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투 킬
조엘 슈마허 감독, 매튜 매커너히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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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A Time To Kill

  감독 - 조엘 슈마허

  출연 - 케빈 스페이시, 매튜 맥커너히, 산드라 블록, 사무엘 L. 잭슨

 

 

  찡하니 가슴이 아파서 ‘아놔, 진짜!’라고 안타까워하다가, 막판에는 ‘그렇지!’를 외치게 했던 책. 예전에 아주 좋아해서 나오는 족족 찾아 읽었던 작가의 책. 영화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그나저나 소설 감상문이 없다? 아! 내가 감상문 작성을 하지 않을 때였구나.

 

  무덥던 어느 날. 먹을거리를 사들고 집에 가던 흑인 소녀를 두 명의 백인 청년이 처참하게 강간을 하고 죽이려던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동네는 남부, 백인의 우월의식이 극에 달하는 동네였기에 두 청년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분위기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소녀의 아버지가 법정에서 둘을 쏴죽이고, 주인공에게 변호를 부탁한다.

 

  공교롭게도 주인공 변호사는 전형적인 백인 가족을 이루고 있는 남자였다. 흑인을 돕는다는 이유로 KKK단의 협박에 가족들을 대피시키면서, 온통 백인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단과 피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백인 판사를 앞에 두고 그는 몇몇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고군분투한다. 그럴수록 그를 향한 위협은 점점 강도를 높여간다.

 

  이 영화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오리엔트 특급살인’처럼 개인적인 복수가 과연 가능한지 말하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이 책에서는 법이 처벌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 불공평하게 적용된 것이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법의 처벌이 불공평한지 공평한지, 적절한지 아닌지 누가 판단하는 걸까? 피해자가? 가해자가? 제 3자가? 아니면 관련자가? 그것도 아니면 언론이나 여론이?

 

  누구나 다 자기 입장에서 판단을 하기에, 내가 제일 억울하고, 내가 제일 불쌍하고, 내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법의 판단이 내가 생각하기에 불만족스럽다고 마음대로 사사로이 처벌을 해도 되는 걸까?

 

  백인 건달들이 소녀를 폭행하고도 거들먹거린 것은 자기들이 이 동네에서 절대로 처벌을 받을 리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왜냐고? 속된 말로 자기들 구역이니까, 어떤 피부색이냐가 죄의 유무를 결정하는 곳이니까. 소설에서는 그들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 과정까지 나왔지만, 영화는 그 부분을 생략했다. 그래서 소녀의 아버지가 총기 난사 사건을 벌이는 장면이 좀 뜬금없어 보이긴 했다.

 

  딸이 처참하게 성폭행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면, 당연히 그런 일을 저지른 놈들과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놈들이 처벌도 안 받고 풀려날 게 뻔 하다면, 법의 효용성이나 존재 의의에 불만을 품을 것이다. 젠장, 이따위가 법이라니! 누구를 위한 법이야? 이런 생각을 당연히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쓰레기 같은 백인 건달, 성실하게 살아가던 화목한 흑인 가정, 너무도 어린 소녀에게 닥친 처참한 상황, 열악한 흑인 인권 등등. 특히 소녀의 강간 폭행 장면은 간접적으로 표현하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웠다. 거기다 변호사 부인은 ‘그런 일을 당했으니 일을 저지를 만해요.’라는 동정적인 대사를 노골적으로 내뱉는다. 아버지의 행동으로 총상을 당한 백인 부보안관 역시 는 죄가 없다고 재판정에서 외치기까지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저 아버지가 무슨 죄야? 건달 녀석들이 원흉이고, 도대체 변호사를 협박하는 KKK단이나 건달의 가족들은 뇌에 뭐가 들었기에 복수하겠노라 난리치는 거지? 미친 거 아냐? 개념을 어디다 흘렸기에 저러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변호사의 마지막 변호 장면에서 울컥하고, ‘그렇지!’라고 외치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조금 삐딱하게 보면, 호감형 외모에 말 잘하는 변호사만 얻으면 누구나 다 무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배심원제의 단점이 아닐까 싶다. 그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동정심을 어떻게 잘 자아내는가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니 말이다.

 

  아, 역시 세상은 외모 지상주의란 말인가!

 

  어쩌다가 결말이 이렇게 나는지 좀 의아스럽다. 분명히 법의 판결이 부적절한지 누가 판단하느냐와 개인의 복수가 가능한지가 문제였는데. 어쩌면 음, 법이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을 빨리 수용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스토킹이라든지 남자에 대한 성폭행 관련법이 미비하다고 알고 있다. 법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을 하고 변화에 적응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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