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의 역사 - 인류 역사의 발자취를 찾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성춘택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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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페이건은 역시 글을 잘 쓰는 저술가다.

지루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고고학 발굴의 과정과 수많은 학자들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간다.

저자 자신이 고고학자이기 때문에 더욱 깊이있는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낼 수 있는 것 같다.

하워드 카터나 아서 에반스, 루이스 리키 같은 유명한 고고학자들 이야기는 익숙해서인지 쉽게 넘어갔는데 처음 듣는 학자들 챕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역시 비슷한 주제를 반복해서 많이 봐야, 즉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독서가 즐거워지는 것 같다.

다음에는 <고고학의 모든 것>에 도전해 봐야겠다.


고고학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은 것 같다.

유물을 발굴해서 소유하려는 행태, 거칠게 말하자면 도굴을 통해 부를 얻으려는 행위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발굴을 통해 인류사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고고학의 탄생은 겨우 19세기에나 가능했던 듯하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유럽 사회에서 이집트학 열풍이 불자 벨조니 등 초기 발굴자들은 요즘 수준으로 보자면 약탈에 가까운 파괴적 발굴을 시도한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발굴 역시 제국주의의 약탈 행위 이미지가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문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호기심이 고고학의 발달을 가져왔지 않나 싶다.

어쨌든 관심이 있어야 그 먼 곳까지 조사단을 파견하고 오랜 시간 동안 발굴에 매달리며 무엇보다 엄청난 돈이 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학이나 박물관에서 연구비를 지원하지만, 19세기만 해도 개인적인 후원을 받아 사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졌다.

오늘날과 같은 학구적인 의미의 발굴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 통해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하여튼 지나간 역사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한 것 같다.

초기 고고학자들은 하인리히 슐리만처럼 고대 유적에 대한 탐구심이 매우 강했고 지지치 않는 끈질김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도 뛰어난 직관력을 갖고 동물적으로 탐사했다.

당장 수많은 이집트 왕릉을 발굴한 벨조니만 해도 전직이 차력사였음에도 놀라운 직관력으로 혼자서 탐사대를 이끌었다.

아쉽게도 이들은 유물을 단순히 보물 취급해 팔거나 전시하는데 그친다.

유물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 더 나아가 인류 역사를 밝히는 것이 바로 고고학자의 몫인 것이다.

책에 소개된 여러 학자들을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또 지치지 않는 투지가 돋보인다.

역사책에 한 줄 이름이 남으려면 범인과는 다른 특별한 재능과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명문이다.

명문이 발견되면 고대 역사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 해독도 매우 중요한데 천재적인 언어 학자들이 이집트와 수메르, 크레타 문자들의 뜻을 밝혀냈다.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고대 문자들이 더이상 쓰이지 않아 이처럼 학자들의 해독을 기다린 반면, 오늘날까지 씌여지고 있는 한자는 매우 놀랍다.

중국 문명이 고대 문명으로부터 현대까지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13p

유물 분석 전문가가 되려면 특별한 인성도 필요하다. 유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특히 더 그러하다. 끝없는 인내와 흔히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세세한 특성을 물고 늘어지는 열정과 과거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작업이다. 몬텔리우스는 그런 성품을 갖추고 있었다. 훌륭한 언어학자로서 느긋하면서도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여러 강의에 나서면서 고고학을 대중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169p

페트리는 수많은 집을 발굴하면서 다양한 가내 유물을 수습했다. 이로써 당시 보통 사람들의 존재를 복원했다. 일반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잔혹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은 들에서 일해야 했을 뿐 아니라 적은 배급만 받고 공공사업에 동원되었다. 인골에는 고된 노동의 흔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힘들고 단조로운 삶이었다. 그러면서 나라와 지도자를 떠받쳤지만, 이 사람들의 의도와 취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거대한 기념물과 고분에 관심을 가졌던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과 달리 페트리는 고대 이집트 문명이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노동에 의지했던 복합사회였음을 알고 있었다.

189p

벨의 지성과 고고학적 학식은 전설적이었지만, 오늘날 이라크에서 그리 좋은 평판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많은 이라크 사람들은 벨이 외국 조사단에 너무 많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평가도 일리 있지만, 벨은 늘 순수한 국가적 목적보다 고고학과 학문적 관심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는 이라크에 섬세한 유물을 보존할 시설이 전혀 없었다.

293p

농경은 발명이라기보다 전환이었다. 먹을 수 있는 풀을 채집했던 사람들은 모두 식물이 싹을 틔우고 성장한 뒤 씨를 퍼뜨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채집할 야생초가 있었다면 왜 그런 노력을 했을까? 사람들은 자연의 수확이 줄어들 때 생존 전략으로서 야생초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성 식량을 채집하는 데서 농경으로 변화한 것은 인류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298p

건조한 조건이 지속되면서 식물성 식량은 더욱 희소해졌다.

 이로써 커다란 전환의 조건이 커가고 있었다. 이제 갈색으로 변한 개활 초원은 가뭄이 계속될수록 줄어들었다. 해마다 마을 사람들은 더 멀리까지 걸어가야 숲에서 견과류와 풀을 채집할 수 있었다. 수확량도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배고픔에 시달렸다. 봄이 되면 더욱 굶주렸다. 이미 인구는 증가했고, 기온 하강으로 땔감의 수요가 높아져 벌목도 더욱 빈번해졌다. 힐먼과 무어는 가뭄과 삼림 훼손으로 결국 사람들이 마을을 버렸다고 보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계속 가젤을 사냥했다. 그러자 가젤의 수가 줄어들어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염소와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불과 1000년 만에 가젤 사냥이 쇠락하면서 염소와 양이 더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가뭄이 지속되는 환경에서 안정된 식량 공급을 위해 곡물 재배에 나섰을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야생초를 그대로 심었다. 호밀에서 시작하여 밀과 보리 같은 씨앗 곡물의 수확을 늘리려 했을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전업 농민이 되어 밭농사와 가축 사육에 매달리게 되었다. 농사는 전적으로 강수량에 의존했다. 조심스럽게 다음 비가 오기 전까지 곡물이 시들지 않도록 시간을 조절하여 씨를 뿌렸다. 강수량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위험 부담이 아주 큰 농사였다.

 농경을 촉발시킨 것이 서기전 1만 년 즈음 지중해 동부 지역에 찾아온 1000년 동안의 가뭄(Younger Dryas)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 가뭄은 수렵채집민이 농경민으로 전환한 주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334p

중세시대에 맨손으로 싸워 생긴 상처는 참혹하다. 38구의 시신이 매장된 무덤에는 중세 시대 전쟁의 야만성에 대한 충격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희생자들은 눈폭풍이 몰아칠 때, 장미전쟁의 전투에서 혈투 끝에 죽었다. 활동적이면서 건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소작농에게 예상할 수 있듯이 시신에는 어린 시절부터 고된 노동에 시달린 흔적 있었다.

 대부분의 시신에 머리에 야만적인 가격을 받아 숨진 흔적이 있었다. 근접전에서 적어도 여덟 번에 걸쳐 칼로 베인 뒤 머리에 가격을 받고 죽은 경우도 있었다. 쇠뇌와 화살, 전투용 망치도 잔혹한 상처를 남기며, 대부분 치명적이었다. 사람들은 피바다 속에서 죽어갔다. 당시의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았을 테지만, 비타민 부족으로 생기는 괴혈병과 구루병이 가장 흔했다

 외치를 제외하고 가장 철저하게 연구된 시신은 역사에서 잘 알려진 인물, 람세스 2세이다. 람세스는 아주 오래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20대와 30대까지밖에 살지 못하던 시절 아흔 두 살에 죽음을 맞았다.

 람세스는 파라오로서 호의호식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평민들은 끊임없이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서기전 14세기 파라오 아케나텐의 수도였던 엘아마르나의 공동묘지에서 일꾼들의 무덤에 대해 최근 연구가 이루어졌다. 거의 모두가 20대에서 30대에 죽은 사람들이었다. 뼈에는 숨길 수 없는 영양실조의 증거가 남아 있었다. 수년 동안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한 탓에 척추가 무너지고,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만성 관절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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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 대명제국 중국의 역사
데라다 다카노부 지음, 서인범 옮김 / 혜안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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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딱딱하고 재미없는 제목에 비해 내용은 정말 너무너무 재밌다.

300 페이지도 안 되는 얇은 책이라 과연 명나라 300년 역사를 다 풀어낼 수 있을까 약간 의구심이 들었는데 말이 길다고 내용이 풍성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원말의 백련교도 반란에서부터 명나라의 성립, 영락제의 대외원정, 환관의 폐해, 그리고 몰락까지 일목요연하게 핵심을 잘 짚어준다.

이 시리즈는 중국 역사 개괄에 정말 좋은 것 같다.

번역도 아주 매끄러워서 마치 한 권의 소설책을 읽는 기분이다.

훌륭한 학자들은 글도 잘 쓰는 모양이다.

주원장이 한나라를 세운 유방과 더불어 사회 최하층 빈농 출신이었지만 사실은 지구 계급을 모아 거병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오히려 농민 반란군의 성격을 지닌 것은 한림아를 옹립한 유복통의 송 왕조였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순수한 농민군만으로 중원을 통일하고 왕조를 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황하의 범람으로 인해 하남성이 큰 수해를 입었는데 하천 정비를 위해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다 보니 하남성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이 바로 백련교였다.

백련교는 미륵이 하생하여 낙원을 이룬다는 교리이니 기독교의 천년왕국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원나라에 의해 하남성의 반란이 격파되자 주원장 등의 반란군은 강남으로 내려가 풍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결국 원을 몰아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원장 세력의 주축이 된 것이 바로 지주 계급이었고 나중에는 지식인이 합류하여 체제를 안정화 시킨다.

창업주 본인은 빈농이었으나 그 바탕은 지배 계층이었던 셈이다.

주원장은 훗날 이 친위 군단도 전부 죽여 버리고 황제독재체제를 이룩한다.

과연, 여러 의미에서 대단히 잔인하고 강력한 영웅이었던 듯하다.


대체적으로 책의 내용에 다 공감했지만 영락제의 대외원정에 관한 부분은 약간 동의하기 힘들었다.

이 책에서는 영락제가 정화를 해외에 보낸 이유가, 대외교류 목적이었다고 하지만 얼마 전에 읽은 단죠 히로시의 <영락제>에 따르면, 서양 같은 교역 목적이 아니라, 순전히 화이질서를 만방에 공표하기 위한 조공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 더 공감이 간다.

정말 교역을 목적으로 했다면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일순간 원정이 중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명 제국은 대항해 시대의 서양 같은 상업 국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나온 바대로 조공무역은 명으로서도 돈이 아주 많이 드는 대외과시용 무역이었기 때문에 스케일이 컸던 영락제 이후 더이상 대륙 밖으로까지 원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뒤로 갈수록 명은 북방의 유목민을 상대하기도 벅찼던 것이다.

황제독제체제 때문에 환관이 득세하지만 어디까지나 황제의 신임이 유지되는 기간에만 가능했다는 것도 다른 책에서 읽었던 바다.

근본적으로 환관에 의해 황제가 좌지우지 됐던 한이나 당과는 다른 상황이었던 셈이다.

세금을 쌀이나 포의 현물로 받다가 은납제로 바뀌면서, 농가에서는 세금을 내기 위해 은을 마련하는 방편으로 가내수공업을 병행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상업이 활성화 됐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조선은 후기까지도 여전히 쌀이 주요 화폐였기 때문에 (공납을 현물 진상 대신 쌀로 내자는 대동법 시행도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었던가) 명나라 같은 상업의 활성화는 근본적으로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중국은 은이 많이 나지 않아 광산 채굴에 의한 폐해도 매우 컸다고 한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서양이 신대륙에서 약탈해 온 은으로 중국 무역을 시작한 것이나, 은이 많이 나는 일본이 무역에 뛰어든 것도 이런 배경인가 궁금하다.

명나라가 은본위 제도를 시행했기 때문에 전세계 무역이 연결된 것인가?

좀더 알아봐야 할 듯하다.


좋은 책은 독자를 흥분시킨다.

역사는 정말 어떤 분야를 읽어도 사람 사는 이야기라 그런지 거의 항상 재밌고 즐거운 것 같다.


<오류>

133p

황무제가 편찬한 원대의 정사인 <원사>

-> 홍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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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무덤을 훔치다 - 중국 도굴의 역사
웨난.상청융.쉬즈룽 지음, 정광훈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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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제가 주제를 말해 준다. 

"중국 도굴의 역사"

고고학자가 아닌 기자 출신의 저술이라 그런지 전문성이 떨어지고 야사 위주의 흥미를 끄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섞여 있어 책의 신뢰도를 약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능묘를 조성하는 과정과 그것을 훔치는 사람들의 세태에 관해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고대 이집트부터 시작해 부장품이 풍부한 전제군주의 묘를 도굴하는 역사는 전세계 곳곳에서 태고적부터 있어 왔던 모양이다.

이집트 시대에도 고왕국의 왕묘를 파헤쳐 심지어 관짝을 자기 관으로 재활용하기까지 했었다는데,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범죄자들만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군주들이 나서서 역대 황제들의 능에 사용한 목재와 보화들을 뜯어가 재활용했다.

오히려 일개 잡범들의 도굴은 기껏해야 10명 내외가 밤에 몰래 행해지는 비밀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 폐해가 크지 않은 반면, 관에서 주도해 적극적으로 도굴을 시행한 경우 피해가 심각했다.

그래도 고대는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완벽한 도굴이 어려웠으나, 현대로 오면서 아예 폭약을 설치해 능의 입구를 파괴시켜 버리고 싹슬이 해 가는 바람에 그 피해가 매우 커졌다고 한다.

특히 청나라가 망한 후 군벌들이 난립하던 민국 시대에는 아예 지방 군대가 나서서 도굴을 자행했다.

마지막 장에서 서태후와 건륭제의 능을 군대가 참혹하게 파괴하고 부장품을 도굴해 간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서태후가 죽은지 몇 십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민간인도 아닌 정식 군대가 이렇게도 끔찍한 도굴을 대놓고 시행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그들의 변명은 어차피 비적의 손에 털릴 거라면 차라리 자기들이 접수하는 게 낫고, 만주족에 대한 복수를 한답시고 어설픈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서태후의 입에 들어있는 여명주라는 보석을 꺼내기 위해 시신을 난도질 했다니 참혹하기 그지없다.

하긴 살아있는 사람도 쉽게 죽여 버리는 시대였으니 시신이 대수이겠는가.


억울한 도굴꾼의 누명을 쓴 유명인으로는 항우를 들 수 있겠다.

항우는 진의 수도인 함양으로 진격하여 진시황의 아방궁을 불태우고 수많은 보물을 약탈하기는 했으나 능은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진시황릉이 거대한 산처럼 워낙 크고 입구가 잘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묘도를 찾기도 어려웠다.

굳이 황릉을 도굴하지 않아도 훔쳐갈 것이 널려 있었던 셈이다.

항우의 군대가 전해 내려오는 것처럼 황릉을 도굴했다면 오늘날 진시황릉을 새삼 발굴하고 말 것도 없을 것이다.

후장을 하게 되면 이렇게 도굴을 피할 수 없으므로 조조처럼 현실적이고 영리한 사람은 절대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지 말라고 당부했다.

72개의 가짜 무덤, 즉 의총을 만들어 도굴을 피했다고 하는데, 어떤 책에서는 조조의 의총이라고 알려진 무덤들이 사실은 북조 시대 왕족들의 고분군이라고도 설명하니 이것도 그냥 전해 내려오는 설화일 뿐인 듯하다.

최근 중국에서 조조 무덤을 발굴했다는 기사를 봤었는데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는 후장은 묘주가 내세에 가서도 편안하게 살기를 기대해서일테니, 죽어서도 삶이 이어진다는 영혼불멸사상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고대에는 모시는 사람을 직접 능에 파묻어 버리는 순장까지 행해졌고 후대로 갈수록 내세에 대한 관념도 진화하여 사람 대신 도용으로 바뀌고 불교가 성행하면서는 박장을 하게 된다.

여전히 현대인들도 내세가 있다고 신을 갈구하지만, 더이상 무덤 안에 부장품을 넣지 않고 능묘도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의 정신세계도 더 고차원적으로 진화하는 것 같다.

파라오의 미이라를 비롯해 중국 여러 황제의 관에는 도굴꾼에게 겁을 주기 위한 온갖 저주의 말들이 쓰여 있으나 묻히고 나면 몇 십 년만 지나도 도굴이 자행되었으니 역시 죽은 사람은 힘이 없나 보다.

어떻게 생각하면 백성들의 피땀어린 노고가 단지 죽은 이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쏟아부어졌으니, 죽은 후 약탈당한다 해도 묘주로서는 억울해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편안한 영면을 위해서였다면 소박하게 장례를 치뤘어야 할 것이다.

즉위하면서부터 능을 짓기 시작해 전체 재정의 1/3을 쏟아 붓는 한나라 황제들의 후장 관습이 오히려 죽은 후 참혹한 약탈을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건륭제의 능을 파헤친 1920년대의 도굴꾼들은 금은보화 대신 쓰잘데기 없는 고서들만 가득해 불평했다고 한다.

문화적 식견이 높았던 황제가 60년의 재위 기간 동안 정성스럽게 모은 귀중본들이었는데 역시 문화는 감식안이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다.


<인상깊은 구절>

33p

삶에 대한 미련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류는 영혼불멸의 아름다운 신화를 만들었으며, 이 아름다운 신화를 들으며 죽음을 삶처럼 여겨왔다. 그래서 무덤에리난 최종 안식처를 찾은 사람들은 그것을 '새 집'으로 여기고 새롭게 꾸몄다. 후장 풍습이 갈수록 성행한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다.

99P

불로장생과 우화등선에 대한 조조의 관심은 상당했다.

 그는 "불사의 약을 구해 만 년을 기약"하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짧기만 하여 노자나 적송자, 왕자교 같은 전설 속 선인도 결국 신선이 되지 못했으니, 선인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조 자신은 어떻겠는가! 조조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짧은 인생을 비관하며 멋대로 마시고 노는 방종의 삶을 택하지 않았다. "가는 세월에 슬퍼하지 않고,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음을 근심하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리라는 우국우민의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다.

 한편 조조는 "뭣 하러 우울해하며 근심하는가! 마음 가는 대로 웃고 즐겨야지"와 같은 달관된 인생 태도를 가지려 애썼다. 이런 태도야말로 불로장생의 핵심 요건이기 때문이다.

107P

조조의 의심 많은 성격은 소설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료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조조의 고향 사람 중에 항소라는 자가 있었다. 조조와는 예전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사람이다. 조조가 뜻을 이루자 항소는 뜰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죄를 청한다. 조조는 그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무릎을 꿇으면 죽을 죄가 없어지나?"

 결국 항소는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다.

138P

천성이 사치스럽고 음란한 수 양제는 부황 수 문제를 대충 '박장'하고 천자의 보좌에 오른다. 양광은 등극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낙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거대한 공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사후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수나라 역사서에 그의 능묘에 관한 기록은 한 줄도 없다. 아버지 양견은 봉분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 진한의 능침 제도를 회복했지만 양제는 여기에 관심이 없었다. 제위에 오른 그는 자신의 무덤을 세울 땅도 찾지 않았다. 그보다 양견은 상상조차 힘든 현실의 조치를 과감히 실행하길 즐겼다.

 604년 11월, 양제는 친히 낙양으로 행차하여 세 강 유역을 전면적으로 살핀 다음 도성의 방어를 위해 수 십만의 인력을 동원하여 낙양까지 이어지는 '호성하'를 파기 시작한다.

214P

역대의 황제들은 미신을 신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자기가 황제의 보좌에 오른 것을 '천인감응'의 필연적인 산물로 보고, 풍수가 좋은 땅을 찾아 부황을 모시는 것도 '君權神授'의 결과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천추만대에 이어질 홍복을 기대하며 '만세토록 상서로운' 명당을 찾으러 애썼다.

268p

관 밖에는 티베트 글자를 비롯한 옛 문자와 주문 부호를 금으로 가득 그려 넣었다. 이는 청대 황릉의 관곽에 보이는 일종의 독특한 종교 양식으로 사자의 영혼이 부처와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부처와 신도 총을 둘러메고 도끼질을 해대는 군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386p

문물은 실존하는 인류 역사의 산물이다. 문물을 통해 우리는 인류 사회의 끊임없는 생존, 번영, 투쟁, 발전의 역사와 선구적인 사상, 도덕, 과학기술, 문화 수준 등을 엿볼 수 있다. 문물의 가치와 역할이 영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의 한 단락이나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모습을 반영하는 문물의 가치는 역사에 대한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문물은 모든 민족, 모든 인류가 보호하고 연구하고 함께 누려야 할 역사의 보물인 것이다.

(문화재는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각국의 문화유산을 우리 모두 지키고 연구하고 가꿔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일 것이다)


<오류>

16p

서한 초기 장사국의 승상인 대후 이창과 부인 신추, 아들 이희(李희)가 묘주임이 밝혀진다.

-> 아버지의 한자가 利蒼 이므로 아들의 성씨가 잘못 표기됐다.

152p

장손황후는 이부상서 장손무기의 딸이다.

-> 장손무기는 장손황후의 오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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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를 캐는 사람들 - 발굴로 읽는 역사
김상운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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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내용일 것 같아 읽을까 말까 하다가 그래도 신간 코너에 있는 걸 못 지나치고 빌리게 됐다.

제목에서 보여주는 대로 고고학자들의 이야기, 국보가 어떻게 발굴됐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신문기자라는 한계 때문인지 마치 신문 기사처럼 보도 수준에 그치는 것 같아 아쉽다.

직접 발굴에 참여하는 사람이었다면 훨씬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해 줄 수 있었을텐데.

<최초의 인류> 역시 인간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아프리카로 날아가 고군분투하는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를 기자가 취재한 것인데 밀도면에서 너무 비교된다.

여러 유적지와 유물 발굴 당시 현장을 주도했던 고고학자들을 찾아가 당시 상황을 스케치 하듯 풀어간다.

역사 전공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나는 이런 현장 발굴자는 못 되고 문헌 연구에 치중했을 것이다.

고고학자와 사학자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고고학자는 문과보다는 이과 쪽, 공학도 느낌이랄까?

특히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는 더욱 현장 발굴이 중요한 것 같다.

통일이 돼서 북한 유적지 연구가 활발해지면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들이 많아질 것을 기대해 본다.

당장 2000년대만 해도 익산 미륵사지 서탑 해체 과정에서 사리기 명문이 발굴되어 절을 희사한 이가 설화 속의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적덕의 딸, 사택 왕후였음이 밝혀지지 않았는가.

역사를 새로 쓰는 이런 과정이 고고학적 발굴의 묘미인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것이, 몽촌토성 발굴자의 인터뷰였다.

몽촌토성은 한성 백제의 도읍지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온 바대로 1세기에 건립됐다고 알려졌으나, 주변에서 발굴된 중국제 토기 등을 근거로 3세기 무렵 지어졌다고 추정한 것이다.

다른 백제사 책에서도 이런 주장을 봤던 것 같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기년이 200년 정도 앞당겨진 것인가?

흥미로운 대목이라 좀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중국과의 교류, 특히 동오에서 제작된 전문토기를 근거로 백제 초기부터 중국과의 해상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과연 직접 배를 띄웠을까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긴 하다.

본격적인 교양서는 아니라서 더 자세한 논의가 없어 아쉽다.


마지막 편을 읽다가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해서 검색을 해 보니,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기사 모음이었다.

신문 기사 수준이라 느꼈는데 정말로 신문 기사로 쓰여졌던 셈이다.

그래서 한 권의 책으로서 통일성이 부족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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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문명에서 제국의 출현까지
이성원 지음 / 마로니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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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별로인 것 같아 약간 걱정하면서 읽게 됐다.

일단 분량도 250 페이지로 역사서로서는 너무 짧은 것 같고, 책 표지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으며, 1,2장의 중국 선진 시대 역사 서술은 연대 나열에 그치는 것 같아 지루하기만 했다.

잘못 골랐구나 싶었는데, 왠걸.

뒤로 갈수록 너무너무 재밌다.

대학에서 강의 교재로 쓴 것 같은데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교양서로 손색이 없고 중국 고대 제국의 출현 배경과 그 속성에 대해 깊이있게 분석한 아주 좋은 책이다.

대학 교재가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도 서문에서 본인의 대학생 시절 은사의 강의에 감동한 얘기를 잠깐 밝히는데, 나 역시 이런 좋은 책을 읽을 때마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늘 남는 것 같다.

책 디자인을 좀더 산뜻하게 바꾸면 책의 매력을 살리는 데 더 도움이 될텐데 아쉽다.

제목도 약간 진부한 느낌이다.

그렇지만 내용은 아주 흥미롭고 신석기 문명의 탄생부터 상주 시대의 봉건제 사회를 거쳐 고대 제국으로 거듭나기까지 중국 역사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아주 빠른 시기에 거대한 영토를 하나의 통일된 정치체, 국가로 만들었고 그 전통이 수천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대단한 나라다.

위대한 고대 문명들이 여럿 있었지만 하나의 국가로서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 온 곳이 중국말고 또 있을까 싶다.

어쩌면 저자의 설명대로 중국이 거대한 땅덩어리지만 사실은 여러 산맥과 사막, 해협 등으로 닫힌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로마 역시 위대한 제국이었으나 유럽은 통일된 국가를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광활한 개활지였던 듯하다.

문서행정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는지 수십 만장의 목간이 발견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한반도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간독이 수천 매인 데 비해, 우물 하나에서 발견된 중국의 간독이 3만 매가 넘는다고 하니 과연 문서 행정이 발달한 제국의 위용이 느껴진다.

공자는 고대 상주 시대를 이상향으로 노래했으나 사실 문명의 여명기로 갈수록 사회는 매우 폭력적이고 주술에 의해 지배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비인간적인 시대였음을 밝힌다.

신체를 절단하는 육체형이나 수백 명을 순장하는 제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권리와 도덕 등은 오히려 사회가 발전하면서 점차 발전해 온 문명의 혜택인 것 같다.

여러 사람이 안정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관용과 예의범절, 상호 존중, 인격적 대우 등이 필수였을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129p

상족 계통의 송나라 세족의 후손이었으나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이미 그의 가문은 쇠락하였고 사마담이 '야합'의 결과였다고 표현한 것처럼 그의 출생 과정에도 곡절이 있었던 것 같다. <논어>와 <사기> 등의 문헌 전반에 드러나는 공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이미 어려서부터 고대의 '의례'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는 것이다. 사마담은 제자학파를 분류하며 공자와 그 문하를 '儒'라고 칭하였는데, 유의 어원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기우제를 지내는 제사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공자 스스로 '괴력난신'을 경계했듯이 사마담이나 사마천이 공자와 그 문하를 巫史 집단으로 분류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공자를 비롯하여 유가들은 다른 어떤 학파들보다 각종 제사와 의례에 정통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사상과 강령을 관통하는 핵심 교리는 '禮'였다. 

 공자가 그토록 일이관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의 삶을 관통하여 예법을 실천하고 時樂 에 정진하며, 고래로 전해지는 經史 를 보존, 정리하고 생활 속에서 도와 인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조류에 편승하여 예악이 점차 변질되어 가는 당시의 현실을 공자는 항상 개탄해 했으며, 그래서 예와 악이 회복에 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집착했는지는 여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시악의 교육을 얼마나 강조했는지는 <논어> 전편에 산재되어 있다. 모름지기 士人 으로서 시를 알아야 교양있는 대화가 가능하고 공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당시의 정황을 시사하고 있다. 70여 년의 생을 마감하며 마지막까지 주역과 시악에 정진했던 공자는 정치가로서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위대한 교육자이자 학자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6p

순자도 인간의 본성에 천착했는데, 다만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온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맹자와 대비된다. 그러나 본래 불완전한 인간을 적극적 교육과 예의를 통해 온전한 존재로 개선시켜야 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는 맹자의 본성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204p

사마천은 진시황제가 국정을 돌보느라 밤잠을 설치며 정진했다고 기록했는데 현아에 수발된 문서량이 그 정도라면 제국의 모든 문서가 집결되었던 황실의 정황을 감안하면 그 방대한 문서를 결재하고 처리하는 시황제의 격무가 결코 과장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물 하나에서 발견된 간독이 3만 7천매라는 규모를 감안하면 제국의 통치는 막연한 당위나 이상, 그리고 물리적 통제만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행정문서로 집행되고 관철되었던 것이다. 

214p

한대이후 축성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명나라 때로 몽고의 침입에 대비해 총 길이 2700km가 동쪽으로 이어져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자신들이 직접 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의 청 왕조에서는 장성이 상대적으로 군사적 가치가 상당히 떨어져 방치되어 있었다. 혹자가 말하듯 장성은 '인민들의 피와 땀의 결과'라는 평은 틀리지 않지만, 전근대시대 신분질서가 엄연하던 시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대한 권위주의적 토목건축에 인민의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것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각 문명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그러한 건조물을 만들었던 문명도 있었고, 또는 못 만들거나 만들지 않았던 문명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강력한 중앙집권력과 황제의 권위, 항상적인 풍부한 노동력이 어우러져 이러한 건조물을 창출할 수 있었다. 

224p

중국 역사상 누구보다 위대했던 진시황제가 전형적인 '창업'형의 군주였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진 제국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제국의 '수성'을 다질 수 있는 후계자를 양성시키지 못한 채 태자 부소를 변방으로 유배시키듯 축출하고, 무능한 호해가 제위를 계승하면서 진제국은 사상누각처럼 붕괴되었다. 반면 미천한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은 개인의 역량은 부족하였지만 주변의 인재를 중용하고 그들의 상주를 경청하며 역사상의 라이벌이었던 항우에게 승리하며 제국을 재건하였다. 그런 점에서 유방도 전형적인 창업형 군주였으나, 한이 진과 극명하게 달랐던 점은 황실의 안정을 통해 계승자를 양성하였으며 그 결과 문제와 경제라는 유능한 군주들이 연이어 즉위하며 한 제국 초기 안정을 다져 번영의 초석을 다졌다는 것이다. 즉 한은 창업과 수성이 성공적으로 이어지면서 제국의 완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

 '문경지치'의 실질적 수혜자는 경제에 이어 즉위한 7대 황제 무제였다. 진시황제를 연상시키는 정치적 야망과 과감한 추진력, 정치적 균형감각과 타고난 건강을 유지했던 한 무제는 54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다양한 대내외 정책을 추진하며 한의 번영을 구가함은 물론 고대 제국을 완성하였다.

238p

흉노의 정벌과 동시에 무제는 남방으로도 영토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남월국을 정벌하고 여기에 일남군 등의 9군을 설치했는데 오늘날의 광동, 광서, 그리고 베트남 북부에까지 미치는 광대한 영역이었다. 또한 동방으로도 진출하여 고조선과 충돌하여 위만조선을 물리치고 한4군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한 무제는 주변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정복과 영토확장을 추진하여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는 데 초석을 놓았다.


<오류>

206p

장강유역에 근거지를 둔 조(楚)나라와 한나라 지배계층들은

-> 초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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