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적 1
엔도 슈사쿠 지음, 조양욱 옮김 / 포북(for book)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이제는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엔도 슈사쿠 선생의 <숙적>을 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파죽지세 같은 기세로 어제 하루 동안 다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피곤했는지 잠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오늘 아침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숙적>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일본 출신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다. 잘 알려진 것처럼, 두 사람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시 출신이다. 소설은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으로 죽고, 거의 통일을 이룬 노부나가의 뒤를 누가 잇느냐를 두고 맞붙은 시절로부터 시작된다.

 

이번에도 역시 작년에 만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나가> 덕분에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있어 소설은 술술 읽을 수가 있었다. 연쇄 독서를 하면서 느끼게 된 건데, 어떤 한 책을 읽어 기초를 닦게 되면 다음번에는 비슷한 시절을 그린 책을 만나게 되면 좀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고니시 야쿠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고니시 일족은 사카이를 중심으로 한 약종상 출신의 집안이다. 그 때문에 타고난 사무라이였던 가토 도라노스케(기요마사)에게 장사치에 불과하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전쟁에는 무력만 필요한 게 아니라, 하시바 히데요시의 말처럼 돈과 쌀로 이기는 방법도 있는데 우직한 무장 스타일의 도라노스케는 오로지 전장에서 창을 휘둘러 이기는 법만 알았다.

 

고니시 야쿠로와 이시다 사스케(미쓰나리)가 행정관료 출신의 사무라이였다면, 도라노스케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한 훗날 시즈가타케 칠본창으로 알려진 히데요시 휘하 근시들은 전형적인 무장으로 사사건건 고니시들과 맞부딪히게 된다.

 

비록 고마키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일격을 당하긴 했지만, 미카와의 너구리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간파쿠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동원해서 규수와 오다와라의 호조 가를 잇달아 제압하고 결국 일본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간파쿠는 이 와중에, 자신의 가신들이 서로 경쟁하는 구조를 만드는데 고니시와 가토가 대표적인 선수들이었다.

 

전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 히데요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꿈꾸었던 망상을 실현하는데 전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천축까지 정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실질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일본을 통일하기까지는 명석한 판단력과 실천력을 보여줬던 간파쿠가 자신의 외동아들 쓰루마쓰를 잃으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고 엔도 슈사쿠 작가는 분석한다.

 

한편, 규슈를 정벌하고 구마모토에는 도라노스케를 그리고 바로 이웃한 우토에는 야쿠로를 배치한 히데요시는 일본의 기리스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기리스탄 다이묘로 야마자키 전투 이래 간파쿠에게 충성을 다한 다카야마 우콘은 1587년 신앙을 지키던지 아니면 가독을 반환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두 번 생각할 것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버렸다. 같은 자리에 있던 유키나가는 그러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을 앞두고,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규슈의 기리스탄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벌군을 편성한다. 사실 그에게 규슈의 골치 아픈 기리스탄 다이묘들은 버리는 돌일 뿐이었다. 당장에 자신의 근치 출신 다이묘였던 유키나가부터 자신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던가.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써먹고 토사구팽하려는 주군의 속셈을 파악한 유키나가는 겉으로만 기리스탄 신앙을 버렸다고 선언하고, 속으로는 다카야마 우콘과 오르간티노 신부들과의 교류를 계속한다. 진짜 둘 사이의 피 튀기는 수싸움이 아닐 수 없다.

 

우토에서 일어난 토호들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유키나가는 결국 이웃 구마모토의 기요마사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뿐하게 일기토로 아마쿠사 반군들을 제압한 기요마사의 막강한 실력 앞에 유키나가는 다시 한 번 좌절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될수록 서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고, 스타일과 출신이 너무 다른 두 다이묘들의 갈등은 증폭될 뿐이었다.

 

다음 무대는 조선이었다. 망상에 젖은 간파쿠 히데요시는 결국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정벌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처음에는 조선 정벌군 사령관으로 눈엣가시 같은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정될 줄 알았지만, 의외로 기리스탄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임명되었다. 역사적으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벌군의 출발지로 지목된 쓰시마의 도주 소 요시토모와 결탁한 유키나가는 조선과의 전쟁 대신 화의에 전력을 다한다. 왠지 여기서 기리스탄 다이묘로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전하고 싶었던 걸까.

 

주군인 히데요시의 명령을 어겨 가면서, 그야말로 위험한 줄다리기에 나선 상황이 긴장을 자아낸다. 결국 1592년 조선으로부터 가도입명 요구에 대한 확답을 받지 못한 히데요시는 18,000명으로 구성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선봉을 맡겨 조선 침략에 나선다. 주군에게 내몰리듯 가토 기요마사 대신 선봉을 맡게 된 유키나가는 활로 무장한 조선군에게 상대적으로 우세한 철포부대를 앞장 세워 동래, 부산을 차례로 점령하고 조령을 거쳐 한양으로 파죽지세의 진격을 시작한다.

 

조선에서도 고니시와 가토의 라이벌 관계는 계속됐다.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붙은 가토에게 전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니시는 사력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충주 탄금대에서는 신립 장군이 이끄는 8,000명의 정예 조선 기마부대를 상대로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이 무적의 다케다 기마대를 상대했던 시타라가하라 결전을 모델로 배수진을 친 조선군을 격파한다. 고니시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던 가토는 조선 주력군에 대한 고니시의 승전을 시기한다.

 

조선의 수도 한양 입성의 공을 먼저 세우기 위해 가토는 아군마저 기만하고, 한양으로 내달린다. 결국 고니시에 앞서 격전을 기대하고 한양에 입성한 가토는 수도를 버리고 몽진에 나선 텅 빈 성을 마주하게 된다. 다시 한 번, 고니시는 조선과의 화의를 시도했지만 그의 의도를 파악한 가토에 의해 고니시의 화의 공작은 무산되어 버렸다.

 

숙적 1부에서는 성공의 정점에 도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 경쟁관계에 있었던 두 명의 다이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보통의 가신들이라면 주군 아래서 당연히 협력 관계를 도모해야 했음에도, 그들을 다룰 자신이 있었다고 판단한 히데요시는 그들간의 경쟁을 은연중에 부추겼다. 아마 자신은 그들을 능수능란하게 조종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싸움 밖에 모르는 무식한 무장 그리고 장사치라며 경멸하던 두 사무라이의 대결이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거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했다.

 

대국을 보는 시각에서 고니시는 과연 가토를 능가했다. 무력으로 조선을 넘어 후견인 명나라까지 정벌한다는 것은 망상이었다. 일본의 국력이 그 정도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자국도 아닌 타국에서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보급이 약탈만으로 가능하지도 않았다. 결국 도요토미 가문의 멸문을 가져오는 대외전쟁은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았고, 고니시의 주장대로 화의를 주선해야 했다. 어쩌면 가토의 고니시에 대한 방해공작이 조선 원정군의 자멸을 초래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가 자신의 부대에게 엄한 군율을 강요했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약탈전쟁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만행에 대해 저자가 모르고 기술했나 싶다. 전쟁 말기, 조선에서 오죽했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토 기요마사 만큼은 반드시 잡겠다고 처절한 울산성 전투를 벌이지 않았던가 말이다. 저자에 대해 그 부분이 좀 아쉬웠다.

 

전쟁 초기 부산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성주라고 저자는 표현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절, 일본에서는 성주만 잡으면 전쟁이 끝나던 것과 달리 중앙집권제였던 조선에서 지역으로 파견된 공무원에 해당하는 부사를 한 지역을 담당한 성주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일본군에 관군이 격파되기는 했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근왕군과 의병활동으로 대변된 조선의 저력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시작한 전쟁이 침략군의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무대를 일본으로 옮겨 재개될 숙명의 두 라이벌의 대결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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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1-08-21 11: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임진왜란. 그걸 왜 그동안 안 궁금해했나 놀라는 순간입니다^♡^

레삭매냐 2021-08-21 11:47   좋아요 5 | URL
소설에 나오는 캐릭들이 그동안
의 수련으로 익숙하고 내용 또
한 너무 재밌어서 2권도 단박에
100쪽을 읽었네요.

오늘 중으로 다 읽을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1-08-21 12:5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단 책의 내용보다는 <사람 레삭매냐님>이 다시 보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바치는 열정과 정열이 대단하신것 같아요.
매번 그렇게 느꼈지만 또 한 번 느낍니다.
저 레삭매냐님 따라 읽는다고 작년에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의 책 많이 샀는데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어요.
급반성하는 인간인 제가 또 엔도 슈사쿠에 관심가지게 되었습니다. ㅠㅠ

붕붕툐툐 2021-08-21 14:06   좋아요 6 | URL
ㅋㅋㅋ레샥매냐님에 대해 느끼는 바를 격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플러스 페넬로페님 귀여우세요~😍

페넬로페 2021-08-21 21:07   좋아요 2 | URL
툐툐님! 귀엽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레삭매냐 2021-08-21 21:27   좋아요 2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예전에 <침묵>만 읽고서 엔도
슈사쿠 작가의 나머지 책들을
찾아 보지 않았었는데 이 달
들어 마구 읽게 되었네요.

이젠 심지어 그의 동물 타령을
다룬 책까정 ㅋㅋㅋ 제가 그렇
습니다.

참 루이스 세풀베다는 사랑입
네다. 속히 읽어 주세요 ^^

coolcat329 2021-08-21 14:57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쿠 작품이 많나보네요. 이런 대하역사소설도 썼군요.
근데 레삭매냐님 집중력과 열정에 저도 또 놀라고 갑니다.

레삭매냐 2021-08-21 21:44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오늘 마저 다 읽었는데
그동안 만난 책들과는 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
았습니다.

뭐랄까 좀 힘을 빼고 썼
다고나 할까요.

mini74 2021-08-21 17:11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왕만 잡으면 될 줄 알았는데 선조가 도망가서 일본이 우왕좌왕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나요. 일본농민들에게 전쟁은 그저 세금 내는 곳이 바뀌는 것일뿐. 그래서 의병이 낯설었을 듯해요. 고니시 유키나가 저도 궁금해지네요 ~~

레삭매냐 2021-08-21 21:45   좋아요 2 | URL
소설에 말씀해 주신 부분
이 정확하게 등장합니다.

한양에 입성하니 멍청이 임금
선조가 튀어 버려서 가토 기요
마사와 뒤따라온 고니시 유키
나가가 망연자실해 하지요...

bookholic 2021-08-21 18:4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친한 후배가 추천한 책인데, 기회가 닿질 않아 읽지 못했는데, 다시 리스트에 추가해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1-08-21 21:46   좋아요 2 | URL
제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책이 절판
되었더라구요.

어제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
다는 걸 알고는 바로 빌려다
읽었답니다.

저도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캐모마일 2021-08-21 18:5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었는데도 두 숙적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네요.

레삭매냐 2021-08-21 21:47   좋아요 1 | URL
읽는 재미가 쏠쏠했답니다.
이틀 만에 다 읽었네요.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의 주군
도요토미를 위해서라고 했지
만 결국 주군의 가문 멸문한
도쿠가와를 도운 셈이었지요.

대국을 보는 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