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의 역사 - 인류 역사의 발자취를 찾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성춘택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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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페이건은 역시 글을 잘 쓰는 저술가다.

지루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고고학 발굴의 과정과 수많은 학자들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간다.

저자 자신이 고고학자이기 때문에 더욱 깊이있는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낼 수 있는 것 같다.

하워드 카터나 아서 에반스, 루이스 리키 같은 유명한 고고학자들 이야기는 익숙해서인지 쉽게 넘어갔는데 처음 듣는 학자들 챕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역시 비슷한 주제를 반복해서 많이 봐야, 즉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독서가 즐거워지는 것 같다.

다음에는 <고고학의 모든 것>에 도전해 봐야겠다.


고고학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은 것 같다.

유물을 발굴해서 소유하려는 행태, 거칠게 말하자면 도굴을 통해 부를 얻으려는 행위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발굴을 통해 인류사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고고학의 탄생은 겨우 19세기에나 가능했던 듯하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유럽 사회에서 이집트학 열풍이 불자 벨조니 등 초기 발굴자들은 요즘 수준으로 보자면 약탈에 가까운 파괴적 발굴을 시도한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발굴 역시 제국주의의 약탈 행위 이미지가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문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호기심이 고고학의 발달을 가져왔지 않나 싶다.

어쨌든 관심이 있어야 그 먼 곳까지 조사단을 파견하고 오랜 시간 동안 발굴에 매달리며 무엇보다 엄청난 돈이 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학이나 박물관에서 연구비를 지원하지만, 19세기만 해도 개인적인 후원을 받아 사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졌다.

오늘날과 같은 학구적인 의미의 발굴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 통해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하여튼 지나간 역사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한 것 같다.

초기 고고학자들은 하인리히 슐리만처럼 고대 유적에 대한 탐구심이 매우 강했고 지지치 않는 끈질김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도 뛰어난 직관력을 갖고 동물적으로 탐사했다.

당장 수많은 이집트 왕릉을 발굴한 벨조니만 해도 전직이 차력사였음에도 놀라운 직관력으로 혼자서 탐사대를 이끌었다.

아쉽게도 이들은 유물을 단순히 보물 취급해 팔거나 전시하는데 그친다.

유물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 더 나아가 인류 역사를 밝히는 것이 바로 고고학자의 몫인 것이다.

책에 소개된 여러 학자들을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또 지치지 않는 투지가 돋보인다.

역사책에 한 줄 이름이 남으려면 범인과는 다른 특별한 재능과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명문이다.

명문이 발견되면 고대 역사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 해독도 매우 중요한데 천재적인 언어 학자들이 이집트와 수메르, 크레타 문자들의 뜻을 밝혀냈다.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고대 문자들이 더이상 쓰이지 않아 이처럼 학자들의 해독을 기다린 반면, 오늘날까지 씌여지고 있는 한자는 매우 놀랍다.

중국 문명이 고대 문명으로부터 현대까지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13p

유물 분석 전문가가 되려면 특별한 인성도 필요하다. 유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특히 더 그러하다. 끝없는 인내와 흔히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세세한 특성을 물고 늘어지는 열정과 과거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작업이다. 몬텔리우스는 그런 성품을 갖추고 있었다. 훌륭한 언어학자로서 느긋하면서도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여러 강의에 나서면서 고고학을 대중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169p

페트리는 수많은 집을 발굴하면서 다양한 가내 유물을 수습했다. 이로써 당시 보통 사람들의 존재를 복원했다. 일반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잔혹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은 들에서 일해야 했을 뿐 아니라 적은 배급만 받고 공공사업에 동원되었다. 인골에는 고된 노동의 흔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힘들고 단조로운 삶이었다. 그러면서 나라와 지도자를 떠받쳤지만, 이 사람들의 의도와 취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거대한 기념물과 고분에 관심을 가졌던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과 달리 페트리는 고대 이집트 문명이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노동에 의지했던 복합사회였음을 알고 있었다.

189p

벨의 지성과 고고학적 학식은 전설적이었지만, 오늘날 이라크에서 그리 좋은 평판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많은 이라크 사람들은 벨이 외국 조사단에 너무 많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평가도 일리 있지만, 벨은 늘 순수한 국가적 목적보다 고고학과 학문적 관심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는 이라크에 섬세한 유물을 보존할 시설이 전혀 없었다.

293p

농경은 발명이라기보다 전환이었다. 먹을 수 있는 풀을 채집했던 사람들은 모두 식물이 싹을 틔우고 성장한 뒤 씨를 퍼뜨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채집할 야생초가 있었다면 왜 그런 노력을 했을까? 사람들은 자연의 수확이 줄어들 때 생존 전략으로서 야생초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성 식량을 채집하는 데서 농경으로 변화한 것은 인류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298p

건조한 조건이 지속되면서 식물성 식량은 더욱 희소해졌다.

 이로써 커다란 전환의 조건이 커가고 있었다. 이제 갈색으로 변한 개활 초원은 가뭄이 계속될수록 줄어들었다. 해마다 마을 사람들은 더 멀리까지 걸어가야 숲에서 견과류와 풀을 채집할 수 있었다. 수확량도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배고픔에 시달렸다. 봄이 되면 더욱 굶주렸다. 이미 인구는 증가했고, 기온 하강으로 땔감의 수요가 높아져 벌목도 더욱 빈번해졌다. 힐먼과 무어는 가뭄과 삼림 훼손으로 결국 사람들이 마을을 버렸다고 보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계속 가젤을 사냥했다. 그러자 가젤의 수가 줄어들어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염소와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불과 1000년 만에 가젤 사냥이 쇠락하면서 염소와 양이 더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가뭄이 지속되는 환경에서 안정된 식량 공급을 위해 곡물 재배에 나섰을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야생초를 그대로 심었다. 호밀에서 시작하여 밀과 보리 같은 씨앗 곡물의 수확을 늘리려 했을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전업 농민이 되어 밭농사와 가축 사육에 매달리게 되었다. 농사는 전적으로 강수량에 의존했다. 조심스럽게 다음 비가 오기 전까지 곡물이 시들지 않도록 시간을 조절하여 씨를 뿌렸다. 강수량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위험 부담이 아주 큰 농사였다.

 농경을 촉발시킨 것이 서기전 1만 년 즈음 지중해 동부 지역에 찾아온 1000년 동안의 가뭄(Younger Dryas)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 가뭄은 수렵채집민이 농경민으로 전환한 주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334p

중세시대에 맨손으로 싸워 생긴 상처는 참혹하다. 38구의 시신이 매장된 무덤에는 중세 시대 전쟁의 야만성에 대한 충격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희생자들은 눈폭풍이 몰아칠 때, 장미전쟁의 전투에서 혈투 끝에 죽었다. 활동적이면서 건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소작농에게 예상할 수 있듯이 시신에는 어린 시절부터 고된 노동에 시달린 흔적 있었다.

 대부분의 시신에 머리에 야만적인 가격을 받아 숨진 흔적이 있었다. 근접전에서 적어도 여덟 번에 걸쳐 칼로 베인 뒤 머리에 가격을 받고 죽은 경우도 있었다. 쇠뇌와 화살, 전투용 망치도 잔혹한 상처를 남기며, 대부분 치명적이었다. 사람들은 피바다 속에서 죽어갔다. 당시의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았을 테지만, 비타민 부족으로 생기는 괴혈병과 구루병이 가장 흔했다

 외치를 제외하고 가장 철저하게 연구된 시신은 역사에서 잘 알려진 인물, 람세스 2세이다. 람세스는 아주 오래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20대와 30대까지밖에 살지 못하던 시절 아흔 두 살에 죽음을 맞았다.

 람세스는 파라오로서 호의호식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평민들은 끊임없이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서기전 14세기 파라오 아케나텐의 수도였던 엘아마르나의 공동묘지에서 일꾼들의 무덤에 대해 최근 연구가 이루어졌다. 거의 모두가 20대에서 30대에 죽은 사람들이었다. 뼈에는 숨길 수 없는 영양실조의 증거가 남아 있었다. 수년 동안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한 탓에 척추가 무너지고,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만성 관절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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