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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전략에 성공한 작품이다. 문학상 수상작으로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대상에 어울리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특이하게도 공동수상작을 내었다는 것은 절대감에서 반절만 차지했다는 뜻인데 나머지 한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주제넘는 말이지만 그것도 이해가 갔다. 안전하게 너무 잘 계획되었다고 할까. 조직에서 꼼뻬(competition)를 많이 참가해 온 이력덕에 나는 1등을 찝어 내는 직관이 좀 발달했다. 문학에서 1등은 언제나 2등보다 월등해서가 아니라 1등이 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선정되는 것.(내 생각이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1등이 될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데 난 아쉽게도 그 점이 책에 대한 감동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책을 덮고 놀라움에 박수는 쳤지만 어쩐 일인지 가슴이 데워지거나 머리가 시원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아무래도 전략과 전술이 완벽했기에 감지되는 치밀함, 잔여감의 상실에 대한 아쉬움, 감성보다는 이성이 탁월했다는 지적인 공감에서 비롯되었을까. 다년간에 걸친 어떤 기획 프로젝트의 성과물과 같이 이 책은 잘 연구되어 있었다.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그다지 기대했던 만큼 재미있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내 멋대로 굉장히 재미(?)있을 줄 알았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작품을 들쳐보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 기대를 한 내 잘못일지 모른다. 어쩌면 내가 떠올리던 '책 사냥꾼'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토리에 대한 단순한 취향의 문제를 작품성의 문제로 보고 싶지는 않다. 알려졌듯이 이 작품은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해서 본의 아니게 이번 리뷰는 나를 아쉽게 한 나머지에 대해 마음을 정리하는 글이 될 듯하다. 그것은 썩 유쾌한 시작은 아니다. 남들은 다 좋다고 문제없다고 하는데 유독 딴지를 거는 독자의 느낌도 들고 굳이 그 기분을 서평으로까지 남길 때 나는 어떤 죄책감마저도 느끼는, 적어도 서평자로서는 늘 작가에 마음이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수완이라는 작가는 나와도 갑장이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이 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인데 아무리 내 의견이 소중하다 해도 좋은 말을 해드리고 싶은 쪽이지 행여 작품을 폄하하거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이렇게 배수진 치면서 결국 비판하는 안 좋은 습관을 버리고 싶지만 거짓말하고 싶지도 않은 진심을 알아주기를.)

결국 이 책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래된 어떤 연민을 자극하는 어둠의 미학을 가졌기 때문일까. 공교롭게도 지난주에 불혹이 넘은 어느 '책 도둑'의 사연을 뉴스에서 접했다. 대형마트 서점에서 160여권의 책이 없어진 후 범인을 잡았는데 그는 놀랍게도 그 많은 책을 다 읽었다는(?) 것이 뉴스였다. 단순절도가 아니라 정말 책이 읽고 싶어 훔쳤다는 것이고 그 모든 책을 다 읽은 것이 믿기지 않는 다는 것. 삼십대에 직장을 잃고 좀처럼 재기의 기회를 잡지 못한 그는 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책을 읽는 것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독신으로 오후 세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이불속에서 책만 읽었다. 늙은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그는 자신의 방 한 칸 책꽃이 가득 헌 책과 새 책을 모아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었는데 80년대 중반의 어느 시인의 절판된 시집을 보여주며 이 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느냐, 우리 쪽에선 국보급의 가치가 있다며 기자에게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넌지시 질문하기까지 했다. 그때 슬쩍 클로즈업 되는 그의 표정과 생기가 넘치던 그 미소, 는 참 행복해보였다. 그 순간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이 귀한 시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내가 유일하다는 그의 우쭐함이 얼마나 서글프게 느껴졌는지 도둑은 알고 있을까. 그가 마트에서 한 권씩 훔쳐간 책은 거의 두꺼운 고전들이었고 '**평전', '**비판'같은 인문서적들도 있었다. 제작진에게 추천할 만한 책으로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권했고 자신이 꼽은 인생의 책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주저없이 언급했다. 컨텐츠로만 보자면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격을 갖추었겠지만 그가 너무도 무능력해보여 얼마나 화가 나던지. 별로 충격적인 뉴스도 아니었는데 며칠 동안 나는 적잖이 우울했고 이상하게도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날 그 '책 도둑'에게서 얼핏 책에 빠진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저렇게 우습게도 보일 수 있구나, 책만 읽는 다는 것이. 책만 읽는 다는 것이 저렇게 아무 소용없을 수도 있구나. 아무 소용없으니까 또 책을 읽는 것이겠지... 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내 심리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세상과 담쌓고 철저히 비현실속에서 은둔을 택한 자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바로 본 나는 혹시 나도 저렇게 늙어가는 건 아닐까 싶어 아침에 거울을 보는 것도 두려웠다. 하필, 그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되어 더욱 불쾌하고 난감한 심정으로 책을 덮었음을 밝혀둔다.(나는 한권의 책을 집어든 특정 시기와 때마침 읽게 되는 책의 내용과는 어떤 운명적인 상관관계가 있음을 믿는 사람이기에)

나는 우선, 책의 내용보다 외향적인 특성을 언급하고 싶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작가만의 방식으로 서사를 밀고 나가는 문체의 습관이었기 때문에. 이 개성있는 작법이 이 작품에서만 의도된 것인지 자신만의 굳어진 특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경우의 수와 함수관계를 끝간데까지 나열하는 문장의 배열은 분명 서사의 진행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다. 초반부엔 환상과 현실을 모호하게 하는데 중요한 장치로 보였고 사유의 정점에서 느끼는 오르가즘이 꽤 인상깊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매순간 반복되는 '~일지도 모른다'는 꼭지마다의 결론은 지루함을 유도했기 때문에 내 경우 가독성에 있어 피로감을 가중시켰다. 어떤 부분 필력이 과했다고까지 느껴졌다. 이야기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추리장르의 수사를 연상시켰는데 이러한 과다필력이 스토리 긴장감과 박진감에 부담을 주지 않았나 싶다. 아마도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결코 추리 소설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려고 끝까지 'A는 B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 유추의 방식을 고집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사고과정이 점점 슬프게 다가왔던 건 전형적인 책벌레들이 결론을 마무리 짓는 멘트와 유사해 보였기 때문일까. '사는 건 죽어가는 일일지 모르고 죽는 것 또한 삶의 일부이다'라는 틀에 박히고도 진부한 이 결론을 자신이 찢을 수 있는데 까지 분해하고 붙일 수 있는데 까지 붙여 울궈먹는 것이 서평자들의 습관이기도 하기에 나는 그의 문체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적어도 사고의 서술이 아닌 사건의 전개부분에선 과감히 지양해야했을 작법이었다고, 감히 적어본다. 그런데 또 한편 이해가 가는 것은 본인이 토해낼 수 있는 만큼은 모두 끌어내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이루었다는 생각에 아마도 다음 작품부터는(?) 이러한 남김없음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음, 이야기로 본다면 서사는 완벽의 구조아래 그 소재와 주제, 에피소드가 아주 흥미롭다. 주인공 '책 사냥꾼'은 말더듬이에다가 도형이라는 실명을 가지고 있다. 이름의 끝자리에 벌레(蟲)와 불꽃(火)이 어우러진 반딧불 형(螢)을 택해주신 바람에 그쪽 세계에선 '반디'라 불리운다. 이는 '내가 만약 빛을 낼 수 있다면 딱 한권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는 그의 바램을 상징하기도 하며 서사에선 대결구조였지만 사라지고 만 '검은 별'과 상반되는 닉네임이었다. 작가는 실질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책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다행히도,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만큼 많은 책이 있다.'는 문장으로 끝을 내고 있다. 밤은 검지만 별은 빛나므로 '검은 별'은 빛나지 못할 것이고 비록 반딧불만큼 이지만 그만큼의 빛이라도 존재한다면 '반디'는 영원히 빛날 것이라는 자기희망적인 의미를 모르진 않는다. 그런데 이 '반디'가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형설지공, 螢雪之功)을 상징하기 보다 어두운 동네 한 귀퉁이에서 이슬을 먹고 별똥별처럼 흩날리다가 처량하게 죽어버린 구슬픈 존재로 다가오는 건 왜일까.

우리가 무엇을 훔친다고 했을 때 그 대상이 책일 경우 주어지는 면죄부는 아마도 탐욕의 본거지에 대한 똘레랑스일 것이다. 음식이나 귀중품에 대한 탐욕과 지식에 대한 탐욕이 다를 것이라는 기대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다른 것이 아닌 책을 빌려간 후 돌려주지 않아도 도둑놈이라 비난하지 않는 건 지식에 대한 욕심을 눈감아주고픈 인정(人情)일 것이다. 마트의 책 도둑과 책 사냥꾼 반디에게 절도와 강도의 형벌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건 '책을 향한 욕망'만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은 자신의 욕심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책도둑들은 책을 팔거나 소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미치도록 읽고 싶어 읽기 위해서가 많다고 한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서울의 초대형 서점 한 곳에서 1년에 도난당하는 책은 7만~8만권이며 잡히는 사람으로는 번듯하게 생긴 회사원이 가장 많다고 한다.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용기를 선동하는 힘은 음식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수치심을 억제하는 힘보다 큰 것인가 보다. 그런데 이 책에선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책 도둑의 욕망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비즈니스로서의 고서추적에 대한 책 탐정의 능력을 책 사냥꾼의 자질로 언급하고있다. 즉,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찾기 위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책을 찾는 이유는 내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내가 남들보다 잘 찾는 능력이 있으니 누군가가 의뢰를 한다는 것이고, 책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책에 관한 환타지가 곁들여 졌다는 것이다. 책을 찾기 위해 그만한 가상의 책이 등장할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즉, 그 많은 책을 모르고 있었어도 책은 그럭저럭 찾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책을 그토록 목숨 걸고 찾는 이유가 자신이 죽을만한 이유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면 그 개연성은 정당화, 논리화, 감동화되고도 남았을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두에 내가 생각한 책 사냥꾼이 아니었다는 뜻은 사냥의 목적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책 사냥꾼의 긍정적인 역할이 있었다면 '사라진 책을 찾아내 책에 또 다른 삶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곧 이 작품의 주인공이 '책 사냥꾼'이 아니고 책 사냥꾼이 '찾아 왔고 찾고 있고 찾을 책'이었다는 말과도 같다. 이것은 끝에 가서 책 찾아 목숨건진 책 사냥꾼의 이야기가 묻혀 지고 개연성없이 허공에 떠돌던 무수한 책들만 투명의 책꽂이에 꽂혀진 느낌으로 남게 되는 치명적인 원인이었다. 정말로 이 책에 등장하는 가상의 책들은 본 서사와 상관없이 흥미진진하고도 남았기에.

그 결과, 모든 책의 참고문헌이라는 <세계의 책>, 미도당의 윤 선생으로부터 의뢰받은 <베니의 모험>, 책 사냥꾼이 되기로 마음을 먹게 한 <찰리 이야기>, 모든 고문 기술서의 고전이 된 <마르세유>, 작중화자가 마지막에 자신의 이야기에 이름붙인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등 거의 모든 가상의 책들은 내게 변별력없이 다가왔다. 제목과 내용이 달랐지만 어쩐지 하나의 이야기, 한권의 책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한 책에 관련된 정보보다 그곳이 책들의 무덤인지 요람인지 지옥인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이 작품은 책에 담긴 내용만큼이나 책이 존재하는 장소도 중요한 복선이라 생각했다. 기왕에 환타지를 도입할 거 마지막 노인의 미로뿐 아니라 아홉 개의 책을 발견한 모든 장소가 좀 더 해당책과 관련해 입체적으로 시공을 넘나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 책은 책 사냥꾼이 활동하는 시대를 출판의 자유가 몰락한 시대로 설정하여 비록 가상이긴 하나 '책 파동'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미래적으로 투시하는 뼈있는 농담도 노련하게 배치하고 있었다. 출판강국의 미명하에 출판 비리와 관련된 당국의 조사가 진행되고 출판사는 통폐합되고 인쇄및 배본소, 출판사, 인터넷서점은 줄줄이 문을 닫는다는 사회적 현상을 예견해 본다는 점에서 책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출판업의 윤리에 대해서도 나름 신선한 발상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 책을 사랑해온 사람으로서 책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정체성의 문제도 마지막 귀결부에 편안하게 안착시켰다는 점은 가장 큰 성취로 보아야 할 듯하다. 작년에 김영하 작가의 여지껏 자신이 써온 모든 책이 자신보다 더 자신같다는 생각을 한다는 인터뷰를 기억한다. 이 책에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책들의 총합. 어쩌면 내가 읽은 책들이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작가의 고백이 가장 깊게 울려오는 것은 나 역시도 아마 '책이 죽기 전에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다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라 믿는' 책을 사랑하는 대다수의 독자들 중 한사람이기 때문일까. 책은 사람이 태어나듯 태어나고, 사람이 살듯 살아가고, 사람이 죽듯 죽어갈 것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짐짓 숙연하게 들리는 것은 그가 여지껏 그토록 매달려온 것도 책일 것이고 죽을만큼 미워하기도 똑같을 만큼 사랑하기도 한 누구보다 책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독서광들은 많이 보았지만 정작 내 자신이 독서를 광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책에서 위안을 얻게 된 것도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다. 사실 책으로 죽고 못사는 사람들을 애써 이해한 쪽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이러다 지금까지 써온 서평이 나라고 하는 때가 오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책, 모르긴 해도 덮고 나면 작가는 너무나 책을 사랑해 이런 작품을 쓸 수 밖에 없었겠다는 깨달음이 절로 들 것이라 확신한다. 분명한 건 이 책은 세상에 없는 책이었으며 앞으로도 세상에 없을 책이라는 것이다. 그의 독창(獨唱)은 사실, 무섭게 독창적(獨創的)이었다. 몰래, 기립박수를 치고 싶을 다음의 노래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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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28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위안을 얻게 된 게 일년이 채 안 되신다면서
리뷰는 왤케 잘 쓰시는 겁니까?
이 책 칭찬은 많이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별 세 개십니다.
이걸 어케 해석을 해얄지...ㅎ
저도 능력만 되면 책에 대한 책을 써 보고 싶긴해요.
물론 안 쓰는 것이 여러 독자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에 안 쓰지만.ㅋㅋ
어쨌든 오랜만이십니다.^^

stella.K 2011-01-28 15:28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전 요즘 작가들 작품 재미없어요.
이 책도 딱히 끌리진 않는데 너무 광고가 요란하죠? 히~

cyrus 2011-01-2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어요. 이 책에 별 다섯개준 저로써는 민망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
나름 책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추리적 요소나 긴장감이 감돌게 하는 서술을
기대했는데,, 정작 읽고나서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제 글에서도 말했지만,
종이책이 태워지고 출판사가 통폐합하는 장면만 인상깊었어요..^^;;

감은빛 2011-02-12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책도둑 얘기 듣고 참 재밌다고 생각했습니다.
늦은 밤 택시기사님께서 말씀해주시더라구요.
함께 동승했던 친구와 책 얘기를 하고나니, 기사님이 책 하니까 생각난다고 하시면서.

글 참 잘 쓰시네요! 것도 그닥 재미없었던 책에 대해서 이정도로 쓰시다니요!
감탄하고 갑니다! ^^
 
염소의 축제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그대 이름은 노스탤지어(鄕愁)

이상하게 들릴까. 나 이 작품이 너무나 감미로왔다. 독재도 그리움이나 향수(鄕愁)가 될 수 있을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책을 덮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마치 장안에 화제가 된 어느 드라마라도 종영한 그 순간처럼 아쉬움의 탄식이 비어졌다. 지난 시절 독재장르의 소설을 울분이나 연민으로 만나왔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분명 진일보한 변화가 아닐까 싶었다. 작품이 달랐던지 내가 변했던지 어느 한쪽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더불어 나는 이 작품이 좀 더 계속되어야 한다고 자꾸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같은 독재지만 바르사가 요사 이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작품에선 피해자로서의 상처가 더 오롯되 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루마니아라는 동유럽보다 도미니카라는 라틴아메리카가 더 멀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과 남미에 대한 경제적 우월감, 여성작가로서의 증언자 대 남성작가로서의 정치가, 그것도 아니면 내 무의식속에 오랜 세월 저장된 동유럽의 가녀린 체조선수와 남미의 육체파 야구선수 정도로 비교되는 기존의 편견들 때문이었는지 나는 이 작품에서 독재를 예전처럼 상처로만 인식하지 못했다. 대신 신기하게도 약간의 거리감 덕에 제대로 독재를 즐겼다고 할까. 미안한 말이지만 흡사 남미의 삼바축제라도 관람하듯 그들이 연출하던 화려한 독재의 축제를 보기좋게 음미했다는 만족감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역사라는 기록과 증언보다는 소설이라는 허구와 비현실에 그야말로 취해들었던 시간이었다. 이는 우리 역시 비슷한 시절을 겪고 민주화를 이루어낸 같은 경험자로서 상당히 부끄러운 반응임을 먼저 고백한다. 하지만 이 책이 역사서적이 아닌만큼 나는 적어도 문학적, 예술적 수치감을 느끼진 않는다. 독재장르로서의 보편적 주제, 독재자와 독재피해자에 온전히 통감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아니라 독재에 대한 정반대의 시각을 얻게 되었다는 신선함, 나는 지금 그 새로운 자극에 들떠 있는 것이다. 극명한 현실을 소재로 더 자명한 이야기를 창조했으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망각하고 이야기 속에 완전히 빠지도록 이끄는 작가의 마력이 놀라웠다. 작가야 말로 자신이 만든 허구 안에서 한 치의 반역도 허락치 않는 절대 독재자가 아니었을까. 나 역시 그러한 독재의 마법에 일정시간 마취당한 순수한(?) 독자가 아니었을까. 그는 이미 이 작품을 집필하기 30여 년 전에 “소설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장르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침략적, 제국주의적 장르이자 문학의 최상의 형태” (La novela, 9 / 1974)라 주장한 바 있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아마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독재자 한두 명쯤은 별 수 없이 자주 중첩되는 순간이 많을 듯하다. 그런데 그 한사람은 세대별로 다르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운 아버지 세대의 자부동 각하 한명과 내 청소년 시절의 9시 '땡'뉴스 한 분이 떠오른다. 이 책에서 독재자는 트루히요라는 실명외에 '수령님', '총통', '각하', '대통령'이라는 직위로 혹은 '검둥이'라는 인종으로 아니면 '자선가'나 '조국의 아버지', '재정 복구자'로 불리워지며 호칭에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말하는 화자에 따라 대화하는 상황에 따라 그 수식은 대체로 자유로와 보였다. 독재자 역시 의상이나 외모에 상당한 강박을 보인 것에 비하면 호칭에는 별다른 구속없이 민주화를 이루었달까. 실제로도 그에겐 총통(Generalismo), 조국의 수호자(Benefactor de la Patria), 신조국의 아버지(Padre de la Patria Nueva) 등의 칭호가 붙었고 추가로 교회 수호자(Benefactor de la Iglesia) 칭호를 부여받기를 원했으나 교회로부터 거절당했다고 한다. 결국 그 모든 호칭은 대중이 부르고(도미니카인들이 즐겨 부르던 메렝게에서 트루히요를 chivo로 지칭) 작가가 붙여준 '염소'라는 심볼하나에 취합되는 형국이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재자의 획일적이고도 독보적인 대명사로서의 절대적 존재감은 유명무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의 다양함이 되려 독재자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연출하는데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이는 한명의 독재자였지만 사람들에겐 여러 의미의 마법사로 존재하던 다양한 악마의 애칭들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브랜드 이미지를 다각화한, 다분 작가의 의도적 장치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듯 독재자는 자신의 호칭에는 일절의 강요가 없었지만 바로 작가가 계획한 축제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부단히도 염소와 부합하는 기질이나 외모, 성격을 더 중요시 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중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체질적 특성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염소라는 동물의 본질에 가까웠다. 어렸을 때 나는 하도 물을 안 먹어 어머니로부터 '네가 염소**니'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염소가 물을 안먹는 것이 아니라 습한 곳을 싫어하고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특성 때문에 수분이 많이 필요치 않은 생태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물을 안 먹으면 염소같다는 놀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독재자는 자신의 체온을 조절하기위해 작동되는 땀이라는 시스템은 가동하지 않으면서 가장 치밀하게 제어해야 할 방광은 통제하지 못해 그만 소변을 흘리고 다니는 신세로 그려진다.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건강한 땀으로 노폐물이 배설되지 못했으므로 다른 기관에서 질질 새어나오는 것이 당연해보이기 까지 했다. 그것은 일흔에도 손녀뻘의 소녀와 회춘을 갈망한 독재자의 탐욕에 작가가 내린 치명적인 벌이었을까. 여하튼 나는 소변으로 땀을 흘리는 그의 질병이 마치 염소의 축제에 주인공으로 선택될만한 매력이자 마땅한 자격이라는 생각에 작가의 농담이 얼마나 유쾌했는지 모른다. 반사적으로 같은 병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네 두 명의 前 대통령도 떠올랐다. 이렇듯 호칭이 여러 가지로 분열될수록 독재자의 소변이 새어나올수록 '염소'를 향한 끄덕임은 점차 설득력있게 다가오기도 했는데 유독 우리의 군사독재시절을 총정리하듯 호명하는 호칭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 작품을 번역하신 스페인 중남미문학의 전문가 송병선 교수의 유머로도 느껴졌음이다. 번역에서 독재자의 측근에 위치한 사람들을 굳이 '첩보부대장'이나 '합동참모부사령관'으로 명명하는 덕에 나는 우리시절 독재자의 마지막 날이 생각나기도 하였기에 말이다.

작가의 풍자적이고도 독재적인 마법덕에 이 책의 독재자를 만나보고 돌아오는 길은 그 시절의 아픔을 되새기고 상심하기 보다는 같은 시절을 그럭저럭 잘 헤쳐 나왔다는 대견함에 이르는 일이었다. 독재로 신음하던 그 시절 우리는 어쩌면 그들보다 한참 못한 상황이었지만 지금 우린 바로 그들의 옆 나라, 한때 그들을 지배하기도 했던 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이티를 당당하게 원조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엊그제 1986년 민주화혁명으로 쫒겨 났던 아이티의 독재자, 트루히요와 나란히 둘째가라면 서러울 뒤발리에가 25년간의 프랑스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 책에서 가장 잔인한 정보원으로 등장하는 조니 아베스가 말년에 아이티로 망명해 그의 자문관으로 일하지 않았던가. 작품 후반부에 조니 아베스는 반란을 지지 하다가 그로부터 전가족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기에 책을 덮은 시점에 거짓말처럼 등장한 뒤발리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독재의 악령처럼 내 가슴을 서늘하게도 하였음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30년간 아이티를 공포와 억압으로 몰아 넣었던 뒤발리에지만 혼란한 정국을 틈타 민심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정치본능도 다시금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부 아이티 국민들은 지난날의 상처보다는 눈앞에 닥친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독재자의 카리스마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니 한편 씁쓸해지는 이 실망감은 순간 묘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위기상황에서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어쩐지 그리 낯선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 한편으론 그 심정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한 마음 한구석에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의 장소라도 발각된 기분이랄까. 내게 있어 그 곳은 우리 스스로 피눈물로 이루어낸 민주화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군사독재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앞을 보고만 달리던 유년시절의 향수가 대치하는 갈등의 접점지대일지도 몰랐다. 어느덧 나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느끼는 세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권이 '이제 독재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2권은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라 말하기 위한 책이었다. 실제로 작가는 생물학적으로는 분명 '死'했지만 심리적으로는 결코 '死'라지지 않았던 독재라는 마법이 라틴아메리카에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일종의 애도를 표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학으로 독재자가 되어 그 자율성하에서 거대한 반란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 같다. 작가는 우리에게 강압이 아닌 자의에 의해 맹목적인 것에 휘둘리고픈 인간의 욕망, 절대자에 의지하고 싶은 나약함이 독재라는 통치와 얼마나 조화를 이루어왔는지 그것을 확인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타도해야 할 것은 독재자가 아니라 독재라는 마약이었음을, 그 마약을 끊지 못하는 인간의 두려움이었음을 증명하려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도 자유롭지 못한 生의 유혹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나라, 도미니카를 알지 못했다. 유명한 인물을 떠올려 보아도 메이저 리그 시절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박찬호가 가끔씩 삼진 처리하던 강타자 새미 소사정도만,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항상 우승후보였던 육체파 흑인들만이 기억날 뿐 심지어는 카리브해 연안의 관광지 지명하나 떠오르지 않았던 터이다. 이 책을 덮고 세계지도를 다시 펼쳐보았다. 독재의 잔재보다는 그저 작열하는 태양과 눈부신 해변이 아름다워 관광지 사진에만 눈이 휘둥그레 졌었다. 신기하게도 매력적인 카리브해의 태양처럼, 섣부를지 몰라도 이 작품을 통해 개인적으론 독재와 독재자에 대한 나름의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시절을 잊어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도 그 시절의 상처를 교훈삼아 당당히 독재에 신음하던 바다건너 피해자들을 공감으로 격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아이를 먼저 낳고 나온 산모가 아이를 밴 산모 앞에서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듯. 그땐 죽을만큼 아팠지만 이렇게 아이가 컸다고 자랑하고 싶은 그 마음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질식시키던 독가스로서의 향수(香水)가 아닌 그 하나만이 정답이고 진실이라 믿어온 그시절 그들 열정의 향수(鄕愁)만은 오래 기억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독재와 독재자가 고향처럼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지독히도 아픈 기억도 추억이 될 수 있었음에 뒤늦은 감사를 드린다.

Background

-사람들은 과거의 지독한 상처도 지나고 나면 좋았던 순간을 추억하는 심리가 있다.

-독재자는 용서할 수 없지만 독재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자극함으로써 향수를 달래게 한다면.












우라니아로 날아든 나비들

여학교만 십 오년을 다녀서 그런지 나는 사회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페미니스트로서 목소리를 많이 드러내었던 것 같다. 나는 결혼과 육아, 직장을 병행하면서 논문을 진행하기도 했기에 직장에서의 차별적 대우나 일과 가정을 동시에 꾸려나가기 힘든 사회구조에 굉장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러한 시기를 헤쳐 나온 덕에 같은 여성후배들에게 솔직한 충고도 해줄 수 있고 그 시절 내 논리에 슬몃 미소지을 수 있지만 그땐 참 온몸으로 분신하여 울고 싶을 때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내게 있어 결혼과 학업, 조직생활은 여성임을 자각하고 살아온 시간들이었고 결국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라니아를 따라가는 일은 곧 트루히요가 마땅히 죽어야 할 이유를 확실히 매듭짓는 일이기도 했다. 책에선 독재의 피해자로서 가장 약자층인 어린 소녀를 무참히도 짓밟는 가해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라니아와 겹쳐지는 우리시절 희생자들이 떠올랐던 건 바로 내 피해의식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여성으로서 아무런 피해를 겪어보지 않았던 시점, 그 시절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였다고 친구들과 떳떳이 성인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섰고 하필 처음 본 영화는 <서울무지개, 1989, 김호선 감독>라는 영화였다. 꿈많은 미모의 모델 지망생이 그 시절 지도자 '어른'의 탐욕과 무력에 짓밟혀 폐인이 되고 결국 옛 남자친구와 함께 절벽에서 불도저로 밀리게 되는 충격적인 영화였다. 우라니아의 고백 끝에 나는 국가최고 통치권자의 성노리개로 이용되다가 무참히 살해되는 이십년도 더 된 여자주인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서울무지개>의 흥행으로 이른바 '어른'에 인권을 유린당하고 성적으로 착취당한 후 영부인이나 측근들에 의해 처참하게 버려지는 꿈많은 처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마치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처럼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작가는 이 작품을 2006년도에 출간했지만 만약 내가 그 시절에 우라니아를 만났다면 과연 몇 날 몇 일 밤을 울분으로 힘겨워 했을까? 오로지 대학입학만을 목표로 화초처럼 자란 나는 영화속 그들과 같은 나이였지만 그런 건 그저 말 그대로 영화같은 과장된 허구에 지나지 않을 거라 믿었듯이 소설 역시 별다른 자극을 주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여성으로 살아가는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영화같은 일들이 허구가 아닌 현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세계여성 폭력추방의 날'을 탄생케 한 주인공인 미라발 자매를 알게 된 그 시절이 대략 십년쯤 되었을까. 그땐 그녀들이 도미니카 여성인지 몰랐었고 그저 반독재운동을 하다가 맞아 죽은 라틴계 미녀들 정도로 이해되었다. 이 책에 소개되는 트루히요의 골칫거리 '6월 14일' 운동과 조직의 핵심주동자들인지도 몰랐었다. 책에선 미라발 자매들의 활약이나 사연이 자세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트루히요의 암살자들은 자신이 암살을 결심하게 된 계기로 하나같이 미라발 자매의 죽음을 설파하고 있었다. 실제로 도미니카의 트루히요 정권이 사실상 최후를 맞게한 도화선이 미라발 자매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평가와 이 작품이 트루히요의 암살당시를 기점으로 암살전후의 정세변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야기의 주인공 우라니아를 결코 미라발 자매와 분리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우라니아와 같은 법학을 공부했으며 미모가 출중해 트루히요에게 초대받은 경험이 있는 미라발가의 미네르바에게 헌정집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미네르바는 죽었지만 우라니아는 죽지 않았다. 작품속 등장인물이 대부분 실존인물이었지만 우라니아만 가공의 처녀였다는 사실이 그래서 착찹하기도 했다. 미네르바와 같은 시기 같은 독재자로부터의 피해자였지만 소설속에서 부활한 우라니아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작가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라 생각했다. 이 막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질문은 직접적으로 라틴계 여성들을 향하고 있겠지만 미라발 자매가 가지는 범세계적 상징성을 떠올려보면 이는 결국 보편적인 인권문제로 확대되는 아젠다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작품을 처음엔 성폭력에 희생되지 않고 끝내 상처를 극복해낸 어느 여성의 장한 고백으로 받아들였다가 차츰 독재(獨裁)라는 권력에 패배하지 않고 여성이 아닌 그것을 뛰어넘은 초성(超性)적 존재로서 스스로 자립해 독재(獨在)한 인간투쟁의 역사로 넓혀보기로 했다.

열네 살에 조국을 떠난 한 소녀가 처녀성은 잃었지만 다시 인간性과 국민性을 되찾기까지 지내온 35년에 헌화하는 글... 미라발 자매는 반독재운동의 반역자로서 곤봉에 맞아 죽은 후 바다에 버려졌다. 하지만 우라니아는 트루히요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남성의 상실감을 안겨주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보란듯이 미국에서 성공해 곤봉과도 같은 손가락을 극복해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미라발 자매나 우라니아나 모두 트루히요로부터 성적인 정복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은 트루히요의 욕망에 승리한 인물로 상징화 될 수 있었다. 작가는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재의 제물이 되었던 여성을 앞세워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는 인간상을 보여줌으로써 진일보한 여성상에 희망을 걸고 싶었던 것일까. 책에선 트루히요 암살 당시 체제의 전복에 가장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권력을 쥐고 있었던 로만장군이 지레 겁을 먹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남성성을 구현하지 못한 벌로 자신의 고환을 삼킨 채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역할수행의 상과 벌이 성적(性的)으로 주어지는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사회적 시각으로 본다면 우라니아는 상을 받은 것일까, 벌을 받은 것일까. 남성의 입장에서 우라니아는 독재자를 즐겁게 해주지 못하였으므로 그후 순결 트라우마로 어떤 남성과도 관계 맺지 못하는 벌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입장에선 비록 손가락으로 처녀성을 잃었지만 그 후 사랑이나 가족의 도움없이도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상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라니아는 남성이 아닌 폭력으로 처녀성을 잃었다는 점(남성에게 당당), 실제로도 처녀인 채로 살아왔다는 점(여성에게 당당), 그리고 아버지가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평생 순결을 지키겠다고한 약속을 지킨 점(가족에게 당당)으로 보아 상과 벌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타의로부터 주어진 상과 벌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우라니아에게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야말로 라틴계 인권을 대표할 자격을 얻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미라발 자매의 죽음이 트루히요의 암살에 도화선이 되었듯이 우라니아의 귀국이야말로 트루히요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된 원년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그것은 여성이면서 아이였던 우라니아가 도미니카 독재정권에서 가장 취약한 인권유린 대상이었다면 결국 온 국민이 그토록 몸서리쳐지던 독재에서 벗어나기까지 35년이 걸렸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그녀가, 35년 동안 트루히요 증후군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시인'이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가난할지라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순수만큼은 얼마든지 꿈꾸고 노래한다고 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토도밍고 여학생시절 어머니의 날에 우라니아는 자신이 쓴 시 <어머니와 선생님, 최고의 여성>을 아버지와 수녀들, 여학생들, 도미니카 정권의 여성들 앞에서 낭독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떨려서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 큰 박수를 받았던 기억은 어머니가 부재한 이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된 어린 시절이었다. 이 장면은 작가가 의도한 가장 최선의 치유장치가 아니었을까. 인간은 자신에게 소중하고 의미있는 그 한 장면으로 평생을 견디는 존재일지 모른다. 나에게서 '어머니는 떠났지만 수녀들이 있고 당신들이 있으니 나는 앞으로 최고의 여성이 될 것이다'는 자기선언문은 아버지이면서 어머니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배신과 부재라는 시련속에서도 자신을 독재(獨在)시킬 수 있었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한편의 시로서 만인에게 자신의 꿈을 공표한 우라니아의 어린시절은 결국 그녀와 비슷한 나이에 조국 페루에서 독재를 경험한 라틴계 작가로서 전 세계에 자신의 포부를 알리게 된 바르사가 요사의 문학적 행보와 닮았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 미라발 자매는 지하조직에서 '나비들(Butterflies)'이라는 암호로 불리었다. 미국으로 망명한 도미니카의 작가 훌리아 알바레스는 미라발 자매의 이야기를 ‘나비들의 시절(In the Time of the Butterflies)’이라는 소설로 출간한 바 있으며 이를 각색한 영화는 우리에게 엉뚱하게도 <도미니카의 붉은 장미, 2001>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들 사후 ‘나비들’은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용감한 저항과 희생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들의 꿈이 도미니카의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면 세상은 너무나 야속하다 말할지 모른다. 이에 반해 작가는 미라발 자매의 꿈이 날아가 버렸을지 모르나 그 하늘이 곧 우라니아였다고 주장한 듯 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니아(Urania)는 ‘하늘의’ 라는 뜻으로,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뮤즈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우라니아는 천문(天文)을 관장하며 지구의와 나침반으로 별의 위치를 통해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진 여신과 이름이 같다는 점에서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 미라발 자매의 꿈이 다시 우라니아라는 하늘에서 부활해 라틴아메리카의 미래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내가 성인영화라고 처음 본 <서울무지개>의 모델 지망생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독재자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해온 꽃다운 여성들도 결국 나비처럼 날아간 것이라면 우라니아는 독재에 희생된 전 세계 여성을 추모하는 그토록 아픈 하늘이었던 것이다.

끝내 부활한 우라니아는 도미니카의 기억을 좇아 내기 위해 도미니카의 역사를 좇았고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도미니카의 기록을 저장했다. 그녀는 전 세계 기업들의 재정상태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도덕적 지식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최소한의 도덕을 상실한 아버지의 위선적 편지엔 답장하지 않았지만 이제 사촌의 진심어린 안부엔 답장할 여유를 얻었다. 그렇다면 전설적인 존재 미네르바를 계승한 우라니아에게서 피어나는 인권의 향기는 아마도 억압에도 결코 죽지 않은 자유의 나비, 장미보다 붉은 용기의 향수가 아니었을지. 그것은 오늘날 나라와 지도자와 부모의 부재속에서도 꿋꿋이 독재하려는 누군가에게 날아든 희망의 선물은 아니었을지.

-그녀는 언젠가 도미니카 공화국이 이룩하게 될 젊고 아름다우며 열정적이고 이상적인 국가의 서곡이었다. 1권 244p

Design Con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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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의 팩키지나 로고 디자인에 미라발 자매의 암호, 버터플라이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적용.

-독재시절 향수에 대한 반감을 상쇄시키고 비록 억압당했지만 꿈만은 잃지 않았던 순수를 기억하도록.














지식인의 짐승교향곡, 향수(響獸)

이 책에서 트루히요는 유난히도 시를 읊조리거나 외우는 사람들을 대체로 싸잡아 신경질적으로 폄하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에게 시인은 한마디로 웃기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짓궂게도 그의 측근에 문학을 그중에서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배치시키고 있다. 우선 그의 부인 마리아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여류작가로서 도덕적인 시를 좋아하며 그의 핵심측근인 '걸어다니는 오물' 헨리 치리노스 의원은 자칭시인으로서 시를 달달 외우고 다닌다. 비록 허수아비 대통령이었지만 연설문에도 시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던 발라게르는 박식하고도 소심한 시인이었다. 심지어 타고난 정보원으로서 독재정권의 각종 음모수행자였던 조니 아베스마저도 청년시절 시를 썼다고 하며 그의 유일한 취미는 비교서적 읽기였다. 이들 측근들의 문학적 취향은 참 詩답지 않은 반전이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트루히요가 그토록 조롱하는 모든 '시'의 주인공은 어쩐지 최고의 여성이 되겠다고 '시'를 낭독한 우라니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속에서 트루히요는 우라니아를 향해 직접적 비난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당신들(여성) 운명은 내 손안에 있다는 무언의 질'시'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는 앞에선 아부하는 지식인에게 조롱을 일삼았지만 그나마 아부라도 하지 않는 지식인에겐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스페인 내전 후 망명 온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이자 기자였던 지식인 갈린데스(Jesús Galíndez)의 저서『트루히요의 치세 La Era de Trujillo』에 격분해 그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지식인을 뉴욕에서부터 비행기로 납치해 도미니카에서 처형한 이 사건은 트루히요 정권에서 가장 반인권적인 폭력행위로 기억되고 있으며 작품속에서 암살집단의 핵심인 안토니오는 갈린데스를 공항에서 납치한 동생 타비토를 정권에서 죽여버리자 그 복수심으로 암살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예술안에서도 특히 문학이라는 창작까지도 오로지 자신을 찬양하기 위해 독재하는 장르이길 바랬던 애정결핍의 사나이였다.  

한편 트루히요가 '시'를 조롱하고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치 않았던 것은 어찌보면 뼈아프긴 해도 작가의 입바른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식인이며 성직자들, 대학교수들이 마리아의 <도덕적 명상>과 <거짓우정>에 극찬을 하는 것에 심사가 뒤틀리던 트루히요의 시선은 꼭 도덕주의자와 위선자를 동일시하는 작가의 시선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측근 중에 대놓고 지식인이라 불린 우라니아의 아버지 카브랄 의원의 경우도 집에는 누구보다 책이 가득했지만 딸을 독재의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려했던 대표적인 위선자로 그려진다. 군부독재의 억압하에서 대표적인 저항시인의 길을 걸어온 우리네 김지하, 고은 시인같은 문인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는 다분 지식인이야 말로 문학으로 도덕의 가면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냐는 작가 스스로의 비판으로도 여겨졌다. 우라니아의 시점을 대변하는 화자는 최고위층이 참석한 리셉션 자리를 회상하며 아버지를 포한한 지식인집단에 뼈아픈 질문을 한다. 트루히요의 입으로 고위관계자의 아내를 탐하였노라 당당하게 떠벌리는 현장에서 어찌하여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이 나라의 지식인들은 독재자의 학대를 용인하고 되려 우상화하였는지에 반문을 제기한 것이다. 만약 카브랄이 건강한 상태였다면 '그때 아빠는 어디에 있었느냐'는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우라니아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을까. 지식인으로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카브랄은 말을 할 수 있었어도 답은 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차라리 입을 다문 벙어리가 되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카브랄은 트루히요의 독재를 용인하고 협력한 대다수의 지식인을 표상하는 것이기에 그 결과 두 번 다시 말을 할 수 없게 된 그의 질병은 그들이 결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설사 말하고 싶거나 말해야 할지라도 말할 자격은 없다는 벌로도 느껴졌다.

하지만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명한 정치가 출신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작가는 지식인의 책무를 상기시키기 위해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반신불수의 백만장자에게 <전쟁과 평화>같은 19세기 소설을 읽어주며 학비를 마련한 우라니아를 반론으로 제기하며 문학으로 도덕성을 지켜낸 긍정의 서사를 이끌었다. 우라니아는 자신이 떠날 당시 마흔 아홉이었던 아버지와 꼭 같은 나이가 되어 조국에 돌아왔지만 결코 아버지와 같은 지식인이 되진 않았다. 그녀는 기나긴 시간동안 도미니카 관련서적, 증언과 에세이, 회고록을 읽으며 조국과 트루히요 전문가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소설속에서 아버지 카브랄은 끝내 명예회복을 못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존했던 카브랄 의원은 1941년 석방되어 1942년 상원의원으로 복귀한다. 이는 혹시 작품속에서 지식인을 대표하던 카브랄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함에 분노한 작가의 형벌은 아니었을까. 더 아이러니 한 것은 그토록 문학을 조롱하던 트루히요도 <쿠오바디스>를 항상 마음에 간직하며 작품속에 로마의 귀족으로 등장하는 시인 페트로니우스를 동경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페트로니우스의 쾌락적 습관을 부러워 한 것이며 이 동경에는 자신의 모계가 아이티 흑인이라는 열등감과 검은색 피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이 자리하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시인의 서정성, 문학의 감성에 무의식적인 의지를 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그래서 자신의 측근 정치인들을 그토록 문학적인(?) 닉네임으로 호명하였을까? ) 그날밤, 우라니아의 귀에 대고 네루다의 시를 읊은 그가 아니던가.

결국 그것은 통찰하는 작가나 수용하는 독자의 문제인 것이지 창조된 문학의 잘못은 아니라는 주장이 아닐까. 통치자와 국민의 문제인 것이지 정치의 잘못은 아닌 것처럼. 이는 혹시 위선을 특기로 하는 정치와 도덕을 무기로 둔 문학을 병행하는 작가의 이중적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서사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식인이라면 작가라면 특히 정치와 관계된 사람이라면 위선이야말로 독재에 협력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믿음직한 수단임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작가가 정치와 관련있는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 지에 대해 고민한 조지 오웰(1903-1950)은 그의 에세이 <민족주의 비망록, 1945>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정치행동 이전에 제일먼저 자신의 사고과정을 오염시키지 말라고 충고한 바 있다. 그러한 도덕적 노력이야 말로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소양이라 재차 주장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가로서 문학적 기교가 정점에 다다른 시점에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려 했으므로 지식인이면서 당시 독재에 동조한 꼴이된 많은 카브랄의 빚을 갚아내는 의미가 있다할 것이다.

가만 보면 지식인은 위선적이고 문학은 도덕을 은폐하며 시인은 비현실적이라는 트루히요의 주장은 비록 비도덕적 삶을 살았지만 그러했기에 가장 자신있게 알아챌 수 있는 그만의 능력이자 직관이기도 했다. 책에서 트루히요는 아이티의 부적을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 우상화된 자신을 신격화하는 나르시시즘에 도취되기도 한다. 흡사 무당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향수(鄕首)였던 것이다. 신적인 입장에서 트루히요가 보기엔 지식인들의 위선이야말로 자신이 제창하던 독재보다 더 사악한 짐승들의 노래가 아니냐며 보기좋은 한방을 선사했다. 그들이 걸핏하면 자신앞에서 연주하던 교향곡이야말로 가장 웅장하고도 야만적인 향수(響獸, 짐승의 연주)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 시절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었던 카니발 무곡, 메렝게도 울고 갈 범세계적인 클래식이 아니었을지.

Target Area

-주요고객은 기득권 세력과 위선적인 지식인에 반감을 가진 남성사회계층에 주력

-젊은 층과 자유분방한 예술인, 에너지가 충만한 스포츠인에 적극적 소구 















오래 사는 복, 영원불멸의 향수(享壽)

이 작품은 트루히요가 죽기 전 까지는 세 개의 시점이 분명하게 번갈아가며 공존하다가 2권으로 넘어오면서는 우라니아의 시점은 약화되고 사후 암살자들의 행보에 초점이 맞추어 지면서 그야말로 화자가 갈수록 증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2권에서 우라니아 시점의 공백과 암살자, 트루히요, 주변인물들의 어지러운 양상은 더욱 대비되어 보였다. 마치 독재자의 죽음을 확인한 후 일정시간 피해자의 침묵으로도 느껴졌다. 시점에 따라 각자 말하는 방식도 다채로왔는데 우라니아가 주로 자신 내면과 함께 '사고'하였다면 트루히요는 주로 혼자서 '독백'하였고 암살자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그들끼리 '대화'하는 식이었다. 이들 모두는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번민을 멈추지 않았고 책을 덮고나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 현상을 결국 축제의 목격자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 중 인상적이었던 화자는 단연 우라니아에게 '너'라고 호칭하며 그녀의 심경을 변호하듯 울려퍼진 목소리였다. 처음엔 말할 수 없었던 아버지이거나 먼발치에서 모든 걸 지켜본 작가라 생각했지만 결국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돌아온 또 다른 우라니아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가공된 우라니아만이 주관과 객관을 조율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1권에서 이미 총맞아 죽은 트루히요가 다시 2권에서 플래시백으로 출현해 암살의 순간까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다만 죽었지만 불사조처럼 끝내 죽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식과 구성은 독재자는 죽었지만 독재자의 영혼은 결코 죽지 않았음을 더욱 방증하는 훌륭한 구속장치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는 생각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좀처럼 그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독재자의 목소리는 생생했고 역으로 암살자들의 목소리는 어렴풋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연 '염소의 축제'의 행사주체는 어디였으며, 그날의 주인공은 누구였는지 축제기간은 언제까지 였는지 축제로 얻어진 것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거대혼란을 야기시켰다고 할까.

'염소'는 암살자들이 호칭한 트루히요의 별명이었다. 아시아에선 염소에 길조와 화목, 행복, 원만, 기쁨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지만 서양에서는 성적인 의미가 내포된 동물이다. 영어에서 '호색한'을 뜻하는 Satyric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의 시종 사티로스에서 파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이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머리에 작은 뿔이 났으며,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트루히요는 누구보다도 과도한 성욕과 성적 능력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죽기직전까지 최고위층 각료의 부인과 딸을 비롯해, 소녀와 유부녀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매력적인 여성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절대권력이 무소불위함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러한 트루히요를 악마적 본성을 지닌 호색한의 상징, '염소'라 지칭한 것은 어찌보면 소박하다고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이 책에선 염소가 축제를 벌일 땐 재미나게도 그 염소가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냐, 제물로서 이냐 구경꾼이나 들러리로서 이냐를 따져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이중, 삼중의 의미로서 <염소의 축제>를 연출하기 위해 그토록 혼란스런 화자들을 등장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을 통해 진정한 축제의 주인공을 찾아보시오, 하고서 말이다.

먼저, 우라니아는 표면적으로 육욕에 눈먼 트루히요가 벌인 축제의 희생양, 제물로서 축제에 초대받은 손님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행사주체는 트루히요이고 행사 장소는 아마도 '마호가니의 집'이거나 푼다시온 농장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라니아는 이 신성한 축제를 망치는 당사자이면서 자신이 사실상 그 축제의 종결자로서 종지부를 찍은 연출자가 된다. 우라니아 이후 더 이상 축제는 개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예로운 폐막식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남성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염소를 절망에 빠뜨린 우라니아는 한순간에 제물에서 승리자가 된다. 축제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보았을 때 염소의 축제는 얼떨결에 이겨버린 우라니아의 축제가 아니었을까. 미네르바가 파티에서 트루히요의 뺨을 때리며 저항했다는 전설은 이렇게도 소설에서의 특보로 계승 된다. 이제 축제의 수혜자는 고백할 수 있으며 패자는 아무 말이 없는 것이기에.

이 책에서 암살자들은 염소인 트루히요를 죽임으로써 자신들이 벌인 축제를 제대로 만끽하고자 한 페스티발의 제안자일 것이다. 이때 행사주체는 반독재조직이며 집행위원회는 군부와 비호세력, 스폰서는 미국이요, 행사장소는 고속도로변이 되겠다. 그리고 트루히요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시민들을 환호하는 다수의 구경꾼으로 계획했을 터이다. 그들은 거사직전 현장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대화로만 리허설을 진행했다. 실제 리허설의 공백때문이었을까. 암살자들은 전반적으로 행사진행이 너무나 미숙한 아마추어들이었다. 주체집단은 지휘체계를 상실했고 그 결과 운영요원들은 다잡은 염소로도 축제를 연출할 수 없었다. 특급가수는 어렵사리 무대로 모셔왔지만 음향 시스템도 고장나고 관객도 없어 콘서트는 진행되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안 의도는 기가 막혔으나 축제는 실패했기에 다만 구상으로만 남은 우발적 행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행사실패의 책임은 누구의 몫일까. 이 작품에서 트루히요든 암살자든 모두 염소의 축제를 제대로 성공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윗선의 배신은 제쳐두고서 라도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할 관중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상처로 남은 듯하다. 요즘 TV를 장식하는 튀니지 시민들의 독재타도 반정부 시위를 떠올리면 그들의 리액션은 차라리 반전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마지막 트루히요의 아들 람피스는 암살의 주인공들을 잇다라 처형하면서 복수의 축제를 즐기기도 했다. 암살자들을 소품삼아 람피스 혼자서 극본, 연출, 주연, 관객을 떠맡은 광란의 행사였다. 이렇듯 이 책에서 염소의 축제는 모든 화자의 축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광경은 대체로 씁쓸하고도 허탈했다. 원래 염소의 축제는 시민들의 자발적 의지에서 시작되는 민중의 축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책을 덮고 찾아본 도미니카의 전통축제 장면에는 유난히도 염소괴물을 상징하는 가면이 많이 등장했다. 작가는 말한다. 축제란 어느 한사람만의 독점이거나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행사가 아니라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참여의지를 가진 모든 시민이 주체가 되어 교감할 수 있어야 함을. 그 자유의지야 말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용기이자 독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임을. 그러므로 그때 자유의지를 상실한 도미니카의 관람객은 불행히도 축제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음을.

하지만 분명한건 모든 염소의 축제의 시발점은 트루히요 그였다는 것. 그가 만들었고 그 때문에 시작되었고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실행되었으니 그는 진정으로 축제의 오리지날 창안자였던 것. 아마도 그 땅에서 축제가 계속되는 한 그는 천수이상으로 오래 사는 향수(享壽)를 누린 영광의 얼굴이 아닐지. 그렇게 본다면 그 모든 축제를 지켜본(보았을 것 같은) 트루히요는 이 작품이 자신을 위한 영생(永生)잔치의 한마당쯤으로 기억될 만하지 않을까.

Brand Concept

-독재에 대한 상흔과 기억이 오래 남아있었던 것과 독재자로서 통치기간이 길었던 것에 착안 

-오래남는 잔향을 강조하고 당당히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향기를 가지도록 유도.














자유마취제 오데코롱

무엇보다 이 책에서 암살자들의 최후를 묵묵히 따라가는 일은 어이없고도 쓸쓸한 일이었다. 속된말로 운좋으면 목숨을 건져 훗날 영웅이 되기도 하고 재수없으면 바다에 버려져 상어밥이 되는 꼴이었다. 열사이냐 사형수이냐는 정작 그들이 저지른 일과는 무관해보였다. 명분도 순서도 목적도 없는 이들의 최후는 일관성이 없었던 관계로 그만큼 오래 기억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독재정권의 보호아래서 요직을 맡고 있거나 최소한 트루히요 신봉주의자들과 친인척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영원한 구원자가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기까지 이들은 각자가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아마디토는 반란군의 누나와 결혼을 허락지 않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동생을 죽여 버린 과거로 암살을 계획하는 인물이었다. 안토니오는 동생이 음모에 이용된 후 헌신짝처럼 살해되었음에도 정권이 살인자로 만들어 진실을 은폐하자 복수심으로 음모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죽는 것보다 용기와 배짱이 필요한 일'임을 조언했던 조니 아베스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는 왜 자꾸 우리의 용기를 시험하듯 들리는 걸까. 1권에서 활약이 두드러진 '사악한 지성' 첩보부대장 조니 아베스는 모든 희생의 행사를 추진하고 실행하는 주범이었는데 흡사 군사독재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우리네 중앙정보부장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실종과 처형, 중상모략, 여론조작및 은폐가 주전공인 그는 특이하게도 빨간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인물이기도 했는데 이는 미신적인 의미보다는 트루히요 대신 피를 손에 묻혀야하는 자의 자기방어적 소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피 묻은 손을 닦은 그것으로 땀도 닦아야 하는 그에게 빨간 손수건은 일종의 마취제가 아니었을까. 잔인한 피와 야비한 땀이 섞여 자아내는 사악한 체액은 가장 자신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향기일 것이기에 그는 빨간 손수건에 의지 한 것이리.

비단 첩보부장 뿐이었을까. 암살자들은 하나같이 독재가 두렵다기 보다는 어느 순간 이성의 마비 상태를 초래해 스스로 무감각한 시민으로 살게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들 실존인물 일곱 명에게 트루히요를 암살하는 일은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맞물려 있었다. 즉, 그들은 자신이 살기위해 트루히요를 죽여야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이들 모두는 염소가 살아있는 한 자신들은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거사를 도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생존투쟁에 다름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한 비장하고 숙연한 삶의 욕구에 비해 이들의 행동은 민첩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하였다. 작가는 꽤 상당한 분량을 정작 독재자를 죽여 놓고서도 사후처리를 감당하지 못해 우왕좌앙는 그들의 행보와 불안한 심리상태에 할당하면서 천천히 독자의 가슴을 옥죄고 있었다. 그나마 암살자들 중 가장 인상적인 최후는 신앙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터키인 살바도르였고 가장 외면하고 싶던 최후는 국군총수이며 제 2인자 로만장군이었다.

특히 매순간 세심하게 묘사된 로만장군의 심리와 치밀하고도 침착하게 대처한 발라게르 대통령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교체되면서 같은 순간을 비교할 수 있게 한 작가의 노련함은 우라니아의 수미쌍관적 고백에 이은 이 작품에서 또하나의 둔중한 백미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파악하여 적절한 시기에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 결국 한 사람의 운명을 나아가 한 가족과 국가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일임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유독 트루히요가 미스터리한 인물로 결론내린 허수아비 대통령 발라게르. 그의 대처는 국가통치권을 인수하지 못하고 군과 시민, 암살자들, 트루히요 가족 그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한 로만과 더욱 비교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는 암살자들이 로만의 배신에 갈팡질팡 할 때 로만이 결정적인 기회를 흘려버리고 있을 때 트루히요의 가족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마치 이 때를 기다려왔다는 듯 침착하고도 슬기롭게 위기상황을 모면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름을 바꾸는 현명한 지식인이었다. 이 지식인이 트루히요에 마취되었을 땐 하느님을 대신해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공화국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고 그를 위한 시를 헌사하던 분이었다. 시인으로서의 감성마저 마비된 채 합리적이면서도 문학적으로 아부를 지속해왔던 분이었다. 하지만 트루히요 아들의 불안과 영부인의 탐욕을 이용해 그들과 친화관계를 만들고 공적을 돌림으로써 위기상황을 통제한 실리주의자이기도 했다. 이 평정과 차분함은 끝내 조니 아베스까지 몰아내며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내고 시민연대의 움직임을 통해 국민의 정서를 바꾸어 놓는다. 그는 마취된 척 자신을 위장했거나 간혹 마취약이 듣지 않는 특이체질이 아니었을지.

문득 트루히요의 모든 냄새를 증오한 우라니아가 떠오른다. 트루히요는 혼혈이라는 열등감을 숨기면서 자신의 외모를 관리하는 수단으로 향수를 이용하는 사람이었고 유난히도 냄새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나 역시 냄새에 민감한 쪽인데 이런 사람들은 유별난 감각때문에 타인을 피곤하게 만든다. 트루히요는 자신의 냄새만으로도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물론 아예 정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공군기지의 망가진 하수관에서 새어나온 냄새때문에 군수 총책임자인 로만에게 심한 모욕을 준다. 로만은 트루히요 가족의 일원이었으면서도 그간의 증오심 때문에 음모를 지지하게 된 인물이었다.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님을 보여주려 음모에 가담했지만 결과적으로 쓸모있는 인간으로 남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로만은 하수구와도 같았던 트루히요의 악취에 제대로 마비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암살자들과 시민들, 로만장군과 발라게르를 보면서 트루히요가 아침마다 뿌렸다는 오데 코롱이야말로 독재를 강화하는 마취제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이티의 풀내음이든 마호가니 나무의 향이든 랑콤의 장미향이든 그것은 사람들의 이성과 근육을 마비시키고 심할 경우 복종심과 존경심까지 유발하는 향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마이클 스토다드(Michael Stoddard)에 의하면, '비록 사람에게 향이 일으키는 반응이 규칙적,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향에 의한 지배를 받는다' 고 하였다. 그 향이 비록 썩어 들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악취일지라도. 실제로 우리의 뇌는 고통이라는 자극을 쾌락으로 왜곡, 착각하는 신비의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악취라는 고통도 최고의 향수라는 쾌락으로 저장해 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트루히요의 독재는 독자적인 향으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 최고의 최면술은 아니었을지.

USP(Unique Selling Proposition)

-이성(理性)이 마비되는 독재자의 마법(Chivo's Magic)을 긍정적으로 유도

-상대 이성(異性)을 꼼짝 못하게 할 만큼의 감성 유도성분을 차별화전략으로.















넘버 32.(TRUJILLO No.32, 1961)를 론칭하다

이 작품은 트루히요시가 산토도밍고라는 이름을 되찾기까지의 도시수복의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실존인물 카브랄이 공교롭게도 1935년 수도 이름을 트루히요로 개명할 것을 제안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작중 딸로 분한 우라니아는 조국을 떠난 후 우라니아가 아닌 카브랄 박사라는 이름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도시이름을 트루히요로 바꾸어버린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한것은 트루히요시가 다시 산토도밍고로 번복되고도 한참 후 귀국해서였다.  트루히요가 살아있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던 도시이름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이름과 동일시된다. 그 이름은 아마도 조국의 하늘이 아닌 트루히요의 하늘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즉, 카브랄 박사가 우라니아라는 이름을 다시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은 아버지를 용서하기까지의 시간과 중첩되고 있었던것. 도시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의미는 곧 고향(산토 도밍고)을 되찾고 자신의 하늘(우라니아)을 바라본 것과 같았다. 먼곳으로 떠난 사람들은 대체로 고향에 돌아오기 까지 그곳의 하늘을 향수하는 힘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우라니아는 결국 기나긴 독재의 세월로부터 결국 자신만의 향기를 찾은 벅찬 반역자에 다름아니었다. 또한 그 반역의 세월은 육군 사령관신분으로 쿠데타에 의해 대통령이 된 후 32년간 독재자로 살았던 트루히요 시절을 향한 향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독재는 향수(鄕愁)가 될 수도 있으며 독재자는 오래오래 향수(享壽)했으며 독재자 측근들은 향수(響獸)를 연주했으며 독재자는 마취의 향수(香水)를 뿌려왔지만 그 모든 향수에 굴하지 않고 꿋꿋히 자신만의 향기를 개발해온 우라니아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제 우린 무슨 향수를 뿌려야 할까, 아니 어떤 향수를 만들어야 할까.  우라니아를 보면서 어떠한 악취에 대항하거나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뿌려대는 향수가 아니라 영혼으로부터 오랜기간 우러나온 나만의 향기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그래도 지식인의 대명사라 불린 그녀의 아버지 카브랄의 서재를 다시 방문해볼까. 그의 서재에는 '펼쳐진 책은 말하는 머리이며, 닫힌 책은 기다리는 친구이고, 잊힌 책은 용서하는 영혼이며, 망가진 책은 우는 가슴이다.' 라는 타고르의 명언이 새겨있었다. 그냥 스치고 말 명언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왜일까.  이러한 책을 접한 독자로서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당신은 무엇을 기다려야 하며,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에 울어야 할지 질문하는 것만 같았기에 말이다. 힌트라도 얻을 요량으로 슬그머니 의원의 수첩이라도 들쳐볼까. 그의 수첩엔 '한사람이 이루었고 이루고 있으며 이룰 그 어떤 것도 이루었던 상태나 이루고 있는 상태 혹은 이룰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젠가 그렇게 되었다가 이후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문구가 또렷하다. 지식인으로서 독재자에 순응하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문구였겠지만 오늘 나는 지식인의 이 문구가 어떠한 고통도 결코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없다는 위로의 한마디로 들린다. 엊그제 타계한 박완서 작가의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어느 인터뷰와도 말없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헤쳐나온 자만이 자신의 향기를 가질 수 있다는 충고였을까. 책을 덮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다시 시작하는 나만의 새로운 향기를 만들고 싶다는 야무진 생각을 해본다. 불가능할까?

이번 노벨문학상은 어쩐지 문학하는 지식인 작가의 독재에 좀처럼 저항하고 반역할 수 없었다. 그동안 독재장르의 소설을 대할때면 늘 무력감으로 며칠이 우울했었는데 독재를 향기의 유희로 만나본 덕분인지 이번 독서에선 유난히도 생생한 문학의 현장을 여기저기 투어하고 온 느낌이다. 아직은 살아있고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生 날 것의 향기를 맡으며 지긋이 눈을 감아본다. 생각해보면 살아있다는 것은 좋든 싫든 모두 냄새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냄새와 향기의 기억을 그 인물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책을 덮고 찾아본 트루히요의 인상은 왕성한 권력가의 풍체를 지니고 있었고 쇼맨쉽이 강해보이며 무엇보다 눈빛이 강렬했다. 작품속에서도 그와 대면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뚫어보는 듯한 맹렬한 시선이 제일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바로 이 느낌은 어딘지 모르게 얄궂게도 허를 찌르는 작가의 시선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재처럼 익숙하고도 편안(?)했고 그만의 독특한 색깔과 향기의 발산에 자발적 복종을 할 수 있었다. 어렵기만한 사유를 늘어놓고 통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가 흘러가도록 유도했으며 인물들의 내적외적 갈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다원화된 독재의 참맛을 알게 해주었다. 작가의 준비된 치밀함이 흡사 국민의 심리를 꿰뚫는 노련한 독재자의 통치술과도 같았던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처음에 눈이 잘 뭉쳐지지 않아서 그렇지 한번 원형을 만든 후엔 제 몸뚱이 자체가 스스로 굴러감을 유도하는 가공할 추진력은 파워풀, 원더풀 아니었던가. 매 장면 시시각각 섬세하고도 디테일한 묘사역시 역사적인 고증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고로, 그가 창조한 독재의 향수는 압도적이었다. 그가 창조한 문학은 아마도 넘버.32의 트루히요 향수가 되고도 남을지어다. 대체로 독재자는 향수와 잘 어울리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히틀러시절 독일군은 그의 악취 때문에 향수를 뿌려야 했었고 김정일은 여심을 잡기 위해 향수 뿌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조향사 자격증을 딸 정도의 향수 마니아로 알려진 바 있다. 독재자의 향수란 문학으로 저항과 반역을 추구해온 작가만이 제조할 수 있는 비법일 것이므로 그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시대 문학의 조향사일 것이다. 문득 우라니아와 작가에 이어 나만의 향기는 어떤 색깔일까 궁금해진다. 우린 저마다 자신만의 향기를 찾기 위해 이렇듯 독재적 작가에게 기꺼이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닐까. 웅장한 독재의 향기에 취한 이밤, 그가 뿜어낸 향수의 아우라 속에서 부디 지나간 상처는 마취되고 흉터는 사라지고 새살이 피어나길 기원하듯이.

한 병의 향수가 탄생하듯 한 사람의 향기가 형성되기까지 이토록 수많은 일이 있었으며 그토록 극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하나의 향기가 태어나고 그것이 자신만의 향기가 되는 일은  누구에게도 마취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의 향기를 자각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生의 축복임도 조용히 깨닫는다. 통렬한 자각으로 탄생된 그 향기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향기일 것. 그리고 나만이 독재(獨在)하는 生의 고독한 비밀일 것. 그러나 죽어서도 잊히지 않을 오래된 그리움일 것. 나는 오늘도 나만의 향기를 얻기 위해 독특한 나만의 향수를 만나는 그날을 위해 탐욕과 허영과 자만과 분노와 시기의 마취에서 깨어나고자 정신을 가다듬는다. 누군가는 그렇게 탄생한 내 향기에 흠뻑 취해 나만의 독재에 가득 안겨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나처럼 生의 신비함에 감사하길 감히 고대한다. 서로 서로 독재(獨在)하는 당신과 모여 앉아 한번쯤 자유롭게 우리 남은 生의 행복을 이야기 하고 싶어진다. 나만의 향기가 곧 나를 말해주는 그날, 당신만의 향기가 누구보다 기쁠 우리 축제의 그날 나는 비로소 외칠 것이다. 독재(獨在), 죽지 않고 영원히 퍼지는 그 향기를 위하여, 눈물로 건배 ! 

■ Image Making 

-과거에 대한 향수 + 미라발 자매의 꿈 + 지식인의 연주 + 오랜 통치기간 + 염소의 마법 = 트루히요, 오래퍼지다

- 넘버 32는 통치기간을, 1961은 트루히요가 암살된 해를 의미

 


 

 

 

 

 

 

 

<덧붙임>

많은 도미니카 관련, 트루히요, <염소의 축제>관련 사진들을 모아 제 나름대로 패러디, 합성했습니다. 
아쉬운건 7인의 열사들 관련 사진이 제일 드물었습니다. 라틴어이고 시점도 정확하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제안(Proposal)이라는 컨셉으로 구성하다보니 이미지가 많이 필요했고 출처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점,
상업적 사용이 아니니 너그러운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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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클럽 - 그들은 늘 마지막에 온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탐정의 기억이란...

이 책이 다시 생각난 건 나도 좀 추리를 해보고 싶어서였다. 추리(推理)란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서 생각하다', 사전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말을 내식으로 바꾸어 볼까. '알고 싶은 마음'을 바탕으로 '알기 싫은 것'을 미루어 밝혀내다...알고 싶은 건 내 쪽이고 알기 싫은 건 상대편일 것이다. 알기 싫은 이유로는 아마도 그 순간이 두려울 것 같다는 직관일 게다. 대체로 끔찍한 결과보다 어이없는 그 원인을 알게 되면 인간은 더할 수 없이 실망스러울 것이기에.

십년도 더 되었다. 그날은 내 결혼식 날이었고 그때 만해도 아버진 걸어 다니셨다. 그런데 외동딸을 시집보내는 그 경사스러운 날 아버진 우리 쪽의 축의금을 자신의 가슴에 슬쩍하는 한사람을 목격하셨다. 내가 형제가 없다보니 사촌오라버니 한명과 사촌형부 한명을 부조 테이블에 나란히 앉히셨던 모양이다. 마침 없어진 봉투의 주인공은 고모편이었고 확인결과 고모는 백만원을 넣었다고 했다. 현금이라 다른 봉투에 비해 꽤 두툼했을 터이다. 아버진 이 사실을 현장에서 알았지만 집에 와서 많은 시간 고민 하셨다고 한다. 축의금을 받은 두 명의 친척중 한명이 범인일 것이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한명의 사촌오빠는 엄마쪽 외조카였고 한명의 사촌형부는 아버지쪽 조카사위였다. 한명은 어릴 적부터 엄마가 업어 키운 혈연관계의 조카인데다가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한명은 그다지 친분이 없었던 한 다리 건넌 형부에다가 마침 사업은 실패했고 딸이 희귀병에 걸린 상태였다. 굳이 그 현장에 없었다 해도 정황상 범인은 분명해보였고 아버진 엄마쪽 외조카의 명예를 위해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길 원하셨다. 탐정이 되기 자처하셨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모든 걸 여행에서 돌아오고도 한참 뒤에 알았다. 사촌오빠는 득달같이 달려와 자신의 부주의로 생긴 일이니 돈을 물어내겠다고 엄마를 울렸고 사촌형부는 끝내 모르쇠로 일관하며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로 우리집은 작은 아버지네와 근 삼년동안 왕래를 끊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제서야 작은 아버지는 엄마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물론 작은 아버지가 그토록 믿었던 사촌형부는 종적을 아예 감추고 난 뒤였다. 세월이 지나 엄마와 그 일을 떠올릴 때면 늘, 그 사실을 묻었어야 했다고 아버지를 말리지 못하신 당신의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하시곤 했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촌형부는 항공사 조종사 출신의 내가 참 좋아하던 스튜어디스 사촌언니의 남편이었고 아버진 사촌언니의 등록금을 두어 번 해주었기에 배신감이 더 크셨다 한다. 하지만 사촌언니는 아버지, 엄마 장례식 때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 이후로 우린 단 한 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다. 나는 그 일을 겪으며 모든 사건이 언제나 같은 정도로 시원하게 밝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아무리 공부하고 인물이 멀쩡하게 생겨도 사람은 한순간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파헤치고 들추어내는 것이 한사람을 추락시키고 인간관계에 영원한 단절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진 훌륭한 탐정이었을까?

그 이후 아이를 낳고 그로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또 사회생활을 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럭저럭 삶의 이력들이 늘어가면서 나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는 것이 복수하고 사는 것보다 훨씬 마음편한 일임을, 그냥 저절로 알게 되었다. '너를 미워하느니 내가 괴로워 안되겠다'는 노래가사도 있지 않은가. 실은 나 좋으라고 눈감아주고 가슴에 묻고 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마음이 편해진 줄 알았는데 마음은 많이 늙어 있었다. 조금 억울한 성 싶어도 웃어버리고 가해자를 위해 내가 대신 울어주었더니 어느덧 나는 혼자가 되어 있었다. 참 이상했다. 다 이해해주고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은 혼자 짊어지는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가끔 욕도 하고 미운 사람이 있으면 고자질도 하고 당한 일이 있으면 따지기도 하면서 살아야지 혼자 무슨 도닦는 것도 아니면서 왜 스님처럼 답하고 목사처럼 충고하고 수녀처럼 안아주냐는 것이었다. 눈물이 핑돌만큼 외로왔지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길 최근에 같이 사는 사람과 딸아이에게서도 들었다. 지난 일 년간 책만 읽고 글만 써왔던 내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이냐는 투정도 함께였다. 이젠 좀 사람을 만나고 세상에 나가보라는 직접적인 충고도 함께였다. 꼭 책으로 마음을 삭히고 글로써 심정을 토로한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실은 최근에 온라인 상으로 교묘한 심리적 공격을 받고 있던 터라 내 측근의 한마디는 상처가 되고도 남았음이다. 너무나 서운했고 마음의 불똥이 안보이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 속은 참 알 수가 없다.

최근에 우연히 개인적으로 온라인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연달아 내자 이런 내가 궁금하였는지 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 생각되는 여러 정황이 포착되었다. 작년엔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알지 못하는 이의 제보로 시차를 두고 단 두 명에게 확인을 부탁했던 일은 돌고 돌아 다시 내 귀에 폭탄이 되어 떨어지기도 했다. 그로인해 내가 어떤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나를 음해하고 비방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대충 그 원인도 알 것 같아서 그것조차 껴안을 수 있었다. 내가 잘난 성인군자라서가 아니고 습관처럼 주저없이 외로움을 택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나 역시도 주어진 입이라고 지나가는 생각과 생각없는 말로 허공에서 타인들을 오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나는 그 사람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어짜피 만나 보아도 다같은 인간일 것임에 한 치의 의심이 없다. 하지만 나 역시 인간인지라 추리만은 멈추기 힘들었다. 제대로 추리하고 내 나름대로 원인을 알고 나면 그래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아질 것이기에.

이 책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던 그 좁고 막막한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제 그토록 궁금한 그 길 끄트머리에 비로소 찬란한 서명이 비추어 온다던가 아름다운 별빛이 가득하리라 믿지는 않는 사람이 되었다. 모르긴 해도 부패의 악취, 사악한 배신, 탐욕의 역겨움이 진동하는 시궁창에나 도달하지 않으면 얼추 다행이라 여기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우리가 능히 기꺼이 인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모르고 살다 죽는다 한들 그다지 손해볼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알고 싶다. 살아있는 한 그 좁고 어두운 길을 끝까지 따라가 파헤쳐 보고 싶다. 나만큼 인지 나보다 더 인지, 나만 못한 것인지 언제나 궁금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같은 인간된 입장으로서 말이다. 인간이 하는 짓은 인간만이 상상할 수 있고 인간만이 예측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내가 밝혀낼 순 없었어도 내 내신 누군가 밝혀 내었다는 만족감으로 이 책을 덮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난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내가 밝혀내어야 할 인간들 보다 몇 백배는 더 지독하고 기가막혔기에 말이다.

믿어도 될까요?

히가시노 게이노를 알지 못했다. 영화 백야행의 원작자라는 정도만 들어서 생각나는 이름에 불과했다. 내 편향적인 독서취향으로 절대 손이 먼저 가는 쪽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추리소설 작가라고 들었다.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작가를 평할 자격은 되지 않지만 엔지니어 출신인 것으로 보아 몇 가지 추측할 단서는 있었다. 작년 여름 인상깊게 읽은 <바이퍼케이션>을 출간한 이우혁이라는 작가도 이공계 출신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문학적으로 두리 뭉실하게 에두르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은유나 과장도 드물다. 그들은 주제를 향해 나선형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 우물을 파듯 미련하게 한 지점을 공략하는 경향이 있다. 인과관계를 밝혀내고 논리체계를 수립하여 마치 수학시간에 증명을 하듯 문제지를 풀어나간다. 물론 우리가 보기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들이긴 하지만. 그렇게 난해한 문제를 풀고 비로소 연필을 놓았을 때의 뿌듯함을 선사한다. 우리가 흔히들 떠올리는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학습태도가 아마도 삶의 태도로 체화된 작자들일 것이다. 이것은 학교다닐 때 문제집 몇 권을 풀어보듯 누구나 흉내낸다고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자신이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삶의 태도가 형성되고 그것이 문학하는 방법이 된 사람들의 고집을 존경한다. 소위 믿어도 될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나 이과계통의 전공자가 문학안에서 인간을 그려낼 때 감지되는 순수, 자연의 현상에 집착하고 물리적 사건을 관찰하는 그 탐구정신을 느낄 때 이상하게도 어떤 부질없는 욕심이 사라지곤 한다. 오로지 연구자체에 몰두하는 탐구자의 열정이 전해져서 일까. 인간을 탐구하고 삶을 통찰하는 것에는 추리나 장르소설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나는 이 책에서 작가의 냉철한 두뇌속에 숨겨놓은 뜨거운 열정의 응축, 그 오롯된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온갖 욕심을 수행하는 인간들을 향한 꽤 세련된 관찰에의 결과였다.

이 책에는 다섯 편의 믿기 힘든 이야기가 다채롭게 실려 있다. 여지껏 장편이 아닌 단편들을 추리소설로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이토록 빠른 전개와 쉴 틈을 주지 않는 호흡, 확실한 결말들은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어찌보면 추리소설은 작가와 독자간의 게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나는 매번 그 게임에서 참담한 패배를 하다가 겨우 마지막 작품에 이르러서야 힘겹게 범인을 예감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생각지 못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구성도 있었겠지만 내 평범한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결말을 예측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책에는 각 편마다 작가처럼 믿을만한 사람들이 늘 때가 되면 나타나곤 했다. 부자들이 회원제로 가입한 탐정클럽의 해결사 커플이 그들이다. 모두 언제나 검은색의 의상을 입으며 남자는 30대 중반의 큰 키에 서양인의 얼굴 윤곽을 가진 사람으로, 여자는 긴 머리의 미인이면서 일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외모로 등장한다. 나는 그동안 일본을 뻔질나게 다녀왔지만 그때마다 정말 (아쉽게도)키가 큰 남자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여자 역시 긴자나 하라주쿠의 몇몇 모델 뺨치는 (직업이 의심스런)여성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로 수준이하의 외모들이 많았다. 작가가 그려낸 탐정클럽의 해결사 커플은 어떤 의미에서 비일본적인 우월감과 신비감을 조성하는 이상향의 비밀조직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들은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정의감에 불타는 성향도 아니고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지 않으며 특별해 보이는 습관도 없었다. 이들은 숨겨야 할 비밀이 많은 특수계층에게는 일종의 종신보험과도 같은 존재들로서 비밀을 확실히 보장해주고 결과만 알려줄 뿐 처리에는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이 이상적인 회원제 조사기관을 보면서 나는 우리사회 정재계 인사들이 법적인 처리를 의지하는 유능한 변호사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른바 있는 집안에서는 애완견의 루트도 비공식적인 라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그들만의 방식 밑바탕엔 '불신'이 깊게 깔려있을 것이다. 함부로 아무나 믿지 못하는 심리, 섣불리 사건을 의뢰하기 힘든 비리, 검은색의 두 남녀는 그들의 불신과 불안을 이용해 생존하는 꽤 믿을만한 존재인 것이다. 경찰도 믿을 수 없고 언론은 더더욱 공정치 못한 그들 사회에서 이러한 유형의 조직은 왜 생명줄이 길어 보이는 걸까.

이들은 과연 안전한 걸까. 믿을만하긴 해도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이들도 모태는 있었을 터인데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사회의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는 데 음지에서 조력하는 사적단체일까. 사회정의나 진실규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업적 단체일 뿐일까. 이들은 기존의 탐정들에 비해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다거나 절대 선을 추구하는 인물로 등장하진 않는다. 즉, 어느 편도 아닌 중립적 입장을 그 매력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살면서 믿음이란 믿을 수 있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믿어야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할까. 또 틀림없다거나 절대 변치 않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깨달음도 이들을 더욱 긍정하게 한다. 즉, 이들에겐 그들이 믿을 만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믿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기로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건 이들(탐정)이 생기고 그들(부자)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기다 보니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문득 이 사회는 진실도 그것을 밝혀내는 자들의 은밀한 시스템에 좌우될 뿐이라는 착찹한 생각이 드는 두 사람이었다. 늘 같이 붙어 다니는 이들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기도 했던 두 사람이었다.


믿기 어렵네요!

노인을 위한 죽음은 없다 ..........................................................................................<위장의 밤>

첫 번째 이야기는 비교적 얌전했다고 할까. 어느 재계 유명인사의 희수 축하연회장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한 노인을 둘러싸고 죽은 첫 부인의 딸과 사위, 두 번째 부인의 아들, 노인의 세컨드, 노인의 비서등이 모여 연회를 벌이고 있는 장면은 어찌 보면 다들 속으로 저 노인은 도대체 언제 죽을 것인가를 음흉하게 상상해보는 자리와도 같았다. 이때 연회장엔 현재 부인이 갑자기 이혼을 요청하는 불청객으로 등장하고 노인은 잠시 서재로 자리를 비운 사이 목매달은 시체로 발견된다. 그의 서재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죽음을 목격한 자들이 조우한다. 이들이 노인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이 바로 사건의 발단이자 핵심이었던 것. 모두들 노인을 죽여할 이유도 살려야 할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피가 섞이지 않은 사위는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인의 세컨드는 보험금을 타기 위해, 비서는 누구든 권력에 오르는 자를 추종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던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아버지의 재산(유산)분배 문제로 형제간의 연을 끊거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때 노인은 장인이고 연인이고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딱 자신이 단물을 빨아 먹을 그 시기 까지만 생존해주면 좋았을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다.

첫 번째 작품에서는 사건 발생 시각 직후 일어나는 용의자들의 움직임을 시간단위, 장소단위로 쪼개어 나열한 후 모든 것을 종합해 범인을 추론하는 과정자체가 제일 돋보이는 이야기였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언제나 범인들은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며 그것을 밝혀내는 탐정은 더욱 더 기발한 존재들이며 그러한 이야기를 완성해 내는 작가들은 천재적으로 느껴지는, 치밀한 각본의 드라마였다. 더불어 마지막에 사건의 추이상 자신에게 유리한 결말을 선택하는 노인의 비서를 보면서 마지막에 웃는 진정한 승리자는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열한 자는 언제나 살인하지 않아도 이렇게 살아 남는 것을. 뛰는 놈위에 나는 놈 아니겠는가.

내 밧줄에 감기는 법 ...............................................................................................<덫의 내부>

두 번째 이야기는 의문의 세 명의 남자가 한 사람을 살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궁리 끝에 욕실을 생각해 낸 이 장면은 바로 범인이 덫을 꾸미는 순간이었다. 장소는 벤츠가 주차되어 있는 고급주택지. 부동산과 사채놀이로 재산을 쌓은 삼촌의 집으로 결혼할 여자친구를 인사시키러 가는 새하얀 얼굴의 금테 안경잡이가 처음부터 의심스럽긴 했다. 그렇다고 시커먼 얼굴에 뿔테 안경이라고 다를 것이 있었을까. 작가는 독자의 의심을 언제나 확인시켜주는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 저택에선 야미가마 씨의 친척들이 모여 젊은 커플의 결합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되고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불경기에도 끄덕없는 야미가마씨를 부러워한다. 시기를 가식으로 포장한 사람들...좋은 말로 매너라 칭하자. 그런데 어쩐 일인지 평소같지 않게 조카들의 시비가 이어지더니 급기야 우발적인 몸싸움으로 발전하고 야미가마씨는 자리를 비운사이 그만 목욕탕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다. 목욕탕과 시체는 언제나 특별기획세트 아니던가. 그의 아내는 그날 자리에 모인 친척들이 모두 남편에게 돈을 빌렸거나 제대로 갚지 않은 사실을 알아내고 공평한 의심을 표명하지만 우린 이미 그렇게 정상적인 죽음일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야미가마씨는 목욕탕에서 감전사 하였고 딸의 병원비 때문에 그것을 주도한 가정부가 자살을 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될 즈음 작가는 야미가마씨의 불륜과 야미가미씨의 아내인 미치요와 금테 안경잡이 조카의 불륜을 혼란의 장치로 제시하는 극적인 반전을 선보인다. 맙소사 ! 야미가마씨가 죽어야 할 이유 만큼이나 그의 부인이 죽어야 할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덫에 불행히도 부인이 아닌 자신이 걸려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은 알 수 가 없는 것이고 사람은 끝까지 믿을 수 없는 것인가. 작가는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죽음이 아닌 도저히 이해못할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자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상대가 살아있음이 내 불행이 될 때 우린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 인간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를 죽여야 하는 그 누군가있다면 그에게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우리가 살아가는 행운은 곧 상대가 나를 살려준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게 본다면 혹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상대에게는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목이 조여오는 결론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인간은 서로의 목숨줄을 가지고 더 굵은 밧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기 줄을 더 길게 잘라먹어야 웃을 수 있는 자들일까...이번엔 그렇게 끝없이 자르다 그만 그 줄에 스스로 감겨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거짓으로 진실하기 ..............................................................................................<의뢰인의 딸>

어느날 평소같이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엄마가 침대에서 죽어있다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런데 아빠와 언니, 이모는 무언가 알고들 있는 눈치인데다가 자신에게만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어떤 진실은 왕따를 탄생케도 하는 법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미심쩍은 엄마의 죽음을 알고 싶어 하는 여고생이 아버지가 회원인 탐정클럽에 사건을 의뢰하는 설정과 사실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탐정에게 개인적 부탁을 의뢰하는 맞대결구조가 서사의 흥미를 이끄는 참신한 구성이었다. 방송으로 보자면 역몰카의 내막을 알고있는 PD의 진실찾기정도로 이해된다. 딸이 탐정의 보고를 받을 때까진 흡사 아버지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불러 일으키지만 작가는 엄마의 불륜상대가 있었고 엄마가 죽은 날이 바로 그 남자와 떠나기로 한 날이었으며 아빠와 이모, 언니는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공표한다. 즉, 아빠와 이모, 언니는 엄마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남자의 살인으로 몰고 가려 함께 알리바이 자작극을 펼친 것. 그런데 이번엔 탐정이 이 진실을 차마 딸에게 알리지는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의뢰인을 향해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그들이 아니었나. '불필요한 짓'은 안 하는 게 신조인 사람들이 딸에게 엄마는 자신과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해 진실을 누락할 것을 의뢰하는 아버지의 부정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 번째 이야기를 덮으며 어린아이는 시도하지 않는다는 암살자가 떠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너무나 머리가 좋았다. 진실 하나도 여러 개 경우의 수로 쪼개어 증명할 수 있었던 그들은 진실을 들추기 보다 사랑을 들추어 인간을 감싸는 면모를 보여준다. 비록 의뢰자에겐 거짓보고였겠지만 어떤 진실보고보다 진실하지 않았을지. 탐정도 아버지와 딸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여겨지는 이야기였다.

탐정을 이용한 죄.................................................................................................<탐정 활용법>

네 번째는 장난이 비극이 되는 이야기였다. 후미코 부부와 아키코 부부가 여행을 가기로 한날, 호텔방에선 남편들만 변사체로 발견된다. 후미코와 아키코는 동창생이고 이들 부부는 평소 지인들의 관계인데 그날 밤 이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가장 뒷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작품이었기에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여운이 길었음이다. 후미코는 탐정에게 남편과 아키코의 불륜을 의뢰하고 뒤로는 아키코와 공모하여 남편들을 죽일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민 자작극의 당사자였다. 후미코는 보험금이 필요했고 아키코는 진짜 불륜 상대가 있었던 것. 후미코는 아키코의 남편에게 자신의 남편과 아키코가 불륜임을 거짓폭로하여 마치 아키코의 남편이 자신의 남편을 죽인 것처럼 함정에 빠트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아...부인들이여, 그대들은 진짜 불륜을 위해 없는 불륜을 연출해 낸 이 시대 누구보다 진정한 희극인이 아니던가. 우리의 순진한 남편들은 부부 동반 여행임을 의심없이 따라나서 허탈하게 배반을 맞이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도 충분할 마무리에 그만 탐정이 들고 일어 선 것이다. 경찰조사에선 부인들이 범인이 아니라 부인들의 계획대로 아키코의 남편이 범인인 것으로 마무리 지어지자 자신들이 교묘한 범죄에 이용당한 피에로가 되었다는 상심에 반전을 일으킨 것이다. 마지막 탐정의 말은 우리 보통사람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만다. 탐정클럽의 회원수준이 너무 낮았다고 이런 일에 휘말린 자신들을 자책하는 저 짜릿함이란 대저 직업의식이 투철하다고 할 만한 장면이었다. 그래, 개나 소나 모두 탐정클럽을 이용해선 그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다. 남편의 불륜현장만 미행하는 심부름 업소와는 달라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가 탐정의 인간된 이야기였다면 이번 이야기는 그 인간들의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수만이 선수를 알아보고 1등만이 1등을 알아준다는 것일까. 내가 봐도 부인들의 수준이 좀 의심스럽긴 했지만, 어쩌겠나. 그들도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었던 것을. 탐정이여, 죽여야 하는 이유에도 그 레벨이 정해짐을 미처 몰랐다네.

피가 없으니 눈물도 없지......................................................................................<장미와 나이프>

마지막 이야기는 가장 소름끼치고 잔인한 이야기로 장식했다. 피가 난무하거나 수법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범인들의 교활이 너무나 역겹고 미웠기 때문이다. 가장 드라마틱하기도 해 잔혹멜러를 표방하는 공포영화로 연출하여도 수작이 나오겠다 싶었다. 대학의 교수이면서 학과장인 유명인사 오하라에겐 딸이 두 명 있었다. 첫 장면부터 둘째딸의 임신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이기적인 추궁이 시작되면서 아버지는 고집을 부리는 딸의 뒤로 탐정클럽에 사건을 의뢰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첫째 딸이 둘째딸의 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사건은 범인이 임신한 둘째딸을 없애려 했다는 음모로 초점이 맞추어 진다. 설상가상으로 유력한 용의자가 자살을 한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장치는 바로 아버지가 유전공학부 교수라는 설정이었다. 두 딸은 각각 어머니가 달랐고 둘째딸은 자신이 가로챈 여자의 옛 연인, 친구의 딸이었다. 평생 유전자를 연구했지만 자신의 딸이 자신의 유전자를 지니지 않았던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거기다가 야망많은 주치의와 깊은 관계이기까지 했다니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려나. 둘째딸과 주치의는 첫째 언니를 죽인 후 애꿎은 연구원을 위장자살시켜 그를 전범으로 몰아가는 계략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사랑을 앗아간 언니도 죽어야 했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무기로 협박을 일삼은 연구원도 죽어야 했기에 그들은 사건후 정당하게 사랑을 나눈다. 피가 섞여도 천륜을 저지르는 현실이니 하물며 전혀 유전학적으로 피가 섞이지 않은 그녀가 마땅히 시도할 수 있었던 알찬차고도 당돌한 플랜이기도 했다. 작가는 살해된 피해자가 자주 자살로 위장되어 진실을 알 수 없게 유도하는 범인을 등장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의심이라는 기제를 지속적으로 가다듬는 훈련을 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나는 다섯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나서 퍼뜩 몇 년전 삼성가의 막내딸의 자살이 떠오르기도 했다. 뉴욕에도 탐정클럽이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이, 입을 삐죽거렸지만 말이다. 요즘 TV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드라마를 딸아이가 퍽이나 즐겨본다. 부검의가 죽은 자의 사인을 파악해 진실을 밝혀줄 마지막 인물이라던 어느 주인공이 생각난다. 설사 부검의가 진실을 은폐했다 하더라도 이들 탐정이야말로 최후의 천사들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도 믿어보죠

그러고 보니 세 번째 이야기만 제외하면 범인은 모두 한집안 식구였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죽은 엄마는 도망가려는 자신을 막아보려는 가족들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이므로 엄밀히 따지면 이도 한집안 식구들로부터의 죽음인 것이다. 사위는 같은 회사의 총수인 장인을 죽여야 했고, 남편과 조카는 부인을, 부인은 남편을, 동생은 언니를 죽여야 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데 그게 꼭 가족이어야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가진 탐욕을 가장 완성도 있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러므로 그들 또한 완벽주의자가 아닐까. 그들은 보다 완벽한 살인을 위해 다시 자신이 죽여야 할 대상을 죽여야 할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는 치밀한 행보를 계획하는 사람들이었다. 의뢰인이 사건을 부탁한 탐정은 이 누군가를 죽여야 할 범인의 심리를 밝혀내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인간의 열등감이나 성취욕구, 보상심리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는 심리학자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그 살인의도는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 정상적 순로를 밟지 않는다. 작가는 말한다. 인간은 터무니 없는 이러한 개인적인 이유만으로도 자신의 가족을 가장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나는 다만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였을 뿐이라고. 논리적인 단계적 풀이 덕분에 작품을 덮고 나서 어느 누구도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모두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고 하나같이 인간으로서 정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최대한 인간같지 않음도 최소한 인간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내재된 욕망의 종류는 동일한 같은 인간된 부끄러움이었을까. 그들을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더불어 이번 작품에선 의뢰인의 사건도 중요했지만 그것에 반응하는 탐정의 태도도 다양해 더 풍부한 이야기를 연출해 내었다는 생각이다. 탐정도 핏줄이 있었고 눈물도 있었고 화가나기도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꼭 장르소설의 추리 작가로서 그토록 많은 인간을 죽이고 피를 뿌리는 작업을 하지만 사회적 직업의식만은 잃어선 안된다는 스스로의 다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인간을 너무나 잘 알고 누구보다 더 연구하는 사람만이 추리소설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야기 속에선 어떤 치졸한 치정극이나 막장 불륜극이 등장한다해도 그것은 다만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좀 더 연구한 성과이자 기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든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잔인한 범인이 신종수법으로 범죄를 연출하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진 않을성 싶다. 나는 그동안 추리소설에서 새삼 삶의 교훈이나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소설보다 더 냉혹한 현실에서 추리소설을 통해 오늘을 껴안고 인간을 믿으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거 였음 어쩜 추리소설을 집어 들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나는 다만 알고 싶었고 결국 알아졌음을 말하고 싶다. 분명한 결말, 뜨거운 범죄, 잔인한 사람, 무서운 욕심, 내안에 있었을 지 모를 그 모든 화려한 악성(惡性)을 비로소 확인한 댓가를 조심스레 어루만지고자 할 뿐이다. 이제 나는 어느 정도 시원하고 그런만큼 개운하다. 이로써 된 것이다. 내 무언가가 토해지고 다시 헹구어졌다면 나도 그들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인간인 것이다. 그들로 채워지고 걸러내진 내 욕심이 오늘따라 뿌듯한 날이다.

한 편의 추리소설 덕에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일말의 의심을 또 견디었다. 열길 물속 보다 더 깊고 복잡한 그 속을 같이 할 길동무 하나를 얻었다. 추리소설은 분명 무언가를 잊게 해주는 순간의 힘이 있다. 그런데 그 잊어야 할 무언가를 까마득하게 잊어먹는 동시에 안개가 걷히듯 그와 비슷할 지 모르는 내안의 욕망들을 소름끼치게 확인하는 서운함도 있다. 천인공노할 사람들이라며 욕을 하다가도 한편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이해한다고 해서 누가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 혹시 만약 얼굴도 안 보이는 누군가가 미워죽겠는데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 사실을 알릴 길도 없다하면 나처럼 추리소설을 집어드시라.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확인하기도 뭐하고 한다고 해서 결코 좋은 결과를 본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 심사가 혼란스럽다면 탐정소설을 찾으시라. 십 몇년 살 맞대고 살아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속마음이다. 한순간 그 굽이치는 시커먼 길을 돌고 돌아 빠져나온들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토록 지독한 인간들을 만나고 오니 '알기 싫었던 것'들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긴다. '알고 싶었던 마음'에 후회는 없다.

어떨 때 우린 이 시커먼 속내를 나 자신도 모를 때가 있다. 그들처럼 믿을 만한 사람들이 밝혀내는 이토록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이야기 안에선 결국 믿을 수 밖에 없는 이 시커먼 이야기야 말로 우리가 가장 몰래 떠들고 조용히 펼쳐보고 싶었던 이 시대 가장 인간된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한 번쯤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탐정이 되어 좇고 쫓기는 게임을 하고 온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기실, 그 누구도 아닌 내 속을 알아보는 일이 되버릴 줄 미처 몰랐기에 나는 가만히 책을 내려놓는다. 추리하고 싶을 때 나는 또 탐정을 찾을 것이다. 다만 나는 부자도 레벨도 되지 않으므로 히가시노 게이고란 그 이름만 기억하겠다. 그들은 늘 마지막에 오듯이, 추리의 끝에서 나는 몰래 그를 기다릴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이 알라딘에서 오래활동한 물만두님을 추모하기 위해 개최된 리뷰대회 참가글임에 죄송스런 마음이 앞선다. 평소 장르문학을 즐기지도 않았고 물만두님의 서재에 방문한 적도 없는데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이 한참 마음에 걸려 나는 글을 적어놓고도 사실 며칠 망설였다. 그런데,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그분을 애도할 기회도 또 부러 찾아가 인사드릴 염치도 안될 것 같아 나는 이 글로 내 작은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해서 책 읽고 글 쓰는 그 한가지 일, 습관적으로 참여하던 여타 리뷰대회와는 많이도 다르게 느껴졌다. 얼굴도 모르고 한 번의 스침도 없었던 분이지만 부고 소식을 듣고 목이 메어왔던 건 그저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식으로 같은 작업을 해왔다는 연민때문이었을까. 마침표를 찍고 나니 고인의 못다 이룬 꿈이 오늘따라 사무친다. 하지만 오늘 내가 이렇게 그의 뜻을 그리워하듯 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으니 그가 읽어온 책들과 쌓아온 글들이 결코 헛된 작업이 아니었음을 엄숙하게 깨닫는다. 앞으로 추리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아마도 물만두님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그 곳에서 잘 계신지 나는 이 곳에서 잘 있다고 언젠가 한번은 꼭 만나자고 인사라도 해야겠다.

그의 명복을 비는 건 아마도 그가 했던 방식대로 오늘처럼 읽고 쓰는 일, 이 순간의 소중한 기억, 그리고 이토록 시린 감사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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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2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저도 비슷한 생각이었으니까요.
언제 탐정 클럽으로 리뷰를 쓰셨군요.
사실 저도 물만두님을 기리는 마음으로 한편 정도는 참가를 해야지 했는데
결국 못했어요. 책을 그다지 빨리 읽지도 못하는데다가
그땐 왜 그리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
모쪼록 알라딘이 이 대회만큼은 해마다 신경써서 잘 해 줬으면 좋겠는데
갈수록 어떻게 될런지 약간의 걱정도 돼요. 물론 제가 할 일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정말로 물만두님을 기릴 마음이 있다면 시즌 때만 리뷰대회를 하고
추리물을 읽을 것이 아니라 평소 기회있을 때마다 읽었으면 해요. 1년에 한 두 권이라도 꾸준히.
시간 가면 잊혀지는 게 슬픔이고, 기쁨 또한 퇴색해버리죠. 그게 사람인 것 같아요.
요즘도 신간 서적에 추리물 끼어 있으면 물만두님 생각이 나요.
이 분이 살아계셨으면 이 책들 좋아라하며 읽으셨을텐데. 하는 생각요.
한사람님 잘하셨어요. 물만두님도 한사람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 세상에서 그 마음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한사람 2011-01-29 14:25   좋아요 0 | URL

부끄...어쩌나..
예, 전 물만두님을 전혀 몰랐어요.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려놓기 시작한것도 일년도 안되고
거의 다른 분의 글을 읽지도 않는 편이라..그런데 그분이 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을땐,
신기하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한 권이 책을 읽고 한편의 서평을 적는 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 아니란걸
이렇게 리뷰대회에도 참여하는 것 자체에 자괴감을 느끼곤 했던 스스로에게
미치도록 부끄러움을 느끼며..그것으로 온 행복을 삼은 물만두님에게
너무나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물만두님이 추천하시는 책을 부러 구해 읽어볼 성의도 없었으면서 그저
집에 이 책이 있어서 지난 여름 덮었던 책을 다시 꺼내볼 만큼밖에 안되면서..
이렇게 인사하는 것조차 창피하고 죄송했지만...인사는 하고 싶었어요..
잊지 않겠다고요..저 또한 희망같은거 남일이 아니라 내일도 된다는거

잊지 않으려구요..

2011-02-12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2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zx 2012-01-1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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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내 입 밖으로 말하였을 때 그는 한 개의 심장에 치명적인 무리가 오는 일이라 답하였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에 백 만가지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기쁜 일이라고 하였다. 이 책을 덮고 나는 아직도 그 대답을 심장에 고이 간직한 질문자로서 소위 심장에 무리가 간다는 말의 뜻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 소설의 제목이 <나라의 심장부에서>임에 반응하는 자연스런 연상효과였다. 급격히 흥분된다거나 가슴이 터질듯이 기쁘다거나 반대로 찢겨지듯 가슴이 아픈 상태가 아니라 극심한 두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는 상태야 말로 심장에 가장 확실한 무리를 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무게라는 것이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때 보다는 양쪽 다 팽팽하게 물러서지 않을 때 그 긴장감의 피로도가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이다. 즉, 너무나 미운데도 결국 좋아할 수밖에 없다거나, 더없이 고독하지만 그것으로도 전부 타버릴 것 같이 완전할 때, 그럴 때야 말로 심장은 버티기가 힘들어 무리가 가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의 원제는 <In the Heart of the country> 로서 '나라'와 '심장'이라는 단어의 직역을 그대로 제목으로 앞세운 소설이다. 표면적으로는 남아프리카의 어느 황량한 시골마을이 그 중심무대가 된다고 볼 수 있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점점 그곳, 'the country'는 무인도와 같이 외딴섬처럼 정박해있는 관념상의 고독지대 혹은 그 정점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시각으로 본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일은 곧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주인공은 너무나 여러 곳의 나라를 표류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려면 먼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식민지로 둔 네덜란드계 백인(아프리카너)이 부모였던 존 쿠시의 언어적 배경과(존 쿠시는 모국어인 아프리칸스를 사용하지 않고 덜 억압적이었던 영어로 글을 썼다는)소설 속 인물들이 남아프리카의 시골에 사는 아프리카너와 그들의 하인이었다는 설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들 간의 이념적 충돌이나 그로 발생하는 내적 갈등을 그린 소설로 이해하진 않았다. 오히려 사상과 관념적 세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과시한 마력의 주인공 마그다의 이야기는 특수한 가족간의 관계에서 성역할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 어떻게 지배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보편적인 소재로 받아들여졌다.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자극이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식민지가 되어본 경력이 있는 우리로서는 일종의 참신한 기획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성찰하는 존재론적 담론이 소설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문제인지 신기에 가깝다 할 것이다.

여기에는 아마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단순 역학적 문제뿐만이 아닌 피부색이 다른 인종적 문제가 추가개입 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경우 우리를 지배한 일본나라의 국민이 우리와 피부색이 달라서 생기는 갈등은 애초부터 상상할 수 없기에 우리처럼 국가의 독립, 나라사랑에 대한 애국적 문제보다는 주인과 노예, 성적역할과 지위등이 보다 상처깊게 팽배해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이 작품에서 백인이라는 지주 아버지와 흑인 딸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딸의 입장은 갈색인종으로서의 혼혈이라는 꼬리표에 노예라는 하위계층적 지위, 여성으로서의 성적대상이라는 악조건을 삼중고로 짊어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불행한 신분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가정과 사회에 드러나는 외적인 사건과 갈등을 그린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무한대로 펼쳐보였다는 점에서 기실 식민지국가를 배경으로한 소설의 차별화에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이다.

이 소설은 아버지와 딸, 몇 명의 하인은 실재하지만 그들 간의 사건이나 사실은 부재함으로써 이야기의 존재를 점진적으로 구축해나가고 있다. 먼저, 이야기속의 화자인 마그다라는 노처녀는 처음엔 경미한듯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 증상이 심해지는 일종의 정신분열증 환자와도 같았다. 이 증상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겨우 진정되는 국면을 취하고 있는데 때문에 이야기를 끊어서 전달하는 단문형식은 특정 병리현상을 낱낱이 기록하는 의료용 차트 이거나 상담을 정리한 환자노트로 받아들여졌다. 굳이 이러한 형식이 구성상 중요하여 총 266개의 번호가 필요했는지는 작가만이 아는 비밀이겠지만 번호가 없더라도 서사를 이해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구성인 점을 감안하면 일련의 번호들은 주인공이 말하고 전달하는 수많은 상상의 파편을 조각조각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느낌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더 분명했다. 절대 방대한 장편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단락 단락 생각의 편린들을 마치 길거리의 휴지를 줍듯 하나씩 그러모아 보았다는 콜렉션의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개되고 서사가 분명해지면서 무언가 쌓여간다는 느낌보다는 이야기를 할수록 공중에 유영하는 공허한 말들의 조각들이 떠돈다는 느낌, 결국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파국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 서사의 균열은 곧 화자의 정신상태를 의미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이 소설은 굉장히 아픈 소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화자 마그다의 아버진 농장의 주인이며 어머니는 죽었고 표면적으로는 하인들을 관리하는 지배인격이지만 실상은 그들과 같이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하녀의 일상이 그녀의 전부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남자와 일절의 연애및 성적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노처녀로서 아버지가 데려온 둘째부인과 하인 헨드릭의 아내 안나를 같은 여성으로서 부러워하면서도 경쟁적으로 시기, 질투하는 여심의 주인공이었다. 아버지와의 무미건조한 식사나 하인과 다를 바 없는 대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자신이 느끼는 인간적 감정에 대한 연민이나 섬세함으로 표현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이나 벌레에 대한 사랑의 서사시로 자주 그려진다. 그리고 하인들이 주인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동시에 복수심을 느끼는 분노의 이중적 감정을 자신 역시 아버지에게 똑같이 느끼는 존재로 동격화되곤 한다. 그러한 자신의 이야기를 꾸미고 늘리는데서 유일한 위로를 받는 것이다.

- 나는 나를 창조하는 말들로 나 자신을 창조한다. 18p

그녀는 주로 방안에서 바깥으로 부터의 미세한 인기척이나 하인들의 발걸음, 그들이 반복하는 노동의 종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상상의 여행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자신을 학대, 파멸시킨 후 자신은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의 여부를 질문하는 것으로 여정을 마무리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한다. 때문에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상상인지 그 경계는 그녀가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더 모호해지며 그녀역시도 그 이야기 속에서 현실로 회귀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극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보여지는 아버지 살해및 사체유기, 하인으로부터의 강간및 구걸의 서사도 시작과 끝이 뚜렷하지 않아 진실과 허구의 영역구분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죽음이나 배신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 그로인한 내 심리, 감정의 상태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도 그녀에게 큰일로 보이진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상황이 자신의 이야기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인지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번민하는 것으로 보였다. 방안에 틀어박혀 노파가 되어가는 자신의 고독에 어떠한 도움이 되는 것인지 모든 것은 고독이라는 완성을 향해 투입되는 불량의 재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쳇바퀴와도 같은 정신병의 단면을 거의 나노단위로 쪼개어 관념의 인수분해를 해내었다는 생각이다. 실로, 말하여 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찬란한 향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도저히 생성 될 수도 답할 수 없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질문이었다. 흡사 지하 몇 십미터의 갱도를 추적해 들어가는 탐사기의 추진력으로 작가의 에너지는 충만해보였다.

-나는, 말을 넘어선 진정한 나는, 하인들이 보지 못하도록 바닥을 닦게 만든 폭력이 미지의 곳에서 미지의 곳으로 우당탕탕 지나가는 시간의 한 순간에, 공간의 한 지점에 그저 존재한다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이 현상에 관여했는가? 34p

이처럼 마그다가 쏟아내는 독백은 구원받지 못한 말들의 '미로'요, 그러한 말들과 함께 떠도는 자신은 '행성'이나 '사막'에 내버려진 '귀신'과도 같은 존재라 말한다. 그녀는 '고통'에 의존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며 그 고통의 한 복판에는 '증오'와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이 어린아이였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과 인간한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기존재의 부정만이 유일한 존재근거가 되는 전형적인 정신질환이다. 이 블랙홀과도 같은 현상으로 그녀는 자신 스스로가 '구멍'난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은 소용돌이의 '구멍'으로 인식하지만 실은 그 '구멍'을 메울 수 있는 단하나의 방법은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구멍'으로 아버지를 밀어 넣음으로써 어떠한 희망도 차단하는 파행을 결단한다. 그것만이 영원히 '구멍'날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인생을 고독하게 채우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구멍'난 여자로서 헨드릭과의 일말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하나 그 역시 아버지의 부재로 등장한 새로운 부재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 페이지를 넘기면서 결국 혼자 남아 고독한 외딴섬에서 울고 있을 그녀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은 이야기의 완성을 향한 그녀의 집착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어떠한 비명이나, 비탄, 신음소리 하나 없이 처절하게 자유로운 고독의 상태를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만이 완성한 '나라'의 '심장'부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비로소 생명성을 가지는 것. 그것은 암녹색 원피스를 입은 갈색피부의 나이든 한 여인의 건강한 심장이 아니었을까. 오로지 혼자서 만이 이룩해내는 말들의 교감에서 얻어지는 황홀한 에너지, 그래서 고독은 황홀할 수 있으며 그로써 위안이 되는 그녀의 인생은 누구보다 활기찬 펌프질을 할 것이기에. 이 무절제한 펌프질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가 생산될 수 없는 상황, 타자나 주변요인이 자신을 억압하지 않는 환경으로 인식되었다.

그녀가 생산해 내는 이야기 '나라'에서 그녀는 종종 회색나방이나 흰색유충, 갈색개미, 검은 거미등의 곤충으로 꿈틀거린다. 나는 이것이 자학의 코드라기 보다는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나름의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대부분 아버지의 명령어에 길들여진 반항심리에서 비롯된 언어였다는 점에서 그녀가 제창한 위계질서의 언어, 간격과 원근의 언어로서의 父국어는 소름끼치도록 창의적인 개념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이 말하고 싶은 母국어가 아닌 모든 것에 일정한 거리를 둔 패러디, 즉 가면과 가식의 언어라는 것. 그러므로 그녀가 자신을 말하는 언어는 식민지 시대에 강대국의 위선과 폭압에 대응하는 방어기제로서의 언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문학이나 예술의 힘 못지 않게 이 언어의 힘을 믿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가 흑인차별의 중심이 된 母국어로서의 아파르헤이트의 언어 아프리칸스를 사용치 않고 영어로 글을 썼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가지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문학하는 방식을 이 작품에 그대로 실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의 母국어는 곧 마그다의 父국어이기도 했는데 마그다는 지배계급의 자녀였으면서도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는 父국어에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으로 등장한다. 식민지 정책중 가장 지배적인 정신적 폭력은 아마도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만행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마그다에게 父국어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제공한 일등공신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 마그다는 자신이 생산해낸 이야기로서의 말들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들이 멈추었다면 자신은 어디에 있었을지 자문하는 대목이 있다. 마그다는 父국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혹시 자신만의 착각일지 모르는 이 모든 것의 사유가 자신 내부에서 이성적인 목소리가 되어 자신을 일깨우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지막 목소리는 사실 가장 마그다 답지 않은 제정신인 목소리이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는 다분 작가의 설득으로도 들려왔다. 미래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없는 삶의 무료함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진 마그다를 옹호하는 변론은 흡사 법정에서 피고를 변호하는 변호사와도 같았다. 규칙에 갇힌 사람이 모험을 선택하며 결백한 피해자로선 범죄보다 고통이 중요하며 노예가 되면 옳고 그름을 종속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변론이 그것이었다.

모든 변론을 마친 뒤 마그다가 돌아선 행위는 말로써 이야기를 짓는 것이 아닌 쓰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그리는 것이었다. 父국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한 단계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그녀가 가상의 스페인어로 노래한 시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의 서정시였다. 모국어와 부국어도 아닌 주인도 노예도 아닌 그 둘을 이어주는 가교로서의 매개체, 중선(中線)으로서의 언어였다. 언어라는 것이 관계의 부조리와 역할의 억압을 초래하는 시스템이지만 결국 그 모순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시 언어라는 조화가 아니겠냐는 작가의 신념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이해되었다. 제 3의 언어로 시를 짓다. 정신병자의 통렬한 반전이 아닐까.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고독의 기원을 곧 욕망이 집결되는 장소라 보고 그 '심장'을 향해 이야기라는 '나라'를 건립한 이야기였다. 그 고독한 '나라'에서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간 마그다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사용해 스스로 내적인 균형을 이룰 수 박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언어'의 힘을 믿는 마그다는 마지막에 자신들의 모든 질문에 답해주는 문학작품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피력한다. 세상 누구보다 고독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자신을 향해 용기를 선사하는 선언이었다. 정신분열이 이루어낸 쾌거이자 승리였다.

언어와 문학의 힘을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작품으로 보여준 작가의 집요함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단일민족으로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우리들은 사실 몇 개 국어를 공용으로 배우고 사용하는 유럽측의 정서와는 다른 획일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상이하다는 현실을 실감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과거 식민지 국가로서 우리 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언어에 있어서는 늘 수동적인 태도로 다양하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 이번에 존 쿠시의 작품을 처음 읽으면서 식민지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이러한 주제로 형상화 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가식적인 父국어와 고집스런 母국어에 대응해 혼란스런 정체성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언어라는 매개체라는 결론을 보고 그 참신한 해석에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제 3의 언어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한 크리에이티브였다. 솔직히 이런 류의 소설은 우리나라에선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패배감도 들었음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 못지 않게 세상의 것을 이용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 더 넓은 시야와 열린 마음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신년부터 혁명적인 소설을 접했다. 독자든 작가든 이런 작품이 이 '나라'의 문학에, 소설이라는 '심장'에 부디 자극이 되었으면 한다. 문득 내 '나라'의 '심장'은 어디일까 싶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고 예외없이 욕망한다. 우주의 배꼽에 욕망의 발현지가 있다하면 그 배꼽에서 뻗어 나와 한시절 유영하다 다시 귀환할 곳은 어디인가. 진정한 사랑만이 해답이라 그 낭만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마그다의 선택이 퍽 마음에 든다. 자신만이 만들 수 있고 떠돌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을 더욱 성장시키는 이야기, 그 고독의 절정지에서 규칙적으로 뛰고 있을 단 하나의 심장이 그리운 밤이다. 그곳은 아마도 완전한 자유로 실현된 가장 아름답고 비밀스런 유일한 아지트가 아닐까. 나는 오늘도 그곳을 향해 이 뼛속시린 외로움을 벗삼는다. 가장 고독하면서도 가장 기쁠 그 치명적 순간을 기다린다. 하트파탈(Heart Fatale), 그 순간을 위해 내 고독의 무게와 내 환희의 무게를 공평하게 조율하겠다. 내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리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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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얍삽하지만,  
이번에도 서평단 여러분들의 선택에 기대게 되었다. 적어도,
<도롱뇽과의 전쟁>이나 <토마토 랩소디>같은 작품은 내가 선택할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 읽고 있는 <나라의 심장부에서>도 마찬가지. 모두 훌륭한 작품들이다.   
출판사 소개를 보니 상당한 자신에 차있었다.  
막상 책을 읽어보려 할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때문에
책을 집어드는 독자들이 많을까?
다독하시는 분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요점정리하듯 선택하는 분들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요즘들어 느끼는 것이지만, 노벨문학상은 작가의 작품과 문학성이 아니고
살아온 인생과 가치관에 상을 수여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우선 번역 제목이 자극적이다. 이 겨울, 허기란, 다음을 기다리는 본능일것이다.
지인들도 평이 좋아, 대세에 따르고 싶다. 

 

교통사고에 대해서 좀 안다.
해서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읽고 싶기도 하다. 

두렵지만,  
정면돌파가 필요할 때란 생각에서
추천한다. 
가끔, 생각한다.
어제까지 멀쩡히 내 곁에 있던 사람이
오늘부터 없어질수 있다는 사실을.
그럴때, 사람은 수면시에만 꿈을 꾸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논문이라도 쓰고 싶어진다.
이 책은, 그것에 충분한 참고자료가 될 것 같다.

 

한파가 몰아닥친 이 겨울이 책 읽기 참 심난한 계절임을 실감한다. 
두권 밖에 추천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그다지 간절히 읽고 싶은 책도 없거니와
그러므로 어떤 책이 선정되어도 큰 상관이 없기 때문임을 밝혀둔다. 

이 무책임엔 앞선 계절에 간택된 책들에 대한 믿음이 반이상일 터이다. 

두권다 상처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는 책들인 듯하다.
어떤 책이든 1월에 선정되는 두권을 덮고나면
겨울도 한발 물러서 있기를 기원한다.

쌓인 눈이 조용히 녹아내리듯
책장을 넘기고픈 심정이다.

겨울이여, 건승(健勝)하시라.
계절이여, 충만(充滿)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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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1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르 클레지오의 사인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책은 매혹적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그런데도 전 정작 그의 책은 두 권씩이나(아, 세 권인지도 모르겠다)가지고 있으면서
이렇게 또 나와주시면 어쩌라는 건지...ㅠ
아래 책은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다 못 읽을 것 같아요.ㅠㅠ

한사람 2011-01-11 18:5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또 나오는 심정이란 ㅋㅋ
그런데 우리에 소개되는 작품들이 꼭 저자가 집필한 순서가 아니니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아요~
언제나 책을 집어드는 기회는 그 책과의 인연인것 같아요^^*

cyrus 2011-01-1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의 소갯글을 보고나니 르 클레지오의 소설들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집에 <조서>가 소장되어 있는데 아직도 못 읽어봤어요.
한사람님이 계신 곳에 눈이 많이 오고 있다죠. 또 눈 오고나면 동장군이 기승을 부릴텐데
감기뿐만 아니라 눈길도 조심하세요. ^^

한사람 2011-01-11 18:59   좋아요 0 | URL

ㅋ 책 소개도 아니구,
그저 다른 분들이 집어 주신 책들 중에서...될성싶은 것만
(이럼 안되는데, 역시 안목 높으신 분들이 많아서욧!)
추렸다고 봐야져~

여긴 오늘도 눈이 왔어요..
시루스님두 감기 걸리시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