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대산세계문학총서 159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나에게 8월은 가히 엔도 슈사쿠의 달이라고 불러도 될 듯 싶다. 이 달에만 신간 <사무라이>를 비롯해서 <깊은 강><바보>를 잇달아 읽었으니 말이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전쟁과 사랑>도 대기 중이다. 이번에 재개정판으로 나온 <예수의 생애>도 궁금하다.

 

이번 주에 만난 <바보>는 젊은 날의 엔도 슈사쿠 선생의 작품이라 그런지 조금은 구성이나 주제를 보듬는 부분에서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라이><깊은 강>이 너무 강력해서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그런 느낌이랄까.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프랑스 사부아 출신의 가스통 보나파르트(, 맞다 자그마치 나폴레옹의 후손이라고 한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설의 끝까지 도대체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어설픈 일본어를 구사하며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가스통이 왜 일본에 왔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아니 이렇게 불친절할 수가 있나 그래. 독자에게는 적어도 넌지시 알려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소설의 다른 주인공들로는 다카모리와 도모에 히가키 남매가 등장한다. 우리의 주인공 가스통은 예전에 다카모리와 펜팔한 인연으로 일본을 찾는다. 그리고 히가키 집안에서는 외국인 손님을 맞기 위해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의사이자 의대 교수였던 아버지였던 히가키 씨는 작고하셨고 어머니와 가정부 마짱이 미지의 외국인을 맞이하기 위해 열성적인 준비에 나선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은행에 다니는 게으름뱅이 다카모리는 외국인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일본이라는 공식화된 모습을 은근 비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은 일본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자신들보다 못사는 동남아 사람들이나 흑인들에게는 1도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다.

 

오빠 다카모리에게 절대지지 않고, 남들은 배우지 않는 이탈리아어 전공으로 뷰타포코 사에 취업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신세대 엘리트 여성 도모에도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다. 오빠 말로는 혼기에 꽉찼다고 하는데, 그녀는 남자와의 연애나 결혼 이딴 거에 관심을 두는 대신 주식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최근 주식의 세계에 입문한 주린이로서는 눈이 번뜩 뜨이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주식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건 아니고 다만 도모에 씨가 당대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매력의 소유자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프랑스를 출발해서 베트남 호의 사등칸에서 등장한 가스통은 남매에게 실망 그 자체였다. 일단 서구인답게 체격은 건장했으나 인물은 배우를 기대했던 도모에의 그것과 달리 말상이었다. 뭐 이건 외모비하인가. 어설픈 일본어 구사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히가키 남매에게는 기대 이하였던 모양이다.

 

그 다음에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일단 우리의 친구 가스는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다. 소설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에 대한 소개가 등장하는데, 보면 볼수록 도모에가 바보 혹은 얼간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는 합리적 추론을 하게 만들어 준다. 어때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나 말이다.

 

소설 <바보>1959년에 신문에 연재되었던 모양인데,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전후 12년 후인 1957년 경인 듯 싶다. <침묵>이나 <사무라이> 등의 작품을 통해 역사라는 공간에서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이유를 구도자의 모습으로 구하던 엔도 슈사쿠 선생은 시간을 현대에 맞춰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평생 추구해온 주제 의식을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선사한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적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선하고 도대체 화를 내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희생을 자처하는 인물이 바로 가스통 보나파르트다. 일본 사람들은 발음이 어렵다며, 그의 이름도 가스라고 저들 편한 대로 부른다. 히가키 남매와 신주쿠 사건을 겪은 가스는 히가키 저택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달랑 3,000엔과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표 한 장 그리고 일본에 와서 만난 떠돌이개 나폴레옹과 길을 나선다.

 

그리고 산야의 쪽방 같이 허술한 곳에서 당시 일본의 밑바닥 인생들과 조우한다. 오히려 어려운 이들이 자발적으로 우리의 가스를 돕기 시작한다. 먹을 것을 나누고, 오갈 데 없는 가스를 점쟁이 조테이 어르신에게 소개시켜 함께 기거하게 된다. 볼품 없고 일본어도 잘 하지 못하는 가스를 누가 환대한단 말인가? 하긴 가스는 고향 프랑스의 사부아에서도 포플러 나무라며 어린 시절 갖은 학대와 수모를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그의 성향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일본으로 무대를 옮겨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인간이란 바뀌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가스는 거리에서 산야의 소문난 살인 청부업자 엔도와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데,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냉혹한 킬러로 알려진 엔도가 알고 보니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야쿠자였다는 설정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1950년대 일본에서 영어도 아닌 프랑스어를!!!) 가스와 의사소통에 나선다. 그리고 엔도의 난폭한 비정함 뒤에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억울하게 원주민들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전범으로 사형 당한 형님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이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던가. 콜트 권총까지 마련한 엔도는 형님의 억울한 죽음에 관련된 세 명의 인사들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우리의 가스는 킬러의 사냥에서 경찰의 추격이나 검문을 피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첫 타겟이었던 가나이는 선량한 남자 가스의 방해질로 실패하고, 다음 목표였던 고바야시 사냥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엔도라는 불쌍한 영혼의 본질을 알게 된 가스는 엔도에게 이용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내 그를 버리지 않는다. 심지어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지고지순한 희생과 헌신의 모범 보여주었던 전임자 예수 그리스도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야마가타의 어느 숲 속에서 한 바탕 느와르 액션활극을 방불케 하는 소동이 벌어진 뒤, 가스는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그가 도대체 왜 일본에 왔는지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그리고 보니 바로 전에 읽은 <깊은 강>에서 외국인 가스통이 등장하는 것 같던데, 그 가스통이 <바보>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던 바보 가스통 보나파르트가 아니었을까. 한 작가가 쓴 각기 다른 두 소설의 이런 연결점을 만들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좀 별루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 읽고 나서 리뷰를 하다 보니 역시 우리의 가스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진가를 알아 가게 되는 도모에에 나 자신을 투영시켜 보기도 했다. 소설은 신문 연재소설답게 짧게 끊어가며 치고 나가는 흥미로운 포인트들이 분명 있었다.

 

피곤한 참에 아크 페일 에일을 한 깡통 마셨더니만 너무 졸립다. 이제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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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8-20 01: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맥주 마시고 이 늦은 시간에 리뷰 쓰는 대단한 사람

레삭매냐 2021-08-20 08:10   좋아요 4 | URL
굳이 변명을 하자면...

리뷰 쓰던 도중에 비루 생각
이 났고, 그걸 마시고 나니
급피곤해졌더라는.

예전에 술 먹고 시험공부한
답시고 밥상 끌어 안고 잔
생각이 나네요. 당연 시험은
망했습니다.

새파랑 2021-08-20 06: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음주 리뷰군요 ㅋ 어떤 훌륭한 작가라도 모든 작품이 좋을수는 없더라구요. 이 책 대산세계문학 시리즈군요. ㅋ 표지만 봐도 가지고 싶어지는 😆

레삭매냐 2021-08-20 08:12   좋아요 4 | URL
제가 사랑하는 작가 중의
하나인 제임스 설터가
지적해 주신 부분에 정확
하게 들어 맞는 것 같습니다.

한 작가의 모든 책들이
그렇게 다 좋을 수는 없죠.
공감합니다.

대산세문 표지는 짱입니다 역시나.

coolcat329 2021-08-20 11: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깊은 강의 가스통. 그 가스통이 맞는거 같아요.
참 체력이 좋으시네요. 저는 11시 넘으면 앉아있지 못하는데요.

레삭매냐 2021-08-20 14:10   좋아요 2 | URL
<깊은 강>을 다시 살펴 보고
싶은데 책을 반납해서리...

저의 저질 체력을 뭘로 보시고 ㅋㅋ

어제는 참 졸립더라구요. 그래도
왠지 리뷰는 마무리하고 싶어서리.
금방 나가 떨어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