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댓글이 0(영)을 기록한 날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푸하하하~~~. (나중엔 댓글이 달렸지만.) 설마 나를 골탕먹일 속셈으로 모든 알라디너들이 어떤 모의를 한 건 아닌지를 의심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짜고 하는 게임에 끼어 있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런 모의를 할 만큼 내가 비중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 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그렇게 비중 있는 사람이라면 걱정할 게 뭐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스쳤다. 영광인 거지. 그러다가, 내가 비중 있는 사람이 못됨을 다행으로 여겼다. 내가 다수의 표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공감도 영이고 댓글도 영이면 어떠랴. 공감 수도 적고 댓글 수도 적으면 어떠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묵묵히 가겠다.
나아가, ‘영’을 즐기겠다. 둘째 아이가 어릴 적에 학교에서 치는 받아쓰기 시험을 빵 점 받아온 어느 날처럼 재밌다고 웃겠다.
그리고 생각했다. 공감 수와 댓글 수가 적은 내 글이 누군가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끼게 하고 위로가 된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거다. 인생은 그렇게도 살아야 하는 거다. 승자가 아닌 패자가 되는 느낌을 맛보며 사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괜 찮 다.
2. 무슨 이유 때문일까? 구***님, 프***님, 팜***님, 마***님, 말***님 등 다섯 분이 요즘 글을 올리지 않는다. 내 서재에 흔적을 남기지도 않는다. 서재 활동을 중단한 모양이다. “왜 나타나시지 않는 건가요?”라고 물어 보려다가, 아마 자기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있고 싶어서일 거야, 아니면 휴식 시간이 필요해서일 거야, 라고 생각했다. 요즘 김이 빠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의 서재에 들러 여전히 새 글이 없는 것을 볼 때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 제목을 이렇게 변형해 쓴다. ‘나만 새 글을 올리면 무슨 재민겨?’
나도 쉴까, 잠시 생각했다. 인생이 좀 피곤하긴 해서 나도 휴식이란 놈을 갖고 싶긴 하다. 열렬한 휴식을. 소극적인 휴식이 아닌 적극적인 휴식을.
3. 날씨가 좋구나. 나가도 되겠다. 안심이다. 기분이 좋다. 이젠 매일 아침에 창밖을 보며 날씨를 살피게 된다. 미세먼지 때문이다. 미세먼지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해졌다. 오늘처럼 창밖에 있는 먼 곳의 건물들이 선명하게 보이면 미세먼지가 없는 맑은 날이다. 이런 날이면 굳이 오늘의 날씨가 어떤지를 네이버 양에게 알아볼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미세먼지의 존재가 내게 기분 좋은 날을 선사한 셈이다. 미세먼지가 아예 없었다면 오늘이 기분 좋은 날이 아니었을 테니까. 만약 ‘불행’이 아예 없다면 ‘행복’도 없는 것과 같다.
4. 어느 분이 내 닉네임이 쓰기 불편하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불편하다. pek0501, 이라고 쓰면 영어로 쓴 부분이 한글로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고 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어느 서재에서 댓글로 ‘pek0501이 다녀갑니다.’라고 쓰는 것보단 ‘페크가 다녀갑니다.’라고 쓰는 게 편할 것 같아서 ‘pek’를 소리 나는 대로 쓴다고 생각하여 ‘페크’라고 쓰기 시작했다. 여러분도 그렇게 써 주시길.
저는 페크입니다.
5.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1>과 <인간의 굴레에서 2>를 다 읽었다. 두 권을 합해 천 쪽이 넘는 분량이라서 다 읽고 나서 뿌듯했다. <인간의 굴레에서 1>은 이미 읽어 놨고 <인간의 굴레에서 2>를 이번 3월에 읽었다. 다른 책들을 읽느라고 이제야 읽기를 끝냈다. (조만간 이 두 권의 책에 대해 나의 감상을 써서 올리려고 한다.) 같은 작가의 작품 <달과 6펜스>만큼 재밌다. 역시 그의 작품 <인생의 베일>도 재밌다.
<달과 6펜스>를 두 번 읽었는데, <인간의 굴레에서 1>과 <인간의 굴레에서 2>, 그리고 <인생의 베일>도 나중에 한 번 더 읽고 싶은 소설로 꼽는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첫 번째 읽을 때 놓친 좋은 문장을 읽게 되리라. 작품을 더 이해하게 되리라.
서머싯 몸의 작품은 다 읽으려고 계획했는데 차질이 생겼다. <서밍업>이란 책은 ‘품절’이라 구할 수가 없고, <과자와 맥주>는 동서문화사에서 ‘달과 6펜스’와 함께 묶어 나온 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달과 6펜스’는 두 권 가지고 있어서 이 책을 또 구입하기가 망설여진다. 어서 새로 출간하는 출판사가 생기면 좋겠다.
<서밍업>은 77개의 철학적인 짧은 글로 되어 있고 문학적 회상록의 성격을 띤 책.
<과자와 맥주>는 토마스 하디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던 책.
.......... 전자는 서머싯 몸만이 알고 있는, 문학에 관한 비밀들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고, 후자는 <테스>라는 소설을 쓴 작가의 이야기로 알려졌다니, 게다가 문단의 내막을 그린 것이라니 기대된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이 궁금해 죽는다. 무지 매우 퍽 몹시 굉장히 읽고 싶다.)
이 두 권이 새로 출간되기를 기다린다.
(에고... 출판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여... 유명한 작가의 구할 수 없는 작품을 알아보시고, 저 같은 독자를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6. 도정일 저자의 산문을 읽고 기죽었다. 하지만 나를 기죽게 만드는 글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몇 개 뽑아 옮긴다.
나자렛 예수가 태어난 곳은 여관방도, 호텔도, 산실도 아닌 말구유다. 그의 탄생은 가장 지고한 존재가 가장 미천한 곳에 내려온 사건, 말하자면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 가장 부유한 것과 가장 빈한한 것의 결합이고 만남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홈리스’이다. 그는 집이 아닌 곳에서 집 없이 태어난 존재다. 이상하지 않은가, 집 없이 홈리스로 태어난 자에게서 사람들이 되레 ‘집’을 발견하고 집을 구한다는 것은?
-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52쪽
나자렛 예수가 ‘홈리스’였다고 말하다니. 멋지다.
다음의 글은 나도 궁금해 하던 내용이어서 흥미로웠다. 문학을 읽는 사람들과 읽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어느 쪽이 자원봉사 활동을 더 할까?
문학 독자한테서는 비독자와는 다른 어떤 행동상의 특징이 발견되는가? (…) 가장 두드러진 발견은 문학 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자선활동이나 자원활동 같은 사회적 참여행위의 빈도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문학 독자들이 사회적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43%임에 비해 비독자의 참여율은 17%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83쪽.
시는?
사람들은 왜 시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시가 그들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의 핵심은, 내 생각에, 시가 ‘연결의 다리’라는 데 있다. 시는 사람들이 가슴과 가슴을 연결하고 나를 나 아닌 모든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고 나를 나 자신에게 연결한다. 사람과 사람들을 이어붙이고 인간과 별과 바람, 나무와 구름, 지렁이와 개구리까지도 한데 이어붙인다는 점에서 시는 인간이 가진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 나보다 더 작고 약하고 미천한 것, 그래서 내가 노상 업신여기고 깔아뭉개고 구둣발로 걷어찼던 것들도 사실은 내가 그 존재의 귀함을 몰라보았던 ‘더 큰 어떤 것’이다. 그 모든 작은 것들을 어느 순간 나에게로 이어붙여 그 존재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다. 사람들이 시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는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시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시가 가진 이런 느낌과 연결의 마술 때문이다. 시가, 문학이, 사람들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의 원천도 거기 있다.
-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82~83쪽.
이렇게 정리하는 글도 좋았다.
인간이 부단히 어떤 가치들을 추구하고 탐색해왔다는 것은 인간이 가치의 탐색자를 부단히 발명해온 존재라는 것을 웅변한다. ‘참’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인간은 과학자를 발명했고 ‘선’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철학자를 발명했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다가 시인을 발명하고 예술가를 발명했다. ‘생명‘이라는 가치를 위해 인간은 의사를 발명했고 지금도 발명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과 우정이라는 가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하는 인간을, 자유, 정의, 평등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목숨도 내던지는 인간을 발명했다. 그리고 지금도 발명하고 있다.
-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203~204쪽.
7. 에세이를 읽고 싶은 분들을 위해 ‘읽으면 좋을 책’으로 세 권의 에세이를 뽑는다.
왜?
이곳은 책 정보를 주고받는 곳이므로. 나도 책 정보를 많이 얻고 있으므로.
도정일 저,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이명원 저,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세 권 모두 제목이 줵인다. 표지도 줵인다.
내용도 줵이겠지.
세트로도 있구나.
세 권을 다 읽지 못했다. 다 읽고 나서 다음에 좋은 글을 더 뽑아 소개하겠다.
8. 누군가가 비밀 댓글로 내 글에 대한 느낌을 알려 주셨다.
“저 근데 사실은요.. 처음 한동안은 pek님이 남자분이신 줄 알았어요. 여성적 감각을 겸비한 20, 30대 청년 같았거든요. 단호함.. 의지..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느껴졌었어요.”
“문학쪽 혹은 국어쪽 분야에서 일하실 수도 (있겠구나) 했었어요. 글이 절도가 있다고 할까요. 차렷 경례..~~^^ 똑 부러지고 단단한 느낌.. 그랬거든요 페크님.”
하하하~~~.
내가 그런 줄 몰랐는데, 생각 못했는데, 그의 댓글을 읽고 보니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웃음이 나왔다. 나를 들킨 것 같았다. ‘단호함’, ‘의지’와 같은 말은 나와 친숙한 말 같아서. 그리고 ‘똑 부러지고 단단한 느낌’도 맞는 말 같아서. 내 글에 대해 ‘차렷 경례’라고 표현한 것은 탁월하기까지 하다. (이건 내가 몰랐던 거다.) 게다가 문학 쪽 혹은 국어 쪽 분야에서 일하는 것으로 추측했다니... 직업까지 맞추는구나. 글의 정직함에 새삼 놀랐다. 나는 내가 부드러운 여자의 모습으로 보이길 좋아하고 그래서 그런 모습으로 글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 니 었 다.
앞으로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글을 써야겠다.
(님! 고맙습니다. 제가 균형을 잡고 글을 쓸 수 있게 해 줘서 말이에요. 단단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겠습니다.)
아, 그런데 나의 어떤 글이 그런 걸 느끼게 했을까? 이상하다, 이상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의 댓글은 줄곧 내 글에 대해 호의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 그 댓글도 호의적인 관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부드러운 여성적인 문체와 단단한 남성적인 문체 중 어떤 것이 좋은가? 여자의 문체는 여성스러워야 하고 남자의 문체는 남성스러워야 하는가?
노노노노노... 둘 다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서 적합한 문체를 쓸 줄 알아야 한다. 문체를 골라 쓰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어떤 글엔 여성적인 문체가 필요하고, 어떤 글엔 남성적인 문체가 필요할 테니까.
어쨌든 그 비밀 댓글은...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라는 뷔퐁의 말이 내 머리를 세게 후려치게 만든 댓글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문체는 곧 나다.
(아이, 무서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