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진 건 마음 하나뿐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 중에 ‘나는 가진 게 마음뿐이니 마음 하나는 제대로 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즉, (다른 건 모르겠고)마음만 주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대부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지식도 없으니 그저 정성스런 마음 하나로 때우겠다는 미봉책의 답변일 경우가 많다. 혹은 예전엔 뭐라도 하나 해줄 수 있었거나 앞으로 잘되면 반드시 뭐라도 해주겠다는 말을 대신할 경우도 있다.(지금은 마음밖에 못주니까) 나름 미안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안 하니만 못한 말이 되기 쉬운 속성을 가진 말이다. 듣는 입장에선 결국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뜻으로 들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정말로 (주고 싶은데)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 마음만 애타는 사람은 그 미안함이 저런 식의 말을 전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을 주지 못해 마음만 가득인 사람은 말 안해도 그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인격에 서슴없이 마음을 파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만 받겠다는 말은 주는 쪽이 아닌 받는 쪽이 해야 할 말인 것이다.

  또 하나, 나는 오래 전에 마음이라는 게 인간에게 있다고 치자면 그것의 위치는 인간의 가슴쪽이 아닌 뇌쪽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헤깔릴 때가 아마도 대략 이십년 전 쯤 마음이 아프다고 느껴질 때 정말로 왼쪽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파오는 것을 확인하던 시절이었던 듯하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추상적 관념어가 아닌 처절하게 육화된 육체적 고통에서 비롯된 경험어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곳은 실제적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인 심장쪽 근처 어딘가에 자리할 것이다, 이런 믿음을 처음에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무참하게 짓밟는 학자들은 학교 도처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붙었는지 그것은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 연구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이 사람들의 이론은 대체적으로 마음의 변화는 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인지적 접근에 의해 충분히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말도 곧 마음이 아프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는 말씀이다. 마음 바꾸는 건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라는 말은 틀렸다는 뜻이렸다. 마음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어디있다고 (항변하고)싶었지만 나는 결국 그들의 이론을 믿어보기로 했다. 마음을 돌리기 싫은 마음 역시 머리가 시키는 일임을...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라 할까.


 #2. 상처난 마음, 깨어진 마음

박숙희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화남>

  마음이 많이 어지럽던 지난 주말 이외수 작가는 뜬금없이 이런 책을 추천한다고 하셨다. 추천 이유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언급하신 바가 없다. ‘반값 등록금 투쟁’으로 광화문 집회소식이 탑 뉴스일 때 였다. 그 즈음 누군가의 자살 소식도 들려왔다. 요즘은 유명인사의 자살소식 같은 건 (운대가 안맞으면? 채동하를 보라~)탑 뉴스에 끼지도 못하는 것 같다. 자살이 기사화 될 때 우리는 어느덧, 그것이 특정 사건종결의 의미이냐, 개인사 동정의 시작이냐, 새로운 사건 제보의 의미이냐, 여론 반성의 기회이냐를 발빠르게 구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뇌에서 이루어지는 작업과정은 자살자에 대한 애도와는 별개의 문제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별개의 문제일까? 부고 소식은 마음이 아프지만 어쩐지 불쾌하고 진부하기 까지 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 누군가의 자살 이후 대한민국의 언론대응 시스템은 세목화된 매뉴얼을 연상시킨다. 아직 가슴에 남아있는 애도의 불씨를 진정시킬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등장이후로 실시간의 뉴스를 언제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덕에 지나간 뉴스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른바 소셜 학습효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마음도 학습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나 같은 반아나, 반디지 세대는 정말 혼란 스럽다. 마음 하나만 믿고 버텨온 세월(?)이 풍화작용에 의해 지지층이 약해지는 순간, 말 그대로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순간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박숙희의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화남>는 진지한 마음탐구의 시간을 열어주었다. 이 책은 따끈따끈한 신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온라인 서점에서도 홍보되지 않은 어느 중견작가의 장편소설이며 특이하게도 노숙자의 심리상태를 그리고 있다. 딴에는 새로운 책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 책을 추천받았을 때에 나는 몇 년 지난 소설쯤으로 생각했다. 생소한 제목, 전혀 기억나지 않는 작가, 들어보지 못한 출판사. 속된 말로 대형출판사와 유명작가에 밀린 작품이었다. 내용마저 노숙자로 시작하는 터라 이 책은 안밖으로 소외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 책을 덮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떻게든 글로써 예의를 표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였달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쓰고도 이러저러한 속세의 법칙에 의해 독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현실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출판사와 작가에겐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 책이야 말로 문단의 노숙자 격인 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노숙자를 말하고 있지만 그를 통해 들여다 본 인간 마음의 상처와 그 변화 심리 상태를 정교하게 포착하고 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노숙자인 화자 ‘나’의 일상과 그가 동경하던 노숙자 범생이의 자서전, 그리고 범생이가 시신으로 발견 된 후 경찰서에서의 조사과정으로 나누어져 있다. 어쩌다가 노숙자가 된 ‘나’는 S역 대합실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신세인데 고상하게 생긴 범생이가 남긴 자서전을 읽게 되고 사망자의 유품인 노트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주인공 화자는 소설의 리더이지만 시점은 노숙자인 '나'의 시점, 범생이의 시점, 그리고 마지막 여러 노숙자의 시점으로 이동하며 상황은 흥미를 더하고 시공간은 입체적으로 확대된다. 노숙자의 생각과 그들 친구의 생각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생각의 깊이는 곧 작가의 깊이인지라 서울역 대합실에서 펼쳐지는 그 사유의 바다가 꽤 관념적이다.(이 책에선 노숙자가 곧 철학자다) 작가가 전하는 노숙자의 하루는 우리가 생각하는 노숙자와는 전혀 다르다. 아니 다르게 전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외수 초기 소설에 등장하는 대칭적 수사, 반복 만연체식 문장도 오버랩되었다. (말잘하는)누군가 내 귀에 들려주는 소설같은 느낌이었달까.

떠나던 날 우리는 서로의 손을 오래 부여잡은 채 놓지 않았다. 아무리 노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이별은 슬픈 것이었다. 아니, 우리가 노숙자이기 때문에 이별이 더 슬펐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 우리가 다시 만날 기약은 정녕 없는 것이므로. 26 p

  화자가 말하는 노숙자는 ‘버려본 자 만이 알 수 있는 철학’ 을 지닌 사람들이다. 노숙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슬픔’이며 노숙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제일먼저 ‘슬픔의 습기’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경험자는 말한다. 건조해진 상태에서 노숙을 하지 않으면 한없이 위태로와 진다는 것이다. 즉 마음이 촉촉한 사람은 노숙자의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촉촉하다는 것은 생각이 많고 그 깊이가 깊어 결국 우울해지고 그러다 보면 극단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노숙자는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않아야 하기 때문에) ‘기억의 사진첩 대부분을 찢어 버림으로써’ 자신을 버린다. 그런데 모든 걸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킬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자의 여유로움마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노숙자가 된 이유는 자존심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장의 제목은 ‘나는 나를 버림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인 것이다. 내 마음 하나 버리니 세상을 비추는 마음이 되었다니 참으로 철학적인 그들이 아닌가. 아니 노숙자와 도인과의 차이는 종교의 유무밖에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을 울리는 건 범생이라는 김형훈이 노트에 기록한 자서전이었다.

떨쳐 버리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버려지지 않는 어떤 마음, 아니 끝까지 간직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깨어져 버린 어떤 마음, 그리고 깨어진 그 마음이 딱딱한 물질이 되어 급기야 병이 되고 만, 바로 그것들에 대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 57p

  그러니까 이미 마음은 깨어졌는데 어떻게 해서 깨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마음 모양은 어떤 것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글이었다. 한 사람의 마음에 균열이 가고 깨어지는 과정은 회화도 영상도 아닌 오로지 글로써였다. 나는 이 책에서 시각이 문자화된 범생이의 마음 기록이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마음의 작동기능을 정지해야 하는 이유는 외려 정지 했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마음이 산산조각 나면 그것의 기능은 멈추어 버리는 것이므로 일단정지는 생존을 위한 방어본능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깨어지면 그 기능이 정지되며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자서전을 쓰느라 노트에 연신 무언가를 적던 노숙자, 범생이는 글을 쓰기 전에 소설을 읽는 사람이었고 소설은 위안도 상처도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아픔이 있는 사람이 소설을 읽는다는 말은 어쩐지 작가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고 싶은 내가 열렬하게 동의하고 싶은 말씀이기도 했다. 책을 넘길수록 이 책은 서울역 어느 노숙자 이야기가 아니고 소설가로서 노숙자가 되어본 작가의 이야기라는 믿음이 생기는 건 왜 였을까. (노숙자의 경험이 있으셨던지.. 남자 노숙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표현하신 점이 놀라웠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동안 살면서 아프게 여겼던 삶의 상처들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보다 훨씬 더 아픔이 많은 상처투성이의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러 위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깊이 빠져들면 들수록 상처가 오히려 부추겨지면서 세상이 더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아픈 사람을 더 심각한 환자로 만드는 그런 측면도 있었던 거지요. 책을 좋아하는 B 역시 어쩌면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아픔이 많은 친구일지도 몰랐습니다. 103 p

  범생이의 자서전을 통해 작가는 소설이 가지는 기능적 속성은 물론 예술로서 문학으로서의 소설의 치명적 단점도 언급하시는 듯 했다. 소설속에서 범생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는 훗날 소설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 그녀는 소설쓰기와 같은 예술행위가 안고 있는 딜레마를 너무 잘 알고 있어 섣불리 그런 일에 뛰어들지 않을 거라 생각되었습니다. 예술은 태생적으로 결코 완전할 수 없는, 그리고 도저히 완전에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할 뿐인 완전을 뒤늦게 표현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완전과는 어긋나거나 미끄러워질 뿐인 그런 것이니까요. 그런 어긋남과 미끄러짐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래도 낯설었습니다. 138p

   이 말은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된다면 내가 아는 지인들이 꼭 내게 퍼부을 말 같기도 했다. 나조차도 의심스러운 나일테니까.

  그런데 범생이 노숙자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학창생활, 교우관계, 연애와 결혼 등의 이야기를 넘기고 나면 이 사람은 그 어디도 노숙자가 될 만한 사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순결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고 그것이 완벽한 자신의 조건이라 생각한 사람이었다.(물론 노숙자가 마음이 더럽다는 뜻은 아니다) 살면서 마음이 깨어져 그것을 버린 사람을 노숙자라고 볼 때 범생이는 절대 마음을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화자인 ‘나’ 역시 범생이의 매력은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고백한다.(범생이는 주로 들어주는 쪽이었다) 그 마음 하나때문에 범생이가 좋았고 그곳의 가장 깊은 곳에 빠져 도저히 나오려 하지 않았던 그 마음 때문에 범생이가 싫어졌다고 말한다. 모든 건 마음 탓이다. 하지만 세월속에서 현실이 주는 상처에 굴복당한 범생이의 마지막 거처가 노숙자 현장이었던 것은 슬프기도 했지만 어쩐지 아프기만 한 소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마음을 다치면 육체도 훼손되듯이 마음을 둘 곳이 없다면 그곳은 훌륭한 고택이나 서울역 대합실이나 매 한가지 아닌가 묻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마음 하나만 바꾸면 다시 육체도 회복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는 말 아닐까. 그렇다면 범생이는 왜 그 마음하나 바꿀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마음만 바뀌면 다시 얼마든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노숙자가 아닌가. 이 때 나는 (공부한 것을 버리고)그 마음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안된다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손바닥 뒤집듯이 쉽지 않은 것이 마음 바꾸기라지만, 그것은 가슴이 시키는 일이 아니고 머리가 명령하는 일일 것이므로, 그렇담 그 일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싶다고. 아직은 집에 가고 싶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늘 그렇게 바뀌기 마련이라고.  

  그렇게 본다면 마음을 잡는 다는 것은 외려 도망가던 생각을 붙잡아 그 속에 고집스럽게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는 일이 아닐까. 마음을 잡아야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 터이니.


#3. 마음을 바꾼다는 것


    그런데 왜 어떤 이는 마음을 바꾸지 못해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         

    마음을 좀 뜻대로 바꿀 수는 없는 걸까.                                

허전한 마음에 소설을 덮고 나는 다중지능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하워드 가드너의 <체인징 마인드>라는 책을 다시 뒤적여 본다. 몇년 전 그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한 친절한 답변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으로 일곱 가지 지렛대를 말하고 있는데 어려운 것 같아도 따져 넘겨보면 하나같이 우리 마음이 바뀌는 이유가 되는 것들 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마음을 바꿀 때,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있다.  

하워드 가드너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은 결코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겉보기에는 매우 갑작스럽고 직관적인 변화라 할지라도 그 배경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이고도 능동적인 변화 과정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 과정에는 그가 ‘일곱 가지 지렛대’라고 부르는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을 하는데, 그 일곱 가지 지렛대는 우연히도 모두 영어의 알파벳 Re로 시작한다. 이성(Reason), 연구조사(Research), 동조(Resonance), 표상의 재구성(Representational Redescriptions), 자원과 보상(Resources and Rewards), 실제 사건들(Real World Events), 그리고 저항(Resistances) 이 그것이다.

    

  좀 더 통찰력을 높여 보려면 질문을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가?’로 확장할 수가 있다. '체인징 마인드' 이후에 소개된 『미래 마인드』는 미래에 요구되는 마음의 능력을 연구한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마음, 21세기를 성공적으로 살아 나가기 위한 미래 마인드 다섯 가지는 훈련된 마음, 종합하는 마음, 창조하는 마음, 존중하는 마음, 윤리적인 마음이다. 역시 교육적인 결론이다.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출간하는 책마다 교육및 심리, 사회학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이다. 이분의 신간 소식을 기다린다.


 

 

  

   나는 소설 읽고 미치도록 즐거웠다는 사람보다는 더할 수 없이 쓸쓸했다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일차적으로 결말이 유쾌한 소설보다는 우울한 소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왜 우울하고 슬픈가. 왜 그렇다고 느끼는가. 그런데 왜 그것에 위로를 받는가. 혹, 슬픈 마음을 받아 들이는 뇌의 문제는 아닐까?

   소설이 허탈할 때 그것을 덮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나는 인문학이 유용하다는 생각이다. 소설이 상처난 마음을 위로해준다면 인문학은 그 상처의 원인을 이해하게 하고 얼마간 논리적인 시간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둘다 균열된 마음, 깨어지려고 하는 마음을 다잡아 주는 치유효과는 확실하다.  그런데 소설을 자주 읽는 사람은 바로 인문학 서적을 집어 들기가 쉽지 않다. 내 생각에 위로의 방식도 습관화 되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그 슬픔을 더 오래 유지하고 싶은 욕망도 잔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좀 생각이 달라졌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소설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문학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불어 나는 이외수 작가가 왜 박숙희님의 소설을 권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모든건 이렇듯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청춘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끝내 자살을 택하는 청춘에게 글로 이루어진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씀 같기도 하다. 어떻든 청춘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피할 수 없는 마음관리 행위에 속한다 할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거나 종잡을 수 없는 분들에게 이 책들을 꼭 권하고 싶다. 특히, 박숙희님의 소설은 글을 쓰려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흔드는 매력을 지녔다. 왜 주목받지 못했는지 그것이 통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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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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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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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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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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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1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희숙님의 소설이 굉장히 읽고 싶어지네요. ^^ 이런게 진짜 리뷰이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구요. 감탄해요.

소설이 허탈할 대 인문학이 유용하다는 것, 그것은 저에게도 쓰일 수 있는 치유책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저 역시 소설로 무언가 부족하고 실체를 잡고 싶을 때 인문학 서적을 보는 편이니 말이에요. 아주 꼼꼼히 자세하게 잘 읽었습니다. 전 한국 문학은 거의 안 읽는 독자이다 보니..왜 그런지를 모르는데 한국 소설은 잘 읽지를 않아요. 별로 안 좋은 습관인 것은 알지만, 고쳐지지 못 하는 습관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 여기 와서 그 습관 좀 고치고 가야할 듯 합니다.ㅋ

한사람 2011-06-15 08:54   좋아요 0 | URL

겁없이 이소설을 추천합니다 가독력도있고 문체도 남성적이고ㅡ갠적으로 여성취향의 문체를 싫어해서ㅋㅡ읽는동안 노숙자의 시선으로 살았습니다

...........

어제 머리가 좀 아파서 덧글을 폰으로 작성했어요
오늘 다시 읽어보니 글이 엉성하고 급하게 쓴티가 나서 좀 고쳤습니다..
진짜 리뷰라고 하셔서 자극+용기+위로+감사+책임...이런 것들이 지나갑니다 ㅋ

정말 괜찮은 소설입니다^^

굿바이 2011-06-1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숙희씨의 책을 선물받고 겁이 나서 아직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책을 선물하고, 한사람님은 이렇게 울림이 있는 리뷰를 쓰시고, 이 책은 피해갈 수 없는 책인가 봅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1-06-15 11:12   좋아요 0 | URL

맞아요..슬쩍 외면하려던 책이 끝까지 발목을 붙잡는 인연이 될 때가 있어요 ㅋㅋ
이 책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있었다니..저는 그게 더 반갑네요^^
아마 읽어보시면 굿바이님은 제 글 보다 더 깊은 울림을 느끼실 겁니다~


2011-06-16 1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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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3: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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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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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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