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시집을 읽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덮어요. 내가 찾는 건 시였을까요?

 


#1. 젖은


오늘 아침에 젖은 시집이 한 권 도착했습니다.
누런 서류 봉투는 축축히도 짓물러 있었어요. 안되는데...
겉봉에 택배비 2,500 원이 선불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숫자가 무어라고...
그게 눈물이 났습니다. 돌려보니,
시집은 7,000 원이라고 찍혀 있었습니다.

합이 만 원이 안 되는 봉지 하나가 내 가슴에 도착하는 동안
그들은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아 버린 상태였던 겁니다.

우린 그렇게 젖은 채로 만났습니다.



#2. 굳은


어제는 팥빙수를 먹었습니다.
떡이 굳어 있었어요. 우유가 많아 얼음이 금새 녹아버렸습니다.

예전에 2,000 원 할 때 아버지에게 자주 사다가 드렸어요.
그때 생크림 도넛이 1,200원 이었는데 도넛을 두 개 사고 남은 동전을 저금통에 넣었습니다.

이상하죠. 분명 저금한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돈을 어디다 썼는지,
그 돈이 얼마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사람은,
돈 쓸 때보다 돈 모을 때가 더 행복한 모양입니다.



#3. 마른


두어 번 뵈었지만 여러 번 뵌 것 같은 분이
남도 어느 섬마을에 작은 주막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이유로 그곳으로 가길 결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저를 울적하게 했습니다. 

새출발하는 사람두고 박수는 쳐주지 못할 망정 뒤돌아 청승입니다.

그냥,

무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뒤돌아섰을 그 순간의 그분이 슬펐습니다.

언젠가 이곳으로부터 뒤돌아 설 때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어요.
실은 누구에게라도 잡힐까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나를 마르게 하는 시간입니다.
마른 가슴에 풀을 메기는 기억입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이 보기보다 원래 본질을 미화하는 단어라는 생각을 해요.
그에 비해 ‘이별’은 원래 속성보다 구슬프게 보이네요.

이번 주말은 마음에 비가 내리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얼마간 부여잡고 있던 일상의 유기체들을 잃어버린 탓이겠죠.
누군가는 떠나갔고,
무언가는 끝이 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직도 돈 계산을 못합니다.
그동안 그렇게 계산을 해왔으면서도 숫자가 어리둥절해요.
유일하게 남은 계산이라곤 주말에 주말을 견디게 해줄 고운 님들입니다.



이 책이 나온지는 알았지만 <은교> 이후 약간의 <비즈니스>에 대한 실망때문이었는지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트윗을 통해 작가님이 이 소설은 재미있다고 쓰는 동안 손에 정말로 말발굽이 생겨버렸다고 어리광(?)을 부리셨어요. 기자간담회 하고 온 날, 어쩐지 뻥치고 온 것 같다고, 소설 쓸 땐 거짓말 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하셨어요. 다음날, 기사를 보니 특이할 건 없었고, 작가의 말이나 그동안 인터뷰로 알 수 있었던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같은 말 반복하고 오면 가슴에 허전함이 남잖아요. 정년퇴직도 하셨고 슬하에 자식도 결혼보냈고 지금 누구보다 허전한 시간들을 보내고 계실 것 같아 이 소설을 택했습니다. 독자로서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이렇게 주말을 같이 보내드릴 순 있잖아요. 
 

 

 


그리곤 간간히 이 시집을 넘기며 가슴에 내리는 비를 달래 볼래구요.
(오늘 아침에 빗물과 한께 도착한 시집입니다)

이 서른 넘은 시인이 말하는 오늘, 금요일을 적어봅니다. 
 

 

 



   
 

금요일


  검은 옷의 사람들 밀려 나온다. 볼펜을 쥔 손으로
나는 무력하다. 순간들 박히는 이 거룩함. 점점 어두 
워지는 손끝으로 더듬는 글자들, 날아오르네. 어둠은
깊어가고 우리가 밤이라고 읽는 것들이 빛나갈 때.
어디로 갔는지.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거기 가장 불행한 표정이여. 여기는 네가 실패한
것들로 가득하구나. 나는 구겨진 종이처럼 점점 더
비좁아지고. 책상 위로 몰려나온 그들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그러니 불운은 얼마나 가볍고 단단한지.
지금은 내가 나를 우는 시간. 손이 손을 만지고 눈이
눈을 만지고, 가슴과 등이 스스로 안아버리려는 그때. 

 

- 오늘 아침 단어 中 , 28 p

 
   





글쎄, 어떤 금요일이었을지 모르지만 모르긴 해도
다가오는 주말이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뭐, 장마같은 사람들, 비에 젖은 소식들이 슬프긴 해도 저는 주말을 기다립니다.
견디게 해줄 님들이 있어 그럭저럭, 아직은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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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2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지니스가 별로 였나요?
하긴 저도 딱히 끌리지는 않던데...
박범신 작가의 저 책은 저도 언젠가 꼭 한번 읽어보고 싶긴해요.
저도 3주전에 팥빙수 먹었는데 또 언제 먹어 볼까 싶어요.ㅋ

한사람 2011-06-24 16:13   좋아요 0 | URL

ㅋ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급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파리바게트 울 동네 팥빙수는 6500원이나 하더군요 ㅠ.ㅠ
둘이 먹기에도 많고 완전 냉면 먹는 기분..
그냥 옛날에 분식집에서 얼음 갈고 팥하고 미숫가루 넣고
먹던 팥빙수가 그립더라는 ..

stella.K 2011-06-24 18:1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카페 베네보다 싸네요.
거긴 9천원인가? 9천5백 하던데요?
물론 양도 많고 맛있긴 한데,
그냥 카페는 그보다 싸요. 4천5백원인가 하니...

저는 작년에 출판사하고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어요.ㅋ

한사람 2011-06-25 10:51   좋아요 0 | URL

카페베네가 그렇게 비싸요?
허긴 웬만한 음료는 6000원이 넘더라구요 ㅠ.ㅠ
시집은 7.8천원인데..

글구, 출판사라 하심은 혹시 <비지니스> 의 자음과 모음? 말씀 하시는 건가요?

2011-06-25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1-06-25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마에 태풍에..주구장창 비오는 주말입니다. 이런 날엔 점심으론 짬뽕이 제격이고, 저녁엔 찬 소주를 한 잔 들이켜야 맛이고, 그리고 한 손엔 시집을 끼고 있어야지요.ㅎ
저도 시집 한 권 끼고 울고불고 하고 있슴돠~

한사람님의 시집은 첫 만남부터 그렇게 멋있으면서 애잔하군요. 내용도 분명 주말을 견딜만할 듯합니다. ^^

한사람 2011-06-25 16:40   좋아요 0 | URL

아..저는 점심으로 고열량의 피자를 먹었어요..
짬뽕에 쏘주...김치전이라도 해 먹어야 하는데
그러다가 손에 든 시집을 그만 라면 받침으로 쓰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ㅋㅋ

예, 전 인문서적 보다가 텍스트의 근엄함에 짓눌릴때
시집으로 뇌를 정화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시집들이 서정적이지 않아서...
옛날이 그리워요 흑.

2011-06-27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지자본주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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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우선 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선 한숨짓던 날이 생각난다. 과연 내가 리뷰를 잘 쓸 수 있을까, 아니 끝까지 완벽하게 이해해 낼 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다. 분량도 만만치 않았고 평소 내가 선호하던 분야도 아니었고 마치 학교 때 교수가 지정해준 참고서적을 서점에 가서 울며 겨자먹기로 사들고 나오는 기분이었달까. 거기다가 그냥 자본도 반갑지 않은 터에 ‘인지’가 덤으로 붙어 있는 ‘인지자본’인지라 나는 더 머리가 아팠다. 학부 때 인지과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방법도 생각나고 인지주의 학습이론도 떠오르고 그 시절 이후 인지는 더 이상 내가 인지하고 싶은 분야는 아니었다. 주제넘지만 제목부터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고 그 결론이 쉽지 않을 것임을 간파했다고나 할까. 대체로 (이렇게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인지과학의 결론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가 정답이다.

  거기다가 나는 이 책을 반쯤 읽었을 무렵 익명의 평가단으로부터 이런 책을 읽을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으면 괜한 불평말고 탈퇴나 하라는 뼈아픈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이 책을 어렵다 말하면 수준이 낮은 것이라는 오만하고도 어이없는 작태에 며칠 젠 체 하는 먹물들에 환멸을 느끼면서 어디가 어려운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페이지를 넘겨갔다.(물론 어렵다는 걸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이 쉽다는 사람은 마르크스가 쉽다는 것과 똑같은데 마르크스 연구하는 사람치고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 익명자가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며 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히 이 책은 어렵다기 보다는 지루하다고 해야 맞을 책이다. 그건 분량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 책을 이루는 본문의 본질적 문제이다. 물론, 어려우니까 지루할 수 있으나 이 책은 결론을 위한 본론, 본론을 위한 서론, 서론을 위한 참고, 참고를 위한 선 연구가 꽤 긴 편이다. 책의 구성상 인지자본주의를 말하기 위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분량상 절반을 차지한다.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의 재해석과 리메이크,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인지자본주의 자체가 설명되어 문제가 되기되고 대안을 제시해 내는 과정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외려 인지자본은 마치 우리 생활에 체화된 이론처럼 잘 수용되었고 그 이전의 경제이론들은 마르크스 원론과 비교, 분석이 밀도높게 이어지다 보니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인지자본주의는 쉽다) 마르크스 자본론 공부하려고 이 책을 펼쳤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연구자인 저자에게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고 마르크스에 비춘 인지자본의 결과를 논리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연구의 성과였을 것이므로 이 책은 인문학적 교양을 위한 서적이라기 보다는 사회과학적 연구실적이라고 해야 맞다. 학계에서 이미 인정을 받고 계신 분의 책을 내가 무어라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일반독자인 나는 최대한 겸허한 자세로 이론의 주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마르크스 비전공자이면서 현재 저자가 말하는 인지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인지노동자중 한 사람으로서 인지자본주의를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하며 인식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중요한건 작금의 시대가 인지자본주의가 맞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인지자본주의 시각에서 바라본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이곳은, 하는 질문일 것이다. 그것은 꽤 단계성을 요구하는 인지적 사고, 의식적 과업의 과정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 책보다도 인지적 사고 과정을 거칠 것임이 틀림없다. 연구엔 의미있었을지 몰라도 일반 독자에겐 너무 과한 마르크스 분석만 제외하면 이 책은 독서과정 자체가 다른 서적과도 차별화되는 인문학적 매력을 지녔다. 자본에 대한 역사적 흐름과 인지라는 과학적 개념을 합체하여 간만에 학구적인 시간을 가졌다. 오랜기간 연구한 성과이니 만큼 소장용으로서도 충분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서론과 본론에 비하면 인지자본주의를 아젠다로 확정 한 후 그 대안에 대한 내용은 다소 추상적, 상징적이고 힘이 없어 보였다. 사실 문제만 잔뜩 독자들에게 안겨준 느낌이 들었다. 공통으로서 공통되기는 최선의 결론으로서 비약적이다 싶었다. 그것이 비록 현재까지 가장 대안인 답안일지라도 구체적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이상은 너무 멀어 보였음이다. 다행히 사회 혁명적 대안문제에 관해서는 추후『혁명의 세계사』(가제)라는 책을 통해 역사서술적 방식으로 또 상세하게 다룬다고 하니 이 책은 현재 자본주의에 대한 현상분석과 결과 및 문제확인, 그리고 새로운 개념정리 정도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이제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서로 다 알면서도, 마치 옛날 민담에 나오는 호랑이 꼬리를 잡고 달리는 소금장수 신세같이 놓을 수도 멈출 수도 없다. 파국의 여러 징조가 보이는데도 꼭 잡고 계속해서 달려야만 한다.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지옥 또는 천국처럼 낯선 것이 아니라 너무도 일상적으로 낯익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만들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처럼 ‘매트릭스’로서의 그 세계는 바로 우리 지척에 있다.

- <낯익은 세상, 황석영- 작가의 말 中에서>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현실에 계란으로 바위치듯 물질문명을 비판해온 작가들은 하나같이 문명은 운명이라 외친다. 황석영은 자본주의에 지배당해 그 결과로 드러나는 다양한 세상이 아무리 낯설은 것 같아도 결국 우리가 원하고 만들어 온 세상이기 때문에 어딜가나 낯익은 세상이라 말한다.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오늘을 만들어온 자본주의 세상이라 말한다. 그런데 정말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렇게 악마같은 자본주의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벗어나야 하는 이유와 벗어나고픈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부터 체계적인 분석과 탐구를 요한다. 세계적 운명이니만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럴려면 자본주의가 그동안 우리와 주고 받은 것들을 면밀히 따져 물어야 한다. 물론 자본은 아무런 답이 없다. 지난 주에 이 책을 덮고 작가가 제시한 소설적 질문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거의 질문을 답으로 생각하며 그 답없음에 한숨을 지었다. 우리 사는 현실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세상엔 비현실이라는 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적 질문이 많다. 예를 들어, 왜 사는가?, 사람은 왜 사랑하는가?, 왜 밥을 먹는가? 등과 같은 질문은 굳이 답없어도 질문 자체가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고 결과를 말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마음이 공유되는 성격을 가졌다. ‘자본주의’도 거대한 역사 프레임이 아니라 일상의 독서프레임에 놓고 보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질문이 아닐까. 우리는 아파트에 잘 살고 있으면서 아파트가 가져오는 인지적 착취와 그로인한 사회적 변화를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적어도 변혁이나 개혁, 혁명의 대상이 아니라 오랜 세월 불변하는 국가관이자 운명적 진리였다. 반공이나 민주주의, 세계평화와 같은 수준의, 그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내 부모이니 어쩔 수 없는 종류의 기분좋지 않은 가치적 명제였다.

  저자는 우선, 동시다발적으로 조로하고 있는 21세기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라 명명한다. 인지란 무엇인가.

나는 이 책에서 인지를, 지각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의지하는 등의 활동에 포함되는 정신적 과정을 총칭하는 용어로서, 감각, 지각, 추리, 정서, 지식, 기억, 결정, 소통 등의 개체적 및 간개체적 수준의 정신작용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 43p

  쉽게 말해서 이 책에서 말하는 인지는 정신작용으로 시작해 육체적으로 체화된 인간의 생체적 반응을 말한다. 내가 썼지만 뭔가 유식해 보이는 인지적 문법이다. 더 쉽게 말해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라 할 수 있는데 (교육을 전공한 내 주변머리에 의하면) 인지도 습관화되는 보편성을 지녔다고 할까. 프랑스의 철학자 라베송은 이런 말을 했다.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라고. 예를 들면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오지에 여행을 갔다고 치자. 환경이 변화했지만 신문이라는 습관은 이미 내면화되어 있어 그 사람은 신문을 찾게 된다. 습관이 무섭다는 것은 단순반복성의 이유때문 만은 아니다. 라베송의 사유는 오늘날 많은 뇌 과학적 연구에 의해 인간은 습관을 인지화하는 능력을 지녔음이 밝혀짐으로 해서 철학의 과학화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과학을 예견한 철학이었다.  바로 인간은 처음에 합리적인 생각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정서나 행동으로 변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이것은 의식적 노력이 본능적 운동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자꾸 생각하면 그것이 몸으로 체화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 과정자체도 다양한 종류로 확대되며 습관을 반복할 수 있다는 뜻과 같다. 결국 인간은 부모, 환경, 교육, 경험 등 여러 가지 습관이 자기식으로 체화되어 이루어진 습관의 인지적 체화의 총체인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지자본주의는 이렇게 ‘사회공통의 동시 다발적인 생각’이 개인의 신체에 체화되어 우리는 오늘날 인지화된 노동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고 ‘사회공통의 동시 다발적인 생각’은 다름 아닌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습관이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가장 가까운 시점부터 역순으로 따져 들어보면,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무상급식에서부터 북 아프리카 및 중동의 혁명, 올 봄 일본의 쓰나미와 원전 사고, 2008년 금융위기, 촛불시위, IMF 사태 등의 일련의 역사적 현상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위기를 방증하는 지구적 현상들이며, 3기 자본주의의 추락을 상징하는 연쇄적 형태라 말한다. 제 3기의 자본주의는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이어 나타는 것이며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특징으로 하는데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노동의 변화과정이다. 노동형태의 변화는 인지적 재구성을 가져왔고 그것은 자본과 금융, 시공간, 계급, 정치, 지성의 재구성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울, 불안, 공황, 두려움의 만연된 심리상태에 노출되었으며 사람들은 알면서도 뾰족한 대안 없이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의 인지화를 ‘영혼이 노동한다’ 혹은 ‘노동하는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비물질노동’, ‘삶정치적 노동’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 프로그래머, 산업 연구원, 의사와 간호사, 교사와 교수, 예술가, 승무원들은 육체가 아닌 지식노동, 감정노동, 정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인지화 되는 착취와 지배’속에서 영혼의 피로도를 축적한다는 것이다.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 것은 구글이나 사회연결망 서비스(SNS)가 다중들의 자유로운 인지활동을 기반으로 지적소유권을 독점, 유지함으로써 개인의 인지 및 사회적 소통활동을 결국 착취하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장(인지적 토지)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활동을 자신들에게 집중시키는 알고리즘을 설계하여 노동자체가 유발한 상품이 아니라 노동으로 발생한 가치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 특정 계급 집단이 사적으로 독점하는 것은 이미 금융, 공간, 교육, 환경 등의 분야에 걸쳐 일반화되었지만 나는 지적재산권이라는 문화자본에 더 절실함을 느낀다. 공유와 소유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작금의 시점에 나는 평소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지적소유인지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내 손안에 든,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지 않은가. 물론 가진다는 것이 목적이고 그것 만이 중요한 사안은 아닐 테다. 그런데 분명, 누군가는 무엇을 위해 지적소유권을 가지게 되는 자가 반드시 발생하고 가진 자는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 은둔적인 성향인 성격의 나이지만 이제 전자적 집단사회에서 개인은 진정한 은둔이 가능한가 묻고싶다. 은둔의 시대는 더 이상 가치를 상실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SNS의 세상에서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인지, 알고 싶은 사람인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알았던 사람, 알아야 했던 사람, 알 뻔 했던 사람, 알고 싶지 않은 사람,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 그 아는 사람이 알고 싶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연결되며 인간관계가 양적으로 확대된다.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나는 벌거숭이처럼 노출된다. 어떤 의미에서 SNS 세상의 모든 가입자는 자발적, 타의적 노출에 동의한 사람인 것이다. 세계는 파워 스위치를 터치함과 동시에 접속되어 매순간 업데이트 되는 인간, 물자, 지식, 정보들로 채곡히 충전된다. 나는 핸드폰을 끄지 못하고 잠드는 내가 과연 진정한 휴면에 들어가는 인간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제는 어떤 사람이 죽으면 노자돈을 관속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계정의 스마트폰을 넣어 주어야 할지 모르고 그를 위해 영구 밧데리를 개발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진다. 오늘날의 개인의 정체성이란 절대 혼자 스스로 정립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회성은 곧 접속성과 동일시 되었고 실시간은 관계의 조건을 너머 대화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단하고도 놀라운 네트워크의 인지화 과정들의 한 국면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까지 아니 잠들어 있는 순간까지도 체화된 모든 인지적 작업들이 과연 내 의지에 의해 단 한 명의 자본주의 시민으로서 순전한 주체성을 행사하는 인간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시스템과 운영체제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 역량을 지배한지 오래되었고 문제는 그 지배의 주체가 누구이며 주체행위는 우리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 것이다.

  저자는 9.11을 기점으로 금융자본에 의해 사회 모든 부위에 전이되던 조울증이 더욱 심각해졌고 이것은 개인의 건강 문제가 아니라 자본에 의한 인지적이고 문화적인 지배의 주요방식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자본은 노동자에게 계속하여 유연함, 사회성, 순발력, 융통성, 인내심등의 초능력을 요구하고 그것이 마치 현대사회를 능숙하고 세련되게 살아가는 주체적 양식인 것처럼 홍보한다고 전한다. 이 개인의 양식이 실현되고 인지노동이 펼쳐지는 곳은 바로 현대사회의 초대형 공장이라 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스이다. 메트로 폴리스를 상업적이지 않도록 가치화 하는 것은 예술공간이다. 예를 들어 해외의 유명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나 안도 다다오 등을 불러놓고 공공시설을 도시의 랜드마크처럼 구축하는 것이다. 첨단의 화려한 파사드는 새로운 상징공간을 창출하고 사람들은 이를 통해 새로운 욕망에 자극 받는다. 이는 곧 예정된 부동산과 연계되어 새로운 자본을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메트로폴리스적 불문율이 된다. 그러므로 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인 것이 된다. 오세훈 시장은 언젠가부터 공공디자인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2008년까지 디자인 업계에 종사할 때 적어도 우리의 공공디자인을 망치는 사람들은 고위관직에 있는 공무원들이었지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아니었다. 어디서 본 것은 많고 참여에의 생색은 내야겠으니 멀쩡한 디자인이 위로 갈수록 지져분하고 보편타당한 종합상품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버스 컬러와 우체통 컬러가 왜 영국의 색깔과 틀린지 우리네 신호등과 가로등 디자인이 왜 뉴욕의 그것과 다른지 그것은 우리가 그 색깔을 몰라서 그 디자인을 그려낼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메트로폴리스가 삶권력공간, 인지착취의 산실이 되는 것은 우리가 메트로폴리스를 가꾸고 가공할수록 더 확실히 진행된다. 메트로폴리스는 계획된 도시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잘 설계된) 자율적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할 뿐인 것이다. 교통체계, 정보환경, 풍부한 인프라, 재산가치, 공공예술, 이 모든 것은 중산층 이상의 삶에 적합하도록 진행되며 오토매틱, 디지털화된 중산층이 욕망화 될수록 중산층은 줄어든다. 거인의 도시를 떠받치는 희생자는 늘어만 가기 때문에. 어쩌다 실업자가 된 사람의 다음 행보는 재취업과 노동이 아니라 노숙이나 범죄, 죽음이라는 추락인 것. 이것이 인지자본주의의 약속된 미래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은 인지자본주의에서 '지성의 산업화'를 말하는 11장이었다. 이것은 반값등록금의 문제와도 연결된 부분이고 자본주의 시대에 인문학의 의미를 되돌아 볼수 있는 중요한 주장이었다. 오늘날 대학은 상아탑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이고 대학에서 추방된 인문학은 다중지성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런데 저자는 대학에서 말하는 위기가 인문학과의 위기인 것이지 인문학의 위기는 아니라 말한다. 대학이 아니어서 그렇지 기업이나 국가가 다방면에서 인문학을 종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는 곧 기업을 위한, 국가를 위한 인문학으로 가치가 목적에 지배당하면서 대학은 기존의 정치권력을 인문적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하위군단이 되는 악순환 구조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기업문화는 군대문화 이후에 가장 내면화된 보편적 우위감정으로서 대중은 그것에 자발적 종속화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고전붐이 일어난 것과 그것을 이명박 정부가 영어교육으로 대체한 것은 결국 인지적 구조위에 그 컨텐츠만 이동시킨 것이라는 내용이다. 고전은 어짜피 엘리트적인 국가주의를 심어 주는 것이고 영어는 경쟁을 강화하는 장치라는 것. 여기에 기존 진보, 좌파이던 인문학자들마저 이들과 영합하며 인문학 신보수주의가 되가고 있는 실정을 저자는 개탄했다. 나는 참다운 인문정신이란 개인과 사회가 가진 상처를 치유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 지금의 고통을 솔직하게 겪은 다음 희망의 불씨를 다시 지피우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의 필요성을 이야기 할 때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고전이나 영어나 인문서적이나 모두 우리 생을 풍부하게 하는 자양분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 읽는 입장에서 지성의 인지적 재구성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악덕이라 하기에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 책은 저자가 말하는 인지적 착취의 양상들(공황, 우울, 불안)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렇다면 인지적 치유는 불가능한 것일까. 세기말 자본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악의 구렁텅이요, 지옥의 산실인 것일까. 저자는 그 답을 자신의 연구실적인 '인지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인지'에서 찾는 듯 보였다. 저자는 한국의 촛불봉기와 아랍의 혁명에서 나타난 투쟁이 주체성에서 변화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투쟁이 인지적으로 유통되면서 국지적이 아닌 범세계사적인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것을 지도력의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지도력의 탄생으로 보고 있다. 특정 주체가 지도자가 아니라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개방 및 참여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저자는' 다중의 공통되기'라는 용어로 시사화하였다. 인지적 지배를 탈피 하는 일은 인지적 창조라는 뜻으로 들렸다. 인지자본주의에는  인지혁명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인지착취의 대상이 많아졌다는 것은 역으로 인지작업량과 작업주체 즉, 참여의 인원이 많아진다는 뜻과도 상통한다. 비정규직 근로자, 노약자, 여성, 이주민등 기존에 비참여적, 소극적이었던 소외집단이 대거 자발적인 참여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적이 개발한 무기를 적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주장한 것이 인지자본이었기에 나는 이 책의 말미에 제시된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뽕띠(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말을 다시 새기고 싶다.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고, 스스로를 바라볼 수도 있으며, 따라서 자기가 보는 것 속에서 자기의 보는 능력의 이면을 인식할 수 있는 몸, 다시 말해 보는 자기를 보고, 만지는 자기를 느끼고, 자기 눈에 보이고, 자기 손에 느껴지는 몸은 그 자체로 공통된 세계를 구성하는 인지적 존재로 나타난다.

- 『눈과 마음』, 마음산책, 2008
 
   


  이 책의 시작은 정치, 사회, 경제학이었지만 결론은 철학이었다. 새로운 다중, 새로운 군주로서 스스로 혁신적인 존재가 되는 길은 무엇보다 인간 자신이 인지적 존재임을 깨닫고 창의적인 인지적 과정을 수행해나가는 것이었다. 철학이라는게 늘 부족하고 허탈한 것 같아도 마음에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인지적 사고과정을 유도하는 미덕을 가졌기 때문일 터이다. 이 결론은 작년에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이 <생각버리기 연습>에서 제시한 수행과정과도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스님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외에 다른 것을 할때 그 생각을 버리고 그 다른 것에 더 집중하라고 주장했다. 완벽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모든 감각을 가동해 각자의 감각에 충실하게 집중하라는 말씀은 결코 생각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폭이 더 확장되는 효과를 가져올 터이다. 그것은 메를로-뽕띠가 말하는 인지적 존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말처럼 ‘구경꾼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는 정보수단을 변혁수단으로 이용해 다른 미래를 창출하려는 혁명적 참여자이자 창조적 예술가’로 살아가기란 말처럼 어려워 보이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거창하게 혁명이나 예술같은 위대한 존재를 바라지 않고 무엇보다 스스로 인지적 존재임을 깨닫는 과정이 선행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책을 덮으며 스스로 내 자신의 사고 과정을 시뮬레이션 해보게 된 것은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적지 않은 기쁨이었다. 자본에 상처입은 우리들의 인지적 치유는 자본없이도 실행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것은 바로 오늘이라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진지한 성찰일 것이고 내일의 위기를 준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의 인지적 행동은 아닐까. 인지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인지적으로 착취할 순 있어도 계속되는 노동자의 인지적 사고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착취냐 치유냐, 그것은 인지적 존재인 우리 자신의 인지적 사유에 답이 있을 터이다. 그것만을 인지하자.


<덧붙임>

  

 mess-up mess-age issue, 2008, primaverasurotoñonorte 에 실린 제프 사피의 그림들


  이 책에는 각장의 말미에 편집상 의미있는 사진과 일러스트들을 첨부해 눈길을 끌었다. 책의 표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기억을 먹어치우는 약탈자>라는 그림을 그린 제프 사피(Jef Safi)가 그린 또 다른 일러스트이다. 이 작가가 그리는 대중은 자신을 스스로 갉아먹는 대중으로서 보통 신체의 일부분이 왜곡, 훼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대중매체에 희생된 개인의 이미지를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구분짓지 않고 제시한다. 3D 안경을 낀 대중들, 타자의 아우성을 그대로 먹고있는 개인의 정체성은 그대로 자본주의의 위기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지는 결국 정신으로 지배되어 나타나는 극명한 신체적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실은 물질문명의 실재를 보고 만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문명의 환상을 자각하고 감내하는 과정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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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이면서 너무나 가슴에 확 와닿는 리뷰인데요. 댓글을 쓰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대단하다고 감탄을 하며 댓글을 쓰고 있습니다. 헉! 너무 대단하심! 그리고 전 요즘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를 보며 자본론을 읽고 있어요. 노동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경제학원론을 공부하다가 그리로 빠지게 된 셈이죠. 이 책 전 반드시 읽어야 겠어요! 한사람님의 리뷰가 얼마나 굉장한지를 새삼 다시 한 번 느껴요. 저도 사실 경제학으로는 젬병이라서 잘 모르는데 리뷰가 너무 많은 도움이 됐네요. 으..정말 어떻게 이렇게 쓰시는지..감탄하고 가요. ㅋ

esmeral 2011-08-3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한사람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헬프 1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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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손, 하얀 질문



내 두 팔을 벌리고
태양을 마주하여
춤추고! 돌고! 돌고!
짧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
어스레한 저녁에 쉬는......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
부드럽게 다가온 밤은
나처럼
 까만색.

 -『랭스턴 휴스 시선집』 中에서 


   미국 흑인 문학을 대표하는 랭스턴 휴스(1902∼1967)는 흑인들을 향해 피부색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응원하는 시인이었다. 바닥은 분홍색이고 등은 암흑같은 손이지만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보물이므로 엄숙하게 여기자는 것이다. 옳고도 아름다운 말씀이다. 하지만 시인이 전하는 자부심은 그들 삶의 긍지에서 기인한 당당함이라기 보다는 삶의 애환을 극복하려는 애잔함으로 다가온다. 어쩐지 백인을 향한, 백인을 견디고 극복하려는 상대적인 선언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의미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시를 읽고는 묘하게도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얼마간 공감하는 마음보다는 다행히도 우린 흑인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앞선다. 백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흑인은 아니라는 비겁한 심리를 숨길 수가 없다.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안도감은 낯선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흑인이 등장하는 영화나 그들이 억압받는 종류의 이야기를 만날 때면 그들을 향한 연민과 울분에 실컷 공감하다가 뒤돌아선 꼭 흑인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어린아이같은 생각을 해왔다. 내게 있어 흑인은 오바마 대통령, 오프라 윈프리 같은 성공한 인물보다는 아직도 할렘가를 어슬렁거리는 불량배, 기아와 에이즈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난민, 유흥가에서 호객행위를 일삼는 마약 매춘부들이 먼저 떠올려지는 까닭이다.

  시인이면서 소설가이고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흑인여성 중 한명이라는 마야 엔젤루(1928~ )는 작년에 한국에서 출간된 <딸에게 보내는 편지, 2010, 문학동네>를 통해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흑백분리 영화관을 다닌 적 있다고 그 생생한 설움을 전하였다. 매표소부터 백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쓰레기가 밟히는 2층의 흑인 전용 상영관, 그 닭장같은 곳이 기억난 건 당대의 유명한 백인 배우들(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팩, 헨리 폰다, 찰턴 헤스턴)과 함께 나란히 초청되어 유명한 영화감독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때 그 영화 속의 하얗고 눈부신 주인공들 앞에서 추모사를 낭독하려던 마야 엔젤루는 그만 '유명하고 돈 많고 인정받는 하얀 당신들을 증오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으로 한참이나 아무 말을 못했다는 고백을 한다. 마야 엔젤루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제일 먼저 떠오른 흑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흑인여성으로서 뼛속부터 각인된 분노를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은 문학이었고 그녀의 시와 소설은 이 땅에 사는 딸들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소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졸업을 축하하며 의미심장하게도 ‘너희들은 이 나라를, 우리나라를 지금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똑바로 물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녀의 책을 뒤적이면서 밑줄이 그어진 이 문장을 보고 흠칫 머뭇거렸다. 그 질문은 공교롭게도 이 책에서 작가로 데뷔하는 스키터가 작가가 되고파 하는 아이빌린을 만난 날,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하며 아이빌린을 혼란스럽게 만든 질문과 겹쳐졌다. 나는 그들의 심장같은 연타의 질문에 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현실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친 적은 많았으나 그 현실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한 적도, 노력한 적도 없지 않았나, 싶어서다. 그것은 더 이상 흑인이 아니어서 다행인 나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꽤 둔중하면서도 동시에 예리한,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그들의 검은 손가락이 똑바로 나를 가리키며 그래, 당신은 흑인이 아니어서 행복한지 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질문은 거의 이 작품이 최종적으로 던지는 한마디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1960년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처럼 현실이 까맣게 불타버려 실은 피부색같은 건 하나도 의미없는 자들을 위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누구보다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갔고 내가 처한 현실과 자주 비교하며 조용히 울고 실없이 웃었다. 책을 덮었다고 내 까만 현실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분명 조금은 하얗게 변한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그러잡으며 두 손에 힘을 주어본다. 나는 그들에게 한 번도 손을 내민 적이 없었으나 그들은 그 까만 손으로 나를 보기 좋게 ‘HELP’ 해 준 것이었다.


虛스토리가 herstory로

  소설은 특이하게도 세 명의 여성이 시점을 번갈아가며 자기가 처한 입장을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자기 고민을 우리와 깊게 나누는 형식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대본으로 인식될 정도로 매 장면마다 섬세한 연출력을 선사했고 인물마다 에피소드가 분명하고 풍부해 이야기로서 현실감이 구체화, 극대화 되었다는 것은 이 소설이 지니는 개성이자 장점이었다. 서사의 디테일, 이야기의 밀도,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흡입력을 잃지 않게 하는 작가의 고집스런 의지가 글의 행간에서 느껴질 정도로 소설은 긴장감을 유지했다. 이 소설이 올 여름 영화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것도 반가운 소식이었는데 보통 영화가 원작의 감동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르긴 해도 책만으로도 영화의 감동을 미리 예상해보기에 충분했음이다.

  우선 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의 잭슨이라는 마을인데 글만으로는 오십 년 전의 미국에서 우리의 80년대가 상상되는 느낌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고용주로서 백인 여성들과 가정부로서 흑인 여성들이 소설적 관계를 맺고 흑인의 인권문제를 앞세우는 구조였지만 그 이면에는 이들 주종 관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백인 작가 지망생 여성이 소설 속에서 소설을 통해 흑인여성들의 자아를 해방시키고서 동시에 자신의 자아를 성취한다는 복선적 주제를 함의하는 소설이다. 인물의 뼈대는 스물셋의 백인 작가지망생인 스키터와 아들을 잃고 상처를 지닌 50대 흑인 가정부 아이빌린, 그리고 그녀의 절친인 30대 가정부 미니를 주축으로 스키터의 동창생과 그녀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백인 여성 셀리어, 그녀들의 가족, 같은 동네에서 그들의 가정부로 사는 흑인 여성들이 뭉클하고도 통쾌한 이야기를 만들어 갔다. 남자로서 여성의 갈등에 기여하는 인물은 스키터의 동창생인 힐리의 옛 연인이자 셀리아의 남편 미스터 조니 정도였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에피소드와 함께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로 보여졌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여성이 만든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이 말하는 꽤 상징적인 미국식 herstory의 자아실현물로 볼 수도 있었다.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자칫 단순하고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소재였지만 작가는 미국 남부 잭슨 마을을 보편적인 인간군상의 무대로 활용하며 세대간, 계층간, 동성간의 정교한 일상과 심리묘사로 절망과 희망을 밀도높게 조율했다. 작가의 대리인으로 보인 스키터는 ‘가정부 위생 발의안’을 구상한 힐리와 육아와 살림엔 도통 관심이 없는 엘리자베스와 동네 오랜 친구였지만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기도 했다. 내 경우를 보아도 미혼인 친구들은 기혼인 친구들과 공통된 관심사가 거의 없다. 미스 리폴트(엘리자베스) 집의 가정부인 아이빌린에 따르면 이들은 사교적인 모임에서 자식, 옷, 친구, 딱 세 가지만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국식으로 정리해보면 ‘자식’은 반드시 남편과 시집식구들을 포함한 자기가족을 의미하며, ‘옷’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상품으로서 아파트나 자가용, 가방등으로 표출되는 허영심을 상징하며, ‘친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이른바 주변인 혹은 남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한마디로 어딜 보아도 절대 자신에 대한 내면의 성찰과는 상관이 없다. 혹시라도 기혼녀의 모임에 미혼인 친구가 속하게 되면 이미 신산한 인생사를 겪었다고 자랑하는 그들이 스키터와 같은 친구에게 충고하는 건 딱 한가지이다. ‘좋은 남자를 만나라’,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향후 보다 안전한 生의 기득권을 빠르고 쉽게 쟁취하는 일은 조건 좋은 남자와의 결혼이 가장 모범답안인 것이다. 세상이 변하여 ‘자아실현’이라는 답도 무효인 것은 아니나 ‘좋은 남자’는 아직도 효력면에서 우세하다. (자기는 그렇지 않았지만)딸을 좋은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자기 남은 생의 최대 목표가 된 속물적 엄마의 전형성을 보여준 사람은 예상대로 스키터의 엄마였다. 이것은 작가하겠다는 딸에게 안정적인 행복을 주입하려는 오늘을 사는 여기, 우리 여성들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캐릭터 상으로 전형성이 더 부각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백인 여성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주로 가해자였고 가정부가 피해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 바로 작가가 백인여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아이빌린, 미니, 콘스탄틴, 율 메이 등 가정부들 중에서는 미니가 제일 활력적으로 느껴졌지만 그녀도 어쩐지 바라보는 시각에서 타자화된 대상이라 생각되었다. 자신과 같이 성장했고 같은 교육을 받았고,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았고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생각과 행동, 심리묘사는 리얼하다 못해 안스러울 정도였다. 백인의 위선은 내가 가장 잘안다 식의 고발적 문장들은 사실 고백으로 들리기도 했는데 그 과정이 작가에게는 뼈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일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녀가 말하는 백인 여성은 하얀 얼굴과는 달리 모두 속은 시커먼 유형의 인물이었다. 힐리는 마을의 유능한 여성일꾼이었다. 겉으로는 지역과 주민의 발전을 위해 빈번한 자선행사를 개최하고 공통의 복지를 위해 법안을 개진하여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진취적 인물인 것 같지만 뒤로는 자기 집단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층계급을 억압하고 일방적인 권력행사를 통해 주종관계를 영속화 하려는 위선적인 지역인사의 대표적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머나먼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서는 돈을 보내도 내 가정부가 자식들 등록금이 모자라 손을 내밀 땐 원칙을 내세우는 식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난민에 울음짓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각종 단체에 기부는 해도 내가 알고 나를 아는 이웃의 불행엔 외면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 아닐까. 좋은 환경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사교적인 성격에 능숙한 언변까지 갖춘 사람들은 힐리의 위선을 욕하기 보다 힐리와 자신의 싱크로율을 점검해 보아야 할 터이다. 미스 리폴트는 뚜렷한 개인 주장은 없으면서 영향력있는 친구를 추종하며 그의 행보와 지시를 무조건 따라하는 기회주의의 인물이다. 이런 유형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명품이나 동안, 패션에만 관심있고 텅빈 내면을 화려한 외양으로만 메워보려는 사람들이다. 셀리아는 어린 시절 가난한 빈농출신으로서의 열등감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늘 불안한 인물이다. 운좋게 남자를 통한 신분상승에 성공했지만 남편이 지역의 유명인사인 힐리의 옛 연인이었기에 이웃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였다. 돈과 시간이 많아 과도하게 외양을 치장하는 것에만 만족을 느끼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작가는 이들이 언뜻 보기엔 세련되어 보이고 타인에게 예의바른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교양있는 백인 여성인 것 같아도 가정에선 흑인 가정부에게 살림과 육아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고민이나 가족간 갈등, 살아가는 지혜 등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의지하는 나약한 면모를 자주 일러주었다. 바로 작가 자신이 그러한 가정에서 자랐고 누구보다도 흑인 가정부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백인 여성들은 결국 각자 다른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같은 여성인 흑인을 적극 이용한 것이었다. 힐리는 자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확인하는데 가정부를 앞세웠고 미스 리폴트는 아이를 사랑하는 시간을 가정부에게 일임하므로써 자신을 더 사랑하는데 시간을 투자했고 셀리아는 남편과의 형식적인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할 목적으로 가정부의 도움을 적극 활용했다.

  이렇듯 백인 여성의 herstory는 흑인 여성의 성실함과 부지런함, 그 고생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반대로 흑인 여성의 herstory는 그들로부터의 눈물과 상처위에 씨앗이 싹트고 울분이 자라나는 것이었다. 타자의 노력과 고통으로 성립된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 터이다. 비록 남들이 보기엔 초라한 사연일지라도 자신의 눈물로 영글어진 이야기가 진실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백인 여성의 虛스토리가 진짜 이야기로 탄생하는 것은 작가의 대리인인 스키터의 역할이자 책임이었다. 그녀는 흑인 여성의 herstory로 자신의 herstory를 완성했다. 백인의 虛스토리가 비로소 색깔있는 유색의 이야기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까맣게 타들어간 와중에도 마지막 남겨진 백인의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자기절망이 자아실현으로 

  스키터와 친구들의 공통점은 모두 가정에 흑인 가정부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녀들의 손에서 자랐다는 것이었다. 작가 캐스린 스토킷은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가정부 디메트리를 떠올리며 한번이라도 그녀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었는지를 자문하며 그 미안함을 이 소설로 화답하였다 고백한 바 있다. 또 출판사로부터 수십 번 외면당한 작가의 경험은 이 작품에서 스키터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시키고 기어이 출간이라는 성공을 이루어 내는 소설 속 소설구성 및 출간이라는 형식을 완성시켰다. 그런데 그 소설 속 소설은 허구가 아닌 엄연한 사실을 바탕으로 했기에 외려 물리적인 진실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되었고 스키터가 소설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독자에게 비슷한 성취감을 제공하는 효과를 제공했다. 즉, 이 소설에서 스키터가 다름 아닌 자기경험을 쓰게 되었고 그것을 힘겹게 완성하여 마침내 출판까지 이르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스토리는 이미 작가의 소설로 현실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소설이상의 극적이고도 비현실적인 소재였던 것이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루트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스키터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몇백 배 더 세상으로부터 거절, 외면당하고 난 뒤에 빛을 보게 되었고 그런만큼 그 성취와 영광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소설에선 이미 성장기에 작가적 시선을 키워온 스키터가 작가의 대리인으로서 친구들의 위선과 부모의 허영심을 뒤로하고 소설적 주제를 발굴해 그것을 완성시키는 과정을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었다. 뉴욕의 출판사 편집자는 스키터에게 여러 번 우습고 하찮아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찾아내라 주문하였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그동안 인생에서 돌아보지 않았던 과거의 인물, 그 타자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심했던 타자의 고통을 다시 복원해 그것을 섬세한 시선으로 투시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것 마냥 절실하게 끌어안고 체감한 후 독자와 진심으로 그것을 소통하고자한 노력이 바로 더 강렬한 진정성을 발휘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나는 작가의 영리함을 실감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성취한 것은 곧 작가가 성취한 것과 동일했다는 것이 이 작품이 다른 작품과 가장 차별화되는 장점이자 매력은 아닐까.

  또 가만 보면 이 소설엔 자신의 고통을 글로 쓰는 사람들이 결국 글을 완성함으로써 글이 자기 생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통해 가장 현실적으로 체험한 사실이기도 했고 또 지금의 내 현실과도 가장 밀접한 단서였다. 아이빌린은 중학교 때부터 기도문을 쓰기 시작해 평소 일기처럼 자신의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사고로 잃은 아들은 미시시피에서 유색인 남자로 살면서 일하는 것에 관한 내용을 <투명인간>이라는 책으로 쓴 사람이었다. 아들의 책을 읽은 아이빌린은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에 아들이 살아 숨쉬도록 할 터이다. 사람은 죽었어도 글은 죽지 않는다. 사람과는 헤어져도 글로는 이어지고 다시 만나게 된다. 글로 부활해 아직 살아있는 많은 흑인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만난 것이다. 누군가는 눈을 잃고, 누군가는 혀를 잃고, 또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총에 맞아 숨졌지만 그들의 모든 까만 사연은 이렇듯 하얀 그리움으로 새겨진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고 소설의 능력인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흑인도 승리했지만 백인도 승리한 소설이었다. 흑인은 이야기로 승리했고 백인은 소설로 승리했다. 누가 상처를 받고 또 누가 언제 복수를 하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흑인은 흑인대로 백인은 백인대로 서로 자존심을 지키며 자신을 성취했다는 것이 나는 좋았다. 각자의 절망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도 자신의 희망으로 전복되는 결론이 설득력 있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참 기특하고도 공평한 결론이 아닌가.


눈에는 눈, 입에는 입

  그런가하면 이 소설은 화장실 용변으로 시작해 화장실 용변으로 마무리 되는 대 화장실 수사학의 기발한 수미쌍관적 면모를 과시했다. 앞선 화장실 문제는 분명 백인들이 주장하는 질병 및 위생관리 차원의 흑인과의 분리정책을 의미하지만 후자의 화장실 담론은 그것에 대응하는 흑인의 짜릿한 보복을 의미한다. 이 책은 흑인에게 가장 예민하고 가슴 아픈 사연인 화장실 문제를 재치있게도 유머러스한 풍자로 희화화 하면서 이 소설이 다큐나 논문, 기사가 아닌 소설이라는 문학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환기시켜준다. 화장실문제는 어찌보면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이 작품에서 화장실이 직접적으로 거론되는 에피소드는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나는 책을 덮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용변을 보는 것이야 말로 같은 인간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끝까지 자신들이 저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인의 집에 일하러온 흑인 일꾼은 화장실을 가기위해 인근 도처의 덤불을 헤매어야 했다. 아이빌린은 키우던 아기의 소변가리기를 훈련시키기 위해 차고 바깥 화장실에 아이를 데려가 그곳에서 시범을 보여준다. 백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백인에게 몰매맞아 눈을 잃은 청년의 소식은 절로 한숨이 나오는 대목이었다. 같은 식품점에서 음식을 사지 못하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고 같은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지 못하고, 같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반인권적인 이들에게 작가가 내린 벌은 가장 정직하고도 합리적인 처사였다. 거사를 시행한 것은 요리를 잘하고 케이크를 가장 잘 만드는 미니였지만 그 과정을 찬찬히 따져보면 그것은 치밀하고도 계획적인 작가의 계략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입에는 입, 전략은 정직했다. 

  가정부들은 유색인 식품점에서 구입한 싹이 자란 감자나 맛이 간 우유를 먹고 집에 욕실이 두 개나 있어도 한 겨울 멀리 떨어진 차고 뒤편 으슥한 화장실에서 그 결과물을 배출해야했다. 이런 아이빌린에게 지역의 위선자 힐리는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니 어떠냐고 비아냥 거린다. 힐리는 주로 연단에 서서 마이크에 대고 지역민에게 자선금을 호소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미니는 그 입으로 들어갈 초코케잌에 흑인으로서 최종 결과물을 식품첨가제로 활용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것 먹고 그 입 닥치라는 무혈 항변의 행위이다.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수행했기 때문에 미니는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며 우리는 그보다 더한 수치스런 맛을 겪으며 산다는 그래, 당신들과 다른 인간들의 맛은 어떤지 확인해보라는 의미심장한 행위인 것이다. 평소 흑인으로부터 질병이 옮는 것을 두려워한 힐리가 케잌이 더 맛있다고 칭찬한 일화는 이 작품의 모든 눈물을 통쾌한 웃음으로 전복시키는 짜릿한 반전이었다. 자존심 강한 힐리는 그 사실이 평생 지키고 싶은 최대의 비밀이 되었고 그것은 가정부들을 자유롭게 하는 불문율이 된다. 미니에게 별도의 화장실 사용이라는 법안(현실)은 바꿀 수 없었지만 자기식의 용변처리(용기)는 얼마든지 가능한 문제였고 그것으로 힐리에게 안 보이는 법(성과)을 만들어 준 것은 소설적 재미에 그치지 않고 뭉클한 교훈을 준다. 

  이 책에서 가정부들은 대부분 남편의 음주와 폭력에 시달리거나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흑인이면서도 여성적인 성차별의 이중고를 안고 살고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심많은 이웃으로 등장한다. 가족의 먹거리를 책임지며 가정의 안녕을 위해 가사를 책임져온 주부들은 미니의 복수에 야릇하고도 통렬한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서면 사회 최약자층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이런 반인간적인 아니 가장 인간적인 최고의 항거를 온몸으로 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먹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화장실 에피소드는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같은 공간에서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의미를 묻고 있다. 그래봤자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것은 모두 변함없이 똑같다는 우리 生의 이치를 알려준다.


착한 사람, 나쁜 운명

  스키터는 말한다. 이십 구년 동안 가족을 위해 일해 온 가정부 콘스탄틴은 유일하게 자신을 유지니아라는 본명으로 불러주었으며 성인이 되고서도 기숙사에서 편지를 주고받던 인생의 비밀 동맹자였다고. 콘스탄틴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빌린은 말한다. 자신은 ‘아기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줄 알게 키우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그런데 자기 자식에서 허울좋은 규율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예절이 아니라 진심어린 친절과 자존감을 가르쳐준 이들에게 고용주인 백인은 없는 사건을 만들어 인격을 모함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 일자리를 잃게 한다. 가정부의 딸이 백인 것을 인정하지 못해 단칼에 해고하고 별 쓸모없는 보석을 훔친 죄로 모진 실형을 선고하도록 종용한다. ‘잭슨에 있는 모든 땅의 주인은 백인이고, 모두 백인을 아내로 맞았으며, 그 아내들은 누군가의 친구’이기 때문에 속된 말로 백인에게 한번 찍히면 가족의 생계는 물론 생명까지 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왜 그토록 소름끼치게 그들과의 분리를 열망하며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을 두려워 했을까. 실질적인 도움은 제일 많이 받고 있으면서 왜 그들은 그 도움을 인정하지 않는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자신의 결점과 일상의 비밀을 가장 가깝게 많이 알고 있는 가정부들이었기에 될수록 그들과 삶의 구분을 확실히 짓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와 여러 해 동안 나는 부모님과 함께 큰 이모님 댁에 얹혀 살았다. 2층 짜리 주택이었는데 그 큰 집에 시골에서 올라온 ‘행자’언니라는 가정부가 있었다. 그 당시 소위 있는 집에는 ‘식모’라는 개념의 스무살 남짓한 처녀가 대 식구의 살림살이와 치다꺼리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행자'언니는 성격도 좋고 덩치는 물론 식성도 좋아 사촌오빠들의 놀림을 많이 받았다. 얹혀 사는 신세인 내 어머니와 가장 친했고 혼자인 나에게도 잘해주었지만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내가 그 언니와 (신분이)같지 않다는 사실을 꼭 언니에게 주입하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이른바 주인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행자언니는 어린 나를 귀엽게만 여겨 목욕을 하면 머리도 감겨주고 거친 때수건으로 내 등짝을 빡빡 밀어주던 살갑던 언니였다. 나는 이모집에 있는 동안 '행자'언니 덕에 그야말로 호강하며 공주아닌 공주대접을 받았고 나중에 우리 식구가 이모집을 나와 이사를 가고 난 후엔 물한잔도 마다않고 떠다주던 그 언니가 제일로 그리웠다. 한참 세월이 흘러 남의 집 식모로 살아야 했던 <봉순이 언니>라는 소설을 읽고 다시 그 언니가 생각났던 게 벌써 십년 전이다. 고향으로 내려가 방앗간집 큰 며느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잊고 있었던 행자언니를 근 삼십 년만에 만난 것은 뜻밖에도 어머니 장례식장에서였다. 한눈에 보아도 시골에서 상경한듯 보이는 퉁퉁한 아주머니 한분이 어머니 영정앞으로 종종 걸어오더니 그만 목을 놓고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어머니를 잘 아는 분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는지 그녀를 알아보던 큰 이모님이 그녀에게 달려가 서로 안고서 얼굴을 어루만지며 울음을 떠뜨리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모님의 입에서 '행자'라는 호칭을 들었고 그제서야 왜 그녀가 그토록 서럽게 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장례식에서 상주가 되면 조문온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슬픔의 양을 가늠할 수가 있게 된다. '행자'언니는 내 어머니의 죽음이 슬퍼서 울었다기 보다는 자신과 맺은 그 시절 많았던 기억 때문에 눈물을 쏟은 것이었다. 기억의 양이 곧 눈물의 양인 것이다. 울음을 정리하고 마주 앉은 '행자'언니는 그때 내 손을 꼭 잡고 어머니는 스무살에 유일하게 자신을 견디게 해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남의 집 가정부였지만 그런 자신을 늘 똑똑하고 친절하고 성격좋은 사람이라고 앞으로 제일 잘 살거라고 매일같이 용기를 주셨다고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 아이빌린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키운 아이와 헤어지면서 너는 ‘똑똑하고 친절한 아이’라고 재차 일러주고 스스로 다짐하게 할 때 가슴에 태풍같은 바람이 휙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스키터는 가정부의 기억을 통해 ‘비참하다고 생각되는 자기 인생에 구원을 받는 듯한 느낌’을 얻는다고 말했다. 아무리 현실이 고통스럽고 내 처지가 보잘 것 없어도 내가 중요한 사람이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그 사람을 현실에서 구원해주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아이빌린에게 로버트의 실명소식을 전하던 이웃은 말한다. ‘나쁜 일은 왜 가장 착은 사람들에게 생기는 지 모르겠’다고. 우리가 주변을 둘러 보아도 불의의 사고는 꼭 누구보다 착했던 사람에게 일어난다. 남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묵묵히 자기 생을 살아온 사람들, 자신도 변변치 않으면서 남들에게 자기 가진 것을 더 많이  나누어 주던 사람이 꼭 변을 당한다. 나 역시도 어머니의 사고를 겪은 사람이라 왜 착한 사람들에게만 불행이 닥쳐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그런데 얼마 전 십년 전 <봉순이 언니>로 나를 울린 작가, 공지영의 소설 <맨발로 글목을 돌다, 2011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를 읽었는데 그 작품에 수긍할 만한 답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봉순이 언니>를 통해 나와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 제기한 작가였기에 세월이 흐른 후 그녀의 답은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비슷한 질문을 하는 기자에게 ‘착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만이, 선의를 가진 그들만이 자신에 대한 진정한 긍지로 운명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들만이 착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운명을 좋은 의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쁘게 해석하는 것은 운명에 닥친 당사자가 아니라 그들이 불행하다고 바라보는 나머지 사람들의 문제라는 뜻으로도 이해되었다. 이 말은 착한 사람이야 말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 아닐까. 꼭 이 책에서 언급한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線을 뛰어 넘는 것은 오로지 善뿐이라 답하는 것만 같다. 그것을 이 작품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착한 사람이야 말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세 명의 이야기가 교차되다가 이 책에서 유일하게 그 세 명의 시선이 아닌 작가의 시점으로 서술된 부분이 있다. 2권 초반부에 제시된 '자선행사장에서 생긴 일'. 흑인이고 백인이고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작품속의 소설적 축제에 다름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카메라를 줌 아웃하여 조감으로 전체를 내려다 보는 그 장면에서 작가적인 깨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정답이 없다. 저마다 행복하려고 더 좋은 남자를 만나려 하고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행사장 바깥에선 베트남 파병으로 군인들은 전사했고 마틴 루터 팅 목사는 가두시위를 벌렸고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어쩐지 오늘을 사는 우리네 세상과 흡사한 세상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누가 누구를 욕하고 비난하기엔 행사장은 새삼 별 문제가 없어 보였고 저 바깥 세상은 나와는 너무 멀어 보였다. 이 책의 마지막은 아이러니 하게도 예상대로 가정부들이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그 첫 발자국을 따라간다. 이정표는 자선 행사장도 아니고 백인의 또 다른 가정집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지는 장면이다. 두렵지만 벅차고 슬프지만 희열이 느껴진다. 어디로 갈 것인지 묻는 것만 해도 심장이 빨라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현실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조그만 손으로 내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 어떻게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현실을 바꾸는 것은 결국 내 생각이 바뀌어 지는 그리하여 내가 새로워 지는 그 첫 걸음의 시작, 그 바닥을 느껴보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차갑고 단단한 그 바닥위에 그래도 눈을 질끈 감고 발걸음을 한번 떼어 보는 것이 아닌가. 튼튼한 벽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내 두 다리로만 직립하여 얼굴을 들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일이 아닌가. 누군가의 돌에 맞고 누군가의 웃음에 잠시 멈출 지언정 그것을 알고서도 계속 걸어가는 그 서러운 마음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내게만은 돌아설 줄 알았던 그 운명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반드시 나와 마주해 결국 내 두 손을 이끌어 주지 않겠는가. 그렇게 살다보면 HELP, 하고 외치지 않아도 어느새 나는 누군가의 HELP가 되어 있지 않겠는가. 진정한 HELP는 내게 손 내민 상대의 손을 먼저 잡아 주는 마음이 아니겠나.

  HELP, 그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HELP가 됨으로써 나는 내 운명을 HELP하고 싶다. 그것이 내 운명이고 싶다. 현실이여, '시작'하라. 운명이여,'HELP'하라.

어쩌면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내 나이는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생각에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진다. 어젯밤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THE HELP 2, 343p



나는
흑인여자다
사이프러스처럼 키가 크고
튼튼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묵묵하고
장소와
시간과
환경을 무시하며
공격을 당해도
상처받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그대
나를 보고
새로워지라

- 『나는 흑인 여자다』, 메리 에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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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인 문학은 저도 좋아하는 편이라, 랠프 앨리슨도 그렇고 저 위에 인용해주신 랭스턴 휴스도 흑인대푬 문학선에서 읽어 본 기억이 나네요. ^^ 개인적으로 말콤X를 제일 좋아해요. 문학가는 아니지만 말이죠. ^^
이 소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읽은 것 같은데 한사람님이 쓰신 리뷰에는 성실함이랄까, 그런 것을 느껴요. 전 문학에서 성실함을 느낀 작가는 하루키거든요. 작품의 이해는 떠나서요. 내일 다시 와서 이 리뷰를 읽을려구요. 좀 곰곰히 읽어야 할 듯 해요. ^^ 항상 감사해요. 좋은 리뷰 올려주셔서 ㅋ

루쉰P 2011-06-24 23:17   좋아요 0 | URL
아! 그저께는 대략적 대목만 보고 너무 피곤해 잠들었는데 역시나 제가 본 데로 바늘로 꼼꼼하게 하나 하나 엮은 듯한 리뷰에요. 성실에서 더 높은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이거 리뷰를 읽다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이 진정한 리뷰다 생각했는데 이 리뷰!! 그런 마음이 나왔어요. 전 원래 사람들이 많이 보는 소설은 잘 읽는 괴벽이 있는데 이거 정말 한사람님 글을 보니 읽고 싶다는 생각이 팍 드네요.
'나처럼 현실이 까맣게 불타버려 실은 피부색같은 건 하나도 의미없는 자들을 위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문장은 날카로운 화살처럼 확하고 제 마음에 꽂히네요. 전 문장이 아름다울 때 정말 즐거움을 느껴요. 도처에 그런 문장들이 보여요. 후와!! 어떻게 이렇게 쓰시는지..-.- 부럽습니다!

이 리뷰가 공을 안 들인 리뷰라니 또 한 번 놀랐어요. 근데 아무리 봐도 리뷰 안에 있는 한사람님의 문장이 참으로 좋아 소설은 충분히 쓰실 수 있을거라 여겨지는데요. ^^

반응이 없는 것 보는 눈이 없는거죠. 염려마세요.

서재에 글들을 보면서 신중하게 보기는 하지만 한사람님의 리뷰는 읽고 또 읽게 돼요. ^^ 소처럼 되새김질하며 천천히 차근 차근 읽을려구요. 아..리뷰 감동 먹고 갑니다!
 

 


#1. 차가운 라인


요 며칠 저는 다시 온라인이 무서워졌습니다.

책 읽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말과 글로 누구보다 더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이제는 확신을 너머 신앙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는 게 많고 생각한 시간이 많으면 아무래도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책은 읽을수록 더 부족한 것 같고 글은 쓸수록 더 어렵던데 저는 가끔 그런 분들이 자기사유에의 우월감에 듬뿍 빠져 그만 자기 자만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아왔습니다. 그럴 때 저는 책 많이 읽는 것에 급작스런 회의를 느끼며 비록 동네 서평자이지만 제 수준에서 절필을 하고 싶다는 울분에 헐떡이곤 그만 심장을 다칩니다. 책에는 길이 없다는 김훈 작가의 말씀과 책만 보는 얼간이, 글만 쓰는 장애자,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오로지 생각만 할 줄 아는 바보, 이런 자학에 시달립니다.

처음부터 저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근사해보이지 않았거든요. 세상과 사람에 패했지만 자신은 이 방법으로 이겼노라 말하기 위해 문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왜 그때 울었는지 일평생 변명하려고 작가가 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가는 모조리 위선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일 내내 남들 욕하고 주일에 하루 예배가서 나머지 날의 죄를 용서받으려 하는 교인과 다를 바 없다고 믿었습니다. 주제넘지만 시인, 소설가, 평론가, 편집자 순으로 위선은 비례한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그래도 제가 소중하게 여긴 건 그들은 책 안 읽고 글 안 쓰면서 위선자인 사람들 보다는 좀 낫다, 하는 생각이었어요. 정의는 누구에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이라도 이루려고 하는 과정이잖아요. 온갖 욕망과 시기, 타락과 배신 속에서도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을 글로써 토해내는 것이니 그것마저 안하는 자들보다는 낫겠지,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제 속에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살면서 ‘책’이나 ‘글’ 때문에 혼나면서 학교를 다닌 것 같지는 않은데 저는 유독 사회에 나와서 위의 사람들과 많이 부딪히며 세상을 배워왔어요. 사람은 제 속에 들어있는 속내를 타자에게서 발견할 때 가장 그 상대를 싫어하고 거부한다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외려 저한테 그들의 속성을 감추려고 하는 무의식이 내재되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잘난 척 하는 거 재수없어 하는 사람들이 대게 잘난 척을 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아요 ㅋ, 왜 일까요? 그거 사실은 자기가 잘하는 것이기에 금방 알아보거든요) 어떤 사람의 속성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몸서리치게 증오했다면 그건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향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저는 겉으로는 안 그런척 겸손한 척 해놓고 속으로는 그들과 같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혹시라도 그들을 비난했다면 그건 제 얼굴에 침뱉기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엔 오프라인에서 얼굴보고 남는 시간에 온라인에서도 대화를 했죠. 그러나 지금은 그 비율이 완전 바뀌어 버렸습니다. 온라인에서 우선 정들고 정말 괜찮은 것 같으면 오프라인에도 얼굴을 비치게 되는 것이죠. 이제 온라인은 더 이상 사이버 세상이 아니고 완전하고도 구체적인 실질적인, 실물의 세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외려 오프라인이 더 어색하고 비현실적일 경우가 많아졌어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일상에서 온라인을 붙들고 있는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본격적인 우리네 온라인의 인생도 그럭저럭 십여 년이 넘었고 예전에 PC통신의 시절까지 합치면 거진 이십년입니다. 역삼동에 위치한 아이네트라는 회사(당시 허진호 사장)에서 넷스케이프라는 브라우저를 띄워놓고 직장동료와 졸면서 인터넷 교육을 듣던 게 1995년입니다. 딴에는 후져빠진 교육계에 기여하겠다고 멀티미디어를 배운다는 학과에 들어가 대충 졸업과제물로 CD-ROM을 만들었던 게 어쩐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만 같습니다. 예전에 나이드신 이모님이 사람들만 모이면 그렇게 옛날 이야기를 끊이지 않고 하시더니 제가 꼭 그꼴입니다. 이렇게 변한 세상이 가끔은 신기합니다. 네비게이션과 화상대화, 스마트폰으로 이루어진 21세기 등등의 주제로 시나리오를 써놓고 이것이 미래의 한국이라고 아름다운 한국에 놀러오라고 그런 홍보영상을 만들었던 게 불과 십년 전이었습니다. 대부분 우리 손안에서 그걸 당연하게 하고들 있지 않습니까. 저는 잘나가다가도 한번씩 그 당연함에 스스로 한랭전선을 형성할 때가 있습니다.



#2. 따스한 라인  


그래서일까요,

이런 세상이 참 편하고 놀랍고 재미나다가도 저는 가끔 숨이 찹니다. 벅찰 정도로 숨이 막힙니다. 손과 발이 시리듯 가슴이 시큰합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것들에 익숙해지는 제 자신이 징그러울 때가 있어요. 나라고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울컥 눈물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뭐야... 너도 하고 싶었던 거니? 너도 좋았던 거니?, 하면서요. 바로 그럴 때, 또 저는 습관적으로 책을 집어 듭니다. 무슨 용서를 구하듯이, 반성이라도 하듯이, 웃기지만 다른 방법을 아직 못찾았어요. 그러곤 엊저녁에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을 덮었습니다. 컴과 폰과 TV, 모든 전자적 세상을 끄고 조용히...그랬어요. 그렇게 있는 것이 요즘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걸 자각하고 견디는 게 더 낯설지 않습니까?


느낌은 그전 <강남몽>보다 한결 편안했습니다. 슬펐지만 견딜만 했습니다. 심지어는 (외람되게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쉬워선 안 되는데 어, 왜 이렇게 느껴지지, 뭐 이런. 두어군데 훌쩍거리다가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며 원 쓰레기 같은 세상같으니, 혼자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시원하더군요. 그렇게 욕이라도 하고나니 세상에 내 할 짓은 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록 아무도 몰라줄 지언정. 이 작품, 가슴속에 찌꺼기 처럼 남겨져 있던 무언가를 확 불사르는 느낌이 드는 책입니다.

본인 스스로 이 맘 때의 문학은 ‘모든 것을 쓸어버린 뒤의 폐허에 남아있는 연민을 위한 것’이라 했듯이 모든 욕망이 다 타버리고 남은 현장에서 담배 한 대 길게 물고 한숨 한 번 짓는, 그리곤 다시 당신의 일상으로 천천히 복귀하시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저는 그 고독한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번쯤 뒤돌아 보아주셔도 될텐데 그러곤 묵묵히 걸어가시더군요. 그게 꼭 서로를 우리 사는 세상을 위한 일이라 여기시는 듯. 결국, 돌아가게 하는 발걸음은 두말없이 위로였어요.  

 

그래, 저도 세상을 향했던 일말의 분노를 내려놓는 느낌으로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다른 어떤 전자적 세상의 도움없이 말입니다.

그래, 난 오늘 아침도 여전히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감히 추천하건대, 무언가를 태워버려야 할 것이 남아있는 분들은 저처럼 이 책을 덮고 허공에 욕 한번 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성란 작가는 작품 시작하기 전에 빈 문서로 실컷 할 욕 안할 욕을 다 토해놓고 그것을 사정없이 삭제한 다음 후련한 마음으로 새롭게 글을 쓴다고 한 적 있습니다.  이번 독서가 제게는 하성란 작가의 빈문서였습니다.

작가가 말하는 도깨비, 훈장 선생님 같은 그 도깨비 할아버지가 네 이놈들아 하고 훈계하시는 말씀을 적어 봅니다.  쓰레기 없던 세상은 거기 쓰레기 천지인 세상과 이렇게 다르다고, 이쪽이 원래 낯익고 그쪽이 낯설은 거였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제 생각에 이런 비슷한 호령은 조정래, 박범신 작가등의 연배에서 꼭 하고 싶은 말씀인 듯합니다.

그런데 정신차려보면 내가 싸우던 건 결국 세상도 타인도 아닌 나라는 우주였다는 생각입니다. 산다는 건 그렇게 매번 익숙할 줄 알았던 내 안의 다른 나, 또 다른 세상과 끊임없이 싸우며 그럭저럭 낯설었던 세상이 슬슬 낯익은 세상으로 변하는 과정이 아닐까요. 


거긴 여기와 다른가요? 암, 다르구 말구. 우리 동네는 언제나 너희 곁에 함께 있는 곳이다. 너희들이 있어서 우리가 있게 되고 너희가 없어지면 우리도 없어지는 거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오리 한마리, 산과 강에 이르기까지 함께 살고 너와 똑같단다. 여기서는 모든 물건이 장애물이고 싸워서 없애야 할 괴물에 둘러싸인 너 혼자뿐이로구나. 이쪽 길은 너를 끝없이 쫒아내려 하고 성취에 길들이려고 하지 않니? 그냥, 출발하지 말고 나가버리면 될텐데.....   207p

 

안 보이는 온라인도 좀 따스한 溫라인, 어느 세상보다 온기 넘치는 진짜 세상이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얼마나 낯설었습니까,그땐. 지금 이렇게 우리가 낯익듯이

그 얼음같이 낯설은 차가움도 언젠가는 동네이웃처럼 살갑게 낯익은 우리 삶의 터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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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6-18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얼음같이 낯설은 차가움도 언젠가는 동네이웃처럼 살갑게 낯익은 우리 삶의 터전이 되기를.] 저도 꼭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사람님 마음도 따뜻하게 풀어지기를, 그래서 더 좋은 글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그런데 저, [오래된 정원] 때는 황석영님을 엄청 좋아했는데(제가 대학생 저학년일때요) 이제는 그다지 흥미가 없어져요. [낯익은 세상]은 어떨까 싶었는데 막상 그다지 땡기지 않구요. 저도 요즘 엄청 바라고 또 원하는 거니까요. 따뜻한 세상. 그러니까 한사람님.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지 말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요.^^

한사람 2011-06-18 22:40   좋아요 0 | URL

예, 저는 마음이 많이 풀어졌습니다. 글로 상처 받은건 글로 푸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ㅋ

개인적으로 <강남몽>보다 진일보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강남몽>이 압축의 스펙트럼이 얼마간 부담스러운 경향이 있었다면, 이 책은 한가지 현상을 파고드는데
집중하셨어요. 문득, 김훈 작가의 <내 젊은 날의 숲>도 떠올려지더군요.

어쩐지 본인 자신을 위한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른 때와 달리 사회적 시선, 선굵은 서사에 대한 부담(?)은 덜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지 말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요' 이 말씀이
뭉클한 밤이네요^^, 고맙습니다 ~

2011-06-19 1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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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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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15: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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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1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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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19: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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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2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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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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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4: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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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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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6: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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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6: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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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한사람님을 글로 상처주는 작자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절대로 상처 받지 마시고 계속 쓰셨으면 해요. 흠..이해를 못 하겠네요. 저도 황석영의 작품은 읽다가 말아버린 독자라서요. 전 왜이리 한국 문학이 무거운지 모르겠어요. 읽으면 숨 쉬기 힘들만큼 무겁다고 할까요...뭐랄까 가슴에도 안 들어오고 말이죠. 좋아하는 작가가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한사람님의 글을 읽으면 딱 한 호흡에 쫙 읽혀집니다. 멈추지 않구요. 전 그게 좋은 글이거든요. ^^ 평탄한 도로를 미끄러지는 자동차처럼 쫙~하고 글이 흘러가요. 힘 내세요! 온라인도 반드시 통합니다.

한사람 2011-06-23 00:25   좋아요 0 | URL

우연이 겹치다 보니..
제가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늘 그렇게 생각해왔어요
누구나 다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한다잖아요 ㅋ

한국소설, 우울하죠..
그래도 전 저분들 글이 울림이 있어서 좋아요
관념적인 세계를 좋아해서 그런가봐요

제글이 한 호흡에 간다는 말씀이 힘이 되네요
호흡이 길다는 말은 많이 들었었는데..
저는 글만쓰려고 하면 마음이 울컥해지는 경향이 많아요
그래서 글쓰고 나서 풀어지면 그때서야 헤헤 거리죠 ㅋ

 



#1. 가진 건 마음 하나뿐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 중에 ‘나는 가진 게 마음뿐이니 마음 하나는 제대로 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즉, (다른 건 모르겠고)마음만 주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대부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지식도 없으니 그저 정성스런 마음 하나로 때우겠다는 미봉책의 답변일 경우가 많다. 혹은 예전엔 뭐라도 하나 해줄 수 있었거나 앞으로 잘되면 반드시 뭐라도 해주겠다는 말을 대신할 경우도 있다.(지금은 마음밖에 못주니까) 나름 미안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안 하니만 못한 말이 되기 쉬운 속성을 가진 말이다. 듣는 입장에선 결국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뜻으로 들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정말로 (주고 싶은데)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 마음만 애타는 사람은 그 미안함이 저런 식의 말을 전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을 주지 못해 마음만 가득인 사람은 말 안해도 그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인격에 서슴없이 마음을 파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만 받겠다는 말은 주는 쪽이 아닌 받는 쪽이 해야 할 말인 것이다.

  또 하나, 나는 오래 전에 마음이라는 게 인간에게 있다고 치자면 그것의 위치는 인간의 가슴쪽이 아닌 뇌쪽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헤깔릴 때가 아마도 대략 이십년 전 쯤 마음이 아프다고 느껴질 때 정말로 왼쪽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파오는 것을 확인하던 시절이었던 듯하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추상적 관념어가 아닌 처절하게 육화된 육체적 고통에서 비롯된 경험어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곳은 실제적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인 심장쪽 근처 어딘가에 자리할 것이다, 이런 믿음을 처음에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무참하게 짓밟는 학자들은 학교 도처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붙었는지 그것은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 연구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이 사람들의 이론은 대체적으로 마음의 변화는 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인지적 접근에 의해 충분히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말도 곧 마음이 아프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는 말씀이다. 마음 바꾸는 건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라는 말은 틀렸다는 뜻이렸다. 마음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어디있다고 (항변하고)싶었지만 나는 결국 그들의 이론을 믿어보기로 했다. 마음을 돌리기 싫은 마음 역시 머리가 시키는 일임을...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라 할까.


 #2. 상처난 마음, 깨어진 마음

박숙희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화남>

  마음이 많이 어지럽던 지난 주말 이외수 작가는 뜬금없이 이런 책을 추천한다고 하셨다. 추천 이유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언급하신 바가 없다. ‘반값 등록금 투쟁’으로 광화문 집회소식이 탑 뉴스일 때 였다. 그 즈음 누군가의 자살 소식도 들려왔다. 요즘은 유명인사의 자살소식 같은 건 (운대가 안맞으면? 채동하를 보라~)탑 뉴스에 끼지도 못하는 것 같다. 자살이 기사화 될 때 우리는 어느덧, 그것이 특정 사건종결의 의미이냐, 개인사 동정의 시작이냐, 새로운 사건 제보의 의미이냐, 여론 반성의 기회이냐를 발빠르게 구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뇌에서 이루어지는 작업과정은 자살자에 대한 애도와는 별개의 문제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별개의 문제일까? 부고 소식은 마음이 아프지만 어쩐지 불쾌하고 진부하기 까지 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 누군가의 자살 이후 대한민국의 언론대응 시스템은 세목화된 매뉴얼을 연상시킨다. 아직 가슴에 남아있는 애도의 불씨를 진정시킬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등장이후로 실시간의 뉴스를 언제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덕에 지나간 뉴스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른바 소셜 학습효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마음도 학습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나 같은 반아나, 반디지 세대는 정말 혼란 스럽다. 마음 하나만 믿고 버텨온 세월(?)이 풍화작용에 의해 지지층이 약해지는 순간, 말 그대로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순간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박숙희의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화남>는 진지한 마음탐구의 시간을 열어주었다. 이 책은 따끈따끈한 신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온라인 서점에서도 홍보되지 않은 어느 중견작가의 장편소설이며 특이하게도 노숙자의 심리상태를 그리고 있다. 딴에는 새로운 책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 책을 추천받았을 때에 나는 몇 년 지난 소설쯤으로 생각했다. 생소한 제목, 전혀 기억나지 않는 작가, 들어보지 못한 출판사. 속된 말로 대형출판사와 유명작가에 밀린 작품이었다. 내용마저 노숙자로 시작하는 터라 이 책은 안밖으로 소외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 책을 덮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떻게든 글로써 예의를 표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였달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쓰고도 이러저러한 속세의 법칙에 의해 독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현실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출판사와 작가에겐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 책이야 말로 문단의 노숙자 격인 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노숙자를 말하고 있지만 그를 통해 들여다 본 인간 마음의 상처와 그 변화 심리 상태를 정교하게 포착하고 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노숙자인 화자 ‘나’의 일상과 그가 동경하던 노숙자 범생이의 자서전, 그리고 범생이가 시신으로 발견 된 후 경찰서에서의 조사과정으로 나누어져 있다. 어쩌다가 노숙자가 된 ‘나’는 S역 대합실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신세인데 고상하게 생긴 범생이가 남긴 자서전을 읽게 되고 사망자의 유품인 노트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주인공 화자는 소설의 리더이지만 시점은 노숙자인 '나'의 시점, 범생이의 시점, 그리고 마지막 여러 노숙자의 시점으로 이동하며 상황은 흥미를 더하고 시공간은 입체적으로 확대된다. 노숙자의 생각과 그들 친구의 생각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생각의 깊이는 곧 작가의 깊이인지라 서울역 대합실에서 펼쳐지는 그 사유의 바다가 꽤 관념적이다.(이 책에선 노숙자가 곧 철학자다) 작가가 전하는 노숙자의 하루는 우리가 생각하는 노숙자와는 전혀 다르다. 아니 다르게 전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외수 초기 소설에 등장하는 대칭적 수사, 반복 만연체식 문장도 오버랩되었다. (말잘하는)누군가 내 귀에 들려주는 소설같은 느낌이었달까.

떠나던 날 우리는 서로의 손을 오래 부여잡은 채 놓지 않았다. 아무리 노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이별은 슬픈 것이었다. 아니, 우리가 노숙자이기 때문에 이별이 더 슬펐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 우리가 다시 만날 기약은 정녕 없는 것이므로. 26 p

  화자가 말하는 노숙자는 ‘버려본 자 만이 알 수 있는 철학’ 을 지닌 사람들이다. 노숙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슬픔’이며 노숙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제일먼저 ‘슬픔의 습기’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경험자는 말한다. 건조해진 상태에서 노숙을 하지 않으면 한없이 위태로와 진다는 것이다. 즉 마음이 촉촉한 사람은 노숙자의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촉촉하다는 것은 생각이 많고 그 깊이가 깊어 결국 우울해지고 그러다 보면 극단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노숙자는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않아야 하기 때문에) ‘기억의 사진첩 대부분을 찢어 버림으로써’ 자신을 버린다. 그런데 모든 걸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킬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자의 여유로움마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노숙자가 된 이유는 자존심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장의 제목은 ‘나는 나를 버림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인 것이다. 내 마음 하나 버리니 세상을 비추는 마음이 되었다니 참으로 철학적인 그들이 아닌가. 아니 노숙자와 도인과의 차이는 종교의 유무밖에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을 울리는 건 범생이라는 김형훈이 노트에 기록한 자서전이었다.

떨쳐 버리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버려지지 않는 어떤 마음, 아니 끝까지 간직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깨어져 버린 어떤 마음, 그리고 깨어진 그 마음이 딱딱한 물질이 되어 급기야 병이 되고 만, 바로 그것들에 대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 57p

  그러니까 이미 마음은 깨어졌는데 어떻게 해서 깨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마음 모양은 어떤 것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글이었다. 한 사람의 마음에 균열이 가고 깨어지는 과정은 회화도 영상도 아닌 오로지 글로써였다. 나는 이 책에서 시각이 문자화된 범생이의 마음 기록이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마음의 작동기능을 정지해야 하는 이유는 외려 정지 했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마음이 산산조각 나면 그것의 기능은 멈추어 버리는 것이므로 일단정지는 생존을 위한 방어본능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깨어지면 그 기능이 정지되며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자서전을 쓰느라 노트에 연신 무언가를 적던 노숙자, 범생이는 글을 쓰기 전에 소설을 읽는 사람이었고 소설은 위안도 상처도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아픔이 있는 사람이 소설을 읽는다는 말은 어쩐지 작가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고 싶은 내가 열렬하게 동의하고 싶은 말씀이기도 했다. 책을 넘길수록 이 책은 서울역 어느 노숙자 이야기가 아니고 소설가로서 노숙자가 되어본 작가의 이야기라는 믿음이 생기는 건 왜 였을까. (노숙자의 경험이 있으셨던지.. 남자 노숙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표현하신 점이 놀라웠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동안 살면서 아프게 여겼던 삶의 상처들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보다 훨씬 더 아픔이 많은 상처투성이의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러 위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깊이 빠져들면 들수록 상처가 오히려 부추겨지면서 세상이 더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아픈 사람을 더 심각한 환자로 만드는 그런 측면도 있었던 거지요. 책을 좋아하는 B 역시 어쩌면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아픔이 많은 친구일지도 몰랐습니다. 103 p

  범생이의 자서전을 통해 작가는 소설이 가지는 기능적 속성은 물론 예술로서 문학으로서의 소설의 치명적 단점도 언급하시는 듯 했다. 소설속에서 범생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는 훗날 소설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 그녀는 소설쓰기와 같은 예술행위가 안고 있는 딜레마를 너무 잘 알고 있어 섣불리 그런 일에 뛰어들지 않을 거라 생각되었습니다. 예술은 태생적으로 결코 완전할 수 없는, 그리고 도저히 완전에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할 뿐인 완전을 뒤늦게 표현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완전과는 어긋나거나 미끄러워질 뿐인 그런 것이니까요. 그런 어긋남과 미끄러짐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래도 낯설었습니다. 138p

   이 말은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된다면 내가 아는 지인들이 꼭 내게 퍼부을 말 같기도 했다. 나조차도 의심스러운 나일테니까.

  그런데 범생이 노숙자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학창생활, 교우관계, 연애와 결혼 등의 이야기를 넘기고 나면 이 사람은 그 어디도 노숙자가 될 만한 사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순결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고 그것이 완벽한 자신의 조건이라 생각한 사람이었다.(물론 노숙자가 마음이 더럽다는 뜻은 아니다) 살면서 마음이 깨어져 그것을 버린 사람을 노숙자라고 볼 때 범생이는 절대 마음을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화자인 ‘나’ 역시 범생이의 매력은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고백한다.(범생이는 주로 들어주는 쪽이었다) 그 마음 하나때문에 범생이가 좋았고 그곳의 가장 깊은 곳에 빠져 도저히 나오려 하지 않았던 그 마음 때문에 범생이가 싫어졌다고 말한다. 모든 건 마음 탓이다. 하지만 세월속에서 현실이 주는 상처에 굴복당한 범생이의 마지막 거처가 노숙자 현장이었던 것은 슬프기도 했지만 어쩐지 아프기만 한 소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마음을 다치면 육체도 훼손되듯이 마음을 둘 곳이 없다면 그곳은 훌륭한 고택이나 서울역 대합실이나 매 한가지 아닌가 묻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마음 하나만 바꾸면 다시 육체도 회복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는 말 아닐까. 그렇다면 범생이는 왜 그 마음하나 바꿀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마음만 바뀌면 다시 얼마든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노숙자가 아닌가. 이 때 나는 (공부한 것을 버리고)그 마음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안된다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손바닥 뒤집듯이 쉽지 않은 것이 마음 바꾸기라지만, 그것은 가슴이 시키는 일이 아니고 머리가 명령하는 일일 것이므로, 그렇담 그 일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싶다고. 아직은 집에 가고 싶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늘 그렇게 바뀌기 마련이라고.  

  그렇게 본다면 마음을 잡는 다는 것은 외려 도망가던 생각을 붙잡아 그 속에 고집스럽게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는 일이 아닐까. 마음을 잡아야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 터이니.


#3. 마음을 바꾼다는 것


    그런데 왜 어떤 이는 마음을 바꾸지 못해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         

    마음을 좀 뜻대로 바꿀 수는 없는 걸까.                                

허전한 마음에 소설을 덮고 나는 다중지능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하워드 가드너의 <체인징 마인드>라는 책을 다시 뒤적여 본다. 몇년 전 그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한 친절한 답변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으로 일곱 가지 지렛대를 말하고 있는데 어려운 것 같아도 따져 넘겨보면 하나같이 우리 마음이 바뀌는 이유가 되는 것들 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마음을 바꿀 때,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있다.  

하워드 가드너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은 결코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겉보기에는 매우 갑작스럽고 직관적인 변화라 할지라도 그 배경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이고도 능동적인 변화 과정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 과정에는 그가 ‘일곱 가지 지렛대’라고 부르는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을 하는데, 그 일곱 가지 지렛대는 우연히도 모두 영어의 알파벳 Re로 시작한다. 이성(Reason), 연구조사(Research), 동조(Resonance), 표상의 재구성(Representational Redescriptions), 자원과 보상(Resources and Rewards), 실제 사건들(Real World Events), 그리고 저항(Resistances) 이 그것이다.

    

  좀 더 통찰력을 높여 보려면 질문을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가?’로 확장할 수가 있다. '체인징 마인드' 이후에 소개된 『미래 마인드』는 미래에 요구되는 마음의 능력을 연구한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마음, 21세기를 성공적으로 살아 나가기 위한 미래 마인드 다섯 가지는 훈련된 마음, 종합하는 마음, 창조하는 마음, 존중하는 마음, 윤리적인 마음이다. 역시 교육적인 결론이다.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출간하는 책마다 교육및 심리, 사회학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이다. 이분의 신간 소식을 기다린다.


 

 

  

   나는 소설 읽고 미치도록 즐거웠다는 사람보다는 더할 수 없이 쓸쓸했다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일차적으로 결말이 유쾌한 소설보다는 우울한 소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왜 우울하고 슬픈가. 왜 그렇다고 느끼는가. 그런데 왜 그것에 위로를 받는가. 혹, 슬픈 마음을 받아 들이는 뇌의 문제는 아닐까?

   소설이 허탈할 때 그것을 덮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나는 인문학이 유용하다는 생각이다. 소설이 상처난 마음을 위로해준다면 인문학은 그 상처의 원인을 이해하게 하고 얼마간 논리적인 시간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둘다 균열된 마음, 깨어지려고 하는 마음을 다잡아 주는 치유효과는 확실하다.  그런데 소설을 자주 읽는 사람은 바로 인문학 서적을 집어 들기가 쉽지 않다. 내 생각에 위로의 방식도 습관화 되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그 슬픔을 더 오래 유지하고 싶은 욕망도 잔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좀 생각이 달라졌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소설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문학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불어 나는 이외수 작가가 왜 박숙희님의 소설을 권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모든건 이렇듯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청춘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끝내 자살을 택하는 청춘에게 글로 이루어진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씀 같기도 하다. 어떻든 청춘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피할 수 없는 마음관리 행위에 속한다 할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거나 종잡을 수 없는 분들에게 이 책들을 꼭 권하고 싶다. 특히, 박숙희님의 소설은 글을 쓰려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흔드는 매력을 지녔다. 왜 주목받지 못했는지 그것이 통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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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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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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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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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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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1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희숙님의 소설이 굉장히 읽고 싶어지네요. ^^ 이런게 진짜 리뷰이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구요. 감탄해요.

소설이 허탈할 대 인문학이 유용하다는 것, 그것은 저에게도 쓰일 수 있는 치유책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저 역시 소설로 무언가 부족하고 실체를 잡고 싶을 때 인문학 서적을 보는 편이니 말이에요. 아주 꼼꼼히 자세하게 잘 읽었습니다. 전 한국 문학은 거의 안 읽는 독자이다 보니..왜 그런지를 모르는데 한국 소설은 잘 읽지를 않아요. 별로 안 좋은 습관인 것은 알지만, 고쳐지지 못 하는 습관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 여기 와서 그 습관 좀 고치고 가야할 듯 합니다.ㅋ

한사람 2011-06-15 08:54   좋아요 0 | URL

겁없이 이소설을 추천합니다 가독력도있고 문체도 남성적이고ㅡ갠적으로 여성취향의 문체를 싫어해서ㅋㅡ읽는동안 노숙자의 시선으로 살았습니다

...........

어제 머리가 좀 아파서 덧글을 폰으로 작성했어요
오늘 다시 읽어보니 글이 엉성하고 급하게 쓴티가 나서 좀 고쳤습니다..
진짜 리뷰라고 하셔서 자극+용기+위로+감사+책임...이런 것들이 지나갑니다 ㅋ

정말 괜찮은 소설입니다^^

굿바이 2011-06-1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숙희씨의 책을 선물받고 겁이 나서 아직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책을 선물하고, 한사람님은 이렇게 울림이 있는 리뷰를 쓰시고, 이 책은 피해갈 수 없는 책인가 봅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1-06-15 11:12   좋아요 0 | URL

맞아요..슬쩍 외면하려던 책이 끝까지 발목을 붙잡는 인연이 될 때가 있어요 ㅋㅋ
이 책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있었다니..저는 그게 더 반갑네요^^
아마 읽어보시면 굿바이님은 제 글 보다 더 깊은 울림을 느끼실 겁니다~


2011-06-16 1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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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3: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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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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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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