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지균 감독이 25일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인이 자살이라고 하는데, 연탄가스에 의한 질식이 주요인이라고 해 난 좀 놀랬다. 내가 기억하는 곽지균 감독의 영화는 늘 연탄가스 냄새를 맡는 기분이었다. 그의 영화는 '고뇌'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캐릭터들이 늘 등장했다. <겨울나그네>를 어릴 적에 보고, (그땐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던 시기였지만) 한동안 입 맛이 돌아오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인생을 저렇게 처절하고 외롭게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영화 속에서 꼭 봐야하나라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2~30분 정도 보고 나면, 어릴 적 겨울밤을 노곤하게 만들었던 연탄 기운이 들어온다.  

영화 속 인물들의 눈물이 침잠된 분위기를 만든다. 사람들은 서로의 눈물을 확인하며, 인생의 아픔을 노래한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청춘>까지, 그리고 <사랑하니까 괜찮아>까지. 그는 사랑과 인생에 대한 어떤 신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감독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영원히 <겨울나그네>의 곽지균으로만 생각해줄 수는 없었다. <청춘>에서 선보인 그가 강조하는 인간의 고뇌, 사랑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들은, 지금 영화라는 것 자체를 가장 많이 보러오는 세대들에겐, 낯선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남은 것은 인간의 육신에 대한 이야기들. 그 안에서 '성장의 고통은 육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속물적인 소재였다는 의심들.  (이것은 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 대중들이 늘 가볍게 보내는 의구심의 한 소절들이리라.)

그러나, 나는 가끔 사람들이 "시대에 뒤떨어진"이란 표현을 쓰는 영화들을 다시 볼 때마다, 과연 그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측면인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누군가는 이런 괴로운 사랑을 여전히 하고 있다. 다른 누군가는 이 침잠된 우울함 이 삶의 긍정을 위한 극한의 경험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처음부터 곽지균의 영화에 대한 매력을 찾기는 쉽진 않았다. 그러나 <청춘>의 마지막 씬을 보고 나는 조금 감이 왔다.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일이 없어, 우울하다는 정말 우울한 유서를 남긴 고인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애도는, 그의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다.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는,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어떤 방식. 우리가 어떤 허전함으로 인해 그리워하는 사랑의 방식과 그것이 채우는 풍경이 있다면, 곽지균 감독의 영화는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할지도. 

시도 외롭겠지만, 영화도 외롭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안타까운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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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실 저는 그 감독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많이들 그의 죽음에서 영화의 '위기'와 외로움 등을 읽는 것 같아 보이더군요. 그래요, 시도 외롭지만 영화도 외로운 것이라는 말, 정말 그래요..

얼그레이효과 2010-05-26 13:33   좋아요 0 | URL
롱씨, 오랜만이에요. 맥락이 많은 다른 저의 덧글일 수 있으나, 영화문화가 많이 죽은 느낌이에요. 제 졸업논문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글인데, 음..이런 '죽음'들로 인해 다시 영화라는 존재에 대한 긴장감 같은 걸 가지네요.

비로그인 2010-05-26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까지 가야했던 그 우울...
생을 스스로 접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참 가슴이 저며요.

얼그레이효과 2010-05-26 21:15   좋아요 0 | URL
네..애도한다고는 글을 썼지만..막상 그 느낌을 상상할 수 없다는 슬픔때문에..그 죽음에 대한 자신의 아픔을..자신만이 죽음이라는 공간으로 가져가야 하는 '외로움'이 느껴져...더 안타깝네요..

프레이야 2010-05-2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영화는 기억에 별로 없는데
'겨울나그네'는 유독 기억에 강렬해요.
연탄가스 냄새가 나는 듯 하다는 글귀가 정말 와닿아요.
명복을 빕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7 00:2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안녕하세요. 겨울나그네는 다시 보고싶네요. 제겐 <청춘>다음으로 기분을 착잡하게 한 영화라서. 유난히 '죽음'과 '애도'가 많아지는 몇 년이네요..

꿈꾸는섬 2010-05-2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청춘>이란 영화만 보았군요. 어째서 자살을 택하셨을까요? 정말 너무 가슴 아프네요.ㅠ.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7 02:25   좋아요 0 | URL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잊을만하면 다시 찾아오네요. 그래도 희망을 잃지말자구요.
 

 

 

 

 

 

 

 

 

내가 초등학교 후반, 그리고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1990년대 중반), 영화 광고에서 소위 '먹어주는 것'은 '전미 박스오피스 몇 주 1위'였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요즘 이런 광고는 먹히지 않는다. 실제로 예전보다 극장에 걸린 영화들 자체가 박스오피스 1위를 롱런하기가 어려워진 구조로 변했고, 관객들 자체도 이제 이런 카피에 그렇게 환호를 보내지도 않는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활황이었던 90년대까지 소위 '아카데미상 효과'라는 것도 꽤 인기있는 영화의 주목지수를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옛날만큼 번영을 꾀하기가 쉽지 않다.  

이 자리를 채운 것이, 관객들의 눈물과 웃음을 카메라에 직접 보여주는 광고다.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감탄에 찬 표정을 한 관객 여러 명을 잡아, 그들의 소감을 물어본다. 소위 '입소문'이라는 것 자체를 입소문을 퍼뜨리는 자를 영상 이미지에 담아 보여줌으로써, 영화 자체의 신뢰도를 높이는 전략인데, 나는 오히려 이런 '속 보이는 광고'를 더 좋아하지 않는다. 주로 대중영화 쪽에서 이런 전략으로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혹한다면, 이른바 세계 3대 영화제에 진출한 우수한 작품들이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걸 나타내는 광고는, '기립박수'다. 

유럽에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몇 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둥, 영화 저널리즘이 구성하는 이런 현실이 기사의 형식 속에 자리잡으면서, 나는 이런 '기립박수 효과'가 주는 함의를 고민해본다. 이번에 칸에 동시에 진출한 <하녀>와 <시>의 경우, 재미있는 반응을 담은 기사가 실렸다. 주로 <하녀>에 대한 반응이었는데, <하녀>에 대한 기립박수가 있자, 이것이 사실은 칸 영화제 특유의 의례적인 기립박수 문화에 온 것인지, 정말 영화가 좋아서 기립박수를 한 것인가에 대한 진위여부 가리기였다. 기립박수를 몇 분 했는가, 기립박수를 몇 분이나 오래 했는가. 이런 '반응'에 의해 결정된 어떤 작품의 위상.  

영화 자체에 상을 주는 것과 달리, 영화인에 대한 시상을 할 때, '기립박수 효과'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예전에 엘리아 카잔이 오스카 공로상을 받았을 때 일로 기억한다. 헐리웃의 역사를 아는 영화인들은 이 '영감'에게 기립박수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혹시 하지 않는 영화배우가 있다면 누구일까 등등 개인적으로 엘리아 카잔의 공로상 시상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설명하는 '친환경주의자'는 환경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환경, 소위 분위기에 약한 인간들이다. 시상식을 좋아하고, 시상식에서 기립박수 장면이 나오면 가슴 뭉클해하는 인간들. 초대가수가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데, 시상식에 참여한 배우들이 반응이 없자, 너무 예의가 없는 것 아니냐며 배우들을 질타하는 이들. 영화 <시스터 액트>의 마지막 합창 장면, <홀랜드 오퍼스>에서 리처드 드뤠이퍼스가 퇴임 기념으로 제자들과 마지막 합주를 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길 좋아하는 이 '친환경주의자'들에게, 어떤 영화가 기립박수를 몇 분 받았다는 내용은,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의 감성을 체득하는 또 다른 형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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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25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녀>는 저도 봤는데 기립박수를 보낼 정도는 아니었고,
<시>는 그럴 만했는데 분위기가 그렇지 못했죠.
저를 비롯해 관객들이 모두 야단맞은 학생들 같았거든요.
오랜만에 아주 호되게 야단맞은 기분이었어요.
마지막 문단에서 '친환경주의자'의 의미를 알고 한참 웃었습니다,
웃을 일은 아니지만 말예요^^

얼그레이효과 2010-05-25 14:5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하녀>는 시간나면 보고싶군요. 야단맞은 학생들.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니. 이 표현 참 좋구만요.
 

재미있는 아티클 소개.   



2001년도에 나온 <Keyframes:Popular cinema & Cultural Studies>란 책이 있습니다. 대중영화와 문화연구의 관계를 모색하고, 실제 분석 사례를 다양한 저자들의 참여로 엮어낸 책입니다. 영화를 흥미롭게 연구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유익한 해외원서가 되리라 싶습니다.(아직 번역되어 나오진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의 눈을 끄는 아티클은 Ina Rae Hark가 쓴 "Daddy, where's the FBI warning?"입니다. 80년대부터 활발하게 보급된 VCR을 통한 영화소비문화를 다룬 이 글에서, 저자는 영화 <나홀로 집에(1990)>를 흥미롭게 분석합니다. 저자는 이 영화가 당시 미국에서 비디오 문화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었고, 이 소비가 미국의 사회문화 현상, 또 정치적 현상과도 관계가 있음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비디오'는 중심적인 문화 소재가 됩니다.  

크리스 콜럼버스가 감독하고, 매컬리 컬킨이 애띤 소년 케빈으로 나온 이 영화를 아마 거의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국내에서도 큰 히트를 쳤고, 미국이야 말할 것 없구요. 저자는 이 영화를 설명하기 전에 80년대 헐리우드 영화 문화에서,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에 대한 해석을 시작합니다. 뭐, 우리가 아는 <E.T>, <백 투 더 퓨처>같은 영화들이 있겠지요.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이런 영화들의 히트작 중, 가족의 배경은, (좀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표현이지만)'정상가족'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흔히 우리 사회가 간주하는, 이성애적 관계에서 비롯된 부부, 아빠,엄마, 그리고 귀여운 아들과,딸. 그 관계에서 아버지가 부재하거나, 어머니가 없는 형편. 그 안에서 아들 혹은 딸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모험의 과정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지요. Hark는, <나홀로 집에>를 보면서, 케빈의 아버지, 어머니의 역할을 보라고 합니다. 아마 가정 내 역할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80년대 레이건 정부의 정책을 좀 되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미디어학자 제니스 팩의 <오프라윈프리의 시대>라는 문화비평서에 잘 나와 있지만,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에서 가장 강하게 정부쪽으로부터 확산된 담론은, 내 가정 지키기였습니다. 고로 가정 안과 밖의 경계는 분명해졌지요. 단란하고 소박하며, 행복한 가정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들은 그래서 더 심한 낙인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위협의 대상이었고, 가족 내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이상적인 '홈'을 지키기 위해, 방어막들, 특히 정신적 측면에서 잘 준비해야 했지요. 집에 대한 '순수의 이미지'가 확보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집 밖의 이미지는 '불결'한 것이어야 했죠. 그래서 타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 공포에 대한 경계선이 강하게 작동했습니다. 

저자는 <나홀로 집에>의 정치성을 위의 맥락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정상가족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소년은 '아버지의 자리'를 위임받게 됩니다. 실수로 자신을 두고 크리스마스여행을 떠난 가족들, 그리고 텅 빈 저택. 누군가 이  저택을 노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케빈은 이 저택을 지켜야 합니다. 그에게 혼자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건 잠시입니다. 그 즐거움과 가까이 한 가정에 대한 보호의 의무가 부과된 것이지요. 특히, 저자의 말처럼, 케빈이 다니엘 스턴과 조 페시라는 두 도둑(앞 이름들은 배우 이름입니다.)으로부터 큰 저택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것은, 총이나 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가정 테크놀로지였죠. 케빈은 집 안에 있는 친밀한 사물들을 이용해, 도둑들을 무찌릅니다. 저자는 이것을 두고, 케빈이라는 젊은 소년이, 자신의 집 안에 있는 사물의 유용성을 익히고, 그 메뉴얼을 습득하는 과정을 통해, 집을 지키는 어른의 위치에 있게 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안에, VCR(비디오)가 있습니다. 저자의 해석으론, 80년대 VCR의 대표적인 문화 기능 중 하나는 위험한 타자가 존재하는 가정 외부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VCR이 갖는 방어막이라는 상징성입니다. 즉, 아이들이 위험한 곳에서 난처해지지 않도록, 집 안에서 그들의 오락을 보장해줬던 것이지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VCR은 아이들에게 오락이 되었고, 또 교육이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VCR은 집 안에 유약한 아이가 있다는 걸 감추어주는 역할을 하죠. 케빈은 이 VCR을 마음껏 조종하면서, 피자 배달원이 자신을 얕보지 않도록 하고, 두 도둑에게 이 집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고 표시하는 기능도 합니다. 

장면을 하나 하나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족들이 떠나고, 집에 홀로 남은 케빈이 첫 날 한 일은, 부모님이 보지 말라고 했을 폭력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Angels with Filthy Souls>란 작품인데요. 



케빈이 재생한 이 작품은 실제로 존재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바로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1939년도 작품 <Angels With Dirty Faces>를 패러디한 것인데요. 



저자는 케빈이  첫 날 한 일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실제 미국 가족 문화 안에서, 부모님과 아이들의 문화적 실천의 문제를 고민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음화'라는 이미지로 덧씌워진 비디오라는 기기를 통해, 아이들이 폭력물과 야한 영화를 보지 않도록 부모들의 '오바스러운'태도가 존재했지요. 케빈은 바로 그 해방을 만끽하고 싶었던 겁니다. 케빈은 혼자서 가족들이 자신에게 먹지 말라고 했던 아이스크림, 과자들, 식품을 먹으면서, '규제'의 시선에서 벗어났음을 스스로에게 선언합니다. 



케빈은 그러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자, 이내 무서움에 치를 떱니다. 하지만, 결국 이런 무서움을 극복하고, 그리고 적응하여, 이 vcr을 비롯한 다양한 가정 테크놀로지 /문화 테크놀로지를 통해, 자신의 집을 지키게 되지요. 케빈이 피자를 시킬 때, 그가 그림 속에 보이는 리모콘을 가지고 패스트포워드(FF)로, 화면을 이리저리 건너띄면서, 집 안에 어른이 있음을 가장하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단순한 기발함을 넘습니다. 집 안에 있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케빈은 임시 가장 역할을 하게 되고, 그는 기술에 대한 번뜩이는 임시적 애호가 / 요령있는 '남자'가 되지요. 저자는 이러한 케빈에게 Em-powered boy-child라는 호칭을 붙여줍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폭력적인 영화가 가정에 주는 '유해'의 이미지는 케빈의 지혜로운 기술 소비를 통해, 케빈과 케빈의 가정에 대한 '존재론적 안전'을 책임지게 되는 것으로 변환되지요.

# FBI의 경고는, 집에서 비디오를 보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죠. (이는 미국 문화에 해당하지만) 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땐, 이 표시는. "극장 안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으로 변해 있습니다. 저자가 소개한 사례에서, 딸은 묻죠. 아빠, 왜 영화 시작하기 전에, FBI의 경고가 안 떠? 이는 곧 저자가 비디오 문화와 극장 문화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 요약한 인용 사례입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당시 VCR에 친숙했다는 증거이겠죠. 제가 바로 이 세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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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2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잼있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0:0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5-1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세대군요 ㅎ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0:08   좋아요 0 | URL
아하!^^

비로그인 2010-05-1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세대' ㅎㅎ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5:33   좋아요 0 | URL
아이구, 반갑습니다.^^

비로그인 2010-05-1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의 서재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어려운 공부를 하시는 분이군요.
가끔 들르면 제 특기인 '남의 어깨 너머로 하는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건강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5:33   좋아요 0 | URL
아구, 어려운 공부가 아닌데, 제가 늘 어렵다고 블로그에 징징대지요. ㅡ.ㅜ 후와님의 리뷰 읽고, 저도 시간 있을 때, 소설 탐독을.^^

빵가게재습격 2010-05-1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 님도 슬슬 알라딘에 중독되어 가시는 군요......반갑습니다.
(조심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곧 의존증으로 변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3 02:20   좋아요 0 | URL
요즘 하는 일 때문에, 생활 리듬으로 인하여 우연치 않게 글을 업뎃 많이 하게 되었네요. 하하. 이러다가 또 잠수탈 겁니다.
 

 
 

 신문방송학과에 들어온 친구들이, 신문과 텔레비전을 다른 학과생들보다 더 안 보는 세상, 그렇다고 심리학과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더 심리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없는 세상에서, 나 또한 전공명에 '영상'이라는 것이 들어가 있지만, 영화를 안 본지 꽤 되었다. (부끄럽게도 그렇다.) 그래서, '오랜만에' 졸업논문을 써야 한다는 부담을 떨쳐내고, 친구와 함께 영화 <시>를 보러 가려고 예매버튼을 눌렀다. 

로쟈님이 추천해주신 씨네21 특대호를 구하지 못해 아쉬운데, 나중에 친구들에게 빌려 보고, "그거 나한테 줄 생각없나?"하고 찔러봐야겠다.  

극장에 갈 때면,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양장점을 운영하셨던 외할머니는, 골무와 재봉틀, 하얀 초크의 삶에서 벗어나, 극장에 가실 때, 늘 기품을 강조하셨다. 잘 다려진 외출복을 입으시고,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정돈하셨다. 그리고 교회와 극장에 갈 때만 신으시던 구두를 장 안에서 꺼내, 절도있는 걸음으로 극장을 향하셨다. 

(정확하진 않지만) 내 기억에 외할머니께서 생전에 극장에서 보셨던 마지막 영화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였던 것 같다. 외할머니가 밥을 차려주시면서, 영화에 대한 정돈된 나름의 인상비평을 남겨주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물론, 외할머니는 극장에 늘 혼자 가셨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만의 길을 갔다. 떳떳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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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6 0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6 09:41   좋아요 0 | URL
저 털털한 사람입니다.^^!

비로그인 2010-05-16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진짜 멋진 분이시다아~!
고롷게 품위있게 늙고 싶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6 09:4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늙고 싶습니다!

2010-05-16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7 01:57   좋아요 0 | URL
정보 고맙습니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00240.html 

-> 아바타에 주눅든 '한국영화 3D 딜레마' 

지난 주에 가장 닭살 돋았던 기사는 한겨레의 <아바타에 주눅든 '한국영화 3D 딜레마'였다. 이제 이런 구도의 기사를 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내 스스로에게 일깨우기보다는 언론의 게으름을 탓하고 싶다. 마치 문화를 하나의 '침입'으로 보는 이러한 시선에 동조하며, 아이맥스관에 뱀이라도 풀어놓고, 삭발 투쟁이라도 해야할까.  

방송에서도 <아바타>에 대해 연일 찬사를 보내며, 우리도 영화 테크놀로지에 신경쓰자고 종일 외쳐댄다. 근데 말이다.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영화사에 한 켠에 쭉 자리를 차지할지는 몰라도, 그 혁신으로 말미암아, 영화 관객들이 그동안 지켜왔던 어떤 본질에 대해 손을 놓을 것이라는 점, 혹은 그동안 지켜왔던 가치관, 수용 방식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애정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만큼이나 어리석은 이야기는 없을 듯하다. 그것은 지나친 설레발임을 우리의 역사는 그동안 증명해줬다. 

하지만 문제는 '쌍팔년도식' 발언으로 아직 살고 있는 영화인들 많네?라며 영화계를 질타하기에 앞서, 이러한 프레임을 일찍 만들어 놓고, 그런 대답으로 사람들의 향수를 자아내려는, 이 미디어의 태도다. 그들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문제화를 시키기보다, 이미 문제화를 다 시켜 놓고, 목소리를 '딴다'. 고로 봉준호의 저 말(캐머런이 전 세계에 민폐를 끼쳤다)도 왠지 앞,뒤 다 자르고 한 것 같다. 한 유명 감독의 유머로 인식이 되는 저 말도, 왠지 80년대 민족주의 영화비평의 그 세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마치 모든 영화에 3D의 외피를 입혀야할 것 같다는 설레발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런 외피를 입혀야 '살아남는다'는 그런 '공포 효과'는 그만 보여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 시간에 <500일의 썸머>같은 영화가 보여주는 창의성,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보여주는 진정성 담긴 오마쥬를 심층적으로 다뤄주길 바란다.  

다른 한 편으론 <아바타>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야기가 진부하다' 대 아니다의 갑론을박도 왠지 식상한 풍경이다. 차라리 우리는 그런 식상한 풍경의 한 축을 담당한 이들을 각자 자신의 취향에 맞게 응원하기보다는, 그런 식상함이 왜 매번 일어날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 솔직하게 한탄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런 측면에서 김봉석도, 정성일의 코멘트도 조금은 아쉽다. 언제까지 '이런 영화'에, '이야기의 혁신'같은 안티테제로 맞설까. 그 대항의 논리가 너무 녹이 많이 슨 느낌이다.  

'이런 영화'앞에 정말 필요한 자세는 대중들이 나에게 또 '에그, 이 사람 평론가란 사람치고 나보다 분석안이 시원찮네"라는 걱정에 미리 주눅 든 평자의 공포가 아니라, "이런 영화 앞에, 나 정말 영화비평 못해 먹겠다"라는 또 다른 인상적인 '비평의 공포'가 아닐까. 차라리 한 번 속 시원하게 망한 자신의 모습을 비평에 그대로 실어보는 건 어쩌면 지금 우리 영화비평계에 필요한 혁신일 것이다. 그런데, 모두 자기가 똑똑하지 못한 비평가라는 욕을 먹을까봐, 있는 비평의 언어에서 있는 것만 챙겨먹느라 바쁘다. 불쌍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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