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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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 나가서 문 열면 들어와 !" 

  중학교 1학년 이었다. 우리 반 선생님은 체벌이 비교적 육체적, 물리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주로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거나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았을 때 교실 밖 복도에 정해진 시간만큼 서있으라는 벌을 내리셨다. 평소에 손바닥 또는 엉덩이를 때린다거나 무식하게 운동장을 몇 바퀴 돌거나 하는 체벌이 아니었던 지라 나는 어떨 때 너무 벌이 약한 거 아냐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과목의 노트를 챙겨오느라 열심히 정리한 숙제를 내지 못했고 하필 그 우아한 체벌의 대상자가 된 것이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바깥으로 나가서 문 열면 들어와' 이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교실 밖 복도 벽을 향해 뒷짐을 진 채로 십여 분을 서 있었던 것 같다. 애써 정리한 노트에 대한 아쉬움과 숙제를 하고서도 벌을 받게 되었다는 억울함은 둘째치고서라도 서서히 밀려오는 서러움에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이까짓 벌에 눈물을 보이긴 싫어 참고 또 참았다. 복도엔 수업이 시작되어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내가 벌을 받는지 누구하나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우리 반 외에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어쩌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반 친구들도 내가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했으리라-차라리 다른 친구들 속에 섞여 운동장 백 바퀴를 돈다거나 아니면 빡세게 뺨이라도 한 대 맞는 편이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내 자존심은 그야말로 서서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느낀 서러움은 아마도 저들은 '안' 에 있고 나는 '바깥' 에 있다 는 상대적 좌절감이  아니었을까. 내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때 바깥세상으로 내밀려진 당시의 느낌은 영원히 추억의 '바깥'으로 내던지고 싶은 내'안'의 비교적 선명한 상처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참 편하다. 그래서 덮고 나면 무언가 불편한 진실을 건내 줄 것 같은 책들은 서점에서의 만남을 마침표로 찍고 들어올 때가 많은 요즘이다. 성공이나 처세를 위해 한 계단 더 올라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는 책들보다 자신에 대한 성찰, 치유에 관한 책들이 더 대세인 최근 경향에 편승하려는 기미가 엿보인다거나 결국 참신한 정밀화보다는 빤한 추상화를 감상한 듯한 허탈감, 혹은 다양성에 대한 착한 교육적 메시지에 에돌기만 할 것 같은 섣부른 염려로 고백하건대, 이 책을 쉽사리 들고 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끝내 내 발길을 돌려놓은 미련 섞인 그 한마디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의 '바깥' 이었다.  

  신문사 기자가 취재한 인터뷰 연재기사라는 소갯 글을 뒤로 나는 어쩌면 어느 '시' 제목과도 유사한 느낌의 그 한 구절을 통해 시집이나 잠언집을 집어들 때의 문화적 우월감을 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순간 많은 대중들이 선택하는 법정스님이나 하루키, 베르베르의 소설 앞에 몰려있는 독자들의 안마당이 아닌 그들의 '바깥'에 서 있는 내 자신에게 야릇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표지에 뚫려진 조그맣고 네모난 하얀 창 뒤로 빨갛게 드러나는 속살, 이제는 잊었을지 모를 내가 가진 바깥 세상에 대한 첫 추억을 기어이 들추어 살며시 어루만져 주고 싶은 조금은 유치하고 이유 있는 이기심이 더 정확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바깥 세상의 세가지 모임 

 저자도 언급하였지만 '바깥'이 주는 의미를 구태여 분석하지 않아도 우리는 긍정보다 부정의 메시지에 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굳이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 주류 혹은 집단 가치의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적 의미의 아웃사이더, 세勢에 쫒겨 밀려난 주변인, 혹은 사물, 시간, 공간까지 불러오지 않아도, 반대개념의 '안'이 제공하는 안락함과 따스함, 안정감, 선택되어진 기쁨이나 성공의 대열에 안착하는 듯한 느낌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건 어떤 가르침 없이 알게 되는 사계절의 변화나 생노병사의 진리쯤 된다고 말한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서글픈 것일까.

  육개월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가 만난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현재의 인물들, 그리고 동물, 사물, 음식, 공간 이 스물여섯개의 대상들은 바깥세상이라는 위치적인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저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바깥 안에서 자신만의 에너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 운동성의 모습과 행태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깥이라는 개념을 구분 짓는 기준과 근거와 관련이 있는 바, 주제넘지만 기자가 만나본 스물여섯의 대상을 취재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미있는 '동사動詞'의 모임 으로 그들을 다시 무리지어 보았다. 내 나름대로 저마다의 사연을 더 곡진히 존중하고 싶었고, 바깥이라는 결과보다는 그 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더 이해하고 싶었다. 

< 바깥으로 밀려나다 - 바깥에서 피어나는 꽃 >

  첫 번째는 시대의 역사적 흐름이나 자연적인 이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밀려난 경우이다. 10년을 경주마로 살았던 퇴역마 다이와 아라지, 택배기사 된 연극배우 임학순, 40원어치 폐지신세로 절판의 운명을 맞이하는 책들, 은행지점장까지 지낸 IMF 명퇴 1세대 정석희, 한 시대를 상징했던 <광야에서>를 작곡한 '노찾사' 문대현, 아득한 역사의 오브제로 점점 멀어져 가는 우표, 70년대 인기를 누렸던 가수 주정이, 지배적 사회윤리에서 벗어난 유림의 성균관장 최근덕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밀려나다'라는 개념은 다분히 타의적이다. 세월과 나이에 밀려났고, 사건이나 현상에, 혹은 주변의 권유, 아니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떠밀리다보니 어느새 주류와는 멀어지고만 경우이다. 이들은 그래도 한때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박수를 받았으며,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해 인정도 받았으며, 세상을 향한 말이나 글에 힘있는 권위를 실을 수 있었다. 경주마는 마음껏 달릴 수 있었고, 책과 우표는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매번 넘기거나 붙여야 했을 것이다.
  바깥세상이라는 구역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분의 추락을 경험한 경우이므로 세월에 대한 야속함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좌절감이 가장 컸을 것이라 어림짐작해본다. 그들중 가장 현실적인 타협을 통해 개인의 자아에서 사회적 구성원들 이라는 공동체로 그 대상을 감동적으로 넓혀간 명퇴 1세대 정석희님이 나는 가장 뿌듯했고 멋져보였다. 불교사찰을 돌며 버스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그의 겸손한 '하루출가'가 그 어느 유명한 종교인 부럽지 않은 나날들로 다시 꽃피고 있었다. 
 
< 바깥을 택하다 - 똑똑한 클라라 보다는 >

  두 번째는 보다 자의적인 의미에서 이미 바깥임을 알고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강력한 의지를 배경으로 바깥을 선택한 경우이다. 노인들의 2천원 짜리 낙원을 꿈꾸는 허리우드 클래식 사장 김은주, 정통 사회주의자이자 직업혁명가인 이일재, '세계마을 영화축제'를 꿈꾸는 떠돌이 영화감독 신지승, 마음가는 대로 음악을 한다는 홍대 인디밴드 타바코쥬스, 천시와 배척된 30년을 무당으로 살아온 천하대신 할머니,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셋넷학교 박상영 교장, 재주나 묘기가 아닌 소리로 인정받은 풀피리 연주가 오세철, 높은 정신력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성베네딕트 요셉수도원 안 마르코 수사, 민주화된 한국을 모델로 삼은 미얀마 난민 조모아, 호랑이의 정기를 담아내는 다큐 감독 최기순, 한국 출판계의 원칙주의자 개마고원 장의덕 사장이 그에 해당된다.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바깥으로 밀려났다기 보다는 보다 진취적으로 그 바깥세상을 향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오롯이 던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택한 바깥세상이 주는 의미와 그 현실이 주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선택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적어도 각자의 바깥세상 안에서는 그들도 리더이거나 어느정도 최고로 인정받고 있었다.

  다만 슈만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클라라처럼 자신의 선택을 지나치게 정당화하는 일종의 '과잉 정당화(over-justification)'에 해당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소심한 독자로서 바래본다. 과잉 정당화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기에 스스로 너무 똑똑한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보다, 슈만을 위대한 작곡가로 만드는 편이 똑똑한 클라라에겐 더 쉬운 선택이었던 것 처럼 바깥을 당당하게 선택한 그들 역시, 자존심 때문에 아닌줄 알면서도 행여나 고집스런 행보를 미련하게 끌고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바깥에 놓이다 - 영원한 바깥은 없다 >

  마지막으로, 주변이나 세월의 속도에 밀려난 것도 아니고, 또 바깥 세상을 선택한 것도 아닌 어찌하다 보니-타자의 시각에서 바라본-바깥세상에 놓이게 된 경우이다. 박태환의 훈련파트너 수영 국가대표 배준모, 산악계 휴머니스트 넘버 3 한왕용, 서울대 박사출신 시간강사, 이영애와 김연아의 손모델 최현숙, 주역이 아닌 군무 발레리나 안지원, 삶의 상징적인 바깥공간 비부장지대 DMZ, '바깥스러운' 뉘앙스의 우리술 막걸 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손모델과 막걸리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꿈꾸는 최고의 경지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또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동료 중에는 우연히도 최고 중에 최고가 떡하니 존재한다는 애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재능과 실력, 성실함이 부족하여 2등이나 들러리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그보다 더 완벽했던 김연아가 있어 2위에 머무른 아사다 마오와 비슷한 그림이라고나 할까.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현재위치에 대한 크나큰 좌절감이나 '안' 세상에 대한 불만은 알고 있는 만큼보다 덜하다는 것이다. 그저 결과적으로 대세의 흐름이나 주류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바깥으로 분류된다는 것이지 여전히 묵묵히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하고 있는 것을 그만둘 생각도 없다는 점에서-이들도 처음부터 인정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그들이 견디었을 시간의 내공이 보다 안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전 다섯 번의 올림픽 도전에도 끝내 메달획득에는 실패한 이규혁 선수를 기억한다. 인기개그맨의 매니져였거나 인기가수의 백댄서였지만 지금은 자신도 어엿한 스타가 된 연예인도 서너명 알고 있다. 막걸리가 지금처럼 주목받기 전에는 특정 여학교의 축제를 지속적으로 훼방놓는 모 대학교를 상징하는 대표성을 띠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바깥이라는 의미를 최고나 1등을 상징하는 수직적 개념으로서 보다 그 하위에 해당되는 것들을 총칭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그 의미를 보다 더 반갑게 받아들여 따스하게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노력하고 꿈꾸는 자들에게 안과 밖을 구분짓지 않고 그저 박수를 쳐주면 되는 것이다.

  며칠전 어느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나왔을 때의 일이다. 첨단 멀티플렉스 극장도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관객을 몇 개의 엘리베이터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마침 우리의 차는 지하 3층에 위치해 걸어가는 피곤함보다는 기다려서라도 엘리베이터를 탑승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그런데 우리가 위치한 층에 열려지는 엘리베이터엔 사람이 꽉꽉 차있어 우리가 탑승하면 바로 인원초과 경고음이 가차없이 방송될 순간이었다. 몇 번의 기다림 끝에 겨우 탑승을 했고 각층마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멈춰 문을 열고 다시 닫느라 너무나 피곤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엘리베이터 '바깥'에 위치한 우리들의 심정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깥 사람들을 바라본 심정은 화장실 들어가고 나올 때와 같이 너무나 달랐다. 바깥에서의 애졸임과 상실감이나 안에서의 안도감과 성취감을 넘나들 필요 없는 비상계단으로의 속편함과 떳떳함, 이 책은 그런 비상계단을 이용하는 관객들-기자가 대상을 인터뷰하는 심정으로-의 현명한 선택이자 그 결과 누리게 될 자기 존중의 끄덕임, 그것은 아니었을까.   

 뫼비우스의 띠,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

  최윤필 기자는 프로필에 '기자를 하면서 밥을 벌어 먹은 게 아니라 빌어 먹은 것 같다'는 글을 남겼다. 검색을 해보니 기자로 산다는 것이 너무 기생하고 산다는 느낌이 들어 기자직을 그만두었고 목수라는 '딴짓'을 18개월 정도 하다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져서 재입사한 직후 다시 펜을 잡으며 연재를 시작한 것이 바로 '최윤필 기자의 바깥'이었다. 즉, 자신이 조직에서 주류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신문사 기자라는 직업적인 주류세상에서 빠져나와 '목수'라는 바깥세상에서의 노동을 몸소 체험 한 후 비주류의 세상과 사람을 취재한 것이니 어쩌면 책의 제목은 결국 어느 날('안' 세상에서 빠져나와)바깥으로 들어간 자신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느 신문이나 주목을 받는 것들은 따로 있지만 바깥과 안을 그 범주에서 보면 신문에 속하는 이야기들이 안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바깥이 자신이 쓰는 대상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내가 귀를 쫑긋한 부분은 바로 그 '범주' 라는 바깥과 안을 구분 짓는 의미에서의 개념적인 울타리 그것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바깥이고, 바깥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적어도 그 기준이 사회통합적 의미에서 관용되고 있는 범위 내라는 전제하에-근거나 필요조건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존재하다면 과연 타당한 논의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개인적인 딴지를 걸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터다.  다행히도 그는 책머리에 자신이 바라본 바깥과 안의 경계는 아주 허술하고 느슨하여 혹자는 '어떻게 이게 바깥이야' 라고 시비일지 모르지만 경계의 경계警戒가 삼엄하지 않아 안과 바깥이 평화롭게 바뀌고 섞이기도 하는 구분이 없는 세상을 바란다고 다소 김빠지긴 하지만 겸손하게 속내를 비추고 있다. 이마저도 아마 기자에서 목수로 다시 목수에서 기자로 유연하게 넘나드는 자신의 행보를 바라보는 주변 혹은 스스로에 대한 조심스런 격려의 시선이자 독자에게 바라는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의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니까 결국 그는 자신이 '안'에서 빠져나왔던 '바깥' 세상을 다시 '안'으로 들어와 세상에 알리고자 하니 잠시만 주목해 달라 한 것 아니겠는가. 마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는 오래된 속담처럼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으니 다시 안으로 들어와 바깥을 소개하는 치밀하고도 정당한 그의 플랜은 정말로 기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까 그의 시선은 자칫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바깥으로 밀려난 갖가지 사연에 섣부른 연민을 자극한다거나 모질게도 지켜낸 비주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에 의례적인 박수를 치지지도 않을뿐더러 인터뷰 대상에 대한 개인적인 동조나 평가를 미루고 접어둔다.

  어찌보면 그의 문체는 대지에 꽃이 만발하는 화려한 '봄'이 아닌 처연하게 떨어지는 낙엽소리에 가까운 '가을'이다. 계절의 감성에 호소하진 않지만 꽃내음과 낙엽의 습기가 뿌리깊이 스며들어 이미 그의 뇌세포를 거친 외피와 내골이 이루어낸 오랜 약속처럼 그렇게 흘러간다. 유유히 흐르는 절제와 냉정에 가까운 필력들이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강물과도 같아 책을 덮고나니 말없이 가슴이 편안해진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인터뷰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인터뷰 대상을 더 배려한 결과- 대상을 만난 후 써내려간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오연히 들려오는 것도 비슷한 연유 일터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비주류라고 밝히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마흔 세살의 기자, 늦어도 쉰 살쯤에는 수도권 바깥에다 번듯한 작업장을 열고 부끄럼없이 자신을 목수로 소개하고 싶다는 그의 시선을 따라 바깥구경을 아주 알차게 하고 돌아왔다. 굳이 '안'이거나 혹은 '바깥' 이 아니더라도 또는 그 경계선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 누구라도 그가 바라본 스물여섯마당의 세상 안에서 공존共存과 공생共生의 의미를 진지하게 느껴본 시간들이었다.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고  
그 세상은 '바깥'보다 더 따스해 '안'보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기꺼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주저없이 그 손을 잡아
우리는 바깥 없는 바깥에서 서로 에게 '안' 이 되었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 영원히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라도 만들어 진 것일까.  
빨갛게 내비치던
바깥으로 들어 간 내 '안'에 오롯이 새겨진 그대, '바깥'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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