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림픽의 눈물


평창 올림픽 유치 성공을 보면서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마도 우리 민족은 주기적으로 저렇게 하나된 마음을 쏟아 붓고 그 성공을 확인하고 또 같은 마음으로 얼싸 안아야 내일의 희망을 다질 수 있는 민족이 아닐까 싶다. 그때 공감하는 감격의 환희와 뿌듯함의 카타르시스야 말로 다른 무엇이 아닌 긍지높은 대한민국의 한사람인 걸 위안삼는 행위임을 깨닫는다.

모두 같이 동시에 울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만 보면 우리의 그때 표정도 사뭇 다른 나라의 울컥과는 좀 다른 편인데 완전한 기쁨이라기 보다는 서러움에 복받치는 슬픔의 미학이 배어있다. 거기까지 올라오는데 고생했던 그간의 서러움이 목을 타고 동시에 올라오는 것이다. 많이 서러웠을수록 울음이 터지는 순간의 표정이 고통스러운게 아닐까. 이 심리 밑바탕에는 (식민지 국가, 분단국가로서)다분 오랜 열등감과 패배감등이 숨어 있는 듯하다. 어떤 핍박과 무시, 비난과 질타를 받아온 자 특유의 극적 해방감이 스스로를 옥죄던 열등감과 정면에서 대치하면서 스파크를 일으키는 순간의 본능적 고통일 터이다.

그러면서 자연 내 고생도 고생이지만 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뛴 동료의 고생에 눈물이 나는 것이다. 나는 우리네 고생방식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 얼싸안고 부둥켜 우는 성공의 습관만은 어느 나라보다 아름다운 관행이라 생각한다. 평창 올림픽이 2018년이니 그때가 되면 내 나이 오십을 바라본다. (그걸 자각한 순간 눈물이 싹 가셨지만 ㅋ) 지금의 내 세대는 올림픽 정신을 대학입시 다음으로 쑥쑥 함양하며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의 올림픽을 더 구경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살면서 겪어온 올림픽은 분명 미래 희망의 아이콘이었던 것을 부인하지 못할 듯하다.

내가 중학생 때 84년 LA 올림픽, 고등학생 때 88서울 올림픽, 대학생 때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솔직히 그 이후론 이전보다 선명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2002년 월드컵까지 헝그리 스포츠정신은 개발도상국이라는 네이밍에 가장 부합하는 이데올로기였다는 생각이다. (그런면에서 전두환은 용의주도했다)

터져나오는 올림픽 눈물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먼저 84년 LA때 구기 종목사상 첫 은메달이었던 여자농구. 그때 중공을 물리치고 박찬숙이 공을 땅바닥에 꽂으며 동료들과 얼싸안고 부둥켜 울 때.(여름방학이었고 무지 더운 날 오후였다) 88년 양영자, 현정화 탁구 복식조가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을 때.(모의고사를 앞둔 독서실 1층 동네 언니네 가게에서) 92년 스페인 몬주익-바르셀로나는 기억안나도 몬주익은 기억나네-광장에서 황영조가 마라톤 1위로 골인할 때.(알바하는 회사 회의실에서)

세 번의 얼싸안음을 마지막으로 나는 사회생활 이후엔 올림픽을 기억하지 못한다. 90년대는 나의 이십대였고 그땐 너무 바빴고... 하루하루가 올림픽보다 치열했으니까. 아마도 그렇게 나이들어 헝그리 정신을 잠시 잊고 한참 뒤 4강 신화에 놀라움과 우월감을 맛보았던 것 같다. 홍명보의 만세는 곧 대한민국의 만세였으니까. 우린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역대 모든 대회에선 항상 평소성적 이상의 기적같은 승리로 세계의 주목을 받아온 기특한 이력이 있었다. 

김연아의 금메달은 치고박는 경기가 아닌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경기에서도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고 미국보다 유럽에 가진 열등감도 많이 사그라 들었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청소년 시절 도저히 범접할 수 없었던 독보적 존재 카타리나 비트를 만장일치에 가깝게 이겨버린 김연아를 보니 어찌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발표가 끝나고 비트는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는데 나는 그 눈물에서 아쉬움과 슬픔, 미련과 후회보다는 그저 개인적으로 자존심이 상해 도저히 결과를 인정할 수 없어 하는 선진국 舊 피겨여왕의 오만함을 엿보았다. 어찌 우리가. 어찌 내가... 저들과 저 친구에게... 하는. 

 

#2. 중년의 눈물


눈물을 정리하고 다시 눈을 떠본다. 엊그제 덮은 책(데리다 평전)에서 데리다라는 철학자는 우리의 눈이 무엇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굉장히 시적인 말을 했다.(내 보기에 데리다는 철학자가 아니라 시인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동종업계로부터 ㅋ 비난을 받은게 아닐까) 눈물을 흘리는 순간은 곧 눈이 머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순간엔 눈물 흘리는 나도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도 볼 수 없지만 그렇게 나 자신을 알 수 없는 순간이 바로 세상과 타자에게 마음을 열어젖히는 순간이라 말한다. 이는 곧 내 눈이 멀어야 내가 아닌 내 앞의 타자, 그리고 그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우리가 눈뜨고 보는 것은 세상이 아니고 실은 그들에 비친 나라는 것이다.


우린 요 며칠
각자 눈이 멀어 내가 아닌 타인들과 그리고 그들이 속한 우리 세상으로 한껏 열려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열어젖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타자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나도 그래왔지만 마찬가지로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고생해온 남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아닐까.

서로가 네 탓이오 소리를 높이다가 이럴땐 모두 그래 당신도 수고했소, 하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또 주말을 앞두고 있다.
이제 다시 눈을 떠 나를 바라본다.
조금은 더 달래고 싶은 마음에, 아직은 더 울고 싶은 마음에
달달한 에세이를 주문했고 마치 위로해 줄 사람이 내게로 달려오는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다.
신달자님의 위로는 (주제넘는 말이지만) 통속과 신파속에서도 순수의 눈물을 건질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엄마를 잃은 내게 이분의 한마디가 네 고생 먼저 해본 내가 잘 안다는 말씀으로 들려온다.

감동은 무엇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만나는 감동을 마음으로만 삭이지 말고 자신이 다시 감동이 되는 일로 연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음속에 그 어떤 이야기가 있어도 좋다. 가능한 독하게 마음을 추스르는 이야기를 앞세워서 자신이 지금 하려고 마음먹은 그 일의 계기로 삼아라.  


자기를 일으키는 일이 곧 모든 마음속의 화를 잠재울 수 있는 일이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고 자신을 심술로 가득한 독 안에 가둬 둔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 -13p, 신달자, 민음사>

 

몇 년전 마흔을 앞두고 이분의 에세이를 읽었는데 그때 많이 울었더랬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죽도록 사랑해 결혼한 남편을 먼저 보내는 순간이었는데 그때 작가는 이런 고백을 했다.

죽음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숨넘어가는 일이, 숨이 딱 멎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나는 그때 보았다. 내가 말했지.

“우리 다음에 다 만나요. 우리 다함께 만날 거예요.”

그 말이 떨어지자 그는 순하게 눈을 감았다. 다시 만난다는 그 말에 그가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만나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겠다는 듯이 죽음을 저항하다가 다시 만난다는 약속을 받고 그는 내 가슴에 안겨서 그 전쟁같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215p, 신달자, 민음사 >


나는 저런 말을 돌아가신 내 부모님에 할 수가 없었다.(저 책을 읽은 시점은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생각해보니 그냥 ‘잘가라’는 말보다는 ‘다시 만나자’는 말이 참 따스하고 듣는 입장에선 외롭지 않게 눈감을 수 있겠다 싶었다. 먼저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따라간다는 생각을 건네지 못한 게, 그게 너무 후회스러워 가슴을 치며 울었던 거 같다. 이제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누가 죽으면 혹시라도 임종을 지킬 기회가 온다면 누구에게라도 저렇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누구라도 내게 저렇게 말해준다면 좋겠다.

그렇게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다시 만난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품고 순하게 눈을 감고 싶다.

주말을 견디자. 우리 모두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쯤이야 얼마든지 키워내며 잘 살고들 있지 않은가. 그 이루어질 수 없어 보였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들 얼싸안은게 아니겠나. 국가의 희망과 개인의 희망을 동일시하는 이 민족주의적 가치관, 그것이 내가 지난시절 올림픽을 통해 배우고 쌓아온 정말 주장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서러운 방법이었다. 이번주까지는 배운대로 희망을 써먹어 보고 싶다. 나머지 서러움쯤이야 내게 달려오는 책들과, 그리고 이 글을 나누는 당신과 함께 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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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7-08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동계 올림픽 유치된 게 의외로 덤덤해요.
물론 그들의 수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겠는데,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엔 명암이 있다고,
88때 그 화려함 이면에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뤘다잖아요. 이도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저거 유치하느라 돈을 얼마를 썼을까 싶기도 하고,
암튼 아직 실감이 잘 안납니다.

신달자씨가 또 에세이를 냈군요.
20때 시절에 참 많이 읽었는데...
그땐 에세이가 뭔지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아요.
그다지 대접받던 분야도 아니고.
지금은 에세이가 좋아지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40대 때 읽은 신달자씨의 에세이는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 올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한사람 2011-07-08 14:24   좋아요 0 | URL

ㅋ 저는 발표되던 순간에 아예 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같은데요 ㅋㅋ
제일먼저 트윗에 이외수 작가가 올려주시더군요
뱅쿠버도 적자였고..88 올림픽 때문에 노점상 철거된 것들도 생각났지만
그 순간엔, 기뻤어요 !!
(제 친구는 올림픽 꿈나무였는걸요~)

가끔은 신달자님 같은 시인이 쓴 여자만을 위한 에세이가 저는 좋더라구요
겉으로 보기와 달리 사연이 많은 분이더군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보물선 2011-07-08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진행하는 제주포럼에 신달자 선생님이 강연자로 오셔.
http://jejuforum.korcham.net

그래서 <나는 마흔에...>를 읽었어.
너무 기구하셔서 민망하기까지... 너무 그분의 힘든 과거를 다 알아버린것 같아서...

뵈면 그냥 막 좋아해 드릴라구~
따님이랑 동행하신대!
늙으막을 멋지게 보내시니, 복 받으신거겠지??

한사람 2011-07-08 17:31   좋아요 0 | URL

잠시 건너 갔다왔는데 시인으로서 인문학 강의를 하시는구나
어디서 들었는데 강연이 무척 감동적이라
다들 팬이 된다고 하던걸..부럽다 ㅋ

그책 좀 나이 들어서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야
허긴 어릴땐 그런 책들이 눈에 가지도 않지만~

주말 잘 보내!!!

마녀고양이 2011-07-0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중년이 주말을 견디는 방법'에 차마 댓글을 못 다는 것은,
한사람님과 동갑인 제가 이 글에 너무나 공감을 한다면.....
이제 빼도박도 못 하게 중년임을 자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한눈으로 홀끗거리며 갑니다. ^^

중년, 멋지게 견디시기 바랍니다.

한사람 2011-07-08 23:11   좋아요 0 | URL

그 심정 아주 잘 알거 같아요 ㅋㅋ
저도 중년이라는 호칭이 너무나 싫어서 일부러 붙여준다고 할까요
그냥 아무 감정없이 느껴지게 되길 바라면서요
죽는날까지 중년으로 살려구요 ㅋ

마녀고양이님이 저와 갑장인지는 몰랐어요
더 반갑고,
좋아요

좋은 주말 되어요^^

cyrus 2011-07-08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결과 발표에 대해서 긴장을 좀 했는데,, 발표 전부터 확정된다는 기사 내용 때문에
확정 소식을 들어도 뭔가 김이 샌 느낌이 들었어요.

한사람 2011-07-08 23: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분위기가 되는 분위기였잖아요
솔직히 대통령까지 사활걸고 피튀기는데 거기서 안되었으면
어쩔뻔했어요~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발표되던 순간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ㅋㅋ
 
[데리다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1. 집약적 VS 해체적

   데리다가 심오한 철학자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언뜻 매력적인 네이밍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무래도 그가 주장한 ‘해체‘라는 단어의 탈철학성 탓이 아닐까. 자칫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마치 프랑스 미용제국의 창설자 자크 데상쥬(Jacques Déssange)의 이름처럼 패셔너블하거나 시크하기까지 하다. 데리다를 말할 때 ’해체‘와 더불어 언급되는 ’유령‘의 개념도 어쩐지 (우리로선)통속적인 뉘앙스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그를 (제대로)모르고 단지 이 세 단어(데리다-해체-유령)의 조합만으로 데리다를 떠올린다는 건 니체-신, 하이데거-존재, 칸트-이성, 벤야민-아우라 식의 도식적인 연상작용과 절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 일반 독자인 나는 이 책이 어느 정도 그러한 무지에서 탈피할 운좋은 계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그 절반의 기회는 얻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직 책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듯하다. 그의 ’해체‘는 표면적이지 않았고 데리다로서의 ’유령‘은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모든 개념이 반대로 다가오는 이 현상이야말로 데리다라는 철학자가 긍극에 의도한 순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렇다면 내가 그를 잘못 이해한 것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해본다. 하여, 이번엔 이 책의 서평을 쓴다기 보다는 그냥 어려운 개념을 내 나름의 내 식으로 정리한다는 의미가 클 것 같다. 사실 내게 철학자의 책은 그를 통해 내가 얻고 내릴 수 있는 감상과 결론보다는 언제나 그 이해도의 정도에 있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보다 얼마나 알아 들었느냐가 관건인 문제였다. 하지만 알아 들었다고 그것을 말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앎이 느낌이 되고 그것이 말할 수 있음이 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아직 내 수준에서 그 단계적 논리를 강신주 교수같이 친절하게 해석해주는 선생님 없이는 혼자서 난해함을 극복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느껴진다. 나는 이 책을 꽤 오래 붙들고 있는 경우였는데 마치 마주하는 시간만이 나를 탈출시킬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자의적으로 보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건 책 덮고 나서 그리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나는 이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해 서평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우선 집약적, 그리고 해체적이다. 해체를 말하기 위해 많은 걸 모았고 데리다를 평하기 위해 그것들을 해체했다. 데리다가 평생토록 연구한 성과들을 좇아가며 시대와 사람을 연관 키워드로 배치, 재정리하는 식이다. 역자가 말했듯이 ‘사적인 기록을 담은 전기라기 보다는 공개화된 사상을 기술하는 개론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후반부엔 데리다가 저술한 책을 위주로 첨예한 논점들을 정리하고 있어 어찌 보면 역자의 전문적인 서평을 모아놓았다는 생각도 든다.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 데리다의 논지를 대변하는 것인지 그를 통한 역자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는 것인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원래의 데리다를 이해해야하는 과정과 데리다를 평가한 역자의 견해를 이해해야 하는 상황(왜냐하면 역자는 언제나 데리다를 동의한 것이 아니므로)이 동시에 병렬적으로 전개됨으로 해서 독서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즉, 제이슨 포웰이라는 저자의 데리다 ‘읽기’와 ‘전하기’를 간과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는 데리다가 아니면서 데리다를 말하고 데리다 철학을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데리다를 이 책의 저자처럼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뜻과 같다. 내가 행간에서 느낀 기류는 그러한 자신의 책무를 잊지 않으려는 듯 객관적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는 것이고 그 태도를 기저로 데리다의 순수 지향성을 말하면서 외려 그다지 순수하지 않은 데리다를 증명해 보이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단은 독자 몫으로 남겨야 하겠지만 이 책은 이미 평가가 예정되어 있는 경우였다. 한마디로 데리다 판단 위에 덧칠된 그의 판단은 데리다 철학이 아니기 때문에 데리다 초보인 나로선 그 부분이 가장 힘겨웠다. (다른 평을 하기에 나는 수준이 되지 않으므로) 또 하나 1980년 대 이후 데리다의 저서가 더욱 많이 소개됨과 동시에 통시적, 공시적으로 등장한 전시대, 동시대의 철학자 들은 더 입체적인 지식과 주의적인 맥락을 요구하는 관계로 일반 독자 입장에선 전문성의 한계를 그대로 인식한 채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데리다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닌 데리다를 잘 아는 사람을 위한 책이었다는 서운함을 느끼며 이 책을 덮었다. 학교다닐 때 참고서적 두서너 권을 같이 들고 다니며 이 책과 비교하듯 읽었어야 할 책이었다. 이 책에도 심층적으로 언급되는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 <우편엽서>같은 책을 한 권도 독파하지 못한 채로 데리다를 말해야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힘겨움 덕분에 서양철학사에 등장하는 거물급 철학자들을 근접한 위치에서 훑어본 느낌은 우쭐할만큼 만족감을 선사하긴 했다. 아마 현대철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이런 수고가 당연히 반가운 실정이겠지만. 

 

2. 유령적 VS 순수적


   
 
데리다 철학은 유령의 존재론이다. 다시 말해 특히 자기 자신, 글 쓰는 이, 국가나 민족, 철학 그 자체를 포함하는 그 모든 것들의 비실체성을 주시하는 유령적 글쓰기이다. - 27P
 
   

   내가 이 책을 덮으면서 데리다를 느낀 것은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대로 유령처럼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유령이라고 생각한 데리다는 유령인 자신을 말하고 그것에 존재감과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평생을 살았던 것은 아닐까. 데리다는 원래 자키(Jackie)라는 미국식 영화배우의 이름을 거부하고 프랑스적이고 예술적인 자크(Jacques)로 개명한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자키는 죽은 형에 대한 대리 보충물로서 상징되는 문자이고 자크는 프랑스의 흔적을 보충하는 문자인 것이다. 데리다에게 프랑스는 유령과 동일시되므로 자크라는 이름은 유령인 자아로서의 이름도 되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름을 스스로 바꾼 정황이 어떤 은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단서라 생각했다. 알제리 출신 유대인으로서 그가 겪은 청소년기의 반유대주의적 경험도 그의 사상에 밑바탕이 되었을 터이다. 데리다는 프랑스의 식민지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환경 및 가족으로부터 자기 실존을 자각하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데리다의 물리적 고향은 촌구석 알제리였지만 심리적 고향은 유령이 지배하는 프랑스였고 미래의 고향은 원래 자신인 자키가 살아야 할 미국은 아니었을까. 데리다는 인생의 장년기부터 미국에서의 강연으로 명성을 얻게 되고 마치 영화배우처럼 자신을 연기하고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이는 이름을 개명할 때부터 계획된 사실처럼 각본화된다. 그것은 비난의 여지속에서도 자신에게 연기를 가르쳐준 하이데거나 푸코, 알튀세르보다 뛰어난 연기를 바탕으로 그들을 제치고 마침내 주인공이 되는 어느 배우의 일생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궁극에 원한 것이 기존 무대의 질서와 고정관념에 대응한 자기 연기의 (확인으로서)순수 정점이었다면 그는 자기관리를 아주 철저히 해온 배우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의 연기철학은 자기 존재를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완성되는 삶이었고 그것은 곧 자기 삶의 방식대로 세상과 타자를 완성하는 논리로 발전한다.

    어떻든 순수라는 개념은 타락이나 오염의 상대적인 대치점을 상정하게 되어있다. 단독자로서 순수하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데리다에게 순수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데리다가 서구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해체하고 (그것으로 순수하고고)싶었던 것은 순수해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애초부터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순수혈통의 프랑스인이었다면 더 이상 순수에의 집착은 필요치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순수하지 못한 태생적 요인과 환경은 사유와 언어에서 순수에 결여되는 현상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 욕망은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순수를 증명하고 싶었던 자아실현의 욕망이면서 순수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출현한 개념은 아닐까. 그것은 그가 그토록 해체하고 싶었던 기존질서가 사실은 자신이 간절히 추구하던 욕망의 질서였을 수도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자신을 부정해야 하므로)  데리다는 해체의 운명을 자기 바깥으로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데리다는 독일과 존재를 동일시한 하이데거식의 순수에 자극받아 하이데거식으로 순수할 수 없는 데리다로서 하이데거 이상으로(혹은 하이데거만큼은) 순수하기 위해 자신과 조국, 타자를 공평한 유령의 입장으로 대응시킨 것은 아닐까. 본질적으로 모두 유령이고 그 나머지는 희미한 흔적일뿐인 이 세계야 말로 존재하지 않는 순수의 표상, 부재하는 자신의 근거가 아닐까.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면 그들은 자신보다 순수할 것이 자명하기에.


3. 차이남 VS 연기됨

   데리다의 일생은 프랑스 철학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시공간을 살았다 할 수 있는데 놀라왔던 것은 최상위층만 입학한다는 교사, 교수 양성기관인 고등사범학교가 바로 오늘날 현대철학의 산실로서 기능했다는 것이었다. 데리다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은 이곳의 학생이거나 선생이었다. 데리다를 중심으로 인물관계도를 그리면 그자체로서 현대철학의 계보가 프리젠테이션 되는 형국이었다. 프랑스가 왜 영국이나 미국 혹은 독일까지도 인정하지 않는 우월감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인상깊었던 인물은 푸코의 지도교사이면서 데리다의 스승이었던 같은 알제리 출신 알튀세르였다. 데리다가 치밀하고 중립적인 성향의 인물로 느껴졌던 건 알튀세르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같은 처지의 스승이 자기 분열로 가족을 파멸한 범례는 그에게 에피소드를 너머 트라우마가 되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데리다의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사적으로 데리다가 그의 지인들과 어떤 감정적 관계를 이어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풀어가는 이성적 사유는 다분히 문학적, 감성적으로 이해되었다. 데리다가 문학에 기초한 수사법을 사용해 철학계의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그의 감정을 대변한다고 이해되었다.

   
 
유령적 현실은 낱말들이 아니라 흔적에 의해, 의미가 아니라 차이에 의해, 그리고 자발적인 발화된 낱말들이 아니라 글쓰기에 의해 구성된다.  -123p
 
   


   데리다를 확인하다보면 해체와 유령다음으로 ‘흔적’과 ‘차연’이라는 개념이 빈번하게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들이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라 생각하는데 눈을 감고 생각하면 이성보다 훨씬 가깝게 파악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다. 이 개념들은 왜 이성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았을까. 로고스는 ‘이성’이라는 뜻 외에도 ‘목소리’라는 뜻도 있다. 서구에서 이성의 사유는 곧 목소리의 실현이었다. 그에 반해 ‘문자’는 로고스 바깥에 위치한 또 다른 이성(異聖)이다. 그리스 중심의 로고스, 즉 서구철학은 목소리를 문자언어에 우선시하며 문자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이는 곧 알파벳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서구 열강이 상형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등 아시아보다 우월하다는 서구민족주의의 일환에 불과하다. 데리다는 오랜 세월 서구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로고스 중심주의, 구조주의 철학, 제국주의가 주장하는 자신들의 순수성을 정면에서 반박한다.(고들 전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데리다는 자신을 키워낸 순수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순수를 지향하는 방법이 자신처럼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주장했다고 본다. 이른바 (오랜동안) 당신들이 순수면 (지금부터)나도 순수다는 식의. 데리다 해체 사상의 핵심에는 바로  ‘문자’에 대한 재인식 및 위치선정, 그리고 지위부여가 가장 하층구조에 버티고 있다. 마치 언어학자처럼 문자와 문자 사이를 유영하며 그 사이 벌어진 사건을 해부한다. 이 책의 부제는 ‘순수함을 열망한 어느 유령의 이야기’이다. 삶이 애초부터 순수한 기원이 있(어 왔)다는 믿음을 향해 그러한 기원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문자라는 흔적에 의해서만 보충된다는 데리다였다. 그에겐 실종된 신, 부재하는 고향, 비현전하는 기원만이 의미있어 보였다. 존재라는 주제에 관한 구조와 체계는 결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더 순수함을 밝히기 위해) 문자와 문자 사이에 벌어진 사건 즉 ‘흔적’과 ‘차연’의 의미를 주장한다.

   
 
차연이 철학을 위한 공간을 열어젖히는 방식으로 철학에 선행하여 철학을 산출한다. -185p
 
   

   그가 주장하는 ‘차연’은 기호나 개념, 혹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두 장소 사이의 여백이며 양쪽 모두에 속하는 교집합이자 경계의 지위를 가진다. ‘현전은 비현전하는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고 차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흔적과 차연의 역학관계를 가만히 따져보면 우리가 인식하는 어떤 개념은 문자의 흔적들로 이루어지며 문자와 문자 사이의 시공간인 그곳으로부터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공간화와 시간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거의 시적 작법의 발상이 아닌가. 또한 유령의 개념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는 곧 자신의 본질을 분해한 것과 같지 않은가. 차연이 ‘결코 어딘가 제한 될 수가 없고 삶과 죽음 사이의 중간자처럼 그러나 둘 다 아닌 채로 존재도 없고 존재자도 없고 상호간의 반발력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현상일뿐’이라는 수사는 A(알제리)와 B(프랑스) 사이에서 삶의 시원을 찾은 자기 삶의 현상학적 분석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이해한 차연은 데리다 수사법으로 완성된 문자언어의 승리였다. 차연différance은 차이différence의 중간철자 e를 a로 바꾸어 데리다가 만든 조어였다. 차이와 연기 양자를 한꺼번에 뜻하는 차연에서 A는 중요하다. 두 단어는 발음상 차이점이 없는데 이는 곧 말하여지는 소리로는 변별력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며 서구철학이 중시하는 목소리에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결과였다. 데리다가 주장한 문자의 흔적에 지나지 않아보이는 A는 피라미드를 닮아 생생한 현전을 방해하는 문자의 무덤으로 상징된다. 즉 무덤같은 철자 하나가 문자사이에 배치되면서 그 흔적은 더 이상 흔적이 아니라 엄정한 실존이 되는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와의 게임을 즐긴 사람이었다. 유령이 될 문자를 찾아 개념을 해체시키고 그곳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동력삼아 자기 삶을 보충하는 지적유희의 종결자는 아니었을지.

   이를 내 수준에서 풀이해보면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온 다음 날 아침을 생각해보자. 상대는 더 이상 내 곁에 없고 애증의 시간도 끝나야 하지만 우리는 상대를 보지 못하고 그의 ‘원본이 부재’한 상태에서 더 심한 애착을 느끼게 된다. 우리말로 그리움이 사무친다고 할까.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의미하는 소품이라도 건네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품에 안고 잠이든다. 이는 보이지 않는 미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증오도 마찬가지다. 상대라는 원본을 대리하고 보충하는 것은 그의 실재가 아닌 부재로 근거하는 상대의 흔적이다. 우리는 그를 대리하고 보충해주는 흔적을 통해서만 끊임없이 도래가 연기(지연)된 자로서 상대를 만난다. 여기서 상대가 지금 여기 현전하지 않고 연기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원본)는 자신을 대리 보충하는 흔적(소품)과 일정한 차이를 지닌 것으로서만 도래한다는 것이다. 저곳에 있는 상대와 이곳에 놓인 소품은 항상 그와 나사이의 물리적 거리 즉 차이이면서 그와 다시 만나게 될 미래의 시간을 상징한다. 연기(différer-시간적)와 차이(différence-공간적) 이 둘의 의미 모두를 지니는 차연(差延-differance)이 데리다가 말하는 대리보충 논리의 핵심인 것이다. 루소는 데리다보다 먼저 자신의 연인인 바랑부인을 예로 들며 역설적이게도 이 차이와 연기만이 연인이 자신에게 도래하는 유일한 방식이라 말한다. <고백록 Les Confessions, 1769> 어찌보면 흔적은 사차원의 메타스페이스를 의미하는 듯하다. 데리다에 의하면 하나의 원본, 즉 기원은 도래를 연기하며 바로 그 연기되는 방식으로 다시 원본을 출현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사라지는 방식이 곧 드러나는 방법임을 역설하는 데리다식 수사법이다. 죽어가는 방식이 곧 살아가는 방법임을 암시하는 논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기도 한 죽음을 꿈꿀 뿐이다. -212p
 
   

 

4. 고립감 VS 해방감

   또 하나 이 책에서 인상깊었던 것 중 하나는 데리다가 ‘여행’을 의미짓는 대목이었다. 데리다는 ‘개인은 항상 여행자’라고 단정했다. 정확히 보자면 출발하거나 도착하지 않은 중간 상태에서의 여정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말하는 여행자는 유령의 행동하는 인격인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여행을 말하는 일은 곧 철학을 밝히는 일이었고 그것은 유령인 자기삶의 근원을 찾는 것이었기에.

   데리다는 순수해지기 위해 고향과 공동체의 개념을 부정했다. 고향은 공간이고 관계이다. 공동체는 관계의 확장이다. 타자만이 내가 보지 못하는 나를 보는데 내가 나로서 죽기 위해선 먼저 내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타자가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가 나와 다른 타자이려면 나와 타협하지 않고 존재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타자와 공동체의 삶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하며 그러므로 고향이라는 공간이 가능할 수가 없다는 논리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고향은 애초부터 존재한 적도 없고 이후에 현전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건 끝까지 죽음을 향한 삶, 그 삶 죽음의 과정이었다. 데리다는 실제로 연속적인 여행을 경유하며 전 세계를 누비며 강연했고 방랑하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삶을 지속했다. 마치 여행하는 것만이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데리다에게 미국은 해체였고 그것은 꿈이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무수히 통과해 자신을 넘고 원천을 떠나는 것이 곧 자신을 해체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세계 각국의 콘서트 무대에 선 가수처럼 라이브 무대를 선보이면서 자신을 타자들에게 노출하고 소진시키는 것은 분명 자기파멸적 행위였지만 낯선 곳에서 더욱 완전한 고립, 완성된 죽음을 향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유령이 (유령답게)존재화하는 최상의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어찌보면 자신이 여행하는 동안 날것으로 자각한 삶의 순간을 이론화, 가공화 한 것이 데리다가 말한 환원 불가한 종말, 고립될 수 없는 존재의 죽음인 것이다. 이는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자기 본연의)고향이라 할 수 있는데 저자는 그것을 ‘차연을 향해 열려있다는 느낌의 여행’, ‘경계에서 살기’라 말했다. 내가 느끼기에 데리다는 경계인이라기 보다는 양쪽 경계에서 물러나 오롯한 그 중간계에 위치한 단독자로 보였지만.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도 아니고 죽음 그 자체도, 좋은 삶도 좋은 죽음도 아닌 삶 죽음 또는 ‘경계에서 살기’이다.  - 210p

 
   

   언제나 데리다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과의 사이, 그것들 간의 차이였던 듯하다. 그 사이에서 여행하며 논리의 법칙을 이룩하고 텍스트의 완성을 꿈꾸어 왔던 것 같다. 자기 삶을 자기 이론과 같이 산 사람. 자기 이론을 자기 삶으로 승화시킨 사람. 자기 꿈을 자기 이론으로 확립한 사람. 그래서 자기 죽음이 자기 완성이 된 사람. 자기철학과 자신이 일치되는 삶이야 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순수한 삶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는 ‘해체가 학문의 순진한 가능성의 종말이라고 한 데리다는 순진한 철학자 였는’지 스스로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저자는 순수의 절대를 추구했다고 해서 그가 순진한 철학자로서 순수한 인간이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말하는 순수는 순수에의 각성이었다. 이는 마치 정의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실천 노력일 뿐이라 말하는 논리와 같다. 어떤 실제의 텍스트는 ‘살아있는 죽어감’이며 어떤 실제의 사람은 ‘살아지는 죽음’을 사는 것이다. 데리다의 텍스트를 읽어 내는 것은 삶의 지혜를 구하는 인간적 행위일 수 있겠다.

   이 책에선 80년대 이후 철학외에도 일반문화에서 해체를 시도한 데리다의 노력이 정리되어있다. 후반부에 가장 문학적으로 느껴진 데리다는 자서전을 집필하던 시기의 데리다였다.(1990-1991) 그때 데리다는 공교롭게도 한쪽 눈이 마비되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눈이 먼다는 것’과 ‘자신을 본다는 것’이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의 시점과 동일시되며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 작업에서 눈멂을 주제로 한 자화상을 선택하게 된다. 데리다는 눈이 먼다는 것이 자신을 보고 안다는 것이 상실되는 축복의 병이라 설파했다. 눈멂이 축복의 병이며 신에 대한 감사와 환대의 의식이라는 부분에서(물론 저자를 통한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데리다를 시인이라 생각했고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문학적인 시의 정수라 받아들였다.

   본문에서 저자가 언급한 그림은 팬틴 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라는 프랑스 화가의 자화상이었다. 찾아보니 정물을 많이 그리는 화가지만 자화상은 강렬하고도 독창적이었다. 데리다는 말한다. 타자의 도래는 곧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거의 모든 철학자는 타자를 화두로 삼으며 자신을 깨닫지 않던가) 데리다는 이 그림을 보고 어떻게 자신을 보게 되었을까. 아니 어떻게 타자라는 재앙에 마음을 열게 된 것일까.






 

 

 

 

 

 

 

 

 

 

 

 
 
<Henri Fantin-Latour, 자화상> 

   이 그림을 보면 눈 한쪽은 감은 듯 잘 보이지 않고 다른 쪽은 똑바로 관찰자로서의 타자(그림 그리는 사람, 자신)를 향하고 있다. 이것은 묘하게도 꼭 데리다 자신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데리다는 눈이 먼다는 것은 자신을 보는 일이 중단되어 타자를 향해 나를 여는 일이라 말한다. 나를 향해 눈이 닫히므로 타자에게로 시선이 열려진다는 뜻으로 들린다. 눈은 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눈멀게 하는 눈물을 흘리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눈물흘리는 걸 보는 타자도 그걸 흘리는 내 자신도 볼 수가 없다. 눈이 먼다는 것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으로 은유한 철학자가 시인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었다. 자화상이 가능한 것은 결국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한 성찰인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봄을 봄으로써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기억을 향해 흔적지워진 성찰때문인 것이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언어의 불능을 자화상이라는 논리로 구체화한 그가 미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철학자는 타자는 지옥이라 말했고 데리다 역시 타자는 재앙이라 말한다. 내 것이 될 수 없고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의 재앙앞에서 나를 해체하고 분열시켜 나를 열어젖히는 것은 삶의 자유를 위한 생의 전략은 아니었을까.

   데리다는 프라하 방문시(1981) 마약소지 혐의자로 체포, 감금되었을 당시의 경험을 ‘고치에서 벗어나는 누에벌레’같았다고 말한다. 그때만큼 완전한 고립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유년기에 데리다는 누에를 채집하는 예민한 소년이었다. 누에의 변태과정을 관찰한 데리다는 마지막 변태과정에서 ‘나방이 고치에서 벗어날 때 검붉은 빛깔이 터지듯 벌어지는 순간’에 세상의 실재를 느꼈다고 회상한다. 어쩐지 평생 변태과정을 거쳐 스스로 완전한 유령이 되는 데리다를 떠올리게 한다. 나방의 변태가 악의 부재로 환원되는 데리다의 기억은 그 실재에 맞서는 실제적인 노력으로 복원된다. 그는 ‘악이 없는 세계’를 자신이 추구해야 할 순수의 정점으로 보았고 그것은 해체라는 방식을 통해 완성된다. 마치 스스로 고치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고독한 그 순간에 완성된 순수를 자각하듯. 그 해방감은 자유이며 동시에 자기생의 책임이었다. 무의식을 책임회피의 기제로 사용하는 기존 분석학을 순수하지 못하다 생각한 그였기에 책임은 죽어서까지 유효한 의식이었다. 그는 머지 않아 언젠가는 자기 앞에 당도할 죽음에 대해 아주 치밀하고도 침착하게 준비를 해온 것은 아닐까. 스스로 죽음을 경험 할 순 없지만 자기 사후 죽은 데리다를 더욱 실랄하게 겪게 될 나같은 타자를 위해. 그렇담 그는 아직 누구보다 살아있는 유령은 아닐까. 그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의도한 그는 유령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삶죽음 공간을 그토록 헤매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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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08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인물의 평전이라면 그 사람의 일대기를 조명하기 마련인데,, 데리다라서 그런가요??
이 사람 평전도 쉽게 읽혀지지 않으셨을거 같아요. 올해 1학기 때 행정학 수업 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었는데,, 배우고 있는 교제에 데리다에 대해서 언급하더군요.
재미있는건 교수님도 데리다의 사상이 어려운걸 아시는지(?) 수업시간 때 언급은 안 하시더라구요 ^^;;
평전을 먼저 읽어보고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해보고 싶어서 학교 도서관에 이 책을 잠깐 훑어봤는데,,
제가 본 게 주석인지 잘 모르겠는데,, 평전에 주석이 따로 할애되는건 처음 봤어요 ㅎㅎ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서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 고종석 일일연재, <해피패밀리> 제 2회 中에서

http://cafe.naver.com/mhdn/27456

 
   


솔직히 말하면 저 위의 문장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들은 어줍짢은 시인들이라 생각한다. 그 다음은 소설가, 다음은 평론가, 다음은 출판 관계자...

즉, 가장 순수해야할 성정 순으로 저 법칙은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글을 잘쓰는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물론, 만약 내가 글을 잘쓰는 사람의 범위안에 속한다면 나 역시 열외일순 없을 것이다. 글은 오로지 글로써만 신뢰하고 글로써만 감동받는다. 글을 그것을 작성한 사람의 삶이나 인격, 혹은 지식과 동일시 하지 않는다.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을 이차 가공한 것이지 절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다. 글은 글쓰는 사람이 글쓰는 순간에 자신을 정화한 것이지 그 이전과 이후의 자신을 바꾼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정화가 아니라 반성, 감동, 공감, 분노, 환희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동스런 글, 교양있는 글을 쓴 사람은 어쩐지 인격의 수준도 높고 감수성도 예민할 것이라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오래된 관습적 편견에 의해 글을 그 사람의 됨됨이로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꼭 착하라는 법이 없으므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꼭 인간성 좋으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교회는 다분히 행동적이고 글은 사고적이다. 사고는 행동에 우선한다. 깊은 사유를 풀어놓고 그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글은 그 사람의 사고과정이므로 곧 훌륭한 인격을 수행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까지 생각했으니 분명 어느 정도 괜찮은 사람일 것이라는 무언의 신뢰가 형성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사회의 상식이나, 뻔한 윤리, 표어같은 도덕성 쯤이야 기본이겠지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공동의 고민이나 善, 혹은 인권문제까지도 정의의 편에 설것 같고 자신 및 타자를 평가하는 잣대 역시 엄격하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또 대부분은 글 잘쓰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자 노력할 터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럴려고 노력하고 그런 줄 믿고 싶은 것이지, 글은 여전히 위선과 폭력을 은폐하는 가장 손쉬운 도구이자 시스템, 소프트, 혹은 이 모든 걸 포함한 사회 및 개인의 재능에 불과한 것이다.

글 너머 그 사람의 실상은 글 안의 허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여지껏 살면서 글좀 써보려고 애써온 슬픈, 내 결론이다.

외려 글을 쓸수록, 글을 잘 쓰게 될수록 순수성과 독창성은 반비례해 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난 여전히,

글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그 글을 쓴 사람도 아름다울 것이라 믿는 내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은 고집이 있다. 미련이라고 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심지어는 내가 꼭 그렇게 되고야 말겠다는 야무진 생각까지 한다.

적어도 아름답고 고통스런 글을 쏟아내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이 누구보다 진실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 후에 설령 그가 다시 위선으로 자신을 기만했다고 해도 다시 글을 쓰며 그렇게 살지 않으려 했다고 믿고 싶다. 책좀 읽고 글 좀 쓰다보면 위선보단 진선을 향하는 순간이 많아지리라 믿고 싶다. 평일 내내 다른 사람을 욕하고 거짓을 일삼아도 주일에 기도하며 자신을 반성하는 태도를 존중한다. 그 사람은 주일마저 마찬가지 인 사람보다는 아름다울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고 책이 좋다고 떠들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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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7-06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제일 먼저 생각난 문장이 있어요, "순간을 믿어요~!"


한사람 2011-07-06 12:2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굿바이님도 오늘은 맑은 하루 되시길요^^

2011-07-06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6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7-06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맞아요.
글은 참 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글을 쓰면 쓸수록 날카로워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하죠.
이 날카로움으로 누군가를 찌를수도 있겠구나 생각해요.
하지만 칼은 그 자체보다 가는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한 것처럼
글도 글 자체보다 쓰는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하리라고 봐요.
물론 글 잘 쓰는 사람이 다 고매한 인격을 가진 건 아니겠지만,
엊그제 읽었던 글에, 목사는 위선적으로라도 선해야 한다고 했던가 그러더군요.
그렇게 되다보면 정말 선해진다고.
글도 그런 것 같아요. 남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적으로라도 잘 쓰다 보면
언젠간 좋은 인격을 갖게 되겠지요.
문제는 제가 그 글을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남의 서재에 들어와 댓글을 지나칠만큼 길게 쓴다는 것이고.ㅠ

한사람 2011-07-06 12:2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걸요 ㅋ
길게 뿐인가요, 주렁주렁 참견에 부연에 .. 떠들어 대는 걸요

고종석 작가의 연재소설을 읽다보니
(그분 참, 찔리는 문장을 많이 풀어 놓으셔서 ㅋ)
글과 책, 그리고 작가...그리고...나..
그리고 이곳..
이렇게 생각이 연쇄적으로 이동하더라구요..

혹시나 나는 글로써 남의 눈물을 쏙 뺀적이 없을까..

그런 자책도 들구요..

달사르 2011-07-0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어느 작가분이 저에게, 너는 왜 글을 쓰니? 라고 물어봤어요. 물론, 일기같은 글이었지만!
그래서 "제가 마음수양하려구요. 글을 쓰다보면, 내 속의 마음을 들여다볼수 있거든요." 하고 대답했는데요.
한사람님 표현처럼 글 쓸 때는 마음이 많이 정화되는 듯해요. 그리고 실지 현실과 차이나는 지점도 발견하구요. 순결하다거나, 노력한다거나, 멋있다거나..하는 등의 글 속의 나 자신과 현실의 나 자신이 다르다는 걸 어느 순간에 자각하고나면 무~~척 부끄러워지더라구요. 그러면서, 아..내가 글 속에서 나를 속이기도 했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더랬어요. 그렇게 계속 일기든 뭐든 글을 써나가면 나도 몰랐던 스스로에 대한 속임도 발견하게 되고, 또 아주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변화가 있겠지, 하는 기대가 생기더라구요. 글을 쓰면서 드러운 내 성격을 조금이나마 고치고 싶다, 뭐 이런 거도 있구요. 헤

고종석 일일연재, 보는 것도 좋은데 이렇게 한사람님의 포스팅 보는 것도 좋은데요? ^^

한사람 2011-07-06 16:20   좋아요 0 | URL

저는 울면서 쓴 글은 울지 않을 때 보면
아주 가관이라는 생각을 해요 ㅋㅋ
나를 할수 있는 만큼 자학해놓고 스스로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며
연민에 빠지는 작태를 미칠만큼 경멸해요..

그래서 저런 문장은 꼭 저 들으라 하는 말만 같아서
이런 포스팅은, 실은 제 스스로에게 부치는 편지 같은 글인게죠..

cyrus 2011-07-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블로그에 글을 남기면서 글 속 내용에 담겨진 감정과 실제 감정이 정반대라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 앞에서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도 독서모임을 하면서 알게 되었구요,,
그렇다보니 글 한 번 쓰면 길게 써지게되구요,, 가끔씩 그 부분에 대해서 저 스스로 아쉬울 때가 많아요.

한사람 2011-07-07 11:02   좋아요 0 | URL

저도 독서모임을 나가볼까 생각하는데..
말로 전하는 것과 글로 적는 것은 그 본질이 차원적으로 다른 결과를 낳는 다는 생각이어요
저 역시 제대로 설명을 다 못한다는 느낌때문에 서평이 길어지는 쪽이라 시루스님 말 통감합니다^^

또 말이나 글이 원래 생각과 다르게 나가는 경우도 많구요.
특히 글은 그 다음을 엮어야 하니까 원래 생각이 많이 가공되어 나타나게 되죠..

서평은 완전 사기가 아닐까, 어떨땐 그런 생각도 해요 ㅋ

마녀고양이 2011-07-0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공감되는 페이퍼입니다.
글을 쓴다는 자체가, 자신을 가장하고 방어하게 되더라구요.
제 자신이 되고 싶은 측면, 보여주고픈 모습, 그리고 뒤늦은 후회일 경우도 많구요.

알라딘 서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때부터 글자라는걸 끄적거리게 되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실수하고 배우고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활자화도 중독인듯해요, 빠져나오기 힘들걸 보니 말이죠.
(사실 글쓰기가 좋은지 아니면 친한 알라디너의 호응이 좋은지 구분하라면, 음......... 자신이 없네요, ㅎㅎ)

한사람 2011-07-07 11: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글로써 자기논리를 만들다보면
그것이 자신을 변호하게 되고 자연스레 타자에게 상처 혹은 공격이 되는 글이 되게 마련이죠..
원래 그러한 의도가 없었을지라도
글을 쓰다보면 그런 자신을 알아달라는 식의 내용이 되버리잖아요..참..

저는 알라딘 서재에 맘을 붙였더니
글쓰는 일이 좀 활력적이 된거 같아요
예전엔 독백이었는데 이제는 대화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것에 중독될까봐 겁이 나네요

달사르 2011-07-0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 오늘 저기 링크를 따라가서 고종석님 글을 읽어봤네요. 음..글을 무척 정돈된 스타일로 쓰시는 분이신거 같앴어요. 한사람님 덕분에 연재소설 하나 읽겠어요. ^^

한사람 2011-07-08 00:36   좋아요 0 | URL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자신의 사유를 풀어 놓는 스타일이라..
이야기 보단 사고하는 재미가 있는거 같아요 ㅋ
오늘까지 읽어보았는데..언제까지 갈지 몰라요 ㅋ
 

 


작가들에게 문학상을 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모르긴 해도 모두 잠든 그동안의 밤에 흘린 눈물이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로 화답하는 기분이 아닐까.

내가 아는 작가, 내가 읽은 작품이 상을 타면 괜스레 무언가 기여를 했다는 착각에 덩달아 벅찬 경우가 있었다. 바로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의 경우 나는 작가의 소감을 읽고는 같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를 울린 독자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니. 나를 울려온 작가가 그런 말을 하니 나는 가슴이 터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는데 나에게 책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마약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평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어떤 단정적인 문장으로 만날때 나는 그만 숨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책 속의 추함이 현실의 추함을 따라잡는 법은 거의 없다. 책 속의 비참함이 현실의 비참함을 넘어서는 법도 거의 없다. 책은 내 아편이다. 술만큼이나.

- 고종석 일일연재, <해피패밀리> 제 1회 中에서

http://cafe.naver.com/mhdn/27416 

 
   


어제 늦게 연재소설을 시작한다는 고종석 작가의 첫 회를 읽게 되었다. 주제넘지만 그의 인텔리하고 히스테리컬한 문장들이 내 졸음을 가시게 만들었달까. 소설쓰시는 것도 반가웠고 연재까지 하시다니 좀 의외였다. 어쩐지 속세의 유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작가여서 그랬을까. 위의 저 두어 문장을 어디다 적어 놓고 싶은 유혹을 참고 잠이 들었다.

아침 신문에 동인문학상 후보작에 관한 기사를 보며 자연스레 어제 덮고만 두 문장이 어른거렸다. 고종석은 2004년도 동인문학상 후보(엘리아의 제야)를 거부한 작가였다.

작년에 독고준이라는 소설 리뷰를 쓰면서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 찾아본 기억이 난다.


   
 

 

"나는 조선일보가 수구 냉전 복고세력의 선전국일 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권력화를 가장 비도덕적으로, 현저히 정치적으로 드러내왔다는 판단때문에 집에서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조선일보를 읽지 않는다" 

"심사위원단의 종신화와 상금의 파격적 인상, 그리고 상시적 독회 평가의 기사화를 뼈대로 한 세 해 전의 체제 개편 이래 한국문단에 대한조선일보의 아귀 힘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도저히 이 상의 수상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 얼굴을 지면에 실은 데 대해 조선일보 쪽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심사독회에 올랐을 뿐 수상자로 선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거부라니 내 꼴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렇다고 제가 비판해온 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는 꼴은 또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나쁜 뜻이야 없었겠으나 결국 조선일보 지면은 나를 조롱한 셈"


- 2003. 12.25, 한국일보 고종석의 칼럼 '동인문학상의 생각'

 
   


그 외에도 동인문학상은 2000년 황석영, 2001년 공선옥 작가가 후보를 거부했던 적이 있었다. 독고준 리뷰를 쓸 때는 그의 동인문학상 거부 사실을 다시 책의 홍보 헤드카피로 활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독고준 소설 앞에는 ‘동인문학상 거부 고종석’이 메인 카피였었다. 그는 아마도 작가하는 동안엔 거부사실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닐텐데 그럼 발표하는 소설마다 저 타이틀을 활용할 것인지 묻고 싶었다. 물론 그의 의견과 상관없이 출판사 마케팅 차원에서 적극 앞세우고 싶었겠지만 사실 독고준과 동인문학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는 꼴은 또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라는 말만 안했어도...) 본인으로선 거부 사실이 사실이므로 기피하거나 숨겨야 할 사실이 아니었겠지만 어쩐지 뇌물을 안 받아 놓고 나 뇌물 안 받은 의원입니다, 하는 안보고 싶은 경우에 속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여, 그땐 독고준과는 별개로 침묵이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만 없었던 것으로 한다면(?) 나는 그가 수상작도 아닌 후보작을 거부할 때 인터뷰로 날린 저 멘트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또 하나 의문이 들었던 건 ‘도저히 이 상의 수상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라는 부분인데 나로선 어떤 사람이 수상이 안되는 이름인지 알 수 없으므로(그해 수상자는 김영하 작가였는데 솔직히 고종석이 김영하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음이다) 그 어떤 사람의 기준이 몹시도 궁금했다. 독자 입장에선 솔직히 수상한 사람은 무언가 더 아우라가 크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작년에 같은 상을 수상한 김인숙 작가도 그러한 영역에 속해있다. 마치 영화제 주연상을 수상한 후 몸값이 올라가는 이치처럼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 상받은 작가라는 인식은 떡허니 선입견의 저장위치에 한 자리를 내주었다.

올해는, 누가 그 위치에 들어 오실런지. (사실 크게 궁금하진 않지만) 후보작들을 훑어 보니 그들 중 반은 내가 읽은 작품이라 나도 참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작 발표는 10월이고 7월말까지 출간된 소설까지 후보작을 선정한다고 하니 앞으로 두세 편은 더 포함 될 듯 싶다. 현재까지 후보작으로 선정된 작품은 총 열세 편이다.(작년은 열여섯 편) 

 

 

 

 

 



 

    

 

 

 

 

 

 

 

 

 

 

 

  

 

 

 

 

 

 

 

 

 

지금까지 후보작은 권여선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 최제훈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 같은 작가의 연작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 김도연 소설집 '이별 전후사의 재인식', 강영숙 장편 '라이팅 클럽', 서준환 소설집 '고독 역시 착각일 것이다', 김숨 소설집 '간과 쓸개', 박민규 소설집 '더블', 박금산 장편 '아일랜드 식탁', 편혜영 소설집 '저녁의 구애', 윤영수 소설집 '귀가도', 염승숙 소설집 '노웨어맨'  

완전 소설집의 축제이다. 작년 수상작 김인숙의 <안녕, 엘레나>도 소설집이었다.  단편 많이 읽는 축에 속하는 나도 서준환, 염승숙의 소설집은 낯설게 느껴졌다. 등단한지 3년된 최제훈 작가의 돌풍도 놀랍다.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 문서로 사기치는 능력이 남다르다 느꼈지만 두개의 작품을 후보로 올리셨다. (보통 후보작이 두개일 경우 이상하게도 수상확률이 낮은 편이지만 ㅠ.ㅠ) 

이들중 개인적으로 수상하였음 싶은 작가는 김도연 작가이다.  완전 내 기준, 그러니까 순수문학은 순수해야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내 기준에서. (강원도 출신이고 작품에 유난히 눈내리는 마을, 눈 쌓인 배경이 많이 등장하는 덕이다)

눈에 띄는 작품 중에는  조해진 작가의 <로기완을 만났다> 이다. 작품의 제목에서 북쪽 향기의 내음이 났다.  

이야기는 함경북도에서 탈북해 벨기에로 밀입국한 청년 로기완을 쫓아 브뤼셀로 날아간 어느 방송 작가의 정체성 찾기라고한다. 다음 후보작이 선정되기 전에 읽어보고 싶다. (는 생각이지만 읽을 책이 쌓여있구나....ㅠ.ㅠ)

더불어, 이러한 논의에 언급되는 것 자체를 거부한 고종석 작가의 연재소설도 기대된다.  

(연재소설 끊은지 얼추 일년인데 다시 불을 지피는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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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7-05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연재소설 안 쓸거 같은 작가들이 쓰는 연재소설은 정말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당. 저도 고종석 일일연재 따라가볼까요? 접때 문동에서 허수경 일일연재 시작했더랬는데 한 두 번 따라가다보니 지쳐서 말았지 뭡니까. 일일연재 따라가면서 읽는 거 이거..독자도 대단하지 말입니다. 작가도 대단하지만, 독자도 대단하다! 에 한 표. ㅎㅎ

문학상..이 우리나라에 종류가 많은가요?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언급하신거 말고도 또 있을까요?
위에서 저는 더블이랑 저녁의 구애랑, 두 권이나 읽었네요. 히

한사람 2011-07-05 11:00   좋아요 0 | URL

어휴~ 작년에 몇개월 하루도 안빠지고 일수찍듯 해봤는데요
보통의 에너지가 필요한게 아니더라구요 ㅋ
완전 그 시간에 맞추어 하루 일정이 짜지던걸요 ㅋㅋ
첨에 멋도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가 그땐 그 다음이 궁금해서 마치 드라마에 빠져들듯
그랬죠..

제가 생각하기에 연재소설에 더 적합한 작품이 있고
그냥 전작으로 더 감동적인 작품이 있는 거 같아요
몇 회 읽어보다가..스스로 결정했죠^^

이번은 몇회까지 갈지 모르겠는데..
저는 고종석 작가의 칼날같은 관념적 사유가 좋아서..그거 찾으려고 또 몇번은 클릭질을 할거 같다는 ^^

글구, 저도 문학상은 이름 외우는거 그거 두개가 다 일껄요?
 
마당을 나온 암탉 (양장)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가끔 동화를 읽는다. 아이가 어렸을 땐 아이를 위해 동화책을 사주었지만 막상 아이가 크고 나니 이젠 내가 동화를 집어 들 때 가 있다. 모두 아이로부터 알게 된 책이지만 동화라 하기엔 그 울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요즘 동화는 우리 때처럼 틀에 박힌 교훈을 주입하거나 뻔한 결론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다. 가끔 잔혹하거나 현실의 우울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작품들도 있었다. 세상은 발전했고 작가들은 성장했고 아이들도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인지『마당을 나온 암탉』과의 첫인상은 그다지 세련되진 않았다. 그냥 우리 어린 시절 시골 이야기겠지 하는, 이름만으로 이미 읽어 본 듯한 작품이었다. 아이의 책꽂이에 눈에 띄는 표지의 책들과 함께 꽂혀 있기로는 이미 몇 년 전 부터였고 나는 오며 가며 그림도 내용도 대충은 알고 있는 척을 했다. 그렇게 낯익은 이웃처럼 눈인사만 한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성인용’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 놀라웠다. 어른용이 어린이용으로 재구성되는 건 보았어도 어린이용이 어른용으로 변신하는 건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내용상 달라지거나 더 어려워 진 것도 아니었다. 분명 같은 작가의 같은 책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다른 책인 것처럼 끌렸다. 그 순간 비로소 정독하고 싶은 욕심이 불끈 생긴 건 무엇이었을까. 오래전부터 들추어보지 못한 미안함, 아쉬움, 혹은 부끄러움이었을까. 어쩌면 뒤늦게 어른 된 치기를 들켜버려 자존심이라도 회복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본능적으로 이 책은 성인이 필수로 이수해야 할 최후의 동화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로 그와 똑같은 어른용을 구입했고 또 얼마간 책꽂이 한 켠에 보험처럼 모셔두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소장만으로도 그 책을 이미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야 책을 덮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당을 나온 암탉이 그럭저럭 내 집으로 들어오기 까지 세월이 길었다. 감회가 새로웠는지 나는 바보처럼 이 책을 쉬이 넘기지 못했다. 어른들의 소설에 비해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지금 내 곁을 떠나기라도 할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 마냥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이 책과 좀 천천히 이별하고 싶어 일부러 늑장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두어 구절에선 나도 모르게 서러워진 마음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가 한 가지씩 있다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제일 많이 났다. 앞으로 내 아이를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어미된 내일도 미리 슬퍼할 수 있었다. 내 어머니, 내 아이, 그리고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生의 아릿한 모습들을 곳곳에서 예고없이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천천히 문장을 곱씹고 글자 하나하나 꾹꾹 눌러 내 마음에 새겨두고 싶었다. 이 책은 동심은 물론이고 아주 오래된 그리움, 향수의 정서를 자극하는 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문장들이 꼭 지금은 떠나온 옛 고향의 구석구석을 뒤돌아보게 하는 마력을 지녔달까. 마치 문장이 혼자서 시골길을 타박타박 걸어가 시냇물을 건너고 잠시 나무 그늘 아래서 숨을 고르듯. 새소리, 물소리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그 흙내 나는 사계절을 온몸으로 배워가듯. 문장은 자신만의 그리움의 시공간을 능숙하게 계획대로 여행하듯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우스운 건 내가 전혀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회색빛 아스팔트의 유년시절을 지내었음에도 나는 이 책의 문장이 마치 내 고향처럼, 내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따스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잎싹’은 암탉이 아니라 그 시절 누군가의 어머니였고 ‘초록머리’는 청둥오리가 아니라 그 시절 키워낸 누군가의 자식처럼 느껴졌다.

  동물이 등장하는 동화에서 이토록 인간의 정서를 담뿍 느껴본 적은 실로 어린 시절 이후 오랜만 이었다. 개인적으로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 적도 없었고 동물과의 교감을 느껴본 적도 없으며 외려 혐오감까지 지니고 있는 나로서는 의외였다. 처음엔 낯설기도 하고 조금은 부끄럽기까지 했다. 동화 속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개성이 강하다기 보다는 하나같이 심성이 섬세하다는 느낌이어서 그랬을까. 닭이나 오리, 개나 족제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의 외양, 그 익숙한 시각적 이미지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동물로서의 서식 및 집단행위나 생존을 위한 먹이 채집 과정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은 저마다 소중한 생명을 지닌 자연 속 아름다운 주인공들일 뿐이었다. 작가가 그들의 시공간에 인간이 사유하는 감성들을 잘 부여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의 이름이 곧 캐릭터의 성격을 말하는 서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작가는 동물에 부여하는 실명으로는 드물게 서정적인 이름, ‘잎싹’이라는, 어찌 보면 암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의 네이밍을 하셨다. 그런 ‘잎싹’이 품어낸 청둥오리는 상큼하고 생생한 ‘초록머리’로, ‘잎싹’의 친구이자 은인인 청둥오리는 ‘나그네’로 분하도록 하여 자연스럽게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셨다. 그 중에서도 알을 얻기 위한 품종으로 길러진 난종용 암탉을 잎사귀의 생태적 운명과 연결시켜 ‘잎싹’이라 호명한 건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가장 불러보고 싶은 이름으로 남는데 충분했음이다. 알 낳는 암탉의 이름이 꽃피우는 ‘잎싹’인 것이야 말로 이 책이 이루어낸 거의 모든 성취가 아닐까. 아카시아 나무 잎사귀가 부러워 스스로 ‘잎싹’이 된 암탉은 청둥오리라는 ‘꽃’의 어머니가 되었고 족제비라는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소망이라는 ‘햇빛’을 간직하였기에 스스로 눈부시게 하얀 눈발 속으로 흩어지며 우리에게 감사와 사랑의 향기를 전해주었다. 정말로 ‘잎싹’을 나지막히 불러보니 아카시아처럼 ‘꽃’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흩뿌려진 것이다. 잎사귀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나무처럼, 사람들은 사랑없이 계절은 꽃도 없이 아름답기는 힘든 법이 아닐까. 그렇다면 ‘초록머리’는 조건없는 사랑을 베푼 ‘잎싹’이 자신의 뜨거운 가슴만으로 품고 싹틔워낸 초록색 봉우리, 즉 내일의 희망을 상징하는 꽃이 분명했다. 이 작품은 이렇듯 자연의 생태적 운명을 인간미 넘치는 동화로 승화시키며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웅숭깊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동물이었음에도 나는 아카시아 꽃 향기에 흠뻑 취했던 것이다.

  우리네 인간사와 다를 바 없는 동화 속 이야기는 잔잔한 파도처럼 여러 번 반전을 겪으며 더욱 탄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야기가 흥미로와진 것은 잎싹이 더 이상 알을 낳을 수 없게 되자 폐계 처분되어 죽음의 구덩이에 버려진 순간부터였다.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나 목숨을 구해주고 잎싹이 그토록 원하던 마당으로 이끌고 가던 청둥오리는 우리에게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니라 말해주는 수호천사인 듯했다. 알을 낳기만 해야 하는 운명적 역할, 기계처럼 정해진 규칙, 날갯짓을 가로막는 갑갑한 철망을 뚫고 잎싹은 마당에 살기를 소원했다. 보통의 암탉처럼 수탉의 보호를 받으며 둥우리에서 알을 품고 오리들과 산책하고 싶어 했다. 나같은 여성으로 치자면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과 이웃을 가지고 싶다는 소박한 꿈, 그런데 그 평범함이 간절한 꿈이 되는 애틋한 사연에 다름 아니다. 주어진 역할, 주인의 법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을 찾아 박차고 나오던 잎싹은 어쩐지 강요된 교육현장, 억압적인 조직에서 자기 이상을 찾아 처절한 야생의 현장으로 뛰어든 청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평소 잎싹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알’을 생산하는 것에서 발전해 자의적으로 그 ‘알’을 끝까지 품고 길러내는 것이 소망이라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 작품에서 잎싹은 결국 ‘알’을 품고 어렵게 키워내 온갖 위험에도 그 ‘알’을 지켜내는 희생적인 모성의 이상향을 상징하고 있다. 잎싹은 ‘알’에서 깨어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기를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며 아기가 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기어이 성공한다. 또 ‘알’을 품고 싶어 했던 잎싹의 마음을 배려한 외톨이 친구, 나그네 청둥오리는 가족의 무사 안전을 지키려는 묵묵한 아버지를 표상한다고 느껴졌다. 나그네는 그들을 지키려다 족제비에 대신 희생됨으로써 숭고한 가족애를 실천한 가슴아픈 주인공이었다. 잎싹과 나그네가 그들의 ‘알’을 지켜내는 것은 감동적인 노스탤지어로 기억될 듯하다.

  이렇듯 모성으로서의 ‘잎싹’과 부성으로서의 ‘나그네’는 서로의 공통분모인 초록머리에게 각자 유언과도 같은 생의 가치를 직접, 간접적으로 전달해준다. 나그네는 자신은 ‘날지 못하는 야생오리이고 잎싹은 보기 드문 암탉으로 서로 다르게 생겨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똑 같을 순 없지만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집단이기주의에 물든 조직 사회, 계층 간에 만연된 배타심,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주의 등을 꼬집는 따스한 경고로 받아들였다. 나그네가 잎싹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의 성격을 가지는 이 말은 꼭 자기 자식에게도 당부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잎싹이 어미로서 자식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며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타이름이었다. 마당식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초록머리에게 잎싹은 ‘달라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의 다른 버전, ‘같아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역설적 세상 이치를 가르쳐준 것이다. 중요한 건 같으냐 다르냐가 아니라 누가 되었건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이라는 것. 둘 다 보여지는 겉모습보다 안 보이는 속 알맹이를 들여다보라는 말로 생각되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두어 마디로만 깊은 속마음을 전해준 잎싹과 나그네는 아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자신과 다르며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고 친구를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무시, 외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이해해 주면서도 그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공감어린 설득을 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되돌아보게 하면서 이웃과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이해심을 물흐르듯 스며들게 하는 작가의 환유는 어른인 내게도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가족처럼 편안하면서도 친구처럼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그런 나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도 했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악역을 맡은 족제비는 가족의 잠자리를 지키던 나그네를 사정없이 짓밟으며 자기 배를 채우는데 급급한 이기적인 동물로 출연했다. 아기를 지키려는 잎싹의 필사적인 대응에 한쪽 눈을 잃은 후 그는 끈질기게도 초록머리의 신변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잔인할 것만 같던 족제비에게도 누구보다 끔찍한 자기 새끼들이 있었고 새끼를 살리려면 한겨울에도 사냥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잎싹이 족제비 새끼를 위협하며 초록머리를 지키려 할 땐 족제비도 어미된 모성으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각자의 모성을 발휘하던 그 순간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 것은 의미가 없었다. 족제비나 암탉이나 청둥오리 모두 다 같이 현실의 생태계에선 생존하려 발버둥 치는 공평하게 고달픈 존재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자고나면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는 삶의 진리가 그렇다고 슬픈 것만은 아니라고, 아니 슬퍼만 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이 작품이 말하는 우리네 인간들이 짊어진 공통된 삶의 무게와 다르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전하는 작가의 진한 연민에 가슴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잎싹은 어떻게 슬픔을 헤쳐 나갔을까. 잎싹은 철망에 갇힌 삶이 싫어 뛰쳐 나왔지만 그토록 바라던 마당에서도 갈대밭의 보금자리에서도 편하게 살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철망속에서 시간이 되면 알을 낳기만 하는 삶을 반복하는 것은 행복했을까. 生을 대하는 잎싹의 번뇌와 선택, 그리고 그 행보는 팍팍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작품에서 잎싹이 자신의 꿈을 좇아가는 과정은 여느 드라마처럼 기적적이진 않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조각가처럼 잎싹은 알을 품게 되지만 그 알맹이의 모습은 자신이 원하던 바와는 달랐다. 그래도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어미된 모성을 발휘해 청둥오리를 키워내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나그네가 봉변을 당한다. 슬퍼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잎싹의 눈앞에선 초록머리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게 된 것이다. 이 처럼 세상살이는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취와 좌절이, 이별과 만남이 이어지는 그 반복된 과정일 뿐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 이처럼 당연한 우리네 삶의 과정, 일상의 편린들이었다. 꿈을 이루려 자기가 속한 현실(마당)을 뚫고 다른 세상(저수지)에 나왔지만 그 세상도 여전히 현실 속에 위치한 가시밭길인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아닐까. 중요한 건 마당이냐 저수지이냐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만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잎싹에게 연속적인 기적만을 선사하진 않았다. 나그네 덕에 기적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초록머리의 재롱도 느꼈지만 족제비의 위협은 변함없었고 초록머리도 품안에 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잎싹처럼 초록머리도 ‘꿈’이 있었던 것이다. 잎싹이 아기를 지키기 위해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도 굴복하지 않은 것처럼 초록머리도 자신을 외면하는 무리로부터의 시련을 견뎌야 했다.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는 건 어쩌면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자신을 뛰어넘어 날아오른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초록머리는 같은 무리에게로 떠나라고 말하는 잎싹에게 떠나기 싫다고 말하지만 잎싹은 말한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네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초록머리가 엄마를 부르면서 비로소 날개를 펴고 먼 하늘을 날아갈 때 나는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보던 잎싹의 마음과 함께 조용히 울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엄마의 품을 떠나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나를 향해 손 흔들던 엄마의 미소를 떠올리며, 먼 훗날 내 품을 떠나게 될 내 아이와 아이를 배웅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하지만 나는 그리 오래 울고 싶진 않았다. 이 작품을 다 알고 있다는 어른들 시각처럼 쓸쓸하게만 받아들이긴 싫었다. 한번은 아이입장이 아닌 순연한 내 입장이 되어 보고도 싶었다. 마당을 나온 후 온갖 시련을 헤쳐 가며 꿋꿋하게 자기 길을 걸어가던 잎싹, 그 길의 끝에서 마지막 꿈이 실현되던 잎싹의 최후는 비장하고도 숭엄했다. 하지만 더 이상 슬퍼해선 안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미 알을 품은 적이 있고 알을 키우고 알에서 깨어난 아이의 성장을 한창 도우고 있는 나였지만 그 순간 아름다운 모성보다는 솔직한 내 본성이 더 절실했다. 그것은 잎싹이 계속하여 멈추지 않은 꿈에 더 반응하는 결과였다.


이건 내 알이야,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아기, 나만의 알 !


  나는 잎싹이 외친 ‘내 알’이 이 동화를 읽는 모든 어른의 가슴에 못다 이룬 꿈처럼 알알이 박히는 절박한 그리움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꿈처럼 드는 것이다. 그 ‘알’에서 깨어나 친모를 잃은 청둥오리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인생 행로는 꼭 우리 꿈을 발견하고 그것을 찾아 떠나는 과정처럼 다시 보인다. 그 ‘알’을 품고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이 소망이라던 잎싹은 꿈이 실현되었지만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초록머리를 멀고 먼 북쪽 겨울나라로 떠나보낸 뒤 잎싹은 말한다. 오늘까지 산 것은 오늘까지의 소망이며 이제부터는 날고 싶다는 새로운 소망을 가지겠다고. 초록머리가 떠났다고 모두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자기만의 꿈을 떠올리고 그것을 이루려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작가가 말하는 내밀한 희망의 기쁨이란 혹 절망앞에서도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용기, 죽는 순간까지도 꿈을 잃어버리지 않는 의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 인생이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날에도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며 첫걸음을 떼는 벅찬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다. 어제 누군가와 쓰라린 이별을 했지만 오늘 더 귀한 인연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동화책 한권이 이렇게도 인생에 묵직한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이 책을 찬찬히 읽어 내는 동안, 내가 알을 품고 알을 낳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키워낸 사람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는 그 꿈같은 ‘알’일랑 더 이상 간직하고자 생각조차 않았던 구멍난 내 가슴에 오랜만에 충만한 격려와 위로를 채워가는 느낌이다.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알차고 따스한 이야기로 깊고도 풍부한 生의 성찰적 시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보기드문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소망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야할 이유인 것이다. 꿈을 찾는 다는 건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 소중한 책에서 사랑과 소망과 꿈의 목소리가 시냇물처럼 흘러 내린다. 이 책을 덮고 나는 다시 꿈을 꾸고 싶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나만이 간직한 이야기,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 나만이 행복할 그 알토란 같은 이야기를 자아내는 것이야말로 나의 소망이 아니었나. 그것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니었나. 오늘부터 나는 내 이야기라는 꿈의 ‘알’을 다시 품어 소망의 여행을 찾아 떠나볼 터이다. 나도 이제부터는 훨훨 날아보고 싶은 까닭이다. 자유롭게 날기 위해 내 이야기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동화는 동심(童心)을 위한 책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 동심을 잃어버린 내게 꼭 필요한, 꿈을 다시 꾸고 그것을 찾아가는, 굳게 닫혀 진 마음을 움직이는 동심(動心), 그것에 한껏 동화(同化)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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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7-05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최근에 소개해준 책이네요. 성인용 버전이 나왔다길래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더니..아예 책을 새로 성인용으로 만든 거로군요. 와..좀 신기하기도 하고, 좀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그래요.
주인공 이름이 잎싹이네요. 네이밍이 여러 의미가 있는 듯하네요. 뭔가가 삐걱거리고 잘 안되어 의기소침한 그런 날에, 읽으면 참 좋을듯해요.

cyrus 2011-07-0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보다는 요즘에 개봉된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싶더라구요, 물론 책이 애니매이션의 원작이니까
책이 훨씬 낫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