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들춰 보는 책이 여러 권 있긴 하지만 이 여름에 완독할 계획을 가지고 책 한 권을 고르고 싶었다. 올여름이 무덥고 길게 느껴질 것 같아 책을 읽는 재미로 여름을 보내고 싶어서다. 그리하여 고른 책이 「고리오 영감」이다. 이왕이면 꼼꼼히 읽고 좋은 문장은 밑줄을 그어 표시해 두었다가 필사해 보기로 했다. 


필사하면 네 번 읽게 되는 이점이 있다. 첫째, 글을 읽는다. 둘째, 밑줄을 그으며 또 읽는다. 셋째, 필사하기 위해 또 읽는다. 넷째 필사한 뒤에 틀린 글자를 찾아내 바로잡기 위해 또 읽는다. 


볼펜으로 필사하니 팔이 아파서 요즘은 노트북으로 필사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아무런 근심 없이 행복하게 칠 년을 지낸 다음, 불행하게도 그의 아내는 죽었다. 아내가 고리오에게 감정의 영역을 벗어나서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려는 때였다. 어쩌면 그녀는 그의 무기력한 감정을 계발하고 세상과 인생에 대한 지혜를 그에게 가르쳐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고리오에게 부성애가 부조리하게 나타났다. 아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배반당한 듯한 그의 사랑은 두 딸에게로 옮아갔다.(123쪽) 


아내가 죽자 그의 마음이 두 딸에게로 옮아간 것은 잘못한 일이었을까. 


돈이 많았던 고리오 영감은 두 딸에게 전 재산을 다 쓴 뒤에 그 딸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싸구려 하숙집에서 살다가 죽게 된다. 그가 아내와 사별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 같다. 



고리오의 딸에 대한 무분별한 헌신과 시기심 많고 세심한 사랑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었다.(123~124쪽)


무분별한 헌신은 배반을 당하는 결과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얘기는 이러하였다. 아내가 장사로 고생고생하며 돈을 벌어 그 덕분에 남편이 의사가 될 수 있었는데, 의사가 된 뒤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했다. 남편을 뒷바라지한 결과였다. 이상하게도 헌신하면 헌신짝 같은 신세가 되는 일이 많다. 



자연히 그는 두 딸을 교육시키는 데 무리했다. 고리오는 매년 육만 프랑 이상을 벌어들이는 부자였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천이백 프랑 이상 쓰지 않았다. 딸들의 기분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그의 행복이었다. (...)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딸들이 원하면, 이 아버지는 서둘러서 그 소망을 만족시켜 주었다.(124쪽)


부모가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면 버릇없는 자식을 만드는 꼴이다. 부모는 자식이 자기 욕구를 제어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부모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149쪽) 


세상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보트랭이 으젠에게 하는 말이다. 청년 으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보트랭이 자신이 터득한 요령을 으젠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삶을 성공으로 이끌고 싶다면 남의 것을 훔쳐야 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부유한 집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 덕을 보는 것.



내가 자네한테 해줘야 할 충고가 있다면 자네 의견이나 얘기에 너무 고집 부리지 말라는 것일세. 다른 사람들이 자네가 고집을 꺾길 바란다면 팔아버리게. 자기 견해를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란 항상 외곬에 빠진 사람이고, 자신이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리라고 믿는 바보일세. 원칙이란 결코 없네. 단지 사건들만 존재한다네. 법률이란 없네. 오로지 상황만이 있을 뿐이지. 뛰어난 사람은 사건과 상황에 순응해서 그것을 조종하는 법이야.(154~155쪽)  


줏대 없이 남의 말에 뇌동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주장을 굽힐 줄 모르는 것도 문제다. 



위대해지고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거짓말하고 굴복하고 굽실거리고, 다시 일어나서는 아첨하고 속이겠다고 결심하는 게 아닌가? 이미 거짓말했고, 굴복했고, 슬슬 기었던 자들의 하인이 되겠다고 동의해야 하는 게 아닌가?(158쪽)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자는 출세하기 어려운 법. 

 


마음은 좋은 안내자이지.(159쪽)


마음은 좋은 길로 안내하기도 하지만 나쁜 길로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케이블카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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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2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심이 살아있으면 좋은 안내자죠!?^^
고리오영감 반갑네요~~^^

페크pek0501 2025-07-23 15:50   좋아요 1 | URL
무더운 날입니다. 올여름 고리오 영감, 때문에 삽니다. 재밌어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7-22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덕분에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5-07-23 15:51   좋아요 1 | URL
탄탄 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시는군요. 저도 다른 분들의 밑줄긋기를 보고 책 구매를 정할 때가 많습니다. 발췌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죠.^^

yamoo 2025-07-22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리오영감 가지고 있긴 한데, 손이 안가요. 이상하게..^^;;

그나저나 케이블카 안에서 찍은 사진이 아주 멋집니다. 여긴 어딘가요??

페크pek0501 2025-07-23 15:5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오래전 사 놓고 이제야 읽습니다. 오래되어 책이 누래요.
이번 책 완독으로, 사 놓으면 언젠가 읽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길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25-07-23 15:59   좋아요 0 | URL
추신) 케이블카를 탄 곳 역시 부산입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천천히 가니 재밌더군요.

카스피 2025-07-22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사가 좋기는 한데 요즘 같이 무더운 날이면 필사하느라 땀이 너무 흘러 좀 힘드실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25-07-23 15:55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의 말씀이 맞아요. 힘듭니다. 저 페이퍼 작성하느라 시간이 엄청 걸렸어요.
밑줄긋기, 의 글을 올린다고 해서 쉬운 건 아니랍니다. 심사숙고, 엄정하게 글을 골라 베껴 써야 합니다. 하나도 틀리지 않게요.ㅋㅋ^^

서니데이 2025-08-02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점점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이 적어지면서 손글씨보다는 타이핑 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빠르기도 하고요. 책읽으면서 좋은 부분 필사하려면 다시 읽는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케이블카 사진은 바다도 멀리 보이고 나무 의자 느낌도 좋네요.
사진 잘 봤습니다. 페크님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5-08-06 10:42   좋아요 0 | URL
반가운 서니데이 님. 잘 지내시나요?
당연히 타이핑이 더 편하죠. 폰과 노트북 사용으로 더 그렇게 된 것 같아요.
필사하는 재미가 있긴 해요. 저자의 문장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이랄까요.
케이블카 사진, 잘 찍은 것 같습니다. 추억의 한 장! 사진이 있으니 여행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납니다.
아. 내일이 입추, 글피가 말복, 인 것 아십니까? 더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늦더위가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흐를 테니까요.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

stella.K 2025-08-06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필사가 4번 읽는 효과가 있었군요. 저는 요즘 그믐에 필사를 하고 있어요. 사실 필사가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쉬운 일은 아니더라구요. 그나마 그믐은 시스템이 좀 잘되있어서 하루에 한두 문장은 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이죠? 넘 더우니까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더라구요. 그래도 폭염은 꺽인 것 같긴한데 늦더위도 만만치 않죠? 남은 여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25-08-11 16:56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이 댓글 봤었는데 다른 댓글 먼저 쓰다가 깜빡 잊었어요. 요즘 제 정신이 이래요. ㅋㅋ 그믐에서 활동하시는군요. 다독, 보다도 정독, 하려고 필사해 봅니다.
정말 스텔라 님과 오랜만에 댓글 주고받습니다. 저도 너무 더우니까 아무것도 하기가 싫네요. 그래도 밤에 걷는데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서 가을이 오고 있구나 생각 들었어요. 늦더위만 남아서 다행입니다. 지금이 초여름이라고 하면 힘이 빠질 것 같네요.
스텔라 님도 남은 여름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