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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기본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우선 기본기가 탄탄하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까지 한 치의 틈을 허용치 않는 저자의 변함없는 의지와 힘을 실어주는 텍스트 밀도는 나같이 국가나 시민, 진보와 보수의 개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정치 문외한에게는 아주 유용할 듯하다. 꼭 정치적인 시각이 아니더라도 아주 오래전 윤리 교과서와 대학 교양과목에서 스쳐 지나간 분들을 민망하지 않게 조우하도록 자리를 마련했으며 만남을 통해 새로운 끄덕임의 시간을 주었다는 것도 내겐 의미있었다. 국가론 듣다보면 철학과 윤리 및 경제, 사회학을 엿듣게 되기 마련이니까. 개념을 말하는 인문서적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니까, 요즘 세간엔 ‘**는 무엇인가’ 식의 막연하고도 직설적인 질문에 ‘나는 **이다’식의 분명하고 정직한 답변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무엇이든 그 본질을 따져 묻고 해당하는 것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마치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공통의 과제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즉, 질문에 거론될 주제와 답변으로 언급될 역할은 곧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누구든 자주 질문하고 답으로 거론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화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을 물을 것인가는 어떻게 답할 것인 가만큼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총명한 질문이 곧 훌륭한 답으로 가는 길임을 말하는 책이다. 무릇 교육은 정답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내 세대는 ‘질문 하시오’라는 교사의 상투적인 인사에 ‘그런 건 없습니다’하며 정중히 고개숙여 화답하였다. 국가가 무엇인지, 어떤 국가가 좋은 국가인지, 좋은 국가의 시민은 어떤 사람인지, 감히 질문할 수 없었다. 아니 질문하기 이전에 궁금하지도 않았고 궁금할 수도 없었다. 이미 묻기 전에 친절히 정해진 정답을 알려주어 우리는 그것을 외우며 그런 줄 알면 되는 것이었다. 사람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교육은 무엇인가. 철학은, 과학은, 종교는, 경제는....무엇인가에 질문한다는 것은 그들이 열심히 적고 가르쳐준 모든 것들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는 뜻과 같았다. 국가처럼 절대적이고 최상위에 위치한 개념은 더더욱 당연한 (답으로 무장된)질문에 속했다. 국가를 모르고 어떻게 시민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국가에 속한단 말인가. 그러니 우리는 국가가 무엇인지 이미 아는 사람이어야 했고, 그랬기 때문에 결국 국가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학창시절 오답노트를 열심히 외운 사람일 것이다. 결론은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은 질문할 내용을 모른다는 것이고 심지어는 이미 답을 아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역으로 내가 국가를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깨우쳐 주었고 그동안 몰랐던 나를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나를 질책하기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위로까지 더해주는 미덕을 가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알지 못하니 관심이 생길 리 없는 (나같은)정치 문외한이 이 책을 집어들 이유는 희박하다는 것이다.(국가가 무엇인지 알아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 다수가 그다지 부러 시간내어 알고 싶은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내가 아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그들은 대부분 보수이기 때문에) 확신하건대, 이 책의 저자를 잠시 잊어버린다면(?) 나 같은 꼴통 보수는 지금부터 국가를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이 책은 절대 보수를 뭐라 하지 않는다)

  먼저 이 책의 저자 유시민은 친노 대표주자로서 진보, 개혁진영의 국민 참여당 대표이다. 얼마 전 김해 재보궐 선거(4.27)에서 야권 단일화후보를 내세웠으나 (보기 좋게)패배했다. 대선을 일 년 반 남긴 이 시점에 야권 대통령 후보 선호도에서도 민주당 손학규에 밀려 차기주자로서 그 행보가 영 불안한 상황이다. 최근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향후 진보진영의 통합구상을 위해 칩거에 들어갔다고 한다.(혹시 칩거 중에 독자 리뷰를 보지 않을까 싶지만) 그동안 내가 가져온 유시민에 대한 선입견은 한마디로 ‘말빨’ 좋은 (철 안든)정치인이었다. (물론 그의 책은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채로) 유시민은 이 책의 후기에 글을 쓰면서 되도록 정치인의 시각을 가지려 노력했고 정치인으로서 글쓰기를 대 국민과의 소통으로 인식하므로 이번 국가론을 탐구하는 자신의 책에 스스로 긍정적인 의미성을 부여했다.(대견한 일을 했다고 느끼는 듯) 알려졌듯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2009년 용산참사’였다고 밝힌 바 있다. 스스로 학자나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악마성이 내재한 국가폭력’과 관계를 맺고 ‘그 폭력이 가져오는 특수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하는 현역 정치인으로서 국가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정치인인 자신의 역할을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고서는 정치인생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꼈던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은 (국가를 알려야 할)일반시민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국가를 인식해야 할)유시민이라는 대한민국의 대표 진보정치인 자신을 다지는 일종의 자격 논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인으로서 자기검열의 과정이라고 할까. 그런데 정치인으로서 솔직한 소망을 담았다고는 하나 외려 정치색이 느껴지지 않아 이 책은 그가 가진 (독자와의)인문학적 소통의 발판을 더욱 굳건히 해주는 밑거름이 될 듯하다. 정치인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지만 이 책에서 느낀 문학인 유시민은 논리(전개)의 속도감, 밀도의 일관성, 보편적 설득성이 뛰어나다고 느껴졌다. 자신도 배우면서 그것이 남에게 가르치는 것이 되고 끝내 상대를 설득하는 집요함도 가졌다. 한 권의 책을 독서했다기 보다 국가라는 과목을 이수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그는 유려하고 화제성있는 ‘말빨’의 근본에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글빨’까지 소유한 정치인이었다.


1. 국가란 무엇인가

 
이 사람이 질문을 가지는 순서를 보자. 용산참사를 보면 절로 국가는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로 인해 곧 국가가 할 일을 했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건 훌륭한 국가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우리는 당연히 훌륭한 국가에서 살고 싶다. 훌륭한 국가 없이는 훌륭한 시민도 없고, 그렇담 행복도 없을 것이니까. 그런데 훌륭한 국가에 대해 말하려면 결국 국가의 본질과 역할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탄생의 경위 및 배경이다. 이것이 아니다 말하고 싶다면 무엇이 이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야 이것이 아닌지 당신도 끄덕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하니 당신이라는 사람이 질문하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고 묻는 격이다.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국가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행동하는 국가’이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은 그가 바라는 바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 책의 처음은 친절하게도 국가를 말하는 이론을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목적론적 국가론으로 구분해 설명한다.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전제 군주제를 이상으로 꼽았던 홉스와 그의 매뉴얼로 보이는 마키아벨리의 통치술은 분단이후 국가주의 국가론을 신봉해온 대한민국의 국가발전사의 배경이 되었다. 사회질서유지와 국가안전보장을 중요시하는 ‘이념형 보수’는 바로 국가주의 국가론을 토대로 한 것이며 한반도 분단체제가 계속되는 한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세력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슬프지만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한국전쟁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탄생의 시작이었다는 그의 해석은 자명하면서도 뼈아픈 현실이었다.

  그는 평화주의자 러셀의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2010>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국가는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무서운 존재로 군림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 국가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라도 건강한 남자들에게 목숨 걸고 전투에 나서라고 명령하며, 국가의 의도와 견해에 어긋나는 의견을 내놓는 사람을 배신자로 몰아 박해한다. 자국민을 살해하는 사람과 다른 국민 살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모두 처벌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국가는 때로 국민에게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한다. 국가는 때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폭정을 성공시킴으로써 그것이 폭정임을 은폐한다. ” 33p

“ 어른들은 국가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목소리를 낮추었다. .... 국가와 권력자를 큰소리로 욕했다가 구속되고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나더러 자기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를 아침저녁으로 외치게 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했더니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가두어 놓고 두 달 동안 매를 때렸다. 학적부에서 내 이름을 지우고 교도소로 보냈다. 나는 조국을 사랑했지만 대통령들은 나 같은 시민을 미워했다. 나도 대통령들을 증오했다. 때로는 권력자를 미워하는 것인지 국가 그 자체를 미워하는 것인지 나 자신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국가는 그런 것이었다. 그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홉스의 전제군주와 같았다. ” 34 p


  이에 반해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국가론은 비슷하면서도 돌아서면 난해한 구석이 있었다. 국가는 ‘세속의 신’이 아니라 ‘공공재 공급자’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선이 아니라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법치주의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가장 인상깊었다. 내가 알고 있던 법치주의와 정반대였음을 이 책을 통해 깨우쳤달까. 법치주의는 법과 형벌로 국민(통치 받는 자)을 다스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 일부 권력자들의 심각한 오용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라는 개념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법률과 형벌로 국민을 다스리는 데는 어떤 주의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권력 그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필수요건으로 한다. 법을 만들지 못하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만든 원칙이다. ” 50 p


  법을 넘어서는 군주의 권력행사를 막으려고(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것인데 나는 그 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처단하려고 만든 것이 법치주의인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안전과 평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주의론적 피해의식에서 발생한 자발적 복종효과였다.(는 생각이다) 이보다 좀 더 급진적인 자유국가론을 펼쳤던 루소는 ‘법치주의에서 이탈한 독재정권과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쿠데타의 정치적 정당성을 모두 부정’하였는데 루소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4.19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은 모두 법치주의를 위반하고 법위에 군림한 정부에 대한 정당한 행사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 밖의 밀과 소로의 자유지상주의는 철학적으로 다가왔고 그런만큼 그 뿌리가 깊다고 느껴졌다. 톨스토이, 간디, 마틴 루터, 만델라가 그 길을 따라갔다는 대목에서 ‘어떤 이론의 정치적 성격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이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땐 혁신적인 진보이론이었던 것이 지금은 외려 국가가 해야 할 책임을 줄여주고 개인의 능력에 힘을 실어주는 보수적 이론이 되지 않았는가. 고전적 자유주의는 물론이고 자유주의 좌파, 진보자유주의, 신자유주의 모두 생소하기만 하던 내 수준에서 이 책은 기초부터 흐름과 맥락을 짚어주는 친절함이 있었다.

  반면 한때 지구의 절반을 차지했던 마르크스주의는 이 책에서도 여전히 국가를 가장 매력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국가의 소멸과 개인의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전망을 ‘전제정치의 억압하에 살았던 청년 마르크스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라 부연했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심각학 부작용의 하나로 정치무용론과 정치적 냉소주의를 꼽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엇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꿈꾸는데 이 사회혁명이 실패하고 좌절한 상처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에 관조적인 자세를 유발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향수가 가장 깊게 남아있는 곳은 언론, 출판, 학계이며 그들은 시민의 자유, 인권보장, 언론자유같은 문제에 ‘실질적 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정작 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성향을 보인다고 그것은 좌절한 인류의 꿈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같다고 말한다. 유시민은 이렇듯 국가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 주의를 살펴본 후 자신의 진보정치에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국가론을 구축하기 위해 목적론적 국가론을 빌려온다. 이는 모든 국가론을 섭렵한 후 내려지는 꽤 합리적인 결론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는 길에 최우선 가치로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배우고 익혔던 국가관이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나는 밥먹듯이 반공 포스터와 표어를 지어대던 그 시절, 1970년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국기 게양대 앞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처지였다. 나에게 국가는 곧 대통령, 각하는 아니었을까.


2. 누가, 어떤 사람이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가 

 
그런가 하면 그는 도대체 시대에 따라 변하기만 하는 그 국가를 누가, 어떤 사람이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대답을 좇아가며 각자 질문에 숨은 함의에 도달하도록 논리를 펼쳤다. 플라톤과 맹자, 트라시마코스의 입을 빌려 왕의 자격을 전했지만 궁극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답이 정답일 수밖에 없는 최초 질문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 질문은 이미 최악의 인물이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고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 즉,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만에 하나 최악의 인물이 국가를 통치하더라도 악을 최소화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명시화,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시민은 이 해법으로 민주주의를 제시한 포퍼를 예로 들었고 법치주의에 대한 오해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설파한다. 이 사람이 오해를 지적하는 방법은 대체로 겸손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국가를 잘 통치할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과 정당을 국민이 선택하는 제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하지만 어쩌다 히틀러처럼 최악의 인물을 민주적으로 선출한 사례도 숱하게 많으며 누구나 공평하게 선거한다고 유능한 사람을 뽑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민주적이었다고 꼭 옳거나 좋을 수는 없다는 말씀.

“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을 잘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 106p

  우리는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똑같이 역으로 훌륭하고 지혜로운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없다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 최대의 선을 행하게 하는 장치라는 오해를 하지 말라는 저자의 충고는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의미심장한 실용적 메시지였다. 이 말은 어쩐지 최선의 인물이었지만 권력분산과 상호견제로 선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었다. 또 비록 최악의 인물을 뽑아 악을 저지르고 있는 현 정부를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잘 발전시키는 것이지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짜피 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었다.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그의 결론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

" 이렇게 생각하면, 뽑아 놓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좋지 않은 제도라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악을 저지른다고 해도 위축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언제든,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 이 가능성을 말살하면 독재정부가 된다. " 108 p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최악의 인물을 선택한)현 정부에 너무 실망말고 그럴수록 다음 선거를 포기하지 말고 주권을 행사해 어떡하든 정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최선의)노무현이 되나 (최악의)이명박이 되나 (대한민국의 분단체제에서는)대단한 사회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중요한건 지금까지 어렵게 구축해온 민주주의를 다 같이 발전시키고 더욱 성숙한 사회, 정의로운 국가에서 앞으로의 행복을 찾아보자, 뭐 이런. 그러니까 역으로 너무 한 인물에 목메고 다른 인물을 배타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말이다. 나는 유시민의 이런 솔직함이 신선했다. 논리를 만들었다기 보다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발명아닌 발견은 찰나의 직관이 아니라 고민의 시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러니까, 누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그에게)운명이 아니다. 운명은 누가 되든지 포기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속, 발전시켜야 할 그의 사명인 것이었다.


3.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국가를 공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가치가 애국심인데 저자는 애국심이 과연 선한 감정이고 장려할만한 가치인지 질문한다. 솔직히 내 세대는 애국심도 시험을 보는 마지막 세대였기에 애국하라는 말은 신물이 나는 선생님 잔소리 쯤으로 생각된다. 마치 지금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더 공부하라는 부아치미는 말씀만 같아 영 곱게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학창시절 여름방학, 공포영화를 보러 가서도 영화 시작하기 전에 모두 기립해(행여 앉아 있기라도 하면 그 눈총을 견딜 자가 누구였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던 기억은 코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우리는 모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랬기에 무슨 군가처럼 6.26 기념일 노래를 고무줄할 때도 힘차게 불러 제꼈다. 체육대회날 응원가마저도 ‘잘 살아보세’였다.

  저자는 이 강요된 애국심의 이면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혐오감이 숨어있음을 꼬집는다. 애국심을 허위라 여겼던 톨스토이는 국가는 배타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애국심 역시 배타적, 파괴적이며 사악한 감정이라 말했다. ‘애국심은 어떤 대상을 위해, 즉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민족 집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려는 의지’라는 피히테의 견해는 국가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개념이라 말한다. 그는 ‘애국심은 어느 민족 또는 국가에 귀속되어 함께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르낭의 견해를 선호했다.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  137p

  르낭의 애국심을 발전시켜 정리한 저자의 애국심이다. 진보측에서 애국심이라는 단어를 기피하면 결국 보수측에 그 독점사용권을 허용하는 일이므로 정치인인 자신은 이러한 애국심의 의지를 북돋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애국심을 정의하는 구절 속에 결국 국가와 삶이 사이좋게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핵심에 국가가 버티고 있고 그와 연결된 시민의 삶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분명한 것은 타의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애국심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의지가 빈약해 국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인데 유시민에 의하면 의지를 북돋는 것은 정치인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서(의지를 북돋을 일이 없으므로) 애국심이 투철하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기본적으로 애국심에는 정치와 국가, 그리고 국가운영자의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뜻이다. 애국심 하나로 뜻하지 않게 점진적으로 애국(정치관심 및 참여)을 유도하는 그의 정치전략이 나는 나쁘지 않았다. 결국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이라기 보다 고집스런 이성이 아닐까. 감성에 호소하는 이념이 아니라 논리로 설득해야 할 전략이 아닐까.


4. 혁명이냐, 개량이냐

 
국가의 질서를 바꾸는 방법으로 근본적인 사회혁명과 점진적인 개선에 대해 질문하는 장이다.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 혁명주의와 개량주의 어느 것이 효과적인가?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저자가 영리하다 생각된 것은 바로 질문하는 방법이었다. 이 질문의 답은 둘 중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이 틀렸음을 말하기 위한 질문이다. 두 가지를 비교한 끝에 그가 제시한 답은 지속적으로 개량하지 못하면 한 번에 혁명으로 간다, 이다. 그러니까 혁명하는 꼴 안보고 싶으면 천천히 개량이라도 하라는 것을 주장하려고 혁명과 개량중 무엇을 선택할래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차선을 답하기 위한 최선을 질문하기. 이때 남겨진 차선은 궁극에 떠밀려 답하는 것이므로 여지가 없다.

  저자는, 인류역사상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정하다고 만인이 인정하는 사회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을 기억하자고 했다. 이것이 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한계적 배경이다. 그런데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을 따지기 전에 혁명이 일어나는 시점은 언제나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민중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한 후 라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중국혁명이 일어난 곳에선 모두 국가권력이 바닥으로 추락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국가조직이 붕괴한다고 국가가 소멸된 것은 아니고 사회혁명으로 탄생한 국가는 구체제보다 더 능동적인 힘을 발휘했다. 혁명의 순기능이다. 그렇더라도, 톨스토이는 혁명이 권력기관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혁명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면 ‘혁명으로 탄생한 더 강한 국가는 혁명이 삼켜버린 옛 국가보다 언제나 더 정의로운 국가였을까?’ 정의로와 지는 것도 아닌데 혁명을 해야 하는가하는 원론적 질문에 저자가 제시한 철학자는 카를 포퍼였다. 혁명이 초래한 처참한 결과는 대개 숫자로 대변된다. 이에 포퍼는 ‘점진적 공학’이라고 이름붙인 사회개량의 길도 혁명의 다른 방법이라 제시한 것이다. 사회 근본적인 혁명은 폭력과 악을 초래할 소지가 많으므로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개량의 길이 점진적 공학이라는 것이다. 포퍼의 논리가 맞지만 저자는 혁명과 개량의 길은 양자택일 할 수 없다는 논리로 포퍼의 허점을 지적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폭력혁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인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점진적 공학으로 악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혁명이 일어난나는 것이다. 즉, 개량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개량의 길이 막혀 있음이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에 사회혁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라는 것.

  우리가 잘 아는 87년 6월 항쟁은 집회와 시위를 통해 국민의 요구가 드러난 상황에서도 변화의지가 없자 국민들은 폭력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을 공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집권세력은 민주화와 직선제 개선요구를 받아 들였다. 국민들은 평화적, 합법적으로 독재를 종식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더 이상 거리로 나오지 않았고 급진적 사회혁명이 아닌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마르크스가 유난히 혁명을 좋아해서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당시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이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의 길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 봉쇄된 막다른 길에서 사회혁명의 길이 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는 논리의 방증이다. 그러므로 전체주의를 피하고 싶다면 혁명을 외면할 생각을 하지 말고 부지런히 점진적 개량을 시도하라는 말씀이다. 그것만이 사회혁명의 문을 잠그는 길이며 그 곳에서 마르크스의 길이 열릴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혁명을 외면하게 되면 혁명이 일어난다는 논리는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5.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진보는 보수와 어떻게 다르며 진보정치란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 지금부터가 저자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방향이 담겨있는 질문이다. 나는 사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잘 모른다. 그저 운동권은 진보이고 여당은 보수이다, 수준에 지나지 않으며 교육과 환경에 의해 진보를 죄악시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시절 내 세대에서 노란 저금통을 들고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때도 난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감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좌절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나는 정부가 바뀌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쪽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뉴스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나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없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사람들이 많이도 미웠다. 그래서인지 내가 느끼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진보는 내가 아는 진보보다는 보수적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진보는 진화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전략일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든지 진보를 말하기 위해서는 보수도 같이 말해야 한다는 것. 진보를 규정하면 자연 보수도 그 의미가 정해지는 꼴이었다. 사실 보수쪽 사람들은 굳이 보수의 의미를 애써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보수의 특징이다. 언제나 의미를 규정짓고 문제점을 찾아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쪽은 진보였다. 보수는 뒷짐지고 변화하는 진보의 추이에 따라 대안을 마련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인상깊게 느낀 건 이 책에서 진보를 규정하는 과정이다. 진보의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이 꽤나 보수적이었다는 것, 어쩌면 현실적인 진보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보수보다 고전적이고 학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진보를 추진하고 체현하는 과정과는 다른 이야기다) 유시민은 한때 역사교사로도 재직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최근에 진보진영 인사들은 (진보와 보수의 갈림길에 놓인)내 세대에 먹히는 베스트셀러들을 내놓고 있다. 그들에게서 나는 우연히도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초상을 나란히 발견한다. 유시민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은 진보집권이 현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대안이라 여기는 듯하다. 반가운건 이러한 책들이 학문적 각성과 함께 현실정치에의 실패를 교훈삼아 더 이상 계급혁명이나 운동권 세력이 아닌 대안적 집권세력으로서 (세대 구분없이)일반인에게 밀도높은 설득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유시민은 그런면에서 자신의 할 일을 지략적으로 수행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였다는 결론이다.

  먼저 진보는 당위적 요구나 지향이 아니라 ‘사회와 삶의 방식, 사유습성의 실제적이고 불가피한 진화’를 의미한다는 베블런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보수적이라는 말씀이다. 인간 삶에서 보수주의는 특정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 즉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보수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계속 보수로 남는지 중간에 진보로 바뀌든지 하는 변화에너지 이동의 문제라는 것이다. 보수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베블런의 주장은 보수인 나로서는 고마운 개념이다.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김상봉의 주장에 저자는 그렇다면 김상봉의 진보는 ‘사회주의’라고 해석한다. 진보를 제도적 문제가 아닌 인간적 문제로 볼 경우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가는 과정’이라는 이남곡의 견해는 그러한 주의가 정치와 결합해 나타나는 것이 진보정치라는 저자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저자가 가장 선호하는 정치에 관한 답변은 막스 베버(1864-1920)였다. 베버에 의하면 정치는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므로 저자는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진보주의자는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려 하는가? 국가를 직접 운영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 국가운영에 어떤 영향을 어떻게 주려고 하는가? 그들은 국가가 무엇이며,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 199p

  저자가 꼬집는 것은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국가주의 국가론은 거부하고 자유주의 국가론은 혐오하면서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는 비현실성만 개탄하는 이른바 끝없이 방황하는 행보였다. 진보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보다 진취적인 국가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급기야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문장,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진작에 더 도움이 되며 더 정의로운 사회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는 독서대중을 향한 보편성에의 호소는 이 책에서 느낀 진솔함이었다. 정의를 언급하고 싶었던 저자의 목적은 바로 정의가 국가의 목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국가관을 진보정치 국가관에 밑거름으로 삼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훌륭한 국가, 선을 행하는 국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 자유주의 국가론에 목적론적 국가론을 결합해 저자는 진보주의 국가론을 ‘미덕국가’, ‘선행국가’로 이름하자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권력의 남용과 법의 악용을 막기 위한 제도이지만 이제는 국가가 선을 행하게 하자는 것이 진보정치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다음, ‘사회적 연대의 기능을 독점하는 기능국가’로서 복지국가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즉, 가능한 많은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제공할 것을 요구하도록 앞장서는 것이 진보주의자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보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제도와 정책의 문제인 복지국가의 실현이다. 복지는 진보와 보수의 밥그릇 싸움이 아니고 이념투쟁도 아니고 제도적 문제다. 이는 곧 환경과 제도의 변화를 원하는 진보의 본질이기도 하다. 저자는 보수적 인간에서 시작해 진보로 이동하는 사회과정을 충분히 설명하며 이렇듯 진보의 중요성을 복지사회추구와 동일선상에 놓고 결론지었다.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이것의 답을 정리하면 진보정치는 선을 행하는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이고 진보정치는 복지국가로 바꾸는 정치이다, 진보는 이상이고 꿈이었다.


6.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진보정치가 국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하려는 선은 어떤 것인가? 진보주의자는 어떤 선을 실현하라고 국가에 요구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점점 마지막 결론을 향하는 이 장에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적어본다.

  (그동안 대한민국이라는)국가라는 집단은 (다양한 종류의)악마와 손을 잡았으므로 양심이 없고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집단이었다. (노무현)대통령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국가 정의를 위해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나같은)정치인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시장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고 소득과 분배는 여전히 불평등하다.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진보정치가 필요하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기존의)진보정치는 광신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내가 언급한)자유주의 기풍의 철학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해야 한다.


7.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이 책의 마지막은 칸트와 막스 베버이다. 진보정치인의 자질과 윤리를 말하기 위해 그는 다음의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최후의 자격검증에 해당하는 윤리 강령이다.

  국가권력이 선을 실현하는데 쓰이도록 하거나 적어도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정치인이 지켜야 할 윤리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어떤 도덕법이 요구되는가?

  칸트가 말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법은 ‘자율적 인간’을 모델로 한다. 여기서 ‘자율’은 욕망대로 흘러가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부여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을 말한다. 이성적 인간은 곧 자율적 행동을 하는 존재를 말하고 자율적 행동은 도덕적 법칙에 의거한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옳은 행동이라 생각하는 의무감이요 동기이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도덕을 지키면 행복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다. 동기가 순수하고 도덕이지 않기 때문에. 칸트의 도덕법은 공동체의 선을 자발적으로 추구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윤리의식과 겹쳐진다는 저자의 해석은 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보주의자들의 행동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언명령’에 해당된다고 느낀다. 칸트의 도덕법은 모든 인간에 해당되지만 특히 정치인, 그중에서도 진보주의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인데 어짜피 동기만 우선시 할 경우 그 동기 때문에 참극을 불러올 수 있다는 한계를 알면서도 굳이 칸트를 베버위에 놓고 도덕법의 체계를 마련하려는 모습이 약간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은 현장이 아닌 데스크에서 주로 논문쓰는 연구원들이 잘 사용하는 수법인데 뒤에 나오는 베버의 논리를 더 부각하기 위해, 혹은 베버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불러오는 이론의 희생이다. 실은 베버와 비교하려고 가져왔으면서 기본이라고 하는 점이 마음에 안들었달까. 이 책에서 유일하게 글감을 위해 잘 배치된 칸트가 철학이 아닌 도구로 전락한 느낌이 들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잘 희생된 칸트 덕에 베버는 이 책에서 가장 빛났다. 진보주의자는 대개 신념윤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요시 한다. 신념윤리만 중요시되고 베버의 책임윤리가 결여된 가장 극단적인 사건으로는 한국전쟁이었다 말한다. 저자는 신념윤리를 지키면서도 결과에 책임을 지는 정치를 이상으로 꼽았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는 행동의 예견할 수 있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태도이다. 칸트라는 이상에서 베버라는 현실을 인식하자는 뜻이었다. (미안하게도)나는 진보자유주의 연합정당과 같은 야권연합의 필요성이 바로 베버의 책임윤리를 따른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책임윤리를 따랐기 때문에 연합이 된다면 좋을 일이지만 우선에 연합이 먼저고 그 다음에 책임은 나누어 지자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말한다. 연합정치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정치인의 책임의식이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연합정치가 책임의식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식이 있어야 연합정치를 할 수 있다는 말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진보주의자들이 정치권내에서 입지가 강화되고 영향력이 커져야 소수 및 사회적 약자도 잘 살 수 있는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논리는 더 이상 진보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범야권이 연대하면 정권교체를 할 수 있다는 논리 역시 너무나 자명해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이명박 정부는 재임 중 보수세력의 영구집권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그 결과 합리적 보수들은 정의와 복지를 내세운 진보정당을 언제라도 지지할 준비를 끝마쳤다. 하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진보세력이 집권정부가 되더라도 또 노무현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언제나 노동운동의 전통기반이 없으며 지지기반이 취약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권교체후 진보의 추친 역량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보수측만의 기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의 선거에서 젊은 층과 여성층의 투표율은 점점 증가하고 있고 급변하는 시국에 일 년이라는 시간은 (알 수 없는)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이 책을 진보진영의 선거청치의 프레임에 속한 책이라고는 보지 않았지만 책을 덮고선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음을 통감한다. 마치 그에 적절한 답이라는 듯 유시민은 책의 마지막에 자신의 의지를 사인했다.

“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고 믿는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 ” 283p



기본적 의무란 무엇인가

 
이 책을 집필한 후 저자는 국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게 되었다 말한 바 있다. 나는 처음부터 국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알 수도 없었다. 진보가 무엇인지 깊숙이 알지 못했으니 보수가 무엇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 책은 역으로 보자면 향후 진보주의 연합정치를 정당화하고 진보진영의 대표 정치인으로서 그것을 대국민에게 설득하기 위해 처음부터 국가와 국가 운영자 및 애국심, 혁명의 의미, 정치인의 도덕을 정의내리는 작업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이론적이고 고전적이며 학구적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국가를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고 읽어 가면서는 유려한 필체의 논문을 만나는 느낌이었고 나중엔 순수 지식을 배운다는 즐거움도 느끼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정의는, 전쟁,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국가와 동일한 문제라는 생각이다. 국가가 회복되어야 국민이 회복된다. 그래야 훌륭한 국가도 그 속에서 훌륭한 국민도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살면서 국가가 무엇인지 성찰하는 일은 한국인으로서 피해선 안 될 의무에 가깝지 않을까. 비교적 쉬운 방법의 의무이행의 한 단계로서 이 책은 각자 의미있는 시간을 제공하리라 믿는다. 대선을 향한 그의 다음 행보가 퍽이나 궁금해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마도 나는 이 책의 모든 잣대로 그를 평가하게 될 것 같다. 하이에크 식으로 말하면 연합이라는 하나의 가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는 정의나 평등이라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다른 전체주의 사회와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부디 연합이 그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얽매는 유일한 덫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 비타 악티바 시리즈 중 <복지 국가, 정원오(2010)>와 저자가 인용한 버트런드 러셀의 책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Why Men Fight (2010)>을 추천한다. 악티바 시리즈는 작년에 읽었는데 얇으면서 정확하다. 러셀의 책은 아직 접하지 못했는데 꼭 읽고 싶다.


이 책에는 복지국가를 말하기 위해 원형국가, 발전국가, 민주국가의 국가 유형별 발전과정이 상세히 담겨있다.

이 책에서도 베버는 국가를 정의한 인물로 인용된다. 국가는 “독점적 강압력, 통일적 권위, 그리고 제반 법률적, 행정적 장치를 기초로 일정한 영토와 그 영토 내 주민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정치 조직 혹은 공동체”라는 것. 베버가 말하는 국가는 초기국가로서 원형국가가 가지는 최소한의 요건을 잘 설명해준다. 이 책의 끝에는 결국 우리도 미약하지만 복지국가라는 결론을 내린다. <국가란 무엇인가>의 제 7장에 비스마르크의 복지국가론과 함께 복지정책의 간략한 설명이 진부하고 부족하다면 이 책은 복지의 수준높은 대책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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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에 보면 애국심 뒤에 숨은 배타적 증오심을 꼬집는 구절이 있다.

“ 좌절된 도덕성의 관점에서 볼 때 형법의 미덕은 도덕성으로 위장한 소심함 때문에 자연스러운 형태로 표출되지 못하는 공격적인 충동을 발산할 통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전쟁 역시 똑같은 미덕을 가진다. 형법은 아무리 증오심이 끓어 올라도 이웃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한다. 하지만 약간의 선전활동만으로도 이런 증오심을 다른 민족에게 돌릴 수 있다. 다른 민족에 대한 살해 충동은 애국적인 용맹성이 된다. ” - 변화하는 세계의 새로운 희망 77p

왜 사람들은 국가에 순종하는가? 하는 질문에 이 책은 해답을 제시할 듯하다. 러셀은 ‘국가의 폐해를 야기하는 주요한 원천은 국가가 권력을 주요한 목표로 삼는다는 데 있다’고 했다. 유시민은 ‘국가는 때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폭정을 성공시킴으로써 그것이 폭정임을 은폐한다.’는 러셀의 문장을 두 번이나 인용했다.

“ 이처럼 국가의 과도한 권력은 주로 전쟁과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는 내부적인 억압을 통해서 형성된다. 국가의 과도한 권력은 현대 세계에 고통을 안겨주는 주요한 원인이자 사람들의 정신적 성숙을 저해하는 무력감을 낳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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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6-02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을‘말빨’ 좋은 (철 안든)정치인이었다라고 묘사한 부분에서 웃었습니다^^ 어쩌면 정확한 묘사일수도 있다는 생각예요~

가연 2011-06-04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괄호 안이 포인트군요ㅎㅎ 저도 비슷하게 느꼈었는데ㅎ 저자가 작정하고 썼는지 생각보다 너무 술술 읽혀서 깜짝 놀라기도 했고.. 그래도 저로서는 한편으로는 저자에 대한 선입견이 생각보다 많이 가셨던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글빨ㅋㅋ에 감탄하기도 하구요.. 보통 정치인이 이런 책을 내면 마이너스가 되기 쉬울 것 같고 플러스가 되기란 정말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뭘 써도 그의 정치적 행보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으니... 근데 적어도 저에게는 괜찮네,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더라구요.
 
온워드 Onward -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의 혁신과 도전
하워드 슐츠 & 조앤 고든 지음, 안진환.장세현 옮김 / 8.0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가치 ‘달성’자   보다  가치 ‘수호’자

  나는 오늘도 커피를 마신다. 어제도 마셨고 내일도 마실 것이다. 어쩌다가 내가 커피와 일상을 시작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건 지금 이순간도 커피와 함께 글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역시 커피를 찾을 것이라는 것이다. 서머셋 모옴은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고 했다. 이를 본 하루키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며 부연했다. 두 명의 소설가가 커피를 매일 마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책을 덮고 두 사람이 말하는 내가 ‘매일’ 하는 것의 ‘철학’을 떠올리게 된다. 어제와 같이 별 고민없이 습관적으로 커피를 내리고 아침을 시작하는 내 삶의 방식과 그것의 의미를 새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무릎을 탁치며 한마디를 읊조리곤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온워드’... 전진, 앞으로...? 상투적이지 않으면서 단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한 이미지가 연상되지도 않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매력적인 단어, 이 책의 제목은 어쩐지 커피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한 모금이 목으로 넘어가며 입안에 그윽한 향이 퍼지는 느낌은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에 천천히 시동을 거는 일과 같았다. 그랬다.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커피를 마셔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커피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자 ‘온워드’는 한 잔의 커피처럼 천천히, 하지만 꽤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살면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그다지 행복한 시간이라는 생각은 자주 하지 않았는데 오늘부터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틀림없이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자 신문에선 ‘커피 값이 오르고 있다’는 통계와 함께 미국의 스타벅스에선 7월부터 커피값을 인상할 것이라는 기사(5.26, 매일경제)가 눈에 띈다. 대체로 이상기후로 인한 커피 생산량 감소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데 오늘따라 이 소식은 나를 슬프게 한다. 우리가 도시에서 살아온 주거 이력은 얼추 카페인 축적의 이력과 같지 않은가. 문명의 발달로 파생한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바로 이 도시의 급격한 발달이 커피의 생산을 줄어들게 하는 원인이라면 이토록 엄청난 아이러니도 없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도시에 살면서 도시를 원하고 도시를 포기하지 않을수록 커피가 줄어든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원하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기에 커피는 점점 비싸질 것이고 시작과 달리 커피는 우리 생을 옥죄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도시와 커피를 동시에 포기하지 않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혹 커피는 도시 삶에 대한 따뜻한 보상이 아니라 도시를 선택한 자가 감당해야 할 차디찬 댓가는 아닐까. 도시에 살면서 누리는 커피 한 잔의 여유, 그로인한 행복이 아니고 도시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할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세금같은 것. 자동차를 굴리기 위해서는 점점 비싸지는 휘발유를 끌어안는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이런 저런 생각을 하자 ‘온워드’는 휘발유처럼 언젠가 다가올지 모르는 커피전쟁의 시대, ‘on war(전시상태)’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온한 일상을 의미하는 온정어린 키워드 ‘온穩 word’라 여기기에 우리의 오늘은 어두워 보였다.

  이처럼 커피의 중독성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스타벅스라는 대형 글로벌 기업의 상업적 이미지 때문에 처음부터 이 책이 긍정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저 여느 대기업의 성공전략이나 CEO의 성공법칙을 말하는 서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처음 접한 ‘온워드’도 보이지 않는 특수 전략의 암호 정도로 느껴졌달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만이 가지는 독특한 브랜드의 매력처럼 ‘온워드’라는 단어의 창의적인 느낌만은 의문을 가질 만했다. 대단한 비밀같지는 않지만 무언가 의미있는 개념이라 주장하는 듯해 결국 스타벅스의 전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온워드’의 컨셉이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책을 덮고 난 지금의 ‘온워드’는 다행히도 내가 가진 여러 편견을 전복시킬만한 내재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책은 성공이나 신화, 인물이나 법칙을 말하는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한 저자는 스타벅스 신화의 주인공이 맞았지만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세간에 유행하는 특별한 전략들과는 달랐다. 그는 시종일관 자기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을 무던히도 설파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 책이 지난 남다른 가치이자 유일한 의미였다. 다만 평생 품어온 가치가 커피라는 꿈에 담긴 사람일 뿐이었다. 만약 그가 커피가 아닌 다른 장르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했다면 마찬가지로 평생 그 일을 같은 방식으로 수행하였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커피를 말하는 책이 아니고 커피를 통해 발견한 자기 생의 가치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사수한 노력, 그 쉬지 않고 달려온 시간을 말하는 책이었다. ‘가치 달성이라는 목표’를 자신있게 말하기보다 ‘가치 수호에의 과정’을 담담히 전하는 그의 모습이 나는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일등의 목표를 가지고 일등을 이루는 것 보다 일등을 소원하던 처음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 알게 된 까닭이다. 일등을 하고 난 후에도 변하지 않는 일등가치, 그것이야말로 일등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임을 일등에서 내려온 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스타벅스가 커피 업계의 일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일등이 되려고 몸부림 친 것이 아니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무엇보다 최고로 여기는 마음가짐에 있었다. 그 최고의 가치가 실현되는 현장의 진행형 이야기, 그것은 일등이라는 성과를 낸 후 작성하는 결과 보고서와는 다른 문제였다. 내가 이 책을 통해 감동받은 한 가지 분명한 가치는 바로 하워드 슐츠라는 가치수호자의 수호정신이었던 것 같다.

’개방’형 폐쇄공간   또는  ’소음’적 묵음공간

 
이 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의 성장가도를 달리던 스타벅스가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시기에 전격 CEO 복귀 결정을 한 후 어떻게 스타벅스를 다시 1인자의 위치로 올려놓게 되었는지를 되돌아보는 하워드 슐츠의 자전 기록집이다. 글로벌 기업의 창업자나 CEO가 말하는 기업이념과 경영철학, 특화전략들은 사실 CEO가 아닌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괴리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기업가로서 너무 인간적인 개인 경험만을 강조하거나 보편적인 인류애에 호소한다고 느껴질 경우 저자가 주장하는 가치는 자칫 비현실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 책은 그 전문성과 대중성의 사이를 자신들이 전파하는 제품, 바로 커피 한 잔의 가치로 공감을 유도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리드하는 전략이 미덕이 되는 에세이의 특성도 묻어났다. 딱딱하고 어렵고 생소한 용어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최신의 신조어들도 커피라는 향기를 얹어내면 이상하게도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마음을 열게 되는 친화력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경영자의 지나친 겸손도 과장된 칭찬도 부담스런 강요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가진 전부의 기술로 최선을 다해 내린 한 잔의 커피처럼 정직해 보이는 문체와 식기전에 신속히 전달하려는 결단력의 문장들은 번역체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안정감과 신뢰를 제공하고 있었다. 분량상 2년 여 기간 동안의 일을 밀도높게 정리하면서 슐츠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점까지 넘나드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끝내 독서의 저울을 수평으로 유지하는 절제된 균형미를 보여주었다. 꼭 담아야 할 컵에 적정 최고치를 넘지 않는 범위내에서 최상의 맛과 온도를 오래 유지하는 기술자로 보였달까. 하워드 슐츠는 분명 커피 한잔이 차지하는 영혼의 질량과 그 무게감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책은 슐츠만이 우려 낼 수 있는 최상의 커피 한잔이 아니었을까. 

  나는 여지껏 그토록 커피를 마셔왔으면서 흙에서 시작해 컵으로 도착하는 커피 한 잔의 여정이나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담긴 사회적 책임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커피가 사람의 영혼을 잠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보았어도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식품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슐츠는 밀라노의 에스프레소 바에서 바리스타와 사람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며 저마다 낭만을 간직하는 풍경을 보고 커피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어떤 강렬한 기억은 평생의 희망이 되기도 하는 법. 그가 커피를 말할 때 ‘꿀처럼 떨어지는 에스프레소’ 한 잔의 마법을 빚어 내는 바리스타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우아하게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한편의 공연을 연출하는 예술가라 말한다. 밀라노같은 공연이 상연되는 극장이 바로 스타벅스이며 감성적인 사람들이 경험하는 벅찬 인생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말로만 듣고 글로만 보아도 흥분되는 꿈의 공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커피가 내 인생으로 흘러 들어온 일련의 과정을 추억해 보는 것은 이상하게도 삶의 생기를 자극하는 효과가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지난 시절 커피앞에 앉은 나는 사랑도, 우정도, 공부도, 이별도 함께였었다. 슐츠처럼 강렬한 커피 경험은 아니었지만 커피는 내 인생의 그림자라도 되는 듯 늘 묵묵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커피의 행보를 따라간 것인지도 모르지만. 누가 먼저였건 언젠가부터 우리네 인생은 커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한 번도 커피와 연결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따라가는 나는 자주 그 사실을 확인해야했다. 나는 왜 그동안 커피와 함께 커피속에서조차 사람, 인생,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혹시 그가 말하는 커피와 내가 만나본 스타벅스는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스타벅스를 처음 경험한 시절은 대학원시기였다. 그때 학교앞에 생긴 스타벅스는 우리나라 1호점이면서 된장녀의 아지트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이제 커피도 다양화, 전문화, 고급화되는구나, 하는 놀라움과 그 밑에 잠재된 외국 자본주의, 그 침입을 통한 약간은 두렵고도 쿨cool한 이미지 정도였다. 이제까지 먹어온 커피보다는 비싸지만 지금까지 다녀본 커피전문점 보다는 쿨cool한 곳. 약속을 위해 누구를 기다리는 대기 및 전이 공간 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알차게 수행하는 개인적 여가 및 휴식 공간. 예전엔 (같은 자리의)패스트 푸드점에서 시간에 쫓겨 리포트 숙제를 하던 것이 근사한 스타벅스에서는 노트북이나 여유롭게 책을 넘기는 모습으로 바뀌면서 그 장면은 밀레니엄을 코앞에 둔 여학생이 지녀야 할 (트렌드로서)품위로 생각될 정도였다. 속으로는 각자 어떤 뜨거운 사유를 시도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스타벅스에 출입하는 친구들이 쿨cool하고 있어 보인다는 이미지는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했다.(당시 스타벅스 커피값은 학교앞 라면값의 두배였다)

  그 후로 10여 년이 지난 지금 스타벅스는 누가 뭐래도 쿨cool한 이미지를 대량복제하며 폭풍 성장했다. 소설 속에서 마저도 쿨cool한 기운은 특별한 시공간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 책에는 ’오늘의 커피’로 제공되는 브루드 커피가 한결같은 맛이길 바란다는 고객의 바램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을 세우는 슐츠의 경험을 만날 수 있다. 퍼뜩 작년에 출간된 김영하 소설집에 수록된 <오늘의 커피>의 첫 장면을 떠올렸다. 대한민국에서 무릇 쿨cool한 작가로 대변되는 김영하를 관통한 스타벅스는 얼마나 쿨cool했을까. 소설속의 스타벅스는 소란스럽고도 조용했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얼음’을 만져보는 것 같았달까.


“광화문 스타벅스는 소란스러웠다. 계산대 앞에는 여섯 명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색 카디건을 입은 여자는 빨간 털모자를 쓴 친구와,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과 달콤한 티라미수 케이크중에서 어떤 것이 맛있는지 토론하고 있었다. 혼자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한 여자 가수의 배꼽과 그녀가 그것으로 버는 돈, 새로운 다이어트요법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 웅웅거리는 소리들은 원두분쇄기의 요란한 소음에 묻혔다. 캐논볼 애덜리의 색소폰 소리는 스피커를 나오자마자 바람빠진 풍선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아 사람들의 발길에 차였다.”  
                                                       - 오늘의 커피 中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2010>


 
배경이 된 광화문 스타벅스는 국내 스타벅스 매장중에서 매출 1위를 달리는 점포이다. 김영하 작가는 하루에 일 천명 이상의 고객이 드나드는 그곳에서 ‘오늘의 커피’를 주문한 남자와 ‘카페라테’를 주문한 남자가 우연히 재회하도록 만들었다. ‘오늘의 커피’의 친구는 작년에 췌장암으로 죽었고 자신은 얼마 전 직장에서 잘린 신세로 며칠째 스타벅스에 출근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 재수없게 그 죽은 친구와 술 한잔하며 시비가 붙어 코뼈를 부러뜨린 남자, ‘카페라테’를 주문한 그 놈을 광화문 한복판에서 마주친 것이다. 하지만 매장 내 사람들은 ‘오늘의 커피’가 ‘카페라테’로부터 어떤 형태의 보복성의 폭력을 당하고 다시 매장에 들어 섰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작가는 도심 한복판의 커피 전문점이 서로 적당한 거리의 무관심과 다음을 기약하지 않아도 되는 일회성의 특성을 지닌 장소라 말하는 듯했다. 당신도 바쁘고 나도 당신만큼 피곤하니 혹시 실연이나 실직으로 며칠 그곳에 죽치는 신세가 되더라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 같은 연대감이 서로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장치가 되는 곳. 내 사정을 알아줄 사람도 지켜볼 사람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는 장소, 스타벅스는 개방형의 폐쇄공간, 사회적인 독립공간인 것이다. 그러니 열려 있으면서 닫혀있고 소란스러우면서 조용한 곳이 그곳이 아닐까.

 
’핫’hot한 전략이  ’쿨’cool한 고객을

 
 그런데 슐츠는 스타벅스의 감성, 스타벅스의 경험과 문화는 바로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스타벅스만의 고유한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끈질기게도 설파하고 있었다. 고객들과의 지속적 교감, 정서적인 유대감이 없는 스타벅스는 존재이유와 가치가 없다고 반복, 주장하는 것이다. 나로선 이 책에서 가장 핫한 소식이었고 고개를 흔들고 눈을 크게 뜰 정도로 놀라울 뉴스였다. 슐츠가 말하는, 고객 한명에게 내려주는 한 잔의 뜨거운 커피를 가슴으로 느끼며 마시고 싶을 때 나는 스타벅스를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친목을 도모하려 스타벅스를 가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외려 정반대의 이유로 스타벅스를 찾으면 찾았지 말이다. 그동안 스타벅스를 가는 이유는 대용량 커피를 테이크 아웃할 수 있다는 효용성과 규격화된 (에스프레소)커피 맛에 대한 기호변화, 생활 동선상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패턴 및 습관 등이라 믿어왔다. 다시 말해 내 주변에 스타벅스 커피가 특별히 맛있어서 혹은 스타벅스의 바리스타가 특별히 친절해서 굳이 스타벅스를 찾아 가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대체적으로 스타벅스가 제공하는 고유한 커피맛을 충성 구매한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라는 브랜드의 우월한 이미지를 랜덤하게 소비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최근엔 커피 빈, 앤제리너스, 탐 앤 탐스등 커피 맛에 큰 변별력을 느낄 수 없는 경쟁 브랜드들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감에 따라 그동안 스타벅스를 택해왔던 이유들마저 점점 미약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마디로 내 인생에서 스타벅스 경험은 결코 인간적인 유대감이 아닌 비인간적인 소비행태에 불과했던 것인데 그는 스타벅스야말로 인간적인 교류를 추구하는 곳이며 커피향 만큼 진한 사람냄새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곳이라 확신하다니!

  실제로 고객입장에서는 커피 전문점에서 바리스타가 따라주는 한 잔의 커피에 영혼이 담겨져 있다는 느낌을 전달받기는 쉽지가 않다. 바리스타 역시 매순간 어떤 손님에게도 최고 품질의 커피를 최고의 정성으로 예외없이 대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슐츠는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일이 실현되었을 때 얼마나한 행복을 전달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자신 역시 그 행복을 체험했기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첫 번째 가치라 역설하는 듯했다. 가만 기억해보니 스타벅스에는 다른 경쟁사에 다 있는 흔한 진동벨이 없었다. 내 경우 바쁜 점심시간에는 부러 커피전문점을 피하는 편이라 스타벅스에서 줄을 서 본 기억도 없었고 그래서 진동벨의 유무가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진동벨이 없기에 고객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고 바리스타는 커피를 만들어 바로 주문자를 찾게 된다. 바로 슐츠가 강조하는 한명의 고객과 눈을 맞추며 유대감을 나누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의 경험을)다시 생각해 보아도 진동벨을 받았을 때 커피가 나오면 진동벨과 커피를 맞교환 하고는 특별한 이유없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바리스타 입장에서 보자면 고객과의 짧은 눈빛 교환은 물 건너 간 것이다. 무릎을 탁 치게되는 순간이었다. 혹시 슐츠가 말하는 커피 한잔에 담긴 영혼을 판매한다는 것은 이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감사와 보람을 말하는 것일까?  진동벨의 장점을 포기하고 영혼의 목소리를 택한 슐츠가 처음으로 커피와 고객, 바리스타 모두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슐츠가 고객과의 정서적 유대감을 우선가치로 두고 파트너 역시 같은 가치를 자신처럼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 믿어주는 태도는 확신을 너머 거의 신앙에 가까워 보였다. CEO로서 파트너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는 직원들의 자부심으로 이어질 터이다. 직장생활 할 때 회사가 상사가 나를 믿어준다면 스스로 부여하는 책임감은 최상의 상태가 된다. 바로 자기 가치관에 대한 확신에서 파트너에 대한 신뢰, 공동체로서 가치관의 고수로 이어지는 슐츠의 가치추진력은 흔히들 일컫는 리더의 차별화된 능력으로 생각된다. 결국 정서적 유대감에 대한 상호신뢰가 직원들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그 책임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자부심이 스타벅스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고 지속적으로 강화해 온 것이었다. 브랜드 이미지가 타사보다 우월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 그들이 그토록 핫hot했기 때문에 우리는 쿨cool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서로 쿨cool했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적, 개인적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스타벅스라는 무의미한 공간을 재소비할 이유는 없었을 터이다. 또 그들이 말하는 정서적 유대는 바리스타와 한 명의 고객간의 밀착이지 매장 내 고객 간의 교류를 유도하는 건 아니었다. 커피 한잔을 마시는 한 명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에 우리는 개방된 공간에서도 보호막으로서 독립적인 경험이 가능했던 것이고 그 한 명의 고객은 자신처럼 다른 고객을 존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스타벅스에 대한 편견을 한 번도 바꾸어 본적이 없는 내가 미안해지도록 그는 사람에 대한 애정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한 적이 없어 보였다. 위기상황일수록 언제나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았고 사람을 신뢰하는 모습은 이 책을 이루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살면서 꿈을 잃어버려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만은 잃어버리지 않음으로써 다시 꿈을 찾고 이룰 수 있었던 그의 가치 경영방식은 결국 최고의 커피 회사에서 최고의 커피를 제공한다는 공동의 사명감을 창출했다. 최고 경영자가 최고로 여기는 가치는 이토록 최고로 중요한 것이었다.

커피 ‘권위자’  그리고  커피 ‘메신져’

 
스타벅스가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미국이 경제불황을 겪으며 세계적 위기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던 시기와 정확히도 겹쳐졌다. 그렇다면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세계 5대 CEO 중 한사람으로서 그가 혼란을 기회로 재창조하는 과정은 전 세계의 기업인과 고객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줄곧 그 해답은 사람이라 말하는 그의 답안지에 사인처럼 적혀있는 ‘온워드’가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을 통해서만 힘을 발휘하는 어떤 암호만 같다. 이 마법의 키워드야 말로 세상 뭐라해도 꿈쩍않던 슐츠의 고집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런 슐츠는 ‘온워드’로 환기되는 자신의 고집을 내심 자랑스러워 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에서 유독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을 접할 땐 슬몃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졌던 스타벅스의 사회활동은 뉴올리언스 리더쉽 컨퍼런스 였는데 슐츠는 ‘커피를 미국에 들여온 최초의 항구 뉴올리언스’ 지역에서 발생한 카트리나 피해 복구를 위해 총 5만 시간의 봉사를 한 경험을 회상하며 자신들의 결정과 행동에 상징적인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다. 도시복구를 위한 자원봉사활동은 뉴올리언스 지역의 공동체의 힘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바로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미국이 스스로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뉴올리언스와 스타벅스의 회복을 동일시하고 스타벅스와 미국의 성장을 동일시하는 슐츠의 결연한 의지는 당시 많은 미국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을까. 커피 생산자로서 르완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여성 농부와의 공식적 일화도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젖소를 사는 것이 꿈이라는 그녀의 소원은 젖소 살 돈을 기부하겠다는 파트너의 선행을 불러오고 끝내 전 세계 빈민에게 가축을 지원하는 단체와 협력해 젖소기금을 마련하는 온정의 프로그램을 시행하게 된다. 스타벅스의 바리스타가 자신의 고객에게 신장을 제공한 미담은 슐츠조차도 믿기 어려운 기적에 가까웠다. 이렇듯 슐츠가 유난히 커피를 재배하는 농부의 거친 손에 감동받고 그들의 고달픈 노동을 소중히 여기는 심성은 단순히 그가 뉴욕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슐츠는 가장 영광스런 순간에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 모든 것은 아버지 덕이라는 고백을 한다. 참전 용사로서 가족부양을 위해 거친 육체노동을 마다않은 아버지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한 번의 부상으로 해고를 당하고 이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난한 소규모 생산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은 어쩐지 커피라는 가장 도시적인 식품을 파는 기업의 총수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커피가 탄생되는 가장 원초적 과정의 숭고함으로 커피가 주는 마지막 행복한 시간을 창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 잔의 커피를 이루는 노동에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성실성이 담겨있었고 아버지의 고생에 공감하는 가족의 연민이 아버지의 고통을 위로하는 아들의 눈물이 배어 있었을 터이다. 슐츠는 힘없이 스러져 간 아버지가 한 평생 믿었던 노동에의 가치가 부질없고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실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슐츠가 커피 판매의 ‘권위자’가 아니라 커피가치의 ‘메신져’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비로소 그의 전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CEO복귀 후 새롭게 시도한 전략들 중 인상깊었던 것은 ‘비틀즈 브레인 스토밍 회의’와 ‘인스턴트 커피 개발’, ‘선거 켐페인을 활용한 마케팅’등이었다. 이들 모두 아이디어에서부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참신하고도 좋았는데 고민의 출발은 한 가지였다는 생각이다. 바로 스타벅스라는 커피 대표 회사, 스타벅스라는 최고의 커피 브랜드가 이끄는 커피 문화, 커피 철학이었다. 슐츠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커피 한잔의 철학을 통해 리딩기업으로서 지역사회 커피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에 프런티어가 되고자 했다. 한 시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비틀즈를 예로 들며 스타벅스가 단순한 커피 브랜드를 너머 시대를 리드하는 문화 아이콘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비틀즈와 스타벅스의 공통점이 사람들의 삶에서 기억의 표지 역할을 해주는 아이콘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 시대의 커피의 권위자가 그 시대의 문화의 권위자가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진 것은 별스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슐츠가 발견한 진리는 비틀즈가 대규모 공연을 가지면서부터 자신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인데 그는 이 시점이 꼭 스타벅스의 영혼이 부식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매장 수, 매출 규모등 고속 성장에만 집중한 전략은 스타벅스를 조용히 무너뜨리는 발암물질이었던 것이다. 1위 브랜드가 1위를 지키지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자신의 목소리를 변함없이 유지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감성을 고객에게 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비틀즈로부터 자기 영혼의 위치와 상태를 확인한 스타벅스를 보면서 내가 가진 목소리, 나만이 가진 장점들을 조용히 돌아보게 되었다. 내 장점중에서도 남들이 아닌 내가 마음에 들어 자랑하고 싶고 잃고 싶지 않았던 능력이 있었음을 새롭게 상기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목소리가 훌륭해도 (남들이 좋다는 목소리를)자기 스스로 들을 수 없다면 다음의 발전도 없는 게 아닌가. 반면에 슐츠는 자신의 열정과 능력은 오로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 발휘되는 것이 단점이라며 수월하게 해 낼 수 없거나 원래 흥미가 없던 비즈니스 영역은 충분히 파고 들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뼈아픈 자기진단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슐츠뿐만 아니라 한 가지라도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과하는 열정의 사각지대에 다름아니었다. 이 책은 대부분 기업의 전략을 설명하는 책임에도 이렇듯 개인의 역량을 냉철하게 점검하게 하는 기특한 구석이 있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분말커피 비아가 상륙하지 않았지만 아시아인은 미국이나 유럽보다 커피 믹스를 즐긴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스타벅스에서 개발한 수용성 분말커피의 탄생과정도 놀랍고 반가웠다. 자가면역 질환 진단을 전공한 세포 생물학자 돈 발렌시아가 혈액검사의 생물학적 지식을 적용해 시도된 커피추출기술이 스타벅스 인스턴트 커피 개발의 시초였다는 것도 흥미로왔고, 성공적인 개발 후 마케팅을 앞두고 발명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안타까웠다. 한 생물학자의 우연한 실험처럼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이 녹아든 커피를 편리하게 마시면서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가 길이나 거리를, 경유하고, 관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존재라면 ’Via비아’라는 이름의 네이밍은 가히 철학적인 듯하다. 슐츠는 이렇듯 새로운 기술에 대한 잠재력을 특유의 직관으로 투시하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마케팅은 언제나 리스크를 부담하게 되는데 선거캠페인 같이 민감한 행사도 기업의 윤리성, 공정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눈치보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정신이 나는 좋았다. 나만해도 선거가 있는 날 투표를 마치고 삼삼오오 커피전문점에 들러 즉흥적인 모임을 가진 적이 꽤 있었다. 지역사회와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개인적 유대감 형성에 기여하겠다는 슐츠의 기본 원칙이 더 부각되어 보였던 건 위험을 기꺼이 수긍할 수 있는 일관성과 그동안의 고객신뢰를 바탕으로 한 결과였다. 

’마지막’ 인사가  ’시작’의 인사로

 
이 책에는 슐츠의 지인을 비롯해 수많은 스타벅스 파트너, 전략가, 고객들이 등장한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인재를 적재에 등용하고 장인을 존경하듯 한 분야에서의 전문가를 깍듯이 대접했다. 슐츠는 감사의 인사에서부터 그들의 업무수행까지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성의를 표했는데 어떻게 보면 이 책이 한편의 영화라 했을 때 그들의 이름은 마지막 엔딩에 올라가는 크레딧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이 책이 자신을 포함한 스타벅스 파트너들에게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라는 느낌이 든 것은 그가 26년간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의심없이 끄덕여지는 대목이었다. 그는 편지를 누구보다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인식했기에 내부 ‘이메일 유출사건’에서도 유독 상처를 많이 받은 것 아닐까. 이 책에는 스타벅스의 위기신호탄이 된 이메일에서부터 슐츠가 보내고 받은 여러 편지가 등장한다. 최고 경영자의 한번이 아닌 지속적인 인사는 곧 그 기업의 이념이자 사명이 되는 것이었다. 그가 편지 끝머리 인사인 ‘Regards(존경심으로)’나, ‘Sincerely(진실함을 다해)’를 택하지 않고 이미 존경과 진실을 담아 ’Onward(전진, 앞으로)‘라는 구령을 붙인 것은 언제나 바로 지금부터 우리만의 여정을 시작하자는 크랭크 인의 암호는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온워드‘는 헤어질 때 주고받는 인사이면서 동시에 시작할 때 나누는 인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처음부터 갸우뚱했던  ’온워드‘의 메시지를 이제서야 가슴에 새겨본다. ’온워드‘는 언제나 그들에게 현재진행형의 메시지였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에 (40년 만에 최고 매출을 달성 한 후에도) 이제 성장을 이루었다고 믿는다는 확신이 아니라 ‘성장을 이루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이 기쁘다는 설레임을 의미심장하게 표현했다. 무엇보다 끝까지 결과가 아닌 과정에 더 집중하는 자세는 한결같았던 것이다. 지금도 성장하고 있음이 기쁘고 벅찬 것이지 성장했다는 수치가 자랑스럽다는 것이 아니었다. 성장으로 인한 보상이 아니라 생존에서 성장으로 목표전환을 이루어낸 그 자체가, 그리하여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미래의 가시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했기에 결국 계속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최근에 방한한 그는 한국의 커피전문점인 ’카페베네’가 스타벅스를 앞지른 것에 대한 질문에 바로 매장수나 매출규모가 1등 기업을 말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대답한 바 있다.  스타벅스는 고객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과 자부심이 묻어나오는 답변이었다.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기쁨이란  혹시 원두가 로스팅되면서 공장에 서서히 퍼져가는 커피향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순간, 바로 스타벅스의 뜨거운 심장을 확인하는 순간의 환희가 아닐까. 그가 말했듯이 커피로 꿈을 꾸었던 자신의 과거와 그 꿈으로 성공을 이루어낸 스타벅스의 오늘,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파할 미래를 확인시켜주는 순간이 아닐까. ‘온워드’는 그 극적이고도 벅찬 순간에 서로의 가슴뛰는 심장을 확인하며 모두의 내일을 기다리는 가장 현재진행형인 오늘의 단어가 아닐까. 나 역시 한 번의 과거 실패로 성장이 뚝 멈춰진 오늘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나이들수록 실패의 경험은 후유증이 길고 또 다른 시작의 걸림돌이라는 것을 통감한다.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이 잔인한 현실앞에서 더욱 더 진한 커피만을 벗삼아 내일의 두려움을 피하려던 내 자신을 분명하게 깨우치게 된다. 또 실패할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고 다시 시작하는 것, 다시 뛰어드는 그 순간이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온워드’가 사람이라는 행복을 커피라는 문화로 이루고자 하는 하워드 슐츠의 자기선언이었다면 나 역시 꼭 내게 어울리는 온전한 키워드, 나만의 ‘온워드’로 새로운 인생선언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꿈틀거린다. 

  문득 ‘손이 진흙으로 더러워지더라도 결국은 깨끗한 순백의 결말을 맞는 것’이 ‘온워드’의 정신이라는 그의 한마디가 자꾸 떠오른다. 이것은 어쩐지 흙에서 시작해 한잔의 행복으로 귀결되는 커피의 인생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커피는 진하디 진한 제 색에서 출발해 사람들의 하얀 영혼에 이르러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왕에 습관적으로 커피를 즐겨온 거 이제는 커피같은 인생을 출발하고 싶다. 최근에 바닷속 은어의 소리를 듣는 눈먼 어부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수류탄으로 눈을 잃은 어부는 생존이 절박해지자 신비한 청력이 생겼지만 그 능력이 세상에 알려지고 외부의 지원금이 몰려들자 은어의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조금 앞길이 보이는 성 싶으면 초심보단 변심이 더 수월한 법이다. 까짓것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내가 가진 가치관이라고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 어쩌면 미련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슐츠는 말한다. 가장 위기의 순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도 오랫동안 믿었던 신념만큼 더 확실한 해답은 없다고. 그 신념이 옳다고 믿으며 그 신념 때문에 보람을 느낀 적이 있었다면 더 큰 도전이 필요한 그 순간에도 절대 그 핵심가치를 잊지 말라고. 당신이 믿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믿음을 절대 버리지 말라고. 나는 한번의 크나큰 실패 이후 그 결과로 내 꿈이 사라진 것에만 슬퍼하였지 꿈을 좇던 나만의 핵심가치를 놓아 버린 것은 아쉬워 하지 않았다. 내가 꿈을 가졌던 이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가치, 그 가치가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만이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처음 내 꿈을 꾸었던 순간으로 가만히 돌아가본다. 다시 꿈꾸어야 하는 건 지금 꿈을 꿀 수 있어서가 아니다. 앞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 꿈을 꾸던 내가 그 꿈으로 행복해질 것을 의심없이 믿었던 나를 찾기 위해서다. 다시는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켜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꿈, 그 꿈을 다시 꾸고 나를 움직이게 할 인생선언서를 처음으로 작성해본다. 그리고 그 마지막 줄에 조용히 끓어 오르는 커피향처럼 내 심장을 뛰게 할, 지금부터 계속하여 변함없을 뜨거운 단어 하나를 적어본다. 이 사인이 내 인생을 약속하는 사인이면서 마지막까지 변치 않을 사인이길 바래본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마지막 사인이 되어도 후회없지 않을까.


Onword!, 
영원한 믿음, 변함없는 전진, 
존경과 진심을 다해 당신도 나와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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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인의 계절


오월은 정신이 없었다. 월초에 일주일 여행을 다녀왔더니 너무나 짧았다. 무언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작 제대로 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날씨는 초여름에 이르렀고 달력의 무게는 자꾸 줄어든다. 점점 시간에 이끌려 나이를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산다는 건 결국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사용한다는 뜻 일 텐데 언제나 시간이 충분치 않은 것 같고 충분히 있다 해도 야무지게 시간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여행의 후유증이 이렇게 길 줄이야. 나는 누구의 시간을 보내었던 것일까.
 

#2. 타인의 노래


오월은 임재범으로 시작해서 임재범으로 끝났다. 모든 기막힌 뉴스는 그의 더 기막힌 노래에 묻혀버렸다. 내가 생각하기에 임재범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전설은 그런 것이다. 두 번은 필요치 않은 것. 두 번은 울 수 없는 것. 1979년인가. 나는 제 1회 서울 국제 가요제에 참가한 윤항기, 윤복희 남매를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 우리 집 TV는 아직 흑백이었고 윤복희는 머리에 캡을 쓰고 번쩍거리는 뱀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인터내셔날 서울 송 페스티벌, 엔트리 넘버 ~~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윤복희의 여러분은 (대상을 받긴 했지만)내게 그다지 특별하진 않았다. 외려, 좀 낯설고 느끼했달까. 그 당시 노래하는 여자 가수들은 다 그런 식이었다. 그 정도 가창력이 없으면 쇼 프로에 나오지 못했었다. 내 (총명한)기억으로 그 대회에 진미령, 장덕, 김수희도 출전했었다. 어이없게도 임재범이 여러분을 노래 할 때 내 기억은 1979년 반포 주공 아파트 339동 406호로 달려 갔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곳은 어떠하신지.

 

#3. 타인의 방


도서관에서 최인호의 ‘타인의 방’을 빌려와 읽었다. 기가 막혔다. 꼭 4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인데, 앞으로 40년은 족히 먹힐 글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타인의 방’때 까지만 해도 최인호 작가는 대중 소설가는 아니었던 듯하다. 순수(?)의 극치를 달리셨다. 이 분의 신간 소식이 알 수 없게 반가웠다. 서평단 신청을 잘 하지 않는데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서평단을 모집한다 하길래 덜커덕 응모해버렸고, 다행히 기회가 주어졌다. 비슷한 제목의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도 내일이면 도착할 성 싶다. 살면서 나이들면서 모든 게 익숙해질 거 같아도 점점 낯선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의외로 많아진다. 타인처럼 낯선 내가 낯익어 지는 과정이 결국 낯선 세상에 적응하는 시간이 아닐까. 이 분들의 소설을 차례로 읽을 생각을 하니 다가오는 유월이 조금은 설렌다.  




‘타인의 방’에서 소름이 끼치던 문장을 옮겨본다.


그때였다. 그는 서서히 다리 부분이 경직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우연히 느낀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이방에서 도망가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움직이리라고 마음먹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내려 다리를 만져보았는데 다리는 이미 굳어 석고처럼 딱딱하고 감촉이 없으므로 별수 없이 손에 힘을 주어 기어서라도 스위치 있는 쪽으로 가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손을 뻗쳐 무거워진 다리, 그리고 더욱 더 굳어져 가는 다리를 끌고 스위치 있는 곳까지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숫제 체념해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조용히 다리를 모으고 직립하였다. 그는 마치 부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이후 '직립'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분명한 순간은 없었다. 그리곤 부활이라니....그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로 부활한 것이었다.  

 

 

유월달 달력에 두어개 동그라미를 친다. 

그리곤 오월달 달력을 뜯어 버린다.  

 

 

 

 

 

 

 

 

 

읽고나면 어느 분이 더 낯익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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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1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6-01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과 낯익은.
낯익은 이란 단어 참 신기하지 않아요?
저는 항상 '낯'과 '익은'을 떼서 들여다보곤 해요.

전 욕심이 많아서, 나의 계절, 나의 노래, 나의 방이 갖고 싶어요. 그것은
항상 타인과 항상 낯익은의 중간에 위치할거 같아요, 나 자신도 가끔 타인 같아서요. ^^

한사람 2011-06-01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욕심이 많은데,
가만 보면 욕심을 부리다 보면 제 자신이 낯설어 지는 거 같아요
실제보다 자신을 과대평가 했거나, 인격수준을 높게 잡은 것이죠..

몰랐던 자신을 알게 되는 과정은 슬픈 것 같습니다..ㅠ.ㅠ

조선인 2011-06-01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79년의 가요제였는지, 그 후 언제였는지 기억은 불분명하지만, 윤복희님의 '여러분'을 처음 듣고 펑펑 울었더랬어요. 전형적인 경상도 억척어멈인 어머니는 아주 질색을 하며 절 혼냈죠. 기집애가 눈물이 헤프다 참 자주 혼났는데, 오늘도 독거노인 무료배식하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질질 짰으니... 참 별 수 없는 천성이구나 싶어요.

한사람 2011-06-02 00:42   좋아요 0 | URL

전 어릴때는 거의 눈물이 없는 아이여서..
그리고 윤복희 노래를 이해하게 된건 거의 삼십 넘어서였던거 같아요
윤복희 이후 '여러분'은 코미디언 이상해씨가 자주 불렀었죠
감히, 기성가수들은 도전하지 못했던 노래였는데..

그 노래가 그렇게 서럽게 들릴줄 정말 몰랐습니다..

보물선 2011-06-01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의 선택은 항상 나와 같구려.
나도 이 두권이 무척 기대된다우~

한사람 2011-06-02 00:43   좋아요 0 | URL

오늘 <낯익은 세상>이 왔지 ㅋㅋㅋ
책갈피도 오고, 노트도 오고, 싸인도 적혀 있고
하루종일 행복했다는 ^^

달사르 2011-06-03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방..타인들의 도시..작가님이 30년에 걸쳐 비슷한 주제의식의 끈을 가지고 계신 느낌입니다. 저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어볼까..생각했더니, <타인의 방>도 다음에 같이 읽어봐야겠습니다. 언급해주신 짧은 문장이 궁금점을 생기게 해주네요. ^^

한사람 2011-06-03 14:12   좋아요 0 | URL

제가 볼드표시한 문장이 저 소설의 하이라이트인듯 합니다^^

지금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고 있는데 무척 감각적입니다, <타인의 방>보다도요
흥분되서 아껴서 읽고 있어요 ㅋ
 
위조지폐
정문후 지음 / 세니오(GENIO)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돈으로 안 되는 일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줄곧 나는 돈이 좋았다. 실로 오랜만에 돈이 그리웠다. 그리고 그 사실이 누구에게도 창피하지 않았다. 책을 덮고는 내가 현재 돈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자각하기도 했다. 이 사실은 내게 중요했다. 돈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돈이 있었던 나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의 돈을 통과하는 일은 꼭 가질 수 없는 돈다발로 이루어진 숲을 빠져나오는 것 같았달까. 그 지독한 돈 냄새가 나를 관통한 후 떠오르는 상념들, 돈 나무들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는 공간. 폐향(弊香)에 취해 폐목림(弊木林)을 걸어 나오는 시간. 여지껏 살면서 돈을 좇아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돈 때문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돈만큼 귀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는 한때 남부럽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돈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땐 내가 돈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고 살진 않았다. 그저 여기서 조금만 더 벌면, 조금만 더 모이면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그 행복의 테두리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크기와 빛깔들로만 세속의 소원을 차곡차곡 저장해 두었을 터이다. 역시, 사람은 돈이 없어 봐야 돈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인가 보다. 돈이 있을 땐 마음의 여유가 많을 것 같아도 이상하게도 돈이 지닌 가치와 진정한 의미를 진지하게 질문도 답도 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돈이 보여서 돈을 좇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쉬지 않고 좇아야지만 돈이 보일 것 같은 착각에서 절대 자유롭지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돈이 떨어지고 보니 그제서야 지난 시절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동안 누리고 살 땐 몰랐던 돈의 실체와 위력을 절절히 실감하였기 때문도 아니다. 돈이 있다가 거짓말처럼 없어지는 동안 내게 발생했던 일. 돈이 가진 능력과 위안의 실체가 소멸되기까지 내가 머물렀던 장소. 돈이 지탱해주던 나라는 존재가 돈이라는 지지대를 잃고서 허물어지던 시간. 그 지난 시절은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동안 내가 보고 느꼈던 모든 것이 리와인드되어 플레이되는 상영시간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돈의)有에서 (돈의)無로 삶이 전환하는 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기운들이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떤 의미였는지 돈없고 보니 알아지더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특별히 내가 물욕에 눈이 멀었거나 과시욕에 집착하는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살다보면 스무 평의 다세대주택 보다는 서른 세평의 아파트가 간절해지고 뒷좌석에서도 열선으로 엉덩이를 데울 수 있는 중형차를 타고 싶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다보면 정원과 테라스가 딸린 타운하우스나 그에 걸맞는 분위기의 외제차라도 얼마든지 곧 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문제는 무자각 상태로 이들 욕망이 확장하는 시간과 내 소득이 증가하는 시간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크기의 차를 견디는 일은 바로 기나긴 生의 질병이 된다는 것이다. 나이들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게 되는 지병처럼 익숙하고도 만성적인 고통으로.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비현실과 또 언젠가는 탈피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의 안타까운 간극 차, 여간해선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는 속세를 사는 우리에겐 늘 공동의 상처이고 시련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커피를 손에 들고 도시 한복판의 다리를 건너면서 돈에 관심이 없다, 돈 좋아하는 사람이 싫다, 돈만 아는 자들이 우습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웃기고도 우스운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는 돈을 밝히는 태도가 부끄러운 행위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일 뿐 스스로 돈이 싫어서 필요하지 않아서 도인같이 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돈이 너무 간절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머쥔 사람들이 부럽고 샘난다는 자기방어적 표현에 불과하므로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못난 사람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돈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말은 그만큼 ‘돈으로 되는 일이 많다’는 뜻의 부연이라 느껴진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의 종류를 따져볼까. 가만 보면 돈이 제 아무리 많아도 얻기 힘든 것- 예를 들면 사랑, 우정, 추억, 희망 등등 -은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돈으로 구할 수 없기에 더 귀한 것이 아닐까) 억지로 돈으로 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돈 때문에 얻어진 것은 다시 돈이 아니면 사라질 운명이므로 그 절대성과 진실성, 영원성에서는 가치를 비할 바가 아닐 터이다. 사람들이 그나마 비현실과 현실의 간극을 참고 이겨보려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아직은 존재한다는 믿음 때문인지 모른다. ‘돈으로 다 된다’는 주장 역시 돈으로 다 안 되기 때문에 생겨난 반론일 것이니까. 다만 이 믿음의 연대는 돈보다 느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에 그야말로 다같이 믿어 주는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간혹 이 믿음의 연대에서 이탈해 비현실과 현실의 편차에서 탄생한 블랙홀에 빠지고 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정신을 차리고 나면 정작 남는 것은 돈이 아니고 황폐해진 육체의 잔재와 돈에 굴복한 영혼의 쓰레기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돈이라는 우주가 생성한 블랙홀에 빠져든 사람들의 거침없는 아우성을 노래한다. 고백하건대 무엇보다 작가가 마련한 돈의 향연, 거짓의 나락에 같이 추락하는 일은 그다지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제일 신난다지만 이번에 돈구경도 그에 못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돈으로 안 되는 일중 가장 힘든 일은 돈 만드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돈이 인간이라는 이 책의 화두를 떠올리면 인간이 되는 길 역시도 돈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돈으로 최고가 되는 일

소설의 시작은 다분히 자극적이었다. 돈을 똑같이 만들어 내겠다는 한 남자와 취미로 돈을 수집하는 한 여자가 훗날 자신들의 운명적 만남을 위해 돈을 좇아 달려갈 것을 나란히 예고하는 것이었기에. 특이했던 것은 이 두 사람이 후반부에 같은 목적을 가지고 공범자가 되기까지 작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하였다는 것인데 작가의 시점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두 남녀가 공평하게 자기 속도로 달려가는 형식이 흥미로왔다. 이 과정은 흡사 (작가의 의도대로)추리소설의 밀도와 긴장을 유발하는 성격을 가지기에 충분했고 두 사람을 통해 전해진 돈의 유래, 지폐의 제조공정, 위폐의 감별기준 등의 풍부한 텍스트는 이 소설의 구성을 더욱 탄탄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소설 초반부터 시종일관 제시된 돈의 가치와 의미를 질문하는 데 차용된 고시, 중국의 고사성어, 고대 그리스 시인 및 삼국지등의 문헌은 소설을 읽는 동안 피할 수 없이 한번쯤은 진지하게 돈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요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늘 생각하고 살지만 꺼내들고 말해봤자 뚜렷한 해결책은 없어보였던 돈이라는 애증의 대상에 대해 극도로 개인적인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것일 테다. 돈의 사유가 나의 자유가 되는 시간, 나만 하여도 내게 있어 돈의 부재가 의미하는 존재가치를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밖으로 ‘넓다’기 보다는 안으로 ‘깊다’고 느껴진다. 황망한 돈의 바다가 아니라 심오한 돈의 수렁이었다고 할까. 인물도 많이 등장하지 않고 상황도 단순하다. 그러나 돈에 대한 깊이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정밀하다. 마치 초정밀 위조지폐를 만드는 매 단계의 복잡한 기술처럼. 인물의 묘사도 주인공이 돈에 집착하게 된 경위에 보다 집중되었고 돈에 다가가는 여정자체가 소설의 주를 이루는 핵심으로 느껴진다. 사실 우리네 인생도 우여곡절 끝에 돈이 생기는 과정은 대개 돈을 쓰는 과정보다 극적이고 그런 만큼 길고 질척할 터이다. 문득 주인공들이 위조지폐를 만드는 무한한 열정과 엄청난 노력을 다른 일에 투사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작가의 스쳐 지나가는 말이 생각난다. 무릇 한 사람이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도 고난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돈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상징하는 ‘인간되기’, ‘인생살기’의 환유이자 알레고리라 할 것이다. 이처럼 결말보다는 전개과정에 완성도가 집중되었기에 이 소설은 자칫 결론없이 장렬하게 막을 내리는 허무한 전투로 보일 수도 있었다. 희망의 완전무결함이 상징하는 절망의 완성유결. 그러나 돈이 완성되어 펼쳐지는 그 절정의 순간을 소설의 마지막으로 장식한 것은 바로 돈이라는 블랙홀에 빠지고 난 이후부터는 우리들 독자의 몫이라는 작가의 준엄한 경고라는 생각이다. 돈의 광활한 우주에서 내심 빅뱅같은 폭발이라도 기대했다면 그것은 바위로 계란치기 식의 상투적 유혈혁명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작가가 보여준 무혈혁명은 돈이 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이 돈이 되는 세상은 오지 말아야 한다는, 일인 문학시위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작가가 연출한 시위에 연루된 주인공은 소설적 희생양이 아니었을지.

가난한 시골출신이며 정보 처리학 전공이라는 미모의 컴퓨터 학원 강사 정은서는 소위말해 돈맛은 좀 아는 세련된 싱글족이다. 혼자서 도시생활을 즐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돈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돈의 마력에 대한 존경심’ 이 남달라 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미혼여성이었다. 이에 반해 가난한 환경에서 부모와 형제를 잃고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해 중학교시절부터 인쇄업에 발을 들여놓은 김준성은 돈을 존경했다기 보다는 자신에게 패배만을 안겨준 돈을 이겨 보려한 경우였다. 김준성은 미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예술 ‘창작’이라는 최초의 꿈을 포기하고 진품 ‘흉내’라는 대안적 꿈을 실현하려 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장 고난이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돈을 만드는 것이 곧 최고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들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돈만을 모으기 원하는 ‘수집광’으로서 남자는 진짜와 똑같은 가짜를 만들기 원하는 ‘기술광’으로서 각자 돈에 대한 욕망을 현실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모으고 복제하는 collect & copy 행위가 다름아닌 돈이었다는 것은 행위자체에 진정성을 의심받기 충분하다. 과연 실물화폐를 쓰지 않고 모으기만 베끼기만 가능한 것일까. 불행히도 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돈을 쓸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이 두 사람이 희생양으로서 안타깝게 느껴졌던 건 두 사람이 보여준 행위에의 열정과 그 행위의 목적에 있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솔직히 돈 만드는 과정에 간접 참여한 참관인처럼 점점 설레고 흥분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돈을 이렇게 만드는 구나, 돈도 짝퉁으로 유통될 수 있구나 하는 신성불가침의 비밀을 엿보는 심정이었달까. 특히, 은서가 미리 빠져나간 일련번호를 아쉬워하며 번호를 조작해 맨 처음으로 집에서 위폐를 만들어보던 장면은 어쩐지 함께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은서가 취미삼아 재미삼아 위폐를 만드는 시행착오적 과정, 준성이 지폐 인쇄기술을 터득하는 단계별 노력들은 독자로 하여금 관음증적인 쾌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돈을 직접 만들 수는 없지만 그들이 대신해 만들어줌으로써 마치 내가 돈의 주인이 된 것 같은 대리만족을 주었다는 것, 그것은 만의 하나 복권이 당첨되었을 경우를 가정해 하룻밤 상상의 시나리오를 펼쳐보는 기분과 유사했다. 어떻든 (돈좋아하는 같은 인간으로서)이들로 재미를 톡톡히 본 입장에서 그들의 희생을 목격하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이다.

또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위조지폐를 제작해 사회에 불법 유통시키고 그로인해 국민의 불안과 위기를 조장하는 국가단위의 범죄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은서는 고교시절 소도둑을 잡아 경찰표창까지 받은 모범생이었고 준성은 어렸을 적 돈이 안 되는 무명화가였던 아버지를 보고 돈이 되는 놈이 되기로 마음먹은 죄밖에 없었다. 작가는 이들이 애초부터 범죄적 성향을 타고났거나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애써 세상에 강조하는 듯했다. 외려 지폐를 수집하거나 인쇄업에 종사했으므로 돈을 그리면 감옥에 간다거나 위폐를 만들면 어떤 댓가를 치르게 되는지 누구보다 실감하는 경우였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돈을 만들고자 했을까. 아니 돈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했을까. 돈과의 사랑은 누구에게도 짝사랑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 이들은 삐뚤어진 짝사랑의 소유자였다. 돈을 세상과 나누어 돌려 쓰지 않고 자신만이 영원히 소유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운 것이다. 바로 제작 목적에 행사의지를 배제함으로써 위조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작가는 ‘형법 207조’를 들어서라도 우리에게 묻는다. 아니 설득한다. 김준성은 행사할 목적으로 대한민국의 화폐를 위조 또는 변조하는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맑고 깨끗한 눈빛’을 가진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약물과 노동에 시달린 거친 손’으로 그저 인쇄공으로서 최고의 기술을 증명하려 했을 뿐이라고. 증거 수집을 위해 경찰이 위탁한 은서가 중간에서 진폐를 가로채 자신의 위폐와 바꿔치기한 범죄 역시 열정적인 그녀의 수집욕 때문이었다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위폐조작행위는 자아성취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모험에 불과했다고.


돈으로 인간이 되는 일

은서와 준성이 작가의 무혈혁명에 표면적인 희생양이었다면 소설 속에서 외롭게 무혈혁명을 마무리한 희생양이 또 한사람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 은거하며 고시를 읊조리고 산수화를 그리던 인쇄기술의 전설. 등사원판을 만드는 필경사 출신이면서 직업병으로 납중독을 얻게 된 이 시대 돈의 스승. 그는 자신이 경영하던 제지공장에서 친구에 속아 거액의 달러 지폐용지를 만든 전과자이기도 했다. 작가는 크게 참아야 했기에 스스로 대인(大忍)이 되어버린 자신의 대리인을 통해 피없는 혁명을 연출해낸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대인과 준성이 나누는 공자왈 맹자왈 식의 대화가 아니었을까. 인물중 가장 비현실적이고 영화처럼 느껴졌던 대인은 돈을 만들겠다는 준성에게 연신 돈처럼 버라이어티한 충고를 이어간다. 참다운 마음으로 공경하고 어리석음을 굴복시키는 ‘예배자’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제 5의 원소처럼 ‘돈이 인간’이라는 싯구절, 최초로 통용된 쿠빌라이의 지폐, 바람이 불면 불경을 읊는다는 대나무같은 존재 죽존자, 삼국지에서 조조에게 종잣돈을 대준 위홍등 때로는 직구로 때로는 선문답같이 돈의 인문학을 강연하는 존재였다. 대인을 통해 작가는 부에 의해 통제된 기회의 편재와 빈자에 대한 인권유린이 우리 사회 심각한 문제라는 메시지를 설파하였다. 마침내 대인은 가난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돈으로 기회를 나누어주는 무상 종잣돈 제작 및 유통자가 되어 이 작품의 진정한 영웅으로 탄생한 것이다. 준성처럼 화가가 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꿈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꿈을 공모하여 그들에게 ‘기회의 분배’라는 잡지를 매개체로 종잣돈을 나누어주다 ! 무엇보다 인상깊었던 점은 이 꿈같은 이야기가 실현되는 생생한 현장에는 대인이 언급한 돈철학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5장 제목이기도 하며 그리스 격언으로 알려진 '돈이 인간이다(Chremata aner)'는 말은 알려졌듯이 고대 그리스 서정시인 알카이오스의 시 ‘돈’의 한 구절, ‘돈이 인간이네(chrēmat' anēr). 가난한 사람치고 고귀하거나 영예로운 이는 없네’에서 인용된 명언이다. 그 시절 제 5 원소의 하나로서 돈이 인간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되지만 어느 시대이고 늘 가난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고상할 수 없다는 그만큼 돈이 없으면 인격도 높아지기 힘들다는 자조적이고 뼈아픈 풍자의 한구절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이 구절이 자꾸 중첩되어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대인이 지폐가 유래된 배경을 준성에게 가르쳐주는 장면때문 일 것이다. 대인은 준성에게 서양에서 근대적 의미의 지폐가 출현하게 된 계기는 중세 페스트로 죽은 시체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준다. 그전까진 고가의 양피지로 책을 만들었기에 책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지만 페스트로 대량의 인구가 죽은 덕에 시체에서 벗겨낸 옷가지인 면섬유를 지폐의 종이로 대중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죽음에서 피어난 꽃’이 지폐라는 교훈이므로 ‘돈이 인간이다’라는 알카이오스의 시는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준성은 돈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기에 죽어서 비로소 돈이 된 준성은 원래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이는 충분히 ‘돈이 인간이다’는 소설논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논리적 서사인 것이다.

나는 ‘돈이 인간이다’는 작가의 소설논리를 보고 퍼뜩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느냐’는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전에는 이 말을 어떤 경우든 사람이 돈보다 먼저라는 뜻으로만 생각했는데 돈이 너무 좋아서 사람보다 돈을 믿어서 끝내 돈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보니 옛날엔 ‘사람 나고 돈 났’지만 지금은 ‘사람 죽고 돈 났’다 이거나 ‘돈 나고 사람 죽’는다고 해야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속담이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이 죽어서 돈이 탄생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는 분명 인생을 잘못 사는 것이라는 속깊은 이치가 아닐까. 이렇듯 돈과 인간, 인간과 돈 사이의 인과관계를 그리스 격언과 대인이라는 스승 캐릭터, 주인공의 반전 서사로 잘 결합해 제조한 작가의 재치는 작년에 출간된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춤>을 연상시킨다. <허수아비춤>은 신랄한 이야기로 이야기 바깥을 지시하면서 소설을 통해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대표적인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오랜 시간 우리 문단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자신의 방식으로 완성시키는 조정래 작가는 우리 사는 시대를 문학으로 통찰하며 오늘과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역할을 평생토록 자처한 작가이다. 우리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우리 다음 세대에게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역사에 당당한 국민이길 충고하는 멘토형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런 대작가의 작품과 이 작품을 단순 비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책에서 <허수아비춤>과 같은 사회소설이 가지는 문학위치를 발견했다고 말하고 싶다. 바로 대인을 통해 언급된 ‘기회의 분배’는 <허수아비춤>에서 제시하는 ‘경제민주화’를 연상케 한다. 돈에 굴복한 대기업 임원들이 우리네 자화상이라고 한다면 위조지폐로 꿈을 실현하겠다는 발상 역시 돈에 굴복하여 돈의 노예가 되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에서는 애초부터 돈을 만들겠다는 준성을 비롯해 경찰로는 큰 출세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김형사와 능사로 불리운 교도관, 오로지 수집만이 삶의 행복이라는 은서까지 최후엔 모두 불법을 감당하고서라도 돈에 굴복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돈에 대한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대인마저도 최후의 결단을 내리기 전까진 준성의 설득에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아무리 청렴결백한 고위공직자라도 뇌물에 약해질 수 있고 경제적으로 빈곤하지 않아도 눈앞에 굴러들어온 돈에 무심할 인간은 없는 것이다. 유일하게 대인이 마지막까지 그리워한 아내 백상만이 돈에 초월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외려 백상이 제일 비현실적인 캐릭터였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트럭에 꽃을 싣고 다니며 어디서든지 화사한 꽃밭을 연출했다는 백상만이 세월가도 돈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백상이 불교에서 신성시하는 신앙의 대상이기에 작가나 대인, 우리 모두는 현실에서는 도저히 존재할 것 같지 않는 백상같은 사람을 마음의 멘토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국민도 경찰도, 스승도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는 돈도 사라져도 끝내 신적인 존재였던 백상이 가진 순수만은 잊지 말고 모두의 가슴에 새기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돈이 있건 없건 황폐한 도시에 꽃같은 기운을 잃지 않는 사람, 돈을 벌 건 못 벌 건 그 꽃으로 거리를 향기롭게 하겠다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범한 온갖 백상(白狀)일랑은 잊어 버리고 새로운 힘과 생명의 원천으로서 코끼리 같은 넉넉한 백상(白象)을 섬기기라도 하라고.


돈없이 진실이 되는 일

돈이 좀 있다 싶을 때 나는 돈으로 돈을 빌려 제법 큰 규모의 자영업에 도전했다. 좋은 차에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 확실히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주유소 알바생들도 90도로 배꼽인사를 한다. 우연하게 돈으로 무언가를 집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경우라면 그 집행자는 더욱 과대평가되기 시작한다. 나 역시도 내가 돈이 있을 때 내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들 나와 코드가 맞거나 내 성격을 좋아해서 헌신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돈 때문에 발생한 후광효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돈이 빠져나가면 물거품처럼 사람도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사업이 망하고 나면 금전적인 상실도 충격이지만 그로인해 사람사이에서 발생한 이해관계로 받은 상처가 더욱 사람을 망가뜨린다. 돈을 잃으면 돈과 관계된 사람,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잃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직도 돈이 없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두렵다. 이렇게 돈과 사람을 함께 잃은 내가 이제와 가장 많이 땅을 치는 것은 정작 돈 없어도 소중한 것들, 돈 있을땐 우습게 보이던 것들인데 이 책의 영웅은 이런 내게 보란 듯이 질문한다.

술을 마신들, 바람을 피운들, 도박한들, 외국여행을 한들, 그 어떤 취미생활을 한다 해도 그런 속 깊은 즐거움, 그런 가슴이 벅차오는 행복이 어디에 있겠나. 187p


제지공장 사장까지 지냈다는 대인은 지난 날을 회상하며 준성에게 아이들, 가족들과 나눈 소소한 일상, 진정한 행복에 대해 말한다. 대인은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이 행복을 알고 있기에 그 행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에드가 앨런 포우의 시, ‘엘도라도를 찾아서’ 홀연 사라진다. 싯구절처럼 말타고 계곡을 달리는 영혼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고 만 것이다. 엘도라도는 어디에 있는 걸까. 대인은 과연 보물이 가득한 황금의 땅, 돈의 이상향이라 불리는 엘도라도에 도착한 것일까. 엘도라도는 원래 스페인어로 ‘황금을 칠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콜롬비아의 인디언 마을에는 1년에 한번 씩 추장의 몸에 금을 바르고 뗏목에 보물을 싣고 가 그것을 물속에 던진 후 그 물로 금가루를 씻어내는 풍습이 있었다. 16세기 중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이 추장을 ‘엘도라도’라 칭했던 것이다. 금을 몸에 바르고 씻어 내린 추장이 엘도라도였다면 어쩐지 스스로 불꽃이 되어 돈을 내던진 대인의 결연함과 닮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황금인간이 와전되어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가 되었다니 인간을 돈으로 인식한 것이 대략 돈이 인간이라는 고대의 시와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소설에서마저 엘도라도로 다다르는 방법은 자신이 돈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 참 뼈아픈 오늘이다. 엘도라도는 궁극에 우리가 도착하고 이르러야 할 곳이 아니라 영원히 가지 못할 이상향으로 남겨두어야 할 곳은 아닐까.

이 소설은 돈처럼 분명하고 돈처럼 아스라하다. 이토록 현실을 극명하게 자각토록 한 이 소설이 어쩐지 오래 기억될 듯하다. 문득 돈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돈을 만들겠다고 하는지 처음부터 독자를 질타하던 소설 속 스승이 그립다. 결국 위조지폐를 계획하고 제작하여 실행하는 모든 과정은 위조된 이야기, 이야기를 위조하는 소설의 창작과정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교한 위조지폐를 ‘슈퍼 노트’라고 하는 것도 어쩐지 정교한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은행자동화 기기를 통과하는 초정밀 위조지폐처럼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철벽같은 독자의 가슴을 관통하는 섬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얼마나 위대한 엘도라도일 것인가. 위조지폐의 대량유통은 폭탄 테러보다 무서운 경제 테러라지만 위조이야기의 적법유통은 감동과 교훈의 테러가 아닐까. 오늘 이 작가의 이야기 제조과정과 결과를 마주하고 모방심리가 생겨나는 것은 나로선 꽤 흥분되는 일이다.(위조지폐 모방심리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내겐 은서와 준성처럼 소설이라는 위조현장에서 이야기와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역사적 순간인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0과 1이 반복되는 슈퍼 레이더 시리얼 넘버처럼 소중하고도 유일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주어진 이야기만 읽다가 내 자신이 이야기를 창조하고 싶다는 욕망이 어쩐지 주어진 돈만 쓰다가 스스로 돈을 만듦으로써 욕망의 공급자가 되려는 이 책의 주인공과 같은 처지인 것만 같다. 그들이 (불법으로)돈을 만드는 일이 결국 (합법으로)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로 전이될 수 있다면 이것은 소설의 시공간에 편입한 독자참여가 아닌 생생한 삶의 참여인 듯 하다.

돈을 따라 만드는 일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부질없는 일이라면 이야기를 좇아 만드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아닐까. 돈이 인간이고 인간이 이야기이므로 이야기가 돈이 된다면 더욱 좋겠지. 허나 언젠가는 나도 돈되는 인간이 아니라 누구보다 인간된 이야기를 제조해 내고 싶다. 돈되는 이야기가 아닌 돈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 그래서 돈 없이도 너무나 행복해 그 소중함으로 평생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전했으면 좋겠다. 돈없어도 좋을 그 날을 기다리며 나는 현재 돈 없는 나를 조금은 용서하고 위로하고 싶다. 중요한건 오늘 돈이 없어 알게 된 세상의 법칙과 돈이 없기에 발견한 내 본질인 것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돈과 인간의 함수관계, 돈으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의 진실일 것이다. 언제나 내 이야기는 내 돈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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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0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은 정말 말씀 그대로 분명하면서도 아스라하죠.
우리는 항상 돈에 대해 이중적 감정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 듯 해요.
돈이 고민의 80%를 해결해준다죠, 그런데 그게 미국 달러 기준 연봉 15000불 정도까지라네요.
그 이상이 넘어가면, 돈의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아진대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 보니, 돈을 가지면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나봐요.
중간에 언급하셨듯이 소설에서 돈을 위조하는 과정은, 마치 돈을 쫒아가는 우리네 인생 같기도 하고
그 자체가 행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면,, ㅠㅠ

그러게요, 항상 나의 이야기는 돈보다 소중한거죠. 좋은 글 읽고 갑니다.

한사람 2011-06-01 10:30   좋아요 0 | URL

예..이 책읽고 돈생각을 좀 오래해보았는데요..
돈있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닌데,
돈없으면 불행한건 맞더라구요
문제는 돈의 양이 아니고
만족도의 기준인것이죠..

살면서 저도 모르게 그 기준이 날로 높아진다는 것이
오늘을 사는 슬픔이구요...ㅠ.ㅠ

이 글이 썩 제 맘에 들지 않는데 좋은 글이라 해주셔서 고마워요 ~
 

 

저는 한권의 책은 한 명의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인연관계라 믿어요.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이라 해도 비슷하지만 또 다른 사람이라 믿습니다. 읽고 싶은 책도 있고 읽어야 할 책도 있고, 읽기 싫지만 의무적인 책도 있고 또 우연히 읽게 되는 책도 있죠. 사람도 그렇잖아요.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야 할 사람, 만나기 싫은 사람, 우연히 스치는 사람...

그래서 저는 한 권의 책을 알게 되고 그것이 손에 들어와 끝내 가슴에 들어오는 책은 분명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서점에서 책을 들추어 볼 때도 마찬가지죠. 어쩌면 우연을 앞세운 필연인지 모르겠어요.

지난 주말에 우리 사이 오래 끌었던 관계, <깊은 밤, 기린의 말>이라는 책을 덮고 무언가에 이끌려 담 날 아침 리뷰를 적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 책은 의무적인 만남이었어요. 송구하게도 어떤 인연으로 출판사로부터 서평을 부탁받은 책이었습니다. 저라는 사람을 모르지만 제 서평을 보고 또 다른 서평을 부탁받았던 경우가 생각해보니 한 번 더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책을 아직도 손에 들지 못했어요. 꼭 누가 주선해 선보러 나가는 자리 같았거든요. 부탁하시는 분의 성의를 거절하지 못해 약속은 받아놓고 지키지 못한 경우지요. 마음에서 우러 나오지 않는 글을 쓸 확률이 반 이상이라는 생각에 미루고 미루다 보니 작년에 딱 한권 그 책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책이 너무 좋다, 감동받았다고 한들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 없지만 글을 쓰다보면 글이 자신을 밀고 나갈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아직 아마추어이고 서평으로 돈버는 사람도 아니지만 꼴에 느끼지 않은 글은 적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은 전문가 수준입니다. (돈도 안받으면서 거짓말 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

<깊은 밤, 기린의 말>은 워낙 훌륭한 단편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기 때문에 거짓 및 과장의 서평을 쓸 여지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받아들고 한 달간 제대로 읽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탁하신 쪽에서 저에 대한 기대감을 잃어버릴 시간을 보낸 후에라야 글을 쓸 수 있었어요. 그런데 독서에도 다 때가 있는 것인지, 뜻밖에도 이 책을 통해 아름다운 문장가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인연이라는 것이죠.

바로, 최일남 작가입니다. 이분의 국어 사용은 제가 접해본 한국의 소설가중에선 국보급의 수준이었습니다. 이미 문단에서 오래전부터 국보급의 대접을 받아 오셨고 여러 차례 문학상을 수상하신 분이니 일개 동네 서평자인 제가 뭐라고 새삼스럽게 이런 평가를 할까...싶지만 저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 같은 이분의 글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이상한 순정을 발동시키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제 아침 이분의 최근 산문집을 주문했는데 기특하게도 오후 세시 전에 총알 배송이 되어 저는 어제 이분과 좋은 저녁 한때를 보내었습니다. 읽어야 할 다른 책이 있었지만 저는 <풍경의 깊이, 사람의 깊이>라는 책에 푹 빠져 다른 모든 걸 잊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 바로 지난 일요일에 청승을 떨었던 이유까지도 잘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책을 읽게 되는 과정은 마치 영양소처럼 그 음식이 몸에 필요해 먹고 싶어지는 과정과 같지 않을까요.



<풍경의 깊이 사람의 깊이 / 최일남 (문학의 문학)>

최일남 작가의 글은 운율이 있는 시처럼 마음을 적십니다. 이분이 음악에 대한 회상을 소회하는 꼭지가 두어 개 있어요. 자신의 일생을 거쳐 온 노래들을 정리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돌이켜보는 자리였죠. ‘비목’이라는 가곡에서부터 ‘고향의 봄’, ‘반달’, ‘아리랑’ 같은 우리 민족의 노래와 ‘오 쏠레 미오’, ‘번지 없는 주막’, ‘테네시 왈츠’, ‘체인징 파트너’, ‘사랑했어요’등 장르불문한 노래가 우리네 인생에 끼친 영향을 되짚어 주시더군요.


 

 

  


" 간절한 그리움이나 절실한 동경이 무망한 나이를 퇴색한 가사의 시큼한 잔정으로 메우기 위해 노랫말에 더 쏠리는가. 무엇에 대한 사무침이 도대체 없어 아니라고도 못하겠는데, 어떤 때는 또 어느 가수 어느 절창의 외마디 곡조가 열 배 백 배 낫다. 내 마음 내가 모를 노릇이다. "

 


" 그런 울림이 강퍅한 시대를 위무하는 자기 버전 구실을 하는 수도 있다."

" 발상이 너무 한갓지다면 그만이지만 노래는 그처럼 일상에 쓸모가 많고 요사바사하다."

"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어쩌다 축축한 쪽으로 감정이 기운 자는 우군을 만난 기분으로 더욱 곬로 빠지기도 한다. 살다 보면 그런 경우가 참 많다. 삭은 정서를 모아 등에 업고 둥개둥개를 할 것까지는 없어도 일부러 정신적 침잠을 배가시키려 든다."



살다 보면 그럴 때. 삭은 정서, 오래된 상처, 지금은 다 잊었다고 여겨온 묵은 감정. 새삼 다시 꺼내어 나만 힘들다 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쩌다 우연히 들은 노래 한 마디는 그동안의 이 악물었던 모든 것을 일순간에 허물어 뜨리지 않나요.

어제 저녁, 임재범의 하차소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던 어떤 아나운서의 자살소식은 어지럽고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일찌감치 TV를 끄고 독서라는 벗에 의지를 하려고 리모콘을 드는데 그만 잘못 눌려진 채널에서 어느 가수가 흘러간 옛노래를 구슬프게 부르더군요. 대충 부모님을 그리는 익숙한 노래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드라마고 노래고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사정없이 끄려고 하던 순간 왜 부모님이 생각나는 거지요?  왜 울컥하게 눈물이 맺히는 것이죠?  저는 가요무대 보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심지어 그런 프로 보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거든요. 예를들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같은 분들이요. 그랬어요. 그 프로는 내 부모님이 즐겨 보시던 프로였고 나는 그 순간이 마치 그분들이 자주 가던 음식점이라도 들어 가게된 것처럼 발길이 멈추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그분들은 가시고 가게만 남은 그 자리에 들른 황망한 심정이었달까...

최일남 작가는 말합니다.

" 모든 노래는 물레방아를 돌리고 흘러가는 물이 정녕 아니라고 믿는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숨었다가 저를 알아주는 사람앞에 나타나 제 할 일을 하고는 다시 자취를 감출 뿐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면 됐다. " 


요즘, 제 할 일 톡톡히 하는 노래들을 생각합니다. 또 어디선가 꼭꼭 숨어 있을 그들을 생각해요. 혹시 한 곡의 노래도 한 명의 사람이 아닐까요. 임재범이 그랬죠. 그 노래는 내가 부른 것이 아니고 어디선가 내 속에 들어온 무엇이 나를 노래 부르게 했다고요.

노래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네요. 그런데 왜 그 노래들에 보기좋게 관통당한 저는 이렇듯 정처없이 흘러가는 것일까요. 웃기죠. 멀쩡히 서 있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야 말로 바람처럼 구름처럼 모든 곳을 떠도는 존재들이 아닐까요. 어떨 땐 책속에 어떨 땐 노래속에 들어가 사람 아닌 척 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슬프고 많이 아파서 살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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