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후반, 그리고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1990년대 중반), 영화 광고에서 소위 '먹어주는 것'은 '전미 박스오피스 몇 주 1위'였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요즘 이런 광고는 먹히지 않는다. 실제로 예전보다 극장에 걸린 영화들 자체가 박스오피스 1위를 롱런하기가 어려워진 구조로 변했고, 관객들 자체도 이제 이런 카피에 그렇게 환호를 보내지도 않는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활황이었던 90년대까지 소위 '아카데미상 효과'라는 것도 꽤 인기있는 영화의 주목지수를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옛날만큼 번영을 꾀하기가 쉽지 않다.  

이 자리를 채운 것이, 관객들의 눈물과 웃음을 카메라에 직접 보여주는 광고다.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감탄에 찬 표정을 한 관객 여러 명을 잡아, 그들의 소감을 물어본다. 소위 '입소문'이라는 것 자체를 입소문을 퍼뜨리는 자를 영상 이미지에 담아 보여줌으로써, 영화 자체의 신뢰도를 높이는 전략인데, 나는 오히려 이런 '속 보이는 광고'를 더 좋아하지 않는다. 주로 대중영화 쪽에서 이런 전략으로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혹한다면, 이른바 세계 3대 영화제에 진출한 우수한 작품들이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걸 나타내는 광고는, '기립박수'다. 

유럽에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몇 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둥, 영화 저널리즘이 구성하는 이런 현실이 기사의 형식 속에 자리잡으면서, 나는 이런 '기립박수 효과'가 주는 함의를 고민해본다. 이번에 칸에 동시에 진출한 <하녀>와 <시>의 경우, 재미있는 반응을 담은 기사가 실렸다. 주로 <하녀>에 대한 반응이었는데, <하녀>에 대한 기립박수가 있자, 이것이 사실은 칸 영화제 특유의 의례적인 기립박수 문화에 온 것인지, 정말 영화가 좋아서 기립박수를 한 것인가에 대한 진위여부 가리기였다. 기립박수를 몇 분 했는가, 기립박수를 몇 분이나 오래 했는가. 이런 '반응'에 의해 결정된 어떤 작품의 위상.  

영화 자체에 상을 주는 것과 달리, 영화인에 대한 시상을 할 때, '기립박수 효과'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예전에 엘리아 카잔이 오스카 공로상을 받았을 때 일로 기억한다. 헐리웃의 역사를 아는 영화인들은 이 '영감'에게 기립박수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혹시 하지 않는 영화배우가 있다면 누구일까 등등 개인적으로 엘리아 카잔의 공로상 시상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설명하는 '친환경주의자'는 환경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환경, 소위 분위기에 약한 인간들이다. 시상식을 좋아하고, 시상식에서 기립박수 장면이 나오면 가슴 뭉클해하는 인간들. 초대가수가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데, 시상식에 참여한 배우들이 반응이 없자, 너무 예의가 없는 것 아니냐며 배우들을 질타하는 이들. 영화 <시스터 액트>의 마지막 합창 장면, <홀랜드 오퍼스>에서 리처드 드뤠이퍼스가 퇴임 기념으로 제자들과 마지막 합주를 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길 좋아하는 이 '친환경주의자'들에게, 어떤 영화가 기립박수를 몇 분 받았다는 내용은,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의 감성을 체득하는 또 다른 형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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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25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녀>는 저도 봤는데 기립박수를 보낼 정도는 아니었고,
<시>는 그럴 만했는데 분위기가 그렇지 못했죠.
저를 비롯해 관객들이 모두 야단맞은 학생들 같았거든요.
오랜만에 아주 호되게 야단맞은 기분이었어요.
마지막 문단에서 '친환경주의자'의 의미를 알고 한참 웃었습니다,
웃을 일은 아니지만 말예요^^

얼그레이효과 2010-05-25 14:5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하녀>는 시간나면 보고싶군요. 야단맞은 학생들.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니. 이 표현 참 좋구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