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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표지가 떨어져 나가기 직전의 책을 조심스레 넘기며 읽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꽤 방대한 분량인데 소설이라 그런지 쉽게 술술 넘어갔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봐야지 벼르고만 있었는데 역시 이번 터키 여행 때 비행기 안에서 읽게 됐다.
그러고 보면 비행기는 꽤나 좋은 독서 장소다.
흔들림이 없고 조용하니까 집중도 잘 된다.
막연히 인권에 대한 책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 보니 <호밀밭의 파수꾼>과 매우 유사한 필체였고 저자도 이 작품 하나를 쓰고 절필했다고 한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일곱 살의 여자아이 눈으로 본 세상의 편견, 인종차별, 불의에 관한 내용인데 화자가 일곱 살이라 그런지 내용이 어렵지는 않았다.
심오한 개념보다는 직설적인 어법이 많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소 지루하기도 했다.
진정한 영웅은 주인공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의 변호사인데 아내가 일찍 죽어 어린 젬과 스카웃 남매를 키우고 있다.
흑인 가정부 칼퍼니아가 집안 살림을 맡아 한다.
시대적 배경은 흑인 차별이 한창 심했던 1930년대의 남부 앨라배마 주.
변호사 하면 어쩐지 소송 일삼으면서 돈이나 버는 악덕 이미지가 강해서 전반부에서는 애티커스의 역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애티커스가 보여주는 그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흑인의 애인이라는 (동성애자 의미) 모욕적인 언사까지 들으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끝까지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
어떤 면에서는 흑인이라고 차별하고 폭행하는 마을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을 비난하고 대립할 수 있는데도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한계를 이해하는 애티커스의 포용력이 놀랍다.
그는 매우 조화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애티커스의 인격은 듀보스 할머니라는 괴팍한 노인네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애티커스가 흑인의 강간 사건을 맡게 되자 마을에는 그를 비난하는 여론이 쫙 퍼지고 옆집에 사는 듀보스 할머니는 애티커스의 아들 젬에게 아버지 욕을 한다.
그러나 애티커스는 화가 나서 할머니의 꽃밭을 망쳐 버린 젬을 타이르면서 사과하라고 시킨다.
할머니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고 지금도 통증을 잊기 위해 몰핀 주사를 맞을 만큼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환자였던 것이다.
그는 약자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감쌀 줄 아는 놀라운 포용력을 보인다.
그리고 몰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고통을 참는 할머니를 위해 아들에게 매일 책을 읽어 주도록 시킨다.
자신에게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아들에게 자신을 욕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한 달씩이나 아들을 그 집으로 보내 침상을 지키게 한다는 것, 과연 보통 인격으로 가능한 일일까?
강간 사건의 변호도 그렇지만 이 에피소드에서도 애티커스의 놀라운 인격과 포용력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톰 로빈슨은 스물 다섯의 흑인으로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마을의 허드렛일을 해 준다.
마을에는 밥 이웰 일가가 외딴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데 술주정뱅이에 최하층 백인으로 묘사된다.
그는 아이들을 때리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다.
큰 딸 마옐라는 가끔 톰에게 집안일을 거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톰은 이웃과 전혀 교류가 없는 거의 갇혀지내는 이 불쌍한 백인 아가씨를 위해 기꺼이 봉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랍게도 이 아가씨는 욕정이 발동해 톰을 집으로 끌어 들여 자신의 몸을 더듬게 한다.
두려움에 떨던 톰은 도망가려 하고 그것을 발견한 아버지 밥이 달려와 딸을 폭행한 후 톰을 강간범으로 기소한다.
이 사건의 국선 변호사로 애티커스가 선임되어 재판이 진행된다.
흑인은 백인에게 존댓말을 쓰고, 백인이 버스에 타면 자리도 양보해야 하던 시절이니 (그것도 미국의 최남부 앨라배마 주) 마을 사람들은 밥 이웰이 평소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흑인이 백인을 강간했다고 분노한다.
결과는 사형!
아마 오늘날의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약자인 여자 쪽의 말에 더 무게가 실릴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차별이 될 수도 있는 문제 같다.
심지어 재판 중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톰을 폭행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감옥으로 몰려 오고 그 곳을 지키던 애티커스까지도 폭행당할 위협에 놓인다.
화자 스카웃은 겨우 7~8세의 어린 나이로 이러한 처지에 빠진 아버지를 목격한다.
그런데도 아버지 애티커스는 마을 사람들의 무지함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돌아갔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근본이 나쁜 사람은 없다, 그들의 마음 속에도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 역시 인종차별이나 근거없는 대중의 편견에 분노하고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을 이렇게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변호사는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지 모르겠다.
마옐라는 뻔뻔하게도 자신이 유혹해 놓고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 놓고서도, 톰을 강간범으로 고소하고 그에게 맞았다고 주장한다.
톰은 외롭게 갇혀 지내는 마옐라에게 유일한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겨우 열 아홉 살 밖에 안 된, 어찌 보면 사회의 최하층민인 (흑인을 제외하고) 약자인데도 어찌나 뻔뻔하고 역겨운지 전혀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 아버지 밥 이웰은 워낙 형편없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더 분노하고 말 것도 없었다.
미국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흑인들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최하층의 백인들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모든 울분과 분노를 가장 아랫계층인 흑인에게 쏟아 붓는다.
그들의 유일한 자긍심은 바로 피부색이 희다는 단 한 가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온 서구 사회가 아직도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입장이면서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 온 흑인 차별에 대해서는 어쩌면 저렇게도 당당할 수 있는지, 정의나 평등은 과연 기득권층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배심원들에게 톰은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확정을 받는다.
항소를 준비하던 중 톰은 기다리라는 애티커스를 믿지 못하고 탈옥하려다 경비병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이미 톰이 죽었는데도 밥 이웰은 원한을 품고 홀로 남은 세 아이의 어머니인 톰의 아내를 괴롭히고 심지어 애티커스의 아들 젬과 스카웃을 공격해 팔을 부러뜨리기까지 한다.
이 때 남매를 도와 준 사람이 바로 마을의 또다른 이방인 부 래들리.
그도 역시 백인인데 미치광이란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감금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고 평생 갇혀 산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도 온갖 소문을 만들어 내고 악인이자 미치광이로 묘사된다.
사실 밥 이웰은 공공연히 애티커스를 죽이겠다고 설치고 다녔으나 실제로 어른인 애티커스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힘이 약한 아이들을 죽이려고 노렸던 것이다.
얼마나 비겁하고 못난 놈인가.
직접 본인에게는 덤비지도 못하고 약자인 아이들을 뒤에서 노리다니.
결국 그는 댓가를 치뤄 아이들을 죽이려고 한 그 칼에 자신이 찔려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런데도 애티커스는 혹시 다투는 와중에 아들 젬이 밥 이웰을 찌른 건 아닌지 조사하려고 한다.
아들이 뒤에서 살인자라는 수근거림을 듣고 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목격자인 부 래들리가 있고, 보안관의 강력한 변론에 힘입어 사건은 종결된다.
마을의 기피 인물이었던 부 래들리도 사실은 착한 마음씨를 지닌 선량한 인물이었음이 밝혀진다.
가엾은 희생양 톰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1930년대의 상황에서 그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한 가지 또 특기할 만한 것은, 말괄량이 스카웃이 단지 얌전하고 바느질을 잘 하는 겉모습만의 숙녀가 아니라 활발하게 뛰어놀고 거칠게 자랄지라도 편견이 없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진정한 숙녀로 커가는 과정이다.
고모 알렉산드라는 엄마 없이 자란 스카웃이 남자처럼 함부로 자란다고 오빠 애티커스에게 잔소리를 하고 직접 스카웃을 감독하려고 든다.
그러나 진짜 숙녀는 겉모양만 얌전한 게 아니다.
그거야 말로 속물적인 게 아닌가.
진짜 숙녀는 아버지 애티커스가 보여준 것처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편견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게 많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