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 대장(43·골드윈코리아 이사, 동국대 산악부 OB)은 지난 4월 30일(한국시간 5월 1일) 걸어서 53일 만에 북위 90도에 도달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산악그랜드 슬램이란 쾌거를 달성했다. 그랜드슬램은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거봉 완등.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 3극점 도보탐험 성공을 일컫는 말.

아담과 이브를 비롯,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일을 대한민국의 40대 아저씨인 박 대장이 해냈다. 이상기온으로 점점 빙하가 녹아 어쩌면 그랜드슬램 달성은 그가 최초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있어 그의 쾌거는 더욱 빛난다.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 날카로운 빙탑, 얼음이 갈라지며 드러난 바다, 눈을 뜰 수 없이 강하게 불어대는 칼바람, 한치 앞도 파악할 수 없게 시야를 가리는 안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북극곰, 동상으로 찢어질 듯 에는 손과 발, 식량과 장비 등 100㎏이 넘는 무거운 눈썰매를 끌고 하루도 쉬지 않고 800㎞를 걸어 그는 북위 90도에 태극기를 힘차게 꽂았다. 지도상 거리는 800㎞지만 몇 번씩 미끄러지고 돌아섰던 것을 계산하면 2000㎞는 걸었을 거란다. 상상을 초월한 최악의 조건에서 그는 홍성택·오희준·정찬일, 3명의 대원들과 함께 쾌거를 이뤘고 세계 탐험사를 새로 썼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후 찍은 사진에는 추위에 퉁퉁부은 얼굴에 고드름 달린 수염, 털모자 등 에스키모 영감 같았는데 직접 만나본 이 영웅은 웨이브진 긴 머리에 날렵한(?) 몸매여서 마치 뮤지션 같았다. 북극 원정으로 체중이 13㎏가 빠졌단다.

몇 걸음도 걷기 귀찮아 택시를 타고, 조금만 춥거나 더워도 에어컨이나 히터를 틀고, 손가락으로 리모콘만 까딱대는 귀차니스트들. 항상 ‘어떻게 하면 쉽고 편하게 사나’만 궁리하고 심지어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지니 같은 요정이 나타나 무엇이든 해결해주기만 바라는 게으른 종족들에겐 목숨 걸고 이뤄낸 그의 위대한 업적이 때론 ‘사서 하는 고생’이나 가학적인(?) 고행 같다.

“탐험은 제 존재이유니까요. 때론 울기도 하고 너무 힘들어 욕이 절로 나오지만 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목표를 세워 그걸 이뤄낸다는 쾌감은 말로 설명 못해요.”




6남매 중 장남인 그는 어릴 때 칭찬받은 기억이 없단다. 서울 남산 근처에서 자란 그가 유일하게 칭찬을 받은 것이 “산을 잘타고 나무에 잘 기어오른다”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사주신 ‘김찬삼의 세계일주’란 책은 그의 영혼을 흔들었다. 탐험가가 되고싶다는 생각에 그 책을 몇 번이나 읽었다. 고등학교 때 시청앞을 지나다 동국대 산악부가 히말라야 원정에 성공해 카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보고 산악인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동국대 입학 후 그는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산악인으로 급성장했다. 폐가 터질듯한 고산증, 언제 만년설에 묻힐지도 모르는 눈사태, 체력의 극한까지 가는 탈진의 위험을 모두 극복하고 숱한 산을 올랐고 이젠 걸어서 북극까지 정복했다.
“극한 상황들은 예상을 하고 가기 때문에 두렵지 않아요. 죽음도 별로 겁나지 않아요. 어차피 목숨은 하나뿐이고 죽고사는 건 팔자라고 생각해요. 떨어져 죽을 팔자라면 히말라야에서가 아니라 자기방 침대에서 자다가도 떨어져 죽을 거예요.

가장 무서운 건 나 자신이죠. 나를 이기는 게 제일 힘들어요. 약해지려는 자신과 타협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에요. 이번에도 30일 남겨놓고 식량과 연료를 절반이나 버렸어요. 그러니 살려면 빨리빨리 갈 수밖에 없죠. 그동안의 모든 실패는 내가 나와 조금씩 타협하며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었어요. 이번 그랜드슬램 달성은 내가 나를 이겨냈고 대원들이 날 믿고 따르며 모두 함께 이뤄낸 일이라 더욱 기쁘고 자랑스러워요.”

역경지수가 높아야 성공한다

그 어느때보다 힘든 요즘이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유난히 나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루에도 몇 명씩 성적이 떨어졌다고, 카드 빚을 못 갚았다고, 성형수술이 잘못 되었다고, 자식에게 폐가 되기 싫다고 초등학생부터 80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살을 한다. 죽지는 않아도 가족과 사회를 원망하며 이 세상을 지옥으로 여기는 이들. 또 혹시라도 도전에 실패해 겪을 좌절과 고통을 두려워하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박 대장이라고 성공의 달콤함만 맛보진 않았다. 숱한 실패를 경험했고 바로 눈앞에서 7명의 대원이 죽어가는 아픔을 겪었다. 당장 몇 초 후도 알 수 없는 변덕스러운 기후, 보급되지 않는 식량, 갑자기 떨어지는 체력이나 사고 등이 일상인 탐험의 세계에서 그는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했다.

“실패는 엄청난 공부고 최고의 스승이에요. 단 최선을 다한 실패여야죠. 어설픈 실패는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거든요. 성공은 실패나 역경을 얼마나 잘 극복했냐에 달려 있고 그래야 더 큰 성취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폴 스톨츠는 ‘장애물을 기회로 전환시켜라’란 책에서 이제 IQ나 EQ보다 AQ(Adversity Quotient), 즉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역경지수란 수많은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냉철한 현실인식과 합리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끝까지 도전해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 스톨츠 박사는 사람들을 역경에 포기하는 ‘퀴터’(Quitter), 대안 없이 안주하는 캠퍼(Camper), 그리고 모든 능력과 지혜로 기어코 시련을 정복하는 클라이머(Climber)로 분류했다. 클라이머는 자신만 역경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격려하고 북돋우면서 함께 정복하는 이들로 박영석 대장은 가장 대표적인 클라이머다.

26세 때부터 ‘대장’을 맡아 대원들을 이끌어온 그는 자기 손에 목숨을 맡겨놓은 대원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항상 최선을 다했다. 위기에도 당황치 않고 정확한 상황판단과 역할 지시는 물론이고, 북극까지 맥주와 과일을 꽁꽁 싸서 가져가 대원들의 생일축하 파티를 열어주는 자상함, 무엇보다 자기를 버려야 대장 자격이 있단다.
박 대장은 세계인들에게 “봐라, 한국인이 이렇게 위대하고 저력 있다”고 알렸다는 자부심도 크지만 정부에 대한 섭섭함도 감추지 않았다. 등반이나 탐험 역시 국력에 좌우되는데 산악인에 대한 지원이나 관심이 소홀하다는 것.

“외국에 가서 제 신분을 밝히면 금방 ‘Sir’라는 존칭을 써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힐라리 경도 양치기였지만 작위도 받고 영웅으로 존경받죠. 저야 복이 많아서 제가 근무하는 회사며 후원자들이 있지만 다른 산악인들은 그저 할 일 없어 산에 오르는 사람 취급받잖아요. 2년 전에 실패한 이유는 날씨 때문에 캐나다 측의 식량지원을 못받아서였는데 며칠 후 영국팀에는 전달을 해줬더라고요. 이번에 가서 물어보니 영국 정부에서 신경을 쓰고 지원을 해줬다더군요. 노벨상 타는 분야에만 지원할 게 아니죠.

IMF 이후에 주목받긴 했죠. 고통을 겪는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한다며 저같은 산악인들이 여기저기 많이 불려다니며 강의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우리만 열심히 하면 뭐합니까.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연말이면 잘사는 동네의 아스팔트나 보도 블록은 다시 깐다고 뒤집잖아요. 그렇게 남은 돈 다 써야 내년 예산이 늘어난다면서요. 그 돈을 청소년가장, 독거노인들에게 쓰면 얼마나 좋아요. 수십 년 동안 반복되는 일인데 시민단체들은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어요.”




역경지수만 높은 게 아니라 표현지수도 높은 박영석 대장. 그에게 그랜드슬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아직도 못 가본 곳, 탐험하지 않은 곳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가슴이 뛴다. 그러면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고 겸손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대자연을 상대로 하는 일이라 욕심을 부리면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항상 죽음과 맞서야 하는 그에게 혹시 사주나 점은 봤냐고 물었다.

“한 번도 안 봤어요. 점은 나약하고 자신 없는 사람, 그리고 나쁜 일을 많이 하고 사고친 이들이나 보는 거죠. 전 늘 ‘인명은 재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자기최면을 거니까 앞일도 걱정 안 해요.”

얼마 전 본 점괘가 좋아 마냥 흐뭇해 있다가 금방 반성했다. 박영석 대장이 제트기가 아니라 한발한발 걸어 북극점에 도달했듯 기사 하나라도 착실히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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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이 답" 이라는 책을 사서 읽어 보았습니다.
일에 대해서 세이노선생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공통된 부분들이 참 많더군요.
그래서 공통된 부분들을 한번 모아 보았습니다.  이외에도 많을 것입니다.
어느 경지에 오른 분들께서는 진리는 하나 라는것이 몸에 베이시나 봅니다. 

 

 

 

 

 왜 사람들은 내가 이미 실제로 경험한 것을 말해 주는데도 믿지를 못할까?
정말 이러한 의심은 미래를 미리 계산하여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가난한 자들의 공통적 특성이다.
승자는 먼저 달리기 시작하면서 계산을 하지만 패자는 달리기도 전에 계산부터 먼저 하느라 바쁘다
(유대경전에 나오는 말인데 정말 진리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모처럼 얻은 일이 자신이 원래부터 싶었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쉽게 그만두는 것이다.


부모나 선생으로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격려를 받지만

그러한 일은 그리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때론 그런 격려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세상에 나에게 맞는 천직이 처음부터
눈앞에 기적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거의가 없다.

 

천직이나 적성은 눈앞의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 전력투구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찾는 것이다.



 


즉 사전(事: 일 사 前: 앞 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사후(事: 일 사 後: 뒤 후)적인 것이다.

 

 (진실은 이것이다. 백만장자들은 "어떻게 하다 보니까 하게 된 일"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그 일을 사랑하고 즐김으로써 "능력과 적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머리 속에서 꿈꾸고 원하여 온 일”을 그 일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도 없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동일시하거나 “자기가 능력을 갖고 있는 일”,“ 자기 적성에 맞는 일”,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믿는다. 그러나 능력이니 적성이니 하는 것들은 관련 분야의 지식을 갖춘 뒤 실제로 일을 경험하여 보기 전 까지는 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생리용품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목모 시멘트판이라고

불리는 흡음효과가 큰 건축자재를 만들고 있었다.

 

작은 업계였기에 최고의 브랜드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건축 자재와 같은 중간 상품으로는 자신만의 회사 브랜드를

갖는 것이 어려웠고, 또 가격을 재량껏 정하지 못하는 답답함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건축 자재는 내가 추구하는 상품이 아니라는 초조함에

항상 쫓기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목모시멘트판 회사에 내 인생의 전부를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전 인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어떤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며

언제나 엉덩이에 불이 붙은 기분으로 무언가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건축 자재업을 하는 동안은 열정을 다해 일했다.

종업원과 하나가 되어 50킬로그램의 시멘트 부대를 1톤 트럭으로 운반하기도 했다.

손톱 끝과 손가락 사이에는  늘 시멘트때가 끼어 있었고, 또 콧구멍과 귓구멍까지

톱밥이 들어갔다.

 

 (나는 돈을 꽤 모은 뒤에도 새로운 사업을 하게 되면 작업복을 입고 밑바닥 일을 하곤 했다.
그래야 일 전체를 구석구석 빈틈 없이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허드레 일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당신이, 허드레 일은 당신보다 못난 사람이 해야 하는 것으로 믿는 당신이, 사업이나 장사를 하겠다고? 돈을 벌고 싶다고? 꿈 깨라. )


 

그렇게 필사적으로 일하는 사이에 생리용품이라는 천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즉 나는 천직을 지금 내가 있는 곳 보다 더 나은 곳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시멘트 현장에서 땀범벅이 되거나
먼지 투성이가 될 정도로 죽기 살기로 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찾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직이라는 것은 "사후적으로 만나게 되는 일" 이라고 할 수 있다.

걷고 있는 전방에 이미 있는 길이 아니라,

 

 

걸으면서 돌아봤을 때, "아,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었구나"

사후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천직이고 적성이라고 생각한다.


걷기 전에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걷고 있는 사이에 자연히 다가서는 것이다.
(사업에 대한 안목이 아니라 일 잘하는 법 부터 배워야 함.
사업 안목은 하루 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님.
일을 잘하려면 세심하여야 함.)

 

그래서 젊은이들이 일하기 전부터 자신에게 맞는 일이 없다고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또 아무리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봐도 찾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자기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돈이 되는 일이건 아니건 반드시 해내고 만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면 좋아하는 것을 일로 삼기보다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편이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궤변 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자신의 적성에 막는

직업을 고르기 보다 일에 맞게 적성을 키워가는 편이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얻는 것이 많다.

 

내 경험을 비추어 보아도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 그저 좋아하는 것 이상의 것은 손에 넣기 힘들었다.
좋아하는 것을 즐김으로써 스트레스는 풀리지만
나의 능력이 커지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싫어하는 일을 참고 계속하다 보면
더욱 큰 대가를 얻게 되고 인생의 폭도 넓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하는 편이 후회하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은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불편함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불편함을 편리함으로 바꾸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노력이란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기 싫어하는 것을 더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노력이란 싫어하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은 노력이 아니라 취미 생활일 뿐이다.

노력하라. 기회는 모두에게 제공되지만,

그 보상은 당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차등적으로 이뤄짐을 명심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천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일이 자신에게 맞는지 어떤지는

일단 제쳐두고, 좋다 싫다는 말 없이 지금 있는 그 장소에서 해야 할 일에 전력투구해 보라

 

3시간도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되면 기를 쓰고 어떻게든 3일을 견뎌보라.

3일 견디다가 3주를 버터보라.

3주 버텄다면 3개월

3개월이면 3년

 

그렇게 하루하루의 일 속에서 괴로움이나 무력함을 느끼고

또 넘기 힘든 높은 벽에 부딪히는 사이에 점차 일의 재미와 즐거움을 알게 되어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알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100퍼센트 맞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단 일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지 말고

일에 자신을 맞추고자 노력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후에 비로소 자신에게 맞는 천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나의 천직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또 다른 새로운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도 아깝지 않을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바로

내일 만날지도 모른다.

 

일흔을 넘긴 지금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일하는 것 그 자체는 영원한 자기 발견의 과정이며

일을 하는 것은 일생동안 자신의 가능성을 갱신해 나가는 것이다.

 

 

일을 시켜서 한다는 생각을 없애는 것이 업무를 좋아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업무를 좋아하게 되면 그냥 내버려두어도 힘이 생기며

성과도 오른다.

 (나는 10가지 이상의 많은 분야에서 일을 하였다. 그 일들 중에서 내가 사전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일은 단 하나, 음향기기 분야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어쩌다 보니 발을 내 밀게 된 일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에 발을 내 밀던 간에 나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그 분야에서 귀신이 되고자 노력을 하였다는 점이다.

우선 무슨 일에 뛰어 들던지 간에 모든 관련 지식을 책을 통해 공부하는 것은 언제나 필수였다. 나는 그런 책들을 구입하는데 돈을 아낀 적이 없다. 하지만 낮에는 일 때문에 책을 볼 시간이 없으므로 자연히 저녁시간과 휴일을 이용하여야 했다. 시간을 아껴야 했기에 출퇴근 거리는 무조건 짧아야 하였고 차 타는 시간도 아껴야 하였기에 기사를 일찍부터 두었다.)


 

결국 일을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재능인 것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일을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그 일을 좋아하라

그 일에서 일등이 되고 싶으면 그 일을 누구보다도 제일 좋아하라.
(노르웨이에서 라면왕이 된 사람은 주방에서 감자 하나 깎는 것도 머리를 짜내어 했다는데
아마도 그런 독자들은 감자 깎는 것에서는 미래가 안보여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일을 대할땐 연애 감정을 가지고 대하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일이 고되어서 도저히 좋아할 수 없다거나

아니면 재미있는 일이라면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격상의 문제나 기술적 분야가 아닌 이상 어느 한 분야의 일에서 새는 바가지는
다른 분야의 일터에서도 새기 마련이며
, 어느 한 분야에서 귀신이 되는 사람은
다른 일을 해도 중복되는 부분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빠른 시간 안에 귀신이 되게 된다.


 

왜 사람들은 일을 재미나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완전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런 생각은 지극히 유치하고 미성숙한 직업관이다.


 (세상은 그런 조루증 환자들로 넘쳐 납니다.
거기에 기회가 있다는 것을 왜 모른단말입니까. 쯧쯧... )

 

그것은 일이 가진 진정한 즐거움과 괴로움을 아직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일의 즐거움과 괴로움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으로

 

그 즐거움은 괴로움 속에 섞여 있다가 서서히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 눈을 딱 감고서 눈앞에 닥친 일에 죽을둥 살둥 몰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일에 자신을 내던지면 점차 괴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사람이 평생에 걸쳐 일하는 것은 생활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노동을 하는 가운데 맛볼 수 있는 " 쓴맛 속의 단맛"을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많은 부자들은 일하는 것이 취미라고 말한다. 재미있게 즐긴다는 뜻이다. 토마스 J. 스탠리는 '백만장자 마인드'에서 미국의 백만장자 733명을 표본 조사하여 얻은 자료들을 보여주는데 미국의 백만장자들 중 86%는 "나의 성공은 내 일과 직업을 사랑한 결과이다"라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투자를 잘해야 부자가 된다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 일이 우선이고 투자는 나중이다, 이 바보들아.) 그리고 81%는 "나의 일은 내 능력과 적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한다.)

 

괴롭기만 하고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직 미성숙한 상태인 것을 의미한다.

좋아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괴롭다고 불평만하는 것은 게으름이 아닐까? 

 

오해하지 말라.“한 우물만을 계속 파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애당초부터 가까이 가서는 안될 우물도 있다("이런 일은 하지 말아라" 항목을 참조하라). 하지만 처음부터 가까이 가서는 안될 우물이 아니라면 어느 우물이건 그 우물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즉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엿 같이 생각되어도 그 구조체와 흐름을 완전히 파악하여야 하며 거기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스폰지처럼 흡수해 나가야 한다.

>>직원이 10명 이하인 아주 소규모의 제조업체

'학교는 효도하는 마음으로 다니고,부자가 되고 싶다면 장사하는법
과 일잘하는 법에대한 책들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며,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다면 직원이 10명 이하인 아주 소규모의 제조업체에
들어 가는 것이 현명합니다.'라는 짧은 글의 답변이었습니다.
여기서 아주소규모의 업체는 일을 전체적으로 배울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라봅니다. 마치 히딩크감독이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벤치나 지키며 세월보내는 유명팀이 아니라 팀이 좀 떨어지더라도
자주출전할 수 있는 팀을 골라 입단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볼수
있겠네요^^
( 어느 회원분의 글입니다.)

자. 이제 몇 시간을 일하고 얼마를 받는지는 잊어버려라. 일의 질적인 결과에만 관심을 두어라. 몇 년 후에 받게 될 대우에 걸 맞는 일 솜씨를 지금 먼저 보여주어라. 부자가 아니라면 가진 것은 몸과 시간 밖에 더 있겠는가. 그것들을 바쳐 일의 질을 높여라.

그렇지만 직장생활을 하면 부자가 되지 못한다고? 아니다. "직장에서 일을 잘하지 못하면 직장 밖으로 나가도 부자가 되지 못한다"고 해야 한다. 일을 못하면 직장 밖으로 나가도 절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직장생활을 잘하여야 부자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직장생활 자체가 아니라 일이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직장을 그만두고 사회로 나와도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게 되므로 대가를 더 받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투여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대가가 충분치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기다려라. 곧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찾을 것이며 당신의 몸값은 저절로 높아지게 되어있다. 그 몸값이 부자가 될 수 있는 투자의 종자돈이 된다. 동료들의 야유와 시기가 부담스러워지기도 할 것이다. 콩쥐를 시기하는 팥쥐는 언제나 있는 법이므로 철저하게 무시하라. 적어도 5년 후에는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사항; 1.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여도 대가를 더 받기 힘든 일들이 있음을 명심하라. 
               2. 일하는 능력 보다는 아부가 더 우선인 집단들도 많다
                  ( 규모가 크고 안정적으로 보이고 좋게 보이는 곳들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부자들은 예술가들처럼 LIVING에 속하는 일을 자신의 LIFE로 생각하며 살아 온 사람들이다. 일은 일상에서 그들이 최우선으로 삼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일하는 것을 그 어떤 가치 보다 우선시하며 즐겨왔다. 하지만 일 자체를 평생의 의무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직원들에게 “우리가 평생 일만 하여야 하는 일개미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강조하곤 했다. 천국이나 유토피아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은 못 들었다. 인간이 바라는 이상향은 기본적으로 무노동의 세계이다. 평생을 일만 하다가 일벌레로 죽어야 하는 운명이라면 나는 거부하겠다(죽을 때, 일을 더하고 싶다고 말하며 죽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일,일,일” 하며 살았느냐고? 일을 효율적으로 남들 보다 더 잘 하게 되면 세상에서 받는 대가가 커진다. 그 받는 대가가 쌓여 부자가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일에서 벗어나,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된다. 즉 LIVING 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LIFE 가 가능하게 된다. 반대로, 젊어서 LIFE에 투자를 많이 하게 되면 중년 이후에는 LIVING 때문에 쩔쩔 매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는 우선은 LIVING 에 최선을 다하면서 30대가 끝나기 전에 LIVING 영역에서 뭔가 이룩해 놓고자 하였다. 즉 철저하게 우선 순위를 LIVING 에 두었다. LIVING 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바빠진다. 정신없이 바쁘다 보면 문득 회의감이 찾아 올 것이다. LIFE와의 균형 문제로 인하여 갈등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이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면 부자가 되기는 어렵다.

 

아마도 누구나 “돈도 많다”는 말을 듣고자 할 것이다. 내가 조언할 수 있는 것은 , 부자가 되어가는 단계에서 만큼은 LIVING과 LIFE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완벽하게 잡으려고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일단은 LIVING 에 신경을 쓰고 시간을 투자하라(이것을 나는 일용할 양식부터 먼저 구하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야 뿌리가 깊고 굵게 박히며 비바람이 쳐도 열매가 맺는다. 자신이 원하는 LIFE 를 갖고자 한다면 우선은 LIVING 에 충실하면서 돈부터 모으라는 말이다.

그러나 부자가 되어가는 단계에서 LIFE 를 모조리 무시하지는 말아라. 최소한도는 해라. 기혼자라면 이를테면 배우자의 생일, 처음 만난 날, 결혼 기념일 만큼은 카드도 준비하고 꽃도 사고 촛불도 켜라.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애들이 아니라면 멀리 해라. 그래서 친구들이 핀잔을 주고 따돌림을 한다고 해서 속상해 하지 말아라. 부자가 되어가는 과정은 외로움을 이겨내는 과정이기도 함을 결코 잊지 마라. 어차피 당신 친구들 대다수는 평생 돈 걱정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라.

하지만 아무리 돈을 모으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도 비가 오면 때로는 비도 맞아 보고 맨발로 잔디를 밟기도 하여라.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삶도 종종 살펴 보아라. 자신이 왜 부자가 되려는지를 정확히 되새기는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것을 하라 그리고 그 대가를 지불하라 - 에스파냐 격언 -

 

 
 우리는 왜 절망하는 것일까? 미래의 상황을 현재의 처지에 비추어 미리 계산하기 때문이다. 지금 일류대를 못 다닌다고 해서10년 후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금의 빚을 5년 후에도 못갚을 것이라고, 지금의 봉급으로는 평생 남들처럼 못 살 것이라고 미리 계산하여 체념한다. 지금 가난하므로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라고 미리 계산기를 두들겨 대면서 미래의 삶에 절망적인 번호를 매기고 만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러저러하므로 5년후, 10년후에도 이러저러할 것이기에 희망이 없다고? 너무 계산이 빠른 것 아닌가? 점쟁이도 자기 미래는 모르는데 어떻게 감히 신의 영역인 미래를 스스로 투시하고 미리 계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부자가 되려면 미래 방정식에 지금의 처지를 대입하면 절대,절대,절대,절대 안된다. 결코 그런 짓을 하지 말라. 트레인스포팅 게임처럼 우리에게 달려오는 삶의 번호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논두렁에서 군사를 일으켜 일약 군왕이 된 자가 있는가 하면 시장 거리에서 춤추던 무희가 하루 아침에 황후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지 않은가. Don’t cry for me Argentina 의 주인공 에바 페론 역시 술집 종업원에서 아르젠티나 대통령의 영부인이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나 절망적이었던 내가 부자로 살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흔히 이야기 하듯 사람 팔자 시간 문제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미리 계산하여 절망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그저 이 순간부터 당신의 미래 언젠가에 무슨 일인가가 새로 일어날 수 있도록 책을 읽고 지식을 축적하라.

절대로 “내가 이걸 배워서 어디다 써먹겠어? 내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하는 따위의 생각은 추호도 갖지 말라. 그것 역시 미래 방정식에 현재의 시간을 대입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며, 패자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단 조건이 있다. 뭘 배우던지 간에, 뭘 하던지 간에 미친 듯이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하여라. 그렇게 할 때 미래는 그 암흑의 빗장을 서서히 열어주기 시작할 것이며 조만간 그 빗장 너머에서 비쳐지는 강렬한 태양빛 아래에서 당신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이미 그렇게 몇 년째 살아 왔음에도 변화가 없다면 당신은 그저 삶의 번호를 잘못 찍는 바람에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다. 그 잘못된 길에서 절망하지 말고 빨리 깜박이를 키고 길을 바꾸어라. 내 말을 믿어라. 거기서 새 삶이 무섭도록 빠르게 달려온다.


 왜 사람들은 내가 이미 실제로 경험한 것을 말해 주는데도 믿지를 못할까?
정말 이러한 의심은 미래를 미리 계산하여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가난한 자들의 공통적 특성이다.
승자는 먼저 달리기 시작하면서 계산을 하지만 패자는 달리기도 전에 계산부터 먼저 하느라 바쁘다
(유대경전에 나오는 말인데 정말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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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 중 한 분은 깜짝놀랄 스케치 솜씨를 지니고 계신다.

어찌나 똑같이 그리시는지 인물들이 금방이라도 내게 말을 걸어 올 것만 같다.

미술을 전공하신 것도 아니고 그냥 첨엔 재미삼아 그리셨다고 하는데

군에 계실 때 제대하는 장병들의 모습을 한 장씩 그려주셨고 지금은 경비하시는 틈틈이

취미생활로 즐기신단다.

혼자 보기 아까운 솜씨라 이렇게 올려 본다.

출처 : Tong - 내사랑윤대위님님의 강원도이야기통

http://tong.nate.com/sunghansua/39603068



스케치하고 계시는 아저씨.

4B연필과 HB연필 그리고 지우개, 이렇게 세가지가 전부다.



출처 : Tong - 내사랑윤대위님님의 강원도이야기통



출처 : Tong - 내사랑윤대위님님의 강원도이야기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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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쩝니다 특히 윤은혜 강수연 안성기 권상우 이요원 오드리 햅번 ㅠㅠ




출처 : 비공개 카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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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의 동갑 나이에 우리는 맞벌이 부부로 연애 결혼을 했다.내 나이 56 이니까
지금부터 30년 전이다.

우리집은 농촌에서 몇마지기의 논농사를 지으며 6남매가 얽혀 살은지라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집 뿐만 아니라 그 때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리고개를 넘기기 힘든 때였으니까 그래도 2년제 대학이라도 나온 나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공장을 찾아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부러운 존재이기는 했다.
처갓집도 교육자 집안이라 원래 재산이 없었던데다 장모님이 사업(라디오 소매점)에 실패하자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형편이였다.

우리는 양가 부모님에게 전혀 도움을 받을 수가 없는 상황, 아니 내가23살 때
취업을 했으니까 3년 동안 가계를 맡아 오다가 분가하게 되니 자기들 살 것을 걱정해야만 했다. 아내 집도 마찬가지고......

내가 직장 선배에게 24만원(쌀 한가마에 7천원 정도 했음)을 월2%(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고리지만) 빚을 얻어 12만원씩 아내와 나누어 예물이랑 혼수를 장만했다.

분가는 다행히 시골 농촌이라 공짜로 문간방에서 살게 해주었는데 얼마나 작은 방이었는지 아내가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마련한 농(옷장)이 들어가지 못해 주인집 헛간에 넣어서 비닐로 싸두고는 그렇게 울었다.

우리는 10년 10억모으기가 아니라 30년 10억 모으기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 때의 화폐가치로는 참으로 큰 돈이다.
우선 아내의 결혼 반지만 남겨두고 돈이 되는 패물들은 모두 처분하기로 했다. 내 반지, 시계, 팔찌 등을 모두 팔아서 몇푼 안되지만 빚을 갚고, 버스비도 아끼는 피나는 내핍생활을 했다.
소도 키우고, 꿀벌도 치고, 퇴근 후에는 알바도 하고.......

고생하면서 노력했던, 그리고 재테크에서의 성공과 실패 등의 자세한 사연은 다음 기회가 있으리라. 다만 부동산 투자의 성공이 꿈을 이루게 했다는 것만 밝혀둔다.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아들은 치과의사로 내년이면 개업을 하거나 교수로, 딸은 교사로 직업을 갖게 되어 아빠 노릇도 그런대로 끝나간다.
꿈을 이루었으니 마냥 좋은 것 같은데 그렇지만은 않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나누어 본다

1. 얻은 것

넓은 공간의 집에서 살 수 있어 참 좋다. 부모님과 6남매 8식구가 한방 한 이불속에서 자고 생활하면서 내 방과 내 책상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차가 있어 좋다. 우리 4식구 모두가 차를 갖고 있어서 젊었을 때 부러웠던 자가용을 마이카까지 갖게 되었다.

내 자식들이 실력이 되는데 까지는 돈 걱정없이 보낼 수 있어서 좋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를 못가서 얼마나 울었는가 말이다.

여행, 아내가 갖고 싶은 가구와 옷, 가전제품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줄 수 있어 남편으로서 떳떳하다.

고등학교 때 군침을 흘리며 먹고 앂어 했던 찐빵(팥빵)을 싫껏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러 "올드 보이" "


내일 나머지 쓸께요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둘째 글


 


 


번호:50369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805 날짜:2004/06/17 00:09  
 

 
..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 돌이켜 보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었다.
이 카페 회원들에게 미리 살아 본 인생 선배로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진솔하게 더듬거리며 독수리 타법으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1. 얻은 것

넓은 공간의 집에서 살 수 있어 참 좋다. 부모님과 6남매 8식구가 한방 한 이불속에서 자고 생활하면서 내 방과 내 책상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차가 있어 좋다. 우리 4식구 모두가 차를 갖고 있어서 젊었을 때 부러웠던 자가용을 마이카까지 갖게 되었다.

내 자식들이 실력이 되는데 까지는 돈 걱정없이 보낼 수 있어서 좋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를 못가서 얼마나 울었는가 말이다.

여행, 아내가 갖고 싶은 가구와 옷, 가전제품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줄 수 있어 남편으로서 떳떳하다.

고등학교 때 군침을 흘리며 먹고 앂어 했던 찐빵(팥빵)을 싫껏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러 "올드 보이" "살인의 추억""태극기 휘날리며""트로이"등의 영화를 아내와 함께 심야프로 시간대에 팝콘도 먹으면서 보는 즐거움도 있다.
영화이야기가 나왔으니 에피소드 하나 적고 가겠다.

2~3년 전 쯤 아내와 몇 십년만에 처음으로 "살인의 추억"을 보기 위해 극장엘 갔다.
딸이 인터넷으로 예매를 해 주어서 딸이 메모해준 용지를 가지고 긴 줄 끝에 제법
인내를 가지고 젊은 연인들처럼 팝콘을 먹으며 우리 차례를 기다렸다. 족히 30분은
기다렸을 것이다. 우리차례가 되어 메모용지를 보이니 저쪽 줄에 서서 입장권으로
바꿔서 이쪽 줄로 서란다.
별 수 없이 또 그 줄 끝에 서서 입장권을 끊어야 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내 아내는 전부 아들 딸 같은 애 들만 있는데 창피하다며
벽쪽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애들이 힐긋 힐긋 쳐다보는 것이 너무 나이 든 사람이여서 그랬는지 불륜처럼
보여서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에이 이런 말은 잃은 것에 적어야 하는 건데.....

자판기의 커피만을 고집하지 않고 나는 8천원 짜리 "카프치노"를, 아내는 만원짜리
"도마도 쥬스"를 마시며 강가의 야경을 보면서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이 좋다.

주말에는 이삼십만원의 경비를 마다 않고, 그 동안 계획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방콕"을 안쓰러하며 골프가방을 싣고 푸른 잔듸를 그리며 떠나는 경쾌한 자동차
소리가 좋다.
돌아오는 길에 "백골당을 면했느니......
버디를 잡았느니.......이런 대화도 즐겁다.
아들 놈과 내년에 내기하자는 약속도 즐겁다,

휴가철이면 제주도로 갈까 설악산으로 갈까 콘도회원권이 있어 숙박 걱정이 없어
좋다.

#이 글을 치는데 2시간이 소요되었네요 잠이 오니 내일 쓸께요
글을 정리하지 못하고 등록하니 미안해요 양해 바랍니다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셋째 글


 


 


번호:50446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746 날짜:2004/06/17 12:50  
 

 
..

어떤 30대 중반의 주부께서 멜 주셨다. 현대인은 존경할 만한 위인이 없다고......
특히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보면 더욱그런다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존경이나 비난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축하를 못하면 이해라도 해 주었으면 한다. "존경""비난" 등의 관점에서 이 글을 읽는다면 "닫기"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유스러워지면서(지금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만족하기로 했다) 느낀 것들을 진솔하게 쓰고 싶을 뿐이다. 사실 나는 불우이웃돕기를 안한다. 의무적으로 직장에서 성금을 갹출할 때도 될 수 있으면 적게 낼려고 한다.
우리 자식들에게도 재산은 물려주지 않기로 했고, 다행히 우리애들이 기꺼히 동의해
주었다.
나는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고자 한다. 내가 죽은 뒤 남은 재산은 없거나 많지 않을 것이다. 구두 한컬레라도 남으면 두 남매가 한짝씩 똑같이 나누어 가지도록했다.
재산 모으기 과정에서 힘들었던 "만족의 지연" "욕구의 자제" "갈등의 스트레스"
"혹독한 내핍생활" 등이 나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일까?
이 카페 회원들이 대부분 젊어, 돈 모으기에 관심이 많고 나 같은 나이의 회원은 많지 않은 것 같아서 ........
오늘도 "얻은 것"에 대하여 쓰고자 한다. 그 것이 "잃은 것"을 말하는 것보다 좀 더 즐거운 일이니까


1.얻은 것-두번째

술집에 가면 여자들이 내 옆에 앉을려고 다투고 나는 그 순간 왕이된다.
날씬하고 예쁜 젊은 여자들이 태초에 인간으로 돌아가 나를 즐겁게 해 준다.
이런 세상도 있었구마이.....!11
우리나라 봉급쟁이 평균 한달분의 돈을 지불하면서도 즐겁다
(비난하지 말라. 나는 결코 졸부가 아니다. 30년 전 부터 준비했던 일이니까.....
31살 때 서울 친구가 데려가서 가보고 내 돈으로 술마신 것은 최근 다섯 손 가락 안이다. 그 때는 여자들이 내 옆에 안앉을려고 해서 즐겁지도 않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들켜서 몇 달 동안 혼났다. 당신은 이렇려고 그 고생했냐고......)


친구가 많아지고 각종 모임에서 회장으로 추천되는 일이 많다. 모임이라야 계모임 또는 열명 안팍의 친목모임이지만......
아뭏든 모임이 즐겁고 차쯤 대화의 축이 나에게 쏠리는 것이 좋다. 약간의 찬조금
을 내야 하고 행사 때는 타올이라도 돌려야 하지만 받고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듣는 것이 기분 좋다.


재래시장을 가지 않고 백화점 맨 위층으로 갈 수 있어 좋다. 명품 코너에서 이것 저것 구경만 해도 판매원의 태도가 공손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명품을 가지지 못했다. 영국제 버버리 목도리가 명품인가? 그것은 하나 가지고 있다.


하루 스케줄을 나 위주로 짤 수 있는 것이 좋다. 옛날에는 남의 스케줄에 꿰 맞추어야 했는데......


날씨의 변화에 신경을 안써서 좋다. 더우면 에어컨을, 추우면 스팁을 전기세 걱정없이 쓸수 있어 좋다.

아내의 생일에 노란 장미 한송이가 아니고 56송이를 생일 축하쏭이 나오는 카드와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좋다. 그 동안에는 아끼느라 늘 한송이로 떼웠다.


혼자 연립주택에서 89세인 어머니께 용돈을 형제들 중 제일 많이 드릴 수 있어서
좋다. 그 동안 부모님께 불효한다고 형제들로 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참 가슴이 아팠다.나 보다 내 아내가 더 챙긴다. 나 몰래 용돈을 드리고서 둘이 짝짝꿍이 되어
내 흉을 보며 다정하게 외식을 하는 것을 보면 참 좋다.

연말에 계산해 보면 재산이 줄지 안해서 좋다. 그렇게 절약해도 모아진 것은
별로였는데.....

이제 "얻은 것"은 이것으로 마칠까 한다. 아마 우리 카페회원님들이 꿈꾸고 있는
미래의 일부분일련지도 모른다.

"잃은 것"은 몇일 후가 될 것 같다. 주말이 가까워져 시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넷째 글


 


 


번호:50710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675 날짜:2004/06/19 05:58  
 

 
..

나에게 오는 멜 중에서 사업하는 사람이냐?
10억으로 그렇게 살 수 있냐? 등의 질문이 많이 온다. "잃은 것"을 쓰기전에 그에 대한 대답을 먼저해야 겠다.

우리는 동갑으로 26살 때 사내 커플로 결혼한 맞벌이부부였다. 월급이 3만원(쌀 1가마에 7천원 정도) 이였고 아내는 34살 때 퇴직(8년간 맞벌이 부부였음)을 했다.
나는 지금도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10억은 사실 시작에 불과하다.
생각해 보라. 10억의 목표가 이루어졌으니 이제 좀 쓰고 살자 하고 써 보자 그 때부터 재산은 줄어들게 되고, 쓰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우리가 그 고생하면서 이룬 재산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특히 고생하면서 번 돈을 쓰는 것은 무지 아깝다.
왜 내가 불우이웃돕기를 안하는지 아는가? 그들도 나 만큼 고생하면서 노력했다면 그리 되지는 안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10억은 주택값, 자동차, 콘도회원권, 골프회원권 등을 제외한 금액이여야 한다.
주택의 값이 올랐다고 팔고 텐트치고 살건가?
골프회원권이 올랐다고 팔고 골프안칠건가?

또한 10억이 제 역할을 해 줘야 한다.
부동산으로 있으면 거기에서 임대소득이 있거나 그것을 이용한 사업소득이 있어야 한다.

현금이 있으면 그것도 이용해서 이익이 나오도록 해야한다. 주식이든, 펀드든.....
다시 말하면 재테크 능력을 가져라는 이야기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10년 후에는 대부분이 복권에 당첨되기 전보다 더 못한 생활(미국의 어느 연구가가 추적하여 연구한 결과임)을 하게 되는지 아는가?

그것은 돈을 버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자영업을 하든, 주식을 하든 망한다. 잘 할 수있다면 그들은 이미 복권에 당첨되지 안했더라도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커다란 집을 살거고, 멋진 자동차를 살거고, 도박을 할거고, 젊고 예쁜 여자를 얻어 쏙 빠져 돈을 물 쓰듯할거고, 위자료 주고 조강지처와 이혼할거고, 젊은 여자에게 돈 빨리고 배신당해서 홧병으로 누어 복권에 당첨된 것을 후회하면서 불행한 여생을 보낼 것이다.

그럼 10억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해줘야 할까?
정기예금 이율인 연 3.5% ?
그 정도의 능력밖에 없다면 10억도 모을 수 없다.
연 6 ~7% 정도의 이윤은 나와야 한다.

또한 직장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관리자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맨날 놀기만 하면 노는 것이 노동이 된다.
열심히 일하고 난 후 휴식은 얼마나 달콤한가?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관철하면서 다른 사람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삶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또 관리자가 되어야 시간으로 부터도 자유로워진다.

10억은 경제로부터의 자유 뿐 아니라, 시간으로 부터의 자유도 의미한다.

또한 건강해야 한다. 나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건강해야 한다.
늘 가족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칭찬해주고 격려해 주고 희망을 줘야한다.

10억 모으기의 완성은 위 조건을 충족하고, 재산이 줄어들지 않으면서 10억의 1%인
매월 1000만원 정도를 가족 3인이하가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10억을 이용한 소득 월 500만원~600만원 + 근로소득 400만원 ~ 500만원)

소득이 많아도 소비자가 많으면 의미가 없다.

우리 가족은 우리부부와 아직 미혼인 2남매 모두 4명이다.
아들은 보건소에서 군복무 중이며 금요일에 왔다가 월요일에 간다. 자기 월급으로 살고 있고 가끔 우리 내외에게 맛있는 외식과 감동주는 선물을 하기도 한다.

딸은 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다시 교육대학 3학년으로
편입하여 그 동안 자기가 모은 돈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
내가 하숙비 달라고 하면 아빠 기쁨조하니까 면해 달란다. 하숙비는 면해 주기로 했다. 우리의 소비자는 우리부부 두사람이 되는 셈이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보내 주신 질문에 대답이 되었는지 모른다.


#독수리 타법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제 글을 읽으시고 솔직한 의견 많이 주셨으면 좋겠어요. 독자들의 생각과 느낌이 궁금하거든요. 리플 많이 올려주셈.....(애교)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다섯째 글


 


 


번호:50847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920


날짜:2004/06/2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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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이 있다.
사람마다 살아오면서 아픈 상처가 있겠지만 특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오직 그 일에만 매달린 사람은 더욱 깊고 아픈 것 같다.
오늘은 비까지 오고 잃은 것을 쓰자니 더욱 우울해진다.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쓸까 한다

2.잃은 것-첫번째 글

*우리 자식들의 키를 잃었다.

요즘애들은 대개 부모보다 키가 크다.
그런데 아들(166센티미터)은 나(171)보다 작고, 딸(157)은 엄마(159)보다 작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면서 빈곤에서 탈출하자고 다짐을 했었다. 그래서 아이도 늦게 낳자고 했는데 임신이 되었다. 아이가 있으면 아내가 직장생활하기가 곤란하니까...
우리는 고민 끝에 유산을 시켰다. 그런데 한달 안에 또 임신이 되었다.
별수 없이 애를 낳았는데 보통아이보다 작았다.

임신중에 결혼 때 진 빚은 갚기 위해서 반찬을 통제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정부 혼합미(매우 가격이 싸고 그 때도 빈곤층에서만 먹었음)에 식물성 반찬 두어가지만 먹고 살아서 영양실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산모의 젖이 부족했다.
그 때 우리둘의 월급을 합하면 6만원이고 그 중 5만원은 빚을 갚거나 저축을 하고
1만원(지금 돈으로 계산해 보면 30마원 정도)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유로 키워야 했다.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와 보니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배가 아프다고 딩굴고 있었다.
젖이 적어 아기가 우니까 막걸리를 사다 먹었단다. ....나 원 참!!!
막걸리 빛깔이 젖 빛이니 그것이 젖으로 되어 나올 줄 알았나?
미역에다 쇠고기를 넣어 먹거나 돼지 족발를 푹 삶아서 먹어야지.....에그
그러나 고기국을 먹이지 못했다.......독한 나
아뭏든 아내는 모유로만 큰애를 길렀다.

맞벌이 부부의 가장 큰 고생은 애 기르기일 것이다. 그 때는 여자들이 직장생활하기가 지금보다 어려웠고 더우기 모유로 길렀다면 그 고생을 이 카페회원은 조금은 이해할런지..........

둘째 딸도 큰애와 별로 다르게 키우지 못했다. 어려웠던 20대였으니까......
그 결과 우리 애들은 키가 작아 결혼이나 제대로 할려나? ^^;;
걱정마라!!!... 나풀레옹, 한신 장군, 박정희 대통령도 키가 작았지 않느냐!!!
곧 예쁜 공주와 왕자가 나타날걸

*하나 뿐인 형님을 잃었다.

내 형제는 4남 2녀로 누나가 위로 둘이고 10살 위인 형님이 한분 계신다.
형님과 형수씨도 맞벌이 부부이고 형수씨는 정년까지 직장생활을 하셨다.
내가 결혼 할 때가 26살이였으니까 형님은 그때 36살, 30대의 왕성한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을 하던 때다.
형님은 기관장이였고 형수씨는 재테크의 귀재다.

형님은 다혈질이고 안하무인이다. 리더십이 강하고..........
학교 다닐 때는 주먹으로 대장이였다. 그 때는 자유당 시절이라 깡패가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형님보다 세살위인 누님도 얻어터지고 울기만 하지 꼼짝을 못한다.....매형이 얼나나 안 좋았을까?....

집안 식구 모아 놓고 2~3시간씩 자기가 집안을 일으켰다는 둥...동생들을 자기가 얼마나 보살피고 있는지 아느냐는 둥...듣는 태도가 딴 생각하면서 듣는다는 둥....
자기만 싫껏 말하고 나서 우리가족은 이런 대화가 있어서 좋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더 괴로운 것은 지난번에 한 이야기를 또 한다는 것이다.
하도 같은 이야기를 하니까 첫머리 말만 들어도 다음의 이야기는 알 수 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등록금을 형수씨가 2년 동안 대 주셨는데 만날 때 마다 그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한번은 200번 까지는 그 이야기를 듣겠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고 대들었다가 되게 혼났다.
나도 형님을 위해서 그 이상으로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은 생각지도 안는다.

더우기 어머니는 항상 형님편에서 형님 형수씨가 아니면 우리가 살 수 있겠느냐...
형님 말을 들어야 한다. 하시면서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셨다.
무기력한 아버지를 어머니는 가장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큰아들을 의지하면서 사셨기 때문에 더욱 형님은 기고만장하였다.

우리 결혼 때도 축의금은 자기 손님이 대부분이다며 식사값만 내고는 자기가 모두 가져갔다. 내 모임에서도 얼마정도는 들어왔는데 그거라도 달라니까 네 처가 손님 것까지 식사비를 주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혼만 났다.

형님은 내가 직장을 갖게 되자 부모님과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두 동생을 나에게 맡기고 4킬로 밖 이웃동네로 분가해 나가고 그 때 부터 내가 가족을 부양하게 되었다.

23살 때 부터 결혼할 때 까지 3년 동안 월급 3만원 중 500원만 용돈으로 쓰고 나머지는 어머니를 모두 드렸다.

그러던 어느 때 부터인가 이러다가는 가난이 대 물림되어 나도 빈곤에서 벗어 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고, 또한 형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를 찾고 싶었다.
그 때 부터 나는 "NO"를 말 하기 시작했다.

힘든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도 우리는 형님 형수씨의 끊임없는 간섭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 부모님 부양문제, 형수씨가 하고 있는 계(몇 사람이 짜고 하는 적금의 일종)에 들어야 하는 문제 등등.......
내 의견을 분명히 말하고 "노"도 자주하게 되자 자연 다툼이 많아지게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 땅을 담보하고 대출을 받겠다는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부터
나는 형님의 미움을 사고 결국은 서로 내왕을 않게 되어 형님을 잃게 되었다.

언젠가는 화해를 해야지......





#"잃은 것"을 쓰다 보니 재미가 없네요 계속할까요?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여섯째 글


 


 


번호:51149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463 날짜:2004/06/25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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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굳이 “잃은 것”을 쓰는 이유는 우리 카페 회원님들이 나와 같은 “무지”“어리석음” “조급함” 등에서 왔던 후회와 회한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란 시에서 80 이 넘은 노인이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쓴 그 시인의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10억은 큰 돈일 수도 있고 작은 돈일 수도 있다. 몇 백억원 몇 천억원을 가진 진짜 부자들은 내 이런 글을 보면 뭐라 할까?
요금을 못내 전기, 상수도가 끊겨 고생하는 사람이 이 글을 보면 그들은 또한 뭐라 할까?
그러나 우리는 맞벌이 부부로서 텐인텐이다.
우리가 남의 도움 없이도 노력하면 모을 수 있는 금액이다.
그것이면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부자다!!

이 글은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한다.

“동물의 왕국”은 내가 좋아하는 프로다.
사자는 얼룩말의 여러 무리 중에서 한 마리만을 선택하여 공격한다. 다른 얼룩말이 옆에 있어도 거들떠 보지 않고 그 놈에게 집중한다. 그래야 성공률이 높으니까......

비난이 두려운가?
사람 좋다는 말을 듣고 싶은가?
후하고 동정심이 많다는 소리들어가며 적당히 즐기면서 살고 싶은가?

그럼 테인텐을 포기하고 그렇게 살라. 부모님의 유산이 많으면, 고소득자면, 가난도 조금 불편할 따름이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나 같이 살 필요는 없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그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이고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일부분은 밝혔지만, 결혼비용을 내 힘으로 했으며, 농촌의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으로 1년 동안 공짜로 살기 위해서 다섯 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당신 미안!

아버지는 무능하셨고(도박.........등등 ....유산 모두 탕진), 딸 하나 보시고 6.25 때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의 유산이고, 우리집의 마지막 보루인, 논 7마지기(1400평)를 형수님이 나 대학 가르치는 비용으로 쌀 84가마에 팔아 갔다.(작은 아버지가 내 양부고 그 논은 내 명의로 되어 있으며 지금 제사는 우리가 지내고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형수님은 가난하고 어린 시동생들이 줄줄이 있는 시집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형수님의 현명한 판단
형님의 사회적 배경과 형수님의 탁월한 재테크로 형님네는 그 당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미혼으로 23살 때 취직을 했으니 형수님 입장에서는 나에게 맡기고 분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니겠는가? (형님은 한 핏줄인데 그렇게 까지 모질게 생각하지는 안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고서도 앞뒤 가리지도 못한 형님은 만났다 하면 우리가 너를 가르쳤다는 말로 순종하도록 했다.................지금 생각하면 형님이 고맙다

우리 텐인텐은 남의 도움을 받지 말라. 복종과 굴욕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도왔다면 그것을 말하지 말라. 자랑했다면 상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아무튼 나는 결혼하여 분가하게 되고 무기력한 부모님과 동생은 힘든 생활을 해야했다.
아버지가 다행히 벌을 치셨는데 그것이 유일한 생계수단이 되었다.

이와 같은 동기에서 나는 경제로부터의 독립을 결심하게 되었다.

에이!! 또 심각해질려고 하네
“제가 굉장히 딱딱하고 이마에 바늘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죠?”
나, 생각보다 아주 부드러운 남잔데 .........이거 정말!

2. 잃은 것 - 두 번째 글

*신혼여행의 추억을 잃었다.

신혼 여행은 우리 고장에서 가까운 내장산에서 1박하고 대전 유성 온천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 없다.
아니, 딱 두 장 있다. 다리 위에서 안고 찍은 사진......
이 사진만 보면 아내는
“이 때가 제일 예뻤는데..... ”
하면서 자꾸 본다.........그나마 두장 뿐인 사진 닳아 없어지겠네!
필름, 현상값을 아끼자고 사진 찍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이것은 무지였어!

내 아내는 나를 너무 잘 안다.
얼굴표정만 보고도 내가 뭘 생각하는지, 원하는 것이 뭔지 금방 알고 내가 말하기 어려워 하는 것을 먼저 말해서 나를 편하게 해준다.
아내의 제의로 우리는 대전 유성가는 것을 생략하고 꽃병을 기념으로 하나 사 가지고 처갓집으로 직행했다. 절약한 돈으로 선풍기 사자고 하면서 .....

우리 집에는 30년이 넘은 골동품이 3가지가 있다.
신혼 여행에서 그 당시 800원 주고 산 꽃병, 내가 아내에게 연애할 때 생일 선물로 준 목도리, 지금도 아내는 겨울이면 꼭 한번씩 착용 하고 외출한다.
촌 스럽기는 하지만 멋있다. 색깔도 하나 변하지 않았다.(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한 변하지 않을 거야! 회사내 총각 7명의 경쟁을 뚫고 하나밖에 없는 여자직원를 겨우 차지했는데.....)
또 하나, 우리 아들 서너 대여섯살 때, 꿰매고 꿰매어 입힌 내복 한벌 .................에그! 맞벌이 하면서 피곤했을 텐데......

“만족의 지연”은 더 큰 만족을 얻기 위한 인내일 것이다.
그 인내의 댓가로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 보다 더 큰걸로 금년 봄에 김천 직지사에 가서 그 것도 왕과 왕비가 되어 6만원이나 주고 2장 찍었다.
신혼여행 때 찍은 것 보다 훨씬 좋다. ..................... 우리는 역시 왕과 왕비가 어울려!!


#가볍게 쓸려고 노력은 했지만 아프네여.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일곱째 글


 


 


번호:51465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302 날짜:2004/06/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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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잃은 것 -세번째 글

*신혼생활, 그 달콤함을 잃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애기가 없는 동안은 공짜로 살기 위해서 빈집을 찾아 다니느라 이사를 다섯 번이나 하다보니 신혼의 달콤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덕분에 이삿짐을 싸는 데는 이골이 났다.

1년 후 곧 바로 아기가 태어나자 우리는 아기에게 매달려야만 했다.
모유로 키워야 했기 때문에 아내는가정부가 회사 근방에서 놀다가 수유할 때가 되면 상사 모르게 살짝 나와서 젖을 주고 들어가야 했다.........모유가 애기에게 좋은 거야!!

아기를 돌봐주는 가정부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5~6세의 어린아이가 대부분이다, 애기가 애기를 보게 된 셈이다. 그런 나이는 대개 사춘기 때고, 또한 산업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때라 화려한 도시로 가는 것이 꿈인지라 구하기가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있다가도 금방 나간다.
미리 예고도 하지 않고 나가는 날 아침에야 말하는 때도 있다.

한번은 수유시간이 되었는데도 오지 안해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전화를 해봐도 받지 않고....... ....... 핸드폰이라도 빨리 만들지
다급하게 집으로 달려 가보니 아이 혼자서 똥과 오줌에 뒤범벅이 되어 울다가 지쳐서 자고 있고 그 얼굴 위로는 파리 떼들이 새까맣게 들어붙어 있었다.
아이보는 애가 친구따라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이다.
아내는 물로 씻기어 업고 다시 직장으로 달려갔다...........얼마나 가슴아팠을 꼬
그 날은 조퇴를 하든, 해야했을 텐데 그 시절에는 직장 근무환경이 지금처럼 썩 좋지 못했다.
그럴 때의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은 말할 수 없다. 우리 텐인텐 회원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번 쯤은 했으리라.
그 때의 아내 심정은 어쨀을까?.............나를 원망했겠지.....잘할께! 여보!

회사에서 해야할 일들, 직장 상사의 무서운 얼굴.........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 때 일을 생각하고 나는 여직원에게 육아시간을 충분히 준다. 직원이 미안해서 사양해도 내가 챙긴다. 아기를 안아보기라도 해라고...... )

직업을 갖는 것이 자기 일을 갖고 싶고, 성취욕과 자아실현을 위한 사치스러운 것이였다면덜 괴로웠을 것이고, 나 또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빚을 갚아야 하는 형편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였다면 참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는 그 때 앞산을 바라보며 높이 솟은 중바위에서 떨어져 자살해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단다.............친정어머니가 이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가슴아파할까?

6킬로미터 쯤 떨어져 농사지으면서 살고 계시는 어머니를 모셔다가 부탁을 드리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농사일로 바쁘셔서(밭 몇평 가지고 뭐하셨는지....) 첫아이를 산부인과도 아닌 집에서 출산했는데도 그 날만 계시고 바삐 집으로 가셔서 너무 원망스러웠는데 그런 부탁을 들어 주실 것 같지도 않아서 그만 두었다...............................그런 시어머니를 뭐가 좋아서 그렇게 잘하는지......당신 천사
철없는 남편, 어린 가정부가 산후조리를 했으니 젖인들 잘 나왔겠는가?........그래서 먹걸리 먹을 생각했나?

이녀석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우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 우리도 밤을 새우고 출근을 해야했으니 아내의 고통은 더 컸을 것이다.
우리의 신혼생활은 이렇게 정신없이 보내고 말았다.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여덟째 글


 


 


번호:51731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964 날짜:2004/06/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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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잃은 것-세번째의 글

*역동적인 청년기, 그 화려함을 잃었다.

내가 생각하는 청년기는 20대부터 30대 까지라고 생각한다.
일생 중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이때 한 인간의 삶이 결정되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기간을 농촌의 시골에서 생활했고 이 기간에 내 삶의 밑그림이 그려져가는 기간이기도 했다.

나의 청년기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세”
라는 구호속에 고속도로가 뚫리고 마을 길도 넓히고, 초가지붕에서 기와지붕으로 바뀌는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의 청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농촌의 청소년들이 도시로 몰려가고 명절 때 내려온 그들에 의해서 도시의 화려함과 신비로운 생활이 소개되고 막연한 동경과 감탄, 그리고 신비로움으로 젊은 우리를 유혹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미국 생활을 하고 온 청년들이 돌아와서 미국 생활상을 말하면서 폼을 재면, 여자들이 그들의 말에 혹하여 따르는 것에 비유하면 될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20대에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들의 우상이 되고 싶어 한다.
오늘 날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한번 보기 위해 몇시간씩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유명 연예인의 리싸이틀에 몰려가서 열광과 환호하는 것을 보면 그 때 성공하여 고향에 내려온 친구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내 친구 중에 아버지가 운수업 사장을 하면서 꽤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의 아들이 있다.
이 친구는 서울의 명문 대학을 나오고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20대 후반에 벌써 부자가 된 친구이다. 물론 부모의 도움을 많이 받았겠지만..............

이 친구는 나에게 꽤나 잘해주었다.
“시골 촌놈 서울 맛 좀 봐야지”
그러고서는 라이트 클럽, 락카페((?)아뭏든 술먹고 춤추는 곳), 룸싸롱,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술집 등으로 데려갔다.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아가씨들을 웃기기도 하고 그들을 능란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나는 춤도 노래도 여자를 다루는 방법도 팁을 줄지도 몰랐다. 자연 그 친구의 독무대였고 내옆에 앉은 아가씨도 그에 말에 웃고 기대고 하는 것이다. 그 친구가
“너는 저 친구와 놀아”
하고 밀어내도 그 때 뿐, 어느 새 나 혼자가 된다.
즐겁지가 않고 즐기지도 못했다.
그려고서는 내 한달 월급 보다도 더 많은 돈을 대수럽지도 않게 주기도 했다.

그 친구와 숙박을 할 때도 호텔이고(나는 여인숙이나 겨우 여관), 커피도 호텔 커피솝에서 마시고 자가용으로 다녔다.( 80년대 초, 내 나이 30대 초, 이무렵에 지방에서는 30대 젊은 사람이 마이카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했다.)

사업 얘기도 몇억에 상가를 사서 분양을 하면 얼마의 이익이 남는다는 둥, 어느 땅을 사서 누구와 만나 이야기가 잘되어 건축을 하면 얼마가 남는다는 둥, 주식이 어떻다는 둥..........
십몇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사는 나에게는 숫자개념 조차 서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
나와 동떨어진 외계인과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이때 절약하고 저축만 해서는 부자가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 연탄 땔 때, 퇴근하여 낙엽을 긁어서 밥을 짓는 일은 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연탄부엌으로 개조했다.

이렇게 나의 청년기를 화려하지 못하게 보내고 말았다.
화려하지는 못했어도 이기간에 빚을 갚고 종자돈을 모으는 등, 지금이 있기 까지의 준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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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위 이 사회에서 말하는 장애인이다.
그것도 그냥 장애인이 아닌 전신마비의 중증장애인...

8년전 저녁의 밤늦은 퇴근길, 회사동료차를 타고 회사 정문을 나선지 채 2분도 되지 않은 급커브 길에 커브를 틀지 못해 차가 전복되었다. 그순간 나는 목을 다쳐 목이하로 내려오는 신경이 끊겨서 그이후  전신마비장애인이 되었다......사고는 과중한 업무로 인한 피로운전때문이었다.

설상가상...

회사동료는 자동차보험의 책임보험만 들고 있었고, 회사에서는 퇴근길 교통사고는 산재적용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년여의 병원생활후 나에게 남겨진것은 혼자서는 밀 수도 없는 휠체어 한대와 목신경 손상으로 인한 전신마비장판정의 장애인등록증이었고, 그이후 난 장애와 경제난의 이중고에 부딪치며, 이 사회에서 살기위해 치열한 일인서바이벌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장애인이동권연대투쟁중에..."

 

전신마비장애...
사고당시 차가 전복이 되면서, 어딘가에 목을 부딪쳤고, 그 순간 목뼈가 으스러지며, 목이하로 내려오는 신경의 손상으로 손과 발이 마비되었다. 하지만 장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소변기능도 마비되어서 소변이 차면 누군가가 방광에 줄을 집어 너어서 소변을 강제(?)로 빼내야 했고, 대변또한 3일에 한번씩 약을써서 침대에 누워서 봐야하며, 그 모든것을 연로하신 부모님이 다 해주셨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한 복병이 있었다.

 

 욕창...목이하로는 감각이 없다보니 한 자세로 오래 누워있거나, 휠체어에 오래 않아있으면, 눌려있는 부위의 피가 통하지 않아서 살이 괴사하면서 천천히 썩어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썩어들어가도 마비된 감각으로 인해서 통증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중증장애인의 중도 사망중 1위가 심한 욕창때문이라고도 한다.



 "사고전 취미활동으로 암벽등산 처음 배울때"



"사고전 취미활동으로 한 스킨스쿠버"

사고당시 내 나이가 27살이었다.
가장 활발하고,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물한모금도 마실 수없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이 장애의 특성은 정신은 멀쩡하고, 별다른 통증도 없는데 아무것도...아주 가벼운 종이한장 드는것도 할 수없다는 것인데...한마디로 육체의 감옥에 갇혀버린 꼴이 되었다.


퇴원후 꼬밖 1년반을 침대에 누워서 살았다. 그 당시는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지 않다보니 아침에 눈을뜨면 으례 tv를 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밤늦게 tv를 끄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고, 그렇게 1년을 넘다보니 서서히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정말로 무의미한 인생으로 사는것이 사는게 아니었고, 창살없는 감옥의 독방에 갖혀사는 느낌이 들었다.

빠삐용...
그이후 나는 어떻해서든 그 독방(?)을 탈출하고 싶었다.
저 창문밖의 많은 사람들은 자유스럽게 자기의 생활을 누리면서 직장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가고싶은 곳도 다니며 먹고싶은 음식도 가까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그런 평범함을 즐기지만, 나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현실에 조금씩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장애인이 된 이후 누구하나 장애인복지나 시책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아볼 곳도 없었다. 그래서 시청과 보건소에 연락하여 자원봉사자 연결을 몇 차례 부탁하였지만 "알았으니 기다려라"는 소리와 함께 시간은 지나갔지만 아무 연락도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저럼란 가격의 컴퓨터를 구입하면서 인터넷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하여도 장애 관련 정보 및 복지 시책을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아 알지 못하였으나 인터넷을 계기로 그때까지 몰랐던 많은 장애관련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우리나라 장애문제와 복지 시책이 경제 성장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한 조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국내의 복지 관련 서적과 장애관련 복지와 역사에 대해 인터넷을 이용하여 나름대로 조금 공부를 하게 되면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많은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많은 장애관련 기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의를 하였지만 대부분 혼자서 활동 가능한 장애인만을 선호하였고, 나와 같은 중증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 보니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장애관련 단체나 장애관련 서비스가 주로 서울시에 집중되어 있어 경기도 이천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어떠한 활동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생각 끝에 2001년 2월, 서울 수유리 국립재활원에 재활 치료로 입원 신청을 하고, 그해 4월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재활치료도 중요하지만 사회활동을 위한 목적이 크기 때문에 입원 즉시 내가 가지고 있던 조금 남은 돈으로 활동 보조인을 고용하였고 그렇게 사회생활의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우선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 다시 장애관련 단체를 직접 찾아가 상담을 하였고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주관과 서울시의 후원으로 서울시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장애인의 올바른 인식 전환을 위한 일일교사를 하게 되었다.

내용인즉 매주 토요일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3교시 수업을 진행하였고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 장애체험, 체험 후 토론식으로 진행을 하였다. 4개월여 동안 서울시 11개 초등학교가 참여를 하여 장애인의 올바른 인식개선에 대한 많은 성과를 얻어 자료집으로 엮어 전국 초등학교에 배포 되었다.

그 이후 장애인의상연구소 주관과 서울시 후원으로 장애인 패션쇼도 참가하고 그와 관련된 크고 작은 장애관련 행사에 참가를 하였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동권연대와 정립회관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진행중인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세미나를 접하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드디어 찾게 되었다.

바로 나와 같은 중증장애인도 사회적인 배려와 정부의 정책만 지원된다면 비장애인과 같이 평범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라는 중증장애인 모임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나는 홍보담당을 맏아서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알리기 위해서 논문을 찾아 자료를 만들어서 장애인 정책담당자를 만나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 필요성을 알렸다.

그러나 국립재활원을 퇴소하면서 다시 이천으로 내려와  경제적 어려움과 지방의 특성상 다시 활동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의지가 있다 하여도 전신마비라는 장애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높은 벽과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장애인의상 패션쑈에서 ..."




"장애인이동권연대 집회도중"




"중증장애인 인터넷서바이벌 대회도중"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더 많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포기를 한다면 평생을 창살없는 감옥과 같은 방에서 절망과 후회를 하며 지낸다는 것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나가서 활동을 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나의 활동을 보조해줄수 있는 활동보조인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중증장애인의 활동보조서비스의 개념과 지원이 안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의 활동을 도와줄분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간병인협회에서 간병인을 고용하여야 하는데 한 달에 150만원이란 비용은 나에게는 엄두도 내지 못할 비용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끝에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보건복지부에 중증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비도 알아보고, 전경련에 상무님도 만나고, 시청에 지역사회 후원도 알아보고, 여기저기 장애인단체에 문의도 해보고, 시민단체에 호소도 해보았다.

하지만 후원과 기부문화의 부재속에서 먹고 사는 문제도 아닌 단지 사회활동의 필요성만으로는 힘들고, 또한 일반 개인에게는 지원이 어렵다는 말과 함께 어떤 사람은 ?그런 중증의 장애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냥 집에서 요양하다보면 좋은날이 올 것이니 편하게(?)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알아보았지만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는 안되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고심끝에 스스로 벌어서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6개월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보험업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사고 전 서울에서 2년여간의 영업활동도 해보았고 보험이란 대중화된 상품에 무형의 상품이라서 어느 정도 교육을 통한 지식만 갖춘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생겼고, 내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었다보니 누구보다 더 보험의 중요성을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만들어 무턱대고 삼성화재 본사에 찾아갔다. 본사 앞에서 담당자와 통화한 후 만나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전해준 다음에 나도 할 수 있으니 한번만이라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한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바로 활동보조인지원이였다. 담당자는 알았다고, 한번 상의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하였고, 그렇게 다시 이천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생각해도 쉽게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대뜸 찾아와서는 일하겠다고 하고서 거기다가 조건까지 내세우니 내가 생각해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 이천에 있는 삼성화재에 전화해 소장님을 만나 다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전해드린 후 다른 직원들과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일할테니 저에게 한 번의 기회만 주십시오. 하고 호소했다. 소장님도 처음엔 검토 후 연락을 주기로 했지만 한달 후, 연락이 없자 다시 찾아가서 부탁드렸다. 그리고는 얼마 후 11월에 수원 보험연수원에서 2주의 교육과 자격시험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정말 뛸(?)듯이 기뻤다. 비록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지만 기회를 주엇다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감사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수원을 왕래하면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 차도 있어야하고 활동보조인이 당장에 필요했다.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 라고 했던가! 1년 전에 한 장애인 모임에서 만난분의 연락이 왔다. 현재 미인가 장애인시설에서 생활교사로 근무하다가 대학원의 사회복지 공부로 인해서 잠시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사정을 전하고 월급의 일정부분을 드리는 조건으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분은 잠시 고민끝에 허락하였고, 그렇게 직업전선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사무실에서 업무중에...손을 사용할 수없어서 마우스스틱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2003년 12월, 사고 후 거의 5년만에 중증장애로 다시 직업을 같게 되었고. 2004년 1월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추운 겨울 온 몸이 꽁꽁 얼면서도 고객을 만나러 다녔고, 전신마비장애로 어깨아래로는 땀이 나지 않아서 체온이 쉽게 올라가 수시로 일사병을 느끼면서도 고객을 만났다. 항상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영업하느라 계단은 올라가지도 못하면서 매달 매달을 최선을 다해서 활동했다...

그러길 어느새 4년째, 따뜻한 햇살의 5월의 중순... 봄이 찾아왔다. 아직까지는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의 직업적 자립이 성공한 것도 아니지만. 항상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과 나의 목적이 단지 돈을 번다기보다 중증장애인도 정부의 정책지원과 사회적 배려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직업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몸으로 시위(?)를 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일각에서는 그 몸으로 얼마나 할 수 있겠어? 라며 얼마 못가서 그만 두겠지 하면서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솔직히 나도 정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무리해서 오래 앉아 있으면 욕창도 생기고 가끔 옷에다가 소변과 대변이 저절로 나와서 난처할 때도 있었고, 때론 무리한 활동으로 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휠체어 타기가 너무나도 힘들 때도 있었고, 어쩌다 너무 힘들때면 아무도 없을때 혼자서 펑~펑~ 울기도 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전신마비장애가 있다고 해서 평생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안에 누워서 지내는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힘들어도 사회로 나가서 내 할일을 찾아서 활동하는게 낫겠습니까?" 실패는 두렵지 않다. 힘들어도 방안에서 아무희망도 의미도 없이 누워서 사는 것보다 조금 힘들어도 내일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힘든 것은 오히려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고 행복이다.

나는 내장애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길도 점점 더 힘들어질것이란 것도 안다. 결혼을 한다는 것도...아이를 가진다는 것도 나에겐 힘들다. 그리고 부모님이 점점 더 나이가 드셔서 나를 돌봐주실 수도 없을때는 결국은 장애인시설로 들어갈 수밖에 없겠지만...난 그때까지만 이라도 열심이 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에게 있어서 욕심일런지....

 



"나의 애마 전동휠체어를 타고 KBS서점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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