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118103034&Section=07 

-> 카이에 뒤 시네마와 필름 코멘트에서 2000년대 최고의 영화를 선정했다. 

 다음은 두 잡지가 영화평론가들에게 의뢰해 선정한 2000년대 최고 영화 순위이다. 

(본 것 표시해 봐야지. 본 게 별로 없다..아 게을러진 나..ㅜ.ㅜ 반성하자)

<카이에 뒤 시네마 >

1.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미국/2001년
2. 엘레펀트 /구스 반 산트/ 미국 /2003년
3. 열대병 /아핏차퐁 위라세타쿤/태국/2004년
4. 괴물 /봉준호/한국/2006년
5. 폭력의 역사 /데이빗 크로넨버그/캐나다/2005년
6. 종자와 노새 /압델라티프 케시케 /튜니지아/2007년
7. 철서구(鐵西區) /왕빙/ 중국/2003년
8. 우주전쟁 /스티븐 스필버그/미국/2005년
9. 뉴 월드 /테렌스 맬릭/미국/2005년
10. 텐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2002년

<필름코멘트>

1.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
2. 화양영화 /왕자웨이/홍콩/2000년
3. 하나 그리고 둘 / 에드워드 양/대만 일본/2000년
4. 징후와 세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태국 오스트리아 프랑스/2006년
5. 데어 윌 비 블러드 /폴 토머스 앤더슨/미국/2007년
6. 라자레스쿠의 죽음 /트리스티 푸이우/루마니아/2005년
7. 폭력의 역사 /데이빗 크로넨버그
8. 열대병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9. 4개월, 3주, 그리고... 2일 /크리스티앙 문주/루마니아/2007년
10. 뉴 월드 /테렌스 맬릭
11. 플랫폼 /지아장커/홍콩 일본 프랑스/2000년
12. 조디악 /데이비드 핀처/미국/2007년
13. 침입자 /클레르 드니/프랑스/2004년
14. 아들 /장 피에르 &뤽 다르덴형제/벨기에 프랑스/2002년
15.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2003년
16. 히든 /미카엘 하네케/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2005년
17. 킹스 앤드 퀸 /아르노 데스플레셍/프랑스/2005년
18. 엘레펀트 /구스 반 산트
19. 로얄 타넨바움 /웨스 앤더슨/미국/2001년
20. 비포 선셋 /리처드 링클레이터/미국/2005년
2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 /2001년
22.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아녜스 바르다/프랑스/2000년
23. 안녕 용문객잔 /차이밍량/대만/2003년
24. 세계 /지아장커/중국 일본 프랑스 /2003년
25.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도바르/스페인/2002년
26. 인랜드 엠파이어 /데이비드 린치/미국 프랑스 폴란드/2006년
27. 스틸라이프 /지아장커/중국 홍콩/2006년
28. 행진하는 청춘 /페드로 코스타/프랑스 포르투갈 스위스/2006년
29. 러시아 방주 /알렉산데르 소쿠로프/러시아 독일 /2002년
30. A.I. /스티븐 스필버그/미국/2001년
31. 사랑의 찬가 /장 뤽 고다르/프랑스 스위스 /2001년
32. 이터널 선샤인 / 미셸 공드리/미국/2004년
3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조엘&에단 코엔/미국 /2007년
34.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벨라 타르/헝가리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2000년
35. 그리즐리 맨 /베르너 헤어조크/미국 캐나다/2005년
36. 쓰리 타임스 /허우샤오셴/대만/2005년
37. 카페 뤼미에르 /허우샤오셴/대만/2003년
38. 평범한 연인들 /필립 가렐/프랑스/2005년
39. 친애하는 당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태국/2002년
40. 아임 낫 데어 /토드 헤인스/미국 독일 /2007년
41. 2046 /왕자웨이/중국 홍콩 프랑스/2005년
42. 바르다의 방 /페드로 코스타/포르투갈 독일 스위스 /2000년
43. 로스앤젤레스 플레이스 잇셀프 /톰 앤더슨/미국/2003년
44. 밀레니엄 맘보 /허우샤오셴 /프랑스 미국 스페인 그리스 /2001년
45. 라 코뮌(파리 1871) /피터 왓킨스 /프랑스 /2000년
46. 허트로커 /캐슬린 비글로/미국/2009년
47. 밀리언 달러 베이비 /클린트 이스트우드/미국/2004년
48. 거기는 몇 시인가요 /차이밍량/대만 프랑스 /2001년
49. 데몬러버 /올리비에 아사야스/프랑스 /2002년
50. 머리없는 여인 /루크레시아 마르텔/아르헨티나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2009년
51. 갇힌 여인 /샹탈 애커만/프랑스 벨기에 /2000년
52. 에스더 칸 /아르노 데스플레솅/프랑스 영국 /2000년
53. 아워 뮤직 /장 뤽 고다르/ 프랑스 스위스/2004년
54. 디스탄트 / 누리 빌게 세일란/터키/2002년
55. 사라반드 /잉그마르 베리만 /스웨덴/2003년
56. 홀리걸 /루크레시아 마르텔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2004년
57. 이 투 마마 /알폰소 쿠아론/ 멕시코 /2001년
58. 브로크백 마운틴 /이안/미국/2005년
59.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일본 영국 미국/2006년
60. 텐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프랑스 미국 /2002년
61. 사일런트 라이트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멕시코 프랑스 네덜란드/2007년
62. 높 /루크레시아 마르텔/아르헨티나 스페인/2001년
63. 더 차일드 /다르덴 /벨기에 프랑스 /2005년
64. 스타 스프랭글드 투 데스 /켄 제이콥스/미국/2004년
65. 붉은 풍선 /허우샤오셴 / 대만 프랑스 /2008년
66. RR /제임스 베닝/미국/2007년
67. 하우스 오브 머스 /테렌스 데이비스/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2000년
68. 25시 /스파이스 리/미국/2002년
69. 35럼 샷 /클레르 드니/프랑스 독일 /2008년
70. 서머 아워스 /올리비에 아사야스/프랑스/2009년
71. 괴물 / 봉준호/한국/2007년
72. 어댑테이션 /스파이크 존스 /미국 /2002년
73.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소피아 코폴라/미국 일본 /2003년
74. 게리 /구스 반 산트/미국/2002년
75. 공공장소에서의 개인적 공포 / 알렝 레네/프랑스 이탈리아/2006년
76. 마이 위니펙 /가이 매든 /캐나다/2007년
77. 펀치 드렁크 러브 / 폴 토머스 앤더슨/ 미국/2002년
78. 팻 걸 /캐서린 브레이야/프랑스 이탈리아 /2001년
79. 디파티드 / 마틴 스코세즈/미국 홍콩/2006년
80. 파 프롬 헤븐 /토드 헤인스/미국 프랑스/2002년
81. 도니 다코 /리처드 켈리/미국/2001년
82. 무라데 /우스만 셈베네/ 부르키나 파소 모코코 튜니지아 카메룬 프랑스 /2004년
83. 해변의 여인 /홍상수 /한국/2006년
84. 살인의 추억 / 봉준호/한국/2003년

85. 철서구 /왕빙/중국/2003년
86. 웬디와 루시 /켈리 레이처드/미국/2008년
87. 트러블 에브리데이 / 클레르 드니/프랑스 독일 일본 /2001년
88. 팜므파탈 /브라이언 드 팔마/미국 프랑스 /2002년
89. 2층의 노래들 /로이 안데르손/스웨덴 /2000년
90.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미국 /2006년
92. 겁쟁이 로버트 포드에 의한 제시 제임스의 암살 /앤드류 도미닉 /미국/2007년
93. 라스트 데이스 /구스 반 산트/미국/2005년
94. 과거가 없는 사나이 / 아키 카우리스마키/핀란드 독일 프랑스 /2002년
95. 둑이 무너졌을 때 /스파이크 리 /미국/2006년
96. 베스트 오브 유스 /마르코 튤리오 지오다나/이탈리아/2003년
97. 생활의 발견 /홍상수/한국/2002년
98. 24 시티 /지아장커/중국 홍콩 일본 /2008년
99. 인 더 시티 오브 실비아 /호세 루이 게린/스페인 프랑스 /2007년
100. 하얀 리본 /미카엘 하네케/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2009년 

 + <아바타>가 결국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을 가져갔구만. 카메롱 형님이 다시 킹 오브 더 월드를 외칠려나, 오스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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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와 함께 늘 대두되던 문제였다. 이제 영화전문기자라든가, 영화평론가들은 알아서 기는 듯, 아니면 진짜 풀이 죽은 듯, 상당히 '타인지향형'적인 기사와 비평을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의 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최대한의 효과가 '혁신'이기보다는, 약간의 '각성'정도로만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늘 체험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위기담론의 위기를 내놓으며, 또 종언담론의 종언을 주장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는 남아있지 않겠냐라는 안타까운 옹알이를 해댄다.  <씨네21>의 최근 몇몇 글 중 나는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아바타>에 대한 평자들과 글쟁이들의 시각을 보면서, 감히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영화비평'의 어떤 수준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 수준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바타>를 통해 그들이 제시하는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그런 영화의 미래를 제시하는 그들의 미래를 고심해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하나.  이런 우울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부족한 소견 몇 개를 끄적여보면 다음과 같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9&article_id=59314  

-> 김중혁, 카메론의 시간은 거꾸로 가나 

엄밀히 말하자면, 김중혁은 전문적인 영화평론가는 아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한국 문단에서 나름 유익한 발견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있는 작가이다. 작가의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의 지각을 인식하며 그 지각에 자극을 주는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는 꾼이다. 그래, 이 측면에서 그가 <아바타>에 느끼고 있는 실망감의 타겟. 바로 이야기의 허술함을 꼬집는 건 이해해주겠다. 그런데,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이번 글은 이 좁디 좁아진 영화잡지에서 엄하게 큰 두 페이지를 책임질 수 있는 내용으로선 최하의 레벨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아바타>를 대하는 시선은 늘 이럴 때 나오는, 내가 '홍대주의'라 부르는 특유의 스노비즘이다. 그는 마치 모두가 다 환호하는 것에 나는 그 환호가 그리 대단하지 못하겠다라고 하는 90년대식 홍대형 스노비즘을 보여준다. 근데 그의 이런 시선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이럴 때 나오는' 어떤 관행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영화에 나타나는 어떤 측면, 그 측면이 갖고 있는 새로움이 사실상 별 새롭지 않다는 류의 지적은 내가 보기엔 어떤 '문화적 고집'으로서 갖는 비평의 지향이 아니라, 마치 7080담론의 과잉이나, 9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 과잉에 머무른 지양되어야 할 평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지양되어야 할 시각은 <씨네21>에 <아바타>를 평한 이들이 모두다 한 걸치고 있는 그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이 '호들갑스러움'의 스펙터클을 좀 차분히 보기 위해서 이런 비평의 수사를 활용한다. "사실 <아바타>가 보여준 면모들은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지요". 결국 평자들은 영화적 교양주의를 다시 챙겨, <아바타>를 정리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우려하는 것은 그렇게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어서, <아바타>를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 그 위치에서만 머무르게 한다면, 그것은 '창조력' 제로인 비평이라는 점이다. '창조력 제로'인 비평의 위치에 근접한 평자들이 쓰는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로 결국 영화세계사 책을 다시 끄집어 내게 하여, <아바타>에 숨어 있는 다른 영화들의 기시감을 언급하는 수준으로만 끝나는 비평들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  

그나마 허문영이 737호에서 <놀라운 현실감 갖춘 퇴행적인 동화>란 비평에서, <아바타>를 둘러싼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형태의 시각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용어를 제대로 알고 써라라고 말하는 점은, 오히려 권장할만한 것이다.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가 하나의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의 특징을 해부하면서, 주는 쾌감은 기껏해야, "내가 이 영화를 예전에 알았나, 봤나"정도로 마무리되는 '정보 차원'의 언급이다. 그러한 언급은 영화를 성찰할 수 있는 '진정성'의 에토스를 확보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아바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옛 영화를 알고 있다는 '스노비즘'에 머무른 채, 아무런 발전 없는 시각에 머무르고, 그 머무름을 머무르지 않음으로 착각하는 위치까지 나아가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장 실망스러운 글은 736호 <아바타, 과연 혁명적인 대작인가>라는 제목의 4인 대담이다.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이 선수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다가와, 영화를 자극했을 때,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영화적 본질이란 지켜보자라는 구태의연한 자장 안에 눌러 앉은 시선으로 영화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혁명'이란 수사 앞에서, 평자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아바타>의 '혁명'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비평적 시선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만다.  

영화 평론가들의 게으름을 탓하고 싶다. 영화가 새롭다, 혁명적이다 라는 것을 평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에 기반한 자세가, 퇴행적이어야 하나. 그리하여, 혁명적임을 조금 누그러뜨려, 그 퇴행이 아바타를 둘러 싼 광풍 어린 혁명이란 수사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만약 과감하게 외치는대로, 아바타가 그리 혁명적이지 않은 영화라면, 그들마저 혁명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맞불을 놓을 필요는 없었다. 즉, 그들은 아바타의 혁명이란 수사를 영화가 갖고 있는 어떤 역사적 본질이란 견고한 덩어리로 무너뜨리려 했는데, 그 역사적 본질의 틀이 과연 영화를 둘러싼 불변의 진리인지는 의문에 붙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의문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행적 비평으로 혁명이란 수사를 깨뜨리려는 우를 범한다.  

흑백 영화에서 칼라 영화로,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전이, 그 전이의 공포가 준 역사적 체험이 있었다. 그리고 영화평론가들은 그 역사적 체험의 교훈에 찰싹 붙어, 그 교훈이 주는 사례들은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따르는 듯하다. 물론 <아바타>가 가진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영화판의 엄청난 변혁을 도모하진 않으리라 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제3의 지점을 찾아보려 하지 않은 영화평자들의 자세가 안타깝다. 기술의 다가옴, 영화와의 접촉, 그리고 이어지는 기술에 대한 부정과 영화가 갖고 있는 본질의 고수. 이 안에서 호불호가 갈리고, 그 호불호를 깨는 새로운 틀의 시각은 시도조차 않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늘어나는 것은 영화의 내부가 아닌, 영화의 외부다. 어떤 '경제주의'에 침윤된 일련의 현대 영화비평이 갖는 위험성을 여기서 바라본다. <디 워>의 난분분한 비평 장이 그랬듯이, 결국 <아바타>를 수놓는 돈다발, 그것을 촉발한 테크놀로지와 영화의 커넥션. 그러면서 늘어나는 것은 영화가 아닌, 영화를 둘러싼 숫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숫자 안에서 멀티 플렉스와 아이맥스, 입체안경 등의 수용 환경과 문화 산업은 영화 내부에 대한 심층적 해석의 자리를 강탈한다.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아바타>를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과학에 대한 게으른 그리고 정체된 그 무엇의 시선을 느낀다. 과학과 사회, 그리고 과학과 문화이 접촉하는 그 지점 안에서, 나오는 반응들, 그리고 그 반응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자들이 내놓는 시선의 정체와 퇴행은 비평의 시간이 갈수록 거꾸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다시 새겨 넣게 만든다.  

그들은 비평 속에서 실컷 과학과 영화를 매개하는 새 시대의 영화철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들이 고수하는 것은 영화에 내재된 '인문주의'를 어설프게 옹호하면서, 각자가 어설프게 공유하려는 듯한 영화적 교양주의를 설파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한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명제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두려움을 고작 지금의 수준에서 활용한다면, 나는 영화의 미래보다 비평의 미래가 더 불확실함을 과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그들이 보여주는 '영화적 고집'이 오히려 평자로서의 강인한 고집이라기보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시선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한다는 기죽음에서 발생한 '타인지향적 고집'이기때문에, 그들이 보여준 고집의 시선은 더 퇴행적으로 느껴진다. 깔려면 더 새롭게 까고, 옹호하려면 더 진득하게 옹호해라. 죽도 밥도 아닌 눈치 보는 비평을 하지 말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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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1-1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창조적 비평'이란 정말 가능할까요. 어떤 비평이 창조적일때, 왕왕 텍스트는 그 비평을 위한 재료로서만 제약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형태가 될 때, 비평은 비평에서 벗어나 새로운 담론으로 들어서고, 그럼 면에서는 작품분석을 넘어서 철학적 텍스트로 비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컨데 비평이라고 부르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읽고 몇 자 적고 싶어서 빈약한 댓글 남겼습니다. 건필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1-1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부터, '꿈'보다 '해몽'을 좋아한 터라, 비평이 가져야 할 야망의 파이에 대해서 나름 희망을 갖고 있나봅니다.^^' 부족한 글에..덧글 고맙습니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비평의 지점은 텍스트 안에서 적확하게 놀아야겠지만, 비평의 자장은 그 텍스트를 넘어서는 무엇이라 생각해서요. 거기서,,창조적이라는 수사에 대해 고민을 해봅니다. '해몽'이 꿈보다..다만..그 꿈을 허황되지 않게..꿈을 존중하는 해몽이..환호받는 세상이 되길 고대해봅니다. 그런 점에서..작품을 넘어설 수 없는 현실과의 거리에서..작품을 가끔 넘어설 수 있는 이상을 체감할 수 있는 가능성의 비평이..바로 창조적 비평과 가장 근접한 무엇이 아닐까..지금으로선 그 정도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아직 머나먼 무엇이지만요..덧글덕분에..신중하게 되네요. 지적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부재하는 것은 '시민'이다. '시민'은 실현되어야 할 이상, 곧 아직 추구되지 않은 현실이다. '시민의 서사'는 이 영화에서 '탄생'이 아닌, '복권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저 사람들에게 핏빛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고 해서, 그들에게 검투사의 생살여탈을 함성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시민'이라는 위상을 덧씌울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생살여탈권의 주인은 아직 '코모두스'이다. <글래디에이터>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not yet, '아직은'이다. 이 '아직은'이란 시간의 표현 속에서 저 무수한 이들은 '군중 mob'으로 정의된다. 그들은 '아직' '참-권리'를 행사하고 있지 못하다. 황제는 '아직은'이란 시간의 수사를 잘 활용할 것이다. 이 수사 속에서 '시민 되기'의 야망을 겸손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이는 '공화제'를 열망하는 이들은, 그 열매를 수확할 것이다. 고로 우리가 이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파악해야 할 것은, '의사-권력'이라는 달콤한 선물을 준 코모두스가 행사하는 현실 속의 진짜 권력이다.  

우리는 아직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강조하는 억압과는 다른 차원의 권력론으로 섣불리 해석할 수도 없다. 아직 우리는 '생-정치'라는 말을 여기에 쉽게 덧붙이기 어렵다. 다만 이론의 삽입이라는 흥분을 가라 앉히고, '생살여탈권'이라는 힘 자체에 주목하자.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주권자'라는 이름을. 이 주권자의 통치를. 그 통치 형태를. 차라리 이것은 스튜어트 홀이 『대처리즘의 문화정치』에서 말했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에 가깝다. 멀리 갈 것 없이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보여준 그 기이한 스펙터클의 정치는, 저 오래 전 로마의 폭군 코무두스가 보여준 통치 방식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단순히 시각성이 주는 쾌락, 그 광엄함과 웅장함이라는 스펙터클에서 유사 관계를 따질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정치의 목적이 과연 '시민을 위함'에 있었던 것인가에 봐야 한다. 코모두스의 '권력'은 오히려 군중과의 거리를 두기 위해, 군중을 포섭하는 것이었다.(전두환과 코모두스의 걱정은 자기 생명의 보존이었을 것이다) 이 포섭 전략 속에서 코무두스는 군중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그들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다는 황제의 권위가 가장 가까이 기대고 있는 것은, 사실 그 스스로의 생살여탈권이다. 자신에게 두려움이 되는 존재, 자신을 살리거나 혹 죽일지도 모르는 존재들. 코모두스를 둘러싸는 그 존재들이란 정확히 말해,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이상. 바로 '시민-되기'의 열망을 꿈꾸는 자들이 취하는 분노의 눈빛이다.     

 푸코가 말했던 것처럼, 법은 검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그 자신이 법이었던 코모두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는 엄지손가락, 가까이에 있는 검. '시민의 열망'을 가진 자들은 검의 논리에 설 수 없다. 법 앞에 서 있는 시민은 곧 검 앞에 서 있는 시민이었으며, 그 '서운한' 공포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콜로세움에 진입하여 막시무스가 코모두스를 다시 대면하게 될 때. 군중들이 외치는 '살려라!'라는 구호는 사실 코모두스가 군중들에게 듣고 싶어하는 것인지 모른다. '시민의 서사'를 회복하려는 즉시, 자신은 '시민 되기'의 열망에서 배제될 수 있음을 코모두스는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내세우는 그 엄지손가락의 올림과 내림이란 '상징'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의 권력이 비추는 강함과 약함이 얼마나 약한 경계 속에 있는 것인가를 뜻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자신이 법체로서 갖는 강권함을 '과시'하는 쪽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권력 그 스스로의 강권함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던 코모두스의 연약함에 더 마음이 간다) 그리고 그 약한 경계 속에서 코모두스가 군중들의 엄청난 '결정의 소리'들을 접했을 때, 그가 갖는 엄지손가락의 '결정 상태'는 그 스스로가 자신에게 생살여탈권을 스스로 행사한 것일 수 있다. "시민이여, 아직 나를 죽이지 말아라!. 비록 나는 너희들보다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나에게 검은 검이 아니오, 오직 나의 검은 이 콜로세움에서만 빛을 발하는 엄지 손가락임을".  막시무스는 바로 그 지점을 알고 있고, 그래서 코모두스는 그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폭군으로 묘사된다.  (두려움의 극단적 방어는 살인이 아닐까)  

 어찌 보면 이 '시민-되기'의 열망이 우리에게 사유의 지점을 하나 던져주었던 건, '살려라!' 그리고 '죽여라!'라는 구호 자체의  실효를 꾀하는 자들의 중첩이다. 황제도 군중도 살려라!와 죽여라!를 외친다. 그러나 코모두스는 콜로세움의 핏비린내라는 살인의 풍경을 군중들이 '기호'로 느끼게 끔  만든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의 생살여탈권은 행사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그것을 감상하고 반응할 뿐이다. 이 '행사'의 권리는 코모두스의 것이다. 그러나, 이 권리를 감상과 해석이 아닌 실제 행위로 참여하고픈 집단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시민'이다. 이는 시민의 잔혹성을 섣불리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시민으로서 생명을 이야기하는 차원이 아닌, 생명의 존엄을 스스로 수호할 수 있는, 결정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의 권리를 확보하고 싶은 자들이 시민이다.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군중. 그리고 이 군중에게 던져지는 빵 덩어리들. 그들의 쾌락을 바라보는 황제와 권력자들. 막시무스는 아직 시민이 되지 못한 군중과 시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황제 사이에 존재한다. 그는 황제의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자에서 로마시대 황제와 극단의 계급적 위치에 있던 노예의 서사를 감내해야 했던 자였다. 이 파란만장한 자기 서사 속에서, 우리는 그 서사가 감내하는 고통을 알고 있다. 우리가 시민이 되기 위해 쏟아 부었던 역사의 광경들 또한 알고 있다. 고로 우리에게 시민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지만, 그 고요를 떠받드는 것은 여전히 살벌한 늑대의 시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또 그 시간을 망각하게 만드는 오늘날 권력자들의 통치를 날카롭게 보고 싶은 열망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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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 때부터 '법 영화'를 보는 것을 참 좋아했다.  이 쪽의 대가는 지금은 그 인기가 많이 죽은 듯한 존 그리샴이 아닐까 싶다.  <야망의 함정>,<펠리컨 브리프>,<의뢰인>,<타임 투 킬>, <가스실>,<레인메이커> 등등 그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나오면 꼭 챙겨봤고, 비디오테이프로도 소장해놓았다. 영화가 흥미로우면 소설도 덩달아 샀던 때가 많았는데, <야망의 함정>의 원작인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린 시절, 외국 소설의 문체가 눈에 제대로 익지도 않았을 때인데, 막무가내로 읽었던 듯하다. <야망의 함정>을 감독했던, 이제는 고인이 된 시드니 폴락은 내가 소장한 dvd 타이틀 중 아끼는 작품인  <마이클 클레이튼>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8년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마이클 클레이튼>은 한때 인기 장르로 자리매김했던 법정 영화의 맥을 전유하고 있다.  





<마이클 클레이튼>을 대충 본 이들에게 가장 의문으로 남는 씬은, 마이클 클레이튼이 곧 폭발할 자동차에서 내려  기이하게 세 마리의 말을 쳐다보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씬은 <타임 투 킬>에서 매튜 멕커너히가 사건이 풀리지 않아 괴로워할 때, 아내인 애슐리 주드가 갑자기 귀신처럼 나타나 어떤 영감을 주는 그런 '신비스러운' 장면과는 차원이 다르다. 클레이튼이 말 세 마리를 바라보는 장면은 본 작품에서 큰 핵심이며, 제이슨 본을 치밀하게 조직한 경험이 있는 토니 길로이는 이 씬을 위해 친절하게 힌트용 두 씬을 깔아놓는다. 죽은 친구인 변호사 아서와 클레이튼의 아들은  『Realm & Conquest』 란 책을 통해 클레이튼의 죽을 운명을 변화시켜주는데, 사실 이 대화 이전에, 아들이 클레이튼에게 삶에서 누구나 믿을 수 없다라고 하는 메시지가 책에 들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대목- 정확히 말하면, 클레이튼은 이렇게 말한다. "(아들이 책 속의 각 캐릭터들은 15개나 되고, 이 캐릭터들은 모두 서로를 믿지 못한다고 말하자) 삶과 같군"-은   삶의 어떤 윤리, 지켜야 할 정의, 그리고 자본과 법의 관계를 묻는 이 영화의 theme scene이기도 하다.  





법정 영화에선 특히 법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자들의 양심을 해부하는 작업을 자주 시도한다. 법은 우리 사회의 부패를 막아주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지만, 그 부패의 온상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법은 사실 가냘픈 그 무엇이기도 하다. 아감벤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생각. 법이 갖고 있는 강건함을 약삭빠르게 아는 권력자들은, 법에서 법이 아닌 듯한 법을 위치시켜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은 이런 모호한 관계에서 자신의 강건한 '법체'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 '법체'의 모호함을 그 누구나가 다 알지 못하게  관리하는 권력자들에게 법은 상을 내린다.  그러나, 이 상은 법의 틈이자, 부정의함의 열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열림은 법과 마주친 개인의 양심이 어떤 경계 속에서 '죽은 체'연기를 해야할 지, 살아있다는 '선언'을 해야할 지를 갈등하게 만드는 진입구이기도하다. 클레이튼은 여기서'죽은 체 하는 연기'를 포기한다. 그는 아들의 말을 따라, 『Realm & Conquest』에 나오는 이들처럼, 같은 꿈을 꾼 듯한 모습으로 말이 있는 그 동산으로 갔으며, 거기서 죽은 친구의 어떤 부름을 각인해야 하는 의식을 치룬다. 법을 이기는 어떤 신비로움. 이 신비로운 장면은 사실 이 영화의 서사를 망치는 판타지가 아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하나의 문제적 씬이다.

# option -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Last Scene (이 영화의 품격을 보여주는 장면) 



마이클 클레이튼이 사건을 해결하고 50불만큼 길을 돌자는 말을 택시 기사에게 한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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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졸업 논문 준비로, 한 학기 동안 도외시해왔던 -제 '주무'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 문화연구' 서적들을 다시 챙겨보는 중입니다. 그 가운데 좀 예기치 않은 '수작'을 발견했는데 김선아 선생의 『한국 영화라는 낯선 경계』라는 책입니다. 부제가 이 책의 내용을 다 말해주고 있는데요. 길지만 인용해보면 "코리안 뉴웨이브와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의 국가, 섹슈얼리티, 번역, 영화"입니다. 한국 영화의 사회문화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연구 영역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상 분야에 관심 많은 문화연구자들이 사회학적 사고를 통해, 영화 외부의 담론들을 연구하는 논문을 자주 발표하고 있고, (정통)영화학과에서 이론을 공부하는 이들도 영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호관련성을 조망하면서, 한국영화의 한 '꼴'을 보려는 작업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평론가 매혈기』의 저자인 영화평론가 김영진이나, 다들 좋아할 정성일의 시각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에 김선아 선생의 책을 보면서 '흡족한' 구절들이 많아 도그지어 자국이 꽤 됩니다.  

이 책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요.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라는 대표적인 영상 매체가 갖는 힘. 그리고 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자본의 스며든 형태에 대하여, 서구/비서구의 구도에서 과연 서구 중심의 '시각 경제'와 그 경제의 특성과 효과에 영향을 받는 비서구 국가들의 '지역성'은 어떻게 '통'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 책은 자주 화두를 던집니다. 제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소위 한국에서 작가주의 영화라고 하는 홍상수/김기덕/임권택/박찬욱 감독 등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텍스트'의 특성을 분석하고, 그 분석된 안이 어떻게 영화 외부적 시각과 관계맺을 수 있는가라는 저자의 시선 짚기입니다. 일례로 저자는 임권택이 꾸준히 고수하고 있는 민족적 특성으로 간주되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뱉어내는 형식성이 전지구화적 시각경제에서 하나의 특이성이라는 주목 영역에 진입하지만, 그러한 주목 영역의 진입은 동시에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오리엔탈리즘과 동맹을 맺을 위험이 있다 지적합니다.(사실 이 지적은 좀 새롭진 않아보입니다.서편제와 전지구화적 시각 경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찍이 탁석산 선생이 『한국의 정체성』에서 들었던 사례와 비교해서 읽게 되더군요) 

좀 재미있는 것은 제가 요즘 천착하고 있는 역사 과잉으로 촉발되는 '몰역사성'의 우려입니다. 책에서는 제 고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주지는 않습니다만, 영화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한 비서구 사회의 '기술적 근대화'가 이른바 '역사- 향수 영화'를 많이 생산하는 것에 대한 욕망을 저자는 밝혀보려 하는데요. 저자는 트랜스 내셔널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는 이 시대에, 비서구사회가 과거 억눌려왔던 혹은 인정받지 못했던 그 어떤 민족의 우울과 퇴행성들을 극복하려는 몸짓으로 서구가 일찍이 포기해왔던 부분들을 복귀시키거나, 또 서구에 결핍된 현존하는 가치의 형태들을 복원하려는 몸짓으로 봅니다. 이 몸짓은 즉 '인정의 몸짓'인거죠. 무엇보다 이런 인정의 몸짓은 '기술적 근대화'를 가친 비서구 국가들의 발전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역사/ 향수 영화를 통해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이른바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갖고 있는 어떤 기계성의 특징. 그 기계성이 촉발하는 스펙터클로 인하여. 틈입된 이미지의 힘이 과연 역사와 개인의 진정한 만남. 심층적 만남을 고려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여기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견해가 자주 인용 되더군요). 역사의 상품화. 스토리텔링의 욕망에 대해서는 김기봉 선생의 『역사들이 속삭인다』를 보면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임을 느낍니다. 김기봉 선생의 시각보다 이 책에서 더 주목하고자 하는 건 바로 '매체'라는 기계성의 존재가 갖는 힘이겠지요. 이 기계성이 단지 우리에게 영화를 '보여준다'라는 동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을 '지배한다'라고 본다면, 이 매체가 갖는 인간과 역사의 관계는 매우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라는 문화 테크놀로지가 주는 재현의 힘. 그리고 그 힘에 영향을 받고 사는 우리 '영상적 인간'들의 수용 형태들. 『선덕여왕』,『아이리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로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집 안에서 영화관을 꾸밀 수 있는 시대에, 이런 구분은 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이런 구태의연한 구분보다 더 중요하게 짚어야 할 점은, 이러한 스펙터클이 아무렇지 않게 우리의 가정 속으로 들어와 편안하게 이 스펙터클을 즐기고 있는 어떤 시점. 어떤 시/공간의 경험 상태다. 전지구화적 시각 경제에서 집 안에서 나를 계속 움찔거리게 만드는 '뵨사마'와 '고미실'의 시각언어는 과연 나의 어떤 욕망선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그 욕망선의 주도권을 이미 이 이미지들에게 내준 것 같은 상황에서, 역으로 이 주도권이라는 권력의 한 형태를 영상 세계, 시각 경제라는 곳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분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시각'은 그 생물학적 존재에서 '시각성'이라는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시각성의 이데올로기가 나의 감각을 지배하는 단계에서, 그 이데올로기가 정작 소유하려 하는 것은 감각 뒤에 숨은 우리의 지성일 겁니다. 그 지성이 자극 받는 순간. 해석의 언어들이 이미지와 악전고투를 벌이겠지요. 저도 이 싸움을 벌이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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