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표지가 떨어져 나가기 직전의 책을 조심스레 넘기며 읽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꽤 방대한 분량인데 소설이라 그런지 쉽게 술술 넘어갔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봐야지 벼르고만 있었는데 역시 이번 터키 여행 때 비행기 안에서 읽게 됐다.
그러고 보면 비행기는 꽤나 좋은 독서 장소다.
흔들림이 없고 조용하니까 집중도 잘 된다. 

막연히 인권에 대한 책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 보니 <호밀밭의 파수꾼>과 매우 유사한 필체였고 저자도 이 작품 하나를 쓰고 절필했다고 한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일곱 살의 여자아이 눈으로 본 세상의 편견, 인종차별, 불의에 관한 내용인데 화자가 일곱 살이라 그런지 내용이 어렵지는 않았다.
심오한 개념보다는 직설적인 어법이 많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소 지루하기도 했다.
진정한 영웅은 주인공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의 변호사인데 아내가 일찍 죽어 어린 젬과 스카웃 남매를 키우고 있다.
흑인 가정부 칼퍼니아가 집안 살림을 맡아 한다.
시대적 배경은 흑인 차별이 한창 심했던 1930년대의 남부 앨라배마 주.
변호사 하면 어쩐지 소송 일삼으면서 돈이나 버는 악덕 이미지가 강해서 전반부에서는 애티커스의 역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애티커스가 보여주는 그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흑인의 애인이라는 (동성애자 의미) 모욕적인 언사까지 들으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끝까지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
어떤 면에서는 흑인이라고 차별하고 폭행하는 마을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을 비난하고 대립할 수 있는데도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한계를 이해하는 애티커스의 포용력이 놀랍다.
그는 매우 조화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애티커스의 인격은 듀보스 할머니라는 괴팍한 노인네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애티커스가 흑인의 강간 사건을 맡게 되자 마을에는 그를 비난하는 여론이 쫙 퍼지고 옆집에 사는 듀보스 할머니는 애티커스의 아들 젬에게 아버지 욕을 한다.
그러나 애티커스는 화가 나서 할머니의 꽃밭을 망쳐 버린 젬을 타이르면서 사과하라고 시킨다.
할머니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고 지금도 통증을 잊기 위해 몰핀 주사를 맞을 만큼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환자였던 것이다.
그는 약자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감쌀 줄 아는 놀라운 포용력을 보인다.
그리고 몰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고통을 참는 할머니를 위해 아들에게 매일 책을 읽어 주도록 시킨다.
자신에게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아들에게 자신을 욕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한 달씩이나 아들을 그 집으로 보내 침상을 지키게 한다는 것, 과연 보통 인격으로 가능한 일일까?
강간 사건의 변호도 그렇지만 이 에피소드에서도 애티커스의 놀라운 인격과 포용력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톰 로빈슨은 스물 다섯의 흑인으로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마을의 허드렛일을 해 준다.
마을에는 밥 이웰 일가가 외딴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데 술주정뱅이에 최하층 백인으로 묘사된다.
그는 아이들을 때리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다.
큰 딸 마옐라는 가끔 톰에게 집안일을 거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톰은 이웃과 전혀 교류가 없는 거의 갇혀지내는 이 불쌍한 백인 아가씨를 위해 기꺼이 봉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랍게도 이 아가씨는 욕정이 발동해 톰을 집으로 끌어 들여 자신의 몸을 더듬게 한다.
두려움에 떨던 톰은 도망가려 하고 그것을 발견한 아버지 밥이 달려와 딸을 폭행한 후 톰을 강간범으로 기소한다.
이 사건의 국선 변호사로 애티커스가 선임되어 재판이 진행된다.
흑인은 백인에게 존댓말을 쓰고, 백인이 버스에 타면 자리도 양보해야 하던 시절이니 (그것도 미국의 최남부 앨라배마 주) 마을 사람들은 밥 이웰이 평소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흑인이 백인을 강간했다고 분노한다.
결과는 사형!
아마 오늘날의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약자인 여자 쪽의 말에 더 무게가 실릴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차별이 될 수도 있는 문제 같다.
심지어 재판 중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톰을 폭행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감옥으로 몰려 오고 그 곳을 지키던 애티커스까지도 폭행당할 위협에 놓인다.
화자 스카웃은 겨우 7~8세의 어린 나이로 이러한 처지에 빠진 아버지를 목격한다.
그런데도 아버지 애티커스는 마을 사람들의 무지함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돌아갔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근본이 나쁜 사람은 없다, 그들의 마음 속에도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 역시 인종차별이나 근거없는 대중의 편견에 분노하고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을 이렇게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변호사는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지 모르겠다. 

마옐라는 뻔뻔하게도 자신이 유혹해 놓고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 놓고서도, 톰을 강간범으로 고소하고 그에게 맞았다고 주장한다.
톰은 외롭게 갇혀 지내는 마옐라에게 유일한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겨우 열 아홉 살 밖에 안 된, 어찌 보면 사회의 최하층민인 (흑인을 제외하고) 약자인데도 어찌나 뻔뻔하고 역겨운지 전혀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 아버지 밥 이웰은 워낙 형편없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더 분노하고 말 것도 없었다.
미국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흑인들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최하층의 백인들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모든 울분과 분노를 가장 아랫계층인 흑인에게 쏟아 붓는다.
그들의 유일한 자긍심은 바로 피부색이 희다는 단 한 가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온 서구 사회가 아직도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입장이면서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 온 흑인 차별에 대해서는 어쩌면 저렇게도 당당할 수 있는지, 정의나 평등은 과연 기득권층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배심원들에게 톰은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확정을 받는다.
항소를 준비하던 중 톰은 기다리라는 애티커스를 믿지 못하고 탈옥하려다 경비병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이미 톰이 죽었는데도 밥 이웰은 원한을 품고 홀로 남은 세 아이의 어머니인 톰의 아내를 괴롭히고 심지어 애티커스의 아들 젬과 스카웃을 공격해 팔을 부러뜨리기까지 한다.
이 때 남매를 도와 준 사람이 바로 마을의 또다른 이방인 부 래들리.
그도 역시 백인인데 미치광이란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감금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고 평생 갇혀 산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도 온갖 소문을 만들어 내고 악인이자 미치광이로 묘사된다.
사실 밥 이웰은 공공연히 애티커스를 죽이겠다고 설치고 다녔으나 실제로 어른인 애티커스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힘이 약한 아이들을 죽이려고 노렸던 것이다.
얼마나 비겁하고 못난 놈인가.
직접 본인에게는 덤비지도 못하고 약자인 아이들을 뒤에서 노리다니.
결국 그는 댓가를 치뤄 아이들을 죽이려고 한 그 칼에 자신이 찔려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런데도 애티커스는 혹시 다투는 와중에 아들 젬이 밥 이웰을 찌른 건 아닌지 조사하려고 한다.
아들이 뒤에서 살인자라는 수근거림을 듣고 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목격자인 부 래들리가 있고, 보안관의 강력한 변론에 힘입어 사건은 종결된다. 
마을의 기피 인물이었던 부 래들리도 사실은 착한 마음씨를 지닌 선량한 인물이었음이 밝혀진다.
가엾은 희생양 톰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1930년대의 상황에서 그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한 가지 또 특기할 만한 것은, 말괄량이 스카웃이 단지 얌전하고 바느질을 잘 하는 겉모습만의 숙녀가 아니라 활발하게 뛰어놀고 거칠게 자랄지라도 편견이 없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진정한 숙녀로 커가는 과정이다.
고모 알렉산드라는 엄마 없이 자란 스카웃이 남자처럼 함부로 자란다고 오빠 애티커스에게 잔소리를 하고 직접 스카웃을 감독하려고 든다.
그러나 진짜 숙녀는 겉모양만 얌전한 게 아니다.
그거야 말로 속물적인 게 아닌가.
진짜 숙녀는 아버지 애티커스가 보여준 것처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편견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게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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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2010-08-2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의 제국 - 소설로 읽는 아메리카의 초상' 김욱동 교수님 강좌
http://blog.daum.net/pangloss/6940330

영탁 2010-09-0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절한 자상한 독후감 감사드립니다.
책을 사놓고.외국어로된)..읽지못해서...
덕분에 이제는 제대로 읽게 되었습니다.
 
소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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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을 먼저 구입하고 하권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게 됐는데, 도서관에는 2006년도에 출간된 상하 합본이 있었다.
처음 상권을 봤을 때만 해도 상하로 나눠질만큼 내용이 길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합본된 책을 보니 500페이지가 미처 못되는 분량으로 충분히 한 권으로 출간될 수 있는 분량이었다.
꼭 상하로 분책을 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가격은 한 권으로 출간됐을 당시가 13000원이었는데 두 권으로 분책된 후 각각 9800원의 가격이 매겨졌다.
하나의 소설은 가능하면 한 권으로 출간해 주는 게 독자들을 위해서도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권에서는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와 독자 제인 갈런드의 입장에서 기술됐다.
스트라이버트 부분은 아무래도 비평가의 입장이다 보니 문학에 대해 논하는 이론적인 부분이 다소 딱딱하고 쉽게 공감하지 못했고, 마지막에 독자인 갈런드 부인 편은 편집자 이본 마멜 편처럼 주로 사건의 전개를 다루는 서사적 구조라 훨씬 쉽게 읽혔다.
작가와 비평가는 남자, 편집자와 독자는 여자라는 어쩐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고상한 것과 생활적인 것 등의 이분법이 자꾸 느껴지는 대목이다.
스트라이버트가 최악의 미국 작가로 지목한 펄 벅, 헤밍웨이, 스타인벡, 싱클레어 루이스는 모두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이다.
펄 벅과 헤밍웨이의 경우는 문학적 성과에 비해 과도하게 찬사를 받았고, 심지어 펄 벅의 경우 노벨 문학상 수상이 부끄러운 경우로 지목된 칼럼도 보긴 했다.
펄 벅의 <대지>는 청소년 세계문학전집에 실려 있어 굉장히 감동하면서 봤던 책인데 줄거리 위주로 너무 쉽게 쓰여져서인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나 <에덴의 동쪽> 은 언젠가 꼭 읽어 봐야지 벼르던 책이고 싱클레어 루이스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칼이 최고의 작가로 선정한 사람 중 두 사람은 모르겠고 나머지 허먼 멜빌과 포크너는 알고 있다.
<백경>과 <음향과 분노> 역시 읽고 싶은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해럴드 블룸의 책을 읽으면서도 느낀 바지만 역시 기본 상식이 되는 원전을 먼저 읽어야 논쟁과 토론이 가능하다.
일단 읽어봐야 좋다, 나쁘다 평가를 할 게 아닌가.
문학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자극이 됐다. 

스승인 데블런과 제자 칼의 특징은 굉장히 논쟁적이고 사람들의 반발을 사는 민감한 사안들을 피해 가지 않고 일부러 대중에게 노출시켜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민감하지만 중요한 주제에 대해 정면으로 승부하는 자신감이 돋보이고 본인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런 공격적인 자세는 이슈거리가 되기에 충분하고 슈퍼스타로 떠오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칼 역시 미국 최고의 작가, 최악의 작가를 선정해 대중들이 참여한 토론회장에서 공표하므로써 전국적인 스타가 된다.
최고의 작가는 누구나 자랑스럽게 밝힐 수 있지만, 최악의 작가를 공개적으로 언급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체면 문화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더욱 말이다.
칼은 같은 지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루카스 요더의 글쓰기 방식을 못마땅해 한다.
에즈라 파운드를 숭배하고 대중적인 것 대신 고급 독자를 겨냥하는 칼에게, 평이하고 안이한 방식의 글쓰기를 지향하는 요더는 문학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매우 성실한 작가이고, 네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무엇보다 칼의 책을 출판해 주는 키네틱 출판사의 가장 중요한 작가이다.
더군다가 칼이 재직하고 있는 메클랜버그 대학에 거액을 기부했다.
인간관계가 이중 삼중으로 얽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부당한 명성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를 공격한다는 것은 비평가로써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실 나는 왜 요더에 대한 칼의 공격적인 비판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소설의 분위기가 흘러 가는지 잘 모르겠다.
진정한 비평가라면 자신의 기준에 합당치 않다면 소신껏 비판할 수 있는 문제 아닐까?
내가 너무 순진하게 문학동네를 보고 있는 건가?
어쩐지 미국은 그런 온정주의에서 벗어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제일 충격적인 반전은 역시 칼의 동성애였다.
확실히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는 동성애가 일반적이지 않아 주인공을 돕는 동성 친구는 단순히 우정일 뿐이지 둘 사이가 발전될 거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미국 소설을 보면, 주인공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동성 친구의 존재는 꼭 이런 식으로 연인 관계를 형성한다.
데블런 교수가 어린 제자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외국을 여행할 수 있게금 돈을 마련해 줬을 때만 해도 설마했는데, 직접 그리스로 날아가 결국 그들은 한 침대에 눕고 만다.
동성애가 우리보다는 훨씬 일반화된 느낌이다.
맨 마지막 장에서 이본 마멜이 칼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는데 과연 그녀는 칼의 성향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양성애자도 있다고 하니 두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
데블런과 칼의 문학에 대한 고급 대화는 성적 친밀감과는 별도로 무척 이상적으로 보였다.
특히 데블런이 그리스 연극들을 보여 주면서 그리스 문학의 정수를 맛보게 하자 칼이 아트레우스 가계의 비극을 하나의 연표로 만들어 학생들 지도에 활용하는 예는 굉장히 신선했다.
역시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학의 영원한 원천인 것 같다.
데블런 교수가 죽고 칼의 촉망받는 제자 티모시 툴이 등장했을 때 혹시 제자와도? 이런 추측을 했는데 특별한 애정 관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모시가 살해당하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살인 사건이야말로 소설의 가장 큰 반전이고 클라이막스 같다.
루카스 요더의 입을 빌려, 애플버터가 돈 때문에 이웃을 살해하게 방치한 무심한 독일인 가정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너무 짧게 묘사되서 그런지 크게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어쨌든 요더는 그렌즐러 8부작을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지만, 이웃 청년 애플버터의 무지막지한 살인을 계기로 칼 스트라이버트와 티모시 툴이 추구했던 혁신적인 글쓰기에 돌입한다.
역시 그는 성실한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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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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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읽은 책이다.
결혼 준비하랴, 논문 쓰랴 나름 바빴던 관계로 요새 통 책을 못 읽고 있다.
시간이 없다기 보다는 마음의 부담감 때문에 편하게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책은 M양이 선물한 건데 지하철에서 혹은 자기 전 침대에서 짬짬이 읽었다.
소설의 묘미는 바로 이런 잠깐의 여유 시간에 읽는 게 아닐까 싶다.
제목이 특이해 예전부터 무슨 내용일지 궁금했었다.
독특하게도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이 네 사람의 관점에서 기술을 했다.
상권만 읽은 상태라 아직 비평가와 독자 편은 못 읽었는데 내가 독자이기 때문인지 독자의 관점에서 본 소설이 제일 기대된다.
현대 소설을 읽으면 오래된 고전과는 다르게 현실의 묘사나 심리분석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래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 같은데, 고전소설 보다 더 묘사에 정성을 쏟는 느낌이다.  

루카스 요더와 베노 레트너의 극명한 대비.
두 사람의 가운데 편집자로 끼어 있는 이본 마멜.
내가 여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설가 보다는 독자의 입장이기 때문인지, 요더 보다는 이본 쪽이 훨씬 더 와 닿았다.
더 서사적이기도 해서 읽기 쉬운 면도 있었다.
근면성실한 노동자와도 같은 루카스 요더는 첫 네 작품은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들어선다.
그 후 네 작품은 연속으로 히트를 치고, 대가의 반열에 오른다.
반면 번득이는 재치와 분석력, 놀라운 언변을 가진 베노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지성을 한 편의 완성된 글로 풀어내지 못하고 루카스의 성공을 질투하면서 결국은 식칼로 목을 찔러 죽고 만다.
베노의 자살은 서술 초기부터 여기저기 암시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이런 파국으로 끝날 줄 알고 있었다.
어쩐지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소피의 선택> 의 상대역을 보는 느낌이었다.
우리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해야 하나? 
부유한 베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에 진득하게 글쓰기에 몰두하지 못하고 무위도식 한다.
편집자인 아내 이본이 퇴근했을 때 쇼파에 어질어진 신문의 낱말 맞추기 조각들과 술에 취해 잠든 남편의 모습을 봤을 때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이본은 그녀의 삼촌이 경계했던 여인상, 방탕한 남자의 구원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본 마멜, 혹은 셜리 마멜스타인의 성공기는 일견 감동스러운 부분이 있다.
가난한 공장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겨우 대학 1학년 중퇴 후 출판사의 비서로 취직해 밑바닥부터 정상의 편집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노력과 열정은 어쩐지 미국이 기회의 땅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요더의 작품이 네 편 씩이나 연달아 실패를 거듭하는데도 끝까지 그를 후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놀라운 지성과 번뜩이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는 마치 재앙과도 같았던 베노와의 사랑.
아마도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배경 같은데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같지 않은 채 십 여 년 째 동거하는 관계가 용인되는 미국 사회가 부럽기도 했다.  
루카스 요더와 아내 엠마 역시 아이를 같지 않았다.
그들은 그렌즐러 8부작이 바로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결혼과 자식을 개인의 자유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의 너그러움이 부럽다.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소설이다.
비평가와 독자의 입장은 또 어떠한지 궁금하다.
펜실베니아로 이주한 독일인 제세례파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나라 대하소설 <토지>나 <아리랑> 등을 보는 느낌이었다.
같은 문화권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정서와 공감 같은 것들.
결국 모국어로 쓰여진 소설만이 올바로 100% 이해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루카스 요더가 보여주는 독일계 조상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이 감동적이었다.
더불어 아미쉬와 메노파가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생겨난 재세례파였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소득이다.
단추를 달 것인지 말 것인지, 멜빵을 맬 것인지 말 것인지 등을 두고 형제간의 의를 끊고 갈라서는 이들의 모습에서, 18세기 조선의 예송논쟁을 떠올렸고 어떤 종교나 학문이든 인간의 삶을 잡아먹는 교조주의는 배척해야 마땅하며 의식과 관념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문득 <토지>를 다시 읽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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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 이병주 전집 29
이병주 지음 / 한길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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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서재에 있는 책을 읽게 됐다.
이건 순전히 아빠 취향이다.
집에 내려 왔는데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제목이 특이해 골라 잡게 됐다.
역시 대표작인 <마술사>가 가장 흥미로웠다.
그러나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뭐랄까, 너무 작위적이고 통속소설 느낌이 강했다.
도입부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송인규라는 마술사가 서커스단과 계약을 맺고 인도 마술을 보여 주기로 했는데 막상 무대에 서게 되자 자긴 못한다고 버틴다.
큰 돈을 들여 그를 고용한 곡마단원들은 송인규를 폭행하고 화자가 객주에서 그를 구해주면서 사정 얘기를 듣게 된다.
송인규는 일제 말기에 학도병으로 버마에 끌려간다.
거기서 일본 관리들에게 폭탄을 투여한 후 잡힌 버마인들 중, 크란파니라는 인도 마술사가 끼여 있다.
그는 크란파니의 독립의식에 감동받아 식민 조국의 현실에 눈 뜨고, 사형 직전에 그와 함께 탈출한다.
여기까지는 꽤 흥미진진했다. 

그러나...
송인규가 크란파니 집에 머물면서 마술 수행을 하는 이야기부터는 좀 황당무계한 느낌이 강했다.
불가촉천민인 크란파니가 자기 계급에서는 똑똑한 여자가 없다는 이유로 이웃 버마에서 아홉 살짜리 어린 아이 인레와 혼인했다는 설정도 부자연스럽고 (평등을 외치는 자신의 생각에 모순되지 않은가) 송인규가 수련 끝에 깨달음을 얻고 희열을 느껴 인레와 섹스를 하게 된다는 것도 억지스럽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소설 속의 섹스는 지나치게 미화됐던지, 혹은 지나치게 천시된다.
결국은 스승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셈인데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 법열의 순간을 섹스로 승화시켰다는 그런 논리가 억지스럽다.
또 한 번 송인규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순결을 잃어 다시는 크란파니를 모실 수 없다는 설정도 남성 위주의 시각처럼 보인다.
결국 성이란 언제나 남성이 주도권을 쥐기 마련인가?
송인규가 인레하고만 섹스를 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술집 여자와 정사를 나눈 후 마술을 하다가 한쪽 눈을 잃었다는 설정도 너무나 작위스럽다.
부부 관계도 아닌데 평생 한 사람과만 섹스를 해야 한다는 게 도덕적으로 합당한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도덕심이 발달한 나라에 대체 색주가는 왜 있는 것인지.  

맨 마지막 단편, <망명의 늪> 에서도 섹스 얘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술집 작부에게 얹혀 사는데 그가 무위도식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의 큰 물건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이 좋은 걸 누구에게 보내, 절대 못 보내 하는 식의 대사는 어쩐지 현실적으로 와 닿지가 않는다.
남자들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큰 성적 환상을 갖고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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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1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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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었다.
무척 분량이 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쉬운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 준 책이라 정말 편하게 읽었다.
지하철에서는 보통 집중이 잘 안 되서 가벼운 책만 읽게 되는데 이 책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며칠을 다녔다.
역자 후기를 읽어 보니 노인이 며느리의 발을 빠는, 좀 엽기적이고 변태적인 성욕에 관한 소설들을 많이 썼다고 한다.
상당히 에로틱한 걸 좋아하는 작가 같고,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마광수씨였다.
그런데 또 세설은 그런 류의 소설은 전혀 아니라 역자의 말대로 약간 예외적인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서사성이 정말 풍부하고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상적인 이야기로, 마치 일일연속극을 보는 것처럼 네 자매의 가정 생활과 혼담을 중심으로 어쩌면 이렇게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 저자의 기술 능력에 감탄하는 바다.
특히 간사이 지방의 풍속과 자연, 말투 등을 애정어린 눈으로 묘사하여 실제 일본 사람들이 읽는다면 자기 고장에 대한 애향심이 굉장하게 생길 것 같다.
정작 작가 자신은 도쿄 태생이고 재혼한 아내가 오사카 유명 상인의 딸이었다고 한다.
이 아내에 대한 사랑이 세설을 탄생시킨 게 아닐까 싶다.
젊은 시절 어떤 기생을 좋아했는데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의 연인이 되버려서, 대신 그 동생과 결혼을 했는데 의외로 동생은 너무 정숙했기 때문에 작가의 미움을 받았고,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수하의 문인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작가는 아내 양도 각서 이런 걸 써서 신문에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나중에는 다시 아내를 돌려 달라고 하고, 하여튼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에로티시즘은 그다지 흥미는 없지만 어쩐지 이런 대가가 쓰는 소설은 천박하지 않고 고상한 맛이 있을 것 같다. 

네 명의 자매 중 가장 현대적이고 과감한 다에코는 신분이 다른 사진사 이타쿠라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그가 유양돌기염 수술을 하다가 사망하고 만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화가 났었다.
명백한 의료사고이고 최소한 의사가 도의적인 책임이라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시골 출신의 못배운 부모 때문에 항의 한 번 못하고 오히려 잘못을 숨기려는 의사에게 쫓겨나기까지 한다.
가끔 병의 경과가 나쁜 코스로 갈 수 밖에 없는 경우인데도 소송을 걸어 의사를 죽일 놈 취급하는 경우를 보고 기가 막힐 때도 있지만, 소설 속의 이런 경우를 보면 약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에코가 결혼을 한 상태로 이타쿠라가 사고가 났다면 적어도 다에코 집안에서라도 소송을 걸지 않았을까?
하긴 다에코 역시 사산을 하고 원장이 직접 자기 실수였다고 말을 했는데도, 언니 유키코가 오히려 실수를 인정한 원장에게 고맙다고 말을 할 정도니, 1930년대 일본의 현실에서 전문직인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의사가 높은 신분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유키코의 맞선 상대자 중 한 명은 독일에 유학까지 갔다 온 내과 의사이고 제약회사의 중역에 있는데도, 유키코를 높은 신분의 사람으로 생각한다.
일종의 전문직이지 사회적으로 귀족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독일과의 교류가 많은지 유학갔다 온 사람들도 자주 등장하고 독일인 이웃도 나온다.
여자들을 중심의 이야기라 그런지 모르겠으나 의외로 중일전쟁이라 2차 대전 얘기는 많이 나오질 않는다.
다에코는 이타쿠라가 사망한 후 자신을 쫓아다니는 오쿠바타케와 헤어지기 위해 바텐더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것도 혼전에!
사실 유키코의 경우 맞선 상대와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나눌 만큼 내외를 심하게 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다에코의 혼전임신은 나로서도 놀랍다.
그러고 보면 옛날 시대가 배경인 소설에서 지금 정서로는 이해가 안 가는 일도 그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대마다 가치관과 도덕관이 다르기 때문에 시대가 다른 우리가 그 당시 등장인물들을 100%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이 가치가 있는 것은, 이런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고 여전히 감동과 재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 다음 세대는 혼전임신이 왜 이슈가 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재밌는 일화들이 있다.
사치코의 딸 에스코가 성홍열에 걸렸는데 무려 40여 일을 집안에서 격리되어 지낸다.
전염병이긴 하지만 요즘에는 딱 하루만 항생제 쓰면 전염력이 사라지고 열만 떨어지면 3~4일 내로 퇴원할 수 있다.
항생제가 보편화 되기 전이라 그런가?
그것도 간호사를 따로 입주시켜 병 간호를 하게 하다니, 인건비가 굉장히 쌌다는 걸 알 수 있다.
식모들도 많이 나온다.
사치코 집안이 몰락한 상인 가문임에도 부리는 사람들이 몇이나 등장한다.
특히 오하루의 경우, 다에코가 이질에 걸려 설사할 때 요강을 버리는 것은 물론 심지어 대변 처리까지 해 준다.
아프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만 가족도 아닌 일하는 사람이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게 참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가정부라기 보다는 몸종 느낌이 든다.
다에코가 이질에 걸려 죽게 생겼는데 수액을 놓지 않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요즘 같으면 이질에 걸릴 위험도 거의 없지만 만약 실제로 이질에 걸렸다면 항생제를 쓰고 당장 병원에 입원해 수액 치료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돈 천 원도 안 하는 수액이 얼마나 많은 탈수 환자를 살리는지, 현대의학에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일본은 꽤 근대화 되고 잘 사는 나라로 나오는데도 환자 치료가 저 정도라면 식민지 치하의 조선 사람들은 과연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았을지 답답하다.
하여튼 잘 살고 볼 일이다. 

유키코는 과연 누구와 결혼을 할지 궁금했는데 뜻밖에도 서자이긴 하지만 화족의 아들과 혼인을 한다.
이것도 참 재밌는 게, 딱 한 번 사진으로 얼굴을 본 후 남자 쪽에서는 이미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사실이다.
요즘 같으면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인데 집안을 미리 조사해서 큰 하자가 없고 사진이 마음에 들면 벌써 맞선을 보기도 전에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하긴 옛날에는 얼굴도 안 보고 시집 갔으니 그나마 본인 의사를 물어 보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책이 시작할 때 서른 셋이었던 유키코가 서른 다섯에 시집을 갔으니, 지금 시대로 봐서도 꽤 나이가 들긴 했다.
그래서 선 보는 사람들이 죄다 애 딸린 상처한 남자들이었나 보다.
심지어 유키코는 전처 자식이 귀여웠으면 좋겠다는 조건까지 미리 내건다.
결혼 상대자인 미마키는 비록 화족의 지위는 계승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지체 높은 집안 자식이고 미국 유학도 다녀온 엘리트에다가 초혼이니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것.
유키코가 결혼 후에 일어나는 얘기를 후속편으로 써 봐도 참 재밌을 것 같다.
어쩌면 사랑을 찾아 결혼한 다에코가 가장 잘 살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다에코는 양제 기술도 있으니 네 자매 중 제일 다이나믹한 삶을 살 것 같다. 

너무 재밌게 읽은 소설이고 일본 소설에 대한 편견을 바꾸게 했다.
내친 김에 이 작가가 현대어로 번역했다는 겐지 이야기도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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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1-16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꼭 일일연속극 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같은 소감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댓글을 남겨봅니다.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지 않고 쭉 이어서 대작으로 갔다면 어떨까 아쉬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