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링거 SE (1disc) - [할인행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외 출연 / 이지컴퍼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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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Dead Ringers

  감독 - 데이빗 크로넨버그

  주연 - 제레미 아이언스, 주느비에브 부졸드, 하이디 본 팔레스크, 셜리 더글라스



  크로넨버그와 아이언스! 이 두 이름만으로 설레게 만드는 영화였다. 거기다가 미스테리 의학 스릴러라는 타이틀까지!! 이건 ‘더 이상 좋을 수 없다’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이 영화는 일란성 쌍동이의 성공과 파멸을 그리고 있다. 엘리엇과 비벌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놀이도 함께, 공부도 함께, 학교도 연구도 모든 것을 둘이서 같이 했다. 비록 성격은 정반대지만, 그들은 뭐든지 같이 해야 했다. 심지어는 여자까지. 화술이 좋은 한 명이 작업에 성공하면 둘이 번갈아 여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 정도로 그들은 정신적인 면까지 일체가 되어 있었다. 성인이 된 후, 둘은 산부인과 의사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돈과 명예와 여자. 둘에게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갈등이 있는 법. 처음으로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느낀 동생 비벌리는 형과의 결별을 시도한다.


  그녀는 처음으로 둘을 구별한 여자였다. 즉 그를 이름 없는 꽃에서 의미를 가진 꽃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언제나 마커스 형제로만 존재했는데, 그녀는 정확히 둘을 구별했다. 그것이 비벌리에게는 충격이었고 새로운 기회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에게서 분리가 된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자신에게서 결별 선언을 받는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둘은 방황하기 시작한다. 비벌리는 약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수술실에도 약에 취한 채 들어간다. 수술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지사. 엘리엇도 정상이 아니기는 마찬가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둘이 될 수도 없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피난처이자 안식처이면서, 동시에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자신을 잃어버리고 남에게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 같다. 나에게서 위안을 갖지 못하고 남에게서 위안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


  세상 살아가기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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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피조물
피터 잭슨 감독, 케이트 윈슬렛 외 출연 / 기타 (DVD)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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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Heavenly Creatures

  감독 - 피터 잭슨

  출연 - 케이트 윈슬렛, 멜라니 린스키, 제드 브로피, 클라이브 메리슨



  1952년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2명의 10대 여자 아이들의 충격적인 실화를 토대로한 작품. 15세에 살인범이 된 그녀들이 죄를 범하게 되는 심리적 변화를 그린, 소녀 시절의 복잡 미묘한 동성애적 이상 심리에 관한 작품이라는 소개글과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여주인공의 이름과 피터 잭슨이라는 감독의 이름으로 보게 된 영화이다. 물론 피터 잭슨이 영화 ‘반지의 제왕’을 만들기 전에 내놓은 작품이다. 사실 어린 살인범이라는 소재가 특히 마음에 들어서인 점도 있지만.


  폴린은 지극히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소녀이다.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모님. 사춘기 소녀가 꿈꾸는 이상적인 부모와 현실의 부모는 원래 차이가 좀 있다. 언제나 남의 떡이 커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너무도 평범해서 촌티를 풀풀 풍기는 자신의 외모. 그녀는 그런 것들에 불만을 품은 내성적인 소녀였다.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소녀 줄리엣. 폴린이 보기에 너무도 우아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상류계급의 부모님을 갖고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태도와 먼 곳을 바라보는 눈과 예쁜 미모의 소유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금방 친해져,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된다. 서로 같은 꿈을 공유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두 소녀는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요즘 같으면 애들이 친하구나 내지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 당시 시대 상황은 그런 두 사람의 친밀감을 위험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두 사람과 그들을 떼어놓으려는 주변의 압력은 대립하게 된다.


  결국 정신적으로 막다른 곳까지 이른 두 소녀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기로 한다가 처음 제작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냥 상류 계급에 편입하고 싶은 소녀의 발악인 것처럼 그려졌다.


  왜냐하면 폴린이 꿈꾸는 환상에서 두 사람을 환하게 웃으면서 반겨주는 것은 줄리엣의 부모님이었다.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는 호화 여객선에서 두 사람을 마치 친딸처럼 안아주고 웃어주는 환상이 마치, 불만족스러운 친부모 대신 겉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두 사람을 자신의 부모로 여긴다는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사실 어릴 적에 그런 상상은 한두 번은 해보기 마련이다. 주로 부모님에게 꾸지람을 듣거나 뭔가 불만스러울 때, 내 진짜 친부모님이 날 데리러 올 거야라든지 내 친부모는 어쩌고저쩌고 그런 상상 말이다……. 나만 해봤나?


  하여간 폴린에게는 그런 욕구 내지는 상상이 존재했던 것 같다. 비록 줄리엣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지만, 그런 면도 있었다.


  그런데 감독의 의도인지 모르지만, 그 부부도 그렇게 행복하고 완벽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사람의 속사정은 겉으로 봐서는 모르는 거니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줄리엣이 폴린과 비슷한 환경의 소녀였다면, 폴린은 그녀에게 그렇게 집착했을까? 사춘기 소녀의 순수한 우정과 사랑을 너무 모독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그녀였기에, 더 매달리고 애정을 퍼붓고 날 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에 감독이 여자였다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소녀들의 감정 변화를 좀 더 섬세하게 그려내지 않았을까? 두 사람의 환상을 더 몽환적이고 신비롭게 잘 표현하지 않았을까? 물론 피터 잭슨 감독이 별로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소녀들의 감정 처리가 좀 더 섬세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로 ‘여고 괴담 2편’이 떠올랐다. 거기서는 소녀들의 불안하면서 위태로운 심리와 그들이 꿈꾸는 환상이 적절하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이 영화는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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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투 킬
조엘 슈마허 감독, 매튜 매커너히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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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A Time To Kill

  감독 - 조엘 슈마허

  출연 - 케빈 스페이시, 매튜 맥커너히, 산드라 블록, 사무엘 L. 잭슨

 

 

  찡하니 가슴이 아파서 ‘아놔, 진짜!’라고 안타까워하다가, 막판에는 ‘그렇지!’를 외치게 했던 책. 예전에 아주 좋아해서 나오는 족족 찾아 읽었던 작가의 책. 영화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그나저나 소설 감상문이 없다? 아! 내가 감상문 작성을 하지 않을 때였구나.

 

  무덥던 어느 날. 먹을거리를 사들고 집에 가던 흑인 소녀를 두 명의 백인 청년이 처참하게 강간을 하고 죽이려던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동네는 남부, 백인의 우월의식이 극에 달하는 동네였기에 두 청년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분위기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소녀의 아버지가 법정에서 둘을 쏴죽이고, 주인공에게 변호를 부탁한다.

 

  공교롭게도 주인공 변호사는 전형적인 백인 가족을 이루고 있는 남자였다. 흑인을 돕는다는 이유로 KKK단의 협박에 가족들을 대피시키면서, 온통 백인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단과 피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백인 판사를 앞에 두고 그는 몇몇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고군분투한다. 그럴수록 그를 향한 위협은 점점 강도를 높여간다.

 

  이 영화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오리엔트 특급살인’처럼 개인적인 복수가 과연 가능한지 말하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이 책에서는 법이 처벌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 불공평하게 적용된 것이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법의 처벌이 불공평한지 공평한지, 적절한지 아닌지 누가 판단하는 걸까? 피해자가? 가해자가? 제 3자가? 아니면 관련자가? 그것도 아니면 언론이나 여론이?

 

  누구나 다 자기 입장에서 판단을 하기에, 내가 제일 억울하고, 내가 제일 불쌍하고, 내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법의 판단이 내가 생각하기에 불만족스럽다고 마음대로 사사로이 처벌을 해도 되는 걸까?

 

  백인 건달들이 소녀를 폭행하고도 거들먹거린 것은 자기들이 이 동네에서 절대로 처벌을 받을 리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왜냐고? 속된 말로 자기들 구역이니까, 어떤 피부색이냐가 죄의 유무를 결정하는 곳이니까. 소설에서는 그들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 과정까지 나왔지만, 영화는 그 부분을 생략했다. 그래서 소녀의 아버지가 총기 난사 사건을 벌이는 장면이 좀 뜬금없어 보이긴 했다.

 

  딸이 처참하게 성폭행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면, 당연히 그런 일을 저지른 놈들과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놈들이 처벌도 안 받고 풀려날 게 뻔 하다면, 법의 효용성이나 존재 의의에 불만을 품을 것이다. 젠장, 이따위가 법이라니! 누구를 위한 법이야? 이런 생각을 당연히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쓰레기 같은 백인 건달, 성실하게 살아가던 화목한 흑인 가정, 너무도 어린 소녀에게 닥친 처참한 상황, 열악한 흑인 인권 등등. 특히 소녀의 강간 폭행 장면은 간접적으로 표현하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웠다. 거기다 변호사 부인은 ‘그런 일을 당했으니 일을 저지를 만해요.’라는 동정적인 대사를 노골적으로 내뱉는다. 아버지의 행동으로 총상을 당한 백인 부보안관 역시 는 죄가 없다고 재판정에서 외치기까지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저 아버지가 무슨 죄야? 건달 녀석들이 원흉이고, 도대체 변호사를 협박하는 KKK단이나 건달의 가족들은 뇌에 뭐가 들었기에 복수하겠노라 난리치는 거지? 미친 거 아냐? 개념을 어디다 흘렸기에 저러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변호사의 마지막 변호 장면에서 울컥하고, ‘그렇지!’라고 외치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조금 삐딱하게 보면, 호감형 외모에 말 잘하는 변호사만 얻으면 누구나 다 무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배심원제의 단점이 아닐까 싶다. 그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동정심을 어떻게 잘 자아내는가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니 말이다.

 

  아, 역시 세상은 외모 지상주의란 말인가!

 

  어쩌다가 결말이 이렇게 나는지 좀 의아스럽다. 분명히 법의 판결이 부적절한지 누가 판단하느냐와 개인의 복수가 가능한지가 문제였는데. 어쩌면 음, 법이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을 빨리 수용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스토킹이라든지 남자에 대한 성폭행 관련법이 미비하다고 알고 있다. 법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을 하고 변화에 적응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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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앤드류 스탠튼 감독, 린 콜린스 외 출연 / 월트디즈니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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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John Carter

  감독 - 앤드류 스탠튼

  출연 - 테일러 키취, 린 콜린스, 윌렘 데포, 도미닉 웨스트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사주신 SF 어린이 책 전집이 있었다. 난 세계 명작 시리즈보다 그 책들을 더 좋아했었다. 기이한 실험이나 미래 세계 이야기, 시간 여행이라든지 우주여행, 차원 이동 그리고 지구 내부 탐험 등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참 많았다. 이사가면서 친척집에 줬는지 팔았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집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중 개봉 영화 제목 하나가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뭔가를 일깨웠다. ‘존 카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을까? 영화 설명을 보는 순간, ‘아!’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래, 그 소설이다. 인디언인가 강도였나 하여간 그런 사람들을 피해 동굴로 갔던, 이유는 잘 모르지만 하늘로 둥실둥실 떠서 화성에 도착했던, 방방 잘 뛰어다니던 한 남자 이야기가 생각났다. 화성에 가서 예쁜 공주를 구하고, 나쁜 왕을 물리치고 착한 친구를 왕위에 오르게 도와줬던 그 남자. 화성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갑자기 다시 지구로 돌아와서, 화성의 공주를 그리워하던 그 남자의 이름이 바로 존 카터였다.

 

  그 책에 실렸던 삽화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예쁜 공주는 인간처럼 생겼고, 또 다른 화성인은 큰 키에 에일리언처럼 입이 찢어져있어서 악어처럼 뾰족한 이가 솟아나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 추억을 되살리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영화는 내 기억 속의 책 내용과 많이 달랐다. 예쁜 공주가 나오긴 했지만 그녀는 기억과 달리 여전사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그리고 화성인들의 모습 역시 기억 속의 삽화만큼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기억이 불완전할 수도 있다. 아무리 내가 재미있다고 달달 외울 정도로 읽었다고 해도, 거의 30년 전에 읽었던 책 내용이니까.

 

  역시 과학기술의 발달은 놀라웠다. CG로 만든 것이 분명한 팔 네 개 달린 키 큰 화성인이나 엄청나게 큰 비행선 등으로 가득한 화면은 환상적이었다. 화성인 해츨링들과 화성의 개는 어떻게 보면 못생겼지만 또 어떻게 보면 너무 귀여웠다. 하지만 개는 역시 털이 복슬복슬한 게 내 취향이다. 털이 하나도 없이 반질반질한 것들은 좀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 좀 길었다. 우선 화성의 여러 종족이 벌이는 음모와 암투를 설명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다. 각각의 상황과 현재 처한 입장, 얽힌 이해관계와 권력 암투에 너무 치중했다. 덕분에 존 카터가 활약하는 액션장면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일행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화성인들과 대규모 전투를 하는 장면, 비행선을 타고 도망치는 장면, 모함에 빠져 투기장에서 괴물들과 싸우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전투 장면 정도.

 

  2시간이 훌쩍 넘는 상영시간이었는데, 전투 장면의 화려함보다는 화성의 배경이나 자연 환경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신경을 많이 쓴 게 티나는 화성의 밤과 낮이 아름답기는 했다.

 

  게다가 추격자들과 싸우는 장면은 비장함을 주려고 했는지, 통쾌하게 싸운다는 기분보다는 ‘감동 받아봐’라는 속삭임이 들려서 재미가 반감되었다. 어떻게 목숨을 건 일 대 다수의 전투 장면과 그의 부인이 죽었던 과거 기억을 교차 편집할 생각을 했을까? 비장함도 애틋함도 통쾌함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전반부에 너무 배경 설명이 길어서, 전투 장면들은 휙휙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내가 SF 블록버스터를 보는 이유는 권력 암투보다는 화려한 액션이 가미된 볼거리 때문인데 말이다.

 

  거기에 다음편이 나올 것 같은 결말까지. 설마 너무도 자세한 배경 설명은 2부를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궁금해진다. 지금은 화성에 생명체가 없다는데, 그러면 그 많은 타르크인이나 헬리움인들은 누가 먹었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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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라이트
로드리고 코르테스 감독, 시고니 위버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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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Red Lights

  감독 - 로드리고 코르테스

  출연 - 로버트 드 니로, 킬리언 머피, 시고니 위버, 엘리자베스 올슨



  감독은 누군지 잘 모르지만, 배역진은 참으로 화려했다. 하지만 배역진만 화려하고 내용은 별로였던 영화에 낚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기대 없이 마음을 비우고 봤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 전까지는.


  초능력이나 심령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여념이 없는 시고니 위버와 그녀를 돕는 조수 킬리언 머피. 초능력자나 심령 현상 내지는 강령회나 유령이 나온다는 곳이면 어김없 찾아가서 진위여부를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확인한다.


  로버트 드 니로는 삼십년 만에 복귀한 심령술사이다. 아픈 환자를 치료하고 온갖 기이한 능력을 선보이는 그. 당연히 시고니 위버의 레이더에 포착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가 일하는 연구소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받기로 동의한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데…….


  시고니 위버와 킬리언 머피가 그러고 다니는 이유가 과연 그런 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없다는 걸 입증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 다 너무도 절박한 상황이기에, 가짜를 추려내고 진짜를 찾아내서 도움을 받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자신들에게 거짓 희망을 줬다가 빼앗아간 부류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일 수도 있다. 또는 과학자의 사명으로 혹세무민하는 자들을 잡아내야겠다는 것일 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두 사람의 의지와 절망을 로버트 드 니로의 교활함과 대비시키고 있다. 과학과 심령술의 대결이라는 이름하에 말이다.


  이런 유의 영화는 심령 현상이나 초능력이 없다고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지금까지 증명된 적은 없지만, 어쩌면 있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를 한다. 미국 드라마 ‘X 파일’에서 많이 써먹은 방법이다. 대부분의 귀신 영화도 그렇고.


  그래서 어떻게 결론을 내릴지 궁금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학과 심령의 대결을 보여 놓고, 흐지부지 끝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결말은……. 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쩌면 그것이 감독과 각본가에게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룰루랄라 신나게 쾌변을 보다가 마지막에 한 덩어리가 막혀있는 기분이 들었다. 음, 너무 더러운 예를 들었나? 좀 깨끗한 예를 들자면, 밥을 맛나게 먹었는데 막판에 목이 메는 느낌? 그것도 아니면 교실 문에 온갖 함정을 파놓고 선생님이 들어오길 기다렸는데, 기다리는 분은 안 오고 자습을 하게 되는 그런 허탈함?


  반전을 내놓고 ‘짜잔~ 원래 이거였어.’라는 뿌듯한 마음으로 관객들에게 놀라고 감탄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왜 반전이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그걸 그렇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론 그냥 받아들이면 ‘그렇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래서 저 때 저런 반응이 나왔구나!’라고 넘기면 될 일이기도 하다. ‘뭘 그렇게 따지고 그러냐? 주는 대로 받아서 즐기면 되는 거지. 웃자는 글에 진지 댓글 달면 곤란하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긴 그냥 재미있게 보고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까칠한 도시 여자이기에, 아쉬운 건 아쉽다고 말하고 넘어가야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유의 영화는 결말이 뻔하다. 인디 영화라면 몰라도, 대형 자본이 들어가는 것이면 기본 공식화된 끝을 내야한다.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 말라가 그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감독은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도 약간의 일탈을 위해 반전을 주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그 반전이 너무 생뚱맞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허탈함을 주었다.


  결론대로라면, 시고니 위버는 뭐가 되는 거지? 목숨을 걸고 연구한 그녀의 노력은 뭐가 되는 걸까? 결국 영화는 시고니 위버 바보 만들기가 되어버렸다.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구한 여전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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