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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1. 집약적 VS 해체적
데리다가 심오한 철학자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언뜻 매력적인 네이밍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무래도 그가 주장한 ‘해체‘라는 단어의 탈철학성 탓이 아닐까. 자칫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마치 프랑스 미용제국의 창설자 자크 데상쥬(Jacques Déssange)의 이름처럼 패셔너블하거나 시크하기까지 하다. 데리다를 말할 때 ’해체‘와 더불어 언급되는 ’유령‘의 개념도 어쩐지 (우리로선)통속적인 뉘앙스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그를 (제대로)모르고 단지 이 세 단어(데리다-해체-유령)의 조합만으로 데리다를 떠올린다는 건 니체-신, 하이데거-존재, 칸트-이성, 벤야민-아우라 식의 도식적인 연상작용과 절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 일반 독자인 나는 이 책이 어느 정도 그러한 무지에서 탈피할 운좋은 계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그 절반의 기회는 얻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직 책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듯하다. 그의 ’해체‘는 표면적이지 않았고 데리다로서의 ’유령‘은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모든 개념이 반대로 다가오는 이 현상이야말로 데리다라는 철학자가 긍극에 의도한 순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렇다면 내가 그를 잘못 이해한 것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해본다. 하여, 이번엔 이 책의 서평을 쓴다기 보다는 그냥 어려운 개념을 내 나름의 내 식으로 정리한다는 의미가 클 것 같다. 사실 내게 철학자의 책은 그를 통해 내가 얻고 내릴 수 있는 감상과 결론보다는 언제나 그 이해도의 정도에 있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보다 얼마나 알아 들었느냐가 관건인 문제였다. 하지만 알아 들었다고 그것을 말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앎이 느낌이 되고 그것이 말할 수 있음이 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아직 내 수준에서 그 단계적 논리를 강신주 교수같이 친절하게 해석해주는 선생님 없이는 혼자서 난해함을 극복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느껴진다. 나는 이 책을 꽤 오래 붙들고 있는 경우였는데 마치 마주하는 시간만이 나를 탈출시킬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자의적으로 보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건 책 덮고 나서 그리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나는 이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해 서평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우선 집약적, 그리고 해체적이다. 해체를 말하기 위해 많은 걸 모았고 데리다를 평하기 위해 그것들을 해체했다. 데리다가 평생토록 연구한 성과들을 좇아가며 시대와 사람을 연관 키워드로 배치, 재정리하는 식이다. 역자가 말했듯이 ‘사적인 기록을 담은 전기라기 보다는 공개화된 사상을 기술하는 개론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후반부엔 데리다가 저술한 책을 위주로 첨예한 논점들을 정리하고 있어 어찌 보면 역자의 전문적인 서평을 모아놓았다는 생각도 든다.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 데리다의 논지를 대변하는 것인지 그를 통한 역자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는 것인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원래의 데리다를 이해해야하는 과정과 데리다를 평가한 역자의 견해를 이해해야 하는 상황(왜냐하면 역자는 언제나 데리다를 동의한 것이 아니므로)이 동시에 병렬적으로 전개됨으로 해서 독서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즉, 제이슨 포웰이라는 저자의 데리다 ‘읽기’와 ‘전하기’를 간과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는 데리다가 아니면서 데리다를 말하고 데리다 철학을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데리다를 이 책의 저자처럼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뜻과 같다. 내가 행간에서 느낀 기류는 그러한 자신의 책무를 잊지 않으려는 듯 객관적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는 것이고 그 태도를 기저로 데리다의 순수 지향성을 말하면서 외려 그다지 순수하지 않은 데리다를 증명해 보이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단은 독자 몫으로 남겨야 하겠지만 이 책은 이미 평가가 예정되어 있는 경우였다. 한마디로 데리다 판단 위에 덧칠된 그의 판단은 데리다 철학이 아니기 때문에 데리다 초보인 나로선 그 부분이 가장 힘겨웠다. (다른 평을 하기에 나는 수준이 되지 않으므로) 또 하나 1980년 대 이후 데리다의 저서가 더욱 많이 소개됨과 동시에 통시적, 공시적으로 등장한 전시대, 동시대의 철학자 들은 더 입체적인 지식과 주의적인 맥락을 요구하는 관계로 일반 독자 입장에선 전문성의 한계를 그대로 인식한 채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데리다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닌 데리다를 잘 아는 사람을 위한 책이었다는 서운함을 느끼며 이 책을 덮었다. 학교다닐 때 참고서적 두서너 권을 같이 들고 다니며 이 책과 비교하듯 읽었어야 할 책이었다. 이 책에도 심층적으로 언급되는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 <우편엽서>같은 책을 한 권도 독파하지 못한 채로 데리다를 말해야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힘겨움 덕분에 서양철학사에 등장하는 거물급 철학자들을 근접한 위치에서 훑어본 느낌은 우쭐할만큼 만족감을 선사하긴 했다. 아마 현대철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이런 수고가 당연히 반가운 실정이겠지만.
2. 유령적 VS 순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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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철학은 유령의 존재론이다. 다시 말해 특히 자기 자신, 글 쓰는 이, 국가나 민족, 철학 그 자체를 포함하는 그 모든 것들의 비실체성을 주시하는 유령적 글쓰기이다. -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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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덮으면서 데리다를 느낀 것은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대로 유령처럼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유령이라고 생각한 데리다는 유령인 자신을 말하고 그것에 존재감과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평생을 살았던 것은 아닐까. 데리다는 원래 자키(Jackie)라는 미국식 영화배우의 이름을 거부하고 프랑스적이고 예술적인 자크(Jacques)로 개명한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자키는 죽은 형에 대한 대리 보충물로서 상징되는 문자이고 자크는 프랑스의 흔적을 보충하는 문자인 것이다. 데리다에게 프랑스는 유령과 동일시되므로 자크라는 이름은 유령인 자아로서의 이름도 되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름을 스스로 바꾼 정황이 어떤 은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단서라 생각했다. 알제리 출신 유대인으로서 그가 겪은 청소년기의 반유대주의적 경험도 그의 사상에 밑바탕이 되었을 터이다. 데리다는 프랑스의 식민지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환경 및 가족으로부터 자기 실존을 자각하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데리다의 물리적 고향은 촌구석 알제리였지만 심리적 고향은 유령이 지배하는 프랑스였고 미래의 고향은 원래 자신인 자키가 살아야 할 미국은 아니었을까. 데리다는 인생의 장년기부터 미국에서의 강연으로 명성을 얻게 되고 마치 영화배우처럼 자신을 연기하고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이는 이름을 개명할 때부터 계획된 사실처럼 각본화된다. 그것은 비난의 여지속에서도 자신에게 연기를 가르쳐준 하이데거나 푸코, 알튀세르보다 뛰어난 연기를 바탕으로 그들을 제치고 마침내 주인공이 되는 어느 배우의 일생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궁극에 원한 것이 기존 무대의 질서와 고정관념에 대응한 자기 연기의 (확인으로서)순수 정점이었다면 그는 자기관리를 아주 철저히 해온 배우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의 연기철학은 자기 존재를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완성되는 삶이었고 그것은 곧 자기 삶의 방식대로 세상과 타자를 완성하는 논리로 발전한다.
어떻든 순수라는 개념은 타락이나 오염의 상대적인 대치점을 상정하게 되어있다. 단독자로서 순수하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데리다에게 순수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데리다가 서구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해체하고 (그것으로 순수하고고)싶었던 것은 순수해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애초부터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순수혈통의 프랑스인이었다면 더 이상 순수에의 집착은 필요치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순수하지 못한 태생적 요인과 환경은 사유와 언어에서 순수에 결여되는 현상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 욕망은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순수를 증명하고 싶었던 자아실현의 욕망이면서 순수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출현한 개념은 아닐까. 그것은 그가 그토록 해체하고 싶었던 기존질서가 사실은 자신이 간절히 추구하던 욕망의 질서였을 수도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자신을 부정해야 하므로) 데리다는 해체의 운명을 자기 바깥으로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데리다는 독일과 존재를 동일시한 하이데거식의 순수에 자극받아 하이데거식으로 순수할 수 없는 데리다로서 하이데거 이상으로(혹은 하이데거만큼은) 순수하기 위해 자신과 조국, 타자를 공평한 유령의 입장으로 대응시킨 것은 아닐까. 본질적으로 모두 유령이고 그 나머지는 희미한 흔적일뿐인 이 세계야 말로 존재하지 않는 순수의 표상, 부재하는 자신의 근거가 아닐까.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면 그들은 자신보다 순수할 것이 자명하기에.
3. 차이남 VS 연기됨
데리다의 일생은 프랑스 철학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시공간을 살았다 할 수 있는데 놀라왔던 것은 최상위층만 입학한다는 교사, 교수 양성기관인 고등사범학교가 바로 오늘날 현대철학의 산실로서 기능했다는 것이었다. 데리다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은 이곳의 학생이거나 선생이었다. 데리다를 중심으로 인물관계도를 그리면 그자체로서 현대철학의 계보가 프리젠테이션 되는 형국이었다. 프랑스가 왜 영국이나 미국 혹은 독일까지도 인정하지 않는 우월감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인상깊었던 인물은 푸코의 지도교사이면서 데리다의 스승이었던 같은 알제리 출신 알튀세르였다. 데리다가 치밀하고 중립적인 성향의 인물로 느껴졌던 건 알튀세르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같은 처지의 스승이 자기 분열로 가족을 파멸한 범례는 그에게 에피소드를 너머 트라우마가 되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데리다의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사적으로 데리다가 그의 지인들과 어떤 감정적 관계를 이어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풀어가는 이성적 사유는 다분히 문학적, 감성적으로 이해되었다. 데리다가 문학에 기초한 수사법을 사용해 철학계의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그의 감정을 대변한다고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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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적 현실은 낱말들이 아니라 흔적에 의해, 의미가 아니라 차이에 의해, 그리고 자발적인 발화된 낱말들이 아니라 글쓰기에 의해 구성된다. -1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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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를 확인하다보면 해체와 유령다음으로 ‘흔적’과 ‘차연’이라는 개념이 빈번하게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들이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라 생각하는데 눈을 감고 생각하면 이성보다 훨씬 가깝게 파악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다. 이 개념들은 왜 이성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았을까. 로고스는 ‘이성’이라는 뜻 외에도 ‘목소리’라는 뜻도 있다. 서구에서 이성의 사유는 곧 목소리의 실현이었다. 그에 반해 ‘문자’는 로고스 바깥에 위치한 또 다른 이성(異聖)이다. 그리스 중심의 로고스, 즉 서구철학은 목소리를 문자언어에 우선시하며 문자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이는 곧 알파벳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서구 열강이 상형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등 아시아보다 우월하다는 서구민족주의의 일환에 불과하다. 데리다는 오랜 세월 서구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로고스 중심주의, 구조주의 철학, 제국주의가 주장하는 자신들의 순수성을 정면에서 반박한다.(고들 전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데리다는 자신을 키워낸 순수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순수를 지향하는 방법이 자신처럼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주장했다고 본다. 이른바 (오랜동안) 당신들이 순수면 (지금부터)나도 순수다는 식의. 데리다 해체 사상의 핵심에는 바로 ‘문자’에 대한 재인식 및 위치선정, 그리고 지위부여가 가장 하층구조에 버티고 있다. 마치 언어학자처럼 문자와 문자 사이를 유영하며 그 사이 벌어진 사건을 해부한다. 이 책의 부제는 ‘순수함을 열망한 어느 유령의 이야기’이다. 삶이 애초부터 순수한 기원이 있(어 왔)다는 믿음을 향해 그러한 기원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문자라는 흔적에 의해서만 보충된다는 데리다였다. 그에겐 실종된 신, 부재하는 고향, 비현전하는 기원만이 의미있어 보였다. 존재라는 주제에 관한 구조와 체계는 결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더 순수함을 밝히기 위해) 문자와 문자 사이에 벌어진 사건 즉 ‘흔적’과 ‘차연’의 의미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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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연이 철학을 위한 공간을 열어젖히는 방식으로 철학에 선행하여 철학을 산출한다. -1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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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장하는 ‘차연’은 기호나 개념, 혹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두 장소 사이의 여백이며 양쪽 모두에 속하는 교집합이자 경계의 지위를 가진다. ‘현전은 비현전하는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고 차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흔적과 차연의 역학관계를 가만히 따져보면 우리가 인식하는 어떤 개념은 문자의 흔적들로 이루어지며 문자와 문자 사이의 시공간인 그곳으로부터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공간화와 시간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거의 시적 작법의 발상이 아닌가. 또한 유령의 개념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는 곧 자신의 본질을 분해한 것과 같지 않은가. 차연이 ‘결코 어딘가 제한 될 수가 없고 삶과 죽음 사이의 중간자처럼 그러나 둘 다 아닌 채로 존재도 없고 존재자도 없고 상호간의 반발력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현상일뿐’이라는 수사는 A(알제리)와 B(프랑스) 사이에서 삶의 시원을 찾은 자기 삶의 현상학적 분석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이해한 차연은 데리다 수사법으로 완성된 문자언어의 승리였다. 차연différance은 차이différence의 중간철자 e를 a로 바꾸어 데리다가 만든 조어였다. 차이와 연기 양자를 한꺼번에 뜻하는 차연에서 A는 중요하다. 두 단어는 발음상 차이점이 없는데 이는 곧 말하여지는 소리로는 변별력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며 서구철학이 중시하는 목소리에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결과였다. 데리다가 주장한 문자의 흔적에 지나지 않아보이는 A는 피라미드를 닮아 생생한 현전을 방해하는 문자의 무덤으로 상징된다. 즉 무덤같은 철자 하나가 문자사이에 배치되면서 그 흔적은 더 이상 흔적이 아니라 엄정한 실존이 되는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와의 게임을 즐긴 사람이었다. 유령이 될 문자를 찾아 개념을 해체시키고 그곳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동력삼아 자기 삶을 보충하는 지적유희의 종결자는 아니었을지.
이를 내 수준에서 풀이해보면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온 다음 날 아침을 생각해보자. 상대는 더 이상 내 곁에 없고 애증의 시간도 끝나야 하지만 우리는 상대를 보지 못하고 그의 ‘원본이 부재’한 상태에서 더 심한 애착을 느끼게 된다. 우리말로 그리움이 사무친다고 할까.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의미하는 소품이라도 건네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품에 안고 잠이든다. 이는 보이지 않는 미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증오도 마찬가지다. 상대라는 원본을 대리하고 보충하는 것은 그의 실재가 아닌 부재로 근거하는 상대의 흔적이다. 우리는 그를 대리하고 보충해주는 흔적을 통해서만 끊임없이 도래가 연기(지연)된 자로서 상대를 만난다. 여기서 상대가 지금 여기 현전하지 않고 연기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원본)는 자신을 대리 보충하는 흔적(소품)과 일정한 차이를 지닌 것으로서만 도래한다는 것이다. 저곳에 있는 상대와 이곳에 놓인 소품은 항상 그와 나사이의 물리적 거리 즉 차이이면서 그와 다시 만나게 될 미래의 시간을 상징한다. 연기(différer-시간적)와 차이(différence-공간적) 이 둘의 의미 모두를 지니는 차연(差延-differance)이 데리다가 말하는 대리보충 논리의 핵심인 것이다. 루소는 데리다보다 먼저 자신의 연인인 바랑부인을 예로 들며 역설적이게도 이 차이와 연기만이 연인이 자신에게 도래하는 유일한 방식이라 말한다. <고백록 Les Confessions, 1769> 어찌보면 흔적은 사차원의 메타스페이스를 의미하는 듯하다. 데리다에 의하면 하나의 원본, 즉 기원은 도래를 연기하며 바로 그 연기되는 방식으로 다시 원본을 출현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사라지는 방식이 곧 드러나는 방법임을 역설하는 데리다식 수사법이다. 죽어가는 방식이 곧 살아가는 방법임을 암시하는 논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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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삶이기도 한 죽음을 꿈꿀 뿐이다. -2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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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립감 VS 해방감
또 하나 이 책에서 인상깊었던 것 중 하나는 데리다가 ‘여행’을 의미짓는 대목이었다. 데리다는 ‘개인은 항상 여행자’라고 단정했다. 정확히 보자면 출발하거나 도착하지 않은 중간 상태에서의 여정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말하는 여행자는 유령의 행동하는 인격인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여행을 말하는 일은 곧 철학을 밝히는 일이었고 그것은 유령인 자기삶의 근원을 찾는 것이었기에.
데리다는 순수해지기 위해 고향과 공동체의 개념을 부정했다. 고향은 공간이고 관계이다. 공동체는 관계의 확장이다. 타자만이 내가 보지 못하는 나를 보는데 내가 나로서 죽기 위해선 먼저 내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타자가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가 나와 다른 타자이려면 나와 타협하지 않고 존재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타자와 공동체의 삶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하며 그러므로 고향이라는 공간이 가능할 수가 없다는 논리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고향은 애초부터 존재한 적도 없고 이후에 현전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건 끝까지 죽음을 향한 삶, 그 삶 죽음의 과정이었다. 데리다는 실제로 연속적인 여행을 경유하며 전 세계를 누비며 강연했고 방랑하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삶을 지속했다. 마치 여행하는 것만이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데리다에게 미국은 해체였고 그것은 꿈이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무수히 통과해 자신을 넘고 원천을 떠나는 것이 곧 자신을 해체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세계 각국의 콘서트 무대에 선 가수처럼 라이브 무대를 선보이면서 자신을 타자들에게 노출하고 소진시키는 것은 분명 자기파멸적 행위였지만 낯선 곳에서 더욱 완전한 고립, 완성된 죽음을 향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유령이 (유령답게)존재화하는 최상의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어찌보면 자신이 여행하는 동안 날것으로 자각한 삶의 순간을 이론화, 가공화 한 것이 데리다가 말한 환원 불가한 종말, 고립될 수 없는 존재의 죽음인 것이다. 이는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자기 본연의)고향이라 할 수 있는데 저자는 그것을 ‘차연을 향해 열려있다는 느낌의 여행’, ‘경계에서 살기’라 말했다. 내가 느끼기에 데리다는 경계인이라기 보다는 양쪽 경계에서 물러나 오롯한 그 중간계에 위치한 단독자로 보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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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도 아니고 죽음 그 자체도, 좋은 삶도 좋은 죽음도 아닌 삶 죽음 또는 ‘경계에서 살기’이다. - 2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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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데리다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과의 사이, 그것들 간의 차이였던 듯하다. 그 사이에서 여행하며 논리의 법칙을 이룩하고 텍스트의 완성을 꿈꾸어 왔던 것 같다. 자기 삶을 자기 이론과 같이 산 사람. 자기 이론을 자기 삶으로 승화시킨 사람. 자기 꿈을 자기 이론으로 확립한 사람. 그래서 자기 죽음이 자기 완성이 된 사람. 자기철학과 자신이 일치되는 삶이야 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순수한 삶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는 ‘해체가 학문의 순진한 가능성의 종말이라고 한 데리다는 순진한 철학자 였는’지 스스로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저자는 순수의 절대를 추구했다고 해서 그가 순진한 철학자로서 순수한 인간이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말하는 순수는 순수에의 각성이었다. 이는 마치 정의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실천 노력일 뿐이라 말하는 논리와 같다. 어떤 실제의 텍스트는 ‘살아있는 죽어감’이며 어떤 실제의 사람은 ‘살아지는 죽음’을 사는 것이다. 데리다의 텍스트를 읽어 내는 것은 삶의 지혜를 구하는 인간적 행위일 수 있겠다.
이 책에선 80년대 이후 철학외에도 일반문화에서 해체를 시도한 데리다의 노력이 정리되어있다. 후반부에 가장 문학적으로 느껴진 데리다는 자서전을 집필하던 시기의 데리다였다.(1990-1991) 그때 데리다는 공교롭게도 한쪽 눈이 마비되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눈이 먼다는 것’과 ‘자신을 본다는 것’이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의 시점과 동일시되며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 작업에서 눈멂을 주제로 한 자화상을 선택하게 된다. 데리다는 눈이 먼다는 것이 자신을 보고 안다는 것이 상실되는 축복의 병이라 설파했다. 눈멂이 축복의 병이며 신에 대한 감사와 환대의 의식이라는 부분에서(물론 저자를 통한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데리다를 시인이라 생각했고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문학적인 시의 정수라 받아들였다.
본문에서 저자가 언급한 그림은 팬틴 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라는 프랑스 화가의 자화상이었다. 찾아보니 정물을 많이 그리는 화가지만 자화상은 강렬하고도 독창적이었다. 데리다는 말한다. 타자의 도래는 곧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거의 모든 철학자는 타자를 화두로 삼으며 자신을 깨닫지 않던가) 데리다는 이 그림을 보고 어떻게 자신을 보게 되었을까. 아니 어떻게 타자라는 재앙에 마음을 열게 된 것일까.
<Henri Fantin-Latour, 자화상>
이 그림을 보면 눈 한쪽은 감은 듯 잘 보이지 않고 다른 쪽은 똑바로 관찰자로서의 타자(그림 그리는 사람, 자신)를 향하고 있다. 이것은 묘하게도 꼭 데리다 자신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데리다는 눈이 먼다는 것은 자신을 보는 일이 중단되어 타자를 향해 나를 여는 일이라 말한다. 나를 향해 눈이 닫히므로 타자에게로 시선이 열려진다는 뜻으로 들린다. 눈은 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눈멀게 하는 눈물을 흘리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눈물흘리는 걸 보는 타자도 그걸 흘리는 내 자신도 볼 수가 없다. 눈이 먼다는 것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으로 은유한 철학자가 시인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었다. 자화상이 가능한 것은 결국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한 성찰인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봄을 봄으로써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기억을 향해 흔적지워진 성찰때문인 것이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언어의 불능을 자화상이라는 논리로 구체화한 그가 미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철학자는 타자는 지옥이라 말했고 데리다 역시 타자는 재앙이라 말한다. 내 것이 될 수 없고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의 재앙앞에서 나를 해체하고 분열시켜 나를 열어젖히는 것은 삶의 자유를 위한 생의 전략은 아니었을까.
데리다는 프라하 방문시(1981) 마약소지 혐의자로 체포, 감금되었을 당시의 경험을 ‘고치에서 벗어나는 누에벌레’같았다고 말한다. 그때만큼 완전한 고립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유년기에 데리다는 누에를 채집하는 예민한 소년이었다. 누에의 변태과정을 관찰한 데리다는 마지막 변태과정에서 ‘나방이 고치에서 벗어날 때 검붉은 빛깔이 터지듯 벌어지는 순간’에 세상의 실재를 느꼈다고 회상한다. 어쩐지 평생 변태과정을 거쳐 스스로 완전한 유령이 되는 데리다를 떠올리게 한다. 나방의 변태가 악의 부재로 환원되는 데리다의 기억은 그 실재에 맞서는 실제적인 노력으로 복원된다. 그는 ‘악이 없는 세계’를 자신이 추구해야 할 순수의 정점으로 보았고 그것은 해체라는 방식을 통해 완성된다. 마치 스스로 고치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고독한 그 순간에 완성된 순수를 자각하듯. 그 해방감은 자유이며 동시에 자기생의 책임이었다. 무의식을 책임회피의 기제로 사용하는 기존 분석학을 순수하지 못하다 생각한 그였기에 책임은 죽어서까지 유효한 의식이었다. 그는 머지 않아 언젠가는 자기 앞에 당도할 죽음에 대해 아주 치밀하고도 침착하게 준비를 해온 것은 아닐까. 스스로 죽음을 경험 할 순 없지만 자기 사후 죽은 데리다를 더욱 실랄하게 겪게 될 나같은 타자를 위해. 그렇담 그는 아직 누구보다 살아있는 유령은 아닐까. 그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의도한 그는 유령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삶죽음 공간을 그토록 헤매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