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부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



경제통신사인 edaily 증권부 기자 한상복 씨. 그가 지난 1년 2개월간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부자(자산 20억~1천억원대) 1백43명을 만나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펴낸 책이 바로 『한국의 부자들(위즈덤 하우스 펴냄)』이다. 부자들이 부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내용인 이 책은 ‘부자를 꿈꾸는’ 사람에겐 필독서다.



1. 부자들, 독하고 집요한 실천쟁이
흔히들 ‘돈맛’이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맛은 ‘돈을 쓰는 맛’이다. 반면 부자들은 ‘돈을 벌고 모으는 맛’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첫 번째 경계선이다. 사람들은 어떤 계기로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확고한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대개는 길어야 6개월이다. 본인 스스로가 지친다. ‘이러다 어느 세월에 1억을 모으나.’라며 허탈감에 빠진다. 게다가 주변에 돈 쓸 일이 자꾸 생긴다. 슬며시 현실과 타협을 하게 된다. ‘내년부터 모으지 뭐.’라면서. 부자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다. 목표를 정하면 집요하게 실천을 한다. 이것이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두 번째 경계선이다.

2. 부자들, 때론 무모한 투자가이기도
‘돈을 충분히 모아서 사들인다.’는 것은 부자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계획일 뿐이다. 부자들은 일단 사고, 그다음에 돈을 모은다. 저축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리를 해서 부동산을 사고 나면 저축의 목표가 또 한 차례 상향 조정된다. 이런 과정이 끊임없는 상승효과를 일으켜 부자의 길로 인도해준다. 저질러놓고 그것을 막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부자가 되는 과정에 고통은 필수다.

3. 생활비를 빼고 저축하면 부자 못된다
부자들은 ‘단순히 돈을 모으기 위해’ 저축을 하면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명확한 투자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구입하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파악하여 저축 규모를 정해야 한다는 것. 막연한 저축은 불필요한 소비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생활비를 빼고 난 나머지 금액을 저축한다. 반면 부자가 된 사람들은 목표를 세운 뒤, 그것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저축 액수를 결정하고 있었다. 생활은 그다음 문제다. (중략) 부자가 되는 것은 눈을 뭉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처음에 힘을 주어 다지고 나면 굴려서 크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모을 수밖에 없도록 자기 시스템을 만들어놓는 것에서 부자 인생은 출발한다.

4. 짠돌이 생활태도, 부자들의 출발점
진성호 씨는 물건을 살 때 반드시 세 번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 물건이 꼭 필요할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 효용이 반반이고, 거듭 생각하면 필요 없는 물건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바가지를 쓰면 분해서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부자들이다. (중략) 부자들은 돈을 내고 무엇인가를 사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수입은 일정한데, 쓰다 보면 돈이 모일 턱이 없다는 것. 부자들에게도 수입은 일정하다. 갑자기 수입이 곱절로 늘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들이 여전히 부자인 것은 수입을 늘리면서도 지출은 엄격하게 통제하기 때문이다.

5. 0.1% 금리에 목숨 거는 쩨쩨함은 기본
부자들에게 이자 수입은 소득원 순위 3위 또는 4위에 그쳤다. 이들이 은행권에 많은 돈을 넣어두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소득(임대료 및 사업소득 등)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이한 것은 부자들이 이자율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대목이었다. 0.01%라도 높은 이자를 주는 곳을 택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부자가 쩨쩨하게 그까짓 이자 몇 푼 가지고 전전긍긍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부자가 되기 훨씬 전부터 높은 이자를 따라 금융상품을 갈아타는 것을 습관화해왔다.

6. 편안함만 추구한다면, 부자 되기는 글렀다
기능직 공무원 출신인 조대경 씨는 ‘이사’로 돈을 번 사람이다. 강남의 60평 규모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살림이 거의 없었다. 옛날에는 살림이 좀 있었지만, 이사 다니기 거추장스러워서 대폭 줄였다는 것이 조씨의 설명이다. 50대 중반인 그는 23세에 결혼, 지금까지 열일곱 번 이사를 다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아파트 여러 채와 상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사를 다닌다. 집값이 오르면 처분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또 한 채를 장만하는 식이다. “이 일대 아파트 값이 많이 올랐어요. 이제 뜰 때가 됐습니다.”

7. 부지런함, 부자들의 공통점
부자들은 거의 대부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이들 중 64%는 오후 10시 이전에 잠들고, 88%가 오전 6시 이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중략) 한 경영 전문지가 국내 1백대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도 위의 결과와 비슷하다. 이들의 평균 출근시간은 오전 7~8시가 58.6%로 나타났다. 6~7시 사이에 출근한다는 경영자도 7.2%였다. 결국 75.8%가 8시 이전에 출근을 하고 있는 셈이다.

8. 정부정책의 숨은 뜻 파악에 능하다
부자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정부의 생각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부가 어떤 뜻에서 정책을 내놓는지, 그 이면을 해석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연성길 씨만 해도 그렇다. “1998년에 정부가 분양권 전매를 사실상 허용했는데 그 뜻이 뭐겠어요. IMF 때문에 경기가 어려우니까 돈 가진 사람들이 풀라는 것 아닙니까. 그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 투기를 억제한다고 분양권 전매에는 서슬이 퍼랬는데 말이에요. 그럴 때는 돈 가지고 들어가면 틀림없어요. 편법이 좀 있어도 단속을 안 합니다.” 정부와 부자들 간의 관계는 항상 견제와 균형을 유지한다. 정부는 경기가 달아오를 때 ‘세금을 내라’고 부자들을 윽박지르는 한편, 경기가 바닥일 때는 러브콜을 보낸다. ‘돈을 좀 풀라’는 애원이다.

9. 책상에서 말고, 돈 냄새 좇아 다리품을 판다
부자들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들개처럼 돌아다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돈은 아이디어가 아닌 실물이므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돈이 흐르는 곳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 곁에는 아이디어 넘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과 부자의 차이는 바로 실천이다. 돈은 말로 버는 것이 아니다. 다리품을 팔아야 냄새라도 맡을 수 있다. (중략) 우리는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근처 부동산 앞을 지나다니면서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시세만을 본다. 그 옆에 붙어 있는 상가 시세는 상관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장사를 생각하면서도 창업 박람회 한 번 가보지 않는다. 신문광고를 보고 찜닭집 개업을 생각한다. 그 광고를 혼자만 봤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10. 부자들은 '동네 발바리'
부자들은 동네를 속속들이 누비고 다니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주변에서 기회를 찾는다. 낱낱이 파악한 정보로 승부를 걸고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다. 또한 ‘잘 아는 곳’에 투자를 한다. 남들의 성공에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친구가 어떤 아이템으로 한밑천 건졌다고 자랑을 한들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부자에게는 부자만의 기회가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살고 있는 동네에 무수한 기회가 넘실거리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리 기회가 널려 있다 해도 그것을 볼 눈이 없으면 이것 역시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기회는 눈을 뜬 사람에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기 위한 습관을 기르고 실천하지 않는 이상, 부자의 안목을 가질 수 없다.


그냥 구질구질하게 살아라

독한 마음 먹고 하는 재테크. 남들이 뭐라고 하던 굽히지 말아야 한다.

독한 마음 먹고 재테크를 하려다 보면 본의 아니게 많은 오해를 산다. '너무 돈을 밝힌다'는 둥 '너무 돈을 안 쓰는 왕소금'이라는 둥 많은 곱지 않은 시선들도 있다. 또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지 마라'라는 충고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지 않듯이 필자는 열심히 재테크하라고 독려를 하고 싶다. 하나의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할 테니 한번 보고 재테크에 임하는 각오를 새롭게 하라.

필자가 하는 일이 재테크 정보를 만드는 것과 재테크 상담을 해 주는 것이다. 최근에 의뢰받은 상담내용 가운데 대략적인 재테크상황은 다음과 같다. 아주 젊은 여직원이었는데, 그녀는 등록금이 아까워 1학기를 줄여서 7학기만에 조기졸업을 한 독한 여자였다. 그녀의 연봉은 비교적 많아 약 3천만원 정도 되었다. 지금까지 만 3년의 직장생활동안 얼마를 모았을까? 놀랍게도 6천만원을 모았다.

얼추 일년에 2천만원 정도를 모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직장 생활 해 본 사람이면 절감하겠지만 1년에 1천만원 모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게다가 그녀는 자기에게 마음껏 투자하는 20대 중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랍기 그지 없다. 실제 그녀가 매월 쓴 용돈이래 봤자 고작 월 20만원이었다. 여기다가 보험을 많이 들었다. 자기 것은 물론 부모님 것도 충분하게 들어서 약 30만원 정도 나가고 있다. 그리고는 전부 예금과 적금에 부었다.

용돈 20만원이면 식비와 교통비도 대기에 벅찬 돈이다. 정말 허리띠 팍팍 졸라맨 결과인 것이다. 현재와 같은 절약과 저축을 병행한다면 2년 안에 1억원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다. 지금까지 모은 돈을 지혜롭게 잘 굴린다면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 그녀의 친구들과 동료들 눈에 그녀가 어떻게 보였을까? 정말 구질구질해 보이지 않았을까? 아무려면 어떤가? 그녀에게 '내집마련'과 '유학'이라는 꿈을 조금씩 성취해 나가고 있으니까. 지금은 비록 개미처럼 살지만 얼마 후면 베짱이처럼 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와 정반대의 삶을 선택한다. 누군들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을까? 예전에 HOT와 쌍벽을 이뤘던 젝스키스의 히트곡 제목처럼 '폼생폼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공주나 왕자처럼 살고 싶은 본능에 이끌려 낭비하다 보면 나중에는 하인이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즉 현재를 선택할 것이냐 미래를 선택할 것이냐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후자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현재 공주나 왕자처럼 살면서 미래에도 여전히 공주나 왕자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천에 하나 둘에 불과할 것이다.

요즘 출퇴근 시 지하철 내에서 의미심장한 광고를 보곤 한다. 다름아닌 담배광고협회에서 내보내는 'DON'T SMOKE YOUR DREAM(자신의 꿈을 태우지 마라)'이라는 공익광고가 그것이다. 미모의 여자 록가수의 열정적인 춤과 노래를 선 보이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문구를 제시한다. 그리고 '담배보다 더 소중한 꿈이 있기에'라는 가슴에 정통으로 꽂히는 메시지를 던진다. 다시 말해 '담배'와 '자신의 꿈과 미래'를 바꾸지 말라는 내용이다.

아무쪼록 자신만의 꿈과 미래를 설계하라. 가능하면 좀 더 거창한 꿈을 꾸어라. 그리고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우라. 중장기 계획은 물론 단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어렵다. 이런 계획이 섰다면 그것에 맞춰 재테크를 열심히 하도록 하라. 아마 몇 년 후면 경쟁자보다 몇 발짝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0억을 모은 사람들]…“양조장 머슴 생활 잊은 적 없어요”


고졸 영어 강사에서 강남 입시학원 원장 된 유운규氏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 부근의 지하 2층 지상 7층짜리 건물. KOSEI & 신대일학원이란 간판이 내걸린 이 건물의 주인은 유운규(49) 원장이다. 이 건물의 꼭대기 펜트 하우스가 그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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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시어터에 노래방 시설까지 갖춘 이 곳의 한쪽 벽에는 이상한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길이가 1m는 됨직한 액자 안에 전시된 물건은 헤지다 못해 삭아서 으스러질 듯한 청바지 한 벌. 그 액자 오른쪽 아래에는 이런 영어 문구가 붙어 있다. ‘My by-gone-days (나의 지나간 날들·1967∼1970)·Don’t forget your past (과거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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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forget your past (과거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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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은 유원장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5남2녀 중 4남인 유원장이 전북 진안에서 양조장 겸 인삼 밭을 하던 먼 친척 집으로 머슴살이를 떠나던 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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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시장으로 술을 나르고, 돼지 똥을 치우고… 그 속에서도 학구열만은 식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이듬해 인근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학비가 없었다. 주인집에서는 먹여줄 뿐 땡전 한푼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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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겨우 입학금을 마련해 중학생이 됐지만 학비는 밀리고, 머슴살이와 학업의 병행은 지옥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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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에 술 냄새와 돼지 냄새를 풍기며 친구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얻어 먹는 게 치욕스러웠다. 그래도 돼지 우리에 영어단어를 걸어놓고 외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성적은 좋아 선생님에게서 5·16 장학금 대상자로 추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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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청 요건인 ‘등록금 납부 영수증’이 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던 어느날 만취한 선생님이 한밤 중에 양조장으로 쳐들어 왔다. “어린 애를 머슴살이 시키면서 품삯 한번, 학비 한번 안대 주는 파렴치한들!” 유 원장은 그나마 머슴살이도 끝이구나, 싶어 자살할 생각까지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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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구박은 더 심해졌지만 체면 때문인지, 밀렸던 두 학기 학비를 내줬고 그 영수증으로 5·16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중학교 3년을 마쳤다.그 4년의 머슴살이 상징이 액자 속의 청바지다. 주인 아저씨가 입다가 유원장에게 준, 말하자면 머슴 유니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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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술에 삭고 찢어진 그 바지를 철사 줄로 얽어서 입고 다녔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 고된 4년을 청바지에 담아 들고 양조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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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으로 진출한 그는 계란 배달과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가면서 고교 시험준비를 했다. 보문고등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 할 수 없이 후기인 대성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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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장학금으로 다녔지만 생활이 문제였다. 독서실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해가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들 구두를 닦고 친구들의 머리를 깍아 차비와 책값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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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선생님의 소개로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기도 했다. 모처럼 잡은 가정교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유원장은 돈을 쪼개 중학교 학원까지 다녔다. 잘 가르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르치는 것에 대한 기초가 생긴 시기”라고 말했다. 그가 더부살이를 했던 독서실은 학원을 겸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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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칠판도 닦아주고 교실 청소도 해 주며 친해진 학원강사가 대구에 일자리를 얻어 내려가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입 원서를 살 돈조차 없어 방황하던 유원장은 그 강사를 쫓아 대구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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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학원에서 우연히 대타로 강의를 하게 된 유원장은 영어강사로서 재능을 발휘한다.그걸 계기로 학원강사의 길로 들어서 인기를 얻었다. 군대(방위)를 마치고 다시 학원강사를 하던 그는 대구 최대 학원에 스카우트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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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78년 당시 그의 월 수입이 1백만원 정도였으니 고수입자였던 셈이다. 그 학원의 원장을 하던 모씨는 강사비의 3분의2를 무조건 저축해야 돈을 모을 수 있다며 ‘원천징수’ 해 갔다. 고졸자라는 ‘약점’ 때문에 늘 전전긍긍했던 유원장은 뭐든 시키는대로 했다. 결국, 이 돈도 떼 먹히는 바람에 그의 수년간 고생은 물거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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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의 3분의 2는 무조건 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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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그는 서울 경동시장 앞에 있던 대우학원에 스카우트된다.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한 서울 생활은 냉혹했다. 그 해 3월 새벽 6시10분 그의 서울 첫 강의 수강생은 달랑 1명이었다. 그는 그 수강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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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눈이 와도 꼭 나와야 한다. 학생이 안 나오면 나는 쓰레기통이라도 올려 놓고 강의를 할 거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그는 단 1초도 지각한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한 강사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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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점차 명성을 얻었고 월 평균 2백∼3백만원씩 벌어들였다. 알뜰히 돈을 모은 그는 79년 33평형 잠실 진주아파트를 3천4백만원에 사들이고 식구들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곧 이어 서울 최고의 학원으로 꼽히는 ‘대일학원’에 스카우트 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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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 강사의 총 집결지였던 대일학원에는 명문대 출신 강사들이 수두룩했다. 거기서 ‘고졸자’로 버텨내기란 정말 힘겨웠다. 수강생들에게 인정 받는 것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하루 8번 바쁜 강의 일정 중에서도 유명강사의 강의를 빼 놓지 않고 쫓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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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은 꼼꼼히 적었다가 자기 강의에 반영했다. ‘벤치마킹’이었던 셈이다. ‘유홍렬’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유머개발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성문기본영어 강의를 맡았던 그는 커다란 종이 차트에 책 내용을 일일이 다 배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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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강사들이 한 문장씩 칠판에 썼다 지웠다 할 시간에 그는 맨 뒤에 앉은 학생까지 다 보일 수 있도록 그 차트를 걸어놓고 설명했다. ‘효율적인 강의 방식’을 고안한 것이다. 때로는 명문대 영문학 석박사들을 불러다 개인 교습을 받아가며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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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력 덕에 대일학원에 온 뒤 1년여 만에 그는 수강생 1등을 차지한다. 한달에 수강생 4천2백명 기록을 올린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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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유원장은 80년 과외금지령으로 또 다시 시련을 맞는다. 재수생만으로는 학원강사로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85년 대일학원 강사를 하면서 압구정동에 사무실을 빌려 재수생 학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날로 높아 가는 임대료와 걸핏하면 들이닥치는 세무사찰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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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이민 가 있는 미국 처가로 아내와 아이들을 보냈다. 혼자 남은 유원장은 방송통신대를 다녀가며 강사생활을 계속했다.88년 그는 서울역 학원 밀집 지역에 82평짜리 땅을 1억2천6백만원에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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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업으로 독서실을 차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건축업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판단착오로 목욕탕까지 지으면서 건축비가 올라가고 준공 시점도 지연돼 4억5천만원이나 빚을 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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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압구정동 임대 건물의 보증금은 매년 25%씩 인상돼 월 1천만원을 월세로 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자 그는 ‘내 건물’ 마련에 나선다. 97년 8월 그는 매물로 나온 신사동 지금의 학원건물을 16억2천만원에 매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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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독서실과 목욕탕은 4억5천만원에 팔아 빚을 청산했다. 살던 집을 팔고, 그 동안 모은 돈을 싹싹 긁은 뒤 총 9억원의 신규 대출을 보태 지금의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3개월 만에 IMF가 오면서 부동산 가격은 폭락하고 대출 금리는 치솟았지만 짠돌이 생활로 버텨냈다. 덕분에 현재 시가 25억짜리 건물을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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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IMF라고 생각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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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3년째 특수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특례입학 대상자들의 국내 대학입학을 돕는 일이다. 사실 학원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임대료 정도에 불과하다. “학원을 접고 임대료로 편히 살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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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 소련지역과 스리랑카 등 동남아 오지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분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더군요. 그분들의 최대 고민이 자녀교육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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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의 제1 목표는 빚 청산이다. 몇 년전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친척의 간청으로 외제차를 한대 구입했지만 버스를 타고 다닐 때가 훨씬 더 많다. 양조장 머슴시절 약속대로 술은 입에도 안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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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빼고도 20억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그지만 “늘 IMF라고 생각하며 산다”고 한다. 그의 취미는 집에 갖춰 놓은 편집기로 비디오 촬영 작품을 만드는 것. 은퇴한 뒤에는 아내와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비디오 예술가로 사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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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의 맨 밑바닥에는 ‘청바지’가 있다. 그 청바지는 유원장의 표현대로 “고난이자 동시에 성공의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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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장 ‘10억원 모으기’의 결정적 전환점은 논현동 빌딩 구입이었다. 16억2천만원에 사서 현재 시가가 25억원에 달하니 8억8천만원의 차익을 남긴 셈이다. 97년 빌딩을 살 때 까지만 해도 유원장의 재산은 7억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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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겸 목욕탕 투자는 몇 년간 갚았던 이자를 고려하면 오히려 손해였다. 나머지는 ‘소처럼’ 일해서 모은 재산이었다. 잠실 진주 아파트 매입은 재테크의 절호의 기회였지만 동생 사업자금으로 조기에 팔아버린 뒤 10배나 올라 가슴 아팠던 기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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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원장의 최대 자산은 ‘최악의 환경을 성공의 밑거름을 삼을 만한’ 성실과 노력이다. 머슴살이하던 소년이 서울에서 손꼽히는 명강사로 성공한 비결을 유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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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들보다 모자라다는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했죠. 다른 강사들이 ‘내가 최고’라고 자만할 때 저는 연구하고 배웠습니다. 대일학원에 간 뒤 5년여 동안 한번도 강사실 소파에 앉아 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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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히려 재테크를 몰라 손해 본 부분도 많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 아예 은행에 맡기기 시작했다. 99년부터 유원장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는 신한은행 PB센터 고준석 부동산재테크 팀장은 “연리 10.6%짜리 비싼 대출을 금리 7%짜리 상품으로 바꿈으로써 연간 1천7백50만원의 이자부담을 줄이고 대출금리보다 싼 이자를 받으며 붓고 있던 적금을 깬 뒤 자산구조를 대출 갚는데 주력하는 구조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유운규 원장의 재산 형성 과정



1973년 고교 졸업. 첫 영어강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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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대구 최대 학원 영어강사로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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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서울 대우학원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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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서울 최고의 학원으로 꼽히던 대일학원 스카우트. 월 4천명 이상의 수강생을 끌 어 모으는 최고 인기 강사로 부상. 잠실 진주아파트 33평형 3천4백만원에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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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7.30 과외 금지조치로 학원 수입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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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동생 사업자금 위해 잠실 진주 아파트 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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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결혼과 함께 후암동 18평형 동자 아파트를 1천2백만원에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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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압구정동에 학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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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서울역 앞 82평짜리 대지를 1억2천6백만원에 매입. 독서실겸 목욕탕 운영. 건축 과정에서 4억5천만원의 빚을 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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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대학 특례 입학자 대입학원인 KOSEI&신대일학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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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서울역 앞 독서실 겸 목욕탕 4억5천만원에 매각. 신사동 4거리 부근에 지하2층 지상 6층짜리 건물 16억2천만원에 매입. 학원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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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現 논현동 건물 시가 25억원.(부채 9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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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주 볼티모어 자택 시가 25만 달러(약 3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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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예금 3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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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산 22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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