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결혼과 출산 문화 국학진흥원 교양학술 총서 - 고전에서 오늘의 답을 찾다 1
박희진 지음,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사업팀 기획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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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조선 시대 결혼과 출산에 관한 일화들 모음 정도로 생각했는데, 인구학 쪽 이야기라 더 의미가 있었던 책이다.

150 페이지 정도의 짧은 책인데도 조선 시대 출산률과 인구 변화에 대해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어 조선이라는 사회 구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아마도 저자가 경제를 전공한 분이라 접근법이 다른 느낌이다.

서문에서 한국의 저출산에 대한 해법을 조선 시대에서 찾아보자는 말이 있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인구를 늘리기 위한 핵심은 결혼을 빨리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자영업을 안할 때는 인구가 줄어드는 게 왜 문제인지 별로 와 닿지가 않았다.

그냥 막연히 인구가 줄면 생활 공간이 넓어져 쾌적해지고 경쟁도 줄어드는 거 아닌가, 이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영업자가 된 후부터는 인구야말로 내수 경제의 핵심이고 일자리 창출의 기본이라는 걸 뼈저리게 인식하게 됐다.

왜 인구가 힘이라고 하는지 너무나 이해가 된다.

아이들 관련 일을 하는 내 입장에서 느끼기로는, 결혼을 일찍 하면 둘, 셋 낳을 가능성이 커진다.

늦게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싶어도 불임률이 높아지고 하나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

조선 시대도 이런 이유로 조혼이 성행했다고 한다.

빨리 결혼해서 후사를 보고 싶기 때문에 남자들의 초혼 연령은 갈수록 낮아지고, 대신 여자는 가임기여야 임신이 가능하므로 19세기 말까지도 초혼 연령이 평규 17세로 일정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때 오히려 연상이 많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나 보다.

두세 살 많은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유럽의 경우는 초혼 연령이 24,5세로 조선보다 훨씬 높았는데, 그 까닭은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생활해야 결혼이 가능했기 때문에 만혼이 많았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집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는 식이었다.

그런데도 유럽의 1인당 출산율이 조선보다는 훨씬 높았다는 점이 신기하다.

조선은 평균 5명인데 비해 유럽은 9~10명에 이른다.

조선은 일찍 결혼하고 심지어 혼인율이 100%에 이르는데 왜 출산율은 떨어지는 것일까?

저자는 조선의 여인들이 빨리 죽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대를 잇기 위해 남성들도 어쩔 수 없이 재혼, 삼혼을 해야 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조선은 축첩 제도 때문에 한 여성이 아닌 여러 여성에게 자손을 봤기 때문에 일부일처가 기본인 유럽에 비해서 한 배우자당 출산율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

또 주자학이 하층민들에게까지 내려가면서 성적 터부가 강해지고 양반은 시묘살이 3년간 성관계가 불가했던 탓에 출산율이 더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인구학 자료를 볼 것도 없이 조선 후기 왕실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조선 전기에는 왕비들이 다산했던 데 비해 후기로 갈수록 정비에게서는 물론이고 후궁에게까지 자손을 얻기 어려워져 후계자선정에 애를 먹는다.

참 희안한 게 혼인의 목적 자체가 오직 남아를 생산하여 대를 잇는 것인데도 왠 성적 금기가 그리도 많았던 것인지.

남아를 얻기 위한 온갖 미신들이 난무하고 치성을 들이는 대신 자주 합방을 했으면 해결됐을텐데 뭔가 조선은 여러가지로 모순적인 사회였던 듯하다.

조선의 인구 변화와 혼인 문화에 대해 알아 본 좋은 시간이었고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해법이라면 가임기 여성이 빨리 결혼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당장 나만 해도 서른 네 살에 결혼해 연년생으로 둘을 낳았는데, 일찍 결혼했다면 셋째도 낳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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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 학살과 파괴, 새로운 질서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대전 2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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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약한 역사 분야가 바로 전쟁사, 그 중에서도 특히 현대전이라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역시 어렵다.

제목이 "사진으로 보는 2차 대전"이라 좀 쉬울 거라 생각하고 고른 책인데, 생각보다 2차 대전 전투들을 자세히 묘사해서 따라가기가 다소 어려웠다.

거의 흑백 사진이라 사진에 방점이 찍힌 책은 아니고 2차 대전의 각 전투에 대해 성실하게 묘사한 책이라 하겠다.

번역이 약간은 어색하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내 배경지식이 부족해 매끄럽게 잘 안 읽혀 한참 걸렸다.

2차 대전사는 다른 책들도 좀더 읽어 봐야 할 듯.


전에는 막연히 2차 대전이라고 하면 히틀러가 전유럽을 장악하고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협력하여 파시즘을 몰아낸 전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히틀러는 1차 대전의 악몽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아 하던 영국을 이용해 체코 땅을 병합시킨 후 전격적으로 폴란드와 프랑스에 진격해 속도전으로 유럽을 장악해 버렸다.

즉, 병력이나 물자가 아주 풍부해서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들을 장악한 게 아니라 너무 급작스럽게 진행됐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고 당연히 독일도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랑스를 단 6주 만에 점령해 버린 히틀러는 영국을 무차별 폭격하지만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고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소련을 침공하게 된다.

히틀러는 소련을 중부 유럽처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거라 믿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 바로 2차 대전에서 소련의 분전이다.

전에는 막연히 2차 대전은 영국과 미국, 프랑스 같은 자유주의 국가들이 파시즘 국가를 물리친 전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독일과의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도 소련이고 다른 모든 국가들의 사상자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 죽은 이들이 바로 러시아인들이었다.

어찌 보면 소련을 움켜 쥔 스탈린의 분전이 놀랍고 왜 종전 후 소련이 주변을 위성국가화 시켰는지 그 영향력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마치 자유주의 진영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커졌던 것처럼 말이다.

러시아 이외의 지역 전투들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전에는 오히려 소소해 보일 정도로 동부 전선의 피해가 막심했다.


<인상깊은 구절>

51p

그는 폴란드인들이 나중에 우크라이나를 러시아로부터 획득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단치히와 회랑을 독일에 기꺼이 양보하리라 생각했다. 폴란드 통치자들의 시각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셈이었다. 폴란드 통치자들은 폴란드를 강대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일과 소련 두 나라 모두에 대해 독립을 유지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었고 둘 중 어느 나라에든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었다. 폴란드인들이 요지부동일 것이라 판명되자, 히틀러는 늘 사용하던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군사 행동을 취하겠다고 막연히 위협함으로써 협상을 용이하게 풀어보려 한 것이다.

 이러한 위협이 영국 정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938~1939년의 겨울 동안 그들은 점차로 독일이 서유럽에서, 네덜란드에 대해, 프랑스에 대해, 어쩌면 심지어 영국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되엇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은 프랑스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폴란드는 영국인들에게도 중요해졌다. 1938년 12월까지도 그들은 폴란드가 독일의 위성국이 되리라는 것을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강화되어야 한다면 동부에 제2의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폴란드가 필요했다. 폴란드가 이탈한다면 프랑스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었다. 

 영국의 폴란드 보장으로 유럽에서 전쟁 발발이 목전에 다가왔다. 히틀러는 억제되기는커녕 흥분했다. ... 그는 서유럽의 두 나라가 지난해 체코슬로바키아에 했던 것처럼 폴란드에도 양여를 강요할 것을 확신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기다림이 헛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충분히 그럴 의향이 있었다. 그들은 아직 히틀러를 회유하기를 간절히 바랐고 실제로 이번에도 그가 주장하는 바가 정당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체코 위기를 통해 너무 많은 양보를 하지 않으려면 하나도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폴란드인들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분명히 폴란드인들은 스스로의 힘을 지나치게 크게 생각했다. 이보다는 좀 더 관대하게 봐줄 수 있는 실수인데, 또한 폴란드인들은 서유럽 국가들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그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더는 1918년의 기세등등한 전승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러한 폴란드의 망상을 조장했다. 그들은, 좀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들이 폴란드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식했다. 그들은 폴란드의 완강함에 당황했다. 그러나 강대국으로서의 모든 명성을 잃지 않으려면 스스로 한 약속을 부인해서는 안 되었다

333p

그는 두 명의 독립적인 공산주의 지도자 티토와 마오쩌뚱을 다룰 때 보여주었듯이 결코 그들의 성공을 원하지 않았고 종종 방해하기까지 했다. 스탈린은 다른 모든 일을 생각지 않고 독일을 패배시키는 데만 마음을 쏟았고, 이는 우리가 러시아에서 2천만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루스벨트는 아마도 자유 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생각했을 것이고, 처칠은 대영제국을 회복시킬 생각을 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오로지 독일의 패배만을 생각했다.

337p

테헤란 회의는 세계사에서 하나의 이정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그렇게도 협력을 이루지 못하던 두 세계적 강대국이 드디어 하나가 되었다. 삼대 강국은 독일을 패배시킬 때까지 단결하기로 약속했다. 세 나라 모두가 지킨 약속이었다. 강대국들이 연합해 히틀러에게 대항하면 그의 운명이 끝장난다는 사실은 언제나 명백했다. 이제 그들이 그렇게 했고, 독일의 패배가 확실해졌다.

374p

티토는 베오그라드에 자신의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나중에 그가 언급한 대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파이프 담배를 물고 러시아 항공기를 타고 돌아와서 조국을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전쟁 기간 내내 자신의 나라를 떠나지 않았던 유일한 공산 지도자였다.

384p

바로 그날 아침 독일인들이 공세를 시작했고 연합국의 전선 전체가 붕괴 위기에 몰린 것 같았다. 12월의 이 공세는 히틀러의 전략적 영감이 마지막으로 한번 발휘된 것이었다. 신체적으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는 오로지 약의 복용량을 늘려감으로써 버텼다. 남아 있는 전부는 굴하지 않는 의지뿐이었다. 침울한 상태로 그를 대면하러 들어갔던 사람들이 사기가 높아져서 나왔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천재성으로 물질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대담한 수완가였다.

 장성들이 공세를 취하는 것은 독일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히틀러에게 말했다. 히틀러는 "방어태세로 싸우면 오로지 결정을 늦출 수 있을 뿐이고 전체적인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소."

415p

"폭탄은 단지 사용되어야만 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했다면 우리가 그 엄청난 비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일어나게 될 대중의 비난을 생각해 보라. 폭탄이 완성되어 투하되었을 때 관련된 모든 사람은 정말로 크게 안도했다."

 아무도 핵폭발에 따른 방사능 낙진에 대해 숙고해보지 못했다. 핵폭탄은 "그냥 또 다른 종류의 폭탄"이었다. 미국인들은 그들만의 만족감을 느끼며 일본에 대해 핵폭탄을 사용했다. 그들은 이탈리아나 독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격렬한 도덕적 분개나 보복의 열망이 없었다. 그러나 진주만의 굴욕을 뒤에 두고 있는 그들은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가차 없이 받아내기로 결심했다.

430p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즉시 전 세계적인 평화가 시작되지 않은 데 대해 낙담해왔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평화는 전쟁의 목적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의 압제로부터, 그리고 좀 더 작은 부분이지만 일본의 압제로부터 민족들을 해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아무리 큰 희생을 치렀다 할지라도 성공을 거두었다. 누구라도 현재의 상황을 생각할 때 어느 곳에 있는 사람들이건 나치 독일과 일본이 승리했을 때보다는 더 행복하고 더 자유롭게 더 풍요롭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이 수반한 모든 학살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훌륭한 전쟁이었다.

469p

히틀러는 대규모 전쟁을 계획했다기보다는 무력사용의 위협과 소규모 전쟁을 이용해 독일이 힘과 지위를 키워나가려 했고 주로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기회를 포착해 이를 시행했다.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 주데텐 합병, 폴란드 침공에 이르는 길까지 전쟁전의 대외적 행동에 관해 서술한 이전 책에 이어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및 서유럽 정복이 장기적인 계획에 따른 행동이라기보다는 신속한 공격과 승리로 힘과 지위를 강화한 행동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러시아 침공에 대해서는 히틀러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러시아 정복이라는 장기적인 계획의 실현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국이 러시아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해 타협하러 나오게 만든다는, 상황에 따른 대응일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일본과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일본인들은 영국과 미국 혹은 심지어 중국과도 전쟁하기를 원치 않았다.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나 그리스보다 강한 어느 국가와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추축국 국가들은 그들에게 달갑지 않은 세계대전이 다가올 때까지 일련의 즉흥적인 소규모 전쟁을 하며 조심스러게 앞으로 나아갔다"라며 같은 해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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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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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줄 때 별 4개인 경우 많지 않은데, 이 책은 역자가 후기에서 밝힌 바대로 중앙아시아사 개론서로 손색이 없다.

중앙아시아는 정주국가와는 달리 유목민들이 명멸해 간 곳이라 너무 복잡하고 현재의 국가가 과거 민족들과 1:1로 매칭되지도 않아 항상 헷갈리고 실체가 모호한 느낌이었는데 이 책은 정말 쉽고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역자의 찬사처럼 중앙아시아사의 최고 권위자가 쓴 책이라 그런지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아주 쉽게 잘 쓰여 있다.

그러고 보면 잘 쓴 책이 반드시 어려운 책은 아닌 모양이다.

옥스퍼드 세계사 중 중앙아시아 편으로 나온 책이라 지엽적인 세부사항 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잡을 수 있게 쓰여진 듯하다.

300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어찌 보면 짧은 분량인데도 빙하기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쫓아 중앙아시아 초원에 처음 등장한 4만 년 전부터 5개의 독립국가가 된 20세기까지의 긴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핵심 키워드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라는 생각이 든다.

투르크란 어떤 민족인가 늘 헷갈렸는데 투르크어를 쓰고 이슬람을 믿는 이들의 다양한 복합체 같다.

몽골 제국의 출현 이후로는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것이 중요한 정체성이 된 듯하다.

정작 몽골은 불교를 받아들여 중국과 구별되는 민족의 정체성으로 삼은 점도 인상적이다.

이슬람교가 한번에 초원을 점령했다고 생각했는데 가톨릭의 전파처럼 이 종교도 오랜 투쟁과 선교의 역사 끝에 민간까지 내려갔음을 확인했다.

초원의 유목민들에게 선교한 중요한 이들이 바로 수피들이다.

샤머니즘적 신비주의와 결합해 중동 국가들과는 또다른 이슬람 문화를 만든 듯하다.

기마의 시대에서 화약의 세기로 바뀐 18세기부터 중앙아시아의 유목국가들은 거대한 제국 러시아와 청에 둘러싸여 결국은 몰락하고 만다.

마치 미국의 서부 개척을 보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각 민족으로 재정립되어 국가를 이룬 것은 특기할 만하다.

세계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앙아시아사에 대해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고 역자의 매끄러운 번역도 가독성을 높여 준다.

제목만 좀더 임팩트 있게 지었으면 더 접근하기 쉬울텐데 아쉽다.


<오류>

98p

황후 양귀비의연인이라고도 알려졌던 안녹산은

-> 황후가 아니라 후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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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 코드로 읽는 유럽 도시 - 돌·물·피·돈·불·발·꿈으로 풀어낸 독특한 시선의 인문 기행, 2021 세종도서 교양부문
윤혜준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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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내용이 아니라 많이 아쉽다.

제목만 보고 유럽 도시에 관한 고찰인 줄 알았다.

정보를 많이 주는 학구적인 책인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 유럽 도시 이야기다.

여러 도시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깊이 면에서 좀 떨어진다고 할까?

주경철 교수의 "도시 여행자를 위한 파리 역사"와 너무 비교된다.

돌, 물, 불, 피 등 7개의 테마로 나눈 것까지는 신선한데 안의 내용들이 단순 병렬식이라 유기적으로 연결이 안 된다.

좋은 책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느껴진다.



<인상깊은 구절>

163p

이래저래 돈 쓸 데가 많은 귀족들은 상인들과 합작해서 무역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축적한 재산으로 공동체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소수의 귀족 가문들은 베네치아의 집단 통치계급으로서의 정통성을 지켜냈다.

 이러한 베네치아 귀족 가문들에 허용된 사치가 하나 있었다. 화려한 저택 건축. 이들이 습지의 물을 빼서 터를 잡고 집을 짓는 것은 베네치아의 땅이 늘어는 것이기에 공화국 정부는 귀족들의 부동산 개발을 적극 장려했다.


<오류>

45p

서멋싯 공 에드워드 시모어는 헨리의 (일곱 부인 중)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의 오빠로

-> 헨리 7세의 부인은 일곱이 아니라 총 여섯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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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의 역사 - 세상을 움직이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
임용한.김인호.노혜경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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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양 역사서의 표본이 되는 책 같다.

너무너무 재밌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궁금한 것은 단순한 사료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저자의 역사적 평가와 해석일 것이다.

대중 역사서는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흥미 위주로 쓰여지거나 아니면 어제 읽은 <자금성의 노을>처럼 지루하게 사료만 나열하는 두 경우가 제일 많은 듯하다.

임용한씨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역사가로서 저자의 해석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료들을 종합해 당시 사회 현상과 비교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짚어준다.

평범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정말 재밌다.

책 표지도 좀 바꾸고 제목도 좀더 임팩트 있게 지었다면 훨씬 더 많이 알려졌을텐데 너무 아쉽다.

제목만 보고 단순히 뇌물받은 사례들을 연대기순으로 나열하나 했는데 역시 저자가 이름값을 하는 느낌이다.

국가가 존재한 이래 뇌물이 왜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현대 사회가 전근대 보다 투명해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심성이 착해지거나 도덕적으로 진보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관리 시스템이 발달해 사적 거래를 공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의 발전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아전들이 양민을 착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가에서 따로 월급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금을 내는 양민들에게 수수료를 징수하여야 생계가 가능한 구조였는데 문제는 이 시스템이 공정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관이 사회를 장악했던 조선시대에 자의적인 수탈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가는 제도적으로 수수료를 책정하여 아전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을까?

저자는 전근대 사회에서 이런 제도적 시스템을 도입하기에는 생산력이 너무 낮고 관리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시대적 한계였던 셈이다.

국가가 중농주의를 추구하고 상인들을 억압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시대는 수요만 있다면 공급이 거의 무한정에 가까울 정도로 생산력이 받쳐 주는 반면, 전근대 사회는 공급이 경직되어 상인들이 너도나도 물건을 사들이면서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버린다.

기술발전이 거의 불가능했던 전근대 사회의 생산력 한계 때문에 국가에서는 생산을 장려하고 상인들을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상업을 통제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상인들은 관에 뇌물을 바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뇌물이나 부정부패가 많을 것 같지만 그 규모가 크다 뿐이지 오히져 전근대 사회가 일상의 뇌물이 만연했다는 느낌이 든다.

구조적으로 시장이 아닌 사적인 선물경제를 통해 물자를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탐욕을 공평하게 조정한다는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창의력을 억압하여 생산력 증대에 실패했고, 무엇보다 사회를 장악해서 똑같이 분배하는 더 큰 세력, 즉 공산당의 부정부패 때문이라는 분석이 흥미롭다.

왜 모두가 평등하다는 공산국가에서 반드시 독재자가 출현하고 인민들이 굶주릴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이런 좋은 역사서가 많이 발간되서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너무 재밌다!


<인상깊은 구절>

97p

 이 시대의 귀족이란 기본적으로 높은 관직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거나 사람들에게 '귀족다움'을 보여야 했다. 관직 외에 귀족다움을 과시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교양, 즉 문학이었다. 글과 학문에 뛰어난 재능은 사회적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더구나 문학은 군벌이 권력가의 행세를 하는 시대에는 그들과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기회일 수 있었다. 도연명이 사회적 존재감을 높일 수단은 이제 문학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명작을 지었다. 벼슬길에서 은거로 방향을 튼 후의 감회를 쓴 <귀거래사>였다.


"바라건대 세속적인 교제를 그만두련다

세상과 나는 서로 맞지를 않아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하랴

친척들과 정 넘치는 이야기에 기쁘고

거문고와 책을 즐겨 걱정을 달랜다

부귀도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고

천국도 기대할 수 없으니

좋은 시간이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를 세워두고 김을 맨다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타고 목숨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다시 의심하랴"

 

 이 시는 이후 중국과 조선에서 현실에 지친 모든 선비들을 위로했다. 그의 이르믄 한자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정신적 영향을 미쳤으며 시를 짓는데 영감을 주엇다.


<오류>

57p

제안대군(예종의 아들, 갓난아기일 때 예종이 사망하는 바람에 왕위가 삼촌인 성종에게 넘어갔다)

-> 성종은 제안대군의 삼촌이 아니라 사촌형제이다.

125p

그러나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 산욕열로 사망한 딸은 공혜왕후가 아니라 언니인 예종비 장순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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