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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이장욱 외 지음 / 작가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오늘의 소설에 등장하는 7명의 작가들은 책의 이름처럼 2010년 현재를 대표하고 있는 현역소설가인 듯하다. 그들이 이미 한국문단에서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중복되게 수상하였다는 이력은 둘째치고라도 지극히 일반적인 독자부류에서 보았을 때도 그 이름 두석자를 간간이 접해보았다는 면에서 이른바 세상에 대한 노출 빈도횟수가 높은 작가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모두다 문단에 주목받으며 좋은 평을 받았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꼭 그래도 그중에 1등은 누구의 작품인지를 습관처럼 확인하려드는 의식적인 무의식에 살짜기 미안함을 전하며 일곱 편의 작품을 비교적 공평한 애정을 품은 채 <오늘의 소설>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 이장욱 <변희봉>
요즘 관객들은 변희봉의 대표작을 봉준호 감독의 <괴물>로 알고들 있겠지만 80년대 사춘기를 보낸 내 기억속의 변희봉은 단연 역대 시청률 78%를 자랑했던 <사랑과 진실>이라는 80년대 중반의 김수현 드라마에서 보여준 비밀의 조연이었다. 25년이 지난 내 머릿속에서도 주인공 원미경이나 정애리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남아있던 그의 연기, 그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그로테스크함의 정수 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주인공 원미경의 출생비밀을 알고 있는 고향아저씨로 잊을만하면 원미경의 주변에 나타나 그녀를 불안에 떨게 했던 조연 중에서도 매회 등장하지 않는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었다. 그의 캐릭터가 이토록 누가 들어주든 그렇지 않든 오랫동안 불편한 진실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해온 만큼 <변희봉>이라는 작품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혼란스러운 오늘 을 사는 현대인에게 아마도 이름석자로 그 어떤 진실이상의 확연한 메타포를 선사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섣부른 예감을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초등생 시절 지금의 김연아처럼 예쁘고 날씬한 서양선수들이 피겨나 체조경기에 등장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경쟁을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 이웃사촌이자 학교선배이자 나의 물주였던 내 사촌언니와 체조 금메달 선수인 코마네치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놓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사촌언니는 소련, 나는 루마니아- 훗날에도 코마네치가 어느 나라사람인지를 심심하면 물어보는 계기가 되었음- 를 내걸고 당시 걸 수 있었던 모든 걸 걸었던 시절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었던가. 그 유명한 10점 만점의 10점 연기의 주인공 코마네치가 소련이 아닌 루마니아 사람이란 것을 의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오지만 사촌언니는 내기에 진 사실에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는지 그 전처럼 나를 예뻐하지도 않았고 성장하면서 더 이상 친해지지 않게되는 계기가 되었던 코마네치 국적내기 사건...이장욱의 변희봉은 어쩌면 내 사촌언니에게 코마네치와도 같지 않았을까.
2009 현대문학상 수상후보작이었던 <고백의 제왕>에서 보여준 '소설 읽는 재미' 를 다시한번 통렬하게 느낄 수 있었고, 배우<변희봉>의 이름이 주는 상징성처럼 <이장욱>이라는 이름이 오늘을 살고 오늘을 파헤치며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의 대표성을 획득하리라는데 한치의 의심을 가질 수 없는 작품이었다.
- 김숨 <간과 쓸개>·
간혹 단편을 읽을 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소설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떠올라 몰입을 방해할 때가 있고, 반대로 작품 속 주인공이나 상황 속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는데 <간과 쓸개>는 철저히 후자였다. 화창한 어느 봄날 마주친 노인이 작품을 쓰게 했다는 작가는 홀로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간암환자의 쓸쓸한 일상을 저수지의 검푸른 물빛 처럼 나즈막히 들려준다. 쓸개에 큰 이상이 생겨 자식들의 집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는 구순의 누님을 만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지병인 간암을 하루하루 견뎌낼 수 있는 생의 목표라도 되는 듯 누님과의 재회가 이루어지기까지 노인의 소소한 일상은 그립다 못해 몸서리쳐지기 까지 하다. 마지막 누님과의 외나무 같은 재회에서 마주한 누님의 '뭣 때문에 우는가?' 이 한마디는 참고 참아왔던 노인의 고독함과 서러움을 기어이 터뜨리고 마는 한방의 먹먹함을 선사해준다. 그리고 늙음과 자식을 위해 그래도 희생하였던 부모라는 인정하기 싫은 진실이 훗날 내 모습이 될지 모르는 슬픔과 마침내 겹쳐지며 천천히 숙였던 고개는 다 들지 못한 채로 막을 내린다.
2009년도 현대문학상 후보작중 하나였던 <모일, 저녁>에서 보여주었던 평범한 일상의 소름찾기를 선연히 기억한다. <모일, 저녁>이 피부 바깥으로 오소소 드러나는 소름이었다면 <간과 쓸개>는 조용히 내장을 관통하는 소름이었다.
- 김애란 <벌레들>
서울 변두리 재개발 구역의 낡은 연립주택으로 이사 온 신혼부부의 벌레와의 동거이야기가 온갖 종류의 다양하고 끔찍한 벌레들이 끝내 스물스물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제목이 된 <벌레들>은 실제 소설 속 재개발 현장에서 주거공간으로 침입하는 불청객이기도 하지만, 더 넓게는 하루가 멀다하고 공사가 판을치는 대도시와 그 개발현장 안밖에서 인간성을 서서히 질식시키는 위협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달동네를 밀어내고 들어서는 첨단의 건축물 혹은 그러한 인공물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만삭의 신부가 그러한 온갖 종류의 벌레를 생산해내던 쓰러진 나무를 보면서 거기서 탈출하던 벌레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산통을 극렬하게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몸서리치도록 그 고통의 끝이 아득하기만 한 산통의 현장에 비로소 주인공이 된듯했다.
- 김중혁 <유리의 도시>
유리의 자살 이라는 겉으로는 미학적으로 보이지만 다소 폭력이 내재된 도시형추리소설을 만난듯했다. 도시의 부속품처럼 인식되던 대형유리가 물리적인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떨어져나가 길을 가던 무고한 행인을 살인하게 되고 섬뜻한 생명성을 가지게 된다. 소설은 뭔가 허무한듯 시원스럽지 않지만 주제전달이 명쾌하다. 커다란 반전은 없었지만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가의 장르적 취향도 엿볼 수 있었다. 2010 젊은 작가상 대상작인 1F/B1를 읽고서도 도시라는 거대파일속에 보이지 않지만 어긋나버린 디스크 조각들을 치밀하게 파일링 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이 끝나고 곁들여진 애니메이션 작가노트를 기억한다. 작가의 홈피를 방문했더니 흡사 신문의 연재만화를 보는 듯 지적인 디자이너였다. 그의 아이디어 창고 속에서 새롭게 탄생될 도시를 기다린다. 프로파일러와도 같은 그를 통해 오늘의 비열하고 차디찬 도심거리에 복수라도 하고 싶어진다.
- 배수아 <무종>
2010 이상 문학상 우수상에도 선정된 작품이다. 작가 자신이 매우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라 말했듯이 읽는 내내 무의식의 저편을 단절없이 방황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현격하게 호흡이 긴 문장과 의식의 흐름에 따른 배경의 연속적인 등장으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소설 속에서조차 꿈과 현실, 회상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특별한 사건이나 반전, 캐릭터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화자의 사적인 생각의 흐름만으로 글이 전개 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실제로 얼굴도 모르는 스무명의 사람들과 여행을 준비 중인 다급한 상황에서 작품을 썼다는 작가의 후기를 보니 어렴풋한 이해를 곁들 일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이-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새로운 스타일을, 독특한 미학적 의미를, 작가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상징한다는 평론의 긍정적인 반응들이 더 진부해보였다. 이제는 좋은 게 좋은 게 아닌, 새로우면 새로운 것인지, 다르면 실험적인 것인지 독자로서 주제넘은 생각도 해보게 된 작품이었다.
- 신경숙 <세상 끝의 신발>
당혹스럽다. 나는 도시인의 고독이나 이중적인 인간상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글들에는 내성이 강한편이나 가족이나 농촌, 특히 전쟁을 겪어내고 살아온 세대와 다음세대와 연결되는 상처들에 대해서는 유난히도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는 편이다. 신경숙은 우리가 상실한 가족이나 공동체의 의미를 가장 따스하게 위로해주는 대표적인 작가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어떤 작은 일상일지라도 그냥 술술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당시 열여섯, 열다섯이었던 아버지와 낙천 아저씨의 목숨을 주고받은 신발에서부터 어린 시절 친언니처럼 돌봐준 순옥 언니의 가죽부츠, 어른이 된 내가 취재했던 발레리나의 토슈즈와 스케이트 선수의 스케이트 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소복히 쌓여만가는 하얀눈밭을 좇아가며 계속하여 야속한 발자욱을 남기는 일같이 미안하고 아프기만하다. <세상 끝의 신발>이 그렇게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이 들에게 부디 한겨울 털신같은 포근함을 안겨주길 바란다.
- 편혜영 <통조림공장>
2010 이상 문학상 우수상으로도 선정된 작품이다. 2010 젊은 작가상에 빛나는 <저녁의 구애>에서도 예상치 못한 반전에 소름이 돋았고 그 여운이 너무 길었는데 <통조림공장> 역시 한동안 회색빛 문체가 퍼즐처럼 둥둥 떠다니는 듯한 '활자의 표류현상'을 경험했다. 도시의 대량생산과 획일화된 삶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는 통조림 공장에서의 공장장 '박'의 실종과 '박'의 실종 후에도 변함없는 정형화된 공장의 일상, 노동자들의 무표정과도 같은 행동들이 점차 노동자보다 더 냉담할 것 같은 독자의 가슴에 저마다 반복적인 노크를 해댄다. 처음엔 마치 피 한방울도 없을 것 같은 무감정의 기자가 사실만을 객관화해서 쓴 기사를 읽듯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만 남은 공장장의 실종에서 존재의 불안은 곧 마주한 나의 내면을 끔찍이도 파고들어 결국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감정의 교사상태에 이르고 만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음식이 아닌 온갖 실존하는 물건들을 통조림에 넣고 밀봉하듯이 내안에서 도망가지 못하는 작품에 대한 패배감 역시 작가가 제공한 통조림에 조용히 밀봉해 버리고 싶었던 그런 작품이었다.
9시 뉴스만 매일 시청하여도 소설의 소재는 얻을 수 있다는 어느 작가의 인터뷰를 떠올린다. 소설보다 더 잔인한 현실을 보며 어쩌면 소설 속 세상과 인간의 이야기는 차라리 따스한 난방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우리와 같은 공간, 우리와 같은 시간인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들의 오늘의 소설은 이러한 소설보다 더하거나 못한 현실을 견디어 내는 또 하나의 청정 시스템 일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잠시 오늘의 세상과 오늘의 인간을 만나고 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지독하고 어떤 이가 더 형편없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오늘, 오늘을 같이 살아낸다는 것이다. 그가 작가이든 독자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