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가운 라인


요 며칠 저는 다시 온라인이 무서워졌습니다.

책 읽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말과 글로 누구보다 더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이제는 확신을 너머 신앙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는 게 많고 생각한 시간이 많으면 아무래도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책은 읽을수록 더 부족한 것 같고 글은 쓸수록 더 어렵던데 저는 가끔 그런 분들이 자기사유에의 우월감에 듬뿍 빠져 그만 자기 자만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아왔습니다. 그럴 때 저는 책 많이 읽는 것에 급작스런 회의를 느끼며 비록 동네 서평자이지만 제 수준에서 절필을 하고 싶다는 울분에 헐떡이곤 그만 심장을 다칩니다. 책에는 길이 없다는 김훈 작가의 말씀과 책만 보는 얼간이, 글만 쓰는 장애자,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오로지 생각만 할 줄 아는 바보, 이런 자학에 시달립니다.

처음부터 저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근사해보이지 않았거든요. 세상과 사람에 패했지만 자신은 이 방법으로 이겼노라 말하기 위해 문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왜 그때 울었는지 일평생 변명하려고 작가가 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가는 모조리 위선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일 내내 남들 욕하고 주일에 하루 예배가서 나머지 날의 죄를 용서받으려 하는 교인과 다를 바 없다고 믿었습니다. 주제넘지만 시인, 소설가, 평론가, 편집자 순으로 위선은 비례한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그래도 제가 소중하게 여긴 건 그들은 책 안 읽고 글 안 쓰면서 위선자인 사람들 보다는 좀 낫다, 하는 생각이었어요. 정의는 누구에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이라도 이루려고 하는 과정이잖아요. 온갖 욕망과 시기, 타락과 배신 속에서도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을 글로써 토해내는 것이니 그것마저 안하는 자들보다는 낫겠지,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제 속에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살면서 ‘책’이나 ‘글’ 때문에 혼나면서 학교를 다닌 것 같지는 않은데 저는 유독 사회에 나와서 위의 사람들과 많이 부딪히며 세상을 배워왔어요. 사람은 제 속에 들어있는 속내를 타자에게서 발견할 때 가장 그 상대를 싫어하고 거부한다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외려 저한테 그들의 속성을 감추려고 하는 무의식이 내재되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잘난 척 하는 거 재수없어 하는 사람들이 대게 잘난 척을 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아요 ㅋ, 왜 일까요? 그거 사실은 자기가 잘하는 것이기에 금방 알아보거든요) 어떤 사람의 속성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몸서리치게 증오했다면 그건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향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저는 겉으로는 안 그런척 겸손한 척 해놓고 속으로는 그들과 같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혹시라도 그들을 비난했다면 그건 제 얼굴에 침뱉기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엔 오프라인에서 얼굴보고 남는 시간에 온라인에서도 대화를 했죠. 그러나 지금은 그 비율이 완전 바뀌어 버렸습니다. 온라인에서 우선 정들고 정말 괜찮은 것 같으면 오프라인에도 얼굴을 비치게 되는 것이죠. 이제 온라인은 더 이상 사이버 세상이 아니고 완전하고도 구체적인 실질적인, 실물의 세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외려 오프라인이 더 어색하고 비현실적일 경우가 많아졌어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일상에서 온라인을 붙들고 있는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본격적인 우리네 온라인의 인생도 그럭저럭 십여 년이 넘었고 예전에 PC통신의 시절까지 합치면 거진 이십년입니다. 역삼동에 위치한 아이네트라는 회사(당시 허진호 사장)에서 넷스케이프라는 브라우저를 띄워놓고 직장동료와 졸면서 인터넷 교육을 듣던 게 1995년입니다. 딴에는 후져빠진 교육계에 기여하겠다고 멀티미디어를 배운다는 학과에 들어가 대충 졸업과제물로 CD-ROM을 만들었던 게 어쩐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만 같습니다. 예전에 나이드신 이모님이 사람들만 모이면 그렇게 옛날 이야기를 끊이지 않고 하시더니 제가 꼭 그꼴입니다. 이렇게 변한 세상이 가끔은 신기합니다. 네비게이션과 화상대화, 스마트폰으로 이루어진 21세기 등등의 주제로 시나리오를 써놓고 이것이 미래의 한국이라고 아름다운 한국에 놀러오라고 그런 홍보영상을 만들었던 게 불과 십년 전이었습니다. 대부분 우리 손안에서 그걸 당연하게 하고들 있지 않습니까. 저는 잘나가다가도 한번씩 그 당연함에 스스로 한랭전선을 형성할 때가 있습니다.



#2. 따스한 라인  


그래서일까요,

이런 세상이 참 편하고 놀랍고 재미나다가도 저는 가끔 숨이 찹니다. 벅찰 정도로 숨이 막힙니다. 손과 발이 시리듯 가슴이 시큰합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것들에 익숙해지는 제 자신이 징그러울 때가 있어요. 나라고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울컥 눈물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뭐야... 너도 하고 싶었던 거니? 너도 좋았던 거니?, 하면서요. 바로 그럴 때, 또 저는 습관적으로 책을 집어 듭니다. 무슨 용서를 구하듯이, 반성이라도 하듯이, 웃기지만 다른 방법을 아직 못찾았어요. 그러곤 엊저녁에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을 덮었습니다. 컴과 폰과 TV, 모든 전자적 세상을 끄고 조용히...그랬어요. 그렇게 있는 것이 요즘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걸 자각하고 견디는 게 더 낯설지 않습니까?


느낌은 그전 <강남몽>보다 한결 편안했습니다. 슬펐지만 견딜만 했습니다. 심지어는 (외람되게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쉬워선 안 되는데 어, 왜 이렇게 느껴지지, 뭐 이런. 두어군데 훌쩍거리다가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며 원 쓰레기 같은 세상같으니, 혼자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시원하더군요. 그렇게 욕이라도 하고나니 세상에 내 할 짓은 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록 아무도 몰라줄 지언정. 이 작품, 가슴속에 찌꺼기 처럼 남겨져 있던 무언가를 확 불사르는 느낌이 드는 책입니다.

본인 스스로 이 맘 때의 문학은 ‘모든 것을 쓸어버린 뒤의 폐허에 남아있는 연민을 위한 것’이라 했듯이 모든 욕망이 다 타버리고 남은 현장에서 담배 한 대 길게 물고 한숨 한 번 짓는, 그리곤 다시 당신의 일상으로 천천히 복귀하시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저는 그 고독한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번쯤 뒤돌아 보아주셔도 될텐데 그러곤 묵묵히 걸어가시더군요. 그게 꼭 서로를 우리 사는 세상을 위한 일이라 여기시는 듯. 결국, 돌아가게 하는 발걸음은 두말없이 위로였어요.  

 

그래, 저도 세상을 향했던 일말의 분노를 내려놓는 느낌으로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다른 어떤 전자적 세상의 도움없이 말입니다.

그래, 난 오늘 아침도 여전히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감히 추천하건대, 무언가를 태워버려야 할 것이 남아있는 분들은 저처럼 이 책을 덮고 허공에 욕 한번 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성란 작가는 작품 시작하기 전에 빈 문서로 실컷 할 욕 안할 욕을 다 토해놓고 그것을 사정없이 삭제한 다음 후련한 마음으로 새롭게 글을 쓴다고 한 적 있습니다.  이번 독서가 제게는 하성란 작가의 빈문서였습니다.

작가가 말하는 도깨비, 훈장 선생님 같은 그 도깨비 할아버지가 네 이놈들아 하고 훈계하시는 말씀을 적어 봅니다.  쓰레기 없던 세상은 거기 쓰레기 천지인 세상과 이렇게 다르다고, 이쪽이 원래 낯익고 그쪽이 낯설은 거였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제 생각에 이런 비슷한 호령은 조정래, 박범신 작가등의 연배에서 꼭 하고 싶은 말씀인 듯합니다.

그런데 정신차려보면 내가 싸우던 건 결국 세상도 타인도 아닌 나라는 우주였다는 생각입니다. 산다는 건 그렇게 매번 익숙할 줄 알았던 내 안의 다른 나, 또 다른 세상과 끊임없이 싸우며 그럭저럭 낯설었던 세상이 슬슬 낯익은 세상으로 변하는 과정이 아닐까요. 


거긴 여기와 다른가요? 암, 다르구 말구. 우리 동네는 언제나 너희 곁에 함께 있는 곳이다. 너희들이 있어서 우리가 있게 되고 너희가 없어지면 우리도 없어지는 거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오리 한마리, 산과 강에 이르기까지 함께 살고 너와 똑같단다. 여기서는 모든 물건이 장애물이고 싸워서 없애야 할 괴물에 둘러싸인 너 혼자뿐이로구나. 이쪽 길은 너를 끝없이 쫒아내려 하고 성취에 길들이려고 하지 않니? 그냥, 출발하지 말고 나가버리면 될텐데.....   207p

 

안 보이는 온라인도 좀 따스한 溫라인, 어느 세상보다 온기 넘치는 진짜 세상이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얼마나 낯설었습니까,그땐. 지금 이렇게 우리가 낯익듯이

그 얼음같이 낯설은 차가움도 언젠가는 동네이웃처럼 살갑게 낯익은 우리 삶의 터전이 되기를.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1-06-18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얼음같이 낯설은 차가움도 언젠가는 동네이웃처럼 살갑게 낯익은 우리 삶의 터전이 되기를.] 저도 꼭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사람님 마음도 따뜻하게 풀어지기를, 그래서 더 좋은 글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그런데 저, [오래된 정원] 때는 황석영님을 엄청 좋아했는데(제가 대학생 저학년일때요) 이제는 그다지 흥미가 없어져요. [낯익은 세상]은 어떨까 싶었는데 막상 그다지 땡기지 않구요. 저도 요즘 엄청 바라고 또 원하는 거니까요. 따뜻한 세상. 그러니까 한사람님.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지 말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요.^^

한사람 2011-06-18 22:40   좋아요 0 | URL

예, 저는 마음이 많이 풀어졌습니다. 글로 상처 받은건 글로 푸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ㅋ

개인적으로 <강남몽>보다 진일보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강남몽>이 압축의 스펙트럼이 얼마간 부담스러운 경향이 있었다면, 이 책은 한가지 현상을 파고드는데
집중하셨어요. 문득, 김훈 작가의 <내 젊은 날의 숲>도 떠올려지더군요.

어쩐지 본인 자신을 위한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른 때와 달리 사회적 시선, 선굵은 서사에 대한 부담(?)은 덜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지 말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요' 이 말씀이
뭉클한 밤이네요^^, 고맙습니다 ~

2011-06-19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6-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한사람님을 글로 상처주는 작자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절대로 상처 받지 마시고 계속 쓰셨으면 해요. 흠..이해를 못 하겠네요. 저도 황석영의 작품은 읽다가 말아버린 독자라서요. 전 왜이리 한국 문학이 무거운지 모르겠어요. 읽으면 숨 쉬기 힘들만큼 무겁다고 할까요...뭐랄까 가슴에도 안 들어오고 말이죠. 좋아하는 작가가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한사람님의 글을 읽으면 딱 한 호흡에 쫙 읽혀집니다. 멈추지 않구요. 전 그게 좋은 글이거든요. ^^ 평탄한 도로를 미끄러지는 자동차처럼 쫙~하고 글이 흘러가요. 힘 내세요! 온라인도 반드시 통합니다.

한사람 2011-06-23 00:25   좋아요 0 | URL

우연이 겹치다 보니..
제가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늘 그렇게 생각해왔어요
누구나 다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한다잖아요 ㅋ

한국소설, 우울하죠..
그래도 전 저분들 글이 울림이 있어서 좋아요
관념적인 세계를 좋아해서 그런가봐요

제글이 한 호흡에 간다는 말씀이 힘이 되네요
호흡이 길다는 말은 많이 들었었는데..
저는 글만쓰려고 하면 마음이 울컥해지는 경향이 많아요
그래서 글쓰고 나서 풀어지면 그때서야 헤헤 거리죠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