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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ㅣ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평점 :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우선 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선 한숨짓던 날이 생각난다. 과연 내가 리뷰를 잘 쓸 수 있을까, 아니 끝까지 완벽하게 이해해 낼 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다. 분량도 만만치 않았고 평소 내가 선호하던 분야도 아니었고 마치 학교 때 교수가 지정해준 참고서적을 서점에 가서 울며 겨자먹기로 사들고 나오는 기분이었달까. 거기다가 그냥 자본도 반갑지 않은 터에 ‘인지’가 덤으로 붙어 있는 ‘인지자본’인지라 나는 더 머리가 아팠다. 학부 때 인지과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방법도 생각나고 인지주의 학습이론도 떠오르고 그 시절 이후 인지는 더 이상 내가 인지하고 싶은 분야는 아니었다. 주제넘지만 제목부터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고 그 결론이 쉽지 않을 것임을 간파했다고나 할까. 대체로 (이렇게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인지과학의 결론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가 정답이다.
거기다가 나는 이 책을 반쯤 읽었을 무렵 익명의 평가단으로부터 이런 책을 읽을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으면 괜한 불평말고 탈퇴나 하라는 뼈아픈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이 책을 어렵다 말하면 수준이 낮은 것이라는 오만하고도 어이없는 작태에 며칠 젠 체 하는 먹물들에 환멸을 느끼면서 어디가 어려운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페이지를 넘겨갔다.(물론 어렵다는 걸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이 쉽다는 사람은 마르크스가 쉽다는 것과 똑같은데 마르크스 연구하는 사람치고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 익명자가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며 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히 이 책은 어렵다기 보다는 지루하다고 해야 맞을 책이다. 그건 분량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 책을 이루는 본문의 본질적 문제이다. 물론, 어려우니까 지루할 수 있으나 이 책은 결론을 위한 본론, 본론을 위한 서론, 서론을 위한 참고, 참고를 위한 선 연구가 꽤 긴 편이다. 책의 구성상 인지자본주의를 말하기 위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분량상 절반을 차지한다.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의 재해석과 리메이크,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인지자본주의 자체가 설명되어 문제가 되기되고 대안을 제시해 내는 과정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외려 인지자본은 마치 우리 생활에 체화된 이론처럼 잘 수용되었고 그 이전의 경제이론들은 마르크스 원론과 비교, 분석이 밀도높게 이어지다 보니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인지자본주의는 쉽다) 마르크스 자본론 공부하려고 이 책을 펼쳤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연구자인 저자에게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고 마르크스에 비춘 인지자본의 결과를 논리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연구의 성과였을 것이므로 이 책은 인문학적 교양을 위한 서적이라기 보다는 사회과학적 연구실적이라고 해야 맞다. 학계에서 이미 인정을 받고 계신 분의 책을 내가 무어라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일반독자인 나는 최대한 겸허한 자세로 이론의 주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마르크스 비전공자이면서 현재 저자가 말하는 인지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인지노동자중 한 사람으로서 인지자본주의를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하며 인식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중요한건 작금의 시대가 인지자본주의가 맞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인지자본주의 시각에서 바라본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이곳은, 하는 질문일 것이다. 그것은 꽤 단계성을 요구하는 인지적 사고, 의식적 과업의 과정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 책보다도 인지적 사고 과정을 거칠 것임이 틀림없다. 연구엔 의미있었을지 몰라도 일반 독자에겐 너무 과한 마르크스 분석만 제외하면 이 책은 독서과정 자체가 다른 서적과도 차별화되는 인문학적 매력을 지녔다. 자본에 대한 역사적 흐름과 인지라는 과학적 개념을 합체하여 간만에 학구적인 시간을 가졌다. 오랜기간 연구한 성과이니 만큼 소장용으로서도 충분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서론과 본론에 비하면 인지자본주의를 아젠다로 확정 한 후 그 대안에 대한 내용은 다소 추상적, 상징적이고 힘이 없어 보였다. 사실 문제만 잔뜩 독자들에게 안겨준 느낌이 들었다. 공통으로서 공통되기는 최선의 결론으로서 비약적이다 싶었다. 그것이 비록 현재까지 가장 대안인 답안일지라도 구체적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이상은 너무 멀어 보였음이다. 다행히 사회 혁명적 대안문제에 관해서는 추후『혁명의 세계사』(가제)라는 책을 통해 역사서술적 방식으로 또 상세하게 다룬다고 하니 이 책은 현재 자본주의에 대한 현상분석과 결과 및 문제확인, 그리고 새로운 개념정리 정도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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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서로 다 알면서도, 마치 옛날 민담에 나오는 호랑이 꼬리를 잡고 달리는 소금장수 신세같이 놓을 수도 멈출 수도 없다. 파국의 여러 징조가 보이는데도 꼭 잡고 계속해서 달려야만 한다.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지옥 또는 천국처럼 낯선 것이 아니라 너무도 일상적으로 낯익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만들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처럼 ‘매트릭스’로서의 그 세계는 바로 우리 지척에 있다.
- <낯익은 세상, 황석영- 작가의 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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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본주의라는 현실에 계란으로 바위치듯 물질문명을 비판해온 작가들은 하나같이 문명은 운명이라 외친다. 황석영은 자본주의에 지배당해 그 결과로 드러나는 다양한 세상이 아무리 낯설은 것 같아도 결국 우리가 원하고 만들어 온 세상이기 때문에 어딜가나 낯익은 세상이라 말한다.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오늘을 만들어온 자본주의 세상이라 말한다. 그런데 정말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렇게 악마같은 자본주의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벗어나야 하는 이유와 벗어나고픈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부터 체계적인 분석과 탐구를 요한다. 세계적 운명이니만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럴려면 자본주의가 그동안 우리와 주고 받은 것들을 면밀히 따져 물어야 한다. 물론 자본은 아무런 답이 없다. 지난 주에 이 책을 덮고 작가가 제시한 소설적 질문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거의 질문을 답으로 생각하며 그 답없음에 한숨을 지었다. 우리 사는 현실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세상엔 비현실이라는 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적 질문이 많다. 예를 들어, 왜 사는가?, 사람은 왜 사랑하는가?, 왜 밥을 먹는가? 등과 같은 질문은 굳이 답없어도 질문 자체가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고 결과를 말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마음이 공유되는 성격을 가졌다. ‘자본주의’도 거대한 역사 프레임이 아니라 일상의 독서프레임에 놓고 보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질문이 아닐까. 우리는 아파트에 잘 살고 있으면서 아파트가 가져오는 인지적 착취와 그로인한 사회적 변화를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적어도 변혁이나 개혁, 혁명의 대상이 아니라 오랜 세월 불변하는 국가관이자 운명적 진리였다. 반공이나 민주주의, 세계평화와 같은 수준의, 그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내 부모이니 어쩔 수 없는 종류의 기분좋지 않은 가치적 명제였다.
저자는 우선, 동시다발적으로 조로하고 있는 21세기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라 명명한다. 인지란 무엇인가.
나는 이 책에서 인지를, 지각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의지하는 등의 활동에 포함되는 정신적 과정을 총칭하는 용어로서, 감각, 지각, 추리, 정서, 지식, 기억, 결정, 소통 등의 개체적 및 간개체적 수준의 정신작용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 43p
쉽게 말해서 이 책에서 말하는 인지는 정신작용으로 시작해 육체적으로 체화된 인간의 생체적 반응을 말한다. 내가 썼지만 뭔가 유식해 보이는 인지적 문법이다. 더 쉽게 말해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라 할 수 있는데 (교육을 전공한 내 주변머리에 의하면) 인지도 습관화되는 보편성을 지녔다고 할까. 프랑스의 철학자 라베송은 이런 말을 했다.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라고. 예를 들면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오지에 여행을 갔다고 치자. 환경이 변화했지만 신문이라는 습관은 이미 내면화되어 있어 그 사람은 신문을 찾게 된다. 습관이 무섭다는 것은 단순반복성의 이유때문 만은 아니다. 라베송의 사유는 오늘날 많은 뇌 과학적 연구에 의해 인간은 습관을 인지화하는 능력을 지녔음이 밝혀짐으로 해서 철학의 과학화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과학을 예견한 철학이었다. 바로 인간은 처음에 합리적인 생각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정서나 행동으로 변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이것은 의식적 노력이 본능적 운동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자꾸 생각하면 그것이 몸으로 체화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 과정자체도 다양한 종류로 확대되며 습관을 반복할 수 있다는 뜻과 같다. 결국 인간은 부모, 환경, 교육, 경험 등 여러 가지 습관이 자기식으로 체화되어 이루어진 습관의 인지적 체화의 총체인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지자본주의는 이렇게 ‘사회공통의 동시 다발적인 생각’이 개인의 신체에 체화되어 우리는 오늘날 인지화된 노동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고 ‘사회공통의 동시 다발적인 생각’은 다름 아닌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습관이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가장 가까운 시점부터 역순으로 따져 들어보면,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무상급식에서부터 북 아프리카 및 중동의 혁명, 올 봄 일본의 쓰나미와 원전 사고, 2008년 금융위기, 촛불시위, IMF 사태 등의 일련의 역사적 현상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위기를 방증하는 지구적 현상들이며, 3기 자본주의의 추락을 상징하는 연쇄적 형태라 말한다. 제 3기의 자본주의는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이어 나타는 것이며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특징으로 하는데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노동의 변화과정이다. 노동형태의 변화는 인지적 재구성을 가져왔고 그것은 자본과 금융, 시공간, 계급, 정치, 지성의 재구성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울, 불안, 공황, 두려움의 만연된 심리상태에 노출되었으며 사람들은 알면서도 뾰족한 대안 없이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의 인지화를 ‘영혼이 노동한다’ 혹은 ‘노동하는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비물질노동’, ‘삶정치적 노동’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 프로그래머, 산업 연구원, 의사와 간호사, 교사와 교수, 예술가, 승무원들은 육체가 아닌 지식노동, 감정노동, 정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인지화 되는 착취와 지배’속에서 영혼의 피로도를 축적한다는 것이다.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 것은 구글이나 사회연결망 서비스(SNS)가 다중들의 자유로운 인지활동을 기반으로 지적소유권을 독점, 유지함으로써 개인의 인지 및 사회적 소통활동을 결국 착취하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장(인지적 토지)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활동을 자신들에게 집중시키는 알고리즘을 설계하여 노동자체가 유발한 상품이 아니라 노동으로 발생한 가치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 특정 계급 집단이 사적으로 독점하는 것은 이미 금융, 공간, 교육, 환경 등의 분야에 걸쳐 일반화되었지만 나는 지적재산권이라는 문화자본에 더 절실함을 느낀다. 공유와 소유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작금의 시점에 나는 평소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지적소유인지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내 손안에 든,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지 않은가. 물론 가진다는 것이 목적이고 그것 만이 중요한 사안은 아닐 테다. 그런데 분명, 누군가는 무엇을 위해 지적소유권을 가지게 되는 자가 반드시 발생하고 가진 자는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 은둔적인 성향인 성격의 나이지만 이제 전자적 집단사회에서 개인은 진정한 은둔이 가능한가 묻고싶다. 은둔의 시대는 더 이상 가치를 상실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SNS의 세상에서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인지, 알고 싶은 사람인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알았던 사람, 알아야 했던 사람, 알 뻔 했던 사람, 알고 싶지 않은 사람,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 그 아는 사람이 알고 싶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연결되며 인간관계가 양적으로 확대된다.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나는 벌거숭이처럼 노출된다. 어떤 의미에서 SNS 세상의 모든 가입자는 자발적, 타의적 노출에 동의한 사람인 것이다. 세계는 파워 스위치를 터치함과 동시에 접속되어 매순간 업데이트 되는 인간, 물자, 지식, 정보들로 채곡히 충전된다. 나는 핸드폰을 끄지 못하고 잠드는 내가 과연 진정한 휴면에 들어가는 인간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제는 어떤 사람이 죽으면 노자돈을 관속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계정의 스마트폰을 넣어 주어야 할지 모르고 그를 위해 영구 밧데리를 개발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진다. 오늘날의 개인의 정체성이란 절대 혼자 스스로 정립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회성은 곧 접속성과 동일시 되었고 실시간은 관계의 조건을 너머 대화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단하고도 놀라운 네트워크의 인지화 과정들의 한 국면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까지 아니 잠들어 있는 순간까지도 체화된 모든 인지적 작업들이 과연 내 의지에 의해 단 한 명의 자본주의 시민으로서 순전한 주체성을 행사하는 인간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시스템과 운영체제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 역량을 지배한지 오래되었고 문제는 그 지배의 주체가 누구이며 주체행위는 우리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 것이다.
저자는 9.11을 기점으로 금융자본에 의해 사회 모든 부위에 전이되던 조울증이 더욱 심각해졌고 이것은 개인의 건강 문제가 아니라 자본에 의한 인지적이고 문화적인 지배의 주요방식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자본은 노동자에게 계속하여 유연함, 사회성, 순발력, 융통성, 인내심등의 초능력을 요구하고 그것이 마치 현대사회를 능숙하고 세련되게 살아가는 주체적 양식인 것처럼 홍보한다고 전한다. 이 개인의 양식이 실현되고 인지노동이 펼쳐지는 곳은 바로 현대사회의 초대형 공장이라 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스이다. 메트로 폴리스를 상업적이지 않도록 가치화 하는 것은 예술공간이다. 예를 들어 해외의 유명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나 안도 다다오 등을 불러놓고 공공시설을 도시의 랜드마크처럼 구축하는 것이다. 첨단의 화려한 파사드는 새로운 상징공간을 창출하고 사람들은 이를 통해 새로운 욕망에 자극 받는다. 이는 곧 예정된 부동산과 연계되어 새로운 자본을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메트로폴리스적 불문율이 된다. 그러므로 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인 것이 된다. 오세훈 시장은 언젠가부터 공공디자인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2008년까지 디자인 업계에 종사할 때 적어도 우리의 공공디자인을 망치는 사람들은 고위관직에 있는 공무원들이었지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아니었다. 어디서 본 것은 많고 참여에의 생색은 내야겠으니 멀쩡한 디자인이 위로 갈수록 지져분하고 보편타당한 종합상품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버스 컬러와 우체통 컬러가 왜 영국의 색깔과 틀린지 우리네 신호등과 가로등 디자인이 왜 뉴욕의 그것과 다른지 그것은 우리가 그 색깔을 몰라서 그 디자인을 그려낼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메트로폴리스가 삶권력공간, 인지착취의 산실이 되는 것은 우리가 메트로폴리스를 가꾸고 가공할수록 더 확실히 진행된다. 메트로폴리스는 계획된 도시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잘 설계된) 자율적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할 뿐인 것이다. 교통체계, 정보환경, 풍부한 인프라, 재산가치, 공공예술, 이 모든 것은 중산층 이상의 삶에 적합하도록 진행되며 오토매틱, 디지털화된 중산층이 욕망화 될수록 중산층은 줄어든다. 거인의 도시를 떠받치는 희생자는 늘어만 가기 때문에. 어쩌다 실업자가 된 사람의 다음 행보는 재취업과 노동이 아니라 노숙이나 범죄, 죽음이라는 추락인 것. 이것이 인지자본주의의 약속된 미래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은 인지자본주의에서 '지성의 산업화'를 말하는 11장이었다. 이것은 반값등록금의 문제와도 연결된 부분이고 자본주의 시대에 인문학의 의미를 되돌아 볼수 있는 중요한 주장이었다. 오늘날 대학은 상아탑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이고 대학에서 추방된 인문학은 다중지성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런데 저자는 대학에서 말하는 위기가 인문학과의 위기인 것이지 인문학의 위기는 아니라 말한다. 대학이 아니어서 그렇지 기업이나 국가가 다방면에서 인문학을 종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는 곧 기업을 위한, 국가를 위한 인문학으로 가치가 목적에 지배당하면서 대학은 기존의 정치권력을 인문적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하위군단이 되는 악순환 구조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기업문화는 군대문화 이후에 가장 내면화된 보편적 우위감정으로서 대중은 그것에 자발적 종속화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고전붐이 일어난 것과 그것을 이명박 정부가 영어교육으로 대체한 것은 결국 인지적 구조위에 그 컨텐츠만 이동시킨 것이라는 내용이다. 고전은 어짜피 엘리트적인 국가주의를 심어 주는 것이고 영어는 경쟁을 강화하는 장치라는 것. 여기에 기존 진보, 좌파이던 인문학자들마저 이들과 영합하며 인문학 신보수주의가 되가고 있는 실정을 저자는 개탄했다. 나는 참다운 인문정신이란 개인과 사회가 가진 상처를 치유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 지금의 고통을 솔직하게 겪은 다음 희망의 불씨를 다시 지피우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의 필요성을 이야기 할 때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고전이나 영어나 인문서적이나 모두 우리 생을 풍부하게 하는 자양분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 읽는 입장에서 지성의 인지적 재구성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악덕이라 하기에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 책은 저자가 말하는 인지적 착취의 양상들(공황, 우울, 불안)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렇다면 인지적 치유는 불가능한 것일까. 세기말 자본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악의 구렁텅이요, 지옥의 산실인 것일까. 저자는 그 답을 자신의 연구실적인 '인지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인지'에서 찾는 듯 보였다. 저자는 한국의 촛불봉기와 아랍의 혁명에서 나타난 투쟁이 주체성에서 변화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투쟁이 인지적으로 유통되면서 국지적이 아닌 범세계사적인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것을 지도력의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지도력의 탄생으로 보고 있다. 특정 주체가 지도자가 아니라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개방 및 참여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저자는' 다중의 공통되기'라는 용어로 시사화하였다. 인지적 지배를 탈피 하는 일은 인지적 창조라는 뜻으로 들렸다. 인지자본주의에는 인지혁명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인지착취의 대상이 많아졌다는 것은 역으로 인지작업량과 작업주체 즉, 참여의 인원이 많아진다는 뜻과도 상통한다. 비정규직 근로자, 노약자, 여성, 이주민등 기존에 비참여적, 소극적이었던 소외집단이 대거 자발적인 참여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적이 개발한 무기를 적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주장한 것이 인지자본이었기에 나는 이 책의 말미에 제시된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뽕띠(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말을 다시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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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고, 스스로를 바라볼 수도 있으며, 따라서 자기가 보는 것 속에서 자기의 보는 능력의 이면을 인식할 수 있는 몸, 다시 말해 보는 자기를 보고, 만지는 자기를 느끼고, 자기 눈에 보이고, 자기 손에 느껴지는 몸은 그 자체로 공통된 세계를 구성하는 인지적 존재로 나타난다.
- 『눈과 마음』, 마음산책,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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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시작은 정치, 사회, 경제학이었지만 결론은 철학이었다. 새로운 다중, 새로운 군주로서 스스로 혁신적인 존재가 되는 길은 무엇보다 인간 자신이 인지적 존재임을 깨닫고 창의적인 인지적 과정을 수행해나가는 것이었다. 철학이라는게 늘 부족하고 허탈한 것 같아도 마음에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인지적 사고과정을 유도하는 미덕을 가졌기 때문일 터이다. 이 결론은 작년에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이 <생각버리기 연습>에서 제시한 수행과정과도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스님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외에 다른 것을 할때 그 생각을 버리고 그 다른 것에 더 집중하라고 주장했다. 완벽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모든 감각을 가동해 각자의 감각에 충실하게 집중하라는 말씀은 결코 생각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폭이 더 확장되는 효과를 가져올 터이다. 그것은 메를로-뽕띠가 말하는 인지적 존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말처럼 ‘구경꾼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는 정보수단을 변혁수단으로 이용해 다른 미래를 창출하려는 혁명적 참여자이자 창조적 예술가’로 살아가기란 말처럼 어려워 보이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거창하게 혁명이나 예술같은 위대한 존재를 바라지 않고 무엇보다 스스로 인지적 존재임을 깨닫는 과정이 선행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책을 덮으며 스스로 내 자신의 사고 과정을 시뮬레이션 해보게 된 것은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적지 않은 기쁨이었다. 자본에 상처입은 우리들의 인지적 치유는 자본없이도 실행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것은 바로 오늘이라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진지한 성찰일 것이고 내일의 위기를 준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의 인지적 행동은 아닐까. 인지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인지적으로 착취할 순 있어도 계속되는 노동자의 인지적 사고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착취냐 치유냐, 그것은 인지적 존재인 우리 자신의 인지적 사유에 답이 있을 터이다. 그것만을 인지하자.
<덧붙임>
mess-up mess-age issue, 2008, primaverasurotoñonorte 에 실린 제프 사피의 그림들
이 책에는 각장의 말미에 편집상 의미있는 사진과 일러스트들을 첨부해 눈길을 끌었다. 책의 표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기억을 먹어치우는 약탈자>라는 그림을 그린 제프 사피(Jef Safi)가 그린 또 다른 일러스트이다. 이 작가가 그리는 대중은 자신을 스스로 갉아먹는 대중으로서 보통 신체의 일부분이 왜곡, 훼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대중매체에 희생된 개인의 이미지를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구분짓지 않고 제시한다. 3D 안경을 낀 대중들, 타자의 아우성을 그대로 먹고있는 개인의 정체성은 그대로 자본주의의 위기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지는 결국 정신으로 지배되어 나타나는 극명한 신체적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실은 물질문명의 실재를 보고 만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문명의 환상을 자각하고 감내하는 과정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