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동물기
엔도 슈사쿠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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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십자매 한 쌍을 길렀다. 마리당 3천원 씩해서 어머니가 하시는 선생님을 통해 구입했다. 그 샘은 아마 부업으로 새를 기르셨던 모양이다. 어린 마음에 녀석들이 번식해서 알도 낳고 새끼도 낳길 바랬으나 나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먹이는 주로 좁쌀을 주었고, 새똥 가는 게 참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여느 아이들처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으나, 곧 관심이 시들해지고 물과 먹이 주는 것도 잊어 버렸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리가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한 마리 남은 녀석을 아파트 뒤뜰로 데려가서 풀어 놔줬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새장에만 갇혀 있어서 그런지 또 내 예상과는 달리 푸른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땅에만 앉아 있더라. 그 다음부터 내 삶에 애완동물 혹은 반려동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침묵>, <사무라이> 그리고 <깊은 강>처럼 심오한 주제를 장끼로 삼은 엔도 슈사쿠 선생이 동물 애호가였다는 걸,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동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작가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는 걸 새삼 엔도 슈사쿠를 읽으면서 깨닫게 됐다. <깊은 강>에 등장하는 다롄의 검둥이나 구관조 모두 엔도 슈사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가정불화 때문에 부모님들이 이혼하게 되시면서, 한 시절을 자신과 함께 했던 만주견 검둥이와 강제 이별하게 되었다. 이별은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런 것처럼 쉽지 않았으리라. 십대 소년에게는 더더욱. 훗날 선생은 자신의 약함과 비겁함 때문에 검둥이를 내지로 데려 오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상처를 입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훗날 만나게 되는 흰둥이와 먹보 등등의 다른 반려동물에게 속죄의 마음으로 더 잘했다고 하던가.

 

보통의 경우 댕댕이들을 좋아하는 이들은 야옹이는 별로라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선생은 댕댕이와 야옹이 모두를 사랑하고 또 그 사이에 별스러운 아기가 태어나면 그 녀석들을 이용해서 돈벌이도 하고 싶다는 망상에 가까운 고백도 서슴지 않는다. , 신의 사랑과 인간의 연약함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시던 작가가 선생이 맞단 말인가요? 놀라울 따름이다. 동시에 유쾌한 생각도 들었다. 작가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라는 점에서 말이다.

 

청년 시절, 전범국의 국민으로 프랑스 리옹 유학시절에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 주던 리옹 공원의 원숭이도 있었다고 한다. 백인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보기 드문 동양인 게다가 전범국 출신이니 누구 하나 살갑게 다가와주지 않았으리라. 그곳의 암컷원숭이거 선생을 보고 입술을 살짝 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전문가에게 물어 보니 그것은 사랑에 빠진 원숭이의 행동이었다고. 인간 여성에게도 사랑 받지 못한 선생이 원숭이에겐 연모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오늘날의 아이들이 동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게 좋다고 강조한다. 아무래도 PC 시절이다 보니 애완이라는 표현보다는 반려가 맞는 말일 듯 싶다. 나도 얼마 전에, 동네 개천에 가서 득시글거리는 다슬기 녀석을 다수 체포해다가 길러 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녀석들의 섭생에 대해 정보가 전무했던 탓으로 돌려야 할까. 지인의 딸이 14마리의 송사리들과 수조 일색을 선물했다는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녀석들은 차례로 용궁으로 가고 단 한 마리 남은 녀석이 힘차세 수조 속을 헤엄치는 장면이라. 아니 그럴려면 일단 물가에 나가 송사리부터 잡아야 하는 건 아니고? 아서라 내 한 몸 챙기기에도 버거운 판에 어떤 생명을 내가 책임진단 말이냐.

 

엔도 슈사쿠 선생은 또한 디즈니 만화를 통해 의인화되고 순화된 동물들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특히 판다가 그렇다. 내가 듣기로는 판다란 녀석은 옛날 난폭한 짐승의 후예라고 하던데, 그 손발의 모양이 그렇다고 한다. 지금은 지구촌 어디서도 대환영 받는 중국의 특산 동물이 아니던가. 하긴 지난번에 녀석을 알현하기 위해 꿈과 환상의 나라를 방문했더니 존귀하신 몸이 오수를 즐기고 있다고 하여, 방해하지 말라는 문구를 보고는 좀 놀랐다. , 판다가 동물원의 보통 동물과 달리 상전이시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디즈니에서는 동물 본성을 순치하고 의인화해서, 원래 동물의 이미지를 알 수 없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아무래도 못생긴 두꺼비나 발이 없어 흉측한 모양의 뱀보다는 왠지 푸근해 보이고, 귀염이 폭발하는 판다 같은 녀석들이 인기가 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게다가 인형으로 만들어도 판다가 훨씬 인기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은 거의 모든 동물들을 키워본 경험이 있으신 것 같다. 자신 말고는 가족 중에서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이 없어서 좀 문제가 되긴 했겠지만 말이다. 동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식물계에까지 발을 들이는 모습에서는 정말 대단한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계절 피고 지는 꽃이 나팔꽃이라는 말에 혹해서 당장 나가서 나팔꽃 씨를 받아와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번에 받아온 마리골드 씨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던데 말이지.

 

엔도 슈사쿠 선생의 작품 중에 지금은 절판된 <유모아 극장>이라는 책이 있다고 하던데, 선생이 구사하는 유머는 또 어떠한지 궁금하다. 선생의 동물기는 참 매력적이었다. 읽을 책들이 많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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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8-22 14: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저도 여러 동물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나네요. 식물과 동물 모두가 소중한 생명이지만, 주는 의미는 다른 듯 합니다. 식물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며 살아 있음을 알려준다면, 동물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어주는 듯 합니다..
.

레삭매냐 2021-08-23 10:55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도 다슬기와 메뚜기
잠자리를 잡으러 다닌답니다.

어제도 메뚜기 5마리를 잡았
습니다. 물론 나중에 다 풀어
주었습니다.

함께 살아감의 즐거움!!!

mini74 2021-08-23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댕댕이도 야옹이도 다 좋아요. 그런데 우리집 댕댕이가 야옹이를 무서워해요 ㅎㅎ 외롭고 쭈구리였던 지금도 그렇지만 ㅠㅠ 그런 시절 나를 태양처럼 봐주던 동물들이 큰 위로가 된 기억이 ㅠㅠ 저는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숩니다. 까칠한 사춘기아이들이 동물앞에선 혀 짧은 소리하며 예뻐하는 거 보면 고마운 존재고 미안한 존재고. 그렇지요 ㅎㅎ

레삭매냐 2021-08-23 10:56   좋아요 1 | URL
오오 댕댕이 야옹스 러버
시로군요.

어제도 공원에 나가서 메뚜기
잡으러 뛰어 다니는데, 댕댕이
들이 신나서 마구 뛰댕기더라
구요.

누군가로부터의 위안 !!!
아이들은 정말 동물들을 좋아
하는 것 같아요.
 
전원 옥쇄하라!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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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에서 미즈키 시게루 작가의 <전원 옥쇄하라!>라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픽 노블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대기지가 있었던 라바울에 파견되었다가 생환한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당시 미즈키 시게루 작가는 미군기의 공습으로 왼팔을 잃었다. 구글링으로 검색해 보니 한 팔이 없었다. 그렇다면 모든 작화는 한팔로만 그렸나 보다. 대단하지 않은가.

 

시작은 전세가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1943년 말, 뉴브리튼 섬의 코코포라는 지역에서 출발한다. 그 무렵 징병된 미즈키 시게루는 라바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그대로 기록했다.

 

날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미군의 공격에 앞서 거의 죽음이 예견된 일본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위안소를 찾는다. 작가는 가감 없이 비극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거 출발부터 심상치가 않다.

 

제공권을 미군에게 빼앗긴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남양군도로 파견하는 수송선들을 잃고 있었다. 물량전에서 도저히 미군의 생산력을 따라 잡을 수 없었던 일본군의 보급은 열악했다. 오죽했으면 그래픽 노블에 등장하는 일본군이 죽기 전에 실컷 생고구마라도 먹고 죽었으면 하는 말이 나왔을까. 태평양 전쟁 당시 상당수의 일본군들이 보급 부족 때문에 기아로 전선에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그리고 내무반에서 초년병들에 대한 폭력은 일상적이었다. 선임병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후임병들을 가혹하게 구타했다. 이어 바이엔 지역에 파견된 대대장은 미군의 압도적인 공격 앞에 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휘하 병사들에게 무모한 반자이 돌격과 옥쇄를 강요한다. 그나마 지각 있는 장교들은 그런 개죽음에 가까운 반자이 돌격보다는 생존을 도모해서 게릴라전을 구사하는 게 라바울에 있는 동료 병사들을 위해서도 좋을 거라는 전략을 제시하지만, 오로지 죽음만 생각하고 있는 지휘부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일 뿐이다.

 

대대장은 센고쿠 시대에나 등장할 법한 고사를 인용해 가며 병사들에게 오로지 옥쇄만이 해결책이라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말만 하는 앵무새일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병사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악어밥이 되어 하반신만 돌아오고, 계속해서 출몰하는 미군 비행기의 표적이 되어 죽어 나간다. 말라리아 발병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굶주림으로 병에 걸린 병사들은 병을 이겨낼 체력이 없었다. 도대체 전쟁을 책임진 대본영의 우두머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들은 현지 병사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1도 관심이 없었다. 센고쿠 시절의 무사도 타령이나 하면서 압도적 물량으로 일본군을 격파하는 미군에 반자이 돌격만을 강요할 따름이었다.

 

구미의 병사들과는 달리 압도적인 적의 화력 앞에 패배가 뻔한 상황에서도, 포로가 되는 것을 치욕이라며 무모한 반자이 돌격과 옥쇄를 병사들에게만 강요했다. 일본 왕의 패전 선언 당시, 1억 총옥쇄 타령을 하던 전쟁지도부에서 옥쇄를 한 장성들이 얼마나 되었던가. 그 점만 보더라도 그들의 위선과 허위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평소 주장대로였다면, 모든 장성들은 종전과 동시에 책임을 지고 천국으로 갔어야 했을 것이다. 도조 히데키조차 자결에 실패하지 않았던가.

 

전원 옥쇄 주장을 하던 대대장이 죽자, 생존한 80여명의 병사들은 후방으로 후퇴해서 적에게 타격을 가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라바울에 있던 제8방면군 사령관이었던 이마무라 히토시를 비롯한 지휘부에서는 전원 옥쇄한 것으로 알려진 바이엔 지대의 잔존 병력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키도 중위를 그들이 집결해 있는 세인즈조지곶으로 파견해서 처리할 것을 명령한다. 키도 중위는 여기서 죽음의 사자였다.

 

자신들의 구명을 위해 사령부를 찾았던 선임 군의관은 이미 자결했다. 키도 참모는 바이엔 지대의 두 소위들에게도 자결을 강요해서 결국 관철시켰다. 나머지 병사들에게도 후방의 라바울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락하게 지내던 10만 병력의 사기를 위해 옥쇄 돌격을 명령한다. 그리고 키도 자신은 이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로 위기를 모면하려다가 결국 적탄에 죽는다. 종전 두 달을 앞둔 19456월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어려서 만난 종군기자 야마오카 소하치(그렇다 그는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자이기도 하다)가 쓴 5권짜리 <태평양전쟁>에서 그런 일본군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기괴한 방식으로 미화하고 찬미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이래, 일본 육군의 지상전 전술을 변화가 1도 없었다. 케케묵은 무사도 타령을 하는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총탄과 포탄이 쏟아지는 사지로 내몰았다. 제대로 된 현지 지도 한 장 없이 남양군도에 도착한 일본군들은 그저 감으로 싸우다가 전장의 원혼이 되었다. 이런 엉터리 전술로 미군을 상대로 해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패전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 현장 지휘관들에게 병사들은 귀중한 자원이 아닌 그저 사석(捨石) 취급을 받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에 읽은 엔도 슈사쿠의 <사무라이>에서도 그런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그들이 말하는 버리는 돌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미즈키 시게루의 <전원 옥쇄하라!>는 전언이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닌,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극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다시 한 번 어떤 전쟁도 비극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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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8-23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만화 유명하죠. 해적판으로 돌았는데 안그래도 정발된다고 해서 반가웠어요. 오히려 예전 나이드신 일본 작가나 만화가들에겐 그나마 양심이 있는거 같아요. 도라에몽 작가분도 그렇고. 요즘 젊은 세대들은 왜곡된 교육을 받아서인지 ㅠㅠㅠ

레삭매냐 2021-08-23 11:51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아예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정발된다는 이야기
듣고는 밀덕으로 바로 주문해서
지난 주말에 읽었답니다.

너무 레알해서 놀랄 정도였습니다.

일본군이 정말 엉망진창이었구나...

아마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와 그렇
지 않은 세대와의 차이가 아닐까 싶
습니다. 교육에서도 계속해서 진실
을 호도와 왜곡하고 있으니까요.

일본 정부가 그런 게 어제 오늘 이
야기가 아니긴 하지만요.

coolcat329 2021-09-10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굉장히 땡기네요!
저 도서관에 가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1-09-10 13:20   좋아요 1 | URL
이 책이 만화책인지라
도서관에서 비치가 되는지
그것이 궁금하네요.

저도 그래서 희망도서로
신청하는 대신 그냥 사서
읽었습니다.

coolcat329 2021-09-10 13:23   좋아요 2 | URL
아 지금 검색해보니 없네요 ㅠㅜ 이 책 중학생이 읽을 수 있나요?

레삭매냐 2021-09-10 13:54   좋아요 2 | URL
제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중학생
이 소화하기에는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참혹한 전쟁에 대한 극사실주의
적 묘사가 좀 걸리네요.

coolcat329 2021-09-10 17:4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감사합니다 🙂
 
숙적 1
엔도 슈사쿠 지음, 조양욱 옮김 / 포북(for book)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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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엔도 슈사쿠 선생의 <숙적>을 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파죽지세 같은 기세로 어제 하루 동안 다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피곤했는지 잠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오늘 아침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숙적>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일본 출신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다. 잘 알려진 것처럼, 두 사람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시 출신이다. 소설은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으로 죽고, 거의 통일을 이룬 노부나가의 뒤를 누가 잇느냐를 두고 맞붙은 시절로부터 시작된다.

 

이번에도 역시 작년에 만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나가> 덕분에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있어 소설은 술술 읽을 수가 있었다. 연쇄 독서를 하면서 느끼게 된 건데, 어떤 한 책을 읽어 기초를 닦게 되면 다음번에는 비슷한 시절을 그린 책을 만나게 되면 좀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고니시 야쿠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고니시 일족은 사카이를 중심으로 한 약종상 출신의 집안이다. 그 때문에 타고난 사무라이였던 가토 도라노스케(기요마사)에게 장사치에 불과하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전쟁에는 무력만 필요한 게 아니라, 하시바 히데요시의 말처럼 돈과 쌀로 이기는 방법도 있는데 우직한 무장 스타일의 도라노스케는 오로지 전장에서 창을 휘둘러 이기는 법만 알았다.

 

고니시 야쿠로와 이시다 사스케(미쓰나리)가 행정관료 출신의 사무라이였다면, 도라노스케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한 훗날 시즈가타케 칠본창으로 알려진 히데요시 휘하 근시들은 전형적인 무장으로 사사건건 고니시들과 맞부딪히게 된다.

 

비록 고마키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일격을 당하긴 했지만, 미카와의 너구리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간파쿠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동원해서 규수와 오다와라의 호조 가를 잇달아 제압하고 결국 일본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간파쿠는 이 와중에, 자신의 가신들이 서로 경쟁하는 구조를 만드는데 고니시와 가토가 대표적인 선수들이었다.

 

전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 히데요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꿈꾸었던 망상을 실현하는데 전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천축까지 정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실질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일본을 통일하기까지는 명석한 판단력과 실천력을 보여줬던 간파쿠가 자신의 외동아들 쓰루마쓰를 잃으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고 엔도 슈사쿠 작가는 분석한다.

 

한편, 규슈를 정벌하고 구마모토에는 도라노스케를 그리고 바로 이웃한 우토에는 야쿠로를 배치한 히데요시는 일본의 기리스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기리스탄 다이묘로 야마자키 전투 이래 간파쿠에게 충성을 다한 다카야마 우콘은 1587년 신앙을 지키던지 아니면 가독을 반환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두 번 생각할 것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버렸다. 같은 자리에 있던 유키나가는 그러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을 앞두고,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규슈의 기리스탄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벌군을 편성한다. 사실 그에게 규슈의 골치 아픈 기리스탄 다이묘들은 버리는 돌일 뿐이었다. 당장에 자신의 근치 출신 다이묘였던 유키나가부터 자신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던가.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써먹고 토사구팽하려는 주군의 속셈을 파악한 유키나가는 겉으로만 기리스탄 신앙을 버렸다고 선언하고, 속으로는 다카야마 우콘과 오르간티노 신부들과의 교류를 계속한다. 진짜 둘 사이의 피 튀기는 수싸움이 아닐 수 없다.

 

우토에서 일어난 토호들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유키나가는 결국 이웃 구마모토의 기요마사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뿐하게 일기토로 아마쿠사 반군들을 제압한 기요마사의 막강한 실력 앞에 유키나가는 다시 한 번 좌절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될수록 서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고, 스타일과 출신이 너무 다른 두 다이묘들의 갈등은 증폭될 뿐이었다.

 

다음 무대는 조선이었다. 망상에 젖은 간파쿠 히데요시는 결국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정벌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처음에는 조선 정벌군 사령관으로 눈엣가시 같은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정될 줄 알았지만, 의외로 기리스탄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임명되었다. 역사적으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벌군의 출발지로 지목된 쓰시마의 도주 소 요시토모와 결탁한 유키나가는 조선과의 전쟁 대신 화의에 전력을 다한다. 왠지 여기서 기리스탄 다이묘로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전하고 싶었던 걸까.

 

주군인 히데요시의 명령을 어겨 가면서, 그야말로 위험한 줄다리기에 나선 상황이 긴장을 자아낸다. 결국 1592년 조선으로부터 가도입명 요구에 대한 확답을 받지 못한 히데요시는 18,000명으로 구성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선봉을 맡겨 조선 침략에 나선다. 주군에게 내몰리듯 가토 기요마사 대신 선봉을 맡게 된 유키나가는 활로 무장한 조선군에게 상대적으로 우세한 철포부대를 앞장 세워 동래, 부산을 차례로 점령하고 조령을 거쳐 한양으로 파죽지세의 진격을 시작한다.

 

조선에서도 고니시와 가토의 라이벌 관계는 계속됐다.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붙은 가토에게 전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니시는 사력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충주 탄금대에서는 신립 장군이 이끄는 8,000명의 정예 조선 기마부대를 상대로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이 무적의 다케다 기마대를 상대했던 시타라가하라 결전을 모델로 배수진을 친 조선군을 격파한다. 고니시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던 가토는 조선 주력군에 대한 고니시의 승전을 시기한다.

 

조선의 수도 한양 입성의 공을 먼저 세우기 위해 가토는 아군마저 기만하고, 한양으로 내달린다. 결국 고니시에 앞서 격전을 기대하고 한양에 입성한 가토는 수도를 버리고 몽진에 나선 텅 빈 성을 마주하게 된다. 다시 한 번, 고니시는 조선과의 화의를 시도했지만 그의 의도를 파악한 가토에 의해 고니시의 화의 공작은 무산되어 버렸다.

 

숙적 1부에서는 성공의 정점에 도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 경쟁관계에 있었던 두 명의 다이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보통의 가신들이라면 주군 아래서 당연히 협력 관계를 도모해야 했음에도, 그들을 다룰 자신이 있었다고 판단한 히데요시는 그들간의 경쟁을 은연중에 부추겼다. 아마 자신은 그들을 능수능란하게 조종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싸움 밖에 모르는 무식한 무장 그리고 장사치라며 경멸하던 두 사무라이의 대결이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거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했다.

 

대국을 보는 시각에서 고니시는 과연 가토를 능가했다. 무력으로 조선을 넘어 후견인 명나라까지 정벌한다는 것은 망상이었다. 일본의 국력이 그 정도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자국도 아닌 타국에서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보급이 약탈만으로 가능하지도 않았다. 결국 도요토미 가문의 멸문을 가져오는 대외전쟁은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았고, 고니시의 주장대로 화의를 주선해야 했다. 어쩌면 가토의 고니시에 대한 방해공작이 조선 원정군의 자멸을 초래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가 자신의 부대에게 엄한 군율을 강요했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약탈전쟁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만행에 대해 저자가 모르고 기술했나 싶다. 전쟁 말기, 조선에서 오죽했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토 기요마사 만큼은 반드시 잡겠다고 처절한 울산성 전투를 벌이지 않았던가 말이다. 저자에 대해 그 부분이 좀 아쉬웠다.

 

전쟁 초기 부산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성주라고 저자는 표현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절, 일본에서는 성주만 잡으면 전쟁이 끝나던 것과 달리 중앙집권제였던 조선에서 지역으로 파견된 공무원에 해당하는 부사를 한 지역을 담당한 성주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일본군에 관군이 격파되기는 했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근왕군과 의병활동으로 대변된 조선의 저력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시작한 전쟁이 침략군의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무대를 일본으로 옮겨 재개될 숙명의 두 라이벌의 대결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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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1-08-21 11: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임진왜란. 그걸 왜 그동안 안 궁금해했나 놀라는 순간입니다^♡^

레삭매냐 2021-08-21 11:47   좋아요 5 | URL
소설에 나오는 캐릭들이 그동안
의 수련으로 익숙하고 내용 또
한 너무 재밌어서 2권도 단박에
100쪽을 읽었네요.

오늘 중으로 다 읽을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1-08-21 12:5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단 책의 내용보다는 <사람 레삭매냐님>이 다시 보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바치는 열정과 정열이 대단하신것 같아요.
매번 그렇게 느꼈지만 또 한 번 느낍니다.
저 레삭매냐님 따라 읽는다고 작년에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의 책 많이 샀는데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어요.
급반성하는 인간인 제가 또 엔도 슈사쿠에 관심가지게 되었습니다. ㅠㅠ

붕붕툐툐 2021-08-21 14:06   좋아요 6 | URL
ㅋㅋㅋ레샥매냐님에 대해 느끼는 바를 격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플러스 페넬로페님 귀여우세요~😍

페넬로페 2021-08-21 21:07   좋아요 2 | URL
툐툐님! 귀엽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레삭매냐 2021-08-21 21:27   좋아요 2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예전에 <침묵>만 읽고서 엔도
슈사쿠 작가의 나머지 책들을
찾아 보지 않았었는데 이 달
들어 마구 읽게 되었네요.

이젠 심지어 그의 동물 타령을
다룬 책까정 ㅋㅋㅋ 제가 그렇
습니다.

참 루이스 세풀베다는 사랑입
네다. 속히 읽어 주세요 ^^

coolcat329 2021-08-21 14:57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쿠 작품이 많나보네요. 이런 대하역사소설도 썼군요.
근데 레삭매냐님 집중력과 열정에 저도 또 놀라고 갑니다.

레삭매냐 2021-08-21 21:44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오늘 마저 다 읽었는데
그동안 만난 책들과는 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
았습니다.

뭐랄까 좀 힘을 빼고 썼
다고나 할까요.

mini74 2021-08-21 17:11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왕만 잡으면 될 줄 알았는데 선조가 도망가서 일본이 우왕좌왕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나요. 일본농민들에게 전쟁은 그저 세금 내는 곳이 바뀌는 것일뿐. 그래서 의병이 낯설었을 듯해요. 고니시 유키나가 저도 궁금해지네요 ~~

레삭매냐 2021-08-21 21:45   좋아요 2 | URL
소설에 말씀해 주신 부분
이 정확하게 등장합니다.

한양에 입성하니 멍청이 임금
선조가 튀어 버려서 가토 기요
마사와 뒤따라온 고니시 유키
나가가 망연자실해 하지요...

bookholic 2021-08-21 18:4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친한 후배가 추천한 책인데, 기회가 닿질 않아 읽지 못했는데, 다시 리스트에 추가해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1-08-21 21:46   좋아요 2 | URL
제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책이 절판
되었더라구요.

어제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
다는 걸 알고는 바로 빌려다
읽었답니다.

저도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캐모마일 2021-08-21 18:5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었는데도 두 숙적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네요.

레삭매냐 2021-08-21 21:47   좋아요 1 | URL
읽는 재미가 쏠쏠했답니다.
이틀 만에 다 읽었네요.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의 주군
도요토미를 위해서라고 했지
만 결국 주군의 가문 멸문한
도쿠가와를 도운 셈이었지요.

대국을 보는 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19번째 작품인 <패주>가 다음 주에 나온다고 한다.

내 생각에 가장 인기가 없을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부끄럽게도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집안에 숱하게 명멸해간 닝겡들을 통해 격변의 프랑스 사회를 그린 그의 작품들은 한 개도 읽어본 게 없다.

 

얼마 전에 2<쟁탈전>을 읽었으나 악명 높은 지만지 축약본의 덫에 걸려 버렸다.

아니 누구 탓을 하리오. 도서관에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빌린 내 잘못이지.

 

참고로 오늘 도서관에 가서 엔도 슈사쿠의 <숙적>을 빌려서 서문을 조금 읽었는데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이다. 우리에겐 가토 기요마사로 알려진 사무라이 중의 사무라이 가토 도라노스케와 상인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1군 사령관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다 때려 치우고 이번 주말에는 이 책을 읽을란다.

 

또 삼천포 빠져 버렸구만 그래. 에밀 졸라의 <패주> 이야기를 하다 말고.

 


여기서 패주란 괴제 나폴레옹 3세가 자신의 실력도 모른 채,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와 폰 몰스케를 상대로 보불전쟁을 벌였다가 개박살이 난 사건을 그린 것이라는 게 나의 추정이다. 뭐 아직 실물을 보지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은 그동안 갈고 닦은 철도를 이용해서 신속하세 대 프랑스 전선으로 병력을 속속 보냈다. 일단 총동원령에서부터 나라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수에 프로이센은 진심이었던 거지. 프로이센이 부상하기 전까지 대륙에서 내가 제일 잘나가를 외치던 프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엉터리 제정에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고.

 

, 일단 끼니부터 때우고 다시 해야겠다. 밥 무러 갔다 와서. 알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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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주> 에밀 졸라 / 1892년 발표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870년 여름이다. 1870년 여름, 에스파냐 왕위계승 문제로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는 심각한 외교적 갈등이 발생했다. 훗날 엠스 전보 사건으로 알려졌다. 결국 프랑스는 프로이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프랑스 군부는 동부에 배치된 그랑 아미(프랑스 육군)가 적군의 수도 베를린까지 바로 쳐들어 가 승리를 거둘 것을 꿈꿨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대였다. 신속하게 라인강을 도하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의 라인군을 격파하고 침공을 개시했다.

 

소설 <패주>의 주인공은 전작 <대지>에서 아내와 땅을 잃은 농부 장 마카르다. <대지>에서 그 과정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모든 걸 다 잃은 장 마카르는 1870년 여름, 조국을 침략한 프로이센군과 싸우기 위해 상병으로 군에 재입대한다. 이때 그의 나이 39, 이미 제2제정 초기 솔페리노 전투에도 참가했던 그는 역전노장인 셈이다. 소설의 주제는 보통의 병사가 느낀 야만적인 전쟁의 참상과 일반 시민들이 전쟁으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상실 그리고 패전에 따른 경제적 곤궁함 등이다. <패주>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 상병으로 남부 라인 계곡으로 이동한 장 마카르가 소속된 프랑스 부대는 벨포르로 후퇴하고 그 다음에는 파리 그리고 랭스로 전쟁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기차로 이동했다. 그 즈음에 알자스 지방에서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에게 격파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신속한 프로이센군의 진격 앞에 제2제정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대응으로 일관했다.

 

프랑스군은 식량과 보급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후장식 대포 같은 신식 무기로 잘 무장되고 훈련받은 프로이센군을 상대해야했다. 랭스로 이동한 장 마카르가 소속된 프랑스 군은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된 동부도시 메츠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원래 계획이었던 메츠로의 진격은 돈좌되고, 벨기에 국경 부근의 뫼즈 강 계곡 인근의 스당 근처에서 멈추게 되었다. 장 마카르는 스당 부근에 사는 앙리에트의 쌍둥이 남동생 모리스 르바쇠와 처음에는 반목하지만, 전투를 치르면서 굳은 전우애로 뭉치게 된다.

 

2부에서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스당 전투가 중심이다. 전투가 치러지는 동안, 프로이센군은 스당을 철저하게 포위하고 덫에 걸린 프랑스군에게 대포로 포격을 시작한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의 포위를 뚫는 데 실패한다. 2부는 주인공들인 장과 모리스, 앙리에트 그리고 그녀의 회계사 출신 남편 와이스의 시선으로 묘사된다. 와이스는 포병대 장교로 참전했지만, 투항하지 않고 프로이센군의 포로로 잡혀 아내의 눈앞에서 처형당한다. 또 한 명의 전쟁미망인 실뱅의 스토리 또한 기구하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맺어지지 못하고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오노레 그리고 적국의 스파이로 활동한 골리아가 등장한다. 스당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고, 프랑스군(8만 여명)과 괴제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3부에서는 프랑스군 소속으로 프로이센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장과 모리스는 탈출을 시도한다. 장은 탈출 중에 부상을 당하고, 앙리에트의 도움으로 스당 부근에 숨어 있으면서 겨울 동안 치료를 받는다. 한편 원래 보나파르트 지지자였던 모리스는 1870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된 파리로 간다. 1871년 봄, 장은 모리스를 찾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새로 구성된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프로이센과 휴전 협정 협상을 개시한다. 굴욕적인 휴전 협정 협상으로 파리에는 민중봉기가 폭발한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 코뮌을 진압하게 된다. 정부군의 일원이었던 장은 격렬했던 내전에서 모리스에게 치명적 부상을 입힌다. 소설은 장과 죽어가는 모리스 그리고 연락이 끊긴 남동생 모리스를 찾아 파리로 온 앙리에트가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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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발 번역으로 소설 <패주>의 대강의 줄거리들을 정리해 봤다.

 


밀덕으로 1870-1871년 보불전쟁의 전개와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이자 지근거리에서 직접 역사적 대사건들을 목격한 에밀 졸라의 시선을 통해 만나보고 싶었다.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후순위인지라 나중에 출간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출간되어 기쁠 따름이다.

 

당장 예약 주문 고고씽.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올라온 에밀 졸라의 <패주> 구성을 보니 다음과 같았다.

 

<패주>는 총 32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 라인에서 뫼즈까지


- 1870년 보불전쟁 개전 이래, 스당 전투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다.


챕터 1 : 대재앙

챕터 2 : 공황 / 벨포르에서 랭스까지

챕터 3 : 두 전투 이야기 / 황제

챕터 4 : 행진 / 스파이

챕터 5 : 전투 대열 / 범죄의 밤

챕터 6 : 기병대 / 포의 추격

챕터 7 : 스당의 관점에서 / 실뱅의 이야기

챕터 8 : 마침내 스당 / 전투 전야

 

2: 스당 전투


-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군이 스당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되어 패배했다.


챕터 1 : 바제이 공격 / 포화 속에 갇힌 황제

챕터 2 : 모리스 포화의 세례를 받다

챕터 3 : 스당 내부 : 한 밤중 나폴레옹 고통 / 두 여인들

챕터 4 : 여인의 영웅적 행위 / 바제이의 공포

챕터 5 : 기병대의 갈등 / 거대한 비용

챕터 6 : 백기 / 앰뷸런스

챕터 7 : 완패 / 은신처에서의 격투

챕터 8 : 휴전 협정 / 항복

 

3: 처절한 패배여


- 파리 포위전과 파리 코뮌에 이르는 과정들


챕터 1 : 실뱅의 질문 / 학살의 와중에

챕터 2 : 포위의 공포 / 기아 살인 질병

챕터 3 : 슬레이브 드라이버 / 평화의 가격

챕터 4 : 어두운 시절들 / 배신자 바쟁 / 전쟁의 물결

챕터 5 : 스파이 골리아 / 끔찍한 보복

챕터 6 : 정복자의 진동 / 어질어질한 길버트

챕터 7 : 파리 내부 / 포위와 코뮌 / 바리케이드

챕터 8 : 불타는 바빌론 / 씁쓸한 종말

 

*** 역시나 발번역으로 다음 주에 나올 정식 번역본을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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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8-20 11:5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게 루공마카르19번인가요? 저 지금 테레즈 라캥 읽고 있는데 에밀 졸라 시작해보려구요.
네 저도 🍚 ~

레삭매냐 2021-08-20 13:14   좋아요 3 | URL
1892년에 나온 19번째 루공
마카르 총서라고 하네요.

물감 2021-08-20 11:5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에밀 졸라라니! 문동 진짜 열일 하는군요!

레삭매냐 2021-08-20 13:14   좋아요 4 | URL
아마 루공마카르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준비 중이라
고 들었습니다.

페크pek0501 2021-08-20 11: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유명한 작가의 작품 중 저도 읽은 게 없는 것 같아요. 많이 들어 본 작가인데도 말이죠.
읽고 나서 글 올려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레삭매냐 2021-08-20 13:15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읽은 게 없어서리...

원래 지난달에 작심하고 읽겠
다고 선포했으나 다른 책들과
바람이 나는 바람에 그만.

얄라알라 2021-08-20 11:59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저, 일상 생활하며 어휘력 딸린다는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알라딘 서재만 들어오면 간혹 국어사전 검색해본단 말이죠.....흑흑...˝패주˝ 패배한 주인공인가? 했어요....흑흑.

coolcat329 2021-08-20 13:14   좋아요 4 | URL
저는 조개관자 그 패주인가?했다가 불어사전 찾아보니 패해서 달아나는 그 패주네요 ㅋ

레삭매냐 2021-08-20 13:16   좋아요 3 | URL
아이고 유머 감각이 남다르십니다 :>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박살
난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잠자냥 2021-08-20 12: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쟁탈전> 지만지 축약본 아닌 것도 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360329

레삭매냐 2021-08-20 13:16   좋아요 2 | URL
제 불찰이었습니다.

폐관 시간이 촉박하야
정본이 있음에도 굳이
축약본을 빌려 다시 한 번
지만지를 욕하게 되는 시츄
를 초래하고야 말았던 것이
었습니다...

Falstaff 2021-08-20 12:30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이 <패주>가 제 아홉 번째 읽는 루공-마카르 총서가 될 겁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근데, 인기가 없으리라 예상하셨으면... 이거 재미 없는 책이래요? 재미 없어도 읽겠지만 말입죠.

*1. 패주... 전투에 져서 도망가는 패주敗走죠? 키조개의 관자 패주貝柱를 말하는 거 아니죠?
*2. <돈> 읽으셨으면 <쟁탈전> 요약본 읽는 것이 경제적일 수 있습니다. ㅋㅋㅋ 같은 주인공, 같은 내용이라서....

레삭매냐 2021-08-20 13:19   좋아요 2 | URL
아니 재미가 없다기보다는
뭐랄까, 좀 대중에게는 흥미를
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같은 밀덕에게는 축복이지요.

전 <쟁탈전> 먼저 만나서 고기서
쫄딱 망한 사카르가 재기전을 펼치
는 <돈>을 잼나게 읽고 있답니다.

사카르의 여동생 시도니 부인이
또 <꿈>에 등장하는 여주의 친모
라는 점도 참... 아마 이 맛에 루공
마카르를 읽게 만들겠다는 졸라샘
의 원대한 프로젝트가... 쿨럭.

청아 2021-08-20 13: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언급하신 책 다 찜할래요ㅋㅋㅋㅋ <패주> 저 포즈는 제가 매일 하는 허리운동 자세인데.... 😆

coolcat329 2021-08-20 13:12   좋아요 3 | URL
하하 그러네요 😂

레삭매냐 2021-08-20 13:21   좋아요 2 | URL
와우 저런 포즈를 취하신다고요...
놀랍습니다.

다같이 <패주> 달려 BoA요.

blanca 2021-08-20 13: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완전 기대하고 있는데 내용 설명이 없어 궁금해 죽을 지경이에요. 에밀 졸라 책은 정말이지 다 걸작이더라고요.

레삭매냐 2021-08-20 13:22   좋아요 2 | URL
네 그렇습니다.

전 지금 이 책이 서점에 깔렸다면
당장 달려가서 살 용의가 있습니
다.

위키피디아를 돌려 보려구요...

페넬로페 2021-08-20 13: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에밀 졸라의 ‘결혼, 죽음‘ 딱 한 권 읽었는데 생각보다 작가의 작품이 많더라고요. 계속 읽어야겠어요
신간 정보 감싸합니다^^

레삭매냐 2021-08-20 14:12   좋아요 3 | URL
일단 루공-마카르 총서만
딱 20권입니다.

제가 정리한 바에 의하면
이번 <패주>가 열번째네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내주길.

읽고 있던 <돈>부터 마저
읽어야 하는데 시작만 하고
못 다 읽은 책들이 너무 많
네요.

mini74 2021-08-20 14: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신나셔서 지금 어깨춤 추고 계시죠 ㅎㅎ에밀졸라는 목로주점과 나나만 읽은 ㅠㅠ 근데 축약본하니 어린이용 목로주점 있어서 너무 놀란 적이 ㅎㅎㅎ 만화처럼 귀여운 캐릭터들이 금방이라도 춤출 듯이 그려진 무서운 책이었어요 ㅎㅎㅎ 즐독하세요 *^^*

레삭매냐 2021-08-20 16:41   좋아요 2 | URL
언급해 주신 어린이용 <목로주점>
궁금하네요.

그 책은 컨텐츠가 도저히 아이들
에게 맞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읽고 있던 졸라샘의 책들부터 마
무리지어야 하는데 계속해서 신간
들이 나오니 그것 참.

뒷북소녀 2021-08-20 16: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는데요? 패주... 언제 나오려나요.

뒷북소녀 2021-08-20 16:29   좋아요 3 | URL
찾아봤는데, 700페이지가 넘는데 1권짜리네요.
왜 분책을 안 했을까요? ㅋㅋㅋ

레삭매냐 2021-08-20 16:43   좋아요 3 | URL
책은 다음주에 출간 예정이라고 하네요.

제 생각에는 아마 판매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700쪽 정도를 두 권으로 나누게
되면 권당 만원씩은 잡아 주어야
하는데 그러면 소설 하나가 바로
2만원빵이라는 계산이잖아요.

아시다시피 울 나라 사람들이
또 책에 드는 비용은 아까워 하
는지라... 차라리 단권으로 하고
단가를 높이는 게 낫다고 판단
하지 않았나 뭐 그렇습니다.
 
바보 대산세계문학총서 159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나에게 8월은 가히 엔도 슈사쿠의 달이라고 불러도 될 듯 싶다. 이 달에만 신간 <사무라이>를 비롯해서 <깊은 강><바보>를 잇달아 읽었으니 말이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전쟁과 사랑>도 대기 중이다. 이번에 재개정판으로 나온 <예수의 생애>도 궁금하다.

 

이번 주에 만난 <바보>는 젊은 날의 엔도 슈사쿠 선생의 작품이라 그런지 조금은 구성이나 주제를 보듬는 부분에서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라이><깊은 강>이 너무 강력해서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그런 느낌이랄까.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프랑스 사부아 출신의 가스통 보나파르트(, 맞다 자그마치 나폴레옹의 후손이라고 한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설의 끝까지 도대체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어설픈 일본어를 구사하며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가스통이 왜 일본에 왔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아니 이렇게 불친절할 수가 있나 그래. 독자에게는 적어도 넌지시 알려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소설의 다른 주인공들로는 다카모리와 도모에 히가키 남매가 등장한다. 우리의 주인공 가스통은 예전에 다카모리와 펜팔한 인연으로 일본을 찾는다. 그리고 히가키 집안에서는 외국인 손님을 맞기 위해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의사이자 의대 교수였던 아버지였던 히가키 씨는 작고하셨고 어머니와 가정부 마짱이 미지의 외국인을 맞이하기 위해 열성적인 준비에 나선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은행에 다니는 게으름뱅이 다카모리는 외국인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일본이라는 공식화된 모습을 은근 비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은 일본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자신들보다 못사는 동남아 사람들이나 흑인들에게는 1도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다.

 

오빠 다카모리에게 절대지지 않고, 남들은 배우지 않는 이탈리아어 전공으로 뷰타포코 사에 취업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신세대 엘리트 여성 도모에도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다. 오빠 말로는 혼기에 꽉찼다고 하는데, 그녀는 남자와의 연애나 결혼 이딴 거에 관심을 두는 대신 주식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최근 주식의 세계에 입문한 주린이로서는 눈이 번뜩 뜨이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주식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건 아니고 다만 도모에 씨가 당대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매력의 소유자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프랑스를 출발해서 베트남 호의 사등칸에서 등장한 가스통은 남매에게 실망 그 자체였다. 일단 서구인답게 체격은 건장했으나 인물은 배우를 기대했던 도모에의 그것과 달리 말상이었다. 뭐 이건 외모비하인가. 어설픈 일본어 구사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히가키 남매에게는 기대 이하였던 모양이다.

 

그 다음에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일단 우리의 친구 가스는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다. 소설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에 대한 소개가 등장하는데, 보면 볼수록 도모에가 바보 혹은 얼간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는 합리적 추론을 하게 만들어 준다. 어때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나 말이다.

 

소설 <바보>1959년에 신문에 연재되었던 모양인데,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전후 12년 후인 1957년 경인 듯 싶다. <침묵>이나 <사무라이> 등의 작품을 통해 역사라는 공간에서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이유를 구도자의 모습으로 구하던 엔도 슈사쿠 선생은 시간을 현대에 맞춰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평생 추구해온 주제 의식을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선사한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적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선하고 도대체 화를 내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희생을 자처하는 인물이 바로 가스통 보나파르트다. 일본 사람들은 발음이 어렵다며, 그의 이름도 가스라고 저들 편한 대로 부른다. 히가키 남매와 신주쿠 사건을 겪은 가스는 히가키 저택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달랑 3,000엔과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표 한 장 그리고 일본에 와서 만난 떠돌이개 나폴레옹과 길을 나선다.

 

그리고 산야의 쪽방 같이 허술한 곳에서 당시 일본의 밑바닥 인생들과 조우한다. 오히려 어려운 이들이 자발적으로 우리의 가스를 돕기 시작한다. 먹을 것을 나누고, 오갈 데 없는 가스를 점쟁이 조테이 어르신에게 소개시켜 함께 기거하게 된다. 볼품 없고 일본어도 잘 하지 못하는 가스를 누가 환대한단 말인가? 하긴 가스는 고향 프랑스의 사부아에서도 포플러 나무라며 어린 시절 갖은 학대와 수모를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그의 성향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일본으로 무대를 옮겨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인간이란 바뀌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가스는 거리에서 산야의 소문난 살인 청부업자 엔도와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데,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냉혹한 킬러로 알려진 엔도가 알고 보니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야쿠자였다는 설정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1950년대 일본에서 영어도 아닌 프랑스어를!!!) 가스와 의사소통에 나선다. 그리고 엔도의 난폭한 비정함 뒤에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억울하게 원주민들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전범으로 사형 당한 형님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이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던가. 콜트 권총까지 마련한 엔도는 형님의 억울한 죽음에 관련된 세 명의 인사들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우리의 가스는 킬러의 사냥에서 경찰의 추격이나 검문을 피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첫 타겟이었던 가나이는 선량한 남자 가스의 방해질로 실패하고, 다음 목표였던 고바야시 사냥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엔도라는 불쌍한 영혼의 본질을 알게 된 가스는 엔도에게 이용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내 그를 버리지 않는다. 심지어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지고지순한 희생과 헌신의 모범 보여주었던 전임자 예수 그리스도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야마가타의 어느 숲 속에서 한 바탕 느와르 액션활극을 방불케 하는 소동이 벌어진 뒤, 가스는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그가 도대체 왜 일본에 왔는지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그리고 보니 바로 전에 읽은 <깊은 강>에서 외국인 가스통이 등장하는 것 같던데, 그 가스통이 <바보>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던 바보 가스통 보나파르트가 아니었을까. 한 작가가 쓴 각기 다른 두 소설의 이런 연결점을 만들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좀 별루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 읽고 나서 리뷰를 하다 보니 역시 우리의 가스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진가를 알아 가게 되는 도모에에 나 자신을 투영시켜 보기도 했다. 소설은 신문 연재소설답게 짧게 끊어가며 치고 나가는 흥미로운 포인트들이 분명 있었다.

 

피곤한 참에 아크 페일 에일을 한 깡통 마셨더니만 너무 졸립다. 이제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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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8-20 01: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맥주 마시고 이 늦은 시간에 리뷰 쓰는 대단한 사람

레삭매냐 2021-08-20 08:10   좋아요 4 | URL
굳이 변명을 하자면...

리뷰 쓰던 도중에 비루 생각
이 났고, 그걸 마시고 나니
급피곤해졌더라는.

예전에 술 먹고 시험공부한
답시고 밥상 끌어 안고 잔
생각이 나네요. 당연 시험은
망했습니다.

새파랑 2021-08-20 06: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음주 리뷰군요 ㅋ 어떤 훌륭한 작가라도 모든 작품이 좋을수는 없더라구요. 이 책 대산세계문학 시리즈군요. ㅋ 표지만 봐도 가지고 싶어지는 😆

레삭매냐 2021-08-20 08:12   좋아요 4 | URL
제가 사랑하는 작가 중의
하나인 제임스 설터가
지적해 주신 부분에 정확
하게 들어 맞는 것 같습니다.

한 작가의 모든 책들이
그렇게 다 좋을 수는 없죠.
공감합니다.

대산세문 표지는 짱입니다 역시나.

coolcat329 2021-08-20 11: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깊은 강의 가스통. 그 가스통이 맞는거 같아요.
참 체력이 좋으시네요. 저는 11시 넘으면 앉아있지 못하는데요.

레삭매냐 2021-08-20 14:10   좋아요 2 | URL
<깊은 강>을 다시 살펴 보고
싶은데 책을 반납해서리...

저의 저질 체력을 뭘로 보시고 ㅋㅋ

어제는 참 졸립더라구요. 그래도
왠지 리뷰는 마무리하고 싶어서리.
금방 나가 떨어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