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수 연간 6억 엔」의 벤츠를 파는 남자

◆「미스터 벤츠」라고 불리는 남자


옛날 그대로의 오래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와 신흥주택이 섞여있는 다마(多摩)지구의 코슈(甲州)가도길. 크고 작은 판매소가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 세일즈의 격전지에 야나세(YANASE) 영업소가 있다.

1997년 1년간 91대의 메르세데스 벤츠를 팔아 「미스터 벤츠」라는 별명이 생긴 야나세의 톱 세일즈맨은 그곳에 있다.

일반적으로 자동차 세일즈맨은 한 달에 약 10대, 연간 100대 전후를 판매하면 톱 세일즈맨이라고 불린다.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국산차 딜러의 목표이다. 수입차 영업맨은 같은 선상에서는 다룰 수 없다. 97년 수입자동차의 판매대수는 34만 1495대. 전년대비 13.2% 감소로 5년 만에 추락세를 보이며 일본 내에서의 수입차 점유율은 9.6%로 10%대에 그쳤다.


같은 해 4월부터 소비세율 인상으로 인해 신차 불황과 국산 메이커의 판매공세, 나아가서는 엔화 약세의 여파를 직접 받아 수입차는 고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판매대수가 전년 실적을 상회하고 일본 국내 수입차 판매 점유율 을 3위에서 2위로 끌어올린 곳이 다임러 벤츠(Daimler-Benz)였다.

확실히 벤츠는 경기에 좌우되지 않는 견실한 브랜드 파워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가장 싼 C클래스도 390만 엔부터인 고급차를 국산차 톱 세일즈 못지않게 판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참고로 「미스터 벤츠」씨가 판매한 벤츠는 평균 600만~700만엔. 단순히 계산하면 연간 약 6억 엔을 판매한 꼴이 된다.


◆ 별로 말을 하지 않는 세일즈맨

「영업 비결이요? 글쎄요…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드는데요…」「미스터 벤츠」, 코우노 타카시(河野敬)씨(33세)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주식회사 야나세 동경지점 후츄(府中)영업소 메르세데스 벤츠 판매과 계장. 이것이 현재 코우노씨의 직함이다.


수입차의 톱 세일즈맨이라는 말을 듣고 선입관이 있었다. 세일즈 화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자기 페이스에 상대를 끌어들이면서 가볍게 교섭을 진행시켜 나가는…좋게 말하면 세련되고, 나쁘게 말하면 잘난 척하는 가벼운 이미지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선입관은 바로 무너졌다. 멋진 더블 슈트를 맵시 있게 입고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딱 벌어진 체구. 짧게 깎은 머리스타일. 수완가 세일즈맨이라기 보다도 말끔한 스포츠맨의 모습이다.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선택해서 대응하는 어조는 정직한 인상을 주었는데, 말을 해도 수다스럽지 않았다.

「(웃음) 글쎄요. 마음에 없는 말은 못하는 성격입니다. 확실히 화법도 필요하죠, 우리들의 업무는 영업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화법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고객과의 인간관계를 구축해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법만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들은 그저 자동차를 사주었으면 하는 게 아닙니다. 세일즈맨과의 신뢰관계도 사주었으면 합니다.」


고객과의 신뢰관계가 코우노씨의 세일즈를 지지하고 있음은 매출 실적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97년에 팔았던 91대의 내역을 보면 새차로 바꾸는 것이 약 40대, 고객이나 업자, 판매점 등으로부터의 소개로 새차 구입이 약 40대. 방문영업이나 쇼룸을 방문한 고객의 신규 구입은 10대 전후라고 한다.

즉 지금까지 구축해 온 고객과의 신뢰관계가 작년도의 좋은 실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 야구와 미식축구

코우노씨가 야나세에 입사한 때는 87년. 그 용모대로 학생시절에는 “체육 계통의 날들”을 보냈다. 고교시절에는 야구에 푹 빠져 지냈다. 예전 한신(阪神)의 좌익수, 이노마타 타카시(猪俣隆)투수를 거느린 호리코시가쿠엔(堀越學園) 고교에서 좌익수를 맡았었다. 유감스럽게 고교야구 출전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도대회의 준결승에 머물렀다. 같은 시대에 와세다(早實)의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輔)(야쿠르트→요코하마 · 현 야구해설자)가 있었다.

대학 진학 후에는 「야구를 단념하고」미식축구부에 들어갔다. 4년간, 쿼터백으로서 팀을 이끌어 왔다. 심한 공격을 받아 등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대학 4학년 때 「실업단에 들어가 미식축구를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였지만」결국에는 영업이라는 일에 매력을 느껴 취업한 곳이 야나세였다.

자동차는 좋아했지만 특별히 자동차 마니아는 아니었다. 정비에 강한 것도 아니었다. 자동차를 처음 샀던 것도 입사해서 1년 후. 그런 코우노씨가 왜 수입차 세일즈맨이 되려고 했을까.

「역시 수입차 이퀄 고급차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벤츠와 같은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역시 그 나름대로의 지위가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해 그런 사람들과 자동차를 통해 만남으로써 자기를 높일 수 있다면…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높아졌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요 (웃음)」

처음에 배치 받은 곳이 후츄(府中)영업소. 지금이야 주택개발이 한창이고 새로운 주민이 늘어나 시장의 잠재능력이 높아지고 있는 다마(多摩)지구이지만, 배치 받았던 11년 전 당시에는 아직 수입차 세일즈맨에게는 미개척 시장이었다.


「내가 입사한 당시에는 수입차가 척척 팔릴 것 같은 지역도 아니었고, 개인적으로도 팔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입사해서 그 지역의 지리를 전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매일 100건의 기습방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성과가 나오지 않았어요. 이렇게 해서 정말 팔리기는 할까 하는 생각에 일하는 게 싫어졌습니다. 하지만 모든 선배들에게 배우고, 격려 받으면서 일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때 야나세의 세일즈맨으로서의 기초나 예의를 철저하게 배웠던 셈이죠. 역시 고가의 상품을 파는 일이라서 고객 입장에 선 대응이나 예의는 빠뜨릴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 기본은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세일즈맨 초기인 87년에 코우노씨는 연간 35대를 팔았다. 능력에서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신입으로서는 성과가 좋은 숫자였다. 이후 57대(88년), 61대(90년), 48대(91년), 57대(92년), 56대(93년), 60대(94년), 60대(95년), 72대(96년)…식으로 순조롭게 판매실적을 쌓아올렸다. 거품경제가 무너진 시기에는 실적도 저조했지만 좋지않은 일본 경제와는 반대로, 코오노씨의 판매실적은 다시 치솟았다.



「고객의 개비 리듬이나 소개해 주시는 리듬이 마침 겹쳤을 뿐이예요」

라고 코우노씨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런 고객과의 신뢰관계는 하루아침에 쌓을 수는 없다. 실적은 입사 이후 코우노씨가 착실하게 쌓은 고객과의 신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 쿼터백식 영업방식

「자주 『세일즈에는 기책(奇策) 없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역시 매일매일의 작은 노력이 앞날에 큰 성과로 이어집니다. 단지 보다 효율 좋은 노력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포인트가 되는 것이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발로 얻는 정보도 있다. 코우노씨의 머리 속에는 담당지역 내의 수입차 유저의 데이터가 늘 들어있다고 한다. 물론 애프터 서비스나 상담을 통해서 고객에게 정보를 얻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구누구씨는 슬슬 자동차를 바꾸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정보는 고객을 만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일상 업무 속에서 어떻게 그런 지역 정보를 수집할까. 게다가 옛날 그대로의 마을이라 하면 농가나 지주, 땅 소유자가 많죠. 그런 상태라면 폐쇄적인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근처에 세력가인 한 고객이 자동차를 사면 주위에서 사주기도 합니다. 그런 고객끼리의 관계 등도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지역정보를 수집해 활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고객의 구매의욕을 자극하기 위해 “정보”를 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얻은 새차 정보 등을 바로 고객에게 알린다. 빠르면 1년 앞서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색이나 내장 옵션 등을 중요시하는 벤츠 유저일수록 예약주문도 받기 쉽다.

상대방의 정보와 자신의 공격 상대 속에서 최선의 전략을 선택한다…그것은 마치 미식축구와 같다. 미식축구의 사령탑인 쿼터백은 적과 아군의 움직임을 넓게 파악해 돌파구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글쎄요. 확실히 쿼터백 경험이 도움이 되었을지 모릅니다.(웃음) 미식축구에는 몇 백개의 플레이 패턴이 있거든요. 그것을 몸에 익혀서 순식간에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일즈도 고객이 보여준 시그널에 슬기롭게 대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에는 이런 자동차를 타고 싶다』라든가 『얼마까지 해줄 것인가?』와 같은 말은 살 마음이 있다는 시그널. 그것을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게다가 쿼터백이 그때의 상황을 보고 플레이 스타일을 만들듯이 세일즈에도 고객 개개인의 조건에 맞춰 공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고객도 나도 만족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선택하면 됩니다.」

미식축구에서 길러온 강한 정신력과 순발력, 그리고 전략적인 눈. 그것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코우노씨의 강점인 것이다.


◆ 일류의 세일즈맨의 조건이란

고객과의 신뢰관계를 쌓는다. 코우노씨가 분명하게 밝혀준 영업 비결은 그가 말했듯이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니다.

고객과의 관계를 좀더 밀접하게 하려고 자기 시간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술자리나 골프에 동행하는 영업맨도 있다. 그런데 코우노씨는 「고객의 마음 속에 들어가려는 노력은 합니다. 하지만 아부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한다.

「이전에는 고객이 말한 대로 하는 것이 서비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명의 고객에게 얽매이면 다른 고객에게 폐를 끼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참된 신뢰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은 고객이 정말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필요한 때 고객이 의지할 수 있는 영업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코우노씨의 고객 중 한명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와는 10년 이상을 알고 지냈는데, 우선, 팔려고 아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웃음)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고객 가족 생일에 꽃을 보내거나 하는 일은 영업의 상투적 방법 아닙니까. 하지만 그는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자동차를 새로 바꾸어도 이상하게 코우노씨쪽에서 액션을 취하지 않아요. 한대라도 더 팔기 위해 거짓말 하는 경우도 없고, 제가 부탁한 일에 빨리 대응해줍니다.」

요전에 정비검사에 맡겼던 벤츠에 얼룩이 묻어 왔던 적이 있었다. 그날 『별일 없으시죠?』라고 안부 전화해온 코우노씨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그 날 바로 나를 찾아와 자동차 키를 빌려 몇 시간이나 청소를 했다고 한다.

「장마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래서 얼룩도 말끔히 지워졌어요. 원래 이 얼룩은 영업맨의 책임이 아닌데도 말이죠. 아내도 『일류 영업맨은 확실히 다르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야나세의 자동차를 타고싶다고 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반드시 그를 소개 시켜줄 생각입니다.」


◆ 중후, 견실함은 벤츠와 같다

팔려고 특별한 화법을 쓰는 것은 아니다. 고객에게 아부하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의 바르고, 성실해서 확실히 신뢰를 느낄 수 있다. 코우노씨는 만나면 만날수록 그의 매력이 보인다, 그것은 벤츠라고 하는 자동차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중후함이나 견실함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미스터 벤츠」라고 하는 칭호는 단순히 판매실적만이 아니라 코우노씨의 영업 스타일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닐까.

올해, 코우노씨는 개인적으로 100대라고 하는 판매목표를 설정했다. 목표를 달성하면 입사하고 나서 총 775대를 판매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무리 불경기라 하지만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재정이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소비 마인드가 얼어붙을 뿐. 이런 시대에 불필요한 돈은 쓰지 않겠지만 정말로 필요한 것에는 모두 돈을 지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사 주세요』라고 하면 팔리지 않을 거예요. 벤츠를 사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있어 어떤 의의가 있는지, 메리트가 있는지. 그 점을 앞으로는 좀 더 어필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1000대는 팔고싶거든요」

자동차 불황이라고 하는 역풍을 극복하고 한층 더 높은 의지를 보여준 한마디. 그러나 「미스터 벤츠」의 그 말은 결코 호언장담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자료출처 : 세일즈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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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이란 없다 」  
 

 

                                                고 승 덕 변호사

 

  [ 도 입 ]

 

   ㅇ 나는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다. 아시겠지만, 대학교 때 고시 3개를

      합격했다. 사법고시 합격, 외무고시 2등, 행정고시 1등,

      그리고 서울대 법대를 수석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부모님께 큰 절을 했었다. 똑똑한 머리를 물려줘서가

      아니라, 사실은 변변찮은 외모덕에 그저 고시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ㅇ 삼성카드가 요즘 잘 되고 있다. 그냥 해 본 소리가 아니라,

      경제전문가 활동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좀 더 열심히 하시면 머지않아 좋은 시절이 올 것 같다.  

 

 

  [ 본 론 ]      

 

   ㅇ 내 직업은 ① 변호사이면서, ② 방송도 하고, 3년 전부터 ③ 책을

      쓰고 있다. 평생 소원이 1년에 1권씩 평생 책을 내는 것이다.

      ④ 글도 쓴다.  모 신문사에 경제기사를 1주일에 2개정도 쓴다.

      ⑤ 또 오늘과 같은 특강도 한다. 평균 1주일에 2회 정도.         

      ⑥ 증권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운영하고 있는 사이트가 있는데

         회원수만도 3만 5천명 정도 된다. 나름대로 홈페이지 관련

         사업을 하나 구상중인 것도 있다.

      ⑦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척 많은 것 같고 어떻게 이걸

      다 할까 생각이 들겠지만 다 가능하다.

       이 중에서 한가지만 하더라도 힘들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다 가능하다.    

 

   ㅇ 무엇이든지 목표가 중요하며, 그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신이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일수록 확신을 갖지 못한다.  

 

   ㅇ 사람들은 나의 삶을 보면서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 노력의 결과다.

 

   ㅇ 학교 다닐 때 누구나 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해 봤을 것이다.   

      고 2때 수학 45점의 낙제점수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대학을 못 간다는 선생님의 말이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외를 한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6개월간 죽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2학기 때 400점 만점에 400점을 받았다.

      그 이후로 매 시험마다 1등 했고, 석달에 한 번 정도 2등을 했었다.

      학생시절 나는 여러 차례 내가 결코 남들보다 머리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남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ㅇ 인생에 있어 2가지 자세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남보다 적게 노력하고 결과는 남들과 같은 똑같이

      나오게 하려고 한다. 사실은 이것이 경제학 법칙에 맞는 것이다.  

      투입을 적게하고 효과를 많이 내는 것.

 

      반대로, 다른 사람들 만큼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경험상으로 보면 후자가 훨씬

      좋은 결과를 낳는다.

      

      남보다 노력을 더 많이 해서 비슷한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것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살면서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ㅇ 그럼 노력이란 무엇이냐?  나는 “노력이란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라고 정의 내린다. 하지만 물론 결과를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노력에도 함수 관계가 성립한다.

 

      * 노력 = f(시간 × 집중)  

 

      내가 실제 노력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판단하려면 시간을 많이

      투입했거나 집중을 잘 했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ㅇ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3시간만에 끝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5시간만에 끝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3시간만에 끝내는 사람이

      실제 일을 더 잘하는 것 같지만 나머지 2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더 많이 알기 위해 그 2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면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

 

  

 

 

 

 

 

   ㅇ 집중에 대해서 얘기해 보면, 고시 공부할 때 예를 들어 보겠다.

      나는 고시 공부를 1년간 해서 합격했다. 어떻게 가능 했느냐?

 

      첫째는 된다고 생각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보통 고시에 합격하려면, 봐야 할 책이 50권, 권당 페이지는 500P,

      그 책을 5번을 봐야 합격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나는 7번을

      보았다. 이를 계산해 보면

 

      50 × 500 × 7 = 175,000 페이지를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을 1년을 360일로 계산해보면 1일 목표량이 나온다.

      즉, 1일 500 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봐야 한다는 계산이다.

  

 

   ㅇ 이처럼, 목표를 세울 때는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 막연한 목표는

      달성하기 힘들다.  

 

      이 결론을 보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은 포기하게 된다.

      설사 하게 되더라도 하다가 흐지부지 된다.

 

      이렇게 목표에 대해 확신이 없고, 목표를 의심하는 사람은

      집중을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표에 확신을 가져라.  

 

 

   ㅇ 된다는 사람만 되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 된다.

      일단 안 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85%의 사람들은 이미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것이다. 된다고 생각하는 일부만 나의 경쟁이

      된다. 그럼 경쟁대상이 줄어드니 훨씬 마음도 한결 가벼워 진다.

 

   ㅇ 세상도 절대적으로 잘 하는 사람은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남 보다만 잘 하면 된다.  

      그럼, 다른 사람보다 잘 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  

      그것은 나 자신을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 된다.

 

      인간은 거의 비슷하다. 내가 하고 싶은 선에서 멈추면 남들도

      그 선에서 멈춘다. 남들보다 약간의 괴로움이 추가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노력이란 것을 했다고 할 수 있다.

 

   ㅇ 고시 공부할 때 7시간 잤다. 장기간 공부를 해야 할 경우라면

      일단 잠은 충분히 자야 한다. 하루 24시간 중 나머지 17시간이

      중요하다.

      고시생의 평균 1일 공부시간은 10시간 정도다. 그러나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잠자는 시간 빼고 17시간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정말,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남들과 똑같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찬 떠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씹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래서 모든 반찬을 밥알 크기로 으깨어

     밥과 비벼 최대한의 씹는 시간도 아꼈다.

     숟가락을 놓는 그 순간부터 공부는 항상 계속 되어야 했다.

     나의 경쟁자가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냐 하고 생각들면 노력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ㅇ 미국에서 생활 할 때 보면 소위 미국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간단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운다. 점심시간 1시간 다 쓰고,

      이래저래 20~30분 또 그냥 보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들에

      비하면 일 하는게 아니다.

 

 

   ㅇ 집중을 잘 하는 것은 벼락치기 하는 것이다. 벼락치기 할 때가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한다.

      우등생은 평소에 벼락치기 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막연한 목표를 가지면 이렇게 긴장이 안되지만 분명하면 항상

      긴장되고 집중을 잘 할 수 있다.

 

   ㅇ 방송하면서 인생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 주변 사람들은 말렸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람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면 해도

      되는 일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해야 할 일이 참 많다.

 

   ㅇ 나에게는 인생 철학이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A와 B가 있을 때

      나는 A가 더 중요하지만 B를 선택해야 할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학교 다닐 때 나는 A는 여자친구 였고, B는 고시 합격 이었다.

      대학시절 한 때 A는 내게 무척 중요한 시기가 있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t1,t2판단법이란게 중요하다.

    

      내가 A를 선택하면 난 B를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줄어든다.

      그러나, 나의 외모 컴플렉스 때문에 A를 성공하는 일 또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B를 먼저 해서 좀 더 유리한 조건이 되면

      A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고시합격을 더 빨리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집중도 잘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낀 것이다. 장기간 동안

      시간의 흐름을 계산해 볼 때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를 판단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ㅇ 그래서 난 남들이 말려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코미디 프로에도

      나갈 수 있었다. 난 " 할 수 있을 때 뭐든지 해 버리자 " 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그러면서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쌓아 가면 된다.

      하다가 안되면 포기하더라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아예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ㅇ 나의 징크스는 시험에 합격하려면 10번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합격의 확신을 갖는다.

      3~4번만 보면 불안하다. 그래서 그냥 뭐든지 기본적으로 10번을

      본다. 몇 번 3~4번 책을 보고 시험을 본 적 있다. 역시 떨어졌다.

 

 

  [ 결 론 ]      

 

   ㅇ 앞으로는 이렇게 해 보자. 첫째는 남보다 많이 노력하는 것이다.

      둘째는 어려운 목표일수록 확신을 가져 보자. 그러면 정말 되는

      일이 훨씬 많다. 셋째는 남보다 최소 3배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ㅇ 직장에서 윗 사람이 일을 시킬 때 남보다 더 많은 일을 시키고,

      나한테만 어려운 일을 시키더라도 신나는 표정을 지어보자.

      대부분의 사람, 아니 나의 경쟁자는 이럴 때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기려면 그들 보다는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힘들더라도 괴로움을 추가해 보자.

      

   ㅇ 남들에 비해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3배의 노력만 한다면 4번째 부터는 분명 가속도가

      붙어 급속도로 차이가 날 것이다.       

 

 

   ㅇ 마지막으로 대인관계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세상을 살다보면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노력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나 혼자의 노력 외에  대인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경우가 있다.

       어떤 상대를 만나든 최소 5분은 상대방을 위해 생각하는 시간으로

      할애해 보자.

      

 

   ㅇ 남과 똑같이 해서는 절대 노력했다고 할 수 없다.

   

                                                     - 以 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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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2.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갈망하던 내일이다.

3.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4.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5. 공부할 때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6. 공부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7.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 몰라도 성공은 성적순이다.

8.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전부도 아닌 공부 하나도 정복하지 못한다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9.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겨라.

10. 남보다 더 일찍 더 부지런히 노력해야 성공을 맛 볼 수 있다.

11. 성공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노력에서 비롯된 다.

12. 시간은 간다.

13. 지금 흘린 침은 내일 흘릴 눈물이 된다.

14. 개같이 공부해서 정승같이 놀자.

15.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

16. 미래에 투자하는 사람은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다.

17. 학벌이 돈이다.

18. 오늘 보낸 하루는 내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19.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20. no pains no gains 고통이 없으면 얻는것도 없다.

21. 꿈이 바로 앞에 있는데, 당신은 왜 팔을 뻗지 않는가?

22. 눈이 감기는가? 그럼 미래를 향한 눈도 감긴다.

23. 졸지 말고 자라.

24. 성적은 투자한 시간의 절대량에 비례한다.

25. 가장 위대한 일은 남들이 자고 있을 때 이뤄진다.

26. 지금 헛되이 보내는 이 시간이 시험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얼마나 절실 하게 느껴지겠는가?

27. 불가능이란 노력하지 않는 자의 변명이다.

28.노력의 댓가는 이유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29.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30. 한시간 더 공부하면 남편 얼굴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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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부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



경제통신사인 edaily 증권부 기자 한상복 씨. 그가 지난 1년 2개월간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부자(자산 20억~1천억원대) 1백43명을 만나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펴낸 책이 바로 『한국의 부자들(위즈덤 하우스 펴냄)』이다. 부자들이 부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내용인 이 책은 ‘부자를 꿈꾸는’ 사람에겐 필독서다.



1. 부자들, 독하고 집요한 실천쟁이
흔히들 ‘돈맛’이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맛은 ‘돈을 쓰는 맛’이다. 반면 부자들은 ‘돈을 벌고 모으는 맛’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첫 번째 경계선이다. 사람들은 어떤 계기로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확고한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대개는 길어야 6개월이다. 본인 스스로가 지친다. ‘이러다 어느 세월에 1억을 모으나.’라며 허탈감에 빠진다. 게다가 주변에 돈 쓸 일이 자꾸 생긴다. 슬며시 현실과 타협을 하게 된다. ‘내년부터 모으지 뭐.’라면서. 부자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다. 목표를 정하면 집요하게 실천을 한다. 이것이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두 번째 경계선이다.

2. 부자들, 때론 무모한 투자가이기도
‘돈을 충분히 모아서 사들인다.’는 것은 부자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계획일 뿐이다. 부자들은 일단 사고, 그다음에 돈을 모은다. 저축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리를 해서 부동산을 사고 나면 저축의 목표가 또 한 차례 상향 조정된다. 이런 과정이 끊임없는 상승효과를 일으켜 부자의 길로 인도해준다. 저질러놓고 그것을 막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부자가 되는 과정에 고통은 필수다.

3. 생활비를 빼고 저축하면 부자 못된다
부자들은 ‘단순히 돈을 모으기 위해’ 저축을 하면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명확한 투자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구입하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파악하여 저축 규모를 정해야 한다는 것. 막연한 저축은 불필요한 소비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생활비를 빼고 난 나머지 금액을 저축한다. 반면 부자가 된 사람들은 목표를 세운 뒤, 그것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저축 액수를 결정하고 있었다. 생활은 그다음 문제다. (중략) 부자가 되는 것은 눈을 뭉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처음에 힘을 주어 다지고 나면 굴려서 크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모을 수밖에 없도록 자기 시스템을 만들어놓는 것에서 부자 인생은 출발한다.

4. 짠돌이 생활태도, 부자들의 출발점
진성호 씨는 물건을 살 때 반드시 세 번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 물건이 꼭 필요할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 효용이 반반이고, 거듭 생각하면 필요 없는 물건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바가지를 쓰면 분해서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부자들이다. (중략) 부자들은 돈을 내고 무엇인가를 사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수입은 일정한데, 쓰다 보면 돈이 모일 턱이 없다는 것. 부자들에게도 수입은 일정하다. 갑자기 수입이 곱절로 늘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들이 여전히 부자인 것은 수입을 늘리면서도 지출은 엄격하게 통제하기 때문이다.

5. 0.1% 금리에 목숨 거는 쩨쩨함은 기본
부자들에게 이자 수입은 소득원 순위 3위 또는 4위에 그쳤다. 이들이 은행권에 많은 돈을 넣어두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소득(임대료 및 사업소득 등)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이한 것은 부자들이 이자율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대목이었다. 0.01%라도 높은 이자를 주는 곳을 택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부자가 쩨쩨하게 그까짓 이자 몇 푼 가지고 전전긍긍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부자가 되기 훨씬 전부터 높은 이자를 따라 금융상품을 갈아타는 것을 습관화해왔다.

6. 편안함만 추구한다면, 부자 되기는 글렀다
기능직 공무원 출신인 조대경 씨는 ‘이사’로 돈을 번 사람이다. 강남의 60평 규모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살림이 거의 없었다. 옛날에는 살림이 좀 있었지만, 이사 다니기 거추장스러워서 대폭 줄였다는 것이 조씨의 설명이다. 50대 중반인 그는 23세에 결혼, 지금까지 열일곱 번 이사를 다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아파트 여러 채와 상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사를 다닌다. 집값이 오르면 처분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또 한 채를 장만하는 식이다. “이 일대 아파트 값이 많이 올랐어요. 이제 뜰 때가 됐습니다.”

7. 부지런함, 부자들의 공통점
부자들은 거의 대부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이들 중 64%는 오후 10시 이전에 잠들고, 88%가 오전 6시 이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중략) 한 경영 전문지가 국내 1백대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도 위의 결과와 비슷하다. 이들의 평균 출근시간은 오전 7~8시가 58.6%로 나타났다. 6~7시 사이에 출근한다는 경영자도 7.2%였다. 결국 75.8%가 8시 이전에 출근을 하고 있는 셈이다.

8. 정부정책의 숨은 뜻 파악에 능하다
부자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정부의 생각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부가 어떤 뜻에서 정책을 내놓는지, 그 이면을 해석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연성길 씨만 해도 그렇다. “1998년에 정부가 분양권 전매를 사실상 허용했는데 그 뜻이 뭐겠어요. IMF 때문에 경기가 어려우니까 돈 가진 사람들이 풀라는 것 아닙니까. 그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 투기를 억제한다고 분양권 전매에는 서슬이 퍼랬는데 말이에요. 그럴 때는 돈 가지고 들어가면 틀림없어요. 편법이 좀 있어도 단속을 안 합니다.” 정부와 부자들 간의 관계는 항상 견제와 균형을 유지한다. 정부는 경기가 달아오를 때 ‘세금을 내라’고 부자들을 윽박지르는 한편, 경기가 바닥일 때는 러브콜을 보낸다. ‘돈을 좀 풀라’는 애원이다.

9. 책상에서 말고, 돈 냄새 좇아 다리품을 판다
부자들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들개처럼 돌아다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돈은 아이디어가 아닌 실물이므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돈이 흐르는 곳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 곁에는 아이디어 넘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과 부자의 차이는 바로 실천이다. 돈은 말로 버는 것이 아니다. 다리품을 팔아야 냄새라도 맡을 수 있다. (중략) 우리는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근처 부동산 앞을 지나다니면서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시세만을 본다. 그 옆에 붙어 있는 상가 시세는 상관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장사를 생각하면서도 창업 박람회 한 번 가보지 않는다. 신문광고를 보고 찜닭집 개업을 생각한다. 그 광고를 혼자만 봤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10. 부자들은 '동네 발바리'
부자들은 동네를 속속들이 누비고 다니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주변에서 기회를 찾는다. 낱낱이 파악한 정보로 승부를 걸고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다. 또한 ‘잘 아는 곳’에 투자를 한다. 남들의 성공에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친구가 어떤 아이템으로 한밑천 건졌다고 자랑을 한들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부자에게는 부자만의 기회가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살고 있는 동네에 무수한 기회가 넘실거리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리 기회가 널려 있다 해도 그것을 볼 눈이 없으면 이것 역시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기회는 눈을 뜬 사람에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기 위한 습관을 기르고 실천하지 않는 이상, 부자의 안목을 가질 수 없다.


그냥 구질구질하게 살아라

독한 마음 먹고 하는 재테크. 남들이 뭐라고 하던 굽히지 말아야 한다.

독한 마음 먹고 재테크를 하려다 보면 본의 아니게 많은 오해를 산다. '너무 돈을 밝힌다'는 둥 '너무 돈을 안 쓰는 왕소금'이라는 둥 많은 곱지 않은 시선들도 있다. 또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지 마라'라는 충고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지 않듯이 필자는 열심히 재테크하라고 독려를 하고 싶다. 하나의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할 테니 한번 보고 재테크에 임하는 각오를 새롭게 하라.

필자가 하는 일이 재테크 정보를 만드는 것과 재테크 상담을 해 주는 것이다. 최근에 의뢰받은 상담내용 가운데 대략적인 재테크상황은 다음과 같다. 아주 젊은 여직원이었는데, 그녀는 등록금이 아까워 1학기를 줄여서 7학기만에 조기졸업을 한 독한 여자였다. 그녀의 연봉은 비교적 많아 약 3천만원 정도 되었다. 지금까지 만 3년의 직장생활동안 얼마를 모았을까? 놀랍게도 6천만원을 모았다.

얼추 일년에 2천만원 정도를 모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직장 생활 해 본 사람이면 절감하겠지만 1년에 1천만원 모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게다가 그녀는 자기에게 마음껏 투자하는 20대 중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랍기 그지 없다. 실제 그녀가 매월 쓴 용돈이래 봤자 고작 월 20만원이었다. 여기다가 보험을 많이 들었다. 자기 것은 물론 부모님 것도 충분하게 들어서 약 30만원 정도 나가고 있다. 그리고는 전부 예금과 적금에 부었다.

용돈 20만원이면 식비와 교통비도 대기에 벅찬 돈이다. 정말 허리띠 팍팍 졸라맨 결과인 것이다. 현재와 같은 절약과 저축을 병행한다면 2년 안에 1억원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다. 지금까지 모은 돈을 지혜롭게 잘 굴린다면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 그녀의 친구들과 동료들 눈에 그녀가 어떻게 보였을까? 정말 구질구질해 보이지 않았을까? 아무려면 어떤가? 그녀에게 '내집마련'과 '유학'이라는 꿈을 조금씩 성취해 나가고 있으니까. 지금은 비록 개미처럼 살지만 얼마 후면 베짱이처럼 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와 정반대의 삶을 선택한다. 누군들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을까? 예전에 HOT와 쌍벽을 이뤘던 젝스키스의 히트곡 제목처럼 '폼생폼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공주나 왕자처럼 살고 싶은 본능에 이끌려 낭비하다 보면 나중에는 하인이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즉 현재를 선택할 것이냐 미래를 선택할 것이냐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후자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현재 공주나 왕자처럼 살면서 미래에도 여전히 공주나 왕자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천에 하나 둘에 불과할 것이다.

요즘 출퇴근 시 지하철 내에서 의미심장한 광고를 보곤 한다. 다름아닌 담배광고협회에서 내보내는 'DON'T SMOKE YOUR DREAM(자신의 꿈을 태우지 마라)'이라는 공익광고가 그것이다. 미모의 여자 록가수의 열정적인 춤과 노래를 선 보이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문구를 제시한다. 그리고 '담배보다 더 소중한 꿈이 있기에'라는 가슴에 정통으로 꽂히는 메시지를 던진다. 다시 말해 '담배'와 '자신의 꿈과 미래'를 바꾸지 말라는 내용이다.

아무쪼록 자신만의 꿈과 미래를 설계하라. 가능하면 좀 더 거창한 꿈을 꾸어라. 그리고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우라. 중장기 계획은 물론 단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어렵다. 이런 계획이 섰다면 그것에 맞춰 재테크를 열심히 하도록 하라. 아마 몇 년 후면 경쟁자보다 몇 발짝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0억을 모은 사람들]…“양조장 머슴 생활 잊은 적 없어요”


고졸 영어 강사에서 강남 입시학원 원장 된 유운규氏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 부근의 지하 2층 지상 7층짜리 건물. KOSEI & 신대일학원이란 간판이 내걸린 이 건물의 주인은 유운규(49) 원장이다. 이 건물의 꼭대기 펜트 하우스가 그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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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시어터에 노래방 시설까지 갖춘 이 곳의 한쪽 벽에는 이상한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길이가 1m는 됨직한 액자 안에 전시된 물건은 헤지다 못해 삭아서 으스러질 듯한 청바지 한 벌. 그 액자 오른쪽 아래에는 이런 영어 문구가 붙어 있다. ‘My by-gone-days (나의 지나간 날들·1967∼1970)·Don’t forget your past (과거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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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forget your past (과거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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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은 유원장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5남2녀 중 4남인 유원장이 전북 진안에서 양조장 겸 인삼 밭을 하던 먼 친척 집으로 머슴살이를 떠나던 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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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시장으로 술을 나르고, 돼지 똥을 치우고… 그 속에서도 학구열만은 식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이듬해 인근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학비가 없었다. 주인집에서는 먹여줄 뿐 땡전 한푼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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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겨우 입학금을 마련해 중학생이 됐지만 학비는 밀리고, 머슴살이와 학업의 병행은 지옥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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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에 술 냄새와 돼지 냄새를 풍기며 친구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얻어 먹는 게 치욕스러웠다. 그래도 돼지 우리에 영어단어를 걸어놓고 외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성적은 좋아 선생님에게서 5·16 장학금 대상자로 추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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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청 요건인 ‘등록금 납부 영수증’이 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던 어느날 만취한 선생님이 한밤 중에 양조장으로 쳐들어 왔다. “어린 애를 머슴살이 시키면서 품삯 한번, 학비 한번 안대 주는 파렴치한들!” 유 원장은 그나마 머슴살이도 끝이구나, 싶어 자살할 생각까지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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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구박은 더 심해졌지만 체면 때문인지, 밀렸던 두 학기 학비를 내줬고 그 영수증으로 5·16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중학교 3년을 마쳤다.그 4년의 머슴살이 상징이 액자 속의 청바지다. 주인 아저씨가 입다가 유원장에게 준, 말하자면 머슴 유니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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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술에 삭고 찢어진 그 바지를 철사 줄로 얽어서 입고 다녔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 고된 4년을 청바지에 담아 들고 양조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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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으로 진출한 그는 계란 배달과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가면서 고교 시험준비를 했다. 보문고등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 할 수 없이 후기인 대성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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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장학금으로 다녔지만 생활이 문제였다. 독서실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해가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들 구두를 닦고 친구들의 머리를 깍아 차비와 책값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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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선생님의 소개로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기도 했다. 모처럼 잡은 가정교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유원장은 돈을 쪼개 중학교 학원까지 다녔다. 잘 가르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르치는 것에 대한 기초가 생긴 시기”라고 말했다. 그가 더부살이를 했던 독서실은 학원을 겸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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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칠판도 닦아주고 교실 청소도 해 주며 친해진 학원강사가 대구에 일자리를 얻어 내려가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입 원서를 살 돈조차 없어 방황하던 유원장은 그 강사를 쫓아 대구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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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학원에서 우연히 대타로 강의를 하게 된 유원장은 영어강사로서 재능을 발휘한다.그걸 계기로 학원강사의 길로 들어서 인기를 얻었다. 군대(방위)를 마치고 다시 학원강사를 하던 그는 대구 최대 학원에 스카우트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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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78년 당시 그의 월 수입이 1백만원 정도였으니 고수입자였던 셈이다. 그 학원의 원장을 하던 모씨는 강사비의 3분의2를 무조건 저축해야 돈을 모을 수 있다며 ‘원천징수’ 해 갔다. 고졸자라는 ‘약점’ 때문에 늘 전전긍긍했던 유원장은 뭐든 시키는대로 했다. 결국, 이 돈도 떼 먹히는 바람에 그의 수년간 고생은 물거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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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의 3분의 2는 무조건 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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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그는 서울 경동시장 앞에 있던 대우학원에 스카우트된다.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한 서울 생활은 냉혹했다. 그 해 3월 새벽 6시10분 그의 서울 첫 강의 수강생은 달랑 1명이었다. 그는 그 수강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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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눈이 와도 꼭 나와야 한다. 학생이 안 나오면 나는 쓰레기통이라도 올려 놓고 강의를 할 거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그는 단 1초도 지각한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한 강사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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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점차 명성을 얻었고 월 평균 2백∼3백만원씩 벌어들였다. 알뜰히 돈을 모은 그는 79년 33평형 잠실 진주아파트를 3천4백만원에 사들이고 식구들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곧 이어 서울 최고의 학원으로 꼽히는 ‘대일학원’에 스카우트 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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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 강사의 총 집결지였던 대일학원에는 명문대 출신 강사들이 수두룩했다. 거기서 ‘고졸자’로 버텨내기란 정말 힘겨웠다. 수강생들에게 인정 받는 것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하루 8번 바쁜 강의 일정 중에서도 유명강사의 강의를 빼 놓지 않고 쫓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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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은 꼼꼼히 적었다가 자기 강의에 반영했다. ‘벤치마킹’이었던 셈이다. ‘유홍렬’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유머개발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성문기본영어 강의를 맡았던 그는 커다란 종이 차트에 책 내용을 일일이 다 배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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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강사들이 한 문장씩 칠판에 썼다 지웠다 할 시간에 그는 맨 뒤에 앉은 학생까지 다 보일 수 있도록 그 차트를 걸어놓고 설명했다. ‘효율적인 강의 방식’을 고안한 것이다. 때로는 명문대 영문학 석박사들을 불러다 개인 교습을 받아가며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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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력 덕에 대일학원에 온 뒤 1년여 만에 그는 수강생 1등을 차지한다. 한달에 수강생 4천2백명 기록을 올린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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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유원장은 80년 과외금지령으로 또 다시 시련을 맞는다. 재수생만으로는 학원강사로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85년 대일학원 강사를 하면서 압구정동에 사무실을 빌려 재수생 학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날로 높아 가는 임대료와 걸핏하면 들이닥치는 세무사찰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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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이민 가 있는 미국 처가로 아내와 아이들을 보냈다. 혼자 남은 유원장은 방송통신대를 다녀가며 강사생활을 계속했다.88년 그는 서울역 학원 밀집 지역에 82평짜리 땅을 1억2천6백만원에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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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업으로 독서실을 차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건축업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판단착오로 목욕탕까지 지으면서 건축비가 올라가고 준공 시점도 지연돼 4억5천만원이나 빚을 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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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압구정동 임대 건물의 보증금은 매년 25%씩 인상돼 월 1천만원을 월세로 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자 그는 ‘내 건물’ 마련에 나선다. 97년 8월 그는 매물로 나온 신사동 지금의 학원건물을 16억2천만원에 매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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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독서실과 목욕탕은 4억5천만원에 팔아 빚을 청산했다. 살던 집을 팔고, 그 동안 모은 돈을 싹싹 긁은 뒤 총 9억원의 신규 대출을 보태 지금의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3개월 만에 IMF가 오면서 부동산 가격은 폭락하고 대출 금리는 치솟았지만 짠돌이 생활로 버텨냈다. 덕분에 현재 시가 25억짜리 건물을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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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IMF라고 생각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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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3년째 특수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특례입학 대상자들의 국내 대학입학을 돕는 일이다. 사실 학원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임대료 정도에 불과하다. “학원을 접고 임대료로 편히 살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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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 소련지역과 스리랑카 등 동남아 오지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분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더군요. 그분들의 최대 고민이 자녀교육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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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의 제1 목표는 빚 청산이다. 몇 년전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친척의 간청으로 외제차를 한대 구입했지만 버스를 타고 다닐 때가 훨씬 더 많다. 양조장 머슴시절 약속대로 술은 입에도 안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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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빼고도 20억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그지만 “늘 IMF라고 생각하며 산다”고 한다. 그의 취미는 집에 갖춰 놓은 편집기로 비디오 촬영 작품을 만드는 것. 은퇴한 뒤에는 아내와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비디오 예술가로 사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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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의 맨 밑바닥에는 ‘청바지’가 있다. 그 청바지는 유원장의 표현대로 “고난이자 동시에 성공의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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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장 ‘10억원 모으기’의 결정적 전환점은 논현동 빌딩 구입이었다. 16억2천만원에 사서 현재 시가가 25억원에 달하니 8억8천만원의 차익을 남긴 셈이다. 97년 빌딩을 살 때 까지만 해도 유원장의 재산은 7억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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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겸 목욕탕 투자는 몇 년간 갚았던 이자를 고려하면 오히려 손해였다. 나머지는 ‘소처럼’ 일해서 모은 재산이었다. 잠실 진주 아파트 매입은 재테크의 절호의 기회였지만 동생 사업자금으로 조기에 팔아버린 뒤 10배나 올라 가슴 아팠던 기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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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원장의 최대 자산은 ‘최악의 환경을 성공의 밑거름을 삼을 만한’ 성실과 노력이다. 머슴살이하던 소년이 서울에서 손꼽히는 명강사로 성공한 비결을 유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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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들보다 모자라다는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했죠. 다른 강사들이 ‘내가 최고’라고 자만할 때 저는 연구하고 배웠습니다. 대일학원에 간 뒤 5년여 동안 한번도 강사실 소파에 앉아 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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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히려 재테크를 몰라 손해 본 부분도 많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 아예 은행에 맡기기 시작했다. 99년부터 유원장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는 신한은행 PB센터 고준석 부동산재테크 팀장은 “연리 10.6%짜리 비싼 대출을 금리 7%짜리 상품으로 바꿈으로써 연간 1천7백50만원의 이자부담을 줄이고 대출금리보다 싼 이자를 받으며 붓고 있던 적금을 깬 뒤 자산구조를 대출 갚는데 주력하는 구조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유운규 원장의 재산 형성 과정



1973년 고교 졸업. 첫 영어강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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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대구 최대 학원 영어강사로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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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서울 대우학원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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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서울 최고의 학원으로 꼽히던 대일학원 스카우트. 월 4천명 이상의 수강생을 끌 어 모으는 최고 인기 강사로 부상. 잠실 진주아파트 33평형 3천4백만원에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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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7.30 과외 금지조치로 학원 수입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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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동생 사업자금 위해 잠실 진주 아파트 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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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결혼과 함께 후암동 18평형 동자 아파트를 1천2백만원에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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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압구정동에 학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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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서울역 앞 82평짜리 대지를 1억2천6백만원에 매입. 독서실겸 목욕탕 운영. 건축 과정에서 4억5천만원의 빚을 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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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대학 특례 입학자 대입학원인 KOSEI&신대일학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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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서울역 앞 독서실 겸 목욕탕 4억5천만원에 매각. 신사동 4거리 부근에 지하2층 지상 6층짜리 건물 16억2천만원에 매입. 학원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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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現 논현동 건물 시가 25억원.(부채 9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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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주 볼티모어 자택 시가 25만 달러(약 3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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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예금 3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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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산 22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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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공할 때까지 밀고 나가리라.

나는 패배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며,
내 혈관속에 실패의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양치기에 의해 끌려 다니기만을 기다리는 양이 아니다.
나는 사자이다.
나는 양처럼 울어대고, 양처럼 이끌리고,
양처럼 잠재워지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눈물을 짜며 불평하는 자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리라.
이런 일은 마치 전염병과 같다.
그런 나약한 병은 양떼에게나 머물도록 내버려두자.
실패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은 나의 운명이 아니다.

나는 성공할 때까지 밀고 나가리라.

이제부터 나는 매일 매일의 노력이 마치 커다란 참나무를 베기 위해
도끼를 한번 내려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첫 번째 도끼질은 참나무에 조금의 진동도 주지 못할는지 모른다.
두 번째, 세 번째 도끼질도 역시 그러할지 모른다.
한 번 한 번의 도끼질은 너무 미약해서 아무런 결과가 없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미약한 도끼질이 결국은 참나무를 쓰러뜨릴 것이다.
오늘 하루의 내 노력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런 작은 시도가 반복되면 무엇이라도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위대한 상인의 비밀중에서


내가 만난 10억 부자들의 10가지 공통점


10억원대 부자들은 전문가의 상담과 조언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감(感)’보다는 ‘이론’을 존중한다. 부자라고 다 부자가 아니다. 수천억원을 가진 큰 부자도 있고 10억원대의 작은 부자도 있다. 우리가 10억원대 부자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최소한도의 부자이면서 정신적으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단계에 있는 부자이기 때문이다. 10억원대 부자들에게서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공통점에서 우리는 만년서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다

왜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진정한 부자란 어떤 사람인가? 내 삶의 철학에서 부(富)가 차지하는 비중은 또 어떠한가? 나는 어떤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부는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 10억원을 모은 부자들은 이러한 일련의 질문에 모두 대답할 수 있는 주관이 있었다. 이런 주관은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삶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막연하게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 나는 언제까지 얼마를 만들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훨씬 더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다.

건설회사 자재부장으로 근무하던 이 사장은 경제적인 자유를 좀더 빨리 얻기 위해서 자영업을 선택한 경우다. 이사장은 고용불안으로 언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다면 창업을 서두르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서 선택한 업종이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자동차정비업이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직장생활보다 두세 배나 큰 고난의 연속이었다. 사실 직장생활이야 적당히 게으름을 피워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지만 자신의 사업을 하게 되면서 지속적인 마케팅과 직원관리, 고객관리를 모두 직접 하다 보니 몸이 3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직장에 다닐 때는 그렇게 많던 아침잠이 자기사업을 하면서 싹 사라졌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는 고된 생활이 전혀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하면 빨리 이 사업을 안정시킬 것인가 하는 데에만 모든 생각이 모아졌다.

이사장이 제일 먼저 착안한 아이디어는 ‘ROTC 마케팅’이었다. ROTC 24기였던 이사장은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크고 작은 각종 모임을 주관하는 등 특유의 친화력으로 안산에 사는 ROTC 선후배들을 모두 고객으로 확보했다. ROTC 선배의 도움으로 삼성화재 애니카서비스를 지원하는 정비업체로 등록된 이후 매출액이 부쩍 늘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이사장의 자산은 10억원을 돌파하였다. 불안감 속에서도 직장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만져보기 어려운 돈이었다.

이사장은 일찍부터 회사의 정리해고 방침에 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사업을 창업한 경우다. 남들이 모두 정리해고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그는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졌고 지금은 이미 사업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나름대로의 스케줄에 따른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장점은 항상 멀리 내다보고 일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창업을 꿈꾸는 대다수 직장인은 공상이나 망상에만 파묻혀 창업을 ‘꿈’으로만 간직하는 데 그치는 데 비해 이사장은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과감성과 추진력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돈이 무서운 줄 안다

자수성가하여 부자가 된 사람 중에는 혹독한 가난을 이겨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돈의 무서움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이렇게 젊어서부터 고생을 하다보니 돈에 대한 감각이 보통사람보다 더 빨리 트이고 일단 손에 들어온 돈을 함부로 쓰는 일도 없었다. 10억을 모은 부자들은, 남들이 구두쇠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돈의 무서움을 모르는 숙맥들이 하는 얘기’라며 간단히 넘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곤 ‘그것 두 쪽밖에 없다’는 임사장은 돈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4년 내내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한 임사장은 학비 걱정은 면했으나 기거할 집도 없었고 책을 사 본다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가난한 고학생으로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3만원짜리 쪽방을 얻어 생활하면서 겨울에는 연탄을 때지 못해 냉방에서 자야만 했다. 그러다가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서 3년 5개월을 장교로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다. 당시 초급장교인 소위 봉급은 15만6000원, 중위 봉급은 17만8000원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인천에 16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임사장이 처음 취직해 받은 봉급은 32만원.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회사의 주택자금대출을 끼고 산 24평 아파트의 중도금이 모자라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출근했던 그는 아파트에 입주하고 나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돈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임사장은 32평 아파트로 넓혀간 뒤에야 비로소 장롱과 TV를 구입했다. 그는 현재 전망 좋은 43평 아파트에 거주하면서도 여전히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박봉으로 시작된 임사장의 자산은 이런 검소한 생활과 아파트 투자로 10억원을 넘길 수 있었다.


티끌이 모이면 태산이 된다

부자들은 처음에 목돈을 만드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10억원대의 부자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게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투자에 나서고, 돈을 불려 나가서 끝내는 10억원이 넘는 부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그마한 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도 10억원대 부자들의 몫이었다.

지금은 여유로운 중년을 보내고 있는 이회장은 아이들이 어릴 때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회장은 어린이날을 맞아 다른 데도 아닌 가까운 대학을 찾은 것이다. 놀이공원에 가서 줄만 서다가 그냥 돌아오는 것보다는 잔디밭이 있는 근처의 대학교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 지금에야 대학 구내에서도 주차비를 받지만 당시에는 주차비도 받지 않았고 입장료는 당연히 없었다.

이회장의 집은 수유동이어서 어린이날만 되면 아이들과 함께 가까운 고려대학에 갔다. 자기네 가족만 가면 재미없으니까 친구들 가족과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친구들과 같이 모인 것도 이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뛰어다니며 정신이 없었다. 수돗가에서 아이들은 물장난을 하며 즐겁게 논다. 원래 어른들은 불장난을 좋아하고 아이들은 물장난을 좋아하는 법이다. 아이들이 지쳐서 헐떡거릴 때까지 마음껏 놀게 내버려두고 나중에 재미있었냐고 물어보니 아이들의 반응은 ‘최고’라는 것이었다. 내년에 또 오자고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회장은 놀이공원에 가는 경비의 10분의 1만을 쓰고도 아이들로부터는 ‘최고 아빠’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부자답지 않다고? 티끌을 모으지 못하면 태산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자들은 없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지출을 줄인 덕택에 이회장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만 9억원에 달한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늘 돈에 대해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돈에 대해서 늘 공부하다보니 투자에서의 성공률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높다. 좋은 투자처에 대한 안목은 철저한 공부에서 비롯된다고 부자들은 한결같이 지적한다.

필자 역시 학창시절에 공부 잘했던 친구들이 큰 부자가 된 경우를 본 적이 별로 없다. ‘왜 그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사회에 나와서는 공부와 담을 쌓고 있었다. 이들은 좋은 대학을 나오고 성적이 좋다보니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도 쉽다. 그리고 입사한 후에도 힘든 영업부서보다는 상대적으로 일하기 쉬운 본사의 지원부서에서 볼펜만 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럭저럭 생활하다가 때가 되면 은퇴하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말 재미없고 따분한 ‘범생이’ 생활인데다 인생의 참된 멋을 모르고 일생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은 부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그저 중산층에 안주하는 데서 끝나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어는 서툴지만 ‘돈공부’는 확실하게

부부간 금실이 좋다는 것도 부자들의 공통점이다.
예비부부라면 결혼을 서두르는 것도 재테크의 지름길.
여기에 비하면 학창시절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성공한 친구들을 여럿 보았다. 이런 친구들은 비록 영어단어 외우는 것에는 서툴고 수학공식 암기하는 것을 힘들어했지만 사회에 나와서 하는 ‘돈 공부’에는 모두 우등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 되어버린 반면 비록 학교에서 배움이 부족했더라도 사회에서 ‘돈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성공한 것이다.

돈 공부는 경제신문 읽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신문을 읽다가 중요하다 싶은 것은 스크랩을 해놓는다. 필자가 만난 사람 중에는 스크랩하는 종이가 아까워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스크랩북으로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놓은 스?㈆┷舅? 시간날 때마다 들춰본다. 이런 관심으로 재테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쌓게 되고 이렇게 쌓은 정보와 지식은 재테크의 훌륭한 무기가 된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는다

기회는 수줍은 처녀같이 왔다가 날쌘 토끼처럼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 기회가 나에게 올지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이런 준비를 해놓지 않으면 기회가 지나갔을 때 ‘아차!’ 하기도 하고 아예 기회가 왔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기회는 적절한 곳에 적절한 투자를 함으로써 잡을 수 있다.

현재 주유소만 4군데를 경영하는 50억원대 부자 기사장은 IMF 사태 때 주유소를 매입해 큰돈을 벌었다. 지금은 주유소의 거리제한 철폐로 수익성이 많이 떨어졌다지만 당시는 ‘주유소 거리제한’이라는 규정이 있어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IMF 직후의 고금리와 외상매출을 견디지 못한 주인들은 주유소를 매물로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기사장은 이것을 사들여 큰 수익을 올렸다. 더군다나 기사장이 주유소를 매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금확보에 나선 S정유, K에너지 등에서 덤핑기름이 나왔다. IMF 와중에서 ℓ당 700원대였던 휘발유 값은 1300원대로 올랐는데 휘발유를 반값에 공급받으니 얼마나 큰수익이 났겠는가?

모두들 IMF 관리체제를 힘겹게 겪고 있었지만 이때가 기사장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던 것이다. 부동산투자와 주유소투자로 부자의 길에 들어 선 기사장의 ‘10억 노하우’는 ‘기회는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리미리 준비한다

10억을 굴리는 부자들에게 ‘즉흥적’이라는 단어는 없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전에 미리 준비한다. 준비가 덜 되었다면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는다. 생명보험사 출신인 최부장은 IMF 직후 현대증권 주식을 2800원에 사서 4만9000원에 팔아 이것만으로 10억원을 벌어들였다.

10억원대 부자가 된 그는 정년퇴임 후 자연을 벗삼아 사는 인생을 꿈꾸어왔다. 최부장은 본인이 꿈꾸는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주로 겨울부터 초봄까지 땅을 보러 다닌다. 여름에는 나뭇잎이 시야를 가려서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고 가을에는 단풍과 낙엽으로 인해 땅을 고르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이나 초봄에는 눈이 먼저 녹는 곳, 찬바람이 불지 않는 곳, 따뜻한 양지 등을 쉽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최부장은 이때를 이용하여 전원주택이나 휴양지 터를 물색하러 다닌다.

지난번에 눈여겨보았던 집터는 평지보다 약간 언덕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집터 옆으로 도랑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데 혹시 장마 때 물이 불어나서 집까지 침범할지 몰라 지난 장마 때 직접 가보기도 했다고 한다. 10억원의 자산을 지렛대로 또 다른 행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펜션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단순한 전원주택에서 벗어나 펜션을 겸용하려는 이유는 콘도에 비해서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획일적으로 지어진 콘도에서는 콘크리트 벽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최부장은 통나무로 전원주택을 지을 예정이어서 마치 숲속의 오두막집 같은 분위기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다. 또한 여름에는 별자리 관측, 눈덮인 겨울에는 눈조각전(展) 같은 이벤트도 개최해서 펜션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줄 생각이다. 콘도처럼 슈퍼마켓도 없고 노래방도 없지만 진한 감동을 주면 단골 손님을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최부장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돈을 번다는 기분보다는 타인의 문화생활에 기여함으로써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자부심으로 펜션을 운영하려고 한다.


섣불리 차를 사지 않는다

10억원대 부자들은 저축하는 동안 저축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터부시하고 미루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저축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차를 사지 않는다. 안정적인 위치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차에 눈을 돌린다.

자동차를 산다는 것은 얼마의 돈을 주고 자동차를 산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자동차를 구매함으로써 각종 세금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자동차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비용 또한 엄청나다. 엔진오일도 갈아줘야 하고 미션오일도 갈아줘야 한다. 가끔씩 점화 플러그도 교체해야 할 것이고 겨울이 되면 부동액도 넣어야 한다. 이렇게 나가는 돈은 목돈을 모으는 데 적지 않은 장애요소가 된다. 또한 보험료는 어떠한가? 초보운전자의 보험료는 100만원이 넘는 것이 예사다.

꼭 차를 사야 할 절박한 사정이 있다면 연식 변경기간을 활용하는 편이었다. 11월 말 정도가 되면 각 자동차회사에서는 자동차 가격을 할인해주는 이벤트를 실시한다. 자동차회사에서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 이유는 중고자동차 가격이 연식으로 매겨지기 때문이다. 즉 2002년식일 경우에는 1월이나 12월이나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한 달을 더 기다려 2003년식을 사려고 하다 보니까 2002년식을 좀 싸게 주는 것이다. 중간에 중고차시장에서 차를 판다면 약간의 손해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폐차할 때까지 타고 다닌다는 생각이라면 연식이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자동차 관리도 스스로
10억원을 모은 부자들 중에는 아예 중고차를 구입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신 괜히 싸게만 사려고 하다가 결함이 있는 차를 고르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에 중고차만큼은 제값을 주고 제대로 된 것을 사는 편이었다. 이렇게 차를 산 후에는 폐차할 때까지 타겠다는 마음으로 차를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간단한 자동차 관리는 손수 하는 편이다.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세차를 직접하는 경우도 많다. 세차장에 맡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0억 부자’ 치고는 ‘좀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을 법도 하지만 오히려 그러니까 10억원을 모았을 것이라며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배우자와 금실이 좋다

대부분의 부자는 부부관계가 원만한 편이다.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안정되니까 서로에게 불만도 적은 것 같다. 하지만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서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이해를 못하는 경우는 위험하다. 여자는 남자가 ‘쩨쩨하다’고 비난할 것이고 남자는 여자가 살림도 제대로 못한다고 힐난할 것이다. 결국은 가정불화의 틈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먼저 이해를 구해야 한다.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가족의 도움 없이 10억원을 만들기는 지난한 일이다. 남편은 열심히 돈을 만들 궁리를 하는데 아내는 한 달에 서너 번씩 미장원에 간다든지, 혹은 아내는 알뜰살뜰 사는데 남편은 고급 술집에서 양주나 마시고 있다면 10억원을 벌기는커녕 가정불화의 불씨만 만들 것이 뻔하다.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라면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협조를 구해 결혼을 서두르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미혼남녀가 돈을 모으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데이트 비용이다. 얼마전 1회 데이트 비용이 7만2000원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온 적이 있었다(커피 두 잔 7000원+영화표 두 장 1만2000원+저녁식사비 1만6000원+호프집 500cc 맥주 두잔, 안주 2만5000원+노래방 1만2000원=7만2000원). 이렇게 한 달 평균 10번을 만난다고 하면 매달 72만원의 적금을 부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분위기 때문에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고급 와인을 마시면 그만큼 ‘10억’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빨리 하는 것이 재테크의 한 방편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결혼을 한 다음에는 부부가 똘똘 뭉쳐 ‘10억 만들기’의 행로에 나서야 한다. 재테크에 있어 먼저 시작하는 것만큼 유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투자는 반드시 여유자금으로

필자는 15년 간 증권회사에 근무하면서 빚내서 투자하는 사람치고 부자가 된 경우는 단 한명도 보지 못했다. 흔히 주식투자를 해서 수익을 내어 이 돈으로 집을 사려고 한다. 하지만 부자들은 집을 먼저 사고 그 다음에 주식투자에 나선다. 투자라고 하는 것은 최대의 수익을 얻기 위해 리스크를 떠안고 하는 행위다. 따라서 투자의 초점은 리스크를 어떻게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최대한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느냐에 맞추어져야 한다. 첫 번째 주안점이 리스크이고 그 다음이 수익이다. 부자들은 모두 이렇게 투자한다. 하지만 부자가 되지 못한 일반인은 수익이 첫 번째고 리스크 관리는 안중에도 없다. 이런 식으로 투자해서는 성공하기 힘들다.

경기도청에 다니는 이계장은 요즘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이계장은 2002년 봄 주가지수가 800포인트를 넘어서는 활황장세를 보이자 1000만원을 대출받아 주식에 투자했다. 주당 5만5000원에 매수한 안철수연구소 주식은 한때 6만원을 넘기도 했지만 지금은 1만7000원 근처에서 맴돌고 있다.

70%의 손실률도 손실률이지만 매달 나가는 이자 때문에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다. ‘매달 내는 이자로 적금을 들면 만기 때 목돈을 만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이중으로 손해보는 것만 같아 더더?? 속이 쓰리다.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는 잠깐 들어갔다가 수익을 챙겨서 후닥닥 빠져나올 심산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단단히 코가 꿰인 것이다.
투자는 종잣돈으로 하라는 말을 흘려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자녀교육에 엄격하다

부자들의 공통된 근심거리는 자녀에 관한 것이다. 애써서 자식을 길러놓았는데 행여 엉뚱한 길로 갈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바른 경제교육을 시키기 위해 노력중이다. 벤처회사를 설립하여 10억원대 자산가가 된 구우정보통신 이사장의 자녀 경제교육은 독특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우리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고 한다.

“어째서 이 집이 ‘우리집’이냐? 이 집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집’이다. 이 집 살 때 너희들이 돈을 보탠 것이 있느냐? 없지? 그런데 어떻게 ‘우리집’이 될 수 있느냐? 꼭 명심해라. 이 집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이다.”

“우리집이 아니라 부모님 집”
이렇게 얘기하면 냉정한 사람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는 무척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자녀들을 모질게 대하는 것은 행여 부모에게 의지하는 나약한 아이들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자녀교육의 키워드는 ‘자생력’이다.

사실 이사장은 호남의 명문가 출신이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런 그가 굳이 자녀에게 자생력을 강조하는 이유는 ‘부자병’에 걸린 젊은이들을 간혹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돈과 자식의 돈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늘 강조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주는 용돈의 수준도 또래 아이들보다 약간 낮게 정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유산을 나중에 자녀들에게 물려줄지언정 지금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시킬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 인생은 너희들이 알아서 개척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엄격한 자녀 교육은 부자가 되는 또 하나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출처: 신동아/ 매경 성공클럽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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