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문명에서 제국의 출현까지
이성원 지음 / 마로니에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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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별로인 것 같아 약간 걱정하면서 읽게 됐다.

일단 분량도 250 페이지로 역사서로서는 너무 짧은 것 같고, 책 표지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으며, 1,2장의 중국 선진 시대 역사 서술은 연대 나열에 그치는 것 같아 지루하기만 했다.

잘못 골랐구나 싶었는데, 왠걸.

뒤로 갈수록 너무너무 재밌다.

대학에서 강의 교재로 쓴 것 같은데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교양서로 손색이 없고 중국 고대 제국의 출현 배경과 그 속성에 대해 깊이있게 분석한 아주 좋은 책이다.

대학 교재가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도 서문에서 본인의 대학생 시절 은사의 강의에 감동한 얘기를 잠깐 밝히는데, 나 역시 이런 좋은 책을 읽을 때마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늘 남는 것 같다.

책 디자인을 좀더 산뜻하게 바꾸면 책의 매력을 살리는 데 더 도움이 될텐데 아쉽다.

제목도 약간 진부한 느낌이다.

그렇지만 내용은 아주 흥미롭고 신석기 문명의 탄생부터 상주 시대의 봉건제 사회를 거쳐 고대 제국으로 거듭나기까지 중국 역사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아주 빠른 시기에 거대한 영토를 하나의 통일된 정치체, 국가로 만들었고 그 전통이 수천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대단한 나라다.

위대한 고대 문명들이 여럿 있었지만 하나의 국가로서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 온 곳이 중국말고 또 있을까 싶다.

어쩌면 저자의 설명대로 중국이 거대한 땅덩어리지만 사실은 여러 산맥과 사막, 해협 등으로 닫힌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로마 역시 위대한 제국이었으나 유럽은 통일된 국가를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광활한 개활지였던 듯하다.

문서행정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는지 수십 만장의 목간이 발견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한반도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간독이 수천 매인 데 비해, 우물 하나에서 발견된 중국의 간독이 3만 매가 넘는다고 하니 과연 문서 행정이 발달한 제국의 위용이 느껴진다.

공자는 고대 상주 시대를 이상향으로 노래했으나 사실 문명의 여명기로 갈수록 사회는 매우 폭력적이고 주술에 의해 지배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비인간적인 시대였음을 밝힌다.

신체를 절단하는 육체형이나 수백 명을 순장하는 제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권리와 도덕 등은 오히려 사회가 발전하면서 점차 발전해 온 문명의 혜택인 것 같다.

여러 사람이 안정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관용과 예의범절, 상호 존중, 인격적 대우 등이 필수였을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129p

상족 계통의 송나라 세족의 후손이었으나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이미 그의 가문은 쇠락하였고 사마담이 '야합'의 결과였다고 표현한 것처럼 그의 출생 과정에도 곡절이 있었던 것 같다. <논어>와 <사기> 등의 문헌 전반에 드러나는 공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이미 어려서부터 고대의 '의례'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는 것이다. 사마담은 제자학파를 분류하며 공자와 그 문하를 '儒'라고 칭하였는데, 유의 어원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기우제를 지내는 제사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공자 스스로 '괴력난신'을 경계했듯이 사마담이나 사마천이 공자와 그 문하를 巫史 집단으로 분류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공자를 비롯하여 유가들은 다른 어떤 학파들보다 각종 제사와 의례에 정통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사상과 강령을 관통하는 핵심 교리는 '禮'였다. 

 공자가 그토록 일이관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의 삶을 관통하여 예법을 실천하고 時樂 에 정진하며, 고래로 전해지는 經史 를 보존, 정리하고 생활 속에서 도와 인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조류에 편승하여 예악이 점차 변질되어 가는 당시의 현실을 공자는 항상 개탄해 했으며, 그래서 예와 악이 회복에 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집착했는지는 여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시악의 교육을 얼마나 강조했는지는 <논어> 전편에 산재되어 있다. 모름지기 士人 으로서 시를 알아야 교양있는 대화가 가능하고 공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당시의 정황을 시사하고 있다. 70여 년의 생을 마감하며 마지막까지 주역과 시악에 정진했던 공자는 정치가로서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위대한 교육자이자 학자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6p

순자도 인간의 본성에 천착했는데, 다만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온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맹자와 대비된다. 그러나 본래 불완전한 인간을 적극적 교육과 예의를 통해 온전한 존재로 개선시켜야 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는 맹자의 본성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204p

사마천은 진시황제가 국정을 돌보느라 밤잠을 설치며 정진했다고 기록했는데 현아에 수발된 문서량이 그 정도라면 제국의 모든 문서가 집결되었던 황실의 정황을 감안하면 그 방대한 문서를 결재하고 처리하는 시황제의 격무가 결코 과장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물 하나에서 발견된 간독이 3만 7천매라는 규모를 감안하면 제국의 통치는 막연한 당위나 이상, 그리고 물리적 통제만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행정문서로 집행되고 관철되었던 것이다. 

214p

한대이후 축성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명나라 때로 몽고의 침입에 대비해 총 길이 2700km가 동쪽으로 이어져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자신들이 직접 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의 청 왕조에서는 장성이 상대적으로 군사적 가치가 상당히 떨어져 방치되어 있었다. 혹자가 말하듯 장성은 '인민들의 피와 땀의 결과'라는 평은 틀리지 않지만, 전근대시대 신분질서가 엄연하던 시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대한 권위주의적 토목건축에 인민의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것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각 문명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그러한 건조물을 만들었던 문명도 있었고, 또는 못 만들거나 만들지 않았던 문명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강력한 중앙집권력과 황제의 권위, 항상적인 풍부한 노동력이 어우러져 이러한 건조물을 창출할 수 있었다. 

224p

중국 역사상 누구보다 위대했던 진시황제가 전형적인 '창업'형의 군주였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진 제국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제국의 '수성'을 다질 수 있는 후계자를 양성시키지 못한 채 태자 부소를 변방으로 유배시키듯 축출하고, 무능한 호해가 제위를 계승하면서 진제국은 사상누각처럼 붕괴되었다. 반면 미천한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은 개인의 역량은 부족하였지만 주변의 인재를 중용하고 그들의 상주를 경청하며 역사상의 라이벌이었던 항우에게 승리하며 제국을 재건하였다. 그런 점에서 유방도 전형적인 창업형 군주였으나, 한이 진과 극명하게 달랐던 점은 황실의 안정을 통해 계승자를 양성하였으며 그 결과 문제와 경제라는 유능한 군주들이 연이어 즉위하며 한 제국 초기 안정을 다져 번영의 초석을 다졌다는 것이다. 즉 한은 창업과 수성이 성공적으로 이어지면서 제국의 완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

 '문경지치'의 실질적 수혜자는 경제에 이어 즉위한 7대 황제 무제였다. 진시황제를 연상시키는 정치적 야망과 과감한 추진력, 정치적 균형감각과 타고난 건강을 유지했던 한 무제는 54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다양한 대내외 정책을 추진하며 한의 번영을 구가함은 물론 고대 제국을 완성하였다.

238p

흉노의 정벌과 동시에 무제는 남방으로도 영토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남월국을 정벌하고 여기에 일남군 등의 9군을 설치했는데 오늘날의 광동, 광서, 그리고 베트남 북부에까지 미치는 광대한 영역이었다. 또한 동방으로도 진출하여 고조선과 충돌하여 위만조선을 물리치고 한4군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한 무제는 주변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정복과 영토확장을 추진하여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는 데 초석을 놓았다.


<오류>

206p

장강유역에 근거지를 둔 조(楚)나라와 한나라 지배계층들은

-> 초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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