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 조선 르네상스를 연 두 군주의 빛과 그림자
노혜경 지음 / 뜨인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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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영조와 정조를 비교한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어 보니 그냥 제목만 단순 비교를 해 놓은 것이고 각 챕터들이 산발적으로 독립되어 있어 별 관계가 없어 아쉽다.

어떤 싸이트에 정기 연재를 했던 글인 모양이다.

전부터 관심있게 보던 저자라 재밌게 읽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연재물로 기고한 글이라 한 권의 책으로서는 밀도가 떨어지는 듯하다.

또 무리하게 현대 기업의 리더십과 연결짓는 것도 약간 어색했다.

그럼에도 영조와 정조라는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적 군주를 무조건 찬양하지 않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고 분석한 점은 매우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영조는 아버지 숙종을 닮아 다혈질에 성격도 급하고 사람을 들들 볶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고 아들인 사도세자도 광증으로 내시들에게 칼을 휘두를 정도였으며, 그 손자인 정조도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자부심에 넘치는 매우 독선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성격인 듯하다.

어쩐지 이 삼부자는 다 비슷한 성격을 가진 듯하다.

권력욕 강하고 드센 성격은 장희빈을 어머니로 둔 경종이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영조가 아버지를 닮아 매우 다혈질이고 급했던 듯하다.

다만 영조와 정조는 자신을 잘 조절하고 정치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뛰어나 치세를 안정시킨 반면, 중간에 낀 사도세자는 결국 비운에 가고 만다.

인간의 불완전함이야 당연한 전제인 걸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은 결과로 말해주는 것 같다.

영조가 늘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우는 청계천 준설이 뭐 그리 대단한가 싶었는데 이 결정이 얼마나 큰 결단이고 힘든 과정이었느지 상세히 나와 이해가 된다.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도 없던 시절 사람의 손으로 강바닥의 토사물을 퍼 내야 했으니 궁궐 건설 못지 않은 대역사였을 것이다.

궁궐은 왕만 좋았겠지만 청계천 준설은 한양 시민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으니 과연 영조가 업적으로 자찬할 만하다.

이런 영조도 형 독살설이라는 음모론에 시달렸으니 자신의 출신 컴플렉스와 함께 인간적으로는 참 힘들었을 듯하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보통의 군주라면 노론과 손을 잡고 소론 세력을 싹쓸이 했을텐데 영조는 뜻밖에도 박문수 등의 소론을 내세워 이들을 진압한 후 탕평책이라는 협치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탕평책은 궁극적인 협치라기 보다는 할당제에 불과했다는 게 저자의 냉정한 평가다.

노소론으로 갈라진 조선의 정치 세계는 마치 오늘날의 진영 논리를 보는 것처럼 본질은 사라지고 상대에 대한 극렬한 미움만 남아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단지 역사책에서만 보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끔찍한 괴물 같은 느낌이다.

저자는 사치를 단속하는 영조의 절약정책을 에둘러 비판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모든 정책은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어쩐지 오늘날 정치판에도 적용해도 될 말 같다.

못 갖게 하면 더욱 갖고 싶은 것, 수량을 제한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자산의 가치는 더욱 올라갈 수 밖에 없는 것.

비단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해도 소유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욕망을 법으로 억제할 수 있을까?

같은 실패가 지속되는 걸 보면 딱히 역사에서 뭘 배우지도 못하는 것 같다.


<오류>

64p

태자를 자결하게 만든 한무제의 충신, 안금장이나 차천추 같은 신하가 곁에 있어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말렸더라면

-> 안금장은 당 예종이 태자로 있을 때 측천무후 앞에서 태자의 무고함을 주장한 사람이고, 차천추는 한무제 때 여태자의 무고함을 알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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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중국사 - 한 상 가득 펼쳐진 오천 년 미식의 역사
장징 지음, 장은주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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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신청한 책인데 계속 미루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중국에서 다양한 책이 번역되어 읽을거리가 많아져 참 좋다.

역시 중국 출신의 저자가 써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중국 관련 책보다 훨씬 상세하고 흥미롭다.

다만 언급된 요리들을 거의 알지 못해 직관적으로 확 와 닿지는 않는다.

항상 역사서를 읽을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당시 시대 배경과 한계인 듯하다.

이를테면 고대 중국에서는 조기 같은 바다 고기는 거의 먹지 못하고 잉어나 붕어 같은 민물고기를 먹었다.

내륙으로 생선을 저장해 운반할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요리들도 거의 대부분은 근대의 산물인 것 같다.

중국 역사서에는 생선구이가 자주 등장하지만 오늘날 현대 중국에서는 생선을 통구이로 먹지 않는다고 한다.

생선구이는 한국 식탁에도 자주 오르는 아주 대중적인 요리법인데 왜 안 먹게 됐는지 궁금하다.

중국 요리 변천사의 특징은 유목민의 다양한 음식들이 유입됐다는 점일 것이다.

후추 같은 향신료도 그렇고 양고기를 잘라 양의 위에 넣은 후 진흙을 발라 냄비 없이 직접 굽는 요리들이 그렇다.

재밌는 것은 고대 중국인들은 무려 신석기 시대부터 개를 식용으로 키웠는데 사냥견으로 개를 키우던 유목민들이 중원으로 진출한 뒤 이 습속이 사라졌다고 한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개고리를 먹는데 현대 중국은 생선구이처럼 아예 안 먹는 것인지 궁금하다.

신석기 시대부터 돼지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가축이 개였다니 놀랍다.

어쩌면 지금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유대인과 이슬람들이 돼지를 안 먹는 것처럼 그냥 문화적 관습에 불과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확실히 음식은 문화적 관습과 밀접한 영향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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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 조선인들의 북경 체험
손성욱 지음 / 푸른역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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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주제이고 내용도 아주 재밌다.

일전에 읽은 연행록 관련 책처럼 뻔한 조선 사신 루트 나열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무척 재밌다.

서문에 단국대 심재훈 교수가 글을 읽어 보고 출판을 의뢰해 줬다고 하는데 이해가 된다.

저자는 북경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중국 대학에서 강의한 독특한 이력이 있어서인지 중국측 관점까지 책에 잘 녹여 내어 입체적인 글이 된 듯하다.

보통 연행록이라고 하면 김재업, 홍대용, 박지원 이 세 분의 글을 언급하지만 저자는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대등한 근대 조약을 맺어 공사관을 파견한 후까지 기술해 더욱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조선 세자의 책봉 문제였다.

내치에는 간섭하지 않는 형식적인 조공 관계라고 생각해서 당연히 세자 주청을 올리면 바로 승인을 해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청나라에서는 숙종, 경종, 영조 때까지 책봉에 애를 먹였다.

청나라는 따로 황태자를 정하지 않는 풍습 때문이었을까?

국왕 부부가 50은 되어야 후계자를 세운다는 명의 법전을 들먹이며 어린 세자의 책봉을 거부하는 바람에 조선 사신들은 어떻게든 책봉 교서를 받아 오려고 애를 썼다.

인신무외교 원칙에 따라 신하는 감히 외교를 할 수 없다는 전통적인 관념 때문에 사신들이 실제로 외교전을 펼친 게 아니고 중국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힘을 써달라는 사적인 청탁이라 더 힘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건명은 경종 때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어렵사리 받아오지만 국경을 넘어오는 순간 붙잡혀 위리안치 되고 결국 사사당하기까지 했다.

오며가며 반년이나 길에서 시간을 보내고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약간은 비정상적인 왕세제 책봉이라는 결과물을 얻어 왔건만 의주에 들어서는 순간 붙잡혀 집에 가보지도 못하고 사형이라니.

이래서 책봉사는 다들 꺼렸다고 한다.

이런 속사정들이 아주 흥미롭게 기술되어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글은 마지막에 실린 주요섭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유명한 이 분은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는데 국제 달리기 대회에 나가 5000미터 중국 신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손기정 선수를 봐도 그렇고 의외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래 달리기에 능한 모양이다.


<오류>

169p

강희제의 첫째 아들인 승호가 일찍 죽은 까닭이었다.

-> 강희제의 큰 아들은 승서이고 승호는 둘째 아들이다.

179p

왕비 심씨는 영조보다 두 살 많았다.

->영조의 왕비는 심씨가 아니라 서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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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만나다 - 탄생, 갈등, 성장의 역사 비아 만나다 시리즈
로널드 헨델 지음, 박영희 옮김 / 비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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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흥미로운데 내용은 다소 지루했다.

근본적으로 내가 성경을 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책에 나온 이들, 이른바 신무신론자들인 리처드 도킨스 등의 입장에 서서 비합리성을 비판하기 때문에 창세기가 서구 문명에 끼친 영향에 대한 내용들이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진즉에 기독교적 인격신에 대한 비실재성을 확신하는 내가 여전히 성경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가족을 구원하고픈 열망에 휩싸인 근본주의자인 엄마 때문이다.

이 책에도 미국에서 시작된 아주 현대적인 역사를 가진 근본주의자들이 등장한다.

성경에는 다양한 해석법이 있어 왔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중시하는 근본주의적 교리는 최근 100년 사이에 미국에서 형성됐다고 한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 가장 대척점에 있는 교파가 발전한 셈이다.

전통적으로 성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되어졌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현실주의적 관점, 두 번째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헬레니즘 문화가 퍼지면서 그리스어 번역이 이루어진 후의 플라톤적 해석.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데아, 혹은 완전무결한 이성의 세계와 불완전한 감각의 세계가 대립하는 이원론적 관점이 플라톤의 해석이다.

사실 나도 앍 모르게 이런 이원론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

육체는 불완전하고 인간의 정신이 추구하는 고결한 이상의 세계는 따로 있다고 믿어 왔다.

영혼의 존재는 뇌 작용에 불과하다는 과학적 입장을 받아 들인 후로는 우주의 생성 원리는 관측할 수 있는 혹은 예측할 수 있는 실험적 방법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가 되었고 적어도 기독교적 인격신은 확실히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 선조들도 이성이 있는 사람들이라 비록 과학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성경이 문자 그대로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받아들이게 됐고 자신들이 관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성경과 자연을 조화시키기 위해 상징적인 해석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예가 갈릴레오이다.

자연을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게 되면서 성경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꾀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오직 성경으로라는 해석법으로 바뀌면서 가톨릭의 자의적 해석은 막았지만, 근대 이후 과학이 발달하면서 어느 순간 더 이상은 함께 가기 어려운 상황이 와 버렸다.

지동설까지는 어찌어찌 조화롭게 받아들였으나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 버렸다고 한다.

태양 중심설까지는 이해를 해도 인간이 처음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위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이론은 도저히 성경와의 조화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극렬하게 진화론을 거부하는 모양이다.

상징주의 해석이 남아 있을 때는 그래도 현실과 성경의 조화가 가능한데 근본주의적, 문자 그대로의 성경 무오설로 가버리면 현대 사회에서 성경이 설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음을 피력한다.

심지어 저자는 문학적 상상력으로서의 창세기 해석까지 자세히 실어 확실히 성경을 경전으로 보지는 않는 듯하다.


<오류>

206p

2년 후 갈릴레오는 편지 내용을 확장해 자신의 후원자인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the Grand Duchess Christina)에게 보냈다.

-> 이 여인은 대공과 결혼한 대공 부인이 아니라 스웨덴의 여왕이었다가 퇴위한 후 여대공의 작위를 가진 독신 여성이므로 크리스티나 여대공이라 번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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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을 지배한 무기전 전세를 뒤바꾼 보급전 - 전투코끼리, 랜드리스 작전, 아쿼버스, 탄저균까지 무기와 보급으로 본 세계사
도현신 지음 / 시대의창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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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흥미로워 기대했던 책인데 아쉽게도 비전문가의 교양서 같은 책이었다.

그럭저럭 읽을 만한 수준은 되지만 역사서에 언급된 일화 나열이 많아 아쉽다.

편집북 느낌이랄까.

학자가 아닌 저자의 책 중 제일 괜찮았던 역사서는 신상목씨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를 들 수 있겠다.

역사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사서에 기록된 에피소드 나열이 아니라 그 사건이 주는 저자의 해석인데 일종의 편집북들은 기존 일화들만 쭉 서술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니 뒤에 나온 참조목록 역시 일반인들이 읽을 만한 똑같은 대중서가 대부분이라 정보와 관점을 많이 얻기 힘든 듯하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고 속도감 있게 전쟁을 무기와 보급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 좋은 시간이었다.

저자가 소설가라 그런지 문장이 간결하게 금방 잘 읽힌 점은 좋았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1) 기원전 13세기 무렵 지중해 세계를 강타한 해양민족, 이른바 sea people 의 정체를, 저자는 아리안족의 침입을 받고 그리스와 크레타 섬 등에서 바다로 쫓겨간 선주민들이라고 본다.

얼핏 들었던 얘기 같기도 하고 아직 실체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 같은데 저자의 말대로 이들이 히타이트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그들로부터 철제 무기를 입수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침입했는지 궁금하다.

저자는 이들이 바로 성경에 나온 블레셋인들이라고 한다.

철제 무기가 과연 이들에 의해 전파되었는지가 궁금하다.

또 철제 무기는 히타이트로부터 시작됐는지, 그렇다면 왜 히타이트는 해양 민족에게 멸망했는지, 정말 이들이 히타이트 제국를 정복하게 맞는지 좀더 알아봐여 할 것 같다.

2) 고대 사회 전쟁의 핵심적인 변화 중 하나가 바로 말의 등장이었다.

초기의 말은 너무 작아 사람을 태우지 못하여 수레를 끌고 말 두세 마리가 모여 전차를 끌고 전쟁에 나갔다.

그런데 이 전차는 돈도 너무 많이 들고 무거웠기 때문에 속도전이나 경제성 면에서 떨어져 말의 품종 개량을 통해 기병을 직접 태울 수 있게 바뀌자 점차 사라졌다.

사람을 태우는 말이 처음부터 가능했던 게 아닌 모양이다.

또 달리는 말에서 화살을 쏘는 궁사도 엄청난 훈련을 통해 가능했고 무장하는데도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에 기병은 점점 귀족화된다.

무장을 하지 못하는 보병은 일반인이, 비싼 무기를 스스로 갖추고 오랜 시간 훈련할 수 있는 기병은 귀족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들 역시 전차가 사라지듯 총의 등장으로 역사 속에 사자리게 된다.

3) 중남미를 정복한 에스파냐인들은 당시 이들의 무기가 흑요석 돌칼에 불과했기 때문에 강철 무기로 무장해 정복할 수 있었다.

보통 천연두 같은 전염병만 강조했는데 무기의 압도적인 차이도 중요했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왜 아메리카 대륙은 심지어 청동기 무기도 발전하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면 총균쇠에 나온 바대로 문명의 확산은 세로축보다는 초원을 통한 가로축 전파가 훨씬 쉬운 듯하다.

아즈텍의 멸망에는 이들에게 인간사냥을 당해 온 다른 부족들의 협조도 일조했다.

총의 발명은 시베리아 개척에도 큰 공헌을 세운다.

결국 총포의 발전 때문에 유목민들은 서양 제국의 위력 앞에서 무너져 버린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총을 보고 조선 군인들이 얼마나 기겁을 했을지 상상이 된다.

유럽인들은 한 번에 600발을 쏠 쑤 있는 맥심 기관총을 가지고 아프리카로 진출해 용감한 전사들을 굴복시킨다.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말라리아 약인 퀴닌의 발명도 중요했다고 한다.

4) 무기만큼 중요한 것이 보급이었다.

생산력이 적은 시대였고 수송도 어려워 갑자기 침입군이 나타나면 현지인이건 침략군이건 식량 조달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의 전략도 바로 이런 일본의 해상 보급선을 차단한데 있다.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를 침공했던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도 보급로가 차단되어 그리스 본토에 고립될까 두려워 결국 물러났고 그 유명한 수양제도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결국은 보급로 확보에 실패해 물러나고 만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히틀러에 맞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경제적 지원에 큰 공이 있었다고 하니 과연 전쟁은 곧 경제전이기도 한 듯하다.


<오류>

284p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너무 많은 돈을 탕진한 프랑스가 경제난과 더불어 1783년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자

->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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