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림픽의 눈물
평창 올림픽 유치 성공을 보면서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마도 우리 민족은 주기적으로 저렇게 하나된 마음을 쏟아 붓고 그 성공을 확인하고 또 같은 마음으로 얼싸 안아야 내일의 희망을 다질 수 있는 민족이 아닐까 싶다. 그때 공감하는 감격의 환희와 뿌듯함의 카타르시스야 말로 다른 무엇이 아닌 긍지높은 대한민국의 한사람인 걸 위안삼는 행위임을 깨닫는다.
모두 같이 동시에 울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만 보면 우리의 그때 표정도 사뭇 다른 나라의 울컥과는 좀 다른 편인데 완전한 기쁨이라기 보다는 서러움에 복받치는 슬픔의 미학이 배어있다. 거기까지 올라오는데 고생했던 그간의 서러움이 목을 타고 동시에 올라오는 것이다. 많이 서러웠을수록 울음이 터지는 순간의 표정이 고통스러운게 아닐까. 이 심리 밑바탕에는 (식민지 국가, 분단국가로서)다분 오랜 열등감과 패배감등이 숨어 있는 듯하다. 어떤 핍박과 무시, 비난과 질타를 받아온 자 특유의 극적 해방감이 스스로를 옥죄던 열등감과 정면에서 대치하면서 스파크를 일으키는 순간의 본능적 고통일 터이다.
그러면서 자연 내 고생도 고생이지만 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뛴 동료의 고생에 눈물이 나는 것이다. 나는 우리네 고생방식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 얼싸안고 부둥켜 우는 성공의 습관만은 어느 나라보다 아름다운 관행이라 생각한다. 평창 올림픽이 2018년이니 그때가 되면 내 나이 오십을 바라본다. (그걸 자각한 순간 눈물이 싹 가셨지만 ㅋ) 지금의 내 세대는 올림픽 정신을 대학입시 다음으로 쑥쑥 함양하며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의 올림픽을 더 구경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살면서 겪어온 올림픽은 분명 미래 희망의 아이콘이었던 것을 부인하지 못할 듯하다.
내가 중학생 때 84년 LA 올림픽, 고등학생 때 88서울 올림픽, 대학생 때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솔직히 그 이후론 이전보다 선명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2002년 월드컵까지 헝그리 스포츠정신은 개발도상국이라는 네이밍에 가장 부합하는 이데올로기였다는 생각이다. (그런면에서 전두환은 용의주도했다)
터져나오는 올림픽 눈물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먼저 84년 LA때 구기 종목사상 첫 은메달이었던 여자농구. 그때 중공을 물리치고 박찬숙이 공을 땅바닥에 꽂으며 동료들과 얼싸안고 부둥켜 울 때.(여름방학이었고 무지 더운 날 오후였다) 88년 양영자, 현정화 탁구 복식조가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을 때.(모의고사를 앞둔 독서실 1층 동네 언니네 가게에서) 92년 스페인 몬주익-바르셀로나는 기억안나도 몬주익은 기억나네-광장에서 황영조가 마라톤 1위로 골인할 때.(알바하는 회사 회의실에서)
세 번의 얼싸안음을 마지막으로 나는 사회생활 이후엔 올림픽을 기억하지 못한다. 90년대는 나의 이십대였고 그땐 너무 바빴고... 하루하루가 올림픽보다 치열했으니까. 아마도 그렇게 나이들어 헝그리 정신을 잠시 잊고 한참 뒤 4강 신화에 놀라움과 우월감을 맛보았던 것 같다. 홍명보의 만세는 곧 대한민국의 만세였으니까. 우린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역대 모든 대회에선 항상 평소성적 이상의 기적같은 승리로 세계의 주목을 받아온 기특한 이력이 있었다.
김연아의 금메달은 치고박는 경기가 아닌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경기에서도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고 미국보다 유럽에 가진 열등감도 많이 사그라 들었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청소년 시절 도저히 범접할 수 없었던 독보적 존재 카타리나 비트를 만장일치에 가깝게 이겨버린 김연아를 보니 어찌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발표가 끝나고 비트는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는데 나는 그 눈물에서 아쉬움과 슬픔, 미련과 후회보다는 그저 개인적으로 자존심이 상해 도저히 결과를 인정할 수 없어 하는 선진국 舊 피겨여왕의 오만함을 엿보았다. 어찌 우리가. 어찌 내가... 저들과 저 친구에게... 하는.
#2. 중년의 눈물
눈물을 정리하고 다시 눈을 떠본다. 엊그제 덮은 책(데리다 평전)에서 데리다라는 철학자는 우리의 눈이 무엇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굉장히 시적인 말을 했다.(내 보기에 데리다는 철학자가 아니라 시인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동종업계로부터 ㅋ 비난을 받은게 아닐까) 눈물을 흘리는 순간은 곧 눈이 머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순간엔 눈물 흘리는 나도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도 볼 수 없지만 그렇게 나 자신을 알 수 없는 순간이 바로 세상과 타자에게 마음을 열어젖히는 순간이라 말한다. 이는 곧 내 눈이 멀어야 내가 아닌 내 앞의 타자, 그리고 그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우리가 눈뜨고 보는 것은 세상이 아니고 실은 그들에 비친 나라는 것이다.
우린 요 며칠
각자 눈이 멀어 내가 아닌 타인들과 그리고 그들이 속한 우리 세상으로 한껏 열려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열어젖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타자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나도 그래왔지만 마찬가지로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고생해온 남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아닐까.
서로가 네 탓이오 소리를 높이다가 이럴땐 모두 그래 당신도 수고했소, 하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또 주말을 앞두고 있다.
이제 다시 눈을 떠 나를 바라본다.
조금은 더 달래고 싶은 마음에, 아직은 더 울고 싶은 마음에
달달한 에세이를 주문했고 마치 위로해 줄 사람이 내게로 달려오는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다.
신달자님의 위로는 (주제넘는 말이지만) 통속과 신파속에서도 순수의 눈물을 건질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엄마를 잃은 내게 이분의 한마디가 네 고생 먼저 해본 내가 잘 안다는 말씀으로 들려온다.
감동은 무엇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만나는 감동을 마음으로만 삭이지 말고 자신이 다시 감동이 되는 일로 연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음속에 그 어떤 이야기가 있어도 좋다. 가능한 독하게 마음을 추스르는 이야기를 앞세워서 자신이 지금 하려고 마음먹은 그 일의 계기로 삼아라.
자기를 일으키는 일이 곧 모든 마음속의 화를 잠재울 수 있는 일이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고 자신을 심술로 가득한 독 안에 가둬 둔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 -13p, 신달자, 민음사>
몇 년전 마흔을 앞두고 이분의 에세이를 읽었는데 그때 많이 울었더랬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죽도록 사랑해 결혼한 남편을 먼저 보내는 순간이었는데 그때 작가는 이런 고백을 했다.
죽음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숨넘어가는 일이, 숨이 딱 멎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나는 그때 보았다. 내가 말했지.
“우리 다음에 다 만나요. 우리 다함께 만날 거예요.”
그 말이 떨어지자 그는 순하게 눈을 감았다. 다시 만난다는 그 말에 그가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만나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겠다는 듯이 죽음을 저항하다가 다시 만난다는 약속을 받고 그는 내 가슴에 안겨서 그 전쟁같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215p, 신달자, 민음사 >
나는 저런 말을 돌아가신 내 부모님에 할 수가 없었다.(저 책을 읽은 시점은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생각해보니 그냥 ‘잘가라’는 말보다는 ‘다시 만나자’는 말이 참 따스하고 듣는 입장에선 외롭지 않게 눈감을 수 있겠다 싶었다. 먼저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따라간다는 생각을 건네지 못한 게, 그게 너무 후회스러워 가슴을 치며 울었던 거 같다. 이제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누가 죽으면 혹시라도 임종을 지킬 기회가 온다면 누구에게라도 저렇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누구라도 내게 저렇게 말해준다면 좋겠다.
그렇게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다시 만난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품고 순하게 눈을 감고 싶다.
주말을 견디자. 우리 모두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쯤이야 얼마든지 키워내며 잘 살고들 있지 않은가. 그 이루어질 수 없어 보였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들 얼싸안은게 아니겠나. 국가의 희망과 개인의 희망을 동일시하는 이 민족주의적 가치관, 그것이 내가 지난시절 올림픽을 통해 배우고 쌓아온 정말 주장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서러운 방법이었다. 이번주까지는 배운대로 희망을 써먹어 보고 싶다. 나머지 서러움쯤이야 내게 달려오는 책들과, 그리고 이 글을 나누는 당신과 함께 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