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역사
마크 스미스 지음, 김상훈 옮김 / 수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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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부에서 시청각 교육(교육공학: Educational Technology)을 전공하였다. 우리 때 만해도 칠판식 수업과 필기위주의 학습이 주를 이루었지만 요즘은 보고 듣는(audio-visual)교육 외에도 후각, 미각, 촉각을 다양하게 이용한 오감체험 교육이 학교현장 밖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머지않아 과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등장하는 첨단기술의 제품과 IT기기의 대중적인 보급으로 이제 미세한 손끝의 움직임만으로도 복잡한 업무는 물론이고 교육, 오락, 방송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세상과 접속하며, 세상을 엿보고, 세상에 소리치고, 세상과 교류 할 수 있게 되었다. 내일은 어떤 새로운 소식이 소개될 지, 다음의 제품은 어떻게 발전되었을 지 이제 막 새로운 제품을 손에 넣고 겨우 손에 익을 즈음엔 여지없이 비웃기라도 하듯 언제나 나보다 더 새로운 제품을 손에 든 사람이 나타나고 세상은 또 저만치쯤 도망가 있다는 걸 느낀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숨가쁘게 좇아가는 것을 스스로 포기 하고 멈추게 되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욕심이나 뒤쳐진다는 느낌이 사라질 무렵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저들은 젊었다는 생각이 돌이킬 수 없는 결론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도 벅찬 현실에 '감각'이라는 것의 '역사'를 알아보고자 과연 감각 간에도 서열이 있어 그러한 시각이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하는 것들을 궁금해 한다는 것 자체도 썩 미래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선입견이 들긴 했지만, 마치 방대한 논문 열 편 정도를 훑은 것 같은 지적인 만족감은 결코 세상에 뒤쳐져 있다는 패배감을 충분히 보상해 줄 만한 것이었다.

눈에 보인다는 사실과 눈으로 믿는 진실
'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일 때가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확인방법으로써 이런 말을 하게 될 경우는 주로 남을 통해서 어떠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거나 소식을 접한 경우일 것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눈으로 보는 것은 '믿음'과 관련지어 생각해 왔던 것 같다. '내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못하겠다'라는 말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눈'이 진실과 지식의 원천으로서 '시각'이 다른 감각보다 우위에 자리해 르네상스, 18, 19세기 이후 종교, 의학, 과학,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권력관계를 야기하고 계층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보였다.

16,7세기 유럽궁중에서 시작된 발레는 정치적, 사회적 볼거리의 일환으로 발소리와 숨소리를 최소화 하여 초시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연기자들의 목표였으며 사회통제와 상류층의 관심을 하나로 결합시키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은 새롭고도 놀랄만 했다. 현대 발레를 생각한다면 아름다운 주제음악이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예술의 한 장르인데 소리가 강조되는 춤이나 음악을 노동자 계급이 선호하고 또 그들을 상징하기도 했다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가도 '발레'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멈칫거림이 있었다. 
 
또 하나,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드러난 공공장소에서 '흑'과 '백'을 구분하는 '눈'의 한계를 나타내는 두 가지 에피소드는 우리도 그들의 시선으로는 유색인종인 입장에서 무척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결론적으로 정체성은 오로지 눈으로만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하지만 나는 아직도 미국의 지하철을 탔을 때 육안만으로는 뚜렷한 흑인만 인식 할 수 있지 누가 흑인으로 오해 받을 수 있는 백인인지, 히스패닉인지는 구분하지 못한다. 이미 미국의 지하철엔 백인은 타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상식처럼 알고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오해로 인해 부당한 인종차별을 받을 확률이 있는 백인들의 문제인 것이지 백인으로 오해받아 인종차별을 받지 않을 흑인들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즉, 진실은 오로지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눈으로만 확인 된 사실을 진실로 여기고 싶어하는 오랜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시각과 협력해 감각을 드높이다
나이가 들면 생물학적인 청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기능이 떨어진 상태에서도 감각은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아마도 세월과 같이한 소리에 대한 '기억'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리는 시각보다 신뢰도부분에서는 하위에 있을지 모르지만 피부로 느끼는 체감력으로 본다면 더 직접적이라 생각한다. 청각의 역사에서 제시된 정치, 교육, 신앙에 대한 지배력은 모든 감각이 골고루 발달되지 못했던 시기인만큼 더 상대적으로 막강했을 것이다. 소리가 하나의 기호체계로서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는 역할을 하고 마차소리, 종소리, 대장간 소리 등 그 도시만의 독특한 기준음이 공동체 의식을 구축했다는 사실은 소리가 장소의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교회, 성당, 시장, 공장, 학교, 운동장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소리에 대한 영적이고 주술적인 힘이나 반대 개념의 소음의 문제, 소리를 기록하는 음반의 등장, 식민지국가를 대상으로 한 자아와 국가 정체성의 확보같은 청각의 발전은 오늘날 크게 주목할 만한 이변적인 요소로 다가오진 않았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요즘 마케팅의 일환으로도 자주 이용되고 있는 '낭독회'를 떠올릴수 있겠다. 혼자 눈으로 읽고 철저하게 혼자 느낄 수밖에 없는 독서의 외로움이 소리 내어 읽고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서로 공감을 나눌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분명 청각이 시각의 커뮤니케이션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한 무형의 매체라 생각한다.

나는 시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안경을 쓰는데 안경을 벗으면 이상하게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즉, 안보이면 안 들리게 되는 것 같아 누군가 나와 이야기를 하려할 때는 나도 모르게 안경을 찾게 된다. 그렇지만 안 들린다고 안 보이는 것인가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꼭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다. 실제로 나쁜 것은 시력임에도 불구하고 청력이 시력에 종속되어 약간의 통제를 받는 다는 생각을 한다. 시청각교육에서도 시각적인 정보만 제시하고 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면 약 30% 전달력이 떨어지지만 반대로 소리만 들려주고 시각적인 정보를 제시 하지 않으면 거의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실험을 통해 청각이 시각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어떤 감각이 어떤 감각의 우위에 있느냐 자체가 중요하진 않지만, 두 가지 이상의 감각이 사용되는 장르에서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방법을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냄새를 말 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냄새는 발생한다
신입사원 시절 우리 회사에 프랑스에서 파견 온 남자가 있었다. 그 친구는 유난히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나는 사람이었는데 자신도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진한 향수를 바꾸어가며 뿌리는 꽤 멋쟁이였었다. 그런데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이십년 이상 그의 육체를 만들어온 그 나라 특유의 문화와 그가 섭취해 온 음식을 다 종합한 그 세월의 냄새는 우리를 속일 수 없었다. 그가 한여름이 지나 사무실을 떠났을 때에도 그 냄새만은 두어 달 이상 건물에서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그의 존재를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냄새에 대한 기억은 시각이나 청각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그것이 안 좋은 기억일 땐 영원히 각인되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파리도심의 메트로 역사에서 나던 이해할 수 없었던 냄새, 미국 LA의 어느 박물관 화장실에서 나던 냄새, 일본의 신칸센만 타면 흘러나오던 냄새...나는 유난히 후각에 민감하며 냄새의 온갖 종류와 그에 대한 기억력이 남들보다 자세해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남들도 피곤하게 만들었던 적이 많았다. 나에게 냄새는 장소의 기억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향기와 냄새에 대해 정리한 연구들을 보니 고대와 중세에는 종교적 신앙과 밀접하게 결부 되어 있었고 그 후 근대와 현대를 거쳐 오면서 여성, 계급, 이념과 인종을 구분짓는데까지 정교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부르조아들이 범죄자와 가난한 노동자를 깍아 내리기 위해 계급적으로 후감통제를 이어 온 것과 그로인해 가난과 질병, 불결의 부정적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미지로 굳어졌으며 또 그것은 그들의 감각이 우둔한 것으로 정당화 하는 합리적인 선입견이 되었고 그러한 선입견은 그들의 참을성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을 보고, 나는 어떠한 감각을 잘 참는 것이 그 감각에 둔감하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감각을 잘 견디거나 그러한 행위가 반복되어 익숙해진다면 그것 또한 그 감각에 대해 둔감한 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연구는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훈련이나 연습을 통해 더 개발되고 민감해 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상위계급층이 하위계급층에 도살장 청소나 쓰레기 버리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후감의 권력행사를 보며 나는 현대에 와서도 작게는 학교에서 화장실 청소나 쓰레기 수거같은 체벌로 혹은 인분투척 같은 개인의 사회적 단죄를 떠올렸다. 아마도 악취는 죄악이라는 고대적부터의 뿌리깊은 의식이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연결지을 수 있었다.

맛이 멋이 되다
음식과 요리의 역사라는 틀 안에서 '맛의 역사'는 프랑스와 중국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은 우리와 친근하기도 하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세계 어디를 가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중국음식점을 보며 늘 신기해 하면서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상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수 있었다. 그 지방만의 특산품과 조미료만으로 만든 요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중국인들에게는 자기 지방과 민족의 음식과 맛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으며 그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결국 민족의 정체성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 같다.

또 영국에서는 지배층의 문화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육안으로 구별이 어려운 시각보다 미각으로 격차를 벌이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했으며 설탕을 노동자 계급에 이용해 더욱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이득을 얻기도 했으며, 초창기에는 옥수수가 돼지사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등은 매우 흥미로왔다. 내 경험으로 보면 입맛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면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바뀌어 진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맛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해외 이주민의 경우 미각이 국가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정서적 진정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에 충분한 공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경우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가'라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미각에 대한 진리의 탐지 역할과 그에 대한 신뢰는 보고 듣는 것보다 더 아래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멀고 사람이 많아도 애써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미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다른 감각도 뛰어날지 만약 다른 감각에 더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어떤 감각인지 궁금하다. 미각이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사용되었다면 아마도 미각과 연계된 우수한 감각 역시 그 민족의 문화적 발달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만질 수 있다면 가질 수 있다
가장 열등한 밑바닥 감각으로 이해되어져 온 촉각의 역사는 아무래도 감각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락이었다. 특히, 눈알을 도려내 피부에 가해지는 체벌에 대한 견딤으로 남자다움과 지위를 판단하기 위해 손톱을 기르고 눈알을 파는 것이 일상적이었다는 사실은 나이든 여성 산파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힘을 보여주기 위해 젊고 임신한 여성들을 촉각적으로 괴롭혔다는 사실 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인종차별에 촉감적인 해석이 개입되어 80년대 에이즈의 원인과 감염에 흑인의 타락과 성애에 관한 인종적 고정관념이 투사된 것 역시 노동력 착취와 서열 확립을 위한 지배층 역사의 오래된 관습을 대변하는 것 같아 문화적면에서 결코 상대적인 평가에 자유롭지 못한 유색인종으로서 반가운 결과는 아니었다.

만져 볼 수 있다는 것과 만질 수 없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디지털 시대에서 촉각은 아날로그적 감성과 교류, 물리적인 접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상하는 그 실체를 확인해볼 수있는 실존하는 무게감의 존재증명과 지각의 감각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터치감을 중요시 하는 디지털 제품들에서 손끝의 예민한 감각으로 화면과의 접촉을 통해 컨텐츠를 올리고 보내고 내려 받고 만들 수 있지만 아무리 첨단의 제품일지라도 촉각의 수준자체가 그 제품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시기는 이미 지나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만져 본다는 것은 점점 더 희소성의 감각으로 위태로와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 장에서 제시한 박물관의 유물 만져보기는 단순한 역사를 체험하는 의미로서의 촉각이 아닌 소유를 욕망하는 접촉의 의미로 해석되어 결과적으로 교육적 효과보다는 관리적 측면에서의 제한된 실험요소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다. 만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감각보다 확실히 내 것임을 상징하고 증명하는 하나의 기표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인간의 욕망과 연계된 더 많은 연구결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결론 부부에서 감각의 역사성과 재현문제에 관한 논의들은 당면하고 시급한 문제로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감각의 역사가 외교정책에 도움이 될 것이며 그 예로 감각에 대한 우위가 서양과는 다른 인도에 대한 사례는 같은 아시아이긴 해도 문화적, 외교적으로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꽤 중요한 논제가 아닐 수 없다. 역자도 후기에 밝혔듯이 서양사학자의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구이기도 하지만, 간혹가다 예외로 등장하는 중국과 인도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감각의 역사도 정리되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 분명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고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의 계보와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실용적인 측면에서 후속적인 연구가 이어지길 바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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