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14년 1월 4일 토요일 오후 3시 40분

+ 장소: 광화문 씨네큐브

(*스포일러 있음)

 

#1

 

"으이구 뇬석아. 오냐오냐 자랐더니 그런 것두 못 하구. 생활점수가 빵점이야, 빵점" 고레에타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고 나서 이 익숙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게 이 영화는 평소 생활점수가 왜 이리 낮냐고 지적당하며, 그것에 압박받는 이들을 위한 치료제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성공한 건축가이자 아버지 료타가 아버지로서 '원래 아들' 류세이에게 정을 붙이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 중 텐트 치는 법을 골똘히 보는 그 순간을 기억해보자. 생전 쳐보지 못한 텐트를 잘 치려면 설명서, 즉 매뉴얼을 보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흔히 생활점수가 낮다/없다고 지적받을 때 상황을 돌이켜보면, 집안일을 했을 때 거치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둘러싼 기대와 실망이 있다. 여기엔 '야무지게'라는 결과에 대한 진득한 수사도 등장한다.

 

이런 매뉴얼을 제대로 익힌 아이는 자라서 그  '야무짐'을 인정받는다. 이 인정/불인정의 시선은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의외로 섬세하다. "야 너 손톱 발톱 둥글게 제대로 깎을 줄 아는구나" "못질 하는 거 봐라 이거" "너 매듭 만들 줄 모르는구나?"

"야 바람막이 테이프로 고정시키려면 이렇게 삐뚤어지게 붙이면 어떡하니?" blah, blah.

 

#2

생활점수와 매뉴얼. 고레에타 히로카즈는 여기서 매뉴얼의 의미 전환에 성공한다. 생활점수가 낮다는 타인의 시선이 늘 걱정스러운 이른바 '오냐오냐' 어른들에게 매뉴얼은 '공부를 해서라도' 터득하고 싶은 일종의 부담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매뉴얼은 아버지 료타 스스로가 타인의 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감정의 장치'로 활용된다. '그렇게~된다'라는 성장의 맥락이 가득한 제목처럼 료타는 아버지로 '성장'하기 위해 매뉴얼을 '겪어나간다' 일상에서 가족을 대하는 실질적인 혹은 정서의 메뉴얼을.

 

#3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료타가 가족의 문제를 접근하고 해결하는 데에는 자신이 가장 먼저 나서기보단 매개자들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아내인 미도리 그리고 바뀐 아들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해줄' 변호사 친구, 심지어 자신의 원래 아들을 데리고 살았던 전파상 유다이도 자신의 문제를 대신 처리해주는 매개자들이었다.

아들과 함께 욕조에서 함께 목욕하는 것도 '거리감'으로 정리되던 료타의 과거를 보여준 영화 속 시선에서 료타는 가족의 문제를 '거리감'이 아닌, 가장 밀착된 일상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그 온기를 채워나간다.

 

#4

사실 자식이 바뀌고, 부성과 모성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서사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허나 이 영화는 분명 많은 이의 속에서 '틈새'와 '틈입'을 잘 나타낸 듯하다. '틈새'는 일종의 영화적 전략이다. 영화는 익숙한 서사 가운데 '디테일'이라는 틈새를 잘 그렸다. 두 아버지 료타와 유다의 대비된 구도를 비롯해, 영화는 누구나 한번쯤 느껴봤을 공감의 장면을 세세하게 포착했다. '틈입'은 이런 디테일로 대변되는 '틈새'가 몰고 온 감정선이다.

 

이 영화가 두 번째로 성공적으로 그려낸 것은 '핏줄'보단 '돌봄'이란 틀 안에서 이전의 '대안가족'이란 유형으로 흘러가지 않았단 점이다. 이 영화는 그 어떤 인연이 없던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핏줄보다 중요한 정서적 공동체라는 이름의 대안가족보단, 가족의 제자리를 지키면서 다시 우리 사회 가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했을 때, 료타가 변해가는 과정, 그 어떤 매개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부딪치고' '겪어보려는' 매뉴얼 연습은 이른바 '오냐오냐' 자란 이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고 있는 정서 환경의 중요성을 돌아보게 한다.

 

"당신의 생활점수는 몇 점인가요?"

 

타인이 주는 스트레스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가가려는 나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채점을 해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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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희의 집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잠깐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가구도 필요 없어요.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깨끗하게 살죠. 또 어떤 사람들은 거리가 왜 그렇게 깨끗하냐고 묻습니다. 첫째 이유는 원래 그 장소들이 황폐하기 때문이에요. 스태프들은 여기에 뭔가 더 넣는다고 하고, 나는 뭔가 더 빼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꼭 삶과 같은 게 아니에요. 그럴 거면 영화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지요. - 장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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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옛날이 그리운가보다. 예전 내 블로그를 찾다가 '씨네21'의 창간 광고를 코멘트했던 포스트가 있었다. 1995년 4월 14일, 한국 영화 저널리즘의 한 획이 그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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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1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전 블로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인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 리뷰를 몇 개 발견했다. 2008년 2월 6일의 글. 지금 다시 들춰 보니, 대학 졸업을 곧 앞둔 상황에서  내 어떤 황량한 마음이 담긴 영화 리뷰 같다.  

 

끌로드 샤브롤의 1969년도 작품, [야수는 죽어야 한다]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이 있다. 저는 미리 말해두었습니다!)


끌로드 샤브롤의 1969년 작품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샤브롤 특유의 찝찝함이 느껴지는 인상적인 스릴러다. 샤브롤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히치콕과의 연관성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영화 속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앞에서 언급된 ‘찝찝함’이란 단어와 스릴러라는 장르가 갖는 특성을 나란히 둘 필요가 있다. 샤브롤의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를 찾기 위해서다. 스릴러라는 장르를 통해 관객은 ‘누구’의 문제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져 왔다. 누가 범인인가, 누가 저 사람을 죽였는가, 누가 살아남았는가, 누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가. 마이더스의 손이 되고 싶은 제작자들은 극장 속 관객이 그 ‘누구’를 쉽게 찾지 못하게 만드는 이야기 기술자들을 필요로 했다. 이야기 기술자들이 ‘누구’의 존재를 영화가 끝나기 몇 분 전까지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반전이다. 뒤집어짐의 쾌감. 대중은 오랫동안 그 쾌감을 맛보기 위해 관람석을 채웠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 기술자들이 거둔 성과를 안다.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나 나이트 M. 샤말란의 [식스 센스]는 현대 영화사의 흐름 가운데 자신 있게 뽐낼 수 있는 반전을 가진 영화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나는 한국의 영화 관람 문화 속에서 소위 ‘반전 강박증’이 팽배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반전 강박증’이란, ‘누구'의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해 스릴러라는 장르를 반전의 가치로 환원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최근 영화 경향을 보면, 특히 스릴러는 표방하는 작품들이 거의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야기를 포장하는 기술은 늘었지만 관객은 냉담하다. - 여담이지만 나는 작년에 나왔던 [리턴]을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 “에이 뭐 이렇게 시시해” 스릴러가 갖는 '누구'의 문제, 그것으로 긴장감을 형성하고 관객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당위의 차원으로까지 가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끌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가 갖는 독특한 행보는 바로 이런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찝찝함’ 때문이다. [뉴 웨이브]의 저자이자 영화평론가인 제임스 모나코는 이 작품에 대해 ‘부르주아 실존의 잠잠한 표면을 깨부수는 테러는 결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개인적으로 그 테러에 책임이 있는 특정 인물이 없다’라고 말한다. 샤브롤의 영화는 ‘누구’강박증에 벗어나 있다. 쉽게 말해서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선으로만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조급하게 범인을 찾는 데 골몰하지 말고 좀 더 이 상황을 즐기는 것이 좋다. 영화의 첫 장면은 노란 옷을 입은 미셸이란 소년이 바닷가에서 무엇을 잡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다른 한 편, 조용한 마을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가 나타난다. 바닷가를 나와 마을을 거닐던 소년, 그리고 차 안에서 크게 웃고 떠드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서로 대조되면서 이상한 느낌이 만들어진다. 교차 편집을 통해 더욱 고조되는 불안감. 결국 그 불안감은 미셸이 뺑소니사고를 당한 것으로 선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셸을 너무나도 잔인하게 지나쳐버린 차 안의 남자와 여자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이 우리가 보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영화는 아들인 미셸을 보고 절규하던 아버지 샤를르의 모습을 잠깐 보여준 채, 어느덧 냉정한 모습으로 일기를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는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른다”  

 

샤를르는 경찰을 위시한 법과 제도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복수를 택하는 방식은 공교롭게도 ‘연기’다. 연기를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샤를르라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또 다른 모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과 새로운 이름을 택한다. 마크 앤드류. 이제부터 그는 샤를르가 아닌 마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단서를 하나 둘씩 찾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남자와 여자에게 접근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런 영화를 보면서 갖는 감정은 주인공의 명석함에 대한 감탄이다. 그러나 샤브롤의 이 작품은 주인공의 뛰어난 두뇌를 찬양하지 않는다. 샤브롤이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감정이다. 감정은 변화와 친숙하다. 이제 우리는 이 영화가 뺑소니사고의 범인을 찾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상의 무엇을 향해 나아가려는 샤브롤 특유의 의식을 찾는 게 중요하다.  

영화는 죄와 벌의 관계를 물으면서도 그 범주 안에 우리가 당연하게 제외시켜도 된다고 보는 주인공 샤를르를 집어 넣는다. 당연히 관객은 의아해 할 것이다. 장 안느가 사악함을 능수능란하게 보여주는 캐릭터 폴의 너저분한 욕설과 천박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생각을 보면서 관객은 어느덧 폴의 집에 들어간 샤를르의 심정으로 폴을 대하게 된다. “폴을 죽여. 저 사람이 범인인 것이 확실해!”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샤를르는 윤리의 옹호를 위해, 정의의 수호를 위해 영리한 두뇌를 마음껏 자랑하는 주인공이 아니다. 준수한 외모와 조심스런 태도 속에 어딘가 모를 어색한 두려움이 서려 있다. 폴과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여자인 엘렌 랑송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샤를르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그 낌새를 무시한다. 하지만, 이내 그런 낌새는 다시 돌출되고, 샤를르와 묘한 연대를 형성한다. ‘우리는 폴이 싫다’ 그러나 엘렌은 정확히 왜 샤를르가 폴을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단지 ‘싫다’라는 감정과 그 감정이 바라보는 대상이 ‘폴’이라는 것을 공유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샤를르는 그녀를 가엾게 여긴다. 그는 일기를 쓰며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자신의 여린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약해지지 말자, 경계를 둘 필요가 있다는 표현으로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폴의 집에 들어간 샤를르는 폴의 아들인 필립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필립은 죽은 미셸과 너무나도 닮은 모습인데(실제로 미셸역과 필립역을 맡은 두 아이는 서로 형제 사이다.)필립 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드러낸다. 집은 제법 호화스러운 것 같지만, 경직된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건 역시 샤브롤 영화의 재미다. 샤브롤은 부자들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그들도 분명 화려한 겉모습 뒤에 케케묵은 비밀들이 있을 것이라고 계속 찔러댄다. 그리고 이 영화에 숨어있는 분노의 대상은 폴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 샤를르만이 폴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제인 엘렌과 섹스를 하는 것이 거리낌 없는 남자라면 폴은 정말 야수가 맞다. 폴의 가족들은 이 야수에 억압받고 있으며, 아들 필립은 극한의 증오심으로 다른 아빠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른 아빠가 샤를르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느끼는 쾌감은 좀 모순된 표현일지 몰라도 ‘찝찝함’이다. 쾌감이란 단어가 주는 시원스런 분위기와 거리가 먼 감정인데도 나는 이 영화를 지배하는 불투명함이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로저 에버트는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고 해도 딱 한 번만 보면 되는 작품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솔직히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 [디 아더스] 같은 영화들이 아무리 뛰어난 이야기의 몸매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여러 번 보진 않을 것 같다. 이 이야기들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누구’의 문제로 치닫는 이런 영화들이 여러 번 손길을 가게 만들지 않는 것은 적어도 내 스스로에게 솔직한 상황이다. 허나 샤브롤의 이 작품은 좀 다르다. 그것은 분명 범인을 향한 추궁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큰 상황을 바라보게 만드는 샤브롤의 주제 의식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굳이 끌로드 샤브롤라는 이름과 위대함이라는 표현을 엮어 윽박을 지르는 듯한 거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칭송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려는 건 아니다. 
  

영화는 복수와 자연스레 관계를 맺게 되는 피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끄집어내지도 않는다.(이 영화에서 그나마 선명한 피는 미셸의 사고 현장에 남아 있던 핏자국이다.) 영화 전체를 지배할 것 같은 피의 향연 대신 영화 속 주요 배경이 되는 브르타뉴의 애매한 날씨만이 시각을 채운다. 영화는 머리와 가슴의 문제를 끄집어내며, 이성과 감정의 거리를 좁히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면서 죄, 복수, 살인, 가족, 위선, 증오 등을 이야기한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유사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샤를르가 마크로 변신하면서 마크라는 새 정체성으로 복수를 시작하는 교묘함은 분명 [복수는 나의 것]이 갖는 감각과 스타일에 기댄 복수와는 차이가 있다. 한 번 더 모순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주인공 샤를르가 보여준 복수는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반면 지극히 비인간적이다. 샤를르의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는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자기 영역의 확보다. 그는 경계를 두면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 함께 증오의 심정을 느끼는 애인 엘렌, 폴의 아들 필립에게 그는 복수를 위해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복수는 숭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숭고함은 자신만이 체험할 수 있는 신성함의 의미로까지 읽히는 듯하다. 영화가 끝나면 허무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데, 이는 ‘누구’강박증에 빠져 있었던 나 스스로가 낯선 체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허무함과 낯선 심경은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좀 더 즐길 수 있는 토대가 되며, 스릴러라는 장르를 좀 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scene 이다-샤를르와 엘렌의 식사 scene

이 장면은 [야수는 죽어야 한다]를 본 사람들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폴을 죽이는 데 실패한 샤를르에게 엘렌은 식사를 하면서 지금 밥이 넘어가냐고 묻는다. 샤를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하고, 엘렌에게 먹을 것을 얹어 준다. 식당 종업원이 오리 요리를 가져다 드려도 되겠냐고 묻고, 샤를르는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배인이 오리 요리를 가져올 즈음, 샤를르는 엘렌에게 뺑소니 사고로 죽은 아이는 바로 자신의 아들인 미셸이라고 말한다. 엘렌은 예상은 했지만, 충격은 크게 받은 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린다. 샤를르가 엘렌에게 미셸에 대해 말할 때, 지배인이 오리 고기를 써는 장면이 함께 나오는 데 이 장면이 주는 긴장감과 섬뜩함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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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 소개가 있다) 

 1 

"만약 당신이 내일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가져가고 싶은 세 가지 물건은?" 한때 TV 토크쇼에서나, 아니면 친구들과의 수다 자리에서나 자주 등장했던 이 질문. (요즘은 이 질문이 자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싱거운 대답을 한다는 인상을 줄까봐 자신의 개성에 맞는 사물들을 고심해 본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조난 사고를 당해 아무도 없는 섬에 떠밀려 왔을 때, 우리는 장난으로 했던 '무인도 퀴즈'의 지난 날을 추억하며 슬퍼할지도. 신을 믿는 누군가는 섬에서 회개 기도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카메이 토오루 감독의 <낙원(2005>)는 마치 ,"무인도에서 가져갈 것 세 가지? 쳇"하는 투로, 살기 위해서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케이블 채널에서 자주 방영해주던 영화였는데, 사실 드문드문 봤던 몇 번은 그저 그런 <캐스트 어웨이>의 일본 버젼 정도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어제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서  생각할 거리를 여럿 안겨다 주는 이 작품 속 장면들이 내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자 주인공인 마치다 시온은 전도유망한 정치 신인으로서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이다. 선거 유세를 위해 어촌에 내려왔다가,사고를 당해 자신을 안내하던 한 어부와 무인도에 남게 된다. 여기까진 충분히 많이 봐 왔던 장면들. 그리고 이후에 이런 저런 장면들이 나오겠지?라고 하는 예상 속 장면들이 물론 있다. 좀 과장되고 군데 군데 어설픈 대목들이 있지만, 작품이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 있다. 그건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2  

우리가 흔히 사회화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겪는 많은 과정들이 있다. 가정, 학교, 일터 등 다양한 곳에서 사람은 '사회인'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 학습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타인을 의식하며, 접촉하는 가운데 나와 타인의 관계를 규정짓는 언어를 익히고 신체 기술을 터득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배웠지만, 막상 사회는 그렇지 않다. 일정한 권력이 사람과 사람의 위치를 수직적으로 변화시키고, 누군가는 명령을 하는 것을, 누군가는 명령을 받는 것을 선호한다. 현실 정치를 꿈꾸는 여자인 마치다 시온은 무인도에서 철두철미한 준비도 없고, 가만히 넋을 놓고 있는 어부 사카키 히데오가 못마땅하다. 그녀는 자신을 포함해  두 명의 사람이 있는 이 곳에서 '사회 실험'을 한다.(이미 무인도 생활을 하던 중국인이 있는데, 논의를 위해 이 부분은 생략한다) "넌 명령을 받기만 좋아하는 사람이지?" 라는 직언으로 시작해 남자의 약점을 공략한다. 그녀는 단 한 명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위에서 군림하길 원한다. 그녀는 이러한 '사회 실험'을 통해,무인도에도 내가 사회에서 했던 명령들, 행위들이 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물론 이 확신은 그녀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씌여진 하나의 가면으로 작용한다.  

3  

이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은 어부인 사카키 히데오가 오랜 무인도 생활을 통해, 그가 이 섬에서 그냥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는 대목이다. 이는 여전히 이 무인도를 탈출하고 싶어하는 마치다 시온의 태도와 대비됨으로써 더욱 부각된다.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오랜 감옥 생활로 인해 감옥 자체가 사회보다 더 편안하고 익숙해져버린 모건 프리먼의 경우처럼, 사카키는 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마치다가 이 섬을 나가도록 작은 뗏목을 만들어준다.(원래 그는 마치다가 섬을 자신 몰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동굴 안에 있던 뗏목을 바다에 보내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뗏목을 타고 바다로 향하던 마치다를 부여 잡는 사카키는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이 두려워 자신과 함께 살자고 그녀의 다리를 잡는다. (만약 그녀를 편안히 보내주었다면, 이 영화는 시시한 휴먼 드라마 였겠지만, 약간은 얄궂은 이 반전으로 인해 영화가 가진 '날 것'으로서의 인간은 더 도드라진다)  

바다를 떠돌던 마치다는 결국 사람들이 있는 사회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선거는 끝난 상태다. 성공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첫 출발을 하고 싶었던 그녀의 희망은 산산히 부서졌다. 그녀는 선거관리사무소에 가 직원에게 따진다. 선거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선거가 가능하냐고.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 집착하지 않는 카메라의 시선을 던진다. 영화의 마지막, 마치다의 이런 거센 항의, 분노와 대비되는 것은 너무나 평온한 어촌의 풍경이다. 고로 영화는 그녀의 사회적 부재를 둘러싼 주변의 조용한 시선을 통해, 그녀의 부재를 더욱 강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 부재의 비극은 그녀의 몫이다.  

그녀의 비극은 사실 무인도에 있었다는 차원을 넘어, 그녀가  사회에서 익숙하게 체화시켜왔던 명령, 규범, 이성적 기획의 부분들을 무인도에서 실현시켜보려고 했다는 점. 그것의 출발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무인도에서 그녀는 사람으로서 내가 '살기 위해' 터득해야 할 것은, 내가 '사람다움'이라고 배워 왔던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녀는 중간에 자존심을 버리고, 살아있는 해산물을 씹어 먹고 싫어하던 생선도 먹는다. 살아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잘 짜여져 있는 생각의 구획이 아니라, 순간순간에 충실하여 몸을 움직여버리는 본능의 몸짓이거나, 미약하게나마 인간으로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자연의 도구적 활용이다.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정치평론을 하시는 한 젊은 분이 한국은 6.25 이후 크게 망해본 적이 없는 사회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정말 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랬을 때 우리가 처할 극한적 절망의 상태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런 절망의 상태를 느껴본 적이 없는 세대에게 과연, 그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다가올 혼란이 어쩌면 우리에게는 정치를 다시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과거 LA 폭동처럼, 여기저기서 화재가 일어나고 매일 약탈이 일어나는 상황이 한국에도 발생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그 말 이후 자주 해 보게 된다. 물론 이것은 그러한 상황을 상상함으로써 오는 스펙타클의 스릴도, 정말 그런 상황을 실현시키고 싶은 광기의 차원도 아니다. 다만, 그러한 혼란 자체가 왔을 때, 인간이 행할 사회적 행위. 그것에서 느껴지는 잔혹 혹은 예기치 않은 감동, 사랑,눈물,비애,냉소 등의 사회적 감정 들을 우리는 그 순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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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절망의 상태를 '예언'하는 묵시록자들보다는, 나는 도리어 '극한적 절망의 상태'를 통해 우리가 다시 생각해봄직한 희망과 사랑에 대한 모습들을 더 가까이 /세심하게 보고 싶어하는 놈이긴 하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와 사회를 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그 절망의 상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점점 이 사회에서 우리도 모르게 늘어나고 있는 건, 영화 속 어부처럼 사회에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는 삶의 존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보다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건, 그래도 숨이 붙어있다,라는 것.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러한 존재들의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태도보다는, "그래도 지금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잖아.."라는 시선에서, '사회인'이라는 범주가 갖는 그 기본선의 경계를 타인에게 적용 /작동시키는 데서 오는 위안을 더 즐기는 것 같다. 과연 어디가 낙원일까. 저 먼 유토피아와 저 먼 디스토피아 사이의 간극 속에서, 정치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랬을 때 우리는  현실의 탐독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지도. 만약 누가 무인도에 가져 갈 세가지를 묻는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답변을 준비해봤다. 나에게 닥칠 절망의 상황을 정직하게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의 유지. 그것 하나면 된다고.  오늘 우리네 삶에서 "난 사회인이요! 사회인이요!'라는 소리가 빈번해질 때마다, 그것은 '생존의 두려움'이라는 노래의 b-side ver.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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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1 2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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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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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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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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