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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막 시작된 가을처럼 찬바람이 스며든다. 여름의 열기에 어쩔 줄 몰라 더위를 외면해 놓곤 순리에 따라 막 도착한 가을에 적잖이 당황하는 꼴이 언제나 인간인걸까. 책을 덮고는 지난 여름 내가 한 일이라곤 문학이라는 이야기에 빠져 이야기 밖의 현실을 잠시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럴 땐 진실이라는 보물을 찾으러 자꾸 여기, 우리 사는 이곳을 멀리하고 엉뚱한 곳에서 눈물을 훔치고 돌아온 것 같아 진실보다 더한 현실이 늘 존재해 왔었다는 사실조차 싸늘하게 두려워진다. 꼭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은 책의 제목부터 심상치 않더니 그만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시보다 더 슬프고 소설보다 더 잔인한 문학이 있다면 그건 '현실이라는 진실'이었음을 새삼 되돌림 한 시간이었다.

이 책의 원제는 'NOT FOR SALE' 로 미 샌프란시스코 대학 윤리학 교수 데이비드 뱃스톤(David Batstone)이 책을 출간하면서 시작한 노예제 폐지 운동을 일컫는다. 분명 캠페인성의 뚜렷한 목적을 가진 책이 문학성을 가지게 된 배경은 원제를 시에서 인용한 한 구절로 한참 의역하신 번역의 힘이 컸다. 

 

꽃은 다시 피어나지 않았다
단 한 송이도
입술을 열어 용서라고 발음해주지 않았다

꽃이 난만했던 그 자리쯤
마른 꽃씨들
멀건 눈으로 흩어져 있을 뿐

벌도 날아들지 않는 봄길,
그 누가 안간힘으로
꽃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일까 

불임의 봄, 어떤 울음도
터져나오지 못하고 어떤 눈부심도
허락되지 않는 그 길을 따라

누군가 마음 터뜨려
괜찮다 괜찮다 대답해주기 전에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었다

- 봄길에서 / 나희덕

그도 그럴 것이 시의 전문을 천천히 다 읊어 보면 꽃들이 피지 못하고 멍든 가슴을 부여 잡고 있는 것 같아 더욱더 무력하게 구경만 하는 입장이 되고 만다. 아무리 괜찮다 괜찮다 답해봐도 내가 괜찮아 지지 않으니 이 일을 어찌 해야 할지 한참이나 난감했다. 누군가 현대판 노예의 실상을 고발하는 글이라 했다. 다른 누군가는 개인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걸 믿는 인권운동가들의 이야기라 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난 지금 가장 떠오르는 건 정녕 봄길이 아닌 가을의 초입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구경꾼에서 한걸음이라도 내딛는 작지만 무언가 실천할 수 있는 일거리, 그 하나의 행동이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무엇을 할 수 있는 가보다는 진보한 듯 하지만 사실, 자신의 능력치에 좌절하는 그 한마디와 다르지 않았음이다.

책에서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비롯한 우간다, 페루, 유럽, 미국에 이르기까지 차마 눈뜨고 읽어 내려가기 힘든 사실들이 소개된다. 사연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엄청난 현장속에 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이리저리 팔려가고 강제노동과 성폭력에 시달리며 인간이 아닌 소나 돼지와 같은 格의 노예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실상들을 접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인간을 착취하는 고용주나 착취당하는 고용자가 아니라 그들을 연결해 주는 위치에 자리한 비겁한 인간들...나는 노예 대하 드라마의 조연격인 그들을 좇아가서 결투를 신청하고 싶을 정도로 그자들이 원망스러웠고 참기 힘들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겨우 탈출한 여성과 아이들을 마치 자신이 구원해줄 듯이 데리고 와 다시 버젓이 고용주의 손에 건네는 중간자들...범죄조직과 단단하게 결탁되어 있던 경찰들...자식이 팔려가는 것을 유도하는 부모들...그들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딸 하나를 살림살이가 더 나은 나라로 팔아 버리는 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트남 신부들의 실상과 다를 바 없었다. 세계에서 인신매매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는 캄보디아의 스레이 네앙은 열두살 때부터 가족을 위해 늙은 여자의 노예로 팔려가면서 그 끔찍한 여정이 시작된다. 노인이 죽은 후엔 우연히 친절을 베푼 남자의 집에 들어가 남자의 부인에게 속아 악독한 주인에게 건네지고 목숨을 걸고 탈출한 후엔 택시기사를 거쳐 비슷한 술집에 인계된다. 한 번의 목숨을 더 걸고 탈출한 네앙은 손님이었던 남자의 집에 들어가게 되지만 남자의 부모에게 내쫓겨 임신한 몸으로 거리를 떠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자유의 몸이 되어도 성폭력과 억압으로 피폐된 몸을 끌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마는 그녀들을 보면서 어쩌면 '저주 받은 삶'이 따로 정해져 있었던 건 아닐까... 딸이었고 소녀인적이 있었던 여성인 나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혹은 동유럽의 빈곤층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천금같은 행운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럼으로써 그 사실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죄스러웠음이다.

비슷한 여성들의 케이스 외에 충격적이었던 실상중 하나는 우간다의 반군단체 '신의 저항군(LRA)'에 납치 당하는 소년병 노예들의 이야기였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도망가는 노예를 잔인하게 처벌하게 함으로써 죄책감과 공격성을 동시에 훈련시키는 어른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지 무언가 세상에 대한 믿음과 가치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상식선에서 이해가지 않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싸우도록 훈련받은 소녀들은 장병들의 성노예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어 이중고를 겪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게 같은 나라, 같은 민족,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었다는 것이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 믿기 어려운건 영화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모든 이야기가 전후시대나 동서냉전시기가 막을 내린 1980년대 후반도 아닌 2000년을 넘어선 오늘날 지금까지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970년대엔 태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가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었고, 그후 나이지리아, 우간다, 가나 등의 아프리카 여성들을 거쳐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에 이르면 브라질, 멕시코, 페루등의 라틴 아메리카의 여성이 각광을 받다가 90년대 이후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등의 동유럽 여성이 주요 타겟이 된다. 드디어 2000년이 너머서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의 구 소비에트 연방국가들로 시장이 이동되었다.

굳이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아도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가 약소국의 이름으로 인신매매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여기서 한국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다소 점잖은 형국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앞선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치를 떨며 소름 돋았던 고용주와 고용자 사이를 연결하는 방관자적 이기주의자들의 영역과 아주 쉽게 오버랩 되는 우리 현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노예폐지 운동에 앞장서는 미국의 우방국으로 인신매매를 철폐해야 할 것 처럼 나서고 있겠지만 베트남 신부를 사들여 오면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사실상의 노예계약과 같은 결혼을 자행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며, 동남아시아로 섹스관광을 떠나는 주요국가에서도 그 이름을 지울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한국전쟁이후 꾸준히 미국에 전쟁고아들을 입양수출해 온 경력을 발판으로 미국 주요지역에 일자리를 알선한다는 명목으로 버젓이 성노예를 수출하고 있는 나라 역시 한국이라는 것...결국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나라에서는 왕노릇을 하다가도 우리보다 한참 강한 나라에는 종노릇을 하는 타고난 외세 적응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기회에 따라 인신매매의 출발지도 종착지도, 중간지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비로소 한여성의 운명은 한나라의 운명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가만히 깨닫는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단체들 중에 내가 아는 단체는 단 하나도 없었고, 영웅적인 이타 정신을 발휘하여 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구해낸 분들 중 단 한명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들이 부끄럽기 보다는 어쩌다가 운좋게 빈곤과 가난, 질병과 전쟁에서 벗어난 여기 우리나라에서 노예로 팔려가거나 여기 우리나라의 노예로 팔려오고 있을 그들 누군가에게 많이도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모른 체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책을 덮고 캄보디아 어린이들에게 작은 기부를 하였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였지만, 빌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에 비하면 턱도 없이 말도 안되는 선심이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오늘부터 시작이니 다음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다음을 약속하는 것으로 그리고 잊지 않으려는 마음하나로 한숨을 들이쉬고자 한다. 지금 당장 노예해방구역에 가서 자원봉사라도 할 수 없는 나는 이만 무겁게 책을 덮는다. 바람이 시리다. 이제 가을은 가을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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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09-1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세계 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리뷰를 통해 이와 관련된 새로운 도서를 알게 되었네요.
제목이 참 의미심장하고 여운이 남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