자기방어 방법 등을 배웠다고 한다. 대부분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글을 읽으면서 내내 전해져 오는 신호 하나는 바로 그녀의 '분노'였다. 단순히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결과에 대한 지적과 비난(사회적 차별)이 아니라 자신이 바꿀 수 없었던 흑인(인종차별)이라는 운명, 사회적 약자인 여성(성차별)이라는 신분, 즉 엎친데 덮친격으로 두가지 멍에를 짊어지고 부당하게 당해야 했던 차별에 대한-그것을 쌓아왔건 혹은 극복했건간에-저자만의 분노와 결국에는 미소를 짓기까지의 견딤 그것이었다.
  저자는 어느 유명한 영화감독을 기념하는 자리에 당대 유명한 백인배우들-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팩, 헨리 폰다, 찰턴 헤스턴 등-과 나란히 초청되어 추모와 함께 소갯글을 낭독할 차례가 다가왔는데 막상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올라서니 자신이 어린시절 오빠와 다니던 흑백분리영화관이 떠올라 그만 혀가 굳어지고 만다. 매표소부터 백인과는 분리되어 관객석까지 닭장같은 별도의 장소에서 영화를 관람하였던 그때 그 영화 속의 하얗고 훌륭한 어른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그만 '유명하고 돈 많고 인정받는 하얀 당신들을 증오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한참동안이나 멍해졌었다는 고백을 한다. 당당하게 배우들 앞에서 자신만이 아는 멋진 복수를 하기엔 분노만큼이나 쌓여진 미소가 더 많았던 모양이다

  그저 그녀가 방문했던 나라와 또 수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속에 고여 있었을 눈물과 그것이 미소로 되기까지의 그 견딤의 세월에 고개를 숙일뿐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던 마야
                                              자신을 자랑 스러워 했던 마야
                                                자신을 믿을 줄 알았던 마야

 

작은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지혜

  여기서 나는 그녀가 세상의 모든 딸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한번 더 짚고 가고자 한다. 모든 이야기들은 그녀의 업적과 결과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일어난 일상의 순간이거나 당시의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로 일관하며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는 특히 여자로서 사회인으로서 나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으니 너만은 이렇게 살지 말아라 혹은 너도 이렇게 살아라 식의 두부류로 나누어지는 한국식 딸에게 보내는 편지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미국은 가족간 소소한 에피소드를 소중하게 여기려는 노력 으로 나중에 순간을 기억했을 때-그것이 억지였건 간에-웃을 수 있는 일이 많은 반면 우리는 막상 작은 에피소드에는 냉정하다가 꼭 세월지난 후에 그래도 속으로는 너만을 사랑했다는 식의 고백으로 결론지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마야가 어린 시절이었던 1940년대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결손가정이나 성폭행, 워킹맘 같이 저자가 겪었던 시련들을 똑같이 겪어내고 있다. 희미하게나마 비록 서양의 저 멀리서 우리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인종이 다른 한 여성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가벼운 쪽지처럼 치부하지는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녀는 가족이건, 초면이건, 무례하건, 고맙건 간에 언제 어디서든 매순간을 소중히 여겼고 진실했으며 최선을 다했다는 것.
 


                    일흔여덟 살의 마야가 열일곱 살의 미혼모 마야에게 용기를 건내듯,
                      “다시 돌아가게 되더라도 너 혼자 내딛는 그 첫 걸음이 중요해.”

                                마야의 어머니가 지친 마야에게 용기를 건내듯,
                     "생각해보았는데 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대단해.
           마음씨가 착하면서도 아주 똑똑해,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드문데 말이야."

 

마지막으로, 책에서처럼 멋지진 않지만 나만의 언어로 '딸에게 보내는 편지' 리뷰의 인사로 대신하고자 한다. 

 소중하고도 아련한 나의 딸아!

  너는 아마도 살면서 여자이어서 행복할 때도 있겠지만, 반대로 여자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낄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가 지금보다 더 훌륭한 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지 못해도 너는 엄마가 네 할머니를 존경하고 훌륭한 점을 본받으며 생활했듯이 너 역시 도 엄마와 같을 거라고 믿고 싶다.
  다만, 세상은 그렇게 배워온 모든 것들이 오히려 너에게 칼이 되어 상처를 주고 배신을 알게 하고 절망을 던져줄지도 몰라. 
  <아름다운 삶> 이란 무엇일까?
  진부하지만 엄마가 살면서 느낀 정답노트를 살짝 공개할께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아름다운 삶'이란 결국 그 어떤 것도 얼마나 견디었나의 문제라고 생각해. 네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향한 쉼 없는 단근질과, 실패나 이별 같은 경험에도 또 일어서려는 의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너의 노력, 때론 억울하고 마음속 분노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 그 모든 것에 대한 '견딤'의 선물이 아닐까 
  올봄에도 약속한대로 꼭 꽃구경을 가자.
  꽃처럼 활짝 핀 네 얼굴을 또 한번 봄 속에 엄마 가슴에 담고 싶어.  

< 2010. 4. 꽃보다 더 봄같은 우리딸에게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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