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무덤을 훔치다 - 중국 도굴의 역사
웨난.상청융.쉬즈룽 지음, 정광훈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부제가 주제를 말해 준다. 

"중국 도굴의 역사"

고고학자가 아닌 기자 출신의 저술이라 그런지 전문성이 떨어지고 야사 위주의 흥미를 끄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섞여 있어 책의 신뢰도를 약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능묘를 조성하는 과정과 그것을 훔치는 사람들의 세태에 관해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고대 이집트부터 시작해 부장품이 풍부한 전제군주의 묘를 도굴하는 역사는 전세계 곳곳에서 태고적부터 있어 왔던 모양이다.

이집트 시대에도 고왕국의 왕묘를 파헤쳐 심지어 관짝을 자기 관으로 재활용하기까지 했었다는데,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범죄자들만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군주들이 나서서 역대 황제들의 능에 사용한 목재와 보화들을 뜯어가 재활용했다.

오히려 일개 잡범들의 도굴은 기껏해야 10명 내외가 밤에 몰래 행해지는 비밀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 폐해가 크지 않은 반면, 관에서 주도해 적극적으로 도굴을 시행한 경우 피해가 심각했다.

그래도 고대는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완벽한 도굴이 어려웠으나, 현대로 오면서 아예 폭약을 설치해 능의 입구를 파괴시켜 버리고 싹슬이 해 가는 바람에 그 피해가 매우 커졌다고 한다.

특히 청나라가 망한 후 군벌들이 난립하던 민국 시대에는 아예 지방 군대가 나서서 도굴을 자행했다.

마지막 장에서 서태후와 건륭제의 능을 군대가 참혹하게 파괴하고 부장품을 도굴해 간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서태후가 죽은지 몇 십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민간인도 아닌 정식 군대가 이렇게도 끔찍한 도굴을 대놓고 시행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그들의 변명은 어차피 비적의 손에 털릴 거라면 차라리 자기들이 접수하는 게 낫고, 만주족에 대한 복수를 한답시고 어설픈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서태후의 입에 들어있는 여명주라는 보석을 꺼내기 위해 시신을 난도질 했다니 참혹하기 그지없다.

하긴 살아있는 사람도 쉽게 죽여 버리는 시대였으니 시신이 대수이겠는가.


억울한 도굴꾼의 누명을 쓴 유명인으로는 항우를 들 수 있겠다.

항우는 진의 수도인 함양으로 진격하여 진시황의 아방궁을 불태우고 수많은 보물을 약탈하기는 했으나 능은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진시황릉이 거대한 산처럼 워낙 크고 입구가 잘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묘도를 찾기도 어려웠다.

굳이 황릉을 도굴하지 않아도 훔쳐갈 것이 널려 있었던 셈이다.

항우의 군대가 전해 내려오는 것처럼 황릉을 도굴했다면 오늘날 진시황릉을 새삼 발굴하고 말 것도 없을 것이다.

후장을 하게 되면 이렇게 도굴을 피할 수 없으므로 조조처럼 현실적이고 영리한 사람은 절대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지 말라고 당부했다.

72개의 가짜 무덤, 즉 의총을 만들어 도굴을 피했다고 하는데, 어떤 책에서는 조조의 의총이라고 알려진 무덤들이 사실은 북조 시대 왕족들의 고분군이라고도 설명하니 이것도 그냥 전해 내려오는 설화일 뿐인 듯하다.

최근 중국에서 조조 무덤을 발굴했다는 기사를 봤었는데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는 후장은 묘주가 내세에 가서도 편안하게 살기를 기대해서일테니, 죽어서도 삶이 이어진다는 영혼불멸사상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고대에는 모시는 사람을 직접 능에 파묻어 버리는 순장까지 행해졌고 후대로 갈수록 내세에 대한 관념도 진화하여 사람 대신 도용으로 바뀌고 불교가 성행하면서는 박장을 하게 된다.

여전히 현대인들도 내세가 있다고 신을 갈구하지만, 더이상 무덤 안에 부장품을 넣지 않고 능묘도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의 정신세계도 더 고차원적으로 진화하는 것 같다.

파라오의 미이라를 비롯해 중국 여러 황제의 관에는 도굴꾼에게 겁을 주기 위한 온갖 저주의 말들이 쓰여 있으나 묻히고 나면 몇 십 년만 지나도 도굴이 자행되었으니 역시 죽은 사람은 힘이 없나 보다.

어떻게 생각하면 백성들의 피땀어린 노고가 단지 죽은 이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쏟아부어졌으니, 죽은 후 약탈당한다 해도 묘주로서는 억울해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편안한 영면을 위해서였다면 소박하게 장례를 치뤘어야 할 것이다.

즉위하면서부터 능을 짓기 시작해 전체 재정의 1/3을 쏟아 붓는 한나라 황제들의 후장 관습이 오히려 죽은 후 참혹한 약탈을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건륭제의 능을 파헤친 1920년대의 도굴꾼들은 금은보화 대신 쓰잘데기 없는 고서들만 가득해 불평했다고 한다.

문화적 식견이 높았던 황제가 60년의 재위 기간 동안 정성스럽게 모은 귀중본들이었는데 역시 문화는 감식안이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다.


<인상깊은 구절>

33p

삶에 대한 미련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류는 영혼불멸의 아름다운 신화를 만들었으며, 이 아름다운 신화를 들으며 죽음을 삶처럼 여겨왔다. 그래서 무덤에리난 최종 안식처를 찾은 사람들은 그것을 '새 집'으로 여기고 새롭게 꾸몄다. 후장 풍습이 갈수록 성행한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다.

99P

불로장생과 우화등선에 대한 조조의 관심은 상당했다.

 그는 "불사의 약을 구해 만 년을 기약"하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짧기만 하여 노자나 적송자, 왕자교 같은 전설 속 선인도 결국 신선이 되지 못했으니, 선인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조 자신은 어떻겠는가! 조조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짧은 인생을 비관하며 멋대로 마시고 노는 방종의 삶을 택하지 않았다. "가는 세월에 슬퍼하지 않고,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음을 근심하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리라는 우국우민의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다.

 한편 조조는 "뭣 하러 우울해하며 근심하는가! 마음 가는 대로 웃고 즐겨야지"와 같은 달관된 인생 태도를 가지려 애썼다. 이런 태도야말로 불로장생의 핵심 요건이기 때문이다.

107P

조조의 의심 많은 성격은 소설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료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조조의 고향 사람 중에 항소라는 자가 있었다. 조조와는 예전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사람이다. 조조가 뜻을 이루자 항소는 뜰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죄를 청한다. 조조는 그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무릎을 꿇으면 죽을 죄가 없어지나?"

 결국 항소는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다.

138P

천성이 사치스럽고 음란한 수 양제는 부황 수 문제를 대충 '박장'하고 천자의 보좌에 오른다. 양광은 등극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낙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거대한 공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사후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수나라 역사서에 그의 능묘에 관한 기록은 한 줄도 없다. 아버지 양견은 봉분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 진한의 능침 제도를 회복했지만 양제는 여기에 관심이 없었다. 제위에 오른 그는 자신의 무덤을 세울 땅도 찾지 않았다. 그보다 양견은 상상조차 힘든 현실의 조치를 과감히 실행하길 즐겼다.

 604년 11월, 양제는 친히 낙양으로 행차하여 세 강 유역을 전면적으로 살핀 다음 도성의 방어를 위해 수 십만의 인력을 동원하여 낙양까지 이어지는 '호성하'를 파기 시작한다.

214P

역대의 황제들은 미신을 신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자기가 황제의 보좌에 오른 것을 '천인감응'의 필연적인 산물로 보고, 풍수가 좋은 땅을 찾아 부황을 모시는 것도 '君權神授'의 결과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천추만대에 이어질 홍복을 기대하며 '만세토록 상서로운' 명당을 찾으러 애썼다.

268p

관 밖에는 티베트 글자를 비롯한 옛 문자와 주문 부호를 금으로 가득 그려 넣었다. 이는 청대 황릉의 관곽에 보이는 일종의 독특한 종교 양식으로 사자의 영혼이 부처와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부처와 신도 총을 둘러메고 도끼질을 해대는 군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386p

문물은 실존하는 인류 역사의 산물이다. 문물을 통해 우리는 인류 사회의 끊임없는 생존, 번영, 투쟁, 발전의 역사와 선구적인 사상, 도덕, 과학기술, 문화 수준 등을 엿볼 수 있다. 문물의 가치와 역할이 영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의 한 단락이나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모습을 반영하는 문물의 가치는 역사에 대한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문물은 모든 민족, 모든 인류가 보호하고 연구하고 함께 누려야 할 역사의 보물인 것이다.

(문화재는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각국의 문화유산을 우리 모두 지키고 연구하고 가꿔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일 것이다)


<오류>

16p

서한 초기 장사국의 승상인 대후 이창과 부인 신추, 아들 이희(李희)가 묘주임이 밝혀진다.

-> 아버지의 한자가 利蒼 이므로 아들의 성씨가 잘못 표기됐다.

152p

장손황후는 이부상서 장손무기의 딸이다.

-> 장손무기는 장손황후의 오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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