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 청 제국의 건설자
천제셴 지음, 홍순도 옮김 / 돌베개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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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국과의 교류가 정말 활발해진 것을 책을 통해 느낀다.

좋은 역사책들이 많이 번역되는 것 같아 중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얻을 수 있어 참 좋다.

전에는 어쩐지 중국 번역서는 수준미달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아마도 좋은 책들이 번역이 안 돼서 생긴 오해였던 것 같고, 역시 자국의 역사라 그런지 한국이나 일본에서 나온 중국사와는 다른 보다 상세하고 포괄적인 내용이 많아 중국사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평전은 한 개인의 일생을 너무 파고들어 지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 책은 멋진 표지처럼 누르하치라는 건국 영웅의 이야기를 과장된 서술 없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아주 흥미롭게 풀어낸다.

청나라의 국호를 정하고 병자호란을 일으킨 아들 홍타이지에 대한 책을 주로 보다가 진정으로 여진족의 국가를 세우고 만주를 통일한 시조 누르하치의 일대기를 읽으니 더욱 박진감이 넘친다.

마치 중원을 통일한 쿠빌라이와 몽골 초원의 정복을 시작한 아버지 칭기스칸의 차이를 보는 느낌이다.

여진이 처음부터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던 것은 물론 아니고, 누대로부터 조금씩 영역을 넓히는 노력을 하다가 누르하치가 명과 조선의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을 잘 이용하여 세력을 넓힉 드디어 만주를 통일하여 여진족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고 한족을 압박해 가는 과정이 드라마틱 하다.

이미 명은 서양 화포를 가지고 있었고 인구나 생산력 면에서도 감히 비교될 수 없는 대국이었으니 변방 오랑캐의 만주 통일 쯤이야 우습게 생각했을 법하다.

조선 정치가들이 처음에는 여진의 화친 요구나 압박을 거부했던 것이 너무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처럼 명에 대해 실리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은 조선의 태도는 너무나 안타깝다.

누르하치는 세력을 넓히는 동안 명에 충성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명을 기만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해 왔다.

국가간의 외교시 요구된느 자세가 바로 저런 실리주의일텐데 명분론에 함몰되어 결국은 끔직한 전쟁의 피해자가 된 조선의 처지가 안타깝다.

중국인 저자도 조선의 명에 대한 충성심은 말릴 수가 없었다고 표현할 정도이니 조상들의 완고한 세계관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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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통해 본 문화 이야기
김동섭 지음 / 신아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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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도에 발간된 책이라 그런지 너무 오래된 느낌이라 읽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 어떤 책이든 읽고 나면 보람이 있다.

언어로 살펴보는 각국이 문화 이야기인가 생각했는데 언어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내용이 많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다.


기억에 남는 것들 몇 가지

1) 한국어는 색채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어려서 봤던 책에서는 영어의 색 표현이 단조로운 반면 한국어는 아주 다양하다고 했었는데 정반대 이야기가 흥미롭다.

오히려 한국어는 푸르스름하다 이런 식의 모호한 표현이 많은 반면 영어는 색 자체를 sky blue, marine blue 이런 식으로 정확히 지칭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옛 그림들이 하늘을 파란색으로 표시하지 않은 이유가 파란색 안료가 없어서 파랗게 인식하지 않았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통용된 색깔은 검정, 흰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이 다섯 가지이기 때문에 푸른 계통을 전부 파랗다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초록과 파란색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 셈이다.

화려한 색체를 자랑한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을 생각해 보면 색채 표현의 다양성이 이해가 된다.

반대로 한국어는 친족 관계를 표현하는 어휘들이 매우 복잡하다.

영어에서 단순히 사촌이라 표현하는 반면 우리는 내외, 촌수까지 정확히 구분하고 있다.

이런 어휘들을 통해 사회 구조를 살펴 볼 수 있는 듯하다.

다른 예시로 미국인 학자가 원주민 부족에게 햄릿의 줄거리를 설명해 줬는데 이들은 어머니와 결혼한 작은 아버지를 증오한다는 갈등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형사취수혼을 당연하게 생각하므로 처음부터 이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언어가 사고를 제한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2)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계라 할 수 있는가?

저자가 정확히 구분하지 않았지만 전에 읽은 책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의문을 표한다.

어쩌면 한국인들은 오래 전에 한반도에 정착해 단일 민족으로 지내 왔기 때문에 유럽의 언어들처럼 서로 섞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립어인 중국어와도 전혀 다르다는 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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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으로 백제를 읽다 - 나뭇조각에 담겨 있는 백제인의 생활상
백제학회 한성백제연구모임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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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목간 발굴에 관한 이야기라 전시회 도록 같은 느낌으로 빨리 훑어 볼 수 있었다.

돌에 새긴 금석문은 만들기가 힘든 만큼 중요한 정책이나 법령 등이 많았던 반면, 목간은 물품의 꼬리표 같은 실제적인 역할을 담당해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30만 점 이상의 엄청난 목간이 쏟아져 나온 반면 우리나라는 보존상의 문제 때문에 겨우 수백 점에 불과하다고 하니 안타깝다.

중국처럼 쓰고 난 후 목간을 한꺼번에 버리는 폐사지가 발견된다면 훨씬 풍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목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세금 수취와 군역과 요역 징발을 위한 호구 파악에 있는 것 같다.

신라 촌락 문서와 같은 기록들이 목간으로 남아 있어 흥미롭다.

사비 도성을 5부 5항으로 나누어 어디 사는, 무슨 직책을 가진 누구 이런 식의 신분증 같은 목간이 남아 있다.

또 위덕왕이 관상성 전투에서 사망한 아버지 성왕을 기리기 위한 세운 능사지에서 목간이 발견됐는데 다른 절에서 사월 초파일을 맞아 보내온 물품들이 적혀 있다.

자기사와 보현사는 절 명칭이 나온다.

子基寺, 즉 아들을 기리는 절이라는 뜻이라 흥미롭다.

저자는 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세운 절 이름이 혹 자기사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법왕 때 세워진 백마강 너머의 왕흥사의 원래 이름이 자기사였을 수 있다고 추론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흥미로운 가설이다.

이 곳에서 능사로 송염, 즉 소금을 보낸 목간이 발견되었다.

절에서 염전을 운영했다는 간접 증거라고 한다.

오석, 즉 도교에서 선약으로 쓰이는 오석산이라는 목간도 발견되어 백제와 도교의 관련성도 추측하고 있다.

한 두 글자에 불과한 목간을 가지고 다양한 생활상을 추론한다는 점에서 문자의 힘은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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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는 세계사 - 문화의 눈으로 역사의 진실을 읽는다, 개정증보판
주경철 지음 / 사계절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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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흥미롭게 읽을 만한 주제들이 많았다.

다만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이라 그런지 약간 촌스러운 서술 방식도 있고 오리엔탈리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랄까, 이런 게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문화사적인 역사는 전체에서 개인으로 발전해 오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근대 사회는 "개인"의 발견인지도 모르겠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관습적인 틀 안에서 자신을 누르고 살다가 부가 확산되고 인권이 발달하면서 집단으로부터 벗어나도 홀로 생존할 수 있는, 그래서 나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산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개인"들이 확산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낭만적인 사랑관도 먹고 살만해진 근대의 산물인 것 같다.

18세기 영국의 개신교도들에 의해 부부간의 사랑이 비로소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됐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국만 해도 최근까지 본부인은 가정을 지키는 사람이고 사랑은 가정 밖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 아니라 이제는 사랑을 계속 지켜 나가는 과정으로 변하는 듯하다.

유아 유기 풍습도 부부간의 사랑이 널리 퍼지고 먹고 사는 게 해결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아이를 가정에서 보호한다는 관념이 자리잡게 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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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성채 도시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가이하쓰샤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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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유럽에 대한 관심이 참으로 지대한 것 같다.

이런 책들을 보면, 일반인들도 역사에 대한 오타쿠적인 관심이 큰 듯 하다.

책 서문에도 취미 생활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는 말이 있다.

확실히 일본은 한국과 비슷해 보이는데도 매우 다른 문화권 같다.

사실 책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성채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들은 거의 이해를 못했다.

기계에 대해서는 겨우 스마트폰 누르는 것 밖에 못하는 사람이라 성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나로서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 불가다.

다만 고대로부터 외적의 방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모여 살기 시작했고 거주지를 삥 둘러 거대한 성벽을 쌓게 됐다는 정도로만 이해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은 점점 두꺼워지고 높아졌다.

대포가 등장하면서 성 안에서도 대포를 쏴야 하니 지나치게 높은 성벽은 오히려 비효율적이라 다시 높이가 낮아졌다고 한다.

한국은 대부분 산을 중심으로 한 산성 형태인데 유럽은 아예 주변을 빙 둘러 성벽을 쌓고 도랑을 파서 물을 채운 해자까지 등장한다.

석조 건축물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웅장한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듯하다.

적이 쳐들어 오면 전부 성 안으로 들어가 항전을 한다.

성은 그야말로 방어를 위한 최상의 전략이었던 셈이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시장이 생기고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얻는 도시들도 생겨난다.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도시가 커가는데 제한이 생기므로 중세 사람들도 방어와 확장 사이의 균형에 대해 고심했다고 한다.

좁은 곳에 갇혀 있으면서 위생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이니 페스트 같은 역병이 한 번 돌면 저절로 인구 조절이 이루어졌다.

일부러 역병을 퍼뜨리기 위해 투석기에 포로의 목을 잘라 성 안으로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정말로 인권은 사회의 진보와 함께 발전해 왔고 가톨릭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런 형편없는 인권 의식을 보면, 종교가 도덕성을 담보한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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