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시집을 읽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덮어요. 내가 찾는 건 시였을까요?

 


#1. 젖은


오늘 아침에 젖은 시집이 한 권 도착했습니다.
누런 서류 봉투는 축축히도 짓물러 있었어요. 안되는데...
겉봉에 택배비 2,500 원이 선불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숫자가 무어라고...
그게 눈물이 났습니다. 돌려보니,
시집은 7,000 원이라고 찍혀 있었습니다.

합이 만 원이 안 되는 봉지 하나가 내 가슴에 도착하는 동안
그들은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아 버린 상태였던 겁니다.

우린 그렇게 젖은 채로 만났습니다.



#2. 굳은


어제는 팥빙수를 먹었습니다.
떡이 굳어 있었어요. 우유가 많아 얼음이 금새 녹아버렸습니다.

예전에 2,000 원 할 때 아버지에게 자주 사다가 드렸어요.
그때 생크림 도넛이 1,200원 이었는데 도넛을 두 개 사고 남은 동전을 저금통에 넣었습니다.

이상하죠. 분명 저금한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돈을 어디다 썼는지,
그 돈이 얼마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사람은,
돈 쓸 때보다 돈 모을 때가 더 행복한 모양입니다.



#3. 마른


두어 번 뵈었지만 여러 번 뵌 것 같은 분이
남도 어느 섬마을에 작은 주막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이유로 그곳으로 가길 결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저를 울적하게 했습니다. 

새출발하는 사람두고 박수는 쳐주지 못할 망정 뒤돌아 청승입니다.

그냥,

무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뒤돌아섰을 그 순간의 그분이 슬펐습니다.

언젠가 이곳으로부터 뒤돌아 설 때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어요.
실은 누구에게라도 잡힐까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나를 마르게 하는 시간입니다.
마른 가슴에 풀을 메기는 기억입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이 보기보다 원래 본질을 미화하는 단어라는 생각을 해요.
그에 비해 ‘이별’은 원래 속성보다 구슬프게 보이네요.

이번 주말은 마음에 비가 내리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얼마간 부여잡고 있던 일상의 유기체들을 잃어버린 탓이겠죠.
누군가는 떠나갔고,
무언가는 끝이 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직도 돈 계산을 못합니다.
그동안 그렇게 계산을 해왔으면서도 숫자가 어리둥절해요.
유일하게 남은 계산이라곤 주말에 주말을 견디게 해줄 고운 님들입니다.



이 책이 나온지는 알았지만 <은교> 이후 약간의 <비즈니스>에 대한 실망때문이었는지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트윗을 통해 작가님이 이 소설은 재미있다고 쓰는 동안 손에 정말로 말발굽이 생겨버렸다고 어리광(?)을 부리셨어요. 기자간담회 하고 온 날, 어쩐지 뻥치고 온 것 같다고, 소설 쓸 땐 거짓말 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하셨어요. 다음날, 기사를 보니 특이할 건 없었고, 작가의 말이나 그동안 인터뷰로 알 수 있었던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같은 말 반복하고 오면 가슴에 허전함이 남잖아요. 정년퇴직도 하셨고 슬하에 자식도 결혼보냈고 지금 누구보다 허전한 시간들을 보내고 계실 것 같아 이 소설을 택했습니다. 독자로서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이렇게 주말을 같이 보내드릴 순 있잖아요. 
 

 

 


그리곤 간간히 이 시집을 넘기며 가슴에 내리는 비를 달래 볼래구요.
(오늘 아침에 빗물과 한께 도착한 시집입니다)

이 서른 넘은 시인이 말하는 오늘, 금요일을 적어봅니다. 
 

 

 



   
 

금요일


  검은 옷의 사람들 밀려 나온다. 볼펜을 쥔 손으로
나는 무력하다. 순간들 박히는 이 거룩함. 점점 어두 
워지는 손끝으로 더듬는 글자들, 날아오르네. 어둠은
깊어가고 우리가 밤이라고 읽는 것들이 빛나갈 때.
어디로 갔는지.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거기 가장 불행한 표정이여. 여기는 네가 실패한
것들로 가득하구나. 나는 구겨진 종이처럼 점점 더
비좁아지고. 책상 위로 몰려나온 그들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그러니 불운은 얼마나 가볍고 단단한지.
지금은 내가 나를 우는 시간. 손이 손을 만지고 눈이
눈을 만지고, 가슴과 등이 스스로 안아버리려는 그때. 

 

- 오늘 아침 단어 中 , 28 p

 
   





글쎄, 어떤 금요일이었을지 모르지만 모르긴 해도
다가오는 주말이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뭐, 장마같은 사람들, 비에 젖은 소식들이 슬프긴 해도 저는 주말을 기다립니다.
견디게 해줄 님들이 있어 그럭저럭, 아직은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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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2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지니스가 별로 였나요?
하긴 저도 딱히 끌리지는 않던데...
박범신 작가의 저 책은 저도 언젠가 꼭 한번 읽어보고 싶긴해요.
저도 3주전에 팥빙수 먹었는데 또 언제 먹어 볼까 싶어요.ㅋ

한사람 2011-06-24 16:13   좋아요 0 | URL

ㅋ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급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파리바게트 울 동네 팥빙수는 6500원이나 하더군요 ㅠ.ㅠ
둘이 먹기에도 많고 완전 냉면 먹는 기분..
그냥 옛날에 분식집에서 얼음 갈고 팥하고 미숫가루 넣고
먹던 팥빙수가 그립더라는 ..

stella.K 2011-06-24 18:1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카페 베네보다 싸네요.
거긴 9천원인가? 9천5백 하던데요?
물론 양도 많고 맛있긴 한데,
그냥 카페는 그보다 싸요. 4천5백원인가 하니...

저는 작년에 출판사하고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어요.ㅋ

한사람 2011-06-25 10:51   좋아요 0 | URL

카페베네가 그렇게 비싸요?
허긴 웬만한 음료는 6000원이 넘더라구요 ㅠ.ㅠ
시집은 7.8천원인데..

글구, 출판사라 하심은 혹시 <비지니스> 의 자음과 모음? 말씀 하시는 건가요?

2011-06-25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1-06-25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마에 태풍에..주구장창 비오는 주말입니다. 이런 날엔 점심으론 짬뽕이 제격이고, 저녁엔 찬 소주를 한 잔 들이켜야 맛이고, 그리고 한 손엔 시집을 끼고 있어야지요.ㅎ
저도 시집 한 권 끼고 울고불고 하고 있슴돠~

한사람님의 시집은 첫 만남부터 그렇게 멋있으면서 애잔하군요. 내용도 분명 주말을 견딜만할 듯합니다. ^^

한사람 2011-06-25 16:40   좋아요 0 | URL

아..저는 점심으로 고열량의 피자를 먹었어요..
짬뽕에 쏘주...김치전이라도 해 먹어야 하는데
그러다가 손에 든 시집을 그만 라면 받침으로 쓰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ㅋㅋ

예, 전 인문서적 보다가 텍스트의 근엄함에 짓눌릴때
시집으로 뇌를 정화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시집들이 서정적이지 않아서...
옛날이 그리워요 흑.

2011-06-27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